소설리스트

Episode 15. 다리 없는 말(4권) (17/24)

[안경] [ㅇㅇ]

공금, 요게X

조연의 반격은 없다 4권

Episode 15. 다리 없는 말

별채 밖에는 호위 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쫓아오면 분명 속옷만 입고 나돌아 다닐 거라고 경고했을 텐데.

‘뭐, 볼일이 잘 끝났으니 모르는 척해 줄까.’

한차례 내 모습을 훑은 기사가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기사의 시선이 고정된 팔을 들어 올렸다. 아즈마리아에게서 묻은 피로 영 보기가 흉했다. 나는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괜찮아, 내 피 아니니까.”

방으로 돌아간 즉시 물수건으로 피를 닦아냈다.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무리한 탓인지 전신이 두들겨 맞은 듯 아려왔다.

‘크로허츠, 윌, 잭, 헨서웨이.’

누구를 본보기로 할까? 크로허츠 후작은 가문 내 문제로 올해 황제 탄신일에 참석하지 못했다. 후작이 죽고 장남이 가문을 이었으나 집안 문제가 끊이지 않는 듯했다. 모리타트 잭은 앞으로도 충분히 상부상조할 수 있는 관계이니 넘어가고. 남은 건 마가렛 헨서웨이의 친부인 헨서웨이 백작과 윌 백작인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쉬웠다.

“경.”

내 부름에 멀찍이 서 있던 기사가 대답했다.

“예.”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을 예의 주시해 줘. 그가 황성을 떠난다는 소식이 들린다면 나를 바로 깨우도록 해.”

의아한 얼굴을 하는 것도 잠시, 기사는 곧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습니다.”

몸 좋고 말 없는 시종이 생긴 기분이네. 나는 나머지 핏물도 닦아 내고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 상태라면 한 번도 깨어나지 않고 아주 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눈을 뜬 건 다음날 이른 오전이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나는 거의 한나절을 잠들어 있었다. 눈을 감았을 때만큼 밝은 하늘이 그 증거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한층 가벼워진 몸을 움직이고 있을 때는, 하룻밤 사이 바뀐 호위기사가 기이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움직이고 있는 시체를 마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기척도 없이 주무시기에 중간에 몇 번을 확인했습니다.”

죽은 줄 알고 계속 건드려 봤다는 의미였다. 나는 대충 고개를 주억였다.

“잘했어.”

과거도 보지 않고, 이토록 오랜 시간을 완벽하게 잠든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기분 좋은 날에는 중요한 일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망설임 없이 욕실로 들어가려다가 급히 고개를 틀어 기사에게 물었다.

“리히튼 공작은? 황성을 떠났나?”

설마 어제의 그 기사가 내가 부탁했던 사안을 깜빡하지는 않았겠지.

“아니요. 리히튼 각하께서는 아직 황성에 계십니다.”

기대한 만큼 들을 수 없을 거라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리히튼이 잉고르드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아직 이곳에 있다.

‘됐어. 그거면 충분해.’

단순히 그의 존재를 확인한 것에 불과한데,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놓였다. 나의 바람이 통했는지, 단순하게 마음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게는 그저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날 늦은 오후. 나는 빌힐름의 방을 방문했다. 그의 즉위가 결정된 뒤로는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시종은 나의 방문을 제지했다.

“전하께서는 지금 손님분들과 회의 중이십니다.”

“그래서?”

내 반문에 시종이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 말씀을 남겨드리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와 주시면….”

“필요 없어.”

나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당연한 예의는 빌힐름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빌힐름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자보다, 진심을 다해 충성을 바친 충직한 신하보다, 등 뒤에 칼을 숨기고 배를 뒤집은 척 빈틈을 노리는 간자를 더 사랑했다. 시건방진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시간을 투자하고 관심을 내보였다. 집착하고 곁에 두려 했다. 내게 그러하듯이.

“빌힐름!”

대강 훑어도 열에 다다르는 숫자였다. 그중에는 익숙한 낯도 보였다. 모리타트 공작, 윌 백작, 그리고 황성을 지나치며 보아 온 얼굴들. 공통점은 모두가 빌힐름의 사람이란 점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인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나의 방문을 맞이해 주는 이가 있었다.

“표정이 좋아 보이는군, 누이. 몸은 괜찮은 건가?”

“아니, 전혀. 하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

빌힐름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싫어서 투신한 여자에게 보일 법한 반응은 아니었다. 나는 그 웃음보다 배는 더 밝은 웃음을 지으며 빌힐름에게 다가갔다.

“책을 읽다가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라서 찾아 왔어.”

“궁금하니 말해 봐.”

그는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되레 팔을 뻗어 나를 당기고는 테이블 위로 앉혔다. 가까이서 확인한 귀족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떨떠름했다. 누군가는 대놓고 나를 노려보며 불편한 티를 냈다.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도 나를 나무라지는 못했다. 노련한 늙은 귀족조차 빌힐름 앞에서는 찍소리 내지 않았다.

“황성의 분위기도 어둡고 하니, 빌힐름을 여기까지 있게 한 귀족들을 위해 작은 유희를 즐길 자리를 마련하고 싶어서. 어떻게 생각해?”

나는 오랜 기억을 헤집어, 그때 그 빌힐름 앞에서만 내보였던 수줍은 미소를 그려냈다. 속이 텅 비어 토할 것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빌힐름의 표정은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야.”

“전하.”

그의 긍정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던 귀족들이 하나둘 나서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타계하신 지 아직 일주일도 흐르지 않았습니다.”

“당분간은 황실의 명예를 위해 예의를 갖춤이 옳습니다.”

발전이 없네. 수년을 함께했으면서 아직도 빌힐름의 비위를 맞출 줄 모르는 건가.

“그럼 일주일이 지나고 하면 되지. 안 그래요?”

소모적인 말싸움은 포기하고 대충 동의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황실 예법에 죽고 황실 예법에 사는 늙은 귀족들은 물러설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아그레인 양. 이는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타계하신 선황 폐하뿐만 아니라 빌힐름 전하의 명예에도 흠집이 생길 수 있습니다.”

빌힐름은 자신의 명예에 관심 없대도. 이것 봐, 당사자는 계속해 보라는 얼굴로 웃고만 있잖아? 나는 그를 대신해서 따분해 죽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누가 감히 겁도 없이 빌힐름의 흉을 본단 말이에요? 비비안느 황녀? 아니면 리히튼 공작을 말하는 건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손을 내저었다.

“재미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내 이야기나 마저 들어요. 내가 제안할 게임은 말 경주예요.”

물론 설명은 귀족들이 아닌 온전히 빌힐름만 바라보며 이었다. 다른 이는 모르겠지만, 그가 내 제안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건 자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방긋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다.

“나비 경주랑 똑같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말의 네 다리를 잘라서, 어느 말이 가장 먼저 완주를 하느냐로 승자를 정하는 게임이지. 다른 점은 선수가 말 위에 올라야 한다는 것.”

물론 실제 말의 다리를 잘라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끔찍한 경주를 즐기느니 한 번 더 2층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는 게 나았다. 그럼에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이 잔인한 놀음이 빌힐름의 취향에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사위는 다시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때, 빌힐름? 우리, 이 경주로 사냥 대회를 대체하는 거야. 선황께서 그리하셨듯 승자에게 소원이라는 우승 상품을 하사하는 거지.”

잠시 고개를 돌려 테이블을 둘러싸고 사이좋게 모여 있는 귀족들을 확인했다. 하나같이 제국의 반동분자를 대하는 시선이었다. 누군가는 나를 쳐다보기도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다리가 없는 말을 상상한 듯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 대고 외치고 싶었다. 나비와 말이 다를 건 또 뭔데?

“아주… 훌륭한 생각이야, 누이.”

빌힐름이 팔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우는 개에게나 할 법한 칭찬이었다.

“근래 들었던 말 중 가장 덜 지루하고, 가장 덜 무료해. 그래서 누이가 바라는 선수는?”

나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당연히 박수 받아 마땅한 우리의 영웅들이지! 잭 공작과 윌 백작, 그리고 헨서웨이 백작이면 충분하겠어. 크로허츠 후작이 자리에 없어서 아쉽네.”

이름을 읊기 무섭게 당사자들 사이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안 됩니다. 격식에 맞지 않습니다.”

“이 늙은이들을 우롱하실 생각입니까?”

특히 윌 백작은 내게 유감이 많은 얼굴이었다. 잉고르드에서 하녀 노릇이나 하던 여자가 상관인 양 구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입을 닫고 있는 귀족에게 물었다.

“다들 부정적인 반응인데… 모리타트 각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모두의 시선이 모리타트에게로 향했다. 아즈마리아가 어찌 되었는지는 그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했다. 모리타트의 안색은 그를 안 이래로 가장 좋아 보였다. 마치 풍족한 식사를 마친 사냥개처럼. 모리타트가 대답했다. 유일하게 웃음을 잃지 않은 얼굴이었다.

“격식에 어긋난 게 대수겠습니까? 아그레인 양이 원한다면 다리 없는 말 위에 오르는 것 정도야. 아주 손쉽지요.”

“각하.”

누군가 그를 불렀지만, 모리타트는 듣는 척도 않고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얼굴들, 앞으로 빌힐름 전하의 재위 기간 동안 계속 볼 얼굴들 아닙니까? 또한 아그레인 캐롤드 양은 그렌페르크 제국의 황후가 되실 분이시죠. 다리 없는 말에 올라 서로의 신뢰를 확인할 수 있다면 전 더없이 즐거울 겁니다.”

고작 그런 걸로 신뢰를 확인할 수 있는 거야? 참지 못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입을 가리고 웃자 모리타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따라 말이 많아, 모리타트.”

모리타트는 빌힐름의 한 마디를 가볍게 받아쳤다.

“이 모든 게 빌힐름 전하를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전하의 즐거움을 위해서 말이지요.”

장담하건대, 빌힐름이 성공적으로 황위에 오른다면 모리타트의 명줄이 가장 길고 단단할 것이다. 나는 테이블 위에서 내려와 몸을 일으켰다.

“그럼 동의한 거죠? 일주일 뒤에 말 경주.”

“물론입니다.”

들려오는 건 모리타트의 대답이 유일했다. 침묵이 내려앉았고, 빌힐름은 비어 있는 술잔을 채웠다. 나는 방을 나가기 전에 문을 붙은 채로 그들에게 당부했다.

“모두 그날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한 명도 빠지지 않고.”

***

황성에 소문이 돌았다. 빌힐름 황자의 총애를 등에 업은 아그레인 캐롤드가 방만하고 천박하게 굴며 황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대개 이러했다.

“아그레인 캐롤드가 황후로 예정된 건 이제껏 그래 왔듯 빌힐름 황자의 변덕에 불과하다. 그러니 황자의 총애는 오래가지 못하고 아그레인 캐롤드 역시 곧 고꾸라질 것이다.”

혹은.

“반동 가문의 핏줄을 황후로 추대한다는 건 마땅한 이유가 있어서다. 따라서 아그레인 캐롤드의 패악은 황자가 그녀를 내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나는 눈동자만 굴려 모리타트를 흘겨봤다. 그는 초대하지 않았음에도 부득불 찾아와 궁금하지도 않은 귀족들의 뒷담화 주제에 대해 읊고 있었다. 그런 모리타트에게 말했다.

“나보고 어쩌라고?”

그는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그레인 양은 그게 문제입니다. 황성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아는 게 이상한 거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게 다가 아닙니다. 황성은 넓고 귀와 눈은 넘쳐나지요. 귀족들이 이렇듯 당신에게 악의만 갖게 된다면, 아그레인 양은 혼자 고립될 겁니다.”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었다. 나는 황성이 탐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은 있어도 갖고 싶은 건 없었으며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은 인물은 있어도 가까워지고 싶은 인물은 없었다. 나는 황성에 오래 머무를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각하는 참 친절해. 온통 적뿐인 황성에서 내게 선의를 베푸는 유일한 사람이야.”

모리타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리를 하시지요.”

“내 말에 거짓이 있기라도 한가?”

물로 목을 축인 그는 내게 되물었다.

“아즈마리아에 대해선 안 물으십니까?”

“그 멍청한 계집애의 이야기는 궁금하지 않아. 아, 부탁이 하나 있기는 해. 웬만하면 황성에서 내 눈에 안 띄게 해 줘.”

“아즈마리아가 리히튼 각하께 파혼을 요청했으나, 각하께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나는 가만히 왼쪽 손등을 쓸었다. 뼈 사이를 관통했던 상처의 흔적은 이미 완벽하게 사라진 후였다. 이제는 멀쩡한 피부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그 이유였군. 모리타트 잭 공작이 굳이 날 위하는 척하며 어제오늘 지겹도록 찾아오는 이유가.”

“뭐,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지금 제가 가장 관심을 둔 사안이기는 하지만.”

“잉고르드 공작 부인의 자리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그래? 각하와 그 여자가 붙어먹어도 모두 그러려니 할 거야. 각하의 부인도 신경 쓰지 않겠지.”

“그 정도로 만족할 일이었으면 아그레인 양에게 그런 부탁을 하지도 않았겠지요.”

그런 부탁이라면 청부 살해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무엇보다 이미 한 번 죽도록 빠졌던 남자에게 다시 빠지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잖습니까?”

“각하의 애절한 짝사랑은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으니 그만 나가 줘.”

“그 역겨운 말 경주는 또 뭐고요.”

누가 보면 내 부관인 줄 알겠군. 이쯤 되니 하나하나 따져드는 모리타트에게 신경질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모리타트 잭 공작. 시간이 남아도나? 왜 자꾸 나를 귀찮게 구는 거야? 아즈마리아가 그쪽을 상대해 주지 않아서 그런 거라면 다른 여자를 찾아 봐. 귀찮게 참견하려 들지 말라고.”

모리타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제발 그 상태 그대로 방을 나가 주길 바랐으나, 그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뻔뻔한 낯으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지금 저랑 농이라도 치자는 겁니까? 내가 왜 하루가 멀다 하고 당신을 찾아오겠어요? 그것도 우리 둘이 바람났다는 개소문도 돌기 시작하는 마당에.”

“나도 듣기 싫은 개소문이니 이제 각자의 길을 가자는 의미야.”

“어떻게 각자의 길을 갑니까,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탔는데.”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모리타트의 주장을 부인했다.

“각하. 무언가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같은 배를 탄 적이 없어.”

“그럼 표현을 바꾸지요. 나는 지금 아그레인 양에게 매달리고 있는 겁니다. 옆에 매미처럼 붙어 있으면 떨어지는 콩고물이 아주 쏠쏠할 것 같거든.”

공작씩이나 되어서 나로부터 얻을 것이 무엇이 있다고 저러는 걸까?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은 이미 이곳에선 정보로 통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비비안느 황녀 쪽은 눈에 불을 켜고 당신을 살피고 있을 테지요. 앞으로도 당신이 별관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맘대로 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전혀요. 계단을 올라가다 엎어져도 그 사실 그대로 누군가에게 전해질 겁니다. 하지만 제가 아그레인 양 옆에 선다면… 최소한 눈치는 보지 않겠습니까?”

“빌힐름에게 머리가 썰려도 나는 몰라.”

“괜찮습니다. 빌힐름은 내가 자기 것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아니까요. 그리고 혹시 모르죠. 아그레인 양이 먼저 떨어뜨릴지?”

목적어가 불분명한 문장이었다. 그의 머리를? 아니면, 빌힐름의 머리를?

“아… 웬만하면 오늘부터 제가 뒤따르는 게 좋겠지만, 아즈마리아의 곁을 지켜야 해서 말입니다.”

“그 구멍 난 손을 들고 참석하려나 보네.”

“제국의 신민으로서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선황 폐하를 뵐 마지막 기회이니까요.”

그의 말이 옳았다. 오늘은 선황, 다나한 2세의 입관식이 있는 날이었다.

***

한파였다. 눈을 내리지 않았으나 날은 흐렸다. 실내임에도 뼈를 훑는 한기에 몸이 으슬으슬할 정도였다. 추위 속에 황성의 모든 귀족이 모인 중앙 아카시아홀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황실 법도에 따르면 선황의 입관식은 즉위식 10일 전에 열린다. 새 시대를 여는 황제는 황위가 비워진 10일 동안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즉위식에 올라야했다.

하지만 다나한 2세의 입관식은 예정일보다 2주 빠르게 치러졌다. 명분은 명료했다. 선황이 체질상 추위에 쥐약이므로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관을 묻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빌힐름의 주장이었다. 콜록. 누군가 작게 기침을 했다. 사위가 워낙 고요한 탓에 작은 기침 소리도 크게 들렸다. 입관식의 마지막 절차로, 황제의 적자인 빌힐름과 비비안느가 제단에 올라 마주 섰다. 비비안느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황 폐하를 뵙는 마지막 자리인 만큼 오라버니께서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네시지요.”

“폐하께서는 말년에 비비, 너를 더 아끼셨으니 네가 먼저 함이 옳을 거다.”

“어찌 황위 후계자인 오라버니보다 제가 먼저 입을 열 수 있겠습니까?”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 게 내 착각만은 아닐 것 같군.”

“그럴 리가요. 황위 후계자인 오라버니를 비꼬아 제가 무얼 얻는다고. 황실 법도에 따르면 적자 중에서도 위계가 있는 법입니다. 법도 따윈 개나 주고 입관식을 보름이나 앞서 치룬 오라버니께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요.”

빌힐름을 열렬하게 비꼬는 비비안의 목소리가 얼음송곳보다 날카로웠다.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말 많은 모리타트도 오늘만큼은 입을 다문 듯했다. 눈이 마주치자 은근슬쩍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린다.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어.’

별개로 비비안느의 저런 모습은 내게 몹시 낯설었다. 내 앞에서는 수줍어하거나 입을 가리고 웃거나 서운해 하는 표정이 다였는데. 어느 쪽이 본성에 더 가까울까?

“나를 나무라는 것이냐, 비비. 오늘 네 태도를 선황 페하께서 보시면 경을 치실 텐데.”

“안타깝게도 이제는 그럴 일이 없겠네요.”

빌힐름이 웃었다. 상냥하다든지, 다정하다든지, 비꼰다든지 그런 사람다운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는 말 그대로 웃기만 했다.

“비비. 이 정도면 받아 줄 만큼 받아 준 것 같으니 어서 선황 폐하 앞으로 가거라.”

그건 명령이었다. 비비안느는 무감각한 눈빛으로 빌힐름을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관 앞에 섰다. 그리고 등을 숙여 선황의 귓가에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녀의 작별 인사는 들리지 않았다.

“아그레인.”

빌힐름의 차례가 왔을 때, 그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겨우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빌힐름이 나의 이름을 부를 때만큼 불안한 때가 없었다. 나는 그의 눈짓에 따라 빌힐름의 옆자리에 섰다. 작별 인사를 마친 비비안느가 곁을 스쳐 지나갔다. 빌힐름은 나를 이끌고 관 앞에 섰다. 그리고 다나한 2세가 아닌 나에게 속삭였다.

“비비안느 조나단 레그윈은 보름 후 오필리아의 별장으로 보내질 예정이야. 그러니 그전에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게 좋겠지.”

빌힐름이 황위를 잇게 된 이상, 비비안느가 황성에서 쫓겨나는 건 예정된 일이었다. 오필리아 별장은 황위 경쟁에서 도태된 황족들이 여생을 보내는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빌힐름이 이토록 적절하지 않은 때에 그 말을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내 어깨를 잡아 관 위로 내리눌렀다. 대리석처럼 하얀 다나한 2세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나는 숨을 참았다. 빌힐름이 웃었다. 비비안느 앞에서 보였던 것과 달리,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웃음이었다.

“감사 인사를 올리자, 아그레인. 선황 폐하가 계시지 않았다면 비비도 이 자리에 없었을 테고, 비비가 없었다면 너 역시 내 옆자리에 나란히 설 수 없었을 테니까.”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비가 없었으면 나 또한 이 자리에 없었다는 그의 말. 그 소리가….

“너도 궁금하지 않아, 아그레인? 비비가 떠난 후에도 네가 여전히 미래를 볼 수 있을지.”

빌힐름은 내가 미래를 볼 수 없다고 믿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 비비안느의 존재가 그가 지닌 제어의 힘을 억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의 이마가 내 이마에 닿았다. 내가 숨을 멈출 동안 빌힐름은 밀어를 속삭이듯 달콤한 목소리로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아니면 다시 나의 새장에 갇힌, 발톱을 잃은 작고 사랑스러운 매가 될지.”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예전이었다면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쳤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가까이에서 보는 빌힐름의 얼굴은 다나한 2세와 많은 점에서 달랐다. 빌힐름의 죽은 친부는 관 속에서도 미간을 구기고 있었으나 빌힐름은 아니었다. 다나한 2세의 입꼬리는 축 처져 있는 게 어울렸으나 빌힐름은 아니었다. 다나한 2세의 눈썹은 얇고 흐릿했으나 빌힐름은 아니었다. 나는 빌힐름에게 물었다.

“너는 선황께 정도 없었니?”

“정이 없을 수는 없지.”

“안 슬퍼?”

그가 잠시 고민했다.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나는 그런 빌힐름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비비안느가 떠나기 전에 널 선황 폐하 곁으로 보내 줄게. 잊고 있던 친부의 목소리를 들으면 사랑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나겠지.”

빌힐름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중앙 아카시아홀에 울려 퍼졌다. 나는 어깨에 걸쳐진 그의 팔을 털어내고 제단을 내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반으로 갈렸다. 나를 따라오는 시선, 그리고 빌힐름을 살피는 시선. 그들은 하나같이 빌힐름의 반응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입관식이 끝난 직후 나는 쏜살같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거침없이 서랍을 열어 안쪽에 보관해 두었던 단검을 쥐었다. 번쩍거리는 은색 날을 보자 멀쩡한 왼쪽 손등이 시큰거렸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비비안느가 떠나는 보름 안에 내가 바라는 일을 마쳐야 했다. 망설일수록 실패는 앞당겨질 것이다. 나는 단검을 높이 들었다. 그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고, 모리타트가 들어왔다. 나를 발견한 모리타트는 경악했다.

“젠장, 이번에는 자해라도 할 생각입니까? 하더라도 나와 상의하고 하세요. 우리는 한 배를 탔대도!”

내게로 뛰어온 모리타트가 단검을 앗아가려 했으나, 나는 죽어도 놓지 않았다. 그러다 문 앞에 선 아즈마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겁이 난 눈으로 나를 훔쳐봤다. 저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아즈마리아에게 물었다.

“여기에는 뭐 하러 왔어?”

대답은 모리타트에게서 들려왔다.

“아즈마리아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답니다.”

“빨리 하고 나가. 나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하고 있는 꼴을 보니 여기서 한나절은 죽치고 있어야겠군요.”

모리타트가 아즈마리아에게 손짓했다. 그녀는 굼벵이보다 느린 걸음으로 내 앞에 섰으나, 눈을 마주하지는 못했다. 이번에도 모리타트가 아즈마리아를 대신해서 볼일을 입에 담았다.

“아그레인 양에게 사죄하고 싶어 합니다.”

“누가? 아즈마리아, 네가?”

“제가 그녀에게 『태양이 흐르는 강』 서약을 밝혔습니다.”

“네게 안 물었어, 모리타트. 자꾸 대변인인 양 굴지 마.”

침을 꿀꺽 삼키며, 아즈마리아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

“사, 사죄드리고 싶어요.”

도통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알 수 없었기에 멍청한 얼굴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뭘 사죄해?”

“당신과 리히튼 잉고르드에게 저지른 윌 가문의 죄악들을.”

“무슨 죄악인지는 알고 그러니?”

“내, 내가 당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단 사실을 잊지 마세요. 나머지는 모두 모리타트에게 전해 들었어요.”

나는 어이가 없는 심정으로 모리타트에게 따졌다.

“한 배? 한 배에 탔다는 사람의 입이 종이배보다 가벼워?”

“모든 가정에서 아즈마리아는 예외입니다만.”

“이 여자가 날 죽이라고 하면 옳다구나 하고 실행하겠어.”

“확대 해석하지 마세요. 아즈마리아가 당신에게 속죄하려고 오지 않았습니까? 그럴 일은 죽어도 없단 소리지요.”

아즈마리아가 대뜸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찔렀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붕대로 단단하게 감겨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위, 윌 가문이 캐롤드와 잉고르드에 치른 죄를 제가 갚을게요. 윌 가문의 더럽혀진 명예를 제가 갚게 해 주세요.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네가 뭘 돕는다는 걸까?”

“당신의 복수.”

아즈마리아의 푸른 눈이 마치 홍염처럼 붉었다. 실핏줄이 흰자 곳곳에 터져 있었다.

“당신을 도와서 악마 같은 레그윈의 핏줄을 그렌페르크에서 몰아내고 싶어요.”

그녀의 얼굴을 보자 내가 소설로 착각하고 있었던 <태양이 흐르는 강> 속의 내용이 떠올랐다.

“제발 제가 속죄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눈앞의 아즈마리아는 내가 소설 속의 인물로 인지하고 있던 아즈마리아와 동일했다. 가문의 명예를 중요시하며, 유해 보이나 속은 강단이 있고 의지가 쉬이 흔들리지 않는 여자. 모종의 경로로 얻게 된 나의 기억에 속아 윌 가문을 내팽개치고 잉고르드를 선택하기는 했었으나, 그러한 아즈마리아의 정신머리가 고작 며칠 안에 정상 범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퍽 놀라웠다.

“너와 상관없는 일이야.”

“제가 윌 태생인 것부터가 이 사안에서 상관없지 않아요.”

“나는 윌 가주를 죽일 거다. 너는 네 친부보다 형체도 없는 가문의 명예가 중요하다는 거니?”

“명예는 속죄하면 뒤따라오는 것에 불과해요. 오랜 고민의 결과예요.”

모리타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불나방에 불과한 아즈마리아를 몹시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아즈마리아에게는 요즘 귀족들에게선 보기 힘든 신념이 있죠. 기사들도 갖다 버린 그 신념 말입니다. 참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네 눈에나 그렇겠지. 나는 일부러 비꼬며 물었다.

“잭 가문의 가주께서는 속죄할 마음이 없으신가?”

“그게 반드시 필요한 겁니까?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돕는 이유를 속죄라고 생각하시지요.”

이상하지. 심지가 굳은 건 아즈마리아인데, 대화할 때 더 편한 건 고작 안 지 며칠 되지 않은 모리타트였으니. 다시 아즈마리아를 바라봤다. 내게 있어 그녀의 존재가 어디에 쓸모 있을지 모르겠다. 모리타트를 만난 후부터 일이 꼬였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일을 치룰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내 복수는 나의 것이었고 누구도 알지 못하게 조용히 끝내는 것이 유일한 바람이라면 바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눈앞의 아즈마리아를 돌려보낼 수 없음을 직감했다. 동시에 그녀의 정신머리가 돌아왔다는 생각을 철회하기로 했다. 안타까운 아즈마리아. 너는 아직도 네 머릿속에 남아 있는 아그레인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구나.

“자신만만하게 내 앞에서 무릎 꿇어 놓고… 조금도 도움 되지 않는다면 많이 실망할 거야.”

“그러지 않기 위해서 무릎 꿇은 거예요.”

나는 아즈마리아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좋아. 그럼 네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을 말해 주지.”

“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잠시 올려 두었던 단검을 쥐었다.

“지금부터 나는 피를 꽤 흘릴 거야. 지혈을 부탁해.”

시린 손등은 도저히 다시 찌를 수 없었다. 나는 검 날을 조금 더 올려 팔뚝에 고정했다.

“의원은 부르지 마.”

날카로운 고통이 찾아왔다. 맙소사, 하는 탄식과 함께 아즈마리아가 내게 날듯이 달려왔다. 모리타트가 얼굴을 감싸 쥐는 게 보였다. 기다란 이명과 함께 세상이 뒤집혔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심해에 잠긴 듯 먹먹하고 흐릿한 감각이 나를 감쌌다.

가장 먼저 눈앞에 나타난 건 끊임없이 떨어지는 눈과,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선 윌 백작이었다. 그는 돌연 발작하며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그러쥐었다.

[크윽.]

그의 등 위로 밤하늘보다 새까만 호수가 보였다. 발작하듯 몸을 덜덜 떨며, 윌 백작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던 중 돌연 팔을 뻗어 내 뒷목을 쥐었다.

[아!]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윌 백작이 뒤로 나자빠지면서 내 몸 역시 그와 함께 눈 위를 굴렀다. 그리고 심장을 꿰뚫을 만큼 비현실적인 추위가 전신을 덮쳤다. 나는 호수에 빠졌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러나 내 목을 쥔 윌 백작의 손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갈퀴 같은 손아귀에 이끌려 호수의 바닥으로 끝없이, 끝없이 추락했다.

***

다음날 오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화창했다. 나는 죽어도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던 몸을 일으켜 닫혀 있던 커튼을 거두었다. 아즈마리아의 지혈은 꽤 괜찮았다. 붕대는 너무 느슨하지도, 조여 있지도 않았다. 다만 독에 썩어 문드러진 탓에 굳은 피와 붕대가 한데 뭉쳐 있었다. 나는 몰려드는 강렬한 어지럼에 급히 창문을 열고 소파등 위로 머리를 박았다.

‘오늘은….’

빌힐름이 처음으로 황제의 업무를 대신하는 날이다. 왕좌만 비었을 뿐, 빌힐름은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었다.

똑똑.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내게 말했다.

“무어 자작 부인께서 알현을 청하였습니다.”

“몸이 안 좋으니 다음에 찾아오라고 해.”

“예.”

아, 빌어먹을. 오늘부터 또 면식만 아는 귀부인들이 주구장창 찾아오겠군. 이럴 때는 자리를 비워야 함이 옳다. 나갈 몸 상태는 아니었지만, 여기서 계속 방에 머문다면 몸 상태뿐만 아니라 정신 상태도 피폐해질 게 분명했다. 욕실로 향하기 직전에 한 번 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말해둬야겠어.’

곧장 걸어가 문을 열고 시종에게 말했다.

“나는 오늘 매우 바쁠 계획이니, 아무도 들이지 말….”

그러나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눈앞에 나타난 남자의 이름을 내뱉어야 했다.

“리히튼?”

그는 대답하지 않고 내 몸을 쭈욱 훑어 내렸다. 그리고는 대뜸 내 허리를 감싸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고 한동안 적막이 맴돌았다. 당혹감을 떨치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로….”

“옷 벗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뭐라고?

“옷 벗어, 아그레인. 상처를 제대로 치료해야겠으니까.”

그리 말한 리히튼이 외투를 벗어 대충 의자 위에 올려 두었다. 아무렇지 않게 욕실로 들어간 그는 시종이 새벽 동안 데워 놓은 온수로 손을 닦았다. 물론 나는 그가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나오는 와중에도 옷을 벗지는 않았다.

“팔의 상처를 말하는 거라면, 이미 대충 치료 받았어.”

“뭔가 착각하는 것 같군. 네 몸은 불사가 아니야. 그런 꼴을 내버려두다가는 한쪽 팔이 썩을 수도 있고, 팔이 썩으면 다시 소생하기까지 계속 고통을 맛봐야겠지.”

그는 듣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리고 내게 턱짓하며 재촉했다.

“그러니 어서 내 말대로 해.”

나는 리히튼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리히튼의 옆에 앉아 그에게 등을 보였다. 머리칼을 한데 모아 가슴 앞쪽으로 내리면서 그에게 말했다.

“팔이 이래서 옷을 벗을 수가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의 끈 가봉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소파에 축 늘어져서 가만히 그의 손길을 받았다. 그렇게 두 겹 정도 옷이 벗겨지자 차가운 공기가 맨 등에 닿아왔다.

“여기의 멍은 아직 다 빠지지 않았군.”

정원으로 떨어졌을 때 생긴 멍을 말하는 걸까. 리히튼이 천천히 내 쪽 소매를 내렸다. 부끄러움이라든가 수치심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고통이 훨씬 컸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

“그러겠지. 네 힘은 결국 네 육체도 갉아 먹을 거다.”

“죽지 않은 몸이니 괜찮아.”

“괜찮지 않아.”

리히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아.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소파 등에 머리를 기댔다. 상처에 쓸려 내려가는 천이 마치 칼날처럼 느껴졌다.

“잠시. 그대로 몸을 돌려, 아그레인.”

움직이기 전에 리히튼이 내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눌러 자신의 가슴 위로 기대게 했다.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가 그의 베스트를 눌렀다.

“이제 가만히 있어.”

이윽고 리히튼이 내 한쪽 팔을 소매에서 완전히 빼냈다. 그리고 피에 녹아내린 천과 붕대를 하나둘 떼기 시작했다.

‘이 꼴을 모리타트와 아즈마리아도 봤겠지.’

돌이켜 보면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마음이 급해 중요한 부분은 간과하고 곧장 일을 치르지 않았는가. 은으로 만든 단검은 녹지 않지만 천과 붕대는 다르다. 내가 가진 최고의 패 중 하나를 바보처럼 노출시킨 꼴이 되었다.

“아파, 살살해….”

“나중에는 그런 소리도 못할 텐데.”

“왜 자꾸 부정적인 소리만 해? 내가 더 아프길 바라기라도 하는 거야?”

떨어지는 천 사이에서 피가 흘렀다. 그가 쉰 목소리로 나를 나무랐다.

“지금은 고작 손 하나, 팔 하나로 힘을 사용할 수 있겠지. 그러면 나중에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위태로운 음성과 달리 리히튼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가 온수에 적신 천으로 상처 주변을 천천히 닦아냈다. 탄내가 났다.

“지금처럼 손 하나를 바쳐서 미래를 볼 수 있을 것 같나?”

“무슨 말이야, 그게.”

“네 힘의 기폭제는 신체적 충격에서 오는 착란이다. 하지만, 아그레인. 고통은 익숙해지기 마련이야.”

나는 그의 몸에 머리를 기댄 채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동의할 수 없었다.

“죽어도 익숙해지지 못해. 100년이 흘러도 그대로 아플 거야.”

“너는 익숙해져. 늘 그래 왔어.”

“리히튼, 너는 꼭 그렇게 다 아는 듯이 행동해야….”

속이 후련하냐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지 않은가? 나는 말을 잇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익숙해지면 어떻게 되는데?”

“손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하겠지.”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더 큰 신체적 충격을 받아야 미래를 볼 수 있게 될 거란 건가.’

그러면 대체 얼마 만큼 큰 고통이어야 하기에?

“사흘로 회복되는 고통으로는 부족할 거다. 일주일, 열흘, 보름….”

리히튼이 피에 반쯤 타 넝마가 되어 버린 수건을 쓰레기통 안에 처박았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깨어나지도 못하겠지. 살아 온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죽은 듯 누워 있는 거야.”

언젠가, 그가 살아왔던 또 다른 시간의 내가 그러했던 것일까? 끔찍했다. 얼마나 끔찍한 세계였기에 수십, 수백 번 미래를 보고서도 또 보려 했던 것인지. 상상조차 힘들었다. 리히튼은 나를 침대 위에 옆으로 뉘였다. 그리고 굳지 않은 피가 계속 떨어질 때마다 끊임없이 천으로 닦아냈다. 쓰레기통 안에 점차 많은 넝마가 쌓여갔다. 그의 행동은 피가 완전히 굳어 멈출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느새 깜짝 선잠에 들었던 것 같다. 리히튼이 몸을 일으켰을 때, 나 역시 반사적으로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지금 같은 수고를 한 번 더 경험하고 싶지 않다면 다음에는 심사숙고해서 힘을 사용하도록 해.”

나는 몽롱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가 타박한 탓에 반쯤 벗은 옷을 다시 입을 수 없었다. 피가 굳은 지 얼마 안 되어 소매에 팔을 넣다가 상처가 덧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리히튼은 손을 닦아낸 즉시 곧장 던져둔 외투를 챙겼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문으로 걸어 나갔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리히튼에게로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

“겨우 내 상처를 치료해 주려고 온 거야?”

그는 힐끔 내 팔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담요를 들고 왔다.

“너는 내가 아는 이들 중에서 꽤… 아니, 상당히 행동력이 빠른 편이지.”

두꺼운 겨울용 담요가 맨 왼쪽 어깨를 감쌌다.

“예기치 못하거나, 불리한 상황이 벌어진 날에는 곧장 일을 치르곤 해. 마치 미래를 보는 행위를 통해 안정을 찾으려는 것처럼.”

내가 그랬던가? 그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리히튼이 물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는 하는 건가?”

내게는 그의 질문이 ‘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아느냐’로 들렸다.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텐데도 굳이 묻는 연유가 뭘까.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담요를 그러쥐었다. 긍정했을 때 돌아올 대답이 무서웠다. 리히튼은 나를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대답은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다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리히튼. 하나만 더 묻게 해 줘.”

“말해.”

“잉고르드로 돌아가지 않고 황성에 남은 이유는 뭐야?”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리히튼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그의 눈 속에서 회오리쳤다.

“그건 네가….”

무언가 말하려던 그는 끝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려 했을까. 왜인지는 몰라도 리히튼을 붙잡아 캐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늦은 오후부터 눈이 내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커다란 눈꽃들을 보며 직감했다. 이 눈이 쌓이는 날 나는 윌 백작을 죽이게 될 것이다. 거침없이 내리는 기색을 봐선, 예정된 미래는 내일인 듯했다. 미래에서 나는 윌 백작을 성공적으로 해치우지 못한다. 그는 막내딸인 아즈마리아와 달리 고통에 눈이 먼 와중에도 내 목을 잡아채 함께 호수로 떨어졌다.

‘그전에 도망치면 돼.’

하지만 황성의 주위는 근위대가 수호하고 있다.

‘더 나은 수….’

고민 끝에 짧은 서신을 작성하고 시종에게 건넸다.

“받을 사람은 뒤에 적혀 있으니, 바로 전달하도록 해.”

“예.”

“그리고 베르크네 씨를 데려와라. 누구인지는 알겠지?”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크네가 나를 방문했다. 그 혼자 잉고르드로 돌아갔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아그레인 양. 제게 볼일이라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높임말이 그리 어색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친 팔 위로 조심스럽게 외투를 걸치며 대답했다.

“하던 대로 해요. 불편하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빌힐름 전하께서 황실 법도를 무시하고 질서를 어지럽히시는 가운데, 귀족들이라도 예를 따라야 기강이 지켜질 겁니다.”

“그 말, 꼭 빌힐름 앞에서도 해 주세요.”

베르크네는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나는 그를 이끌고 황성을 나갔다. 별다른 말없이 내 뒤를 따르던 베르크네는 중앙의 분수 정원을 지나고 나서야 내 저의를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별채요.”

“아그레인 양의 외출에 제가 동행해야 하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당신이 아니면 물어볼 사람이 없거든요.”

“물어보신다는 사항이 별채의 건립 연도 같은 건 아니겠지요.”

“선황 폐하의 광증.”

베르크네가 조용해졌다. 나는 기사들을 별채 앞에 대기시키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내부의 공기는 아즈마리아를 불렀던 때보다 훨씬 삭막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과도 연이 참 깊어.’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황성 자체와 지겨울 정도로 연이 깊었다. 이제는 무너져 사라진 힐 성과 예일 성과도 인연이 있는 몸이니. 우리는 『태양이 흐르는 강』 앞에 섰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베르크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가 무얼 하면 되는 겁니까?”

나는 몸을 틀어 베르크네와 마주했다.

“발레리아의 시신을 찾아야겠어요.”

“처음 듣는 이름이로군요.”

“며칠 전까지 황성에서 내 시중을 들던 하녀였어요. 꽤 예쁘고, 똑똑했죠. 다나한 2세가 끌고 가기 전까지는.”

베르크네가 답지 않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는 무언가 깊이 고민하는 듯했다. 곧 내게서 눈을 떼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등을 돌렸다.

“따라 오십시오.”

그는 별채의 마지막 층으로 올라갔다. 6층의 서쪽 복도 맨 끝으로. 정기적으로 관리하는지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고 깨끗했으나, 사람 사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베르크네는 복도 끝, 가장 안쪽의 닫혀 있는 문을 밀었다. 정리가 잘된 호화스러운 침실이 나타났다. 내 방 만큼이나 사치스러운 그림, 가구, 벽화가 가득했다.

“다나한 2세는 한 달에 한 번 이 방에서 취침했습니다. 보통은 시종장인 카이로 백작을 대동했지만, 종종 윌 백작이나 크로허츠 후작, 헨서웨이 백작, 잭 전 공작을 대동하기도 했지요.”

나는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베르크네는 주름 하나 잡히지 않고 말끔하게 펴진 침구를 천천히 쓸었다.

“이곳에서의 일은 모두 함구되어야 했기에 하녀도, 시종도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베르크네 씨는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제가 이 방의 책임자였으니까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몸을 돌린 그가 책장 앞으로 다가가 가장 아래쪽에 꽂힌 서적을 뺐다. 톱니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책장이 옆으로 밀리면서 낡은 나무문이 나타났다.

“아그레인 양의 하녀는 이 아래에 있을 겁니다. 이제는 당신의 정신력이 제 생각보다 더 강하길 바랄 수밖에 없겠군요.”

문 아래에는 기다란 나선 계단이 존재했다. 어둠 속에서 끝없이 지하로 향해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베르크네는 능숙하게 방을 뒤져 등불을 찾아냈고, 우리는 길고 긴 나선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체감 상 올라온 층보다 내려가는 층이 배는 더 깊은 듯했다. 이토록 어두우면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경험은 처음이라 긴장됐다. 감각이 예민해지자 팔의 통증도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다 왔습니다. 길이 많이 낡은 건 워낙 오래전에 생긴 공간이라 그렇습니다.”

“얼마나 됐는데요?”

“별채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은 즉 200년이 훨씬 넘었다는 뜻이었다. 베르크네와 나는 한참 만에 평지를 밟을 수 있었다. 지하의 문은 지상에서 열었던 문보다 훨씬 낡고 추레했다.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음이 나선 계단의 석벽을 때리며 음산하게 울렸다.

“일단 여기서 기다리세요.”

당연한 소리지만, 문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 앞에 가만히 서 있을 동안 베르크네가 안으로 들어가 촛불에 일일이 불을 밝혔다. 내부는 생각보다 꽤 컸다. 켜진 촛불의 숫자가 늘수록 방 안의 모습도 선명해졌다. 나란히 선 수십 개의 장식장 속에는….

“머리인가요?”

베르크네가 마지막 초에 불을 붙인 후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의외라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담담하시군요.”

“전적이 있거든요.”

처음으로 본 머리가 워낙 충격적이라 그런지 몰라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다나한 2세의 취미가 생각보다 더 혐오스럽고 변태적이었다는 깨달음만 있을 뿐.

“200년도 더 된 재산들입니다. 이 중 일부는 귀한 혈통 출신이지요.”

“재산이라니 끔찍한 표현법이네요.”

“특히 선황 폐하는 이곳을 끔찍이 여기셨죠. 끔찍하게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마치 천국을 대하듯.”

갈수록 소름 돋는 다나한 2세의 정신 상태와는 별개로, 베르크네가 말하는 그 귀한 혈통이 어느 혈통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에 있는 머리는 나와 리히튼의 선조들인 건가요?”

“맞습니다. 이미 아실만큼 아시는 것 같군요.”

모를 수가 없지. 알기 위해 황성까지 온 거니까.

“나머지는 이 성의 하녀들이겠네요.”

나는 대답을 듣지 않고 베르크네로부터 등불을 건네받아 장식장을 훑었다. 커다란 유리병 속 묽어 보이는 투명한 액체 안에 희멀건 머리들이 둥둥 떠 있었다. 병의 수는 쉬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역겹다기보다는 머리만 남은 하얀 밀랍 인형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나도 이미 미쳐 버린 걸까.

“역설적이지만…. 이들은 그렌페르크 제국의 의료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머리 없는 시체 대개가 황실 의원들에게 기증됐기 때문이지요.”

“당사자의 허락도 없는 기증을 기증이라 할 수 있나?”

베르크네가 대답했다.

“적어도 그들은 그리 여겼습니다. 잭 가문과 윌 가문… 이하 가까운 가문의 수장들은요.”

이하 가까운 가문이라면, 이제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네 개의 가문 중 두 가문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유리병만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마침내 내가 찾던 얼굴이 나를 맞이했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장식장의 맨 위에 놓인 유리병. 그 안에 익숙한 금발의 여자가 눈을 감고 있었다.

“발레리아. 너 여기 있었구나.”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을까? 이 춥고 습하다 못해 구역질나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니.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유리병을 빼 품 안에 안았다. 빙하를 안은 것처럼 차가웠다.

“이 애의 몸은 어디에 있을까요?”

“말씀하신 하녀입니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의원들에게 넘어갔다면 말 다한 겁니다.”

머리라도 발견한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건가. 오랜 시간 햇빛을 못 봤으니 이제 함께 양지로 돌아갈 때였다.

“이건….”

베르크네가 발레리아의 유리병이 놓여 있던 공간 바로 아래에 놓인 병을 가리켰다.

“아그레인 양. 혹시 레이나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잉고르드에서 일하던 하녀였지요. 빌힐름의 첩자임이 밝혀져 쫓겨났던.”

잊을 수가 있을까? 황성에 온 이후에도 계속 찾던 얼굴인데. 베르크네가 가리킨 유리병을 살폈다. 정말 레이나가 맞았다. 어디에 있을까 궁금했는데 이런 결말을 맞이했을 줄은 몰랐다. 잉고르드를 떠나기 전에는 나름대로 생존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졌었는데.

“레이나는 쫓겨나기 전에 내게 그런 말을 했었어요. 빌힐름이 날 구해 줄 거라고.”

베르크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구부렸던 등을 펴고 문으로 향했다. 레이나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내게는 빌힐름 측의 첩자였던 그녀보다 발레리아가 더 소중했다. 내게는 발레리아의 마지막을 챙겨야 할 의무가 있다. 발레리아를 선택한 건 다름 아닌 나이니, 마땅히 그래야만 옳았다. 베르크네가 내 등 뒤에서 외쳤다.

“아그레인 양. 설마 그 유리병을 들고 나가려는 생각이십니까?”

“왜요. 안 되나요?”

등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베르크네의 표정은 상당히 미묘했다. 마치 모르는 이를 만난 듯 어색하기도 했으며, 어린 시절의 친우를 수십 년 만에 재회한 것처럼 감격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천천히 다가온 베르크네는 몹시 새삼스럽다는 눈빛이었다.

“이제야 조금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군요. 내가 알던 아그레인 캐롤드와 아그레인 양이.”

그러고 보니 베르크네는 과거의 나를 알고 있는 극소수의 인물이기도 했다. 다시 걸음을 이으며 그에게 물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더 해 줄 수 있어요?”

“이곳에서 아그레인 양은 ‘수잔’으로 불렸습니다. 당신의 진짜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이는 힐 성의 하녀들을 포함해 선황 폐하와 빌힐름 전하, 그리고 비비안느 전하가 전부였지요. 그때 아그레인 양은 수잔 양과 똑같은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했었습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내용은 내가 그간 잊고 있던 과거의 퍼즐 조각을 되찾게 했다.

‘펜던트 속의 내가 갈색 머리였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구나.’

대외에는 캐롤드 가문이 멸문한 연유가 반역으로만 알려져 있으니, 내 존재를 숨기려 했던 것이다. 수잔. 내게는 참 많은 의미를 지닌 이름을 상기하자 절로 입이 열렸다.

“그거 알아요? 수잔은… 내 쌍둥이였어요.”

“아니요. 수잔과 아그레인 양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입니다. 그 일로 캐롤드 가문이 멸문했으니까요.”

베르크네는 내게 있어 퍽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내 눈치를 보지 않고 사실만 밝힌 탓인지 나 또한 특별한 감흥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베르크네의 저런 점도 참 능력이다 싶었다.

“이곳에 수잔의 머리도 있나요?”

“아니요.”

다행이었다. 나는 그 애를 만날 자신이 없으니까. 아마 죽을 때까지 없지 않을까? 가까이 다가온 베르크네가 내 얼굴을 꼼꼼하게 뜯어 살폈다. 그리고는 곧 어깨를 잡아 문 쪽으로 밀었다.

“안색이 파리하니 이만 올라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막 낡은 문을 넘었을 때였다.

“아…!”

깜짝 놀란 쥐가 바닥을 구른 것처럼, 작고 새하얀 여자가 문 옆에서 나타나 저 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익히 예상했던 일이라 유리병을 떨어뜨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뒤로 물린 베르크네가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경악했다.

“아즈마리아 윌 영애? 이곳에는 어떻게… 뒤를 밟은 겁니까?”

“나무라지 마세요. 내가 불렀으니까.”

그래, 내가 불렀지. 베르크네와 별채로 오기 전에 시종을 시켜 아즈마리아에게 보냈던 서신은 바로 이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벌어져 왔었는지 그녀에게 알리고 싶었다. 정확히는 윌 가문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행위를 감행해 왔는지에 대해서. 나를 대신해 아즈마리아가 윌 백작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봐, 아즈마리아. 네 친부가 죽인 내 하녀야. 이제 보니 너와 꽤 닮았네.”

엎어진 아즈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유리병을 내밀었다. 아즈마리아는 덜덜 떠는 시선으로 나와 발레리아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등을 돌려 토악질을 했다.

“읏, 으웩!”

“이러나저러나 네가 빌힐름에게서 도망친 건 현명한 선택이었어. 그건 칭찬하는 게 옳아. 자… 너도 내부를 확인했으니 이만 올라갈까?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가빠서 쓰러질 것 같네.”

몸을 일으켜 계단 위를 오르면서 베르크네에게 부탁했다. 그는 내게 아즈마리아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에 대해서 물을 용의가 없어 보였다. 아마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겠지.

“베르크네 씨, 아즈마리아를 부축해 주세요.”

“아니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녀 나름의 자존심인 걸까. 나는 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고 앞장서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지상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저 깊숙한 지하의 공기가 얼마나 텁텁하고 고역스러웠는지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베개의 커버를 벗겨내 유리병을 감쌌다. 이곳에서 발레리아가 몸과 머리로 분리당하기 전에 어떤 일을 당했을지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이 역겨운 방을 빨리 떠야겠단 생각만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런데 베르크네 씨. 내게 이곳의 비밀을 알려 줘도 되는 건가요?”

방을 나서 계단을 내려가며 베르크네에게 물었다. 그는 우리 등 뒤, 멀찍한 곳에서 주춤주춤 따라오는 아즈마리아에게서 시선을 떼며 대답했다.

“이곳을 혐오하기는 빌힐름 전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시면 여기도 곧 폐쇄될 테니 상관없으리라고 봅니다. 무엇보다 아그레인 양은 황후가 되실 몸 아닙니까.”

어떻게 폐쇄될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납득할 수 없었던 건 빌힐름에 대한 베르크네의 평이었다.

“빌힐름이 이곳을 혐오했다고요? 믿기지 않는 소릴 하시네요. 내게 발레리아의 팔이라도 받겠냐며 조롱하던 게 고작 며칠 전의 일인데.”

“그분은, 빌힐름 전하는….”

무언가 설명하려던 베르크네는 이내 혀를 차곤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분에 대해서 함부로 입에 담아 무엇하겠습니까? 저는 이제 리히튼 각하의 사람입니다. 이곳에서의 일은 웬만하면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빌힐름 전하의 일도요.”

“당신은 왜 빌힐름이 아닌 리히튼을 선택한 거예요?”

“저는 카이로 가문의 차남이었습니다. 형님부터 가문 대대로 그러했듯 다나한 2세의 사람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역시 황성으로 불려왔습니다. 그리고 별관을, 특히 그 방을 관리하는 황성의 그림자가 된 것이지요.”

카이로 백작과 베르크네가 혈연 관계였다니?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니 확실히 닮은 게 느껴졌다. 나이 터울이 커서 그렇지, 베르크네가 15년을 늙으면 카이로 백작과 똑같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곳에서 들리는 여자들의 비명이 더는 듣기 싫어지더군요. 이쯤이면 만족스러운 대답이 될까요?”

더 따질 것 없는 대답이었다. 베르크네와 헤어진 후, 나는 아즈마리아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진짜 볼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애초에 별채로 향했던 것도 아즈마리아 때문이었으니까. 발레리아의 머리가 든 유리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 천을 거두었다. 지상에서 보니 지하에서 보는 것과는 느낌이 확실하게 달랐다. 끔찍했다는 의미였다.

“발레리아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아즈마리아?”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문 근처에서 맴돌고 있던 아즈마리아가 대답했다.

“무, 묻어 줘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그 하녀라면… 지금이라도 쉬고 싶을 거예요.”

“쉬고 싶어 한다고? 네가 발레리아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식으로 말해?”

아즈마리아의 입이 닫혔다. 나는 그녀를 테이블 앞으로 불러내며 말했다.

“너도 봤지? 아마 상기하기도 싫겠지만, 그 안에 쌓여 있던 머리들. 윌 백작과 전 윌 백작 그리고 전전 윌 백작… 네 가문 대대로 하던 짓거리야.”

정확히는 윌 가문을 포함해, 서약에 참여한 네 가문이 함께 벌인 짓이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의도적으로 유리병을 피하고 있었다.

“네가 속죄 받더라도, 윌 백작은 속죄 받을 수 있을까?”

“아뇨, 아니요.”

“너는 발레리아라면 지금이라도 땅 아래 묻히고 싶을 거라고 했지. 내가 너라면… 학살자를 가문에서 몰아내고 명예를 회복하겠어. 너희들이 죽고 못 사는 그 명예 말이야.”

“하지만 저는 아무런 힘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즈마리아는 두 눈을 꼬옥 감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뭘, 뭘 할 수 있을까요?”

“어디까지 할 수 있는데? 내 상처를 지혈하는 일?”

아즈마리아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만 깨물었다. 초조함과 불안함이 느껴졌다. 그러라고 데려간 별채였으나, 역시 아즈마리아의 사상은 이해하기 힘들다. 핏줄의 속죄를 왜 저가 하겠다고 나서서는.

“내가 왜 이 꼴이 된 줄 알아? 네 아비에게서 살아남으려고 이 꼴이 된 거야.”

“아, 알아요.”

알겠다면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우물쭈물하는 그녀가 우스웠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아즈마리아를 쫓아냈다.

“모리타트나 데려와. 너는 마음먹은 것과 달리 별로 쓸모가 없는 것 같구나, 아즈마리아.”

아즈마리아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곧 등을 돌려 방을 나갔다. 모리타트가 나를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문을 닫자마자 할 말이 몹시 많다는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당신은 몸 안에 대체 뭘 키우고 있는 겁니까? 뭘 키우기에 피가 산성을 띠는 거예요? 예?”

잉고르드의 독에 대한 정보는 쉬이 알려 줄 마음이 없었기에, 못 들은 척 불러낸 목적을 전달했다.

“내일 밤 윌 백작을 죽일 거다.”

이제 막 의자에 앉으려던 모리타트가 몸을 굳히고 나를 응시했다. 긴 정적이 흘렀고, 그는 한참 만에야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정기 만찬이 예정되어 있기는 합니다. 한 달에 한 번, 네 가문의 가주만 모이는 자리지요.”

“아즈마리아를 이용할 거야. 다만 네가 옆에서 거들어야 해.”

“그 애는 못할 겁니다. 확신해요.”

“그래서 각하가 거들어야 한다는 소리지.”

모리타트의 반응은 확실했다. 얼굴만 봐도 ‘이걸 어떻게 안 된다고 설득하지’ 고민하는 표정이었으니까. 충분히 납득할 만한 반응이었다.

“미래를 봤어. 내 말대로만 하면 문제없이 윌 백작을 처리할 수 있을 거다.”

“뭐라고요?”

빌힐름도 모두 아는 마당에 기를 써서 숨길 필요는 없을 터였다. 모리타트는 전에 본 적 없는, 눈에 띄게 당혹스러운 티를 내며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 절 시험하는 겁니까? 빌힐름 전하께서 멀쩡히 살아 계시는데, 당신이 어떻게 힘을 사용할 수 있단 겁니까? 그분이 계시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리타트의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다가도 마땅히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스스로도 본인의 판단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선례가 있었기에 더 혼란스러운 듯했다.

“윌 백작은 빌힐름 전하의 사람이 아닌 선황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빌힐름 파벌이었던 것 역시 사실이기도 하죠. 빌힐름 전하께서 아그레인 양에겐 한없이 자비롭다 하더라도, 그분께선 아직 황위에 오르지 않은 시점이지 않습니까? 윌 백작을 건드는 건 위험합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나의 대답에 모리타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각하, 너는 윌 백작이 돌아온 아즈마리아를 빌힐름의 정부로 밀어 넣는 꼴을 지켜보기만 해.”

그리고 직후 다시 표정을 굳혔다. 나는 유리병에 쌓인 먼지를 하나하나 털어내며 은근슬쩍 모리타트를 비꼬았다.

“윌 백작이 돌아온 딸을 모르는 체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게다가 빌힐름의 대관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지 않은가. 아즈마리아가 가문을 뛰쳐나왔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모리타트의 결정은 길지 않았다. 그는 부가 사항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기로 마음먹었는지 훨씬 편안해진 낯으로 속내를 비추었다.

“아즈마리아가 백작이 되는 것도… 아니, 되는 편이 제게는 더 편하긴 하겠네요.”

그의 판단은 아즈마리아 한 명으로 좌지우지되었다. 혀를 내두르긴 했으나 다행이라고 여겼다.

“이건 또 뭡니까?”

속 시원한 표정으로 다리를 꼰 모리타트가 대뜸 유리병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제야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너희가 죽인 내 하녀.”

“밝은 데서 보는 건 또 처음이군. 왜 가지고 올라오신 겁니까?”

“적당한 곳에 묻어 주려고.”

아즈마리아보다는 훨씬 안정적이고 차분한 반응이었다.

‘설마 왜 가지고 올라왔느냐는 타박을 듣게 될 줄이야.’

그래, 이상한 일은 아니지. 서약에 참여한 네 가문의 가주들에겐 아주 익숙한 물건일 터였다. 누군가는 이 유리병에 든 머리를 손수 잘라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동안 발레리아를 찾던 나를 훔쳐보며 비웃었을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제대로 확인당한 탓일까? 다가올 내일이 더더욱 기다려졌다.

“뭐, 선황의 취향에 퍽 들어맞는 얼굴이긴 하군요. 그럼… 내일 만찬에서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모리타트의 호박색 눈이 흥미로운 빛을 냈다. 아즈마리아. 네가 이런 식으로 내게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나는 천으로 발레리아의 유리병을 덮으며 천천히 계획을 이야기했다.

***

그날 꾼 꿈속에서, 나는 내리꽂히는 호우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급히 피신하느라 아무 것도 챙겨 나오지 못했다. 진흙에 푹푹 꺼지는 드레스 자락이 정신을 빼먹을 정도로 무거웠다. 회색 시야 너머로 기사단에 둘러싸인 거대한 황성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숙청으로 떨어진 머리가 데구르르 굴러 눈앞에 당도할 것 같았다.

리히튼의 반역은 실패했다. 황자 빌힐름은 자신이 건재함을 만천하에 보이기 위해 황성을 찬탈당한 지 일주일 만에 크로허츠, 잭 가문의 기사단을 이끌고 이곳에 돌아왔다. 자신이 황위 후계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선황의 유서와 함께. 이제 저 새까만 황성이 자신의 주인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어쩌면 내일, 빠르면 오늘 저녁에 리히튼이 이끌던 반역의 무리들은 완전히 소탕될 것이다. 제기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황성 찬탈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나? 좀 더 나은 계책이 있었을까?

[아그레인.]

거대한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 웅크리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곳에서 들려오면 안 될 목소리였다. 나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뛰어갔다. 목소리의 주인, 리히튼은 다가오는 내 머리 위를 자신의 망토로 감쌌다.

[감기에 걸리겠군.]

죽음을 눈앞에 둔 자 치고는 너무나 평온한 음성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그에게 물었다.

[리히튼?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거야? 기사단이 황성을 봉쇄하고 있는데….]

[그래서 소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지. 곧 지척까지 따라올 거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리히튼은 무엇을 위해 황성을 나와 나를 찾아낸 것일까?

[도망가자, 아그레인.]

나, 이 장면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 그건 이상하리만큼 선명한 기시감이었다. 꿈속의 일이었던 걸까. 그때도 분명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 확실했다. 한데 내가 리히튼에게 어떤 대답을 했었더라. 그러자고?

[안 돼.]

그럴 리 없지. 빌힐름을 비롯한 레그윈 가문의 멸망을 이루지 못한다면 내 삶에는 가치가 없었다. 가치 없는 삶을 사느니 죽는 것이 낫다.

[가려면 너 혼자 가. 나는 이곳에 남겠어.]

리히튼은 이미 나의 대답을 아는 얼굴이었다. 그에게선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망치자고 말하던 직전의 음성이 마치 허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리히튼이 고개를 숙였다. 기다란 속눈썹 위로 빗방울이 맺힌다.

[네가 말했었지, 아그레인. 앞으로 네 번이라고. 네 번만 아프면, 이곳을 벗어나 우리의 진취적인 미래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고.]

내가 그런 말을 했었던가? 그러나 전부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의 말들이 모두 허구처럼 들렸다. 하지만 나는 리히튼을 타박할 수 없었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본 네 번의 미래에는 지금 이 순간도 포함되어 있었을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리히….]

강한 힘이 내 팔을 끌어 당겼다.

[나는 내가 이대로 미쳐 버리지는 않을까 무서워, 아그레인.]

이윽고 차갑게 식은 몸이 나를 껴안았다. 거짓말. 네가 운다고? 고개를 들어 내 어깨에 파묻은 리히튼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의 일그러진 뺨은 그저 빗물에 젖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 네가 울 리 없지…. 그럴 리 없어.

[지쳐서 내가 널 포기해 버리면 어떡하지? 내가 더는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면? 너를 살려낼 방도를 끝까지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디선가 풀 밟는 소리가 들렸다. 소란을 일으키고 이곳까지 왔다고 했으니, 리히튼을 쫓아온 기사단이 지척까지 도달한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건 널 위한 거야.]

머리가 어지러웠다. 극심한 고통이 가슴을 짓이긴다. 나는 본능적으로 리히튼을 밀어냈다. 그는 반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 시간을 수백 번 반복해서라도 반드시 너를 살려야겠어.]

정신을 차렸을 땐 날카로운 검이 내 심장을 관통한 뒤였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점멸하는 시야에서 마지막으로 보였던 것은 절망에 빠진 리히튼의 얼굴이었다. 너, 울고 있는 게 맞았구나. 그 깨달음을 마지막으로 나는 죽었다.

***

발작하듯 몸을 떨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꽉 막혀 있던 머릿속에 맑은 공기가 통했다. 나는 한참 만에 수면 위로 올라온 것처럼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

가슴이 미어졌다. 아직까지 환상처럼 남아 있는 왼쪽 가슴의 고통보다, 잔상처럼 눈에 보이는 리히튼의 얼굴이 나를 괴롭게 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눈가를 쓸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이런 아픔으로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면 대체 얼마나 아파야 울 수 있는 걸까?

리히튼은 나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기까지 했다. 리히튼이 했던 말이나 과거에 꾸었던 꿈을 생각해 보았을 때, 아무래도 그가 과거로 돌아가는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나의 죽음이 필요한 듯했다. 그딴 게 촉매라니. 나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창가로 다가갔다.

“하아…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그는 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던 걸까?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리히튼은 내 곁에 있었다. 내가 잃어버린 모든 시간 속에서 리히튼은 나를 사랑하고, 원망했으나 그럼에도 놓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함께였다. 언제나, 항상. 흐린 하늘에 희뿌연 달이 보인다. 미친 듯이 떨어지는 눈이 황성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괘종시계의 시침은 저녁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거의 하루를 잔 것이다. 시종을 불러 명령했다.

“아즈마리아를 불러 와.”

“윌 영애는 현재 만찬에 참석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의 말씀을 전할까요?”

나는 고민하는 척 대답을 미루다가 시종을 밖으로 내보냈다. 책을 읽다가 깜빡 잠들고 말았는데, 다행히 적절한 시기에 눈을 뜬 듯했다. 모피를 걸치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정원의 인공 호수가 가장 잘 보이는 창가로 가 가만히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꿈속에서 리히튼이 울던 장면을 수십, 수백 번 되새기던 때였다.

인기척이 없던 호숫가에 노란 등불이 나타났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였다. 여자를 가운데 두고 두 명의 남자가 무언가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주정뱅이처럼 걸음이 휘청거렸다. 창문을 열자 그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지척까지 들려왔다.

‘아즈마리아에게는 알리지 마. 그녀가 모르는 상태에서 일을 진행해야 해.’

어젯밤, 나는 모리타트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그는 내 결정이 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래야 할 것 같군요. 갑자기 부족했던 효심이 차올라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의심받지 않게 잘 처신해야 할 거야, 각하.’

‘걱정하지 마시죠. 이래봬도 연기 하나는 타고났으니까.’

호숫가에서 잘 걷던 세 명의 동행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각자의 손에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 잔을 들고 있었다.

누군가 선창하듯 잔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모리타트였다.

‘이 유리병에 든 독을 사용해. 황성에서 사용하는 황금으로 된 잔을 사용해야 할 거야. 그렇지 않고는 안쪽이 녹아서 증거가 될 수 있으니까.’

‘…이걸 어찌 사용하라는 겁니까?’

‘어떻게든 윌 백작의 잔에 섞어. 걱정하지 마, 나는 각하가 윌 백작을 죽이는 미래를 봤어. 각하가 스스로를 믿으면 반드시 성공할 거야.’

물론, 나는 그런 미래를 본 적이 없다. 내가 본 미래라고는 윌 백작에게 독이 든 술잔을 건네고, 함께 호수 바닥으로 끌려 내려가 죽음을 맞이한 게 전부였다. 고작 설화처럼 내려오는 서약의 내용만으로 캐롤드 가문의 힘을 접했을 그였다. 내가 어떤 거짓말을 할지 분별하기 어려울 테니, 그럴싸하게 잘 포장하기만 하면 모리타트를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 독으로 다나한 2세를 죽이신 겁니까?’

‘죽일 수 있는 미래를 봤거든.’

‘허… 믿을 수가 없군. 레그윈 황실이 당신들을 가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군요.’

황금 잔을 든 채로 무어라 외친 모리타트가 먼저 술을 들이켰다. 이어서 그의 동행이었던 윌 백작과 아즈마리아 역시 술을 들이켰다. 모리타트의 시선은 윌 백작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술이 든 잔은 반드시 아즈마리아가 건네야 해.’

‘이유가 있습니까?’

있지. 설마 제 딸을 내게 그러했듯 호수 바닥 아래로 끌고 가려 하겠어?

‘왜겠어? 미래에서 아즈마리아가 윌 백작에게 잔을 건넸으니까 그렇지.’

눈은 여전히 펑펑 떨어지고 있었다. 멈춰 있는 건 오로지 윌 백작뿐이었다. 그가 쥐고 있던 잔이 아래로 떨어져 눈밭에 푹, 박혔다. 윌 백작의 두 다리가 비틀비틀 뒤로 넘어갔다.

‘친부가 무슨 말을 하든 고분고분 굴라고 해.’

윌 백작이 호수에 빠졌다. 수면 위로 옅게 얼어 있던 빙판이 커다랗게 갈라졌다. 그를 붙잡기 위해서 비틀거리던 모리타트의 발이 떨어진 황금 잔을 걷어찼다. 빙판 위를 구르던 잔이 윌 백작과 함께 호수 아래로 잠겼다.

‘그리고 최대한 자주 웃어야 해. 각하가 아닌 아즈마리아가.’

‘그 정도야 쉽지요. 미래에서 아즈마리아가 그러더랍니까?’

‘아니.’

‘그럼 왜요?’

아즈마리아의 비명이 들렸다. 그녀의 비명에 곳곳에서 달려온 기사들이 호숫가로 모였다. 고요하던 황성이 들썩거리는 게 느껴졌다.

‘매정하기는. 마지막으로 가는 길에 딸 웃는 낯이라도 많이 봐야 할 거 아니야!’

그 말에 모리타트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즐겁다는 듯 웃었었나, 아니면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었나? 조용히 창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왔다. 벽난로 앞에 앉아 잠시나마 얼어 있던 몸을 녹이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제 말의 남은 다리는 두 개.’

말은 빌힐름. 말의 네 다리는 네 가문. 크로허츠 후작과 윌 백작은 죽었으니, 이제 헨서웨이 가문과 잭 가문이 남았다. 윌 백작의 죽음에 빌힐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워낙 미친놈이라 예측하기 힘들었다. 계획이 성공했음에도 고양되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날 붙잡고 울던 리히튼의 얼굴만 자꾸 생각났다.

‘만나고 싶다.’

만나서 묻고 싶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왜 자기 자신을 구렁텅이에 박아 넣으면서까지 나를 살리려 하느냐고. 내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하지만 리히튼의 방을 향한 발길은 죽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차마 그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게 그를 찾아갔던 며칠 전의 내가 너무나 대단하게 느껴졌다. 리히튼은 나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

윌 백작이 죽은 다음날의 오전. 황성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올 가을부터 세 보자면 벌써 세 번째 죽음이었던 탓이다. 누군가는 새로운 황제에게 저주가 내렸다고 했다. 누군가는 비비안느 황녀가 반역을 준비하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와 모리타트를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조나단 부인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이른 오전부터 날이 좋았다. 그동안 눈을 쏟아냈던 먹구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높고 푸른 하늘만 남아 있었다. 모두가 윌 백작의 죽음을 애도했으나, 내겐 그를 애도할 이유가 일말도 없었다. 그래서 백작의 죽음을 기념할 겸 사냥을 나가려 했다. 조나단 부인이 방문하기 직전에는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들여보내.”

시종이 조나단 부인을 들였다. 그녀의 걸음은 무척이나 빨랐다. 빠른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조나단 부인은 뛰듯이 다가와서 거세게 팔을 휘둘렀다. 예고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얼얼해진 뺨을 붙잡고 그녀를 쳐다봤다. 부인의 낯에는 처음 보는 노기가 가득했다.

“당장 황성에서 나가시오!”

어느 부분에서 이리도 발작하는 걸까. 역시 윌 백작이겠지.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황후가 황성에 안 살면 어디에서 사나요? 비비안느가 가게 될 오필리아 별장? 아니면 혹시 불타 없어진 캐롤드 저택으로 돌아가라는 건가?”

조나단 부인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내 목을 조를 것처럼 살벌했다.

“너는 신이 아니야.”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아마 다나한 2세가 키우던 사냥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곳은 너 같은 미친 계집애가 함부로 휘저을 수 있는 놀이터가 아니다. 황성은 그렌페르크 제국의 아성이며, 심장이자 명예다. 또 역사이기도 하지.”

“부인. 혹시 제 황실 교사로 임명되셨나요?”

“닥쳐라! 네년은 지금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어. 우리가 네 방만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 거냐! 선황을 죽인 것으로 모자라 윌 백작을 호수 바닥에서 썩게 만들어?”

“뭔가요, 그 비논리적인 주장은. 제가 윌 백작을 죽였다는 증거라도 나왔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상 앞에 나올 것 같은가? 빌힐름으로 모자라 비비안느 황녀 전하와 리히튼 공작의 총애까지 등에 업었으니, 네겐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겠지.”

조나단 부인이 나를 손가락질했다.

“가문이 반역죄로 멸문한 게 그리 억울하더냐? 복수에 미친 계집애를 황자에게서 구해내려 했다니. 내가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것 같군!”

조나단 부인의 폭언이 내 폭력 욕구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가 어떤 시선으로 날 보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게 캐롤드 가문의 비극을 모르는 자가 보는 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게 나의 사랑스러운 개의 전언인가요, 부인?”

조나단 부인이 입을 닫았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떴으나 내 물음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비비안느는 그녀의 우발적인 행동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의미였다.

“전언이냐고 묻잖아.”

여전히 조용하다.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인께서 입을 닫으시니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군.”

말을 마친 즉시 비비안느의 방으로 향했다. 얼마 만에 황성의 서쪽 구역을 방문하는 건지 모르겠다. 창가 곳곳에 걸려 있던 레그윈 황실 가문의 휘장이 서쪽 구역에는 드문드문했다. 비비안느의 방에 가까워지자 이제는 아예 눈에 비치지도 않았다. 조나단 부인은 뒤늦게 날 쫓아 왔는지 저 멀리서 다급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비비안느의 방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보인 이는 방의 주인인 비비안느가 아닌, 힐마르티노였다. 둘의 공기는 퍽 평화로운 듯했다.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그레인?”

비비안느가 단번에 환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아그레인이야?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찾아왔어? 무슨 일 있니? 표정이 좋지 않아.”

그녀는 뛰듯이 걸어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를 바라보는 힐마르티노의 시선이 한없이 싸늘하다. 이전에는 그나마 ‘재미있는 것’을 보는 얼굴이었다면 이제는 그런 기색조차 없었다. 나는 비비를 따라 그녀 곁에 앉으며 말했다.

“조나단 부인이 말하기를, 내가 네 인생을 망칠 거래.”

햇빛에 그림자가 옅어지듯, 비비안느의 얼굴에서 웃음이 천천히 거두어졌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비비?”

“주둥이 놀리지 말고 꺼지렴.”

대답은 비비안느가 아닌 힐마르티노에게서 나왔다.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날카로운 검이 목 아래를 위협하고 있었다. 힐마르티노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나를 사무치도록 미워하는 마음이 두 눈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났다.

“그 일이 있고난 지 하루도 안 되어 감히 이곳을 찾아와? 누가 봐도 너와 비비가 음험한 속내로 윌 백작을 죽인 꼴이 되겠구나! 미련한 계집. 아니면 머리 하나는 잘 굴린다고 해 줄까?”

“치워.”

내 대답이 힐마르티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나를 죽일 기세로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언니의 말이 옳구나. 아주 옳아. 황실은 물론 그렌페르크 공신 가문까지 무너뜨리려 하다니! 다나한 2세가 급작스레 별세하는 마당에 빌힐름 황자가 황위를 잇고 말았어! 대체 이 나라를 어디까지 망칠 작정인 게냐!”

조나단 자매가 하는 말은 단번에 이해하기가 영 어려웠다. 그래, 빌힐름이 황위에 오른 일은 충분히 배 아플 수 있다. 하지만 윌 백작이 관짝 안으로 들어간 일에 이토록 흥분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들도 결국 비비안느의 적이지 않은가?

“흥분하지 마, 힐마르티노 후작. 내가 윌 가문을 건든 일은 리히튼이 크로허츠 가문을 무너뜨린 일과 별반 다를 거 없어.”

“다를 게 없다고?”

힐마르티노가 핏발이 선 눈으로 외쳤다.

“다른 게 없을 리가! 우리는 썩어빠진 황실을 개혁하는 개혁자고, 너는 황실과 더불어 우리까지 무너뜨리려는 쥐새끼에 불과한데! 어찌 같은 선상에 둔다는 소리지? 우리는 제국을 받치는 기둥을 고치려 하지만, 너는 그저 갉아 먹고 있지 않느냐!”

아아.

‘저들이 하면 개혁이고, 내가 하면 나라를 망치는 일이란 건가.’

왜? 그 속뜻에 대해 물을 필요도 없었다. 힐마르티노가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알아서 밝혔으니까.

“캐롤드의 멸문에 어떠한 전말이 존재하는지는 몰라도… 아니, 어떠한 전말이 존재한다고 한들! 그것이 그렌페르크 제국의 역사를 지닌 공신 가문을 무너뜨리고, 황성을 욕보일 이유는 되지 못한다. 아그레인 캐롤드, 네 분노를 엄한 귀족들에게 풀어내지 마.”

내가 무슨 꼴을 당하더라도 그 증오와 복수가 그렌페르크 제국의 안위보다 하찮다는 의미였다.

“너, 별채 지하에 뭐가 존재하는지 알아?”

힐마르티노의 안색이 굳었다. 그래, 아니까 개혁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겠지. 힐마르티노가 말했다.

“그곳에 네 부모의 목이 걸렸다고 해도 잊거라. 잊고 이 성을 떠나. 더는 비비와 우리를 방해하지 마렴. 재물은 네가 원하는 만큼 챙겨 줄 테니.”

그녀는 모리타트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네 증오를 잊어. 너를 위해서, 혹은 그렌페르크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 서약의 내막을 아는 모리타트도 그런 개소리를 지껄였는데, 조나단 자매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이들이 비비안느를 황위에 올리려는 이유는 그렌페르크 제국을 위해서다. 『태양이 흐르는 강』 서약으로 인해 수백 년을 노예처럼 살아온 우리 때문이 아니었다. 하물며 긴 시간 햇빛도 보지 못한 채 지하에 전시되어 있어야 했던 그 머리들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 머리들이 어떤 증오를 품고 있든 참으라고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너희는 이미 다 미쳤구나.”

내 중얼거림을 들은 힐마르티노가 목구멍을 내보이며 커다랗게 웃었다.

“네가 내게 감히 그런 소리를 해? 미쳤다고? 내가? 네가 아닌 내가!”

그녀는 검을 내던지고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벽 한쪽에 걸린 거울 앞에 나를 세웠다.

“자아, 아그레인? 거울 속에 비친 네 눈을 봐. 내가 미친 건 나도 인정하는 바야. 하지만 네게 그런 소릴 들으려니 속이 다 뒤틀리는구나.”

힐마르티노는 거울을 통해서 내 두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나는 너처럼 끔찍한 눈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빌힐름을 제외하고 말이지….”

빌힐름과 닮았단 소리가 이상하게 역겹지 않았다. 아니, 역겨웠으나 듣기 싫지는 않았다. 그 정도는 되어야 내가 빌힐름을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너는 제정신이 아니야. 스스로를 인지하렴. 너는 살육을 즐기고 있어, 레그윈이 그러했듯이.”

미안하지만 내겐 그다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말들이었다. 나는 그의 손아귀에서 턱을 빼고 비비안느를 향해 물었다.

“내가 이 악담을 언제까지 버텨야 한다고 생각해, 비비?”

비비안느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힐마르티노.”

그녀의 음성은 평소처럼 자상하고 평화로웠다. 봄날 지저귀는 산새의 울음처럼 고왔다.

“너는 나의 소중한 친구이고… 나는 그런 네게 큰소리를 치고 싶지 않아. 내 마음을 이해하지?”

힐마르티노가 멍한 얼굴로 내게서 물러났다. 그리고 조심스레 비비안느에게로 걸어가 그녀의 두 손을 붙잡았다.

“비비? 이 계집애의 말을 들어선 안 돼. 정신 차려, 이건 네게 하등 도움이 안 돼. 우리의 계획을 망친 주범이….”

“나가 줘.”

그러나 비비안느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띠운 채 밝은 목소리로 힐마르티노를 채근했다.

“제발, 나가 줘. 이왕이면 지금 당장.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하기는 싫어서.”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황망한 눈으로 비비안느를 내려다보던 힐마르티노는 거세게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쾅!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비비안느는 미안하다는 듯 낯부끄러운 표정을 했다.

“미안, 아그레인. 조나단 자매에게는 내가 항상 첫 번째거든. 핏줄로 따지면 조카니 그럴 수밖에. 그렇다 보니 할 말, 못할 말을 못 거르는 때가 많아.”

금세 예쁘장한 미소를 만들어낸 비비안느는 다시 내 손을 이끌어 옆자리에 앉혔다.

“이렇게 오랜만에 함께하니까 너무 좋다. 어떤 차를 준비하라고 할까? 으음…. 날이 추우니 따뜻한 밀크티가 좋겠지?”

“비비.”

“응!”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

비비안느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얼?”

“선황과 빌힐름에 대해서 묻는 거야.”

그녀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듯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건… 내가 아닌 리히튼 잉고르드의 의도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겠네. 그렇지?”

“너는 리히튼이 바라는 대로만 움직이는 모양이구나.”

“그의 계획은 완전하니까. 아주… 완전무결하지. 너도 알겠지만, 아그레인. 결국 모든 건 그의 손바닥 위에 있는 거잖니.”

비비안느의 입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그녀 스스로가 리히튼의 체스 말이기를 자처했다는 소릴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 몰랐던 탓이다. 비비안느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래, 괜히 어렵게 둘러서 말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리히튼과 손을 잡았을 때, 그는 이미 모든 계획을 세운 뒤였어.”

“계획?”

“『태양이 흐르는 강』 서약에 참여한 네 가문을 무너뜨리고 너를 황성으로 다시 불러내는 계획.”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기억이 돌아왔을지 모르겠지만… 너를 황성에서 빼돌린 사람은 베르크네야. 리히튼 공작의 심복인 그 남자 말이야. 나는 공작이 멋진 왕자님처럼 너를 구해내고 곁에 둘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상당히 놀랐었지.”

리히튼이 나를 황성에서 빼냈구나.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으나, 그 일에 베르크네가 관여했을 줄은 몰랐다.

얼굴에 나타난 내 반응이 꽤 솔직했는지, 비비안느가 신이 나서 나를 부추겼다.

“또 뭐가 궁금해? 리히튼 공작이 어떤 식으로 움직였느냐에 대해서? 미안해, 그건 나도 자세히 몰라. 확실한 건 그의 손길이 황성 깊숙한 곳까지 뻗쳐 있다는 점이야.”

“그럼 너는?”

“응?”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비비?”

내 손을 잡고 있던 비비안느의 악력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나를 마주하는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혐오라는 감정이 그려졌다. 숨길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완벽하게 부정적인 감정이.

“레그윈의 멸문.”

나는 그런 비비안느의 눈이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빌힐름과 다나한 2세를 입에 담는 내 표정이 이와 같을 수 있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비비안느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레그윈의 멸문이야.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사랑해 마지않았던 이 핏줄이… 나를 마지막으로 끊기길 바라.”

‘폐하는 병에 걸렸어. 레그윈을 사랑해서, 평생 레그윈만 보고 사는 병 말이야.’

모리타트가 나비 경주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레그윈 가문을 사랑하는 다나한 2세. 다나한 2세가 사랑하는 가문을 몰락시키려는 비비안느. 비비안느가 황성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 왔는지는 나도 잘 아는 바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바람이 별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땅히 그럴 만하다고 여길 뿐. 비비안느는 무언가 골똘히 고민하듯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다소 힘들게 입을 열었다.

“너는 나를 망치지 않았어, 아그레인.”

그녀는 조심스럽게 나와 눈을 맞추었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빌힐름의 무지하고 무능한 쌍둥이 황녀로 살다가, 그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겠지. 아버지와 빌힐름에게 반발 한 번 못해 보고 인형처럼 살다가 죽어 버렸을 거야.”

사랑스럽게 올려다보는 시선에서 과거의 비비안느를 느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날 향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비쳤다. 신기했다. 비비안느는 어떻게 저런 얼굴로 날 볼 수 있을까? 어떻게 저리 순수한 호의만으로 날 대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네 마음을 이해해, 아그레인. 나 또한 죽더라도 차라리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죽어 버리겠어.”

혹시 비비안느는 내 생각보다 더, 내게 많이 의지했던 걸까. 내가 그녀를 이용한 것과 관계없이. 비비안느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원하는 바를 얻은 후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원하는 바를 얻은 후에는… 가장 먼저, 호수 위에 배를 띄울 거야.”

비비안느의 얼굴이 몹시 진중해졌다.

“레몬 마들렌과 산미가 강한 커피, 그리고 벌꿀과 함께 말이야. 커피 두 잔을 모두 비워내기까지는 배에서 내리지 않을래. 해가 지고 달이 뜨더라도, 두 잔을 모두 비워내기까지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아이 같은 웃음이 하얀 낯에 그림처럼 퍼졌다. 다나한 2세의 입관식에서 빌힐름을 냉랭하게 노려보던 여자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너를 초대해서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식사를 즐기는 거야. 그 다음은 별장으로 갈 거야. 그거 아니, 아그레인? 오필리아 별장에서는 바다가 보여. 우리 그곳에서 질릴 때까지 놀자.”

“…나는 바다에 가 본 적이 없어.”

“나도 없어! 정확히는 황성을 벗어나 본 적이 없지.”

밝게 웃던 그녀의 낯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비비안느는 목이 꽉 멘 듯,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꼭… 나는 아그레인, 그날의 네가… 꼭 내 초대를 받아줬으면 해.”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비비안느는 내가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복수라는 목적과 하등 상관없이.

그녀의 곁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기분이었는데, 성을 나왔을 때는 아직까지 해가 밝았다. 나는 멍한 기분으로 정원 앞까지 나가 말라비틀어진 겨울나무를 올려다봤다. 누군가는 나의 삶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 리히튼이 그러하고, 비비안느가 그러했다. 내게 너무나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는 바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모리타트였다. 아즈마리아를 위로하다 밤을 새기라도 한 건지 눈 밑이 검었다.

“아즈마리아는 의외로 괜찮습니다. 너무 괜찮아 보여서 놀랄 정도였지요.”

“그런 것치곤 각하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이는데.”

“그래서 의외라고 덧붙이지 않았습니까.”

그가 말하는 ‘의외’는 적어도 ‘자해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정도가 되는 건가 싶었다.

“윌 전 백작의 시체가 떠오르는 즉시 관과 함께 영지로 떠날 예정이라 하더이다. 그곳에서 작위도 이어 받겠죠. 이제는 아즈마리아 백작이라고 불러야겠군요.”

“안 어울리네.”

그 멍청한 게 한 가문의 가주가 된다니. 망하지 않는다면 다행일 터였다.

“다리 없는 말 경주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참석자 한 명이 떠나 버리고 말았네요.”

그리 묻는 모리타트의 음성은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나는 조용히 대꾸했다.

“한 명으로 끝날지는 두고 봐야지.”

“어째 별로 기뻐 보이지 않으시군요?”

“내가 생각해도 그래. 왜일까, 각하? 왜 만족스럽지가 않지?”

“그런 걸 저한테 물으셔서 어쩌겠다고.”

당연히 윌 백작을 죽인 일에 대해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바랐던 만큼의 쾌감과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그런 건가.’

역시, 빌힐름을 끝내지 않는 이상 나는 계속 목마르기만 한 건가.

“아그레인 캐롤드 양.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습니다만… 저도 말에서 끌어내리실 겁니까?”

농담이라 여기기에는 퍽 진지한 얼굴이었다.

“각하가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데. 꽤 불안해졌나 봐?”

“당신이 미래를 본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까요.”

“죽이는 것만이 복수는 아니지. 걱정하지 마, 각하. 내가 각하의 피를 볼 일은 없을 테니까.”

“피는 아니더라도 다른 건 볼 수 있단 뜻입니까?”

“각하는 내 관심 밖이란 뜻이야.”

나는 이번 일을 통해 어렴풋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 네 가문에 복수하는 건 가슴이 시키는 일이 아닌, 머리가 시키는 일이라는 걸. 내가 간절히 바라는 복수가 아닌, 의무감에 행하는 복수라는 것을. 내가 간절히 바라는 건 오직 빌힐름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 일을 통해서만 내 스스로가 만족할 만큼의 쾌감을 얻을 것 같았다.

“최근 들어 부쩍 불안해 보이는 분위기더군요.”

뜬금없는 주제였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모리타트가 턱짓하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눈이 녹아가는 겨울 정원 사이로, 적발의 여자가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마가렛 헨서웨이?”

얼굴은 분명 그 마가렛 헨서웨이인데, 어쩐지 특유의 드센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예. 빌힐름 전하의 피앙세… 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던 그 아가씨요. 신기하죠. 성격 같아선 지금쯤 아그레인 양을 괴롭히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을 텐데 말입니다.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요. 눈에 띄게 얌전해진 감도 있고.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평소와 다르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기묘한 어감이다 싶었더니,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리였다. 또한 나 스스로도 누군가를 판단할 때 자주 사용했던 평가였다. 누구를 판단할 때였더라?

“각하.”

“예?”

“리히튼 잉고르드와 조금이라도 얽혔던 여자들, 누가 있었는지 기억해?”

모리타트는 짧은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메리튼 헨서웨이, 무어 리올, 에리얼 크로허츠, 그리고 아즈마리아 윌 정도 되겠네요.”

유일하게 낯선 가문은 리올 가문 밖에 없었다. 내 예상이 들어맞기 위해서는, 리올 가문이 서약에 참여한 네 가문과 깊은 연관이 있어야 했다.

“무어 리올의 외친은 어떻게 되지?”

모리타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 아가씨는 제 외사촌입니다. 리올 가문으로 시집가신 이모님의 딸이죠.”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리히튼이 ‘이용하려 했던, 또는 이용한’ 여자들 모두가 서약에 참여한 네 가문의 핏줄이었던 것이다. 왜냐는 물음은 불필요할 터였다. 리히튼은 의도적으로 여자들에게 접근한 게 분명했다.

“그중에서 갑작스레 다른 사람처럼 변한 사람은 없을까?”

“에리얼 크로허츠를 제외하곤 모두 한 번씩 일이 터지기는 했습니다. 아즈마리아처럼 예상에 없던 논란을 만들었죠.”

그랬겠지. 에리얼을 제외하곤 그 여자들의 대부분이 내 기억을 가지고 있었을 테니까.

“그들 중엔 요절한 아가씨도 있고… 그러고 보니 올해는 여러모로 안 좋은 소식이 많았던 것 같군요.”

모리타트는 말하다 말고 입을 꾹 닫았다. 그리고는 살아 있는 바퀴벌레라도 삼킨 양 묘한 얼굴이 되어 나를 응시했다.

“지금 제 머릿속이 매우 복잡한데 말입니다, 아그레인 양.”

“그래? 그렇담 그 결론은 내가 내주지. 이봐요, 아그레인 양!”

나의 부름에 마가렛 헨서웨이가 고개를 돌렸다. 마치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처럼.

“하.”

그 모습을 본 모리타트가 헛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설명을 구했다. 설명이랄 게 필요할까?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였다. 아즈마리아도, 마가렛도, 그리고 앞서 열거되었던 여자들의 대개가 나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바로 내가 소설 『태양이 흐르는 강』 속의 빙의자라고 여겼던 인물이겠지.

나는 ‘스스로를 아그레인이라고 믿는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안다. 이미 아즈마리아라는 좋은 전적이 있었던 덕분이다.

“아.”

마가렛은 우리와 시선이 마주친 후 몹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문득, 그녀를 아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아즈마리아를 이용해 윌 백작을 죽였을 때처럼.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마가렛의 앞으로 걸어가, 고개를 숙인 채 속삭였다.

“당황하지 말고 들어 줘요.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미친 듯이 흔들리던 눈동자가 다급하게 땅을 향했다.

“내 정체를 알고 있다고요? 대낮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시네요. 불쾌하니 이만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가렛은 우리를 극도로 경계했다. 특히 대외적으로 아그레인이라 알려진 내게는 더더욱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들을 설득하기란 차갑게 식은 홍차를 들이키는 일 만큼 쉽다는 것을.

“도망치지 마요. 마가렛 양은 진실을 알고 있잖아요? 아그레인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걸.”

당혹감에 더해 미세하게 떨리는 대답이 들려왔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게 무슨….”

“우리는 당신을 찾아다녔어요, 아그레인.”

마가렛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소리하지 말아요. 내가 아그레인이라고? 지금 날 놀리는 건가요?”

“겁먹지 마요. 그렇게 아닌 척 속일 필요는 없어요. 우리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 아직도 모르겠어요? 나는 당신을 돕기 위해 기꺼이 아그레인인 척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럴 때 만병통치약으로 쓰이는 이름이 있다.

“모든 건 당신을 걱정한 리히튼 잉고르드 각하의 명령이었어요.”

예상대로 마가렛은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그녀는 지대한 충격이라도 먹은 듯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리다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내게 물었었다.

“다, 당신들은 누구죠?”

여기서부터 아쉬운 쪽은 내가 아니라 마가렛이다.

“이런 곳에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주제가 될 것 같군요. …내일 나를 찾아오세요. 리히튼 각하의 전언이 있으니.”

나는 적당히 발을 뺐다. 그녀 스스로 내게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어서 돌아가세요. 내일의 약속은 잊지 말고.”

언제 소리쳤냐는 듯, 고개를 주억인 마가렛이 성안으로 사라졌다.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모리타트가 감격적인 어조로 호들갑을 떨었었다.

“능숙하시네요. 한두 번 겪어본 일이 아닌 것처럼.”

“처음이 아니기는 하지. 아즈마리아가 있잖아?”

그리고 나 역시 똑같은 경험을 겪지 않았는가. 잉고르드에 있었던 시절의 나를 마가렛에게 대입하면, 그녀를 어찌 다루어야 할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모리타트가 물었다.

“어떤 기분입니까? 자신이 진정한 아그레인이라고 믿는 여자들과 대화하는 기분은.”

“답답하고 한심하지. 가끔은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제 그 정도의 답답함 쯤이야 쉬이 참을 수 있었다.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

모리타트가 의문을 담아 질문했다.

“그들은 어떻게 당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리히튼 공작이 발견해내는 것도 신기하군요.”

상식적으로 타인이 나의 기억을 가진다는 건 불가능하다. 적어도 레그윈, 캐롤드, 잉고르드 가문에는 그러한 능력이 전해 내려오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원인. 리히튼이 그들의 존재를 이미 인지하고 있는 이유. 네 가문의 후계에서만 발생하는 이유. 다른 이의 기억이 아닌 오직 나의 기억만 공유되는 이유.

“각하. 각하는 잭 가문의 가주이니, 서약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

“뭐, 그런 편이기는 합니다.”

“황실이 캐롤드와 잉고르드의 힘을 빼앗으려 했을 때 말이야. 혹시 레그윈 말고 다른 네 가문과도 피를 섞이게 했었나?”

모리타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예. 당시 실험이 계속 실패로 돌아가 실험군의 범위를 넓혔었는데, 그중 하나가 레그윈 황실이 아닌 타 가문들과 피를 섞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선별된 가문이 바로 서약에 참여한 네 가문이지요. 물론 그 실험 역시 실패했지만요.”

한 세대에는 한 명의 능력자가 태어나고, 그 능력자는 황성에 보내진다. 그러니 능력을 타고나지 않은 후계자는 캐롤드와 잉고르드의 가주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황성의 제물이 되지도, 가주가 되지도 못한 제 3의 혈통은?

“그 시도 외에 캐롤드와 잉고르드의 혈통이 외부로 유출된 적, 있어?”

이번 대답은 조금 늦었다.

“아니요.”

모리타트는 낮게 깔린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모르셨나 보군요. 『태양이 흐르는 강』 서약 이후 캐롤드와 잉고르드 가문의 핏줄은 출가를 금지 당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 가지 선택밖에 없어요. 황성으로 보내지거나, 가주가 되거나, 방에 갇혀 늙어 죽거나.”

“정말 개와 다름없었네.”

“권력이란 것이 본래 찬탈하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레그윈이 황실을 지키는 방법이었을 겁니다. 옳고 그름의 선을 넘어서 말입니다.”

모리타트가 처음 보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와 헤어져 성 안으로 발을 디디면서, 다시 한번 돌이켜 본 모리타트의 이야기로 그간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가정에 확신을 지니게 되었다.

내 기억이 특정 인물들에게 공유된 건, 반복된 회귀로 인해 발생한 특이점이었다. 잉고르드와 캐롤드 가문의 혈통이 섞인 자들에게서 생기는 이상 현상. 다른 말로는 회귀가 반복됨에 따라 생긴 부작용. 만약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다음 회귀에는 나의 더 많은 기억이 공유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다음 회귀에는 더, 더 많은 기억이. 그 다음의 다음 회귀에는 나의 모든 기억이….

‘그래서 아즈마리아는 내 유년의 기억만 지니고 있던 거야.’

마치 감자의 썩은 부분이 번지듯, 회귀가 반복될수록 더 많은 기억이 유출되는 것이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 이상의 회귀는 위험하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복수가 끝나면 리히튼을 죽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죽은 나를 살리기 위해 또다시 시간을 되돌릴 테니까.’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를….

“안녕, 아그레인.”

몸에 한기가 들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느릿하게 잇고 있던 걸음을 멈추었다. 창문에서 붉게 진 노을의 빛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 앞에 선 남자는, 여느 때처럼 상냥한 미소를 걸친 빌힐름이었다. 윌 백작을 죽였던 일이 떠올랐다. 설마 그 사건 때문에 나를 찾아온 건가. 내 얼굴을 꼼꼼히 살핀 빌힐름이 작게 혀를 찼다.

“너무 긴장하지 마. 오늘은 그저 네 얼굴을 보러 온 것에 불과하니까. 비비를 만나고 온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을 테니 긴장 풀어.”

모르는 게 없구나. 하긴, 황성 자체가 그의 눈이나 마찬가지니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마치 내가 큰 실수라도 한 것처럼 말하네, 빌힐름. 나는 그저 그 애의 안부가 궁금해 물어보러 갔을 뿐이야.”

빌힐름이 내게 손짓했고, 나는 그의 명을 착실히 따랐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내 팔을 끌어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맞추었다. 노을보다 더 붉은 눈동자가 내 뇌를 훑는 착각이 들었다.

“착해. 거짓을 말하는 눈은 아니로군.”

“정말 얼굴만 보러 온 게 맞아?”

“새삼스러운 소릴 하는구나. 나는 언제나 네 얼굴을 보러 오곤 했지. 네가 재미있는 놀이를 시작한 날이면 언제든.”

그가 말하는 ‘재미있는 놀이’는 윌 백작의 죽음을 뜻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빌힐름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는 내게 멋대로 굴지 말라고 타박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해 보라고 채근하고 있었다. 모르는 척 웃으며 대답했다.

“그날이 오늘인가 봐? 나만 몰랐나 보네.”

빌힐름은 느긋하게 창틀 위로 몸을 걸쳤다. 그의 시선이 정원 옆의 인공 호수를 향했다. 몇 시간 후면 윌 전 백작의 시체가 떠오를 곳이었다.

“지금처럼만 해.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도 좋아. 내 다리를 모두 잘라내려거든 잘라내. 이제 딱 두 개가 남았구나.”

무언가 이상했다. 빌힐름이 나를 기껍게 여기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으나, 그중 하나는 늘 선을 지킨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의 비위가 상하지 않도록 항상 적정선에서 개처럼 기었다. 또한 그는 내가 선을 넘지 않도록 경고하곤 했다. 지금처럼 그 선조차 지워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빌힐름 답지 않았다.

“그런 끔찍한 소리 말아 줘. 내가 네 다리를 왜 자르겠어?”

빌힐름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거짓말을 하는 눈이로군. 예전에도 말했지? 너는 내 앞에서 결코 진심을 숨기지 못한대도?”

그의 말이 옳다. 나는 빌힐름 앞에선 거미줄에 걸린 벌레 수준만도 못하다. 그와 보냈던 긴 지옥의 시간은 아직까지도 내 발에 족쇄처럼 묶여 있었다. 나는 그와의 심리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럴 때는 그냥 보지 않는 게 답이다. 나는 빌힐름을 지나쳐 방으로 향했다.

“아그레인, 멈춰.”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미안한데, 빌힐름. 나는 이제 네 개가 아니란다.

“돌아와.”

그러나 내 머리가 빌힐름의 명을 거절한 것과 말리, 몸은 어느새 빌힐름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 두 다리가 자연스럽게 그 앞에 멈춰 선다. 빌힐름의 선한 웃음이 보였다. 부드러운 손이 내 머리를 쓸었다. 개새끼. 몰려오는 치욕이 숨통을 틀어막았다.

‘아니지, 개새끼는 나지.’

입술 안쪽을 짓이겨 폭풍처럼 휘몰아치려던 내면의 감정을 잠재웠다. 강한 피 맛이 나자 흥분이 가라앉았다.

“말을 잘 들었으니 상을 주지. 내게 무엇이든 물어보도록 해. 비비의 안부가 궁금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내 안부도 알아가는 게 공평하겠어.”

내가 궁금한 너의 안부는 죽었느냐 마느냐 정도에 불과해. 그래도 나는 빌힐름이 바라는 대로 비비안느에게 했던 질문을 본떠 물었다.

“좋아, 빌힐름. 혹시 나라는 존재가 네 삶을 망쳤니?”

“아니. 난 네가 있기에 살아.”

“네가 바라는 게 뭐야?”

“날 죽이기 위해 살아가는 널 지켜보는 것.”

“내게 뭘 바라는 거야?”

“날 죽이기 위해 살아갈 것.”

하나같이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잊고 있던 공포가 가슴께를 울렸다. 그가 날 놓지 않는다면 나는 그의 울타리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감정을, 수십 번 회귀하는 내내 느꼈겠지.’

하지만 나는 결국 복수에 성공했고, 리히튼이 곁에 있는 이상 빌힐름에게 다시 끌려 다닐 일은 없을 것이다.

‘리히튼….’

아아. 다행이었다. 리히튼을 생각하자 전신을 덮쳐오던 그림자가 조금 옅어지는 듯했다.

“또 묻고 싶은 건?”

빌힐름의 질문에는 여유가 느껴졌다. 나는 열리지 않는 목구멍에 갖은 힘을 줘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내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건 언제 알았어?”

그 질문에 대한 빌힐름의 반응은, 정말 의외였다. 황성에 온 이래 보아 온 웃음 중 가장 환한 웃음을 보인 것이다. 그는 소리 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래! 그게 궁금할 거라 여겼지….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나 대단한 일을 해냈어, 아그레인. 선황을 죽인 일도, 윌 전 백작을 죽인 일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들을 가능하게 할 방도는 하나밖에 없더군.”

기다란 손가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등 뒤로 넘겼다.

“입관식 날…. 널 떠봤을 때, 네 반응이 퍽 솔직했지. 귀여워서 웃음이 다 날 정도로.”

제기랄. 흐트러지려는 숨을 깊게 삼켰다. 내 스스로가 이토록 멍청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빌힐름에게 겁먹은 나머지, 그가 나를 떠봤을 거란 의심 자체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빌힐름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동안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나의 반응을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날부터 자연스레 생각이 바뀌더구나.”

그리고는 곧 위로하듯 말했다.

“너라면 내 다리를 마음껏 잘라도 좋아. 내게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몸통, 아니 머리만 남게 되더라도 좋아. 왕좌? 더 이상 그런 건 더욱 의미 없지. 이제부터 이 자리는 너와 이 놀이를 즐기기 위한 하나의 방도에 불과하거든.”

빌힐름이 나를 조롱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가 내뱉는 소리 모두가 진심처럼 느껴졌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내가 없는 아그레인 캐롤드에게는 존재하는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아. 나는… 그런 널 보는 것으로 만족해. 그게 내 유일한 즐거움이니까.”

어떤 대화를 해도 제자리에 머무는 기분이다. 그와 나의 관계는 진전이 없다. 과거 힐 성에 갇혀 있던 때 그대로 멈춰 있었다.

‘너 없이는 내 존재에 의의가 없다고?’

끔찍한 개소리였다. 하지만 더욱 끔찍한 것은, 그의 개소리에 반박하지 못하는 내 입이었다. 이대로 반응 없이 등을 돌린다면 내게 또 그 개 같은 명령을 하겠지. 그때의 그 역겨운 기분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거 멋진 고백이네. 괜찮다면 이만 자리를 떠도 될까? 조금 쉬고 싶어서.”

그러니까 너도 제발 꺼져. 이 정도로 날 골렸으면 됐잖아? 다행히 빌힐름은 더 나를 괴롭힐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는 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네 부탁이라면 나는 그 무엇이든 허락해, 사랑스러운 아그레인…. 부디 좋은 저녁 보내기를.”

빌힐름의 입술이 내 뺨에 닿았다. 맞닿은 살갗이 뜨거웠다.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내게서 몸을 돌렸다. 나는 방에 도착한 즉시 물에 젖은 손수건으로 한 시간 내내 뺨을 닦았다.

***

그날 밤에는 꿈을 꿨다. 나는 꽃과 나비가 화려하게 장식된 대리석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구불구불한 적발이 곱게 풀어져 가슴께 아래에서 흔들렸다. 오색으로 반짝이는 꽃 머리핀이 겹겹이 머리에 꽂혀 있었다. 연회에 참석해야 할 것처럼 화려한 레이스 드레스가 바닥에 끌렸다. 나는 입을 열었다.

[아그레인.]

거울을 통해서 보이는 어두운 녹안이, 정확하게 ‘나’를 향해 있었다.

[이제는 아그레인 맞지? 수잔이라는 이름은 진작 버렸을 거야.]

과거의 내가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새하얀 손등이 입술을 가렸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곤 한탄했다.

[리히튼은 왜 네게 수잔이라는 이름을 주었을까, 아그레인? 우연이라 여기기에는 너무 깊은 의미를 지닌 이름인 것을….]

깊은 의미를 지니기는 했지. 리히튼의 행동에는 대개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었기에, 추측하려 할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그거 아니? 나는 곧 죽으러 갈 거야. 아카시아 숲속의 너른 호수 아래에서 눈을 감기로 했어.]

기분이 이상했다. 그럼 이건 죽기 전에 내게 남기는 마지막 인사라도 되는 걸까.

[아무리 괴물 같은 회복력을 지닌 나라고 해도 심장이 뚫리면 즉사하겠지. 내 첫 죽음이야. 이 얼마나 기념적인 날인지….]

‘나’는 거울에 비친 내게 원망과 안쓰러움을 느꼈다. 거울 속의 나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동시에 숨겨지지 않는 기대감도 엿보였다.

[오늘을 시작으로 나는 열네 번을 죽을 예정이야.]

그래, 네가 리히튼을 그렇게 만들었지. 리히튼이 나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어. 나 때문에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올가미를 씌웠다.

[그리고… 네가 바로 열네 번을 죽은 후의 나지. 나는 내가 열다섯 번 죽는 미래는 보지 못했어. 너는 내가 봤던 미래의 마지막이야.]

그 소리는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도록 했다. 리히튼이 내 죽음을 다시 되돌리려 하지 않았다는 뜻일까? 아니면 내 손으로 그를 죽였다는 뜻일까?

[열네 번의 죽음. 아아, 긴 시간이었네…. 처음에는 말이야. 넌 단 한 번의 복수도 성공하지 못했어. 리히튼만 개고생을 하다가 죽고 시간을 되돌리길 반복했지.]

리히튼이 그렌페르크 제국을 손바닥 위에 두게 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는 의미였다. 나의 표정은 오랜 꿈을 회상하듯 아련했다.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미래인데, 거울 속의 나에게는 마치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되돌려졌고, 네 복수가 성공하는 횟수도 점차 늘었지. 그럼에도 시간은 또다시 돌려져야만 했어.]

그 이유에 대해선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복수에 성공한 너는 늘 자살을 선택했거든.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나는 눈을 감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마치 공작의 깃처럼 보였다. 나는 ‘나’를 향해 자문했다.

[네게 부족한 게 뭘까?]

[나에게는 무엇이 부족할까?]

[아니면 무엇이 그리도 넘치기에 늘 마지막에는 삶을 포기하고 마는 걸까?]

착각이 아니라면, 나의 목소리에는 응집된 슬픔과 미련, 그리고 후회가 드글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마땅한 선택이라 여겼지… 하지만 내 자신이 열네 번을 죽는 꼴을 본 후에는 생각이 조금 달라지더구나. 다름 아닌 리히튼 때문에.]

나에게 입이 있었다면 웃음을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형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나를 원하지만, 딱 너를 위한 만큼만 나를 원하지.’

그리 말하던 리히튼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머릿속에 선명했기 때문이다. 이것 봐, 리히튼. 네가 틀렸어. 나는 처음부터 너를 생각하고 있었어. 너는 내가 원하는 만큼보다 더, 더 깊숙이 나에게 관여하고 있었다고.

[너는 모르겠지… 아마 모를 거야. 그 애는 항상 네 곁에 있었어. 네가 죽는 그 자리에, 항상. 열네 번의 순간을 매번. 처음 여섯 번은 울더군. 한데 나중의 여섯 번은 울지 않았어. 그리고 마지막 두 번은….]

가느다랗고 풍성한 속눈썹이 옅게나마 파르르 떨렸다.

[그 얼굴은… 다신 보고 싶지 않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위로 리히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빌힐름을 죽이고 사형대에 올라갔을 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말하던 그의 얼굴. 비비안느의 즉위식이 열리던 날, 발코니에서 추락하는 나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던 얼굴. 그리고 나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던 얼굴까지. 무엇 하나 흐린 얼굴이 없었다. 전부 차가운 송곳이 되어 내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아그레인. 너는 다시 죽을까? 열다섯 번째 기회에서도 결국은 또 죽음을 선택할까?]

느리게 눈을 떴다. 거울 속 나의 시선은 바닥의 어딘가를 향해 멍하니 고정되어 있었다.

[리히튼은 지칠 만큼 지쳤어, 아그레인. 너는 마치 새 삶을 살아가듯 기억을 갈아 끼우지만… 그는 모든 날을 기억하거든.]

어느 순간부터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아닌 리히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전처럼 ‘나’에게 복수를 강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내 삶의 목적이며 내가 살아온 이유라고 설명하지도 않았다.

[아그레인. 나는 네 선택이 무엇이든 지지해. 너는 다름 아닌 나니까. 그건 당연한 일이지.]

…아, 이게 아닌가.

[그저, 죽기 전에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네 곁에는 항상 리히튼이 있다는 것을. 우리의 복수는 단순히 우리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리히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리히튼이 곁에 있는 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열네 번째 삶의 어느 순간에서… 너는 지금의 나를 보겠지.]

고개를 든 내가 정면의 거울을 응시했다. 이상하게도 그제야 내 얼굴이 더 확실하게 보이는 듯했다. 거울 속의 나는 너무 어렸다. 지금의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그렇다면 나를 기억해 줘, 아그레인. 네가 있는 미래에서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될 나를.]

그때 나는 차마 말로 표현 못할 극도의 황망함을 느꼈다. 쏟아지는 이 상실감의 홍수를 분출해 낼 구멍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아그레인 캐롤드라는 인물이 가엽고 기구해 보였다.

[안녕.]

어색하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보였다. 거울 속 나의 감정이 지금의 ‘나’에게로 생생하게 전달됐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살고 싶었다.

***

꿈속에서 과거의 기억을 마주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있다. 바로 충격이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나는 항상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꿈을 꿨다. 그 꿈의 기억들은 대개 내가 앞으로 움직여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특히 충격적인 기억과 마주하는 날에는 긴 시간 숨을 참은 것처럼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럴 때면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내 감정을 빠르게 정리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늘의 기억이, 아니 과거의 내가 준 이야기가 너무나 명료했기 때문이다. 나는 살고 싶다. 살기 위해서 과거의 내가 빌힐름을 죽인 후 느껴왔던 감정들과 정면으로 마주할 것이다. 이번에는 그 공허함에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안에 모든 일을 끝내자.’

빌힐름은 내가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이 시기 자체를 즐기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시기를 한나절 안에 마무리 짓겠다.

아침 식사 직전에 시종이 내게 말했다.

“아즈마리아 윌 영애가 곧 영지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 전에 아가씨를 만나 뵙고 싶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바쁘니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고 답해.”

고민하지도 않고 곧장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식사하면서 가볍게 적고 있던 서신을 시종에게 건넸다.

“정오가 되기 전, 이 서신을 마가렛 헨서웨이에게 직접 전해라. 읽은 후 불에 태우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와.”

“알겠습니다.”

아즈마리아가 가지고 있던 나의 기억은 황성에서 지냈던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다면 마가렛 역시 동일할 확률이 높았다. 그녀도 아즈마리아가 그러했듯, 리히튼과 자신이 특별한 유대감으로 묶여 있다고 믿을 게 분명했다. 만약 맞다면 원하는 방향으로 이용해 먹기 퍽 손쉬울 터였다.

“확인한 후에는 모리타트에게 가능한 빨리 나를 찾아오라고 전해. 아즈마리아를 배웅한 직후가 좋겠어.”

“예.”

시종이 방을 나간 후, 꽤 긴 시간동안 남은 빵을 느긋하게 뜯어먹었다. 나는 오늘 헨서웨이 부녀를 황성에서 내쫓을 것이다. 모리타트와 함께.

***

모리타트가 나를 찾아온 때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후원으로 나간 정오였다.

컹컹!

하늘은 맑았고, 눈이 반쯤 녹은 땅 위에는 사냥개들이 쏘다녔다. 귀족들은 빌힐름의 즉위식을 기다리는 지루한 일상의 틈에서 또 다른 놀잇거리를 발견한 듯했다. 선택한 토끼가 사냥개에게 가장 늦게 사냥당해야 이기는 게임이었다. 나비 경주에 비하면 창의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놀이였다. 저 멀리서부터 걸어온 모리타트가 테이블에 앉아 멍하니 놀이를 구경하던 내게 다가왔다. 그는 품 안의 서신을 건넸다.

“아즈마리아가 전해 드리라더군요.”

“더는 아즈마리아에게 볼일 없어.”

“그래도 한 번은 읽어 주시죠. 윌 영지로 떠나기 직전에 급히 작성한 서신입니다. 내용이 궁금하지도 않으십니까?”

“그다지. 각하가 궁금해서 그런 거지?”

“네, 뭐….”

저 멀리서 누군가의 아쉬움 섞인 탄식이 들려왔다. 선택한 토끼가 개에게 사냥당한 듯 했다. 나는 모리타트의 바람대로 아즈마리아의 편지를 쭈욱 읽어 내렸다.

무려 두 장이나 되는 길이였다. 자신이 어째서 속죄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속죄할 예정인지, 나의 가르침에 어떠한 깨달음을 얻었는지…. 서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감할 수 없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이리도 성실하다고? 이 정도면 성녀라 불러도 무방했다.

“그녀가 뭐랍니까?”

대답 없이 서신의 첫 번째 장을 건넸다. 끝까지 읽어 내린 모리타트의 표정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아즈마리아는 이런 점이 참 귀엽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쪽 혼자 실컷 귀여워하도록 해.”

“흠. 허락만 해 주신다면 이 서신은 제가….”

“챙기든가. 가보로 간직하든지.”

홀로 시시덕거리던 모리타트가 서신의 첫째 장을 소중히 품 안에 넣고선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모리타트는 귀족들의 새로운 놀이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했다. 그들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절 찾으신 용건은 뭡니까?”

나는 모리타트의 호박색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일 안으로 모든 일을 끝낼 거야.”

잠시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 턱을 쓸어내리던 모리타트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내게 되물었다.

“설마 그분과 관련된 미래를 보신 겁니까?”

그에 나는 하마터면 조소를 참지 못할 뻔했다.

‘빌힐름이 이런 식으로 나를 떠본 거구나.’

거짓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착각해 주다니, 이토록 손쉬운 속임수가 없었다.

“즉위식은 열리지 않을 거야.”

나는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무장해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했다. 그의 말대로 미래를 봤다는 듯, 진중한 눈빛을 보냈다.

“그 말씀은….”

“다리 없는 말이 곧 죽는단 소리지.”

말과 함께 검정색 레이스 장갑으로 가린 손을 흔들었다. 아마 모리타트는 예전처럼 내 손등에 보기 흉한 상처가 생긴 줄로 알 것이다. 고통을 통해서만 미래를 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기대와 달리 모리타트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흠.’

…아니, 미적지근하게 느껴지도록 얼굴 근육에 힘을 준 건가. 가만히 살피니 그의 낯에는 미약한 놀라움과 미약한 긴장감, 그리고 미약한 기대감이 감돌았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자 모리타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뛰어다니는 사냥개들을 응시했다. 귀족들의 놀이에는 관심도 없는 주제에. 그가 이토록 티 나게 딴청 피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지만 목소리에서만큼은 흥분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그의 물음에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무얼 위해서 날 돕는 걸까? 정말 무엇 하나라도 얻기 위해 내게 달라붙은 게 맞는 것일까? 그럴 리가. 나는 모리타트를 신뢰하지 않는다. 아마 그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지만 예상 외로 우리 둘의 미묘한 관계는 별 탈 없이 유지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모리타트를 조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 뜻은….

‘모리타트가 나와의 관계에 용을 쓰고 있다는 뜻이겠지.’

목적이 무엇이든, 모리타트가 나를 배신할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그렇다면 배신하기 전에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게 옳을 터였다.

“자정에 마가렛 헨서웨이가 동쪽 숲의 예일 성으로 향할 거야. 예일 성이 어디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모리타트는 <태양이 흐르는 강> 서약에 참여한 잭 가문의 가주였다. 내가 갇혀 있던 힐 성과 리히튼이 갇혀 있던 예일 성을 모를 리 없었다. 모리타트는 의아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 성은 무너진 지 오래일 텐데… 마가렛이 성의 위치를 알고 있기는 합니까?”

“모르겠지. 하지만 내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찾기 위해 고군분투할 거야.”

그래도 명색이 아그레인의 기억을 지닌 여인이지 않은가? 내가 그러했듯, 마가렛 역시 결국에는 무너진 예일 성을 찾아낼 것이다. 그녀의 다리가 본능적으로 그곳을 향할 테니까.

“각하가 해야 할 일은, 예일 성에 도착한 마가렛 헨서웨이를 잡아가는 거야. 쉽게 말해서 납치지.”

“지금 저보고 귀족 영애를 납치하란 소립니까?”

혼란스러운 눈이었다. 모리타트는 나비 경주에서 지나가는 말로 마가렛과의 친분을 내보인 적이 있었다. 그래서 꺼림칙하다 이건가? 낯선 하녀의 머리를 보고는 황제의 취향에 대해 운운할 수 있으면서, 낯이 좀 익은 여자는 납치조차 어렵나 보구나.

“왜. 알고 지내던 여동생을 죽이려니 동정심이 들기라도 해? 걱정 마. 나는 연좌제에 관심 없으니까.”

비꼬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모리타트에게는 그리 들리지 않았는지, 내 말을 듣자마자 사람답던 표정을 버리고 계획에 염려를 표했다.

“헨서웨이 백작을 끌어내는 게 목적이시군요. 그러나 마가렛의 실종이 알려지면 황실 기사도 움직일 텐데요.”

“각하가 그러지 못하도록 잘 끼어들어야지.”

모리타트가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말을 이었다.

“마가렛이 <태양이 흐르는 강> 서약을 밝혀내려 한다고 몰래 흘려. 그 일을 빌미로 헨서웨이 백작을 위협해. 딸을 살리고 싶다면, 황자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데려와야 한다고. 백작이라면 그의 미친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 거 아니야?”

모리타트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럴싸합니다. 사랑하는 인물의 목숨을 운운하면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워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동쪽 숲으로 들어온 헨서웨이 백작을 죽여.”

모리타트는 잠시 주변을 살폈다. 내 직설적인 명령에 조심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우리 주변에는 개미 한 마리도 오가지 않았다. 나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 나온 황실 기사만이 멀찍이 서서 귀족들의 놀이를 질린 눈으로 관망할 뿐이었다. 목소리를 낮춘 모리타트가 의문을 나타냈다.

“마가렛을 어떤 식으로 동쪽 숲에 보내시려고요?”

“서신을 보냈어. 리히튼이 그곳에서 기다릴 거라고.”

“고작 그런 것으로 꼬셔낼 수 있겠습니까?”

나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다.

“각하. 아그레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그야 물론, 제 앞의 아그레인 양이겠죠.”

“그렇지? 마가렛은 반드시 나올 거야. 나의 한정적인 기억을 지녔다면 그럴 수밖에 없거든.”

황성의 새장에서 지냈던 그 지옥 같은 기억을 지녔다면, 내 서신을 절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보지 않으려 해도 눈이 가고, 무시하려 해도 다리가 움직이겠지. 아즈마리아가 그러했고 내가 그러했다. 어떻게 보면 참 미련한 짓이었다. 아그레인이라는 인물을 더 알아내려 한다는 건, 더 깊은 고난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내 볼일은 이것으로 끝이야. 이번에도 각하만 믿을게.”

기대가 서린 말과 함께 모리타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옅은 긴장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단단히 마음먹은 눈으로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대업을 앞둔 이의 눈이 이러할 것이다.

‘이게 내 뒤에 서서 뭐 하나라도 거저먹으려는 남자의 눈이라고 할 수 있나?’

이윽고 나는 자리를 털며 일어선 모리타트를 다시 붙잡았다. 그리고 깜빡 잊을 뻔했다는 투로 제안했다.

“일을 마친 직후 백작의 머리가 든 상자를 들고 <태양이 흐르는 강> 앞으로 와. 아즈마리아에 대해서 할 말이 있으니까.”

아즈마리아의 이름이 나오자 모리타트의 눈매가 달라졌다. 습관처럼 배어 있는 가벼움과 장난스러움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아즈마리아? 그녀에 대해서라면 그냥 지금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만.”

“아니.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한 후에.”

작은 헛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모리타트는 내 제안의 의도를 알아챈 듯했다. 헨서웨이 백작의 목 없이는 아즈마리아의 정보도 없다는 내 속뜻을.

“허, 이거… 서운하다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함께 여기까지 온 마당에.”

“어제 본 황자의 미래에는 아즈마리아도 있었어.”

그의 낯이 대번 창백해졌다. 불안하겠지. 비비안느도, 힐마르티노도, 조나단 부인도 아닌 무려 빌힐름이잖아?

“현명하게 판단하도록 해. 내가 왜 아즈마리아로부터 받은 서신의 두 번째 장은 건네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

가만히 손을 들어 기사를 불렀다. 나는 기척 없이 다가온 호위 기사에게 아즈마리아로부터 받은 서신의 두 번째 장을 건넸다. 그리고 명령했다.

“어디로든 가서 불에 태우고 돌아와. 내용은 절대 확인하지 말고.”

“예.”

기사를 시종처럼 부리는 건 보안 면에서 여러모로 신뢰 가는 일이다. 기사가 호기심에 서신을 펼칠 수도 있었지만, 걱정될 사안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모리타트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었으니까. 나는 빌힐름의 미래를 본 적이 없다. 애초에 손에 착용하고 있는 까만 레이스 장갑도 모리타트를 속이기 위해 착용한 물건이었다. 내가 미래를 보았다고 믿도록 만들기 위해서.

“하….”

짧은 한숨과 함께, 모리타트가 마른세수를 했다. 자리를 박차고 내 멱살을 잡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억제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웃음을 잃지 않은 낯으로 그에게 조언했다.

“앓는 소리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모리타트. 설마 우리가 친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지금 그쪽에게 선의를 베풀고 있는 거야. 무려 사랑하는 여자의 미래를 보장해 주겠다잖아. 안 그래?”

모리타트가 말했던 대로다.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운운하면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워진다. 그가 아무리 냉철한 인간이라고 해도, 지금 당장은 머릿속에 아즈마리아의 이름만이 떠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모리타트는 꽉 막힌 목소리로 내게 간청했다.

“그렇다면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그녀가 위험합니까?”

아니, 전혀. 하지만 진실을 알릴 마음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 못지않게 딱딱해진 음성으로 답했다.

“글쎄. 각하가 내게 백작의 목을 가져오지 않으면 위험해질 수도.”

모리타트는 곧장 타이를 끌어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자정이 지난 후에 별채에서 뵙죠.”

멀어지는 모리타트의 걸음이 몹시 바빴다. 새하얀 눈 위에 찍히는 발자국에서 그의 불안한 감정이 그대로 전달됐다. 저 정도로 신경 쓴다면… 아즈마리아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내게 속았다는 분노보다는 안도를 더 느끼겠어. 나는 기사의 복귀를 기다리며 사냥개의 뜀박질을 느긋하게 관람했다.

***

늦은 저녁부터 다시 눈이 내렸다. 두 명의 시종을 불러 밤 열 시 즈음부터 동쪽 숲 입구를 주시하도록 명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다시 돌아온 건 한 시간가량이 흐른 뒤였다.

‘검은 로브를 쓴 여자가 급히 뛰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시종은 내게서 적지 않은 사례금을 받고 방을 나갔다. 이후 두 번째 시종이 방으로 돌아온 건 자정 즈음이었다.

‘덩치가 작고 늙은 귀족이 홀로 말을 타고 동쪽 숲으로 향했습니다요. 아주 급한 눈치였습니다.’

두 번째 시종 역시 내게서 적지 않은 사례금을 받고 방을 나갔다. 시종이 사라진 직후 나는 외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말의 첫 번째 다리.’

크로허츠 후작은 친딸인 에리얼 크로허츠에게 죽었다. 크로허츠 가문의 새로운 가주가 된 장남은 영지에서 숨을 죽인 채 몸을 낮추고 있었다. 그 이유가 의문인 걸 봐선 백이면 백, 리히튼의 계략이었다.

‘말의 두 번째 다리.’

윌 백작은 친딸인 아즈마리아 윌이 건넨 술을 마시고 호수에 빠져 죽었다. 모리타트에게 알리지는 않았으나, 아즈마리아는 그가 나를 도와 윌 전 백작의 죽음을 유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서신의 두 번째 장에서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녀의 필체에서 자신을 속였던 모리타트를 향한 강한 유감을 느꼈고…. 모리타트의 애절한 짝사랑은 물거품이 될 미래만을 앞두는 듯했다.

‘말의 세 번째 다리.’

헨서웨이 백작은, 확신컨대 친딸인 마가렛 헨서웨이를 붙잡으러 가는 길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래도 앞의 두 경우에 비해선 퍽 인도적인 결말이라 할 수 있었다. 적어도 핏줄의 손에 죽임을 당하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모리타트 잭.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잭 공작 가문의 가주가 된 남자. 부인은 있지만 아직 슬하에 아이는 없었다. 빌힐름을 친근하게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나, 근래에는 내 옆에만 붙어 있는 듯했다.

‘왜?’

그간의 경험에 따르면, 의문이 풀리지 않는 일에는 리히튼 아니면 빌힐름이 연관되어 있었다. 아마 이번 역시 그렇겠지.

도착한 별채는 늘 그래왔듯 어둡고 고요했다. 눈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여자의 울음 같은 음산한 소리가 내부를 울렸다. 그 사이에서 느릿한 걸음 소리가 들려온 건 한참이 흐른 뒤였다. 작은 등불이 점차 가까이 다가왔다. 노란색 빛이 모리타트의 냉랭한 낯을 비추었다. 그는 서너 걸음을 사이에 두고 멈춰 서며 말했다.

“기분이 영 이상하군요.”

“왜?”

“눈앞의 당신이 내가 아는 아그레인 양처럼 보이지 않아서.”

무슨 의미냐는 얼굴로 쳐다보자, 모리타트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두렵다는 소리입니다.”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는 감상이었다. 그 역시 제 입으로 말하고도 기묘한 기분을 느꼈는지, 품 안의 상자를 덮고 있는 천을 거두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상자를 천천히 기울였다. 그 안에 흐릿하지만 흰머리와 적발이 섞인 정수리가 보인다. 헨서웨이 백작의 머리였다.

“이왕이면 가까이 오셔서 만져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얼굴을 확인해도 좋고요.”

“확인했으니 됐어. 마가렛 헨서웨이는?”

“손발을 묶어 둔 채 성 밖으로 옮겨 놨습니다. 그쪽도 가져와서 보여 드릴까요?”

“아니.”

거절하자 모리타트가 다시 천을 덮으며 씨익 웃었다.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입매 끝이 덜덜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공포로 인한 반응은 아니었다. 아즈마리아가 그렇게 걱정되는 것일까.

“각하. 정말 절절한 사랑인가 봐.”

그는 내 비꼼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들었다. 웃는 얼굴 그대로 어느 때보다 빠르게 답하는 것을 보면.

“아시면 빨리 말씀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나름대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긴 합니다만, 오래가지 않을 것 같거든요.”

그래 보이기는 해. 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지금쯤 윌 영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을 아즈마리아가 아니었다. 내가 궁금한 건 모리타트의 진심이었다.

“어쩌다 그 애를 사랑하게 된 거야? 아무리 그래도 부인의 여동생이잖아.”

그의 목젖이 크게 울렁였다. 침 삼키는 소리가 귓가 바로 옆에서 울리는 착각이 들었다.

“응?”

재차 묻자 모리타트가 숨을 고르곤 대답했다. 평정심이 아직은 유지되는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눈이 갔습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애새끼 시절부터 그 애밖에 안 보였어요.”

“포기할 생각은 안 해 봤어?”

“포기가 안 됩니다.”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헨서웨이 백작의 머리도 들고 있는 사람이.”

모리타트는 조소했다.

“당신이 아즈마리아를 걸고넘어지지 않았더라면 혹시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날 배신했을 수도 있다는 소리인가?”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모리타트는 어떤 방식으로 마가렛 헨서웨이를 붙잡고, 헨서웨이 백작의 목을 따 왔을까? 그는 진정으로 유능한 자다. 윌 전 백작의 죽음도 그렇고, 쉽지 않은 부탁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 그것으로 모자라 아즈마리아를 걸고넘어가는 그럴싸한 꼬드김에도 술술 넘어갔다. 협상할 의지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날 돕기 위해 다가온 것처럼.

“거짓말. 나는 알아, 모리타트 잭. 너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못해.”

호박색 눈이 얇아진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언제부터였어?”

모리타트는 질린다는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안 지겹습니까? 분명 처음부터 아즈마리아에게 눈이 갔다고….”

“언제부터 빌힐름을 배신하고 리히튼에게로 붙었느냐고.”

높이 올라가던 모리타트의 목청이 단숨에 잦아들었다. 간간히 울리던 거친 숨소리가 멈추었다. 가늘어졌던 호박색 눈이 충격으로 크게 떠졌다.

“아니라고 거짓말할 생각 마. 이 세상에서 내게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존재하지 않아.”

그가 다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전에 없던 진득한 체념이 가라앉은 눈매에서 드러났다.

“그것도 미래를 보는 그 빌어먹을 힘으로 알아낸 겁니까?”

언뜻 자조하는 것처럼 들리는 음성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에는 떠본 거야. 한데 아무래도 잘 찍은 것 같지?”

모리타트의 흰자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나한 2세의 입관식에서 빌힐름의 눈에 비친 내가 저런 얼굴이었을 것이다.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 각하. 그 질문에만 대답하면 아즈마리아가 어디 있는지 알려 줄 테니까.”

우습게도 며칠 전 힐마르티노의 폭언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나와 빌힐름이 닮았다는 그 개소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리타트의 입이 열렸다.

“‘태양이 흐르는 강’ 서약이 체결된 지 수백 년입니다. 그 후손들이 영원히 선조의 의사에 반하지 않을 거라 여기는 건 멍청한 생각이지요.”

고작 두 문장에 불과했으나, 어쩐지 베르크네가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그 역시 이 건물에서 자신이 그렌페르크 제국의 황실인 레그윈 가문이 아니라 리히튼을 선택하게 된 사정을 밝히지 않았던가?

“베르크네 카이로가 그러하고 아즈마리아 윌이 그러했듯, 저도 제 나름의 선택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서약을 무효화하려는 선택을 말하는 건가?”

모리타트가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아그레인 양도 별채 지하에 무엇이 전시되어 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단지 아버지와 달리 레그윈 가문의 미친 짓을 납득하지 못했을 뿐입니다만…. 결과적으로는 아그레인 양이 말한 것과 유사한 뜻을 가지게 되었죠.”

“부인을 죽이겠다던 소리도 거짓이었나?”

“제 부인 또한 리히튼 공작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전우애를 나누는 사이라고나 할까요.”

하하. 이어지는 웃음은 웃음이라 표현하기 민망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모리타트는 리히튼이 내게 심은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단 한 번도 모리타트를 신뢰한 적 없었기에, 뒤로 넘어갈 만큼 놀라운 진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과연 빌힐름이 몰랐을까?

‘알았어도 모르는 체 했으려나?’

빌힐름은 자신의 턱 바로 아래까지 칼이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았어도 아는 대로 즐겼겠지. 그는 내가 리히튼에게 배신감을 느꼈으면 하지 않았을까? 사념을 뒤로한 채 모리타트에게 물었다.

“내가 각하의 부탁대로 그 부인을 죽였으면 어쩌려고?”

“글쎄요. 리히튼 공작이 그리 두었을 거라 생각되진 않는군요. 공작이 복수에 자비를 베풀지 않기는 해도, 도우려는 이까지 죽이는 인물은 아니라.”

글쎄. 그보다는 단순히 쓸모가 있어서 이용한다는 표현이 더 옳을 듯했다. 내 표정을 살피던 모리타트가 입술을 짓이겼다.

“아그레인 양.”

그건 재촉이었다.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 자신의 바람 역시 이루어 달라는. 나는 모리타트를 위해 준비한 거짓말을 능숙하게 내뱉었다.

“빌힐름이 아즈마리아를 암살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어. 그 애를 살리고 싶다면, 오늘 뜰 해가 지기 전까지 마차를 따라잡도록 해. 이왕이면 가는 길에 그 머리도 처리하고.”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모리타트는 눈짓 한 번 없이 내게서 몸을 돌렸다. 지금 당장 말을 타고 황성을 나갈 기세였다.

“아즈마리아는 반기지도 않을 텐데.”

이것으로 말은 이제 몸통만 남았다. 나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별채를 나왔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의 걸음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겨울 특유의 한기 역시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왔을 때, 문 앞에는 리히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유독 초췌해 보였다. 새벽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단정한 차림이었지만, 어딘가 하나씩 어긋나 있었다. 주름 없이 빳빳한 상의는 그대로였으나, 늘 걸치던 베스트는 보이지 않았다. 셔츠 한 장만 걸친 상의, 평소와 반대쪽으로 다듬어진 가르마…. 잉고르드의 하녀로 지냈던 시간이 없었더라면 쉬이 알아채지 못할 차이였다. 그래서 기분이 이상했다. 무엇이 그리도 불안했기에, 리히튼에게 스스로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일까? 그런 와중에도 어째서 나를 찾아온 것일까? 등불을 들고 선 그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모리타트에게서 전부 전해 들었나 봐. 그가 네게 이리도 충실한 개일지 몰랐는데.”

모리타트는 리히튼의 눈이며 귀였을 것이다. 내가 모리타트와 나눈 이야기는 물론, 모리타트에게 보인 행동 모두가 리히튼에게 전해졌을 터였다. 그러니 내가 오늘 안에 모든 일을 끝내려 한다는 소식 역시 그의 귀에 들어갔겠지. 나는 가만히 입을 닫고만 있는 리히튼에게 물었다.

“잉고르드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뭐야?”

리히튼은 여전히 나의 눈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에게 재차 물었다.

“단순히 내 곁에 남고 싶어서?”

어둠 속에서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의 눈동자는 희미한 청회색이 아닌 염화의 불길처럼 선명한 주홍빛으로 빛났다. 반사되는 홍색 등불의 빛이 마치 온전한 그의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면 빌힐름의 즉위를 막기 위해서?”

리히튼은 숨을 쉬는지도 미지수인, 그 어느 때보다 정적인 모습으로 내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잠시라도 입을 열어 소리를 뱉어 이 침묵을 깬다면 그것이 죄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눈은 마치 연인의 마지막을 살피는 듯했다.

“그것도 아니면, 이제껏 그래왔듯 내 마지막을 함께….”

목 안으로 거친 모래가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무겁게 닫힌 목구멍에 더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불씨처럼 고요하게 선 리히튼이 너무나 슬펐다. 목 안의 고통이 심장과 얼굴로 쏠렸다. 나는 더 이상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이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리히튼을 만난 후 확신했다. 그가 잉고르드로 돌아가지 않고 황성에 남은 이유는, 나의 마지막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리히튼은 내가 빌힐름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아는 아그레인 캐롤드는 늘 빌힐름과 죽음을 함께 해왔다. 그가 아는 아그레인 캐롤드는….

“울지 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흔들리는 시야 너머에 리히튼이 보였다. 그의 손이 내 뺨으로 다가오다가 코앞에서 멈춰 섰다.

“네가 우는 건 처음 봐, 아그레인.”

나는 리히튼의 손이 제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그의 손바닥 위로 뺨을 묻었다. 그제야 느끼지 못했던 눈물의 감촉이 살갗에 짓눌리며 선명하게 닿아 왔다. 단단한 엄지손가락이 내 눈 아래를 지긋이 쓸었다.

“아닌가? 어쩌면 묻힌 기억 저편에서 네가 한 번쯤은 울었을지도 모르겠군.”

“리히튼.”

리히튼이 다시 입을 닫았다. 비애와 허무에 젖은 시선이 내 얼굴을 느리게 훑었다. 눈, 코, 입 하나하나를 뜯어먹을 듯했던 예전의 기세가 아니었다. 그는 망막에 각인하듯 내 눈꺼풀의 움직임과 숨의 온기 전부에 집중하고 있었다.

“리히튼….”

곧 그의 눈이 닫혔다. 이미 모든 것을 내버린 표정이었다. 이만 포기하라고, 자신이 모든 것을 끝내겠다고, 빌힐름이 아닌 그를 선택하라는 설득도 없었다. 나를 길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리히튼은 내게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서, 나는 이미 빌힐름을 따라 열다섯 번째 죽음을 맞이한 뒤였다. 다시 눈을 뜬 그는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에게 다음은 없어, 아그레인. 이번만큼은 너의 죽음을 이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을 거니까.”

나오지 않는 말 대신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리히튼은 조금의 반항도 없이 끌려왔다. 숨이 닿을 거리가 되고 나서야 그의 눈동자가 제대로 보였다. 안개가 짙게 낀 호수처럼 오묘한 빛을 내는 청회색 눈동자가. 우리의 코끝이 맞닿았다.

“그 눈을 알아. 아주 익숙해. 너는 이미 모든 것을 결정했겠지…. 그 안에 나는 없을 테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나의 부정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리히튼은 홀린 듯 내게 입을 맞추었다. 거칠거나 열정적인 입맞춤은 아니었다. 닿아 오는 입술은 모래성 위를 걷는 발걸음처럼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짧고 빠른 숨이 아닌 느리고 깊은 숨이 나를 삼켰다. 감기지 않은 눈꺼풀의 아래, 축축한 눈동자 속으로 울고 있는 내 얼굴이 비쳤다. 리히튼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서 무거운 숨과 함께 움직였다.

“네 죽음은 내게 트라우마야.”

그가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겐 심장을 꿰뚫는 가시처럼 느껴졌다. 품에 갇힌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았다. 우리는 더 깊숙이 입을 맞추었다. 뜨거운 혀가 입 안을 옭아매듯 훑었다. 그의 몸이 내게로 더 바짝 붙자, 상체가 끌려 올라가 발의 뒤꿈치가 땅에서 떨어졌다. 미친 듯이 뛰는 리히튼의 심장소리가 나를 내리눌렀다. 거친 심호흡 사이에서 리히튼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비가 내릴 때마다… 악몽처럼 되살아나. 네 모든 마지막 순간들이….”

눈물은 어느새 멈춘 뒤였다. 그와 나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리히튼의 목소리는 땅 아래를 기어가는 것처럼 무겁게 짓눌려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이겨 내지 못할, 가장 고통스러운 정신적 충격을 통해서만 시간을 돌릴 수 있지.”

그래서 너는 나의 마지막에서 항상 눈을 떼지 못했던 거구나. 다른 것도 아닌, 오직 시간을 돌리기 위해서.

‘가장 고통스러운 정신적 충격….’

나의 죽음을 무려 열네 번이나 보아 온 그였다. 열네 번이나 봐 왔음에도, 리히튼에게 나의 죽음은 여전히 가장 고통스러운 충격인 것이다.

“그러니 가려거든 나를 죽이고 가.”

리히튼이 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지친 음성이 내 몸을 눌렀다. 아니야,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이 추호도 없어. 절대 그러지 못해.

“언제나처럼 너는 못 그러겠지만.”

그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텅 빈 눈이 긴 시간 나를 응시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 틈 속에서 나는 수백, 수천 번 입을 열기 위해 숨을 골랐다. 나는 죽지 않아. 하지만 이번에는 지금까지와 다를 거란 다짐이 죽어도 혀 위에 올라가지 못했다. 리히튼을 안심시키고 싶었으나 그리하지 못했다. 그에게 내가 지닌 살 의지를 보이고 싶었으나 보이지 못했다.

‘입 밖으로 내뱉으면 이루어지지 못하고 사라져 버릴 거야.’

안 돼. 나는 리히튼을 밀어내고 뒤돌아 달렸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 황성을 나갔다. 어느새 강해진 눈발이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내일 밤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당장 빌힐름과 얽힌 모든 일을 청산하고 이 지긋지긋한 관계를 끝마치고 싶었다. 끝마친 후에 리히튼과 마주 서고 싶었다. 더는 그런 표정을 지을 필요 없다고. 이기지 못할 고통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고. 추위는 극심했다. 나는 성 앞에서 보초를 서는 기사에게로 달려갔다. 머리 위의 눈을 털어 내는 팔을 잡고 협박하듯 명령했다.

“빌힐름 황자에게 올라가 전해. 지금 당장 별채의 ‘그 방’으로 찾아오지 않는다면, 아그레인 캐롤드가 목을 매고 죽어 버릴 거라고.”

그리고 ‘그 방’으로 향하기 위해 눈 속에 뛰어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늦게 쫓아온 기사가 내 어깨를 돌려 세웠다.

“캐롤드 영애, 잠시…!”

“손대지 마!”

나도 모르게 발작하듯 기사의 손을 치워 냈다. 움찔한 기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캐롤드 영애. 어떤 끔찍한 일을 겪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진정하시고….”

“진정할 거야. 경이 빌힐름 황자를 내게 데려오기만 한다면.”

“우선 성안으로 들어가 말씀을….”

“보호를 명목으로 날 끌고 간다면, 유서에 경의 이름을 적고 혀를 씹어 죽겠어.”

그러자 기사는 더 이상 내게 손을 뻗지 못했다.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빌힐름을 별채로 데려와. 가서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등불도 없었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 밤하늘 아래를 오직 본능에만 의존해 걸었다. 내가 기억하는 이 방향의 끝에 별채가 있기를 바라며.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그 방’ 안에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연결된 그 방에. 내 선조들의 머리가 전시된 그 공간 위 침실에.

타닥타닥.

벽난로의 나무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쥐고 있던 찻주전자를 내려다봤다. 내가 물을 어떻게 구했더라? …아아, 눈을 퍼 담아 사용했었지. 멈춰 있던 걸음을 다시 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두 개의 잔에 차를 따랐다. 채워진 첫 번째 잔을 상대방의 앞으로 천천히 밀어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들자, 맞은편 자리에 빌힐름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속삭였다.

“마치 헛것을 본 얼굴이야, 아그레인.”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가 꿈결처럼 몽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날 초대한 사람이 보일 표정은 아닐 텐데. 뜬눈으로 잠에 들었다가 깨기라도 한 걸까?”

빌힐름의 옅은 웃음이 수증기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끔찍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가 내 등을 쓸었다. 동시에 잠깐이나마 끊겨 있던 짧은 기억들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나는 방에 도착한 즉시 서랍 안에 마련된 장작으로 벽난로의 불을 켰었다. 그리고 쌓인 눈을 모아 물을 끓였으며, 장식장에 놓인 홍차로 차를 끓였다. 그 사이에 빌힐름이 나를 찾아왔다. 그래… 그게 전부였다.

“정말 꿈을 꾸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반대로 지금 이 순간이 꿈처럼 느껴지는 걸까, 아그레인.”

빌힐름의 손끝이 찻잔을 쓸었다. 그의 음성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명한 웃음이 배어 있었다.

“마땅히 그럴 만할 테지. 나 또한 너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지금이… 믿기지 않거든.”

머릿속이 점차 또렷해졌다.

“아그레인, 네가 결국 내 곁으로 돌아온 지금이 말이야.”

시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극도의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빌힐름의 추측대로, 선 채 꿈을 꾼 건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 벌어질 일을 눈앞에 그리자 머릿속이 텅 비어, 움직이지 못했을 뿐이다. 그가 무슨 말을 했더라? 딴 생각을 한 탓인지 빌힐름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하는 개소리는 며칠 내내 되새길 수 있을 만큼 내게 강렬하게 다가오곤 했는데.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화제를 끌고 오기 위해 무작정 아무 웃음이나 흘리곤 말했다.

“잊었어, 빌힐름? 내일이 다리 없는 말 경주를 하는 날이잖아.”

빌힐름은 대답 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처음으로 주도해 여는 모임인 만큼 꼼꼼하게 준비하려 했지. 귀부인들의 사랑을 받아야 앞으로의 황성 생활이 평탄하지 않겠어?”

“귀부인들의 사랑을 받는단 표현은 옳지 않아. 그들이 네 사랑을 갈구한다면 모를까.”

담담한 대꾸에 싱긋 웃어 보였다.

“그래, 네 말대로 귀부인들이 나의 사랑을 더욱 갈구하도록 멋진 모임을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뜨거운 차를 한입 삼키고 말을 이었다.

“말에 오를 사람들이 사라졌네?”

모리타트도, 헨서웨이 백작도, 윌 백작도. 이제 더는 황성에 없었다. 아니, 여전히 황성에 남아 있었으나 산 채는 아니었다.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듣고 있던 빌힐름이 입을 열었다.

“아그레인, 네 말은 헨서웨이 백작도 곧 이곳에서 사라질 예정이란 뜻이로군. 그렇지? 네가 본 미래에서? 아니면…. 이미 사라진 후인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너 정말 내 표정을 잘 읽는구나. 그 부분은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어.”

빌힐름은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축하해, 아그레인. 네 덕에 내가 다리를 모두 잃었군. 이제 어찌할까? 내가 어찌해야 네가 원하는 걸 모두 얻을 수 있지?”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른다.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 네가 죽어야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데.

“그런 선의는 필요 없어. 어차피 너는 더 이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끝날 테니까. 그게 리히튼의 바람이잖아? 이 세상에서 그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건 없지.”

“계속 해 봐.”

빌힐름은 내 말에 충분히 귀 기울일 마음이 있다는 듯 눈을 맞추었다. 그에 나는 진심을 담아 의문을 표했다.

“너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 거야, 빌힐름?”

황위조차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면, 숨통이 조여지는 와중에도 대체 무엇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어째서 발버둥치지 않아? 왜 내가 네 다리를 자르도록 지켜보기만 해? 왜 내 힘을 막으려 하지 않는 거지? 너는….”

무엇을 물어야 할까.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는 거냐고?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거냐고? 정말 내게 고통을 안기는 것만이 삶의 이유냐고?

“어린아이 같구나, 아그레인. 너는 어릴 때부터 그랬지. 목표를 위해선 그 무엇이든 불살라 버리는… 불나방. 어여쁘니 나방보다는 나비가 어울리겠어.”

나는 겨우 웃고 있던 낯을 포기하고 얼굴 근육에 힘을 풀며 대답했다.

“개소리하지 마.”

하하. 빌힐름이 소리 내서 웃고는 어쩔 수 없다는 양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네가 힘을 쓸 수 있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네 말대로 이 세상은 리히튼 잉고르드가 바라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지겹도록 능력을 사용해 오며, 그가 그리 설계해 두었으니까. …마치 신 같군.”

그의 손끝은 계속해서 찻잔을 매만지고 맴돌았다. 나는 애써 그쪽에서 눈을 떼 그의 뺨 근처로 시선을 고정했다. 빌힐름의 잔을 채운 홍차에는 내 혈액이 담겨 있었다. 덕분에 그가 아무렇지 않게 찻잔을 건드릴 때마다 등 뒤에 식은땀이 맺히는 기분이었다. 빌힐름이 차를 들이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가 이미 눈치챈 게 아닌가 싶어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 신에게도 과연 약점이 존재할까? 존재한다면 그건….”

이어서 빌힐름의 눈동자에 서린 감정은 눈에 띄게 무감각했다.

“누가 봐도 너일 수밖에 없어, 아그레인. 그는 자신이 만든 이 세상에서 오직 네 말에만 복종해. 네가 없으면 스스로 머리를 베고 죽을 남자지.”

나는 당연하다는 듯 주장하는 빌힐름의 발언에 반박할 수 없었다. 부정하기 힘들다. 리히튼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그동안 보아 온 과거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리히튼 잉고르드는 너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네 스스로도 잘 인지하고 있겠지.”

리히튼을 입에 담는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꽃피지 않았다. 자신의 관심사 외엔 언급도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빌힐름이 날 마주할 때만은 생기가 돌았다. 눈의 깜빡임과 두 손을 이용한 크고 잦은 반응이 가라앉았다.

‘주인을 맞이하는 개처럼.’

빌힐름도 그러한 사실을 알까? 알겠지. 아마 그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는 곧 의자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차에는 일말의 눈길도 주지 않고서.

“그렇다면 아그레인 캐롤드는 과연 어떨까? 그녀는 과연 리히튼 잉고르드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충만하고 영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할 테지.”

내 신경은 온통 그와 그의 앞에 놓인 찻잔으로만 향했다. 빌힐름이 이미 내 의도를 알아챘으면 어쩌지? 내 몸에 독이 돌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으면? 다른 이들에게 복수했던 방법으로는 그를 죽일 수 없는 걸까?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하지?

이번만큼은 몸도, 마음도 진정되지 않았다. 무언가에 계속해서 휩쓸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누가 내게 칼을 들이민 것도, 절벽 앞까지 내몬 것도 아닌데 마치 그런 상황에 처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빌힐름은 나의 이러한 불안을 알까? 그는 언제나 내 표정을 잘 읽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몰라야 했다. 모르길 바랐다.

“하지만 너는 나 없이 살 수 없어.”

그러나 여상한 미소가 떠올라 있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런 바람도 폭풍 앞의 들풀처럼 힘없이 뿌리 뽑히고 말았다. ‘너는 나 없이 살 수 없어.’ 그의 말이 옳았다. 빌힐름 조나단 레그윈이 없으면 나도 없다. 열네 번이나 반복된 시간 속에서 나는 빌힐름이 죽고 나면 미련 없이 생을 버리곤 했으니까. 나는 피곤한 눈가를 손등으로 내리누르며 입을 열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네 바람이겠지.”

정확하게는 그의 바람이길 바라는 나의 바람이었다.

“아그레인. 이제 인정해, 나는 네 삶의 이유야. 나는 네 인생의 주인이며 목적이고 네가 살아 숨 쉬게 하는 심장이자 폐야.”

“제발, 빌힐름.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려면 차라리 입을 닥쳐 줘….”

그의 말에는 오점이 없었다. 모두 내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 그 사실이 나를 이 방에서 도망치고 싶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도달하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용기였음을, 나는 아니까.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어, 아그레인.”

등 뒤로 다가온 빌힐름이 내 목을 다정히 매만졌다. 엄지는 내 귀 아래를 지그시 눌렀고, 검지는 내 턱 아래를 조심히 쓸었다. 조금의 악력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나는 숨이 막혔다. 젖어 든 낮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 리히튼 잉고르드는 나를 절대로 죽일 수 없을 거다. 그가 미쳐 사는 아그레인 캐롤드가, 빌힐름 조나단 레그윈 없이는 못 살아가니까. 그렇지?”

빌힐름은 내 팔을 끌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붉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핥듯이 훑었다.

“그래…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어. 너는 내가 만든 최고의 개야.”

뜨거운 입술이 손가락 안쪽을 천천히 더듬었다. 그가 고개를 꺾을 동안 홍련처럼 붉은 눈길은 내게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두 팔과 두 다리가 속박된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빌힐름이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송곳처럼 내 귓가와 심장과 머리에 박혔다.

“이 나를 허울뿐인 황제로 부릴 거라면 그리 하라고 해. 그렌페르크? 누구의 발아래에 있든 상관할 바 아니야. 내게는 너를 가진 것으로 충분하니까.”

내 목을 쓸던 뜨거운 손은 이제 내 뒤통수를 받치고 있었다. 나를 향한 그의 눈과 목소리와 날숨에서 숨겨지지 않는 욕망이 느껴졌다.

“나는….”

“네게는 오직 나만이 의미 있는 거야.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를 죽일 수 없을 테지. 그러니 나를 받아들이고 마음을 편히 해, 아그레인.”

파도가 나를 삼키기 위해 등을 굽혔다. 빌힐름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가치가 없으니….”

그의 온기가 내 입술 위로 떨어졌다.

“우리, 영원히 하나가 되자.”

벌어진 숨이 나를 삼켰다. 그는 오랜 인내를 지금 막 끊어 낸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내 입술을 탐했다. 호흡할 틈도 없었다. 떨쳐 낼 수 없는 단단한 힘이 나를 끌어올렸다. 머리와 허리 모두 완벽하게 빌힐름에게로 얽혀 들어갔다. 나는 반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빌힐름이 다시 한번 속삭이듯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그가 뱉은 나의 이름은 뜨거운 온기에 녹아 흩어졌다. 입 안을 헤집는 움직임이 점차 거칠어졌다.

이 순간 나는 이제껏 느끼지 못한 엄청난 흥분으로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마침내 빌힐름의 턱 아래로 칼을 꽂아 넣었다는 고양감이! 빌힐름이 나를 욕망해서 다행이었다.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마저 집어삼키길 원해서 미치도록 다행이었다. 공들여 준비한 쥐덫을 밟지 않아도, 알아서 걸려 들어오니까. 언제부터였을까? 내 몸을 가두고 있던 그의 두 팔에 힘이 빠졌다. 열기가 멈추고 입술이 떨어졌다. 용암처럼 들들 끓던 빌힐름의 눈동자가 찬물을 맞은 듯 딱딱하게 굳었다.

“아그레인.”

쉰 목소리였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의 음성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내내 얼어 있던 두 다리를 움직여, 빌힐름에게서 천천히 멀어졌다. 그의 숨이 점차 거칠어진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아, 드디어…. 입 안을 지배하고 있는 짙은 피 맛을 목 뒤로 삼켰다. 어금니에 짓뭉개진 입 안쪽 살이 아렸다. 날 부른 이후에도 빌힐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런 그를 대신해 내가 입을 열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절로 입이 열렸다.

“그렇게 나를 가지고 싶었니? 네 눈앞에서 열심히 재롱떠는 내가 그렇게 탐났어?”

도무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고통에 온몸을 뒤틀던 다른 이들과 달리, 빌힐름은 고요하게 멈춰 서 있었다. 너무나 고요해 언뜻 보면 사람과 닮은 동상처럼 착각할 정도였다.

“나를 가지고 싶었다면 계속해서 리히튼을 주시하고 끊임없이 발버둥 쳤어야지, 빌힐름.”

“…아그레인.”

“그를 끊임없이 견제하고 파헤쳐서, 내가 몸 안에 어떤 독을 삼키고 있는지 알아 두었어야지.”

대단해! 내벽과 장기가 녹는 와중에도 멀쩡히 서 있는 그에게 갈채를 보내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게 내 이름을 읊는 정신력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 정신력이 과연 어디까지 갈까. 지금부터 산 채로 녹아 가며, 아주 천천히 죽어갈 텐데.

“내가… 어떤 방식으로 황제를 죽였는가에 대해 끝까지 물어 늘어졌어야지. 응? 그랬어야지, 빌힐름.”

빌힐름에게는 충분히 그럴 기회가 있었다. 크로허츠 후작가에서 내가 쳄벨 자작을 테라스 아래로 밀던 장면도 목격한 그이지 않은가.

‘그리고 이런 빌힐름의 성정을 이용한 것 역시….’

모두 리히튼의 계획이었겠지. 전부, 이 모든 게. 빌힐름이 느리게 입을 벌려 혀로 입술을 쓸었다. 붉은 피가 입가에 번졌다.

“아그레인.”

세 번째 부름은 한숨과도 같았다. 이윽고 번들거렸던 그의 눈이 천천히 닫혔다. 빌힐름은 비틀거리듯 의자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몸을 기댔다. 그것이 끝이었다.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빌힐름의 끝.

“하, 하하.”

정말…. 끝이 맞는 걸까.

“아니야, 이렇게 끝일 리 없어.”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고양감이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그 빌힐름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리 없었다. 다나한 2세와 빌힐름은 다르다. 그는 잉고르드의 독을 제외하고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았는가? 황실의 적자는 어린 시절부터 독에 면역을 기른다고 했다. 제아무리 잉고르드 독의 존재를 몰랐다 하더라도, 이리 쉽게 눈감을 수 없었다.

“빌힐름.”

따라서 그는 곧 이따위 방법으로 자신을 죽이려 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몸을 일으킬 것이다.

“눈을 떠, 빌힐름.”

이가 갈렸다. 이런 순간까지 나를 조롱하려 하다니! 나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눈을 뜨라고! 아그레인 캐롤드가 아직도 너의 사랑스러운 개인 줄 알았어? 너의 사랑스러운 개라서, 네가 없으면 안 돼서 네게 돌아온 줄 알았던 거야?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네게 다시 복종할 줄 알았느냐고!”

나는 코앞에서 죽은 듯 쓰러진 빌힐름의 멱살을 쥐었다. 그의 몸은 무겁고 뜨거웠다. 굳게 닫힌 입가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럴 거였으면….”

손의 떨림이 심해졌다. 그가 찻잔에 손을 대지 않을 때보다도 훨씬 더 격한 떨림이었다.

“그럴 거였으면 끔찍했던 잉고르드에서의 가을과 혹독했던 황성의 겨울을 버티지도 않았는데….”

빌힐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죽어 가고 있었으니까. 심장이 멈춰가고 있으니까.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빌힐름이 죽는다. 하지만 당장 황성으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를 살릴 수도 있었다. 그를 살려야 하나?

“아아, 아니야. 멍청한 생각하지 마, 아그레인. 살릴 이유가 하등 없어….”

그럼 죽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나?

“그게 옳아. 그게 네 오랜 염원이잖아…. 그를 죽이고 황성을 나가자. 황성을 나가서….”

황성을 나가서, 그 다음은? 그 다음에는? 등 뒤로 차가운 벽이 닿았다. 나도 모르게 계속 뒷걸음질 치고 있었던 것 같다. 곧이어 무언가 발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진 물건의 정체는 새것처럼 먼지 하나 없이 빳빳한 융단이었다. 황실의 주인인 레그윈 가문의 휘장이었다. 몸을 돌려 휘장이 가리고 있던 벽을 올려다봤다.

“아.”

그곳에는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굽이치는 기다란 갈색 머리칼과 새하얀 얼굴. 부드럽게 웃고 있는 선명한 녹색 눈동자. 복숭아처럼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두 뺨.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숲의 배경까지.

그림 속에 앉아 있는 소녀는, 바로 나였다. 수잔이 아닌 내가 맞았다. 확실했다. 이 초상화를 그렸던 날의 기억이 흐릿하게나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빌힐름. 왜 하필 갈색 머리일 때 초상화를 남기는 거야?’

장마가 끝나고 하늘이 갠 지 얼마 안 된 날이었다. 늦여름의 끝에서 나는 빌힐름의 명령으로 아카시아 숲을 배경으로 몇 시간을 내리 앉아 있어야 했다. 힐 성으로 끌려온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였다.

‘이제 더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까. 그림으로라도 기록해 두어야지.’

빌힐름은 내 물음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눈알만 굴려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칼을 힐긋 바라봤다. 이 머리색은 순전히 빌힐름의 장난이었다. ‘수잔과 네가 정말 자매처럼 닮았을까?’ 에서부터 시작된 장난. 하지만 질문의 답에 대해, 빌힐름은 긴 시간 답을 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이 머리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어서 내 붉은 머리로 돌아가면 좋겠어. 그때도 초상화를 그려 줄 거지?’

‘아니.’

즉답과 함께 빌힐름은 가만히 책을 읽던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그리고 선한 웃음을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너는 죽고 나서도 이 힐 성에 묻힐 테니, 굳이 그려 둘 필요 없지. 그림이 아니어도 내 곁에 있을 거잖아?’

초상화를 그리는 황실 화가의 표정이 좋지 않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초상화를 위한 미소를 유지했다. 빌힐름은 내가 웃는 얼굴을 좋아하니까.

‘그래도 바다에는 가 보고 싶어.’

‘하면 바다를 그려 주면 되겠군.’

간결한 명령이었다. 이곳에서 나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는. 그 명에 굴복했다면 나는… 아마 내 선조들이 그러했듯, 그 작은 새장에서 평생을 보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머저리같이 굴지 말자. 황성을 나간 다음 같은 건 생각할 필요 없어. 빌힐름의 죽음에 불안해 할 필요 없다고. 그게 진정으로 내가 바란 거잖아.’

불안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차 머릿속에 선명해지는 얼굴이 있었다.

“리히튼.”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죽지 않아야 할 이유는 있었다.

‘리히튼이 나로 인해 회귀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해.’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만났던 리히튼의 파리한 낯이 떠올랐다. 그가 더는 나로 인해 닳지 않도록, 여기서 눈을 감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리 마음먹고 문을 열었다. 복도로 첫 발을 떼는 그 순간이 내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역이었다. 방을 나서자 빌힐름의 호위 기사가 허리를 숙였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위장하여 기사에게 명령했다.

“빌힐름 전하께서는 지금 막 잠드셨다. 근래 많이 피곤하셨던 듯해. 내가 다시 찾아와 전하를 깨우기 전까지는 문도 두들기지 말도록.”

“예.”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까지, 그의 죽음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몇 번이나 참았는지 모르겠다. 별채를 나온 직후에는 걸음을 빨리해 미친 듯이 뛰었다. 눈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와중에도 등에 땀이 났다. 눈 위에 새겨지는 발자국이 내가 황자의 살인범임을 알리는 듯해 마음이 졸았다.

‘어디로 가야 하지?’

당장 떠오르는 이름은 리히튼이었다. 나와 함께 동쪽 숲에 갇혀야 했던 그. 나를 위해 열 번이 넘도록 시간을 되돌린 그. 하지만 내 다리는 리히튼이 아닌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리히튼의 얼굴을 그리면서도, 나의 목적지는 이미 다른 곳으로 정해져 있었다. 나는 곧장 문을 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임에도 방의 주인은 의자에 앉아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그레인?”

방의 주인, 비비안느는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즉시 몸을 일으켰다. 맑은 두 눈동자에는 당혹스러운 감정이 한가득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무슨…. 안색이 좋지 않아, 어서 안으로 들어와.”

급히 다가온 비비안느가 안절부절못하며 내 어깨를 더듬었다. 나는 벌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어 대답했다.

“비비안느. 내가 빌힐름을 죽였어.”

“뭐?”

잘못 들은 건가, 싶은 얼굴이었다.

“무언가 잘못 안 걸 거야. 그가 죽을 리….”

한참 동안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비비안느는 금세 제정신을 차렸다. 이전에 본 적 없는 냉랭한 시선이 내게 물었다.

“빌힐름의 시체는?”

“별채에. 기사가 방을 지키고 있으니 들키는 건 금방이야.”

나는 왜 리히튼이 아닌 비비안느에게로 왔을까.

‘어차피 비비안느를 통해서 그도 알게 될 텐데.’

하지만 무서웠다. 내가 살아감으로써 변하게 될 리히튼과의 관계가. 정확히 왜 두려운 건지는 모른다. 이제는 모른다는 사실마저 두려웠다.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비비안느는 이내 천천히 등을 돌렸다.

“바라던 대로 당신을 쓸모 있게 사용할 수 있겠군요, 킨 경.”

“…킨?”

비비안느의 목소리는 나 이전에 그녀가 맞이하고 있던 손님에게로 향했다. 한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영 이상하다. 그가 이곳에 있을 리 없는데. 그러나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온 남자는, 내게도 충분히 낯익은 인물이었다. 눈에 띌 정도로 큰 신장과 선명한 적발, 짙은 눈썹에 짧은 턱. 비록 내가 알던 장난기 있는 얼굴은 아니었으나, 남자는 킨이 분명해 보였다.

“킨, 네가 어떻게 여기에…?”

그는 다소 허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탈하면서도 무언가 진득이 후회하는 듯한, 고통스러운 눈이었다. 킨이 대답했다.

“너는 몰랐겠지만… 빌힐름 황자가 황후 내정자를 맞이했단 소문이 잉고르드의 저택 앞까지 자자했지. 나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확인해야만 했어. 리히튼 공작 각하께선 내 동행을 마뜩잖게 여기시니, 도착한 즉시 비비안느 전하에게 들른 거다.”

“소문?”

“캐롤드 가문의 아그레인이 차기 황후에 오른다는 소문.”

킨의 음성은 몹시 지쳐 있었다. 단기간에 잉고르드로부터 황성까지 달려온 탓일 터였다.

“한데 설마 네가….”

킨은 긴 한숨과 함께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니, 이런 소릴 할 때가 아니지. 너는 마차를 타고 황성을 벗어나도록 해. 그리고 오늘 일은 잊어.”

고개를 튼 그가 비비안느에게 말했다.

“전하, 제가 아그레인을 대신해 빌힐름 황자의 시해범이 되겠습니다.”

“안 돼.”

곧장 거부했으나 비비안느는 아니었다. 그녀가 손짓하자 방 안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내게 달라붙었다. 이럴 순 없어. 이러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나는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안 돼, 비비안느. 킨은 나와 아무런 관련 없어! 그를…!”

기사의 거친 손이 내 입을 막았다. 나는 그렇게 억지로 황성 밖까지 끌려 나가, 준비된 마차에 구겨 넣어졌다. 손아귀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손을 치워 내고 킨에게 외쳤다. 그는 내가 아는 잉고르드의 기사, 킨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을.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마, 킨!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빌힐름은 황위에 오를 사람이야. 그를 시해했다는 죄를 덮어쓰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그는 쌓인 피로에 벌게진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 덮어쓰지 않으면 안 돼. 황자가 죽은 날, 황자를 독대하자마자 황성에서 사라진 널 모든 사람이 의심할 거야.”

“의심하라고 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지옥 끝까지 도망갈 테니까.”

대답을 들은 킨의 얼굴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그는 심장에 화살을 맞은 양 괴로운 얼굴이 되어 소리쳤다.

“멍청한 소리 좀 하지 마, 아그레인! 황실 기사단이 널 쫓으면 넌 도망칠 수 없어. 일주일, 아니 나흘도 되지 않아 잡힐 거란 말이다!”

“차라리 그게….”

몸이 휘청거리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킨이 내 몸을 껴안은 것이다.

“제발, 제발 아그레인.”

내 어깨를 감싼 손길이 애절했다.

“이번에는 내가 널 지키게 해 달라는 소리야…. 이렇게 말해도 모르겠어?”

나에게는 네 보호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리 말하고 싶었으나, 어째서인지 목구멍이 열리지 않았다. 이상했다. 리히튼이 아닌 비비안느를 찾아온 것도 그렇고, 내 마음과 몸이 반대로만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가만히 킨의 가슴에 기대어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킨은 거의 울고 있었다. 그의 소리 없는 울음에서 비참함이 느껴졌다. 추위에 얼어붙은 팔이 자신의 품 안으로 나를 더 깊숙이 끌어안았다. 킨에게선 날 리 없는 오래된 라벤더 향이 났다. 캐롤드 저택의 정원에서 키우던 그 라벤더의 향이.

“지금까지로 충분해, 아그레인. 너는 할 만큼 했어. 캐롤드를 지킬 만큼 지켰다고. 나도 캐롤드의 일원이야. 이제는 내가 네 오라비 노릇을 하게 해 줘.”

충분하다고? 충분하지 않아. 네가 돌아왔어도 아버지와 가솔들은 모두 불에 타 죽었잖아. 나는 캐롤드를 지키지 못했어. 다 죽었단 말이야.

“아니야. 네 말은 틀려, 아그레인.”

킨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고 있던 걸까. 그는 곧 외투를 벗어 내 머리와 등을 덮었다. 들이닥치는 눈이 그의 외투 위로 녹아내렸다.

“충분해. 아니, 충분하다 못해 넘쳐서 내가 돌아온 거야. 그러니 어서 멀리 떠나.”

마차가 닫히기 전, 크고 차가운 손이 내 뺨을 쓸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캐롤드로 돌아와 줘.”

기다릴게. 그 한마디를 끝으로 마차의 문이 닫혔다. 회색 눈이 비바람처럼 불던 그날의 새벽. 나는 늦가을에 홀로 황성에 들어왔듯, 한겨울에 홀로 황성을 떠났다.

그해 겨울 중에서 가장 추운 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