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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4. 수잔 (16/24)

Episode 14. 수잔

[제인을 돌려 줘.]

바위에 쇠가 긁히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찻잔을 들여다봤다. 잔잔하던 표면에 파문이 인다. 마른하늘에서 하나둘,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그레인.]

비비안느가 나를 불렀다. 그제야 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시선이 향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몰려오는 먹구름 아래에,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 더벅머리를 한 마른 몸뚱어리가 서 있었다. 두 팔과 두 다리는 크고 작은 상처들로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몸뚱어리의 주인, 리히튼이 재차 요구했다.

[제인을 돌려 줘.]

제인이 누구더라? …아아. 먼지에 쌓여 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리히튼의 소중한 그 하녀를 말하는 거구나. 오래 전에 내버려서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그 하녀. 그날부터 며칠이 흘렀더라. 한 달… 한 달이 흘렀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의자에서 일어나 리히튼에게 다가갔다. 비비안느와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던 때였다. 따라 일어선 비비안느가 등 뒤에 서서 내 팔을 꽈악 잡아 당겼다.

[아, 아그레인….]

그녀는 무언가 몹시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상관 않고 리히튼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뒤늦게라도 나를 찾아온 건 몹시 기뻤지만, 보름이 흘렀음에도 그 하녀를 잊지 못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애는 널 기다리다가 죽었어. 외로워서.]

[개소리 지껄이지 마.]

[개소리? 내가 그런 가치 없는 목숨으로 왜 개소리를 해?]

리히튼이 그녀를 노려봤다.

[제인은… 너 같은 미친 계집애는 몰라, 제인의 목숨은 가치 없지 않아.]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리히튼은 제인의 죽음에 분노하고 있었으나, 그 분노가 순전히 제인을 위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려 한 달이 흐른 후 찾아오지 않았는가?

[너 지금 나 가르치니?]

[너처럼 정신 나간 계집애를 가르쳐서 뭘 하겠어?]

[말을 참 서운하게 하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시기가 있기는 했지. 한, 일주일 정도.]

이곳에 처음 왔던 일주일. 이제는 적잖은 시간이 흘러 제대로 상기할 수도 없는 과거였다.

[일주일도 너무 길었어. 그 일주일이 내 삶에서 가장 무가치한 시간이었거든….]

[네가 어떤 정신 나간 삶을 살아 왔었는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아. 닥치고 제인을 내놔.]

[왜?]

리히튼은 그다지 간절하게 보이지도 않았고, 그의 지친 음성은 오히려 매달리기 위한 매달림처럼 느껴졌다. 그가 제인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한데 그 애착이…. 아하, 그래. 제인이 아닌 본인을 위한 애착인 거야?

[도대체 왜 그 쓰레기한테 그렇게 절절한 거니? 그 애가 널 빌힐름에게 갖다 판 돈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던 건 알아?]

대답이 없다. 그런 사실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이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이 확실해 보이는 흐리멍텅한 눈이었다. 장담컨대 저 눈동자보다 흙탕물에 섞여가는 빗물이 더 투명할 것이다.

[리히튼, 너 내 생각보다 굉장히….]

병신 같구나. 정말로. 그의 한심한 얼굴을 그만 보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 그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에게는 곧 죽어도 리히튼이 필요했다. 관에 갇히더라도 리히튼과 비비안느를 양손에 쥔 채 갇힐 것이다.

[제인을 잃은 게 그렇게 고통스럽다니… 좋아. 내가 그 대가를 받으면 되겠지.]

정원 테이블로 돌아가 식기를 집어 들었다. 파운드케이크를 자르기 위해 놓여 있던 나이프였다. 나는 나이프를 리히튼에게 내밀었다.

[찔러.]

멍청했던 청회색 눈동자에 미세한 빛이 스쳤다. 하. 리히튼의 헛웃음은 이제껏 그에게서 들었던 목소리 중 가장 컸다.

[아, 아그레인.]

비비안느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음성으로 내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나에게는 그녀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안 찌르고 뭐해? 네가 원하는 답을 못 들려 줬잖아.]

눈앞의 리히튼이 무엇이라도 하길 바랐으니까. 물론,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제인과 함께 그 행복한 새장 속에 갇혀 있을 때처럼. 내게 하나뿐인 애착 인형, 제인을 빼앗겼을 때처럼.

[그게 너의 문제야.]

번뜩이는 은색 날을 따라 추락하는 빗물을 응시했다. 더 이상의 실망감은 없었다. 그저…. 순간, 흐물흐물했던 머릿속이 마법처럼 맑아졌다. 지금이었다. 그래, 지금이라면 미래를 볼 수 있어. 잠시라도 망설인다면 다신 오지 않을 기회였다. 손끝의 떨림이 심장을 흔들 정도로 빨랐고, 머릿속이 핑 도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포기할 순 없었다.

나이프가 나를 관통했다. 아, 아, 아그레이인! 비비가 목청을 높여 울었다. 성 안에서 놀고먹고 있을 하녀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내밀 정도로, 날카로운 외침이었다.

[봤지? 리히튼.]

빗줄기가 거세졌다. 차갑게 식어가는 공기가 무색하게 전신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어, 어떡….]

비비안느가 박힌 나이프를 뽑으려 했다. 나는 사랑스러운 바보의 손을 겨우 밀어냈다. 이걸 빼서 피가 멈추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나의 귀여운 비비안느는 생각이라는 게 없다니까.

[그 애는 오직 널 이용하기 위해 네 곁에 남았지만, 나는 아니야.]

발아래가 포도주를 쏟은 것처럼 붉었다. 리히튼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봐. 나는, 널 위해서라면 그 애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읏, 흑. 아그레인, 제발!]

날 잡아끄는 비비안느의 악력은 턱없이 약했다. 그녀는 빗물 때문인지 울음 때문인지 모를 일그러진 얼굴로 뛰어 나갔다. 시종이라도 데려와 날 끌고 갈 심산인 듯했다. 상관없다. 나는 내 목표만 이루면 되니까.

[이건 오직 널 위한 거야, 리히튼… 널 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온 세상에 나밖에 없어. 진심이야, 이건.]

리히튼에게 다가갔다. 걷기가 쉽지 않았으나 더 대단한 일을 해내야 하는 내게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리히튼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지만, 그렇다고 나를 피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훨씬 사람처럼 보였다. 백금발 뒤로 낯선 안광이 보였다. 썩은 동물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느껴졌다. 그의 눈이 이토록 마음에 드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진심을 다해서 입을 열었다.

[‘우리’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걸게. 그러니까 날 선택해.]

그리고 세상이 뒤집어졌다. 빗물로 습했던 시야가 암전되며 귀가 막히고 눈이 막혔다.

아, 드디어! 나는 환호했다. 이게 몇 년 만에 보는 미래인지! 그러나 나의 환희는, 눈앞에 나열되는 일련의 미래들을 확인한 후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

꿈에서 깬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정신 차릴 수 없었다. 처음으로 미래라는 것을 봤다. 아니, 보기 전에 잠에서 깨어나기는 했으나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미래를 봤다. 그리고 나의 예상이 맞다면, 미래를 보는 방식은 몹시 폭력적이고 비인도적이었다.

‘지금 당장 확인해 볼까.’

한차례 고민이 일었으나 결국 실행하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보다 훨씬 겁쟁이였다. 의지 하나만으로 내 몸에 구멍을 뚫을 수 없단 뜻이었다. 나타샤, 아니 발레리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며칠간 죽은 듯 앓아야 할 테니 당연했다.

똑똑.

“들어와.”

이른 시간부터 시종이 찾아오는 건 드문 경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비비안느를 멀리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들어온 시종은 멀찍한 거리에 서서 말했다.

“조나단 부인께서 사냥에 초대하셨습니다.”

“몇 시?”

“오후 네 시입니다.”

“알겠다고 전해라.”

시종이 허리를 깊이 숙이고 방을 나갔다.

‘그 여자가….’

이런 식으로 적극적일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내게는 지금 당장 그녀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날 돕겠다고? 순수한 동정에서 기인한 호의라면 이용할 가치가 충분했다. 실제로 내게 도움이 될지 모를 일이지.

정오에도 날은 흐렸다. 다만 어제까지 내내 불이 꺼져 있던 별채가 오늘은 밝았다. 흐릿한 하늘 아래에서 드문드문 밝혀진 창이 노랗게 빛난다. 갑작스러운 일정이 생겼다며, 약속을 취소했던 빌힐름. 그런 빌힐름과 만나게 된 별채.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관심 없었다. 다만 내게는 가만히 두고 볼 마음 역시 없었다. 도착한 후원에는 이전과 달리 꽤 많은 사람이 보였다. 이 사이에 아즈마리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서 빨리 총성을 울리고 싶었다. 나는 안면도 없는 사람들 틈을 지나 조나단 부인 옆에 섰다. 조나단 자매는 신장이 유독 커 개미 떼들 사이에서도 눈에 잘 띄었다.

“오늘은 꽤 어여뻐 보이는군요.”

답지 않은 첫인사였다.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그녀가 장갑을 끼는 와중에 덧붙여 말했다.

“귀족 아가씨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어여쁜 건 아니니까. 특히 올해처럼 황자 전하의 옆자리가 비어 있는 해는… 별별 꼴을 다 보게 되죠.”

“다들 볼 만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저 앵무새 깃털을 머리에 꽂은 여자가? 비위가 강한가 봅니다. 아니면 관심이 없다던가.”

조나단 부인은 총구를 든 채 한 바퀴 크게 돌았다. 뒤 쪽에 오순도순 모여 차를 즐기던 여자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그러나 목소리만 조금 작아졌을 뿐, 자리를 피하지는 않았다.

“왜 겁을 주세요?”

나의 물음에 조나단 부인이 대답했다.

“흩어졌으면 싶은데 통하지 않을 것 같군요.”

“부인을 쫓아다니는 건가요?”

“비비안느 전하의 총애가 한 방향만을 향하니, 아쉬운 아기새들이 내 곁에 모이는 겁니다.”

그녀를 따라 총을 들었다. 항상 숲 방향만을 보며 사냥감을 맞췄는데, 황성을 향하려니 이상하게 더 흥분되는 느낌이었다.

“부인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말을 완전히 이을 수 없었다. 총구 끝의 인물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히튼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저분이 잉고르드 공작 각하셔.’ 잠시나마 고요했던 후원에 큰 파문이 일었다. 꽤 먼 거리임에도 불과하고 여자들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내 지척까지 들리는 듯했다. 짐짓 아무렇지 않게 총을 내렸지만,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리히튼은 젊은 신사 서너 명과 함께 모여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다가왔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부인, 이러려고 날 부른 건가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사람을 잘 못 믿으시나 봐요.”

“아아. 황성에서 지내다 보면 누구든 그리 되지.”

조나단 부인은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 날 빌힐름에게서 구해 주겠다고 한 주제에, 리히튼의 사람이란 주장은 믿지 못하는 그녀였다. 비쩍 말라 죽어 버린 화원 사이를 가로질러 오는 리히튼은 그야말로 그림 같았다. 묶지 않은 화려한 패턴의 긴 머플러가 바람에 펄럭였음에도 눈에 보이는 건 얼굴밖에 없었다. 거리가 좁혀지자 그의 눈이 날 훑는 게 느껴졌다. 우리 사이에는 잠시간 아무런 말도 오고가지 않았다. 그가 내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잘 지내나 봐.”

비스듬히 보이는 옆 시야로, 조나단 부인의 미간이 구겨지는 게 보였다. 내가 극존칭이라도 할 줄 알았나 보지. 공교롭게도 나는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힐끔 내 총을 내려다 본 그가 말했다.

“어울려.”

“총이?”

“한 몸 같기도 하고.”

그와 재회하면 어떤 대화가 오고갈까? 근래에 잠이 들기 전마다 수십 번 상상하곤 했었다. 그 안에 총과 내가 어울린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에 총신을 살짝 쓸었다.

“낯빛이 다시 창백해졌군.”

잉고르드의 독을 가리키는 것일 터였다.

“그러라고 준 거 아니야? 친절하게 엽서까지 보내가면서.”

나는 발레리아가 꾸준히 받아 온 엽서의 발신자가 그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리히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세상일이란 게 생각하는 것만큼 마음대로 돌아가지는 않지.”

그 말이 다름 아닌 리히튼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우스웠다. 그의 세상은 그의 생각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오자마자 날 찾아오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우연히 만나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라 여기지는 않는 건가?”

“리히튼 잉고르드라면 그럴 만해. 뒤에서 날 몰래 훔쳐보는 걸 좋아하잖아?”

그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날씨만큼이나 냉랭하고 건조했던 얼굴에 처음으로 색이 드러났다.

“못하는 말이 없어졌군.”

그리 말하는 리히튼은, 어쩐지 그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꿈속의 그가 떠올랐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어리숙한 티를 풀풀 내던 그 청년이. 몸도, 얼굴도, 표정도, 모든 게 달라졌는데 그때의 그와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리히튼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수잔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들을 해 왔을까.

“두 분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은 몰랐습니다.”

조나단 부인이었다. 그녀는 한쪽 눈썹을 미세하게 구부린 채 내게 말했다.

“마치 어린 시절부터 함께 어울려온 친우 사이를 보는 느낌이군요. 리히튼 각하께서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닌데.”

“그러실 분이 아니란 말씀의 저의는?”

“누구에게나 항상 선을 지키신다는 의미지요.”

리히튼을 바라봤다. 조나단 부인이 언급한 ‘선’이 무엇일지는 명명백백했다. 크로허츠 영지의 연회에서 보았던 리히튼은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누구에게나.

“두 분이 어떻게 가까워지신 건지 궁금하네요. 각하께서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아그레인 양을 언급한 적이 없으신데.”

“특별한 사이죠. 비록 제가 빌힐름 전하의 사람이기는 해도.”

조나단 부인을 향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이 말은 전하께 비밀로 해 주실 거죠?”

“아그레인.”

날 부르는 목소리는 조나단 부인이 아닌 리히튼에게서 들려 왔다.

“잊은 것 같아 말해 두는데… 네 자유는 내가 베푼 기회다. 설마 네 스스로가 얻은 거라 생각하고 있지는 않겠지.”

나는 입을 닫았다. 칼을 베어 문 말과 달리 리히튼의 시선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뭐라도 할 것처럼 나간 것치곤 일 년 만에 돌아온 황성은 그대로군. 적잖이 실망스러워.”

담담한 그와 다르게 내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대로라서 실망스럽다니. 그는 내가 황제의 목을 날리길 바라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오래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아두길.”

무언가 미련이 남은 눈이었다. 하지만 리히튼은 끝끝내 그 미련을 버리고 등을 돌렸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리히튼은 나를 협박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미적지근하게 굴다간 잉고르드로 데려가 버리겠다고.

“이제 믿으시겠어요, 부인?”

“…아그레인 캐롤드.”

조나단 부인은 진심으로 알 수 없다는, 속 깊숙한 곳에서 배어 나온 진정한 의문을 내보였다.

“그대는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입니까?”

어디서 뭘 하다가 왔냐고?

“이상한 질문이네요, 부인… 나는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어요.”

그야말로 웃음 짓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지 않은가. 내 집은 이곳, 황성이다.

“당신들이 몰랐을 뿐.”

나는 무언가를 하다 온 게 아니라 돌아온 것이었다.

***

사냥이 끝난 후에는 금방 날이 어두워졌다. 리히튼과 재회한 탓인지, 멍하니 뜬눈으로 저녁을 지새우다가 침대에 누웠다. 내가 실망스럽다고?

“실망이라.”

인정한다. 황성에 온 후 나는 그저 잃기만 했다. 애초에 얻은 것이 있기는 했던가?

‘킨이 내 핏줄이라는 것 하나 정도 알아내기는 했지.’

과거의 나는 달랐다. 그때의 나는 결국 원하는 대로 황성을 벗어났고,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서 있도록 만들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당시의 내가 그만큼 간절했던 걸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그만큼 간절하지 못한 거구나.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황성에서 지낸 지 고작 몇 달이 흘렀을 뿐인데, 잉고르드를 막 나서며 벼리고 있던 내 칼날은 이미 반쯤 이가 빠진 상태였다. 물론 이대로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 필요한 게 뭘까?

‘동기?’

나는 나를 알지만 완전히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나는 퍼즐 조각이 듬성듬성 빠진 미완성의 작품에 불과했다. 과거의 내가 겪어온 기억에 공감하고, 지금의 나를 만든 자들에게 복수심을 불태우면서도 시간이 흐른 뒤 남은 건 허무함밖에 없었다. 왜일까? 설마 지쳤다거나.

‘아니야, 나는 지치지 않았어.’

그래, 이건 과정에 불과했다. 나는 지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건 오직 나를 되찾는 것과 복수하는 것, 그리고…. 그리고.

‘아아.’

이런 고민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내일 해가 뜨면 또 무뎌질 텐데. 나는 눈을 감았다. 기이하게도 아주 긴 밤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휘이이익.

아주 긴 휘파람이었다. 저 멀리 창공을 날던 매가 방향을 틀어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나는 남자의 팔뚝만한 매의 두 다리가 서서히 내려와 팔에 안착하는 광경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쳐다봤다. 매의 부리는 내 주먹보다 커다래 보였다.

[각하께서 네게 주신대.]

고개를 틀었다. 내 양쪽 어깨를 꽉 잡은 킨이 정수리에 턱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 매 말이야.]

[저렇게 큰 거 나는 못 다뤄.]

[일이 년만 지나면 네가 훨씬 커질걸.]

[원칙대로라면 내가 아니라 네가 먼저 받아야지.]

머리가 흔들렸다. 킨이 열심히 웃는 중인가 보다.

[나이는 내가 많아도 적녀인 네가 먼저 배우는 게 옳아.]

[나는 매 같은 거 필요 없어. 너나 키워.]

[각하께서도 어렸을 땐 그렇게 생각하셨대.]

[됐대도.]

킨은 별것도 아닌 데서 꼭 나를 먼저 챙기려고 한다. 꼴에 오라비라 이건가? 하지만 아는 건 내가 더 많은걸? 나는 킨이 매를 먼저 받은 후에 새로운 아기 매를 받을 거다. 이미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아버지에게도 그리 말해 둘 생각이었다.

겨울이었기에 해가 금방 졌고, 저녁 식사 시간도 빠르게 찾아왔다. 큰 저택에 가족이라곤 덩그러니 셋뿐이라, 우리의 식사 시간은 언제나 조용했다. 세 명밖에 없는 식탁이었으나 허전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사용했을 때는 무서울 정도로 넓게 느껴졌던 것 같은데, 작년 초 킨이 들어온 이후부터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가족이 함께 둘러앉은 식사 시간을 가장 사랑하게 되었다.

[킨의 말 잘 듣고.]

[아, 정말!]

한데 오늘은 결국 짜증을 참지 못하고 식기를 내려놨다. 내 예의 없는 태도에도 아버지는 눈을 한 번 흘겨 뜰 뿐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그만 좀 당부하세요. 그 말만 열 번째야!]

[그걸 다 셌어?]

맞은편에 앉은 킨이 눈치 없이 내게 물었다.

[세고 싶어서 센 줄 알아? 귀에 딱지가 앉겠어!]

[식사하면서 소리 지르지 말거라, 아그레인. 네가 자꾸 그런 식으로 말을 안 들으니 이 아비도 같은 소릴 반복하는 게다.]

콧김을 강하게 내뿜고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집었다. 아버지는 늘 옳은 말씀만 하셔서 대꾸하기가 힘들다. 작게 웃던 킨이 나를 타일렀다.

[내일부터 열흘 동안 자리를 비우시잖아. 각하께서 걱정하실 만도 해.]

저건 정말.

[너는 맨날 아버지 타령이야. 꼬박꼬박 각하라고 부르는 주제에. 아버지가 그렇게 좋으면 같이 황성 구경이라도 가지 그래.]

킨의 얼굴이 머리칼만큼이나 눈에 띄게 붉어졌다. 누가 들으면 좋아하는 여자애가 고백이라도 한 줄 알 것이다.

[말을 곱게 써야지, 아그레인.]

딱 잘라 말씀하신 아버지가 킨에게 시선을 돌리셨다.

[킨. 이제 각하라는 호칭은 그만 쓰거라. 일 년이 흘렀는데 아버지라 부를 때도 되지 않았느냐.]

킨이 당황하는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한두 번 들은 소리도 아니면서 늘 저렇게 당치도 않다는 반응이다. 생각이야 뻔했다. ‘나 같은 놈이 어떻게….’ 정도 되겠지.

[당장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바뀌겠지요.]

[그 말만 일 년이란 소리라구, 바보야.]

[너도 슬슬 킨에게 경칭을 써야지. 누가 오라비에게 그리 방정맞게 군단 말이냐?]

이번에는 내가 딱 잘라 말했다.

[나보다 수학도 못하는 오라비는 오라비 아니야.]

킨은 글도, 수학도, 그림도, 음악도 전부 이곳에 와서 처음 배웠다. 나이는 킨이 많아도 배움은 늘 내가 앞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를 핑계로 항상 킨에게 말을 놓았다.

[제가 어서 수학을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킨은 바보같이 착해서 불만을 가지지 않는걸. 나는 모르는 척 익은 생선살을 꼭꼭 씹어 먹었다.

아버지가 캐롤드를 떠난 후, 캐롤드의 하늘은 한창 맑았다. 보통 이 시기의 날씨가 평탄하면 새해가 지난 후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나는 차라리 그리하길 바라고 있었다. 황성처럼 먼 거리는 날씨가 얄궂으면 오고 가는 길에 큰 사고가 나기 부지기수라, 이제 막 길을 떠난 아버지가 사고에 휘말리는 일만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안 그래도 사람이 적은 저택이었다. 아버지마저 안 계시면 한겨울 캐롤드 저택에 감도는 적막감은 배가 된다. 나는 킨의 방을 찾아갔다가 그의 방이 비었음을 확인하고 서재로 향했다. 킨이 방에 없을 때는 대개 기사관에서 수련을 하거나 서재에서 책을 읽는데, 날이 어두우므로 전자보다는 후자에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니나 다를까, 킨은 서재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옆으로 다가가자 기겁하며 옆으로 물러섰다.

[왜 그렇게 놀라? 이상한 거 봐?]

내 얼굴을 확인한 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킨은 잠시 불편한 낯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그레인. 혹시 이 집에 너 말고….]

무엇이 문제인가 싶어 그가 한참 바라보던 서책을 확인했다. 캐롤드의 가계도였다. 길게 이어진 뿌리 그림의 끝에 세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그레인과 킨, 그리고….

[아. 수잔을 말하는 거구나.]

수잔. 이름으로만 접한 존재.

[내 쌍둥이야. 지금은 죽고 없어.]

[쌍둥이? 네게?]

킨이 눈에 띄게 놀란 얼굴을 했다.

[몸이 약해서 태어나자마자 죽었대. 나만 건강하게 태어났었나 봐. 얼굴도 모르는 언니의 기운을 다 먹고 자란 건가.]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아그레인.]

별 생각 없이 뱉은 말인데, 킨의 반응은 진지했다. 나는 기록된 것이라곤 가계도에 쓰인 이름이 전부인 ‘수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어머니에게도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 같아. 시름시름 앓다가 내가 태어난 지 백 일도 안 되어서 돌아가셨다고 들었어.]

슬픈 이야기지만, 딱히 슬플 거리가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 그들의 죽음이 남아 있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킨은 자신이 그러한 불행을 겪기라도 한 듯 무거운 눈으로 입을 꾹 닫고 내 머리를 쓸어 내렸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웃음이 터졌다.

[엄마 없는 건 너도 똑같으면서.]

[그렇기는 하지만, 네게 쌍둥이가 있었을 줄은 몰랐어.]

[수잔이란 이름 예쁘지? 내 성격이 이렇게 괴팍하니, 그 애의 성정은 엄청 살갑고 고왔을 거야. 아버지께 말씀드린 적은 없지만 꿈에서도 몇 번 만났어. 내가 상상한 그대로의 모습이더라. 물망초 향이 날 것 같은 청초한 숙녀에,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조곤조곤하고….]

꿈속에서 그 애를 만나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대화만 해도, 다음날의 해가 훌쩍 뜨곤 했다. 수잔의 꿈을 꾸면 늘 그러했다. 생일날에는 아버지에게서 늘 다른 선물 두 개를 받았다. 하나는 내 것이고, 하나는 수잔의 것이었다. 생일날 밤에는 수잔의 선물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었다. 꿈속이든 어디든 그 애가 잘 받았기를 바라면서.

[수잔이 있었다면 우리도 조금 더 재밌었을 텐데.]

[너만큼 나를 좋아해 줬을까?]

[누구라도 킨을 좋아할걸. 너는 잘생기고 키도 큰 데다 착하고 잘 웃잖아. 조금 바보이기는 해도.]

[네게 그 바보 같단 소릴 안 듣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지 모를 거야.]

[우리 가정교사 말이야, 킨. 너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게 분명해. 보는 눈빛이 나랑은 다르다구.]

킨이 질린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 좀 제발 그만 해, 아그레인. 지겹지도 않아?]

[하지만 사실인걸.]

[그 아가씨와 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알았어?]

어울리지 않게 단호한 어투였다. 어차피 놀릴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는데 그렇게 화낼 일인가 싶었다. 심지어 거짓말도 아닌데 말이야.

[수수한 건 킨의 취향이 아니구나?]

[하여간.]

[알았어. …그런데 수잔 이름 위에 그려진 이 그림은 무슨 의미야?]

킨이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가계도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림은 언뜻 점처럼 보일 만큼 아주 작았지만, 꽤 섬세했다. 자세히 살피니 태양이나 별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한 명씩 있네. 나랑 킨에게는 없어. 다 여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에게도 없었으나, 선조를 타고 올라가면 한 세대 하나씩은 반드시 그려져 있었다.

[글쎄.]

[나 이런 거 궁금해서 못 참아. 아버지가 오면 물어 보자.]

킨이 드물게 냉소적인 표정을 보였다.

[각하께서 알려 주실 것 같진 않으니, 너무 기대하진 마.]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마치 자신은 그 이유를 알고 있기라도 한 양.

그날 밤은 이상하게 잠이 안 왔다. 달이 유독 크고 밝아 방 안이 낮처럼 환했기도 환했지만, 수잔을 생각하느라 눈이 감기지 않았던 것 같다. 유독 그런 날이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고, 뜬 눈으로 해가 뜨길 기다려야 했다.

***

이튿날 저녁. 회색빛 하늘에서 함박눈이 흩날리는 날씨를 뚫고 아버지가 귀성하셨다. 정해진 일정보다 이틀이나 빠른 귀환이었다.

[아그레인!]

지도를 구경하다가 잠깐 졸았던 것 같다. 비몽사몽한 기분으로 엎어져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의 부름이 점차 가까워 졌다.

[아그레인!]

[나 여기 있어요.]

숨이 거칠다. 당장 느껴진 것은 나를 쥔, 거친 손이었다. 그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버지의 그런 얼굴은… 단연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확신컨대 아버지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굉장히 두려워하는 듯했다.

[시간이 없다. 어서 빨리 나갈 채비를 하거라.]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이었고,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를요?]

아버지는 대답 없이 등을 돌리셨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 방에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내 겨울옷과 눈에 보이는 잡화들을 커다란 가방 안으로 구겨 넣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 저도 황성에 따라 가나요?]

아버지는 대답 없이 가방을 채우는 데 급급해 보이셨다. 돌연 불안해졌다. 딱딱하게 굳은 아버지를 향해 연신 이유를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

나는 아버지의 손에 죄인처럼 끌려갔다. 후문을 나가자 낡고 추레한 마차가 보였다. 저 멀리서 킨이 외투도 챙겨 입지 못한 채 뒤따라 나왔다.

[각하.]

마차가 점차 가까워져 갔다.

[각하!]

미동도 없는 고개에 킨이 이를 악물며 다시 한번 외쳤다.

[아버지!]

그제야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쳐다봤다. 새하얀 입김보다, 코앞에 마주한 아버지의 낯이 더 창백했다. 킨이 물었다.

[무척 불안해 보이십니다. 황성에서 무슨 일 있으셨던 겁니까? 아그레인을 어디로 데려가시려고요?]

잠시간 말이 없던 아버지는 킨의 등 뒤로 집사가 도착한 즉시 입을 여셨다.

[너도 따라 와라, 킨. 해리! 누군가 아그레인의 행방을 묻거든 지독한 중풍에 걸려 의원을 찾으러 나갔다고 전해. 방문을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아주 위독한 상태였다고.]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나는 무엇이 아버지를 괴롭히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멀거니 마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네 시간을 달려 산기슭 아래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그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낡고 작은 목조 건물이 우리의 목적지였다.

[너는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거다, 아그레인.]

[왜요?]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가방을 열어 짐을 꺼내기 바쁘셨다. 계속되는 답답함에 점차 화가 나기 시작했다.

[사흘에 한 번씩 사람을 보낼 테니 식사는 걱정하지 말거라. 창고에 들어가면 올해 겨울을 나기에 충분한 장작이 쌓여 있으니, 아끼지 말고….]

[제가 왜 여기에서 지내야 하냐고요! 설마 지금 절 버리겠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머플러를 꺼내던 손이 멈추었다. 몹시 무거운 침묵이었다. 그 침묵 끝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수잔이 죽었단다.]

이 시점에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름이 나오다니. 나를 놀리고 계시는 걸까?

[그 애는 아주 예전에 죽었잖아요. 제가 태어났던 까마득한 과거에요.]

[아니, 아니야… 살아 있었어. 너는 모르겠지만 그간 수잔은 황성에서 지내고 있었다. 사흘 전까지는.]

[왜요?]

왜요. 정말 살아 있어요? 왜 살아 있어요?

[왜 황성에서 지내요? 내 쌍둥이잖아요. 우리의 집은 캐롤드에 있는데.]

[아버지.]

그때, 벽난로에 기름을 부어 막 불을 지핀 킨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례한 질문인 걸 알지만… 아그레인을 이곳에 데려오신 게 설마 『태양이 흐르는 강』과 연관되어 있는 겁니까?]

나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킨의 말에 긍정이라도 하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서재를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드는데, 네가 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구나.]

킨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버지가 내게 말씀하셨다.

[아그레인. 우리 캐롤드의 핏줄에는 저주가 걸려 있다. 건국부터 시작된 아주 오래된 저주이자 마법이고, 악몽이지….]

저주?

[한 세대에 한 명이야. 우리는 선조 대대로 황성과 언약하여, 가문을 종속하는 대가로 한 세대에 한 명의 아이를 바치기로 했단다. 저주 받은 아이를 말이다.]

[그 저주란 게 뭔데요?]

되묻던 나는 이내 고개를 뒤흔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런 건 궁금하지 않아요…. 그럼 수잔은요? 수잔은 황성에서 행복하게 잘 살았나요?]

잘 열리기만 하던 아버지의 입이 녹슨 쇠문처럼 다시 굳게 닫혔다.

[왜 죽었어요? 캐롤드 후작 가문의 영양으로서 잘 대우 받다가 갑자기 죽은 거예요? 대답 좀 해 봐요, 그렇게 벙어리처럼 입 닫고 있지만 말고!]

[아버지.]

킨 역시 아버지를 불렀으나 한 차례 고개를 저은 아버지는 무릎을 굽혀 나를 당겨 안으셨다.

[미안하구나. 시간이 없어, 아그레인.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해….]

아버지는 몸도 마음도 이상하리만치 급해 보이셨다. 당신께서는 내 어깨를 으스러지게 안은 후 급히 몸을 떼어내 꽉 닫혀 있던 문을 여셨다. 몰아치는 눈보라가 킨의 발등을 적셨다.

[너라면 분명 이 아비의 마음을 이해할 거라 본다. 그럴 게 분명해.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다오. 이게 널 위한 일이야.]

그리 말한 아버지는 무언가에 홀린 듯 등을 돌리셨다. 그대로 가 버리는 거야? 나를 여기에 이렇게 두고? 반사적으로 뛰어나가 아버지를 쫓았다.

[아버지! 아버….]

[아그레인.]

그때, 앞으로 쏘아진 내 몸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힘이 있었다.

[아그레인? 진정해, 쉬이…. 괜찮아, 나를 봐. 이건 널 위한 거야.]

킨의 따뜻한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무언가 결심한 듯 단호한 그의 얼굴에 나는 여기서 그만 체념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정확히는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오직 하나라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널 보호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걱정하지 마, 내가 꼭 데리러 올게. 나를 믿지?]

[못 믿으면?]

[아니야, 아그레인. 나는 반드시 널 데리러 올 거야. 우리는 이제 서로가 하나뿐인 남매잖아.]

킨은 한참동안 날 껴안았다. 등 뒤에서 부는 문 밖의 눈보라가 차갑다. 나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땐 마른 장작 냄새가 나는 넓고 어두운 실내 안에 홀로 놓여 있었다. 혼자가 되었다. 나는, 이 지독한 겨울의 한가운데서 오롯이 혼자였다. 겨울의 밤은 끔찍하리만치 길었다.

홀로 갇혀 지내려니 그 사실이 더 확연하게 와 닿았다. 첫날에서 둘째 날은 침대에 누워 종일 잠만 잤다. 사흘째가 되는 날부터는 아버지와 킨이 걱정되어 하루 종일 창밖만 내다봤다. 그리고 나흘이 흐른 어슴푸레한 새벽. 문 앞에 나와 보니 급히 휘갈겨 쓴 쪽지가 걸려 있었다.

<걱정하지 마렴. 금방 데리러 가마. 위에서 세 번째,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짧은 쪽지였으나, 나는 나흘 만에 처음으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위에서 세 번째.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암호인 걸까? 나는 하루 종일 그 쪽지를 붙잡고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남는 게 시간이라, 그 뜻을 해석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책장 앞에 서서 암호가 가리키는 위치에 꽂힌 책을 꺼냈다. 책 사이에는 오래되어 노랗게 착색된 서신들이 끼워져 있었다. 나는 맨 앞에 놓인 서신을 꺼내 읽었다.

<건강하다니 다행이야. 약속 받은 아이는 보름 내로 태어날 예정이라고 들었네. 그때까지 부디 아그레인과 벨을 잘 돌봐 주게.>

벨은 오래전 죽은 친모의 애칭이었다. 나는 다음 서신을 펼쳤다.

<벨이 불안해하는 마음은 나도 십분 이해하네. 이제 막 아그레인이 태어났으니 더욱 그러하겠지. 이틀 안에 벨의 유모를 한 번 보내겠네. 그녀가 안정되는 데 도움을 줄 거야.>

다음 서신.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 벨이 캐롤드의 추악한 저주를 알게 된다면… 아니, 그 진실은 벨을 안정시키기는커녕 더 불안하게 할 걸세. 내 마음을 이해해 주게.>

자신을 이해해 달라.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과 똑같지 않은가? 나는 이 서신의 발신자를 알 것 같았다. 지금의 필체보다 더 힘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아버지가 보낸 서신들임이 분명했다. 네 번째 서신에는 이전과 달리 빳빳하고 두꺼운 종이가 접혀 있었다.

<…87년, 열한 번째 시도의 실패. 잉고르드 가문의 힘과 캐롤드 가문의 힘은 황실에 흡수할 수 없음.

90년, 황실은 캐롤드와 잉고르드에 매 세대 첫 번째 후계를 바칠 것을 명했으며 불복 시 반역으로 간주.

92년, 서약, ‘태양이 흐르는 강’을 작성.

100년, 당해 탄생한 장녀 휘슬리 캐롤드를 황실로 보냄.

113년, 당해 탄생한 장녀 베네트릭 캐롤드를 황실로 보냄.

136년, 당해 탄생한 장녀….>

나는 떨리는 손으로 두 번째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 언급되어 있던 그 서약서였다.

<1. 캐롤드 가문은 그렌페르크 제국의 태양이 될 것을 맹세한다.

2. 캐롤드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힘은 오직 국가를 위한 봉사에만 사용할 것을 맹세한다. 이때의 봉사는 황실에서 규정한다.

3. 이를 위해 후계자를 황실에 바칠 것을 맹세한다.

4. 후계자의 양육권을 포기할 것을 맹세한다.

5. 후계자의 처우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6. 거짓을 고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7. 위반 시 황실의 처분에 따를 것을 맹세한다.

8. 이 모든 사항은 비밀로 지킬 것을 맹세한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수잔이 황실에 보내졌는지. 어째서 아버지가 그 사실을 내게 숨겼는지.

[그 힘이란 게 대체 뭐기에….]

얼마나 대단하기에 황실에서 무려 열한 번을 흡수하려 시도했던 걸까? 얼마나 두려웠기에 죄 없는 어린 아이들까지 빼앗아간 것일까? 복잡해지는 감정을 뒤로한 채 나머지 서신을 펼쳤다. 남은 건 고작 두 개. 그러나 몇 줄 되지도 않는 다섯 번째 서신을 읽은 후에는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약속된 아이가 태어났다고 전달 받았네. 내일 오전에 바로 그곳으로 보내도록 할 예정이야. 잊지 말게. 보내질 아이는 우리 캐롤드 가문의 장녀이며, 아그레인의 자매이자 후계자야.>

설마. 나는 허겁지겁 마지막 서신을 펼쳤다.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과 다르게 손가락 끝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보내질 아이의 이름은 수잔으로 정했네. 다시 말하건대 절대 잊어서는 안 돼. 장녀는 수잔이야. 수잔과 아그레인은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캐롤드 가문의 적녀이며, 황실에는 아그레인이 아닌 수잔이 보내지게 될 거야. 내가 보낸 서신은 모두 정리하여 언급해 둔 책 사이에 보관해 두게.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되네. 아이가 도착하면 이틀 후에 캐롤드로 돌아오게.>

툭.

손 안에서 떨어지는 서신들을 황망한 기분으로 내려다 봤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니, 차라리 그러길 바라는 심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파.]

따끔거리는 느낌과 함께 옅은 피 맛이 났다. 꿈이었으면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은 현실이었다.

[수잔.]

얼굴도 모르는 그 애가 떠올랐다. 막연하게 나와 비슷할 거라 여겼었는데, 이제는 그조차도 아님을 안다. 수잔과 나는 완벽한 남이었다. 그 애는 나를 대신해 도축당한 최고급 돼지처럼 황실에 팔려갔다. 다행인 건가? 이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날부터 나는 몇 날 며칠 동안 서신만 기다렸다. 하지만 사흘이 흐르고 나흘이 흘러도 기조는 보이지 않았다. 멈춘 눈보라가 다시 불기 시작해도 그때와 같은 쪽지가 도착하는 날은 없었다. 그렇게 캐롤드를 떠나고 열흘이 흐른 늦은 밤.

똑똑.

알 수 없는 손님이 찾아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읽고 있던 책의 내용은 머릿속에서 저 멀리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이자 같은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똑똑.

[킨?]

이상하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숨이 가빠지며 오감이 예민해지는 게 느껴졌다. 머지않아 문이 열렸다. 하늘이 어두워 문 너머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들려오는 것은 오직 바람 소리만이 전부였다. 그때, 문 밖에서 무언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실내로 굴러 들어왔다. 머리였다. 내 발 앞에 도달한 그 머리는, 다른 누구의 머리도 아닌 아버지의 머리였다.

[아.]

나는 너무 놀라면 소리도 나지 않는단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두 팔을 뻗어 아버지의 머리를 안았다. 아버지의 머리는 무겁고 딱딱했으며 눈을 뭉친 것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버지.]

왜 머리만 왔어요? 내게 분명 기다리라고 말했잖아요.

[아아. 가엾은 내 누이.]

등불이 걸어 들어왔다. 다른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느릿하게 가까워진 걸음이 나를 향해 천천히 등을 숙였다. 노란 불에 일렁거리는, 눈보다 하얀 낯이 평화로운 미소를 그려냈다. 그 천사 같은 얼굴에서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공포를 느꼈다.

[혼자 남겨진다는 건 참 외로운 거야. 그렇지?]

[빌힐름.]

[모두가 그렇게 말했으니 아마 누이도 그럴 테지. 혼자 남겨진 고독 말이야.]

빌힐름과의 인연은 황제의 탄생연에서 고작 서너 번 만난 게 전부였다. 그때마다 빌힐름은….

[왜 다를까?]

그래, 그게 그런 뜻이었어. 나를 볼 때마다 물었던 저 질문의 의도가 바로 그런 의도였던 거야. 등불을 내려놓은 빌힐름이 무릎을 구부리고 나를 쳐다봤다.

[왜 다를까… 라고 생각했지. 연회에 참석한 누이를 볼 때마다 말이야. 항상. 매일. 왜 아그레인과 수잔은 다를까? 수잔은 갈색에 가까운 적발을 가졌는데, 아그레인의 머리칼은 왜 살아 숨 쉬는 불꽃처럼 선명한 적발일까. 수잔은 윗입술이 두꺼운데 아그레인은 왜 얇을까. 수잔은 손가락이 짧은데 아그레인은 왜 손가락이 길까.]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운 빌힐름의 손이 내 오른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불에 덴 듯 깜짝 놀라며 그에게서 손을 뺐다. 하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건 그만 이리 줘. 아니면 방에 장식이라도 해 둘 생각이야?]

그가 팔을 뻗었을 때 나는 아버지의 머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빌힐름이 고개를 숙여 내 얼굴을 확인했다. 눈앞이 흐릿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다.

[울지 마. 네 머리 아니잖아.]

개새끼.

[이게 아닌가? 미안해, 아그레인. 살면서 누구를 위로해 본 적이 없어서. 네 머리가 떨어진 사과처럼 땅을 구르는 일은 없을 거야.]

나는 양쪽 귀를 막고 울었다. 아버지가 죽은 게 슬퍼서 우는 건지, 그가 두려워서 우는 건지, 킨이 걱정되어 우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서 숨쉬기가 버거웠다. 그러다가 문득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의 죽음을 조롱하는 빌힐름을 용서하기 싫었던 것 같다. 손에 잡히는 족족 그에게 내던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빌힐름에게 양쪽 손이 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돌아가자. 집에 데려가 줄 테니.]

[놔.]

[너도 마음에 들 거야. 그랬으면 좋겠어.]

[놓으라고!]

[너무 슬퍼할 필요 없어, 아그레인. 네 오라비가 너를 기다려.]

발버둥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봤다. 내 시선을 의식한 빌힐름이 고개를 돌려 다정한 미소를 보였다.

[어서. 착하지?]

머리 위로 차가운 눈발이 떨어지고, 등 뒤로는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킨. 제발, 킨은….

[내가 갈게.]

[어디를?]

[내가 수잔을 대신하면 되는 거잖아. 맞지? 그렇지? 내가 황성으로 갈게. 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어, 제발 킨을….]

[알았으니 어서 마차에 올라. 재회는 누이가 움직여야만 가능하니까.]

빌힐름은 마치 생기 있는 인형처럼 느껴졌다. 아름답고 자상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으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나의 슬픔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했고, 이해할 마음도 없는 듯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텅 빈 괴물이 사람을 흉내 내는 것 같아서.

마차를 타는 내내 두고 온 아버지의 머리가 잊히질 않았다. 빌힐름은 눈을 감고 있거나 혹은 창밖을 봤다. 그러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면 짧게 웃었다. 나는 무슨 희망을 갖고 있었던 걸까? 빌힐름이 나와 킨만은 용서해 주리란 희망이었던 걸까? 기나긴 길을 건너 마차의 문이 다시 열렸지만, 나는 내릴 수 없었다. 은하수 아래의, 활활 타오르는 저택에서 눈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불이 꺼지면 누이의 오라비를 볼 수 있을 거야. 하녀도, 시종도, 유모도.]

매캐한 탄내가 뇌를 흔들었다. 타오르고 있다는 점만 빼면 마차를 둘러싼 모든 풍경이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었다. 여자가 항아리를 기울고 있는 백색 분수대, 겨울잠을 자고 있는 라벤더, 은색 정원 테이블…. 저것들이 모두 불타면 내게 남는 것은 없다. 나는 굳은 몸을 일으켜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킨!]

푹푹 파여야 할 눈이 반쯤 녹아내려가고 있었다. 누군가 내 팔목을 잡아챘다. 거칠게 손을 휘둘렀으나 나머지 손 역시 꼼짝없이 잡히고 말았다.

[이거 놔, 킨! 킨이…!]

몸이 뒤집혔다. 발버둥을 쳤으나 힘에 부쳐 휘청거리다가 눈밭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그레인 캐롤드.]

새까만 밤하늘 아래로 빌힐름의 적안이 보였다. 타오르는 불길에 그의 안면과 눈동자가 노란빛으로 일렁였다.

[그거 알아? ‘진짜’는 불사에 가까운 육체와 미래를 보는 눈을 지닌다는 걸.]

그의 눈빛은 너무나 평온해, 마치 다른 세계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너는 과연 진짜일까, 아그레인?]

[…킨을 살려 줘.]

[차차 알아 가면 되겠지. 서로 교감하고… 애정을 쌓으면서.]

[제발, 킨을… 유모를… 사람들을….]

불길에 거대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하늘 위로 검은 연기가 한 층 더 커다랗게 타올랐다. 그가 두려웠다. 내게 처음으로 완연한 무력감과 공포, 공허함을 선사한 빌힐름이 마치 죽지 않는 악마처럼 보였다.

[모든 것을 불태웠으니 처음으로 돌아가자, 누이. 내 옆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누이가 있어야 할 그곳에서.]

하얀 손이 내 뺨을 쓸었다. 축축한 물기가 그의 손에 닦여 나갔다. 멈추지 않는 울음으로 숨을 내쉬기가 버거웠다. 그런 나를, 빌힐름은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포옹했다.

[나는 네가 그 가짜처럼 고장 나지 않길 바라.]

***

추웠다. 꿈에서 깨어난 직후, 나는 관 속에서 일어서는 기분을 만끽했다. 차가운 겨울 땅 속에서 오랫동안 죽어 있다가, 다 썩은 시체가 되어 눈을 뜬 기분. 그 기분은 단순히 개 같다는 일차적인 감상만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몰려오는 공허함과 후회, 분노에 다시 관이 닫히길 바랐다.

내가 아버지였다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버지처럼 자식을 대신할 희생자를 바쳤을까? 반역자로 몰려 멸문될 위기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렇다면 아버지에게 나라는 존재는 캐롤드 가문의 존속보다 더 귀중했다는 의미일까? 아버지의 머리를 끌어안았던 그 감각이 아직도 두 팔 안에 생생했다. 싸늘했던 감촉을 되새기자 파도처럼 밀려오던 상념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아버지는 결국 죽었다. 식솔들은 모두 산 채로 불태워졌으며 수년이 흐른 후 나는 황성으로 돌아왔다. 무엇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한 황실에 복수하기 위해서.

며칠 만에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머릿속이 또렷해지고 전신에 혈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그날, 나는 황성에 온 이래 가장 화려하게 몸을 치장했다. 이건 일종의 의식이자 의지였다. 향과 색, 그리고 빛으로 완전히 무장하여 그 어떤 공포에도 이정표를 잃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이정표를 따르기 위해서는 미래를 알아야 하며,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지금이 딱 좋은 시기야. 지금 해야 해.’

지금이라면 그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차갑게 굳어 있던 아버지의 머리와 겨울밤을 불태우던 캐롤드 저택의 모습이 내 두려움을 희석시켰다.

‘하지만 너무 어지러웠어.’

출혈하는 상태로 정신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발레리아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자상을 내는 것은 멍청한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방을 나섰다. 손님들로 소란스러운 황성의 공기가 피부로 와 닿았다. 고작 하룻밤이 흘렀을 뿐인데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느껴졌다. 이 역겨운 곳에서 하루하루를 멍청하게 소비했던 어제까지의 내가 혐오스러웠다. 시종의 도움을 받아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 왔다. 동시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방을 나왔다. 베르크네였다. 나를 알아챈 그의 눈이 살짝 커졌지만, 이내 늘 그랬듯 금방 평정심을 찾았다.

“이렇게 보니 캐롤드의 혈통이란 소리가 거짓은 아니었던 것 같군.”

어떤 의미인지는 뚜렷했다.

“출신을 외양으로 판단하시나 봐요.”

“눈에 보이는 것은 단순히 외양만이 아니다, 아그레인. 그 사람이 지닌 기질과 성품, 특히 움츠리고 있느냐, 아니냐 정도는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지.”

“어떤 말씀인지 알 것 같아요. 적어도 제가 움츠리고 있지는 않단 뜻이겠죠.”

그가 살피는 눈으로 내 얼굴을 훑었다. 오래간만의 재회에 반가워한다거나, 반대로 불편해 하는 기색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는 베르크네의 그런 점이 좋았다.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늘 한결같은 얇은 벽이 내 마음을 편하게 했다.

“한 계절도 흐르지 않았는데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군.”

“안 바뀌는 게 더 놀라운 일 아닌가요? 이곳에서 저는 황자 전하의 손님인걸요. 계단을 청소하던 한낱 하녀는 이제 없어요.”

“황성에 살면서 신분이 상승한 하녀나 집시쯤은 나도 많이 봐 왔다. 그들은 바뀐 게 아니라 바뀐 척했을 뿐이야.”

“그럼 이게 진짜 저인가 보죠.”

살짝 일그러져 있던 베르크네의 눈썹이 서서히 누그러지며 평온을 되찾았다. 그가 원한 답이기라도 했던 걸까? 힐끔 문을 응시한 베르크네가 말했다.

“안에는 아즈마리아 윌도 있다.”

“알아요. 목소리가 들렸어요.”

“귀가 좋군.”

그야 잉고르드의 독에 중독된 상태니 좋을 수밖에.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긴 후, 베르크네는 통로를 돌아 사라졌다. 그의 걸음은 황성의 시종들만큼이나 곧았다. 베르크네도 원래는 황성의 사람이라 했었지. 그는 황성을 방문할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할까. 그리울까? 아니면 껄끄러움을 느낄까. 시종이 나의 방문을 알리기 전에 문을 열었다.

“아, 아가씨….”

방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마치 잉고르드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만끽했다. 긴장한 낯으로 차를 들이키고 있는 아즈마리아와, 멀찍이 떨어진 창가에 몸을 기대고 있는 리히튼. 그 곁에 선 힐마르티노와 조나단 부인을 제외하면 퍽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제는 조나단 자매마저 익숙해졌지만.

“…수잔?”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건 아즈마리아였다. 아니, 반겼다기보다는 경계하는 눈치가 만연한 것을 봐선 내가 한 번쯤 이곳을 찾아올 거라 확신하고 있었던 듯했다. 리히튼이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동안 그 옆에서 대화를 나누던 힐마르티노가 헛웃음을 지었다.

“저거는 시건방짐이 하늘을 찔러.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미는 걸까? 혹시 묫자리 확인하러 온 거니?”

“힐.”

조나단 부인이 힐마르티노를 나무랐다. 그러나 누가 나무란다고 하여 욕을 멈출 여자는 아니었다.

“이래서 얼굴만 쓸 만한 것들은 예뻐해 줄 가치가 없어. 그렇게 발정 난 공작새처럼 꾸미고 오면 넘어가줄 줄 안 거냐?”

말하는 꼴 하고는. 나는 아즈마리아의 건너편에 앉은 즉시 눈을 치켜떴다.

“언제 나를 예뻐해 줬다고 그래?”

“네 목숨이 무사한 게 그 방증이란다.”

“사람을 낙마시키는 게 조나단 가문에서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인가 보네. 너무 끔찍해서 빌힐름이 울고 가겠어.”

빌힐름을 언급하자 힐마르티노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 제 적은 없다는 듯 망나니처럼 구는 여자가 빌힐름 앞에서는 아닌 티를 내는 게 재밌었다. 이해했다. 미친 것들에게도 급이 있기 마련이니까. 찻잔에 차를 따르고, 식기 위로 잘린 케이크를 옮기는 내내 아즈마리아의 눈은 내게 박혀 있었다. 그녀의 열렬한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하는 기분이라 반응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안녕, 아즈마리아. 잘 지냈니? 너는 정말 겁도 없구나. 그 점은 본받을 만해.”

“고맙군요. 그쪽은 잘 지내나 봐요.”

“덕분에.”

아즈마리아는 의식적으로 내게서 눈을 틀었다. 언행을 최대한 조심하려는 게 느껴졌다. 리히튼은 나의 방문에 놀란 기색 없이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홍차를 한 입 마신 후 그를 불렀다.

“리히튼.”

대답을 대신하듯, 그의 짙은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였다.

“네가 필요해서 왔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것도 심지어 탐탁지 않은 사람들만 용케 모여 있지 않은가? 조나단 자매와 아즈마리아라니. 여기에 빌힐름만 들어온다면 기름을 두르고 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다면 사람들을 물려 줄래?”

탁. 창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흘러 들어오던 겨울바람을 봉쇄한 리히튼은 팔을 뻗어 커튼을 끌어 내렸다. 소음 속에서 아즈마리아의 턱없다는 헛웃음이 들려왔다.

“이래서 천출은.”

아즈마리아가 저런 말도 할 줄 아는 여자였던가? 나는 그녀의 유리알처럼 맑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하기는, 소설 『태양이 흐르는 강』 속의 빌힐름과 실제 빌힐름도 같은 인물이라 보기 어려우니까.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아즈마리아보다 눈앞에 앉아 있는 아즈마리아가 그녀의 본성에 더 가까울 수 있겠다.

“황실에서 몇 달 지냈다고 당신의 지위가 공작 각하를 웃도는 줄 아는 건가요?”

내게 아즈마리아의 비난은 투정처럼 들렸다. 그래서인지 화는커녕 가소롭지도 않았다.

“너는 말을 너무 비약적으로 해, 아즈마리아. 부탁이라는 건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든 할 수 있는 거야.”

“나는 당신에게 하대를 허용한 적이 없어요.”

“나도 알아.”

아하하! 어디선가 커다란 폭소가 터졌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힐마르티노의 경박한 웃음소리임은 자명했다.

“흐흥. 아그레인은 맹랑한 게 매력이긴 하지. 설마 리히튼 각하 앞에서까지 그럴 줄은 몰랐지만.”

그때, 아즈마리아의 새하얀 낯 위로 짙은 의문이 드리워졌다.

“아그레인이라고요?”

그녀는 나의 얼굴을 한 번, 그리고 힐마르티노의 얼굴을 한 번 확인했다. 이윽고 아즈마리아는 힐마르티노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곤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그게 무슨….”

“너. 너 맹랑하다고.”

나의 대답을 아즈마리아는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마지막 커튼이 닫히자 방 안은 깊은 동굴 속에 갇힌 것처럼 어둡고 고요해졌다. 리히튼은 말없이 등불을 켰다. 그의 발걸음 소리만 울리는 와중에도 방을 벗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조나단 부인은 오히려 내가 어떤 부탁을 할지 무척이나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리히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들이 전부 남아 있어도 상관없어. 조금 남사스러울 것 같기는 하지만.”

리히튼은 고개를 틀어 내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킥킥 웃은 힐마르티노가 내가 앉은 소파의 옆자리로 몸을 던졌다.

“각하. 오늘 오후는 제게 시간을 할애한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질세라 뱉어진 아즈마리아의 발언에 힐마르티노가 내게 속삭였다.

“재밌어라. 저 아가씨보다는 우리 예쁜이가 한 수 위인가 봐. 쯔쯧, 겁이 나서 제 입으로 바짓가랑이를 붙잡네.”

아즈마리아의 눈빛이 절벽 앞으로 밀려난 것처럼 한없이 불안했다. 그녀는 급히 자리를 일어서 대답 없는 리히튼에게로 다가갔다. 힐마르티노에게는 그녀의 노골적인 구애가 퍽 인상 깊은 모양이었다.

“무려 각하의 약혼자이신데 말이야…. 과거의 사랑까지 물리치고 매의 둥지로 숨어 들어온 소녀, 아즈마리아 윌. 아그레인, 네가 그 분홍빛 서사를 이긴다고?”

“그야 약혼자가 아니니까.”

“흐음?”

가볍게 대답하자 힐마르티노가 눈을 얇게 뜬 채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에 대고 싱긋 웃음을 지어 주었다.

“그런 건 당장 오늘에라도 깨부술 수 있거든.”

여섯 번째 등불이 밝혀진 후에야 리히튼은 아즈마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노란빛에 밝혀진 리히튼의 이목구비는 곧고 선명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아즈마리아의 존재를 달가워하거나 귀찮게 여기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 있기에 그녀의 말을 들어 주는 것처럼 보였다.

“너는 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힐마르티노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흥미가 깔려 있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자문하는 거야? 좋은 대답을 생각해내길 바랄게.”

곧 분한 얼굴이 된 아즈마리아가 리히튼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녀는 거친 걸음으로 실망했다는 기색을 풀풀 풍기며 방을 벗어났다. 이윽고 다가온 리히튼이 정중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후작, 그리고 부인. 괜찮다면 시간이 나는 대로 만남을 잇도록 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조나단 부인의 시선이 한차례 나를 훑고 멀어진다. 한껏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쉰 힐마르티노가 내 어깨에 이마를 한 번 기댄 후 일어섰다.

“너 너무 재밌다.”

너처럼 제정신이 아닌 사람만 할까. 둘이 떠나자 너른 방 안에는 무겁고 건조한 적막이 돌았다. 리히튼은 테이블을 가볍게 돌아 힐마르티노가 앉았던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와 나 사이의 간격은 고작 한 뼘이었다. 한 뼘만 가까이 다가가면 어깨가 닿을 거리에서 리히튼이 나와 눈을 맞추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예전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단둘이 남았을 때 그의 목소리는 타인이 함께 할 때보다 훨씬 낮고 부드러웠다. 더불어서 조금 더 느리고 끝이 늘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나는 그의 숨이 코앞에서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말했듯, 리히튼. …나는 네가 필요해서 왔어.”

리히튼의 시선이 내 뺨과 눈, 코, 입, 턱 곳곳으로 엉켜들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의 맹목적인 관심에서 안정을 얻는다.

“하지만 이건 변명에 불과해. 사실 나는 네게 자존심을 세우러 온 거야. 너는 모르겠지만… 아니, 누구보다 잘 알겠네. 나는 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자존심이 꽤 세거든.”

이쯤이면 내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 물어봐야 했다. 하지만 리히튼은 내 쪽으로 상체를 비스듬히 튼 채 눈을 맞추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침묵에 가라앉기 일보 직전,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입 맞추고 싶어서.”

너무 황당한 대답이라 나도 모르게 얼굴 근육이 풀렸다.

“뭐?”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남사스러운 일이란 게 그것 말고 더 있나?”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살폈다. 그림자가 내려앉은 실내에는 나와 그밖에 없었고, 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 리히튼은 그런 소릴 한 주제에 조금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뻔뻔한 낯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알잖아.”

그래, 알겠지. 리히튼이라면 알면서도…. 그가 팔을 뻗었다. 차가운 손끝이 내 콧등을 타고 떨어졌다.

“아그레인. 네가 그렇게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치장하고 올 때마다….”

그리고 내 턱을 감아쥐어 부드럽게 끌어 당겼다.

“내가 무슨 상상을 하는지 죽어도 알 수 없을 거야.”

입술 위로 숨이 떨어졌다. 그의 몸이 나를 소파 아래로 천천히 내리눌렀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리히튼의 어깨는 무겁고 단단했으며 또한 사나웠다. 그와의 간격이 좁아질수록 선명한 고양이 머릿속을 불태웠다.

“아….”

리히튼이 나를 안아 침대 위로 눕혔다. 그의 입술은 나의 턱과, 목, 어깨, 그보다 더 아래를 오가며 뜨거운 자국을 남겼다. 나는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와 숨을 나눌 때마다 죽어 있던 온몸의 신경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무엇이든 해, 아그레인.”

리히튼이 자신의 목을 휘감고 있던 나의 팔을 풀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힘이 내 손을 침대 위로 떨어뜨렸다.

“오직 내 앞에서만.”

그건 정말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날카로운 단도가 왼쪽 손바닥을 꿰뚫고 침대에 박혔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시야가 뒤집히며 수백, 수천 개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뒤덮었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가쁘게 뛰었다. 시야가 흐릿한 와중에 뜨거운 입술이 내 뺨에 닿았다.

“아그레인, 집중해. 고통보다 중요한 게 네 앞에 있잖아.”

수많은 목소리들 틈에서 몇 가지만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건 황제의 웃음소리였다. 이윽고 자각몽을 꾸듯 눈앞에 흐릿하면서도 선명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황제는 팔을 뻗었다. 흑색 소매가 트레이에 닿는다. 주름진 두터운 손가락이 황금색 술잔을 잡았다. 왼쪽에서 세 번째. 중앙에서 위쪽 잔을. 시종이 황송하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이윽고 귀족들이 뒤따라 팔을 뻗어 술잔을 가져갔다.

‘오늘 사냥은 만족스럽군. 아주 만족스러워. 더할 나위 없이 기쁜 날이야.’

‘하늘도 폐하의 탄생일을 축복하는 모양입니다.’

푸르륵. 말이 고개를 흔드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가 즐겁다는 듯 목을 젖히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끝으로 나는 눈을 떴다. 동시에 극심한 통증이 왼쪽 손에 몰려 왔다.

“읏….”

몸이 미치도록 무거웠다.

“진통제가 필요하면 서랍 첫 번째 칸에서 가져가.”

이윽고 어둠을 뚫고 리히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창밖에 떠오른 흐릿한 달이 눈에 들어 왔다. 10분도 채 흐르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밤이 찾아온 것이다.

“…내가 잠들었어?”

“바로 정신을 차릴 때도 있지만, 육체의 피로도가 높은 날은 정신을 잃기도 하지.”

둘 모두 ‘미래를 본 후’라는 전제 하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역시 나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알아.’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손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지금쯤이면 진통제의 효과가 서서히 풀리고 있을 거다. 완전히 풀리기 전에 서랍을 열든가, 아니면 고통을 참든가.”

진통제라면 내 방에도 있었다. 이슬라의 환청. 약제 중에서 가장 강한 진통 효과를 지닌 약제이기도 하니까.

‘내가 방금 본 그 장면이… 미래.’

그런데 왜 하필 그런 특징 없는 미래를 본 것일까. 애초에 불특정한 장면만 볼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나는 문을 열기 전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리히튼을 바라봤다. 그는 등불 옆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내가 억지로 끌어 내렸던 타이가 다시 가지런하게 매여 있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낼 생각이라면, 나는 상관없어. 오히려 환영할 일이지.”

리히튼은 내가 그리 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어쩐지 리히튼의 곁보다 고요한 황성의 공기가 더 차가운 기분이었다. 화롯불 안에 손을 집어넣은 것처럼 손등과 손바닥이 홧홧했다. 그날 밤은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비비안느에게서 받았던 이슬라의 환청을 사용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될 줄 몰랐는데.’

단 한 번도 사용한 적 없었던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입으로 열었기 때문인지 가루가 쏟아져 나왔지만, 상관 않고 소량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제 안 아프겠지. 아마 그럴 거야. 그러나 약의 효과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

다음날. 꿈쩍도 못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왼손의 상태는 놀랍도록 호전되어 있었다.

‘그거 알아? 진짜는 불사에 가까운 육체와 미래를 보는 눈을 지닌다는 걸.’

불사에 가까운 육체.

“설마.”

그러고 보니 별채에서 생긴 상처는 어떻게 됐더라? 언제 완전히 나았지? 아니, 다음날 고통을 느끼기는 했었나? 순간, 머릿속을 스친 벼락같은 깨달음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즉시 방을 나섰다. 그리고 주방으로 들어가 아무 하녀나 잡아 물었다.

“발레리아… 아니, 나타샤 폴은 어디에 있니?”

눈 밑이 거무죽죽한 하녀는 나의 질문에 겁먹은 눈이 되어 어깨를 움츠렸다.

“나, 나타샤는 여기 없어요.”

“뭐?”

“주, 죽었어요.”

하녀의 어깨를 잡고 있던 두 팔에 힘이 풀렸다.

“어떻게?”

두 손을 달달 떨던 하녀가 등을 돌려 주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멍하니 서서 힐끔 훔쳐보기 바쁜 하녀들을 응시했다. 그들의 시선에는 두려움이 만연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급히 고개를 돌려 어깨 아래로 푹 숙였다.

그야말로 누구 하나가 도망가도 이상하지 않을 아슬아슬한 분위기였다.

“아가씨.”

그때, 하녀장이 멀거니 선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나를 이끌고 주방을 나가 한산한 복도의 구석에 멈춰 섰다. 다른 하녀들과 달리 차분한 낯이었다.

“나타샤의 시체는 며칠 전에 장의사에게 넘겨졌습니다.”

“언제 죽은 거지? 무슨 일로?”

“자세한 건 아무도 모릅니다. 새벽 내내 고통으로 울부짖다가 피를 토하더니, 결국 숨이 끊겼죠. 그 일이 일어난 뒤로 같은 방을 쓰던 하녀들 사이에 불경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아가씨의 눈에 띄면 무사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뒷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두 번째 발레리아, 나타샤가 죽은 이유는 간단했다. 잉고르드의 독은 애초에 인간이 적응할 수 있는 독이 아니었다.

‘오직 나라서 가능했던 거야.’

내 육체가 불사에 가까웠기에 독에 굴복하지 않고 끝끝내 해독까지 성공했던 것이다.

‘베르크네가 잉고르드의 독에 중독됐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그럼….’

리히튼도 독을 삼킨 적이 없던 걸까? 헷갈렸다. 하지만 그 역시 잉고르드 대대로 내려오는 ‘힘’을 가졌다는 이유로 황성에 갇혀야 했다.

‘잉고르드의 힘은 뭘까.’

하나하나 천천히 정리하려던 참이었다. 주변을 살피던 하녀장이 내게 몸을 바짝 붙이며 속삭였다.

“리히튼 각하께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 흡족해하실 겁니다. 나타샤는 며칠 전에 갑자기 들어온 아이거든요. 귀하신 분의 명이라고 전달받았었기에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리히튼?”

이게 무슨 말이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것치고는 하녀장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했다. 그녀는 이전과 달리 날카롭게 벼려진 눈을 하고 있었다.

“나타샤는 황제가 발레리아를 사냥했던 날 직후에 들어왔습니다. 아마 발레리아를 치우고 나타샤를 이용해서 아가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는 계획이었겠지요.”

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졌다.

“마침 각하께서 황성을 방문하신지라 말씀을 전하려 했는데… 그전에 아가씨께서 해결하신 덕에 일이 쉽게 풀렸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더욱 조심하셔야 합니다.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을 테니, 아가씨를 더욱 예의주시할 게 분명합니다.”

놀라웠다. 설마 황성의 하녀장이 리히튼의 사람이었을 줄이야. 덕분에 나타샤가 황제의 끄나풀이었다는 사실에 상대적으로 담담할 수 있었다. 그렌페르크 제국의 중심에 더 깊숙이 파고들수록, 리히튼이라는 인물은 더 의문에 휩싸인다. 고작 황성의 개에 불과했던 그가 어떻게 이 모든 걸 손에 쥘 수 있었을까? 나는 하녀장에게 질문했다.

“약초를 판다던 그 아이의 노부는? 어머니와 두 동생이 불치병으로 일어서지 못한다고 들었어.”

하녀장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거짓말을 믿으세요?”

질문한 내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확고한 답이었다. 그런가. 황성은 모두 거짓말만 하는구나. 나 또한 마찬가지이니 당연한 일인가. 칼날에 관통 당했던 손등을 내려다봤다. 편두통처럼 따라오는 고통은 여전했으나 고작 하루가 지난 것치곤 놀랍도록 호전된 상태였다. 나타샤는 아마 독에 의해 내장이 녹아가는 고통을 느끼며 죽었을 것이다. 철저히 나의 판단 착오 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나타샤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미약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황제의 끄나풀이었다는 소리를 들은 후에는 그녀의 죽음에 안도했다. 번거롭게 상대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이유 하나로.

‘나나 빌힐름이나 다를 바 없네.’

하지만 내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인간성의 부재 따위는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됐다. 바람을 쐬기 위해 성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뺨을 두드리고 지나갔다. 어떤 빌어먹을 우연인지는 몰라도, 빌힐름으로 분명해 보이는 뒷모습이 낯선 여자와 함께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나를 발견한 빌힐름이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다가오라는 듯 가볍게 턱짓했다.

‘인사라도 나누자고? 뻔뻔하긴. 황성에는 죄다 거짓말쟁이에 뻔뻔한 것들뿐이야.’

나는 그를 위해서 기꺼이 계단을 내려갔다. 누군가와 만날 꼬락서니가 아님에도 괘념치 않았다. 빌힐름의 곁에 선 여자는 윤기 나는 적발을 곱게 틀어 올린,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누굴까 싶었던 차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마가렛 헨서웨이.’

빌힐름의 비공식적 연인.

“좋은 아침이에요, 빌힐름.”

빌힐름은 건방진 호칭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내 오른손을 끌어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낯빛이 안 좋아 보이는 군요, 아그레인.”

“그럴만한 일이 있었거든요. 한데 이분은?”

잠시 당황스러워하던 여자가 곧 능숙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저는 마가렛 헨서웨이에요. 그리고 보통은 이름을 묻기 전에 본인의 신분부터 밝히는 게 예의이죠.”

“멸문한 가문 출신의 숙녀에게 신분이랄 게 있나? 나는 아그레인 캐롤드예요. 굳이 신분을 따지자면… 빌힐름의 손님 정도?”

내 귀로 들어도 경박한데 멀쩡한 귀족 아가씨 귀에는 얼마나 경박하게 들릴까, 싶었다. 반응이 훤히 보이는 얼굴을 보는 게 이상하게 즐거웠다. 힐마르티노가 이런 기분으로 나를 상대하는 걸까?

“만나서 반가운데, 우리 악수라도 할까요?”

마가렛은 내 제안에 동조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억지로 끌어서 악수했다.

“…뭐하는 거죠? 기분 나쁘게.”

마가렛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빼냈다. 솔직하네. 아즈마리아였다면 억지로라도 웃었을 텐데.

“황성에서 꽤 지냈다고 들었는데, 무례하기가 힐마르티노 각하 뺨치네요.”

“그런가요? 의자매라 그런가. 원래 자매끼리는 닮는다잖아?”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자 마가렛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그녀가 한 번 더 입을 열기 전에 빌힐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즈마리아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영애네요. 분위기도, 말투도. 사실은 이쪽이 당신의 진짜 취향인 건가요?”

“하!”

“어떻게 보면 나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일부러 저와 비슷한 여자를 만드신 건지.”

빌힐름의 선한 얼굴에선 여전히 조금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조롱과도 같은 언사에 화를 낸 건 그가 아닌 마가렛이었다. 그녀가 무어라고 지껄이는 동안 빌힐름의 시선은 오롯이 한 곳을 향해 있었다.

“손등의 상처가 큽니다, 아그레인.”

바로 내 왼쪽 손등에. 꿈속에서 날 내리누르던 빌힐름의 얼굴이 떠올랐다. 빌힐름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내가 ‘진짜’임을 실험해봤을까?

“모든 일에는 대가가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원하는 것은 얻었습니까?”

빌힐름이 초원에 부는 미풍처럼 따사로운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더라도 자애롭고 상냥한 웃음이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왜 나는 미래를 읽는 힘을 지녔으면서도, 이 남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혼자 행동하기에는 새끼 오리처럼 몹시 허약해서? 벗어날 용기가 없어서? 아니다. 과거의 내가 고작 그런 이유로 시간을 허비했을 리 없었다.

“…언젠가는 얻겠죠.”

그 이유를 알게 되기까지는, 적어도 미래를 보는 힘에 대한 발언은 조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능한 몸을 아끼는 게 좋습니다. 고통이 즐겁지만은 않을 텐데.”

빌힐름이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대답했다. 키우는 애완동물을 놀리듯 미세한 장난기가 밴 음성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확실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그는 내가 미래를 볼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빌힐름의 눈과 입술과 목소리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이걸 이용해야 한다. 단언컨대 몇 없는 기회였다.

“어젯밤부터 식사를 못해 허기가 지네요. 인사는 나누었으니 먼저 올라가 봐야겠어요.”

“아쉽군요. 제 취향은 안 듣고 가십니까?”

“제가 듣기에는 너무나 끔찍할 취향일 것 같아서.”

빌힐름이 요새와 같던 평정을 잃고 웃음을 터트렸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내 고막을 두들겼다. 나는 굳은 표정의 마가렛을 두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시간이 얼마 없어.’

시간이 흐르면,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미래를 본다는 사실이 밝혀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빌힐름이 방심하고 있는 지금을 노려야 해.’

수많은 미래 중에서, 나는 왜 그 미래를 봤을까? 왜 하필 귀족들이 모여 있는 한가운데서, 황제가 술잔을 고르던 미래를 봐야 했을까. 조금 늦었지만, 나는 지금에서야 그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이면 되는 거야.’

모레 열리는 탄생연에서 나는 황제를 죽일 것이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첫 번째 미래이자 복수이므로.

***

저녁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빌힐름의 시종이 내 방을 방문했다. 시종이 내게 건넨 서신에는 리히튼의 필체보다 훨씬 경직되고 화려한 필체가 적혀 있었다.

<당신의 나비는 얼마나 빠를 것 같습니까?>

낮술이라도 한 건가. 헛소리를 적어 보낼 줄이야. 그러나 그 밑에 짧게 적힌 내용을 확인한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빌힐름은 오늘 저녁에 가까운 손님들을 초대해 나비 경주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아가씨께서 필히 참석했으면 한다고 전하셨습니다.”

사흘에 한 번씩 얼굴을 보기로 했으나, 어제 저녁에는 처음으로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얌전히 대화만 나눌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나의 긍정에 빌힐름의 시종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방을 나갔다. 나비 경주. 귀족들의 놀이란 참 고상하기도 하지. 까만 레이스 장갑을 벗어 왼쪽 손등의 상처를 확인했다. 이제는 피딱지도 거의 아물어가고 있었다.

‘괴물이구나. 이건 괴물이나 다름없어.’

그만큼 쓸모 있는 몸이란 뜻이니 만족스러웠다. 약속된 시간이 이십 분 가량 흐른 뒤에 빌힐름의 방으로 향했다. 황성의 동쪽 구역 꼭대기 층에는 황제의 방, 그 아래층에는 빌힐름의 방이 위치한다. 때문에 이층에 거주하는 내가 계단을 오르는 도중에 황제의 방문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 얼굴이 베르크네일 경우도 있다는 건 생각지 못했었지만.

“아그레인.”

베르크네는 멀끔하고 고리타분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베르크네가 이상하게 반가웠다.

“베르크네. 황성이 좁으니 자주 만나네요.”

“그렇군.”

나는 그가 멈춰선 계단의 위쪽을 올려다봤다. 여기서 더 위쪽은 황제의 방이 위치한 꼭대기 층이 전부였다.

“황자를 찾아가는 건 아닌 것 같고, 황제 폐하를 뵈러 가시나 봐요.”

“정확하게는 불려 가는 거다.”

“불경죄라도 지으셨어요?”

베르크네는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내가 폐하의 눈이며 팔이고 귀이니까.”

처음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현재는 리히튼의 사람인 그가 황제의 수족이 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크네가 이중 첩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리고 이중 첩자라는 사실이 중대한 비밀이었다면 내게 밝히지 않았겠지.’

내 표정이 영 좋지 않았는지, 베르크네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때로는 평화를 위해 적당한 선에서 합의해야 할 때가 있다. 서로의 목적에만 부합한다면 말이야.”

황제와 리히튼이 합의 하에 서로의 정보를 나눈다는 의미였다. 리히튼은 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고 있는 거지?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럴싸한 소리네요. 그러고 보니 베르크네 씨에게 묻고 싶었던 게 있었어요.”

“노닥거릴 시간은 없으나 기꺼이 들어 주도록 하지.”

“잉고르드의 독에 중독된 적 없죠?”

베르크네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래.”

“고마워요.”

베르크네도 거짓말이란 걸 하는구나. 돌려 말하면 말했지, 누굴 속일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볼일은 그것으로 끝이냐는 듯 눈으로 묻던 베르크네가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베르크네 씨, 하나만 더 여쭐게요.”

다행히 그는 귀찮은 티를 내지 않고 나와 눈을 맞춰 주었다.

“오늘이 폐하를 뵐 마지막 기회라면, 그분에게 어떤 질문을 올리고 싶으세요?

이번에는 칼 같이 답이 나왔다.

“후회하지 않는지.”

그 후회가 무엇에 관한 걸까? 어차피 알아낼 수 없을 사안일 테니 질문을 목 안에 삼켰다.

“그럼, 그 질문. 꼭 오늘 여쭤보세요. 저 요즘 그 명언에 푹 빠져 있거든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

“조언 고맙군. 감사의 의미로 나 또한 한 마디 남기도록 하지.”

이어서 언급된 이름은 전혀 예상하지 이름이었다.

“킨은 네가 아그레인임을 아직 몰라.”

“…그런 건.”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 머리가 멍했다. 나의 배다른 형제. 척박한 북쪽의 땅에서 유일하게 나의 친구였던 인물. 이제는 둘만 남은 캐롤드의 후계자. 킨이 무너져가던 캐롤드 저택의 불길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알 필요 없으니 평생 모르라고 하세요. 그리 중요한 사실도 아니잖아요?”

그가 나를 알고, 혹시라도 나를 찾아 황성에 온다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나는 똥통을 구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킨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베르크네와 헤어진 후 곧장 빌힐름이 안내했던 다른 방으로 향했다. 문 바로 앞에서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들어가기 싫어.”

문을 열어 주던 시종이 힐끔 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나는 이용할 수 있는 건 죄다 이용할 생각이니까, 이런 초대에는 응하는 게 옳았다. 나는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엉덩이 저리 치워!”

“이것 봐요. 내 아이는 다리가 더 길어. 가장 빠를 거라구.”

“이번에는 뭐라도 거는 게 어떤가? 경주만 즐기려니 좀이 쑤시는군.”

방의 내부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타이를 풀어 헤친 채 소리치는 남자들과 술에 빠져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치는 귀부인들이 한데 뒤섞여 요란한 꼴을 보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꺼림칙한 탄내가 풍겨오기도 했다. 나는 이 향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슬라의 환청.’

마약까지 즐기는 건가. 아주 살 판 났군. 각자 뒤엉켜 놀기 바빴기에 방에 들어서도 이목이 집중되지 않은 건 좋았다.

“그 나비는 날개가 크잖아요. 무거우니까 뒤뚱뒤뚱 걷지!”

“고작 예쁘다는 이유로 선택한 머저리가 누구일지 궁금해.”

걸음을 옮겨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은 모두 등을 굽히고 바닥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곳에는 나비가 기어가고 있었다.

‘…날아가는 속도로 경주하는 게 아니었어.’

날개는 장식에 불과했다. 두꺼운 책으로 허술하게 만들어진 벽 안쪽의 나비들은 하나같이 날개가 서로 붙어 있었다. 날지 못하는 나비. 귀족들은 날개가 붙어 꾸역꾸역 기고 있는 나비로 경주를 즐기고 있던 것이다. 악취미야. 심지어는 느릿느릿하기만 해서 무슨 재미로 보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몸을 틀어 테이블 위의 샴페인 잔을 쥐고 아무 자리에 앉았다. 머리 바로 위쪽에 청색 휘장이 걸려 있었다. 두 개의 창이 하늘을 겨누고 네 장의 날개가 퍼덕거리고 있는 그림….

“그건 레그윈 가문의 휘장이야. 멋지지? 안 그래, 응?”

술에 취해 반쯤 꼬인 목소리였다. 나는 자리가 푹 꺼진 옆자리 소파로 시선을 돌렸다. 키 큰 흑발의 청년이 눕듯이 소파 등에 기대고 있었다. 남자는 초점 없이 축 처진 눈매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는 병에 걸렸어. 레그윈을 사랑해서, 평생 레그윈만 보고 사는 병 말이야. 그래서 방 안 곳곳에 레그윈의 휘장을 걸어 놓으셨지. 원래 사람은 좀 쉽게 질려야 해. 수십 년이 흘러도 오직 하나만 사랑하는 건 미친 거라고. 그래서 레그윈의 핏줄에 광기가 각인된 건가?”

약을 해서 제정신이 아닌 걸까? 꽤 흥미가 가는 이야기였기에 적당히 대답했다.

“겁도 없네. 전하가 계신 자리에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그런 것치곤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인데? 붉은 머리의 숙녀분…. 오오, 이렇게 보니 빌힐름의 취향을 그대로 빼다 박았어.”

남자가 목을 길게 빼 내 이목구비를 샅샅이 살폈다. 남자의 하얀 얼굴에 박힌 호박색 눈동자가 황금 사과처럼 화려하게 빛났다.

“그 사람의 취향이 나야? 마가렛과 내가 조금 닮기는 했지. 하지만 헤어진 전 약혼녀는 전혀 다른 분위기던걸?”

“으응? 숙녀분은 황성 사람이 아닌가? 아즈마리아가 빌힐름에게 버림받기 싫어서 먼저 선을 끊은 건 아주 유명한 일화라구. 수년을 불안해했지. 적발에 초록 눈을 가진 빌힐름의 정부들 사이에서.”

정부들. 한 명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선하고 금욕적인 빌힐름의 인상과는 정반대의 사생활이었다.

“우리의 귀여운 아즈마리아는 도망칠 만했어. 아암, 그렇고말고. 모두에게, 하물며 하수구에 처박힌 쥐새끼에게도 사랑받고 싶어 하는 여자인데. 어?”

“서로 잘 아나 봐.”

“푸흐흐… 그렇게 보이나?”

하기는, 같은 빌힐름 파에 또래 나이의 귀족이면 서로에 대해서 모르기가 더 힘들 터였다.

“사랑받고 싶어 미친 것들은 누구보다 사랑에 예민하단 말이지. 진작 알고 도망간 거야. 등신처럼 더 끔찍한 사내새끼에게 가 버렸지만….”

내가 샴페인을 홀짝거릴 동안 남자는 술에 취한 투로 이 소리 저 소리를 내뱉었다. 그 속에서 알 수 있는 건 남자의 지위가 꽤 높다는 사실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남자가 조용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웬 여자와 진한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입술을 뗀 여자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놀러 가요, 어서.”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남자가 제 무릎 위에 앉은 여자를 느릿하게 밀어냈다.

“아아! 아니야, 오늘은 아니야, 부인.”

“아이, 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놀아 준다고 했으면서.”

“오늘은 새로 온 친구분과 귀한 시간을 나누기로 했단 말이지. 아주, 매우, 몹시 귀한 시간이야. 친구가 생기는 거니까.”

그렇지?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남자가 내 얼굴을 쳐다봤다. 물론 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말에 여자가 새침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모리타트 각하는 항상 제멋대로라서 짜증나요. 오늘만 넘어가 줄 테니 그리 알아요.”

‘…모리타트?’

모리타트 잭이라면 잭 공작 가문의 가주지 않은가. 나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흑발의 남자, 모리타트를 쳐다봤다. 젊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나 젊을 줄이야. 기껏해야 나와 한두 살 차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우리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으흠…. 그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숙녀분께서 빌힐름의 취향이라는 소리지.”

공작 대접을 해 줘야 할까, 싶었지만 당사자가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라 편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방금 좋은 생각이 났는데 말이야. 우리 작은 놀이 하나 해 보는 게 어때.”

“들어보고.”

개구지게 웃은 모리타트가 내 옆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그의 미소에선 이상하게 소년의 분위기가 풍겼다. 그는 대뜸 내 어깨 위로 팔을 올리며 속삭였다.

“내게서 고개 돌리지 마. 빌힐름이 아까 전부터 우리를 주시하고 있거든. 어어… 마침 마가렛은 술에 취해 저 안쪽에 널브러져 있군. 바보 같지만 명랑하고 귀여운 여동생이지.”

술을 마셔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건지, 본래부터 말이 많은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놀이의 내용은 간단해. 빌힐름이 그쪽에게 관심을 가지면 그쪽이 이기는 거고, 아니면 내가 이기는 거야.”

그의 말에 잠깐이나마 돋았던 흥미가 순식간에 식었다. 승자가 이미 정해진 게임이지 않은가. 내 반응을 살피던 모리타트가 서운한 투로 말했다.

“하아… 너무하네. 이봐, 그렇게 관심 없는 얼굴 하지 말아 줘. 쉬이 포기하지 말란 말이야. 정말 재미있을 거야. 장담하지.”

놀이는 이미 재미없을 것으로 확정됐다. 남은 건 그가 무엇을 거느냐였다.

“뭘 걸 건데?”

“황금?”

투박하기 짝이 없다. 나는 택도 없다는 눈짓을 보내며 고개를 저었다.

“땅?”

나는 잭 영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허, 까다롭기는. 그렇다면… 내 정부? 어때, 이건 괜찮지 않나? 부인은 불가능해, 내가 기혼이라.”

“없던 이야기로 할게.”

자존심이 걸렸다고 생각하는 걸까? 모리타트는 알코올 내를 풀풀 풍긴 채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아, 좋아! 사냥 대회의 우승 상품!”

이번에는 꽤 놀랐다. 모리타트 공작이 그때 그 사냥 대회의 우승자였던 건가. 모리타트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어때. 동하나? 폐하께서는 워낙 배포가 크셔서 바라는 그 무엇이든 허락하시지. 나는 아직 우승 상품을 사용하지 못했어. 폐하께 소원을 비는 것 말이야. 그걸 우리 놀이에 걸지.”

고작 이딴 놀이에 그 귀한 것을 거느냐는 물음은 불필요해 보였다. 남자의 호박색 눈이 내게 끝없이 속삭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료해 죽을 것 같아. 나랑 놀아 줘.’라고. 그렌페르크 제국에 망조가 든 걸까? 황족부터 고위 귀족이란 것들이 하나같이 이 모양이라니.

“그 말, 무르지 않기야.”

“이 모리타트 잭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는 건가?”

나는 반쯤 풀린 눈에 대고 대답했다.

“공작 각하의 명예를 믿어 보지.”

그리고 모리타트의 목을 끌어 입을 맞췄다. 잠시 멈칫하던 그는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열렬히 반응했다. 밀려오는 힘에 목이 꺾일 것 같았다. 열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들어오려 할 때쯤 모리타트를 밀어냈다. 열기가 식지 않은, 다소 어리둥절한 그의 얼굴이 멀어졌다. 시종이 다가온 건 그때였다.

“빌힐름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시종은 정확히 내 귀에만 속삭였다. 모리타트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술에 절어 기분 좋게 풀려 있던 얼굴 근육이 퍼즐 맞추듯 제자리를 찾아갔다.

“아하… 아하! 그래, 그런 거였군. 하하. 그쪽이었나? 우리 빌힐름이 사랑해 마지않는 아그레인 캐롤드가.”

모리타트의 타이를 당겨 입술을 닦고 말했다.

“나라면 그런 끔찍한 소리를 지껄이느니 가만히 입 닫고 있는 걸 추천하겠어.”

어이없다는 듯 목을 젖히고 웃은 모리타트가 손을 뻗어 내 눈가를 매만졌다.

“우리 숙녀분…. 이렇게 보니 빌힐름과 똑같은 눈을 가졌네. 못 알아 본 내가 머저리였어.”

입 밖으로 내뱉는다는 소리가 죄다 사람 성질 건들게 하는 소리였다.

“고마워, 각하. 우승 상품은 잘 가져갈게.”

“으흐흠. 이거 마녀한테 홀린 기분인걸.”

모리타트를 뒤로하고 시종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나비 경주가 시작되었는지 실내의 정중앙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들의 열기와 비명에 나조차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시종이 나를 안내한 곳은 커다란 채집장이 서로 엉겨 붙어 있는 창가였다. 저 안에 들어 있던 나비가 지금 열심히 땅을 달리고 있겠지.

빌힐름은 자그마한 원형 테이블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몇 마리 남지 않은 채집장 속의 나비에게로 고정된 채였다. 가까운 의자의 자리를 잡자 저 멀리 정면으로 모리타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누이.”

누이. 날 부르는 빌힐름의 목소리가 수년 전 그의 목소리와 겹쳐 들렸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날 마주하던 그때의 목소리와.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간 내 제안에 대해서 잘 생각해 봤어?”

캐롤드의 재건을 뜻하는 말일 터였다.

“필요 없으니 거절할게.”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나는 이곳에서 놀고먹는 걸로 족해.”

빌힐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이기는 했다. 그의 시선이 나비를 떠나 내게로 향했다.

“누이도 경주에 참여하면 좋을 텐데. 저들에게 새벽은 낮이나 마찬가지야. 나비의 다리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 계속되겠지.”

“내 취향이 아니라서. 이런 정신 나간 경주는 누가 제안한 거야?”

“나.”

빌힐름은 싱긋 웃으며 홍차가 담긴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뒹굴거나 괴성을 내지르기 바쁜 사람들 틈에서 홍차를 마시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심신 안정에 몹시 뛰어나지. 누이에게 추천한 이유도 그 때문이야. 필요해 보이거든.”

“날개를 묶고 땅을 기게 만드는 놀이가?”

“바로 그 점을 말한 거야.”

그의 표정은 더없이 진중했다.

“날개가 없어도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점. 날개를 이고 죽기 살기로 발버둥치는 모습이… 마음에 평온을 선사하는 거지.”

“정상적인 취미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럼 반대는 어때.”

빌힐름이 채집장을 열어 딱 한 마리 남아 있던 나비를 꺼냈다. 검붉은 색의 얼룩무늬가 인상적인 나비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비의 몸체에서 여섯 개의 다리를 차례로 떼어냈다.

“기는 게 안타깝다면야. 질리도록 날게 하면 되지.”

미친놈.

“사실 누이에게 줄 나비였는데.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작지만… 가장 아름다운 나비였지.”

“보통은 아름다울수록 소중히 하는 법이야.”

“여기서 얼마나 더?”

다리 없는 나비가 빌힐름의 손바닥 위를 굴렀다. 그러나 움찔거리기만 할 뿐 날아가지는 못했다.

“완벽한 건 쉽게 질려. 불완전한 욕망이야말로 가장 사랑스럽지.”

바닥을 구르던 머리. 불타오르는 저택 위로 뭉게뭉게 퍼져가는 까만 연기. 나는 매캐한 연기를 삼킨 것처럼 어지러운 머리를 휘저었다.

“그래서 내게는 누이밖에 없었어.”

그래. 살아남기 위해 개처럼 구는 내가 네게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겠지. 각인된 공포가 옅어진다. 나는 점차 피가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역시 이것도 쓰레기였군.”

빌힐름은 나비의 구실을 못하는 나비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 실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늘, 언제나 그래 왔다는 듯이. 나는 날개를 후들후들 떠는 나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발레리아에게도 이렇게 했어?”

빌힐름은 부드럽게 웃었다.

“또 그 이름.”

그러나 목소리는 얼어붙은 강처럼 차갑고 시렸다.

“정말 끔찍하게 사랑했었나 봐. 비비가 억울해서 울겠어. 응?”

“내 알 바 아니야. 발레리아에게도 이런 식으로 했느냐고 묻잖아.”

“그런 걸 어떻게 일일이 기억할까? 당장 내일이면 저 나비들도 까맣게 잊힐 텐데.”

빌힐름은 당당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엇이 문제인지 조금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역시 개새끼에게 화를 내는 건 내 손해일까? 고개를 숙이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슬퍼? 누이가 마음이 여리기는 했지.”

“너를 어떻게 무너뜨릴까 고민 중이야.”

달칵.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음에도 눈앞에 그의 행동이 그려졌다. 평온한 낯으로 아무렇지 않게 찻잔을 비웠겠지.

“안 돼, 아그레인. 너는 죽어도 나를 이길 수 없어. 이건 운명이야.”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운명이라고? 다른 이라면 몰라도 빌힐름은 절대 사용하지 않을 것 같은 단어지 않은가. 마주한 빌힐름의 눈은 이전과 미세하게 달랐다. 그는 태연하지도, 평온하지도, 하물며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선한 웃음을 짓고 있지도 않았다. 도리어 무언가를 체념한 눈이었다.

“우린 그렇게 타고 났어. 수백 년을 반복해 왔지. 개와 주인일 수밖에 없는 운명. 평생을 서로의 곁에서 썩어가야 하는 운명. 태어날 적부터 거스를 수 없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빌힐름이 내게 물었다.

“황후로 만들어 줄까? 누이.”

마치 오늘 하루는 어땠냐는 물음처럼 한없이 가벼운 음성으로.

“어차피 우리는 후계를 가질 수 없으니까. 반쪽끼리 맺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반쪽이라니,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신머리를 말하는 걸까? 그래, 너는 물론이고 나 역시 반쯤 정신이 나가 있기는 하지. 혀가 입 안쪽에 얽혀 꿰매진 듯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방에서 풍겨오는 매캐한 약 냄새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 방을 빠져 나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함이 느껴졌다. 나비의 사지를 잘라냈다는 점에서 느끼는 불쾌함이 아니었다. 후계를 가질 수 없다는, 반쪽이라는 마지막 한 마디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야, 생각을 바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빌힐름은 내게 힌트를 준 거야.’

운명. 레그윈과 캐롤드, 그리고 잉고르드 셋을 묶는 운명이라면 『태양이 흐르는 강』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소리는….

‘레그윈의 핏줄에도 대대로 내려오는 힘이 존재한다는 의미겠지.’

그 힘이 캐롤드와 잉고르드를 개로 만들고, 과거의 내가 황성에 묶여 있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무슨 힘일까.’

짐작조차 어려웠다.

***

황제 탄신일의 해가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황성이 들들 끓는 게 느껴졌다. 새벽처럼 고요한 분위기였음에도 날이 선 긴장감이 맴돌았다. 나는 잠에서 깬 이후로 오직 하나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왼쪽에서 세 번째. 중앙에서 위쪽 잔. 구멍이 뚫렸던 왼쪽 손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비현실적인 회복력이었다.

그렌페르크 제국에서 황제보다 위에 선 인물은 없다. 따라서 국경일인 황제 탄신일에는 황제가 직접 단상에 올라 축언을 읊는다. 내용은 별것 없었다. 제국의 번영을 위해 신민의 충성과 헌신을 바람. 끝나갈 때 즈음에는 이미 젊은 청년 귀족들 중 반이 졸고 있었다.

“마음을 편안히 하고 속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시종장이 말했다. 이윽고 편안하고 차분한 음률의 현악 4중주가 시작됐다.

“폐하께선 명상을 사랑하시지.”

바로 옆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오지랖을 부리나 싶어서 확인했더니 모리타트였다. 어제의 흐리멍덩했던 눈과 달리 지금 그의 눈은 초점이 또렷했다. 풀어졌던 타이도 깔끔하게 매여 있었으며 멀끔하게 정리한 흑발도, 빳빳한 셔츠도 완벽했다.

“내면을 다스리는 걸 몹시 중요하게 여기셔.”

어쩌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모리타트가 씨익 웃으며 속삭였다.

“그 표정 예쁜데?”

“부인에게나 시시덕거리지 그래.”

“우리는 내외한 지 오래야.”

모리타트가 앞쪽 한 구석으로 턱짓했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금발의 여자와 어떤 남자가 찰싹 붙은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만 심장이 뛰는 여자지.”

“황제와 똑같네.”

“어느 점이?”

“쓸데없는 데에 시간 낭비한다는 점.”

황제는 명상을 하며 내면의 어떤 평화를 가꾸려고 할까. 더 행복하게 사람을 사냥하는 법? 더 끔찍하게 사람을 고문하는 법? 내 눈에는 시간 낭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봐, 아그레인 양.”

“말 시키지 마. 여기서 떠드는 사람은 각하밖에 없어.”

“매정하게 굴지 말고 한 번만 봐 줘. 그동안 아그레인 양에게 반드시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어.”

모리타트는 공작이라는 지위와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위엄이라고는 쥐뿔도 없고. 말 많고. 가진 건 얼굴밖에 없는… 나열하고 보니 킨과 비슷하네. 하지만 킨은 지위도 없었다.

“이곳에는 왜 돌아온 거야?”

오롯이 정면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살짝 틀었다.

“응? 어제 널 만난 후부터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고.”

내게만 겨우 들릴 작은 음성이었음에도, 모리타트의 흥분이 여실히 묻어나왔다.

‘내가 황성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건가.’

나와 빌힐름의 관계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명확한 기준을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빌힐름의 유모인 조나단 부인은 나를 모르는데. 각하는 어떻게 날 아는 거지?”

“조나단은 참여하지 않았으니까.”

“무엇에?”

“『태양이 흐르는 강』 서약.”

꿈속에서. 아버지의 서신 사이에 꽂혀 있던 오래된 서약서 사본이 떠올랐다.

‘하나, 캐롤드 가문은 그렌페르크 제국의 태양이 될 것을 맹세한다. 둘….’

그 끔찍한 서약에 다른 가문들도 연결되어 있었다는 거군.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모리타트가 입을 열었다.

“묵인하겠다는 서명. 서명에 참여한 가문들은 황성에서 벌어지는 일에 묵과하는 대신 황실 소유의 땅을 사이좋게 나누어 가졌지. 아주 비옥한 황금 땅들을 말이야.”

당장 생각나는 가문들이 몇 존재했다. 에리얼의 크로허츠, 아즈마리아의 윌, 그리고 눈앞의 잭…. 아버지의 죽음에 가세한 가문들이었다.

“그런 비밀을 내게 알려 줘도 돼?”

모리타트가 태연한 낯으로 대답했다.

“알려 줘도 아그레인 양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잖아.”

나는 밝게 웃어 주었다.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 줘서.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음악이 끊겼다. 명상의 시간이 끝난 것이다.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오늘 보여 줄게.”

나 역시 그들을 따라 일어서며 모리타트에게 말했다.

“기대해도 좋아.”

오늘은 다나한 2세가 별세하는 날이다. 나는 그에게 잊을 수 없는 탄생일을 선물하고 싶었다.

사냥에 미쳤다는 별칭에 걸맞게, 황제는 탄생일의 오후 일정을 사냥으로 채웠다. 귀족들의 말을 훔쳐 들으니 황제가 만족스러운 사냥을 하지 못하면 그날 밤 열리는 연회의 분위기가 여러모로 불편해질 거라 했다.

‘역시 명상은 시간 낭비에 불과해.’

그리고 황제가 승마복을 걸치고 나왔을 때, 나는 한눈에 알아 봤다. 미래에서 술잔을 쥐던 황제의 소매와 지금 황제가 걸친 승마복의 소매가 똑같다는 것을.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대답은 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나왔다.

“오늘은 왜인지 분위기가 다른 것 같네요.”

“다들 그렇게 여기고 있을 거예요. 듣기로는 연회에서 빌힐름 전하의 혼인 상대가 발표된다던데….”

“모두가 생각하는 그 여자겠군요.”

이름 모를 여자들은 자연스러운 대화와 함께 점차 멀어졌다. 어디선가 차디찬 겨울바람이 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말이 발을 구르는 소리, 총알을 장전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또렷하게 들려왔다.

‘왜지.’

나는 미세한 긴장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내 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했고, 정적이었으며, 그 때문에 이 순간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이 장면, 어디선가 본 것 같아.’

선명한 기시감이었다. 어쩌면 과거의 내가 지금 이 순간을 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탕!

컹컹, 컹컹!

사냥을 알리는 총이 발사되고, 수십 마리의 사냥견이 앞 다퉈 달려 나갔다. 함께 달려 나가는 얼굴들 틈에는 모리타트도 있었다. 즐거움을 주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저렇게 좋아 죽으니 우승을 하지.

“어때. 그간 실력이 좀 늘었을지 궁금하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힐마르티노가 가죽 장갑을 끼며 내게 물었다. 나는 시종으로부터 총을 건네받으며 대답했다.

“우리 내기 할까?”

“흐흥! 웬 자신감이니? 무슨 꿍꿍이일지 의심스러운데.”

“할 거야, 말 거야.”

“어여쁜 아그레인이 뭘 걸지 들어보고.”

“비비안느.”

“하?”

힐마르티노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개와 주인이라고 표현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너. 꽤 대범해졌단 말이지.”

“내가 없으면 지금의 비비안느도 없었어. 비비안느도 부정하지 않을걸?”

그 말에 힐마르티노는 고민하지 않고 즉각 고개를 주억였다.

“나쁠 것 없지. 네게 지느니 죽는 게 더 나을 테니까. 그럼 나는….”

“모리타트 잭의 약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었던 걸까? 힐마르티노가 무슨 꿍꿍이냐는 얼굴을 했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말을 가로챘다.

“누가 더 훌륭한 사냥감을 잡느냐로 승자를 결정짓는 거 어때?”

그때 힐마르티노의 얼굴이 불쑥 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얇게 뜨며 중얼거렸다.

“아그레인의 껍질을 뒤집어 쓴 미친년은 아닌 것 같고….”

이윽고 그녀는 거리를 벌려 자신의 말의 안장 위에 올라탔다.

“건방지게 군 걸 후회하게 해 주마.”

멀어지는 흑마의 꼬리털과 힐마르티노의 머리칼 모두 똑같은 흑색이었다. 미안한데 이번 사냥은 내가 이길 것 같아.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서쪽 숲 안으로 들어섰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내가 잡은 건 족제비 한 마리가 다였다. 애초 노력할 마음도 없었기에 가장 먼저 황성 앞으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귀족들이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 사냥감을 확인한 힐마르티노가 커다랗게 비웃었다. 얼마나 큰 웃음이었는지 거리가 꽤 있음에도 내 지척까지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술잔은 보통 한 번의 사냥이 끝난 후 돌려진다.

그러니 내 사냥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원하신다면 노루라도 한 마리 바쳐 드리지. 어때?”

모리타트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멀어지는 방향에 리히튼이 있었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내가 오늘 어떤 일을 벌일지 알고 있을까? 그때, 시야의 가장자리로 트레이를 든 시종이 지나갔다.

‘아.’

저 시종이야. 고작 한 번 본 얼굴임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말을 돌려 빠르게 그쪽으로 달려갔다. 시종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내게 술잔이 가득 쌓인 트레이를 내밀었다. 시종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장갑을 벗으며, 새끼손가락을 소매 안쪽에 고정시켜 두었던 자그마한 칼날에 그었다.

“제넌입니다.”

“발레리아를 아니?”

“아니요. 잘은 모르나 이름은 들어 봤습니다.”

시종이 내게 눈을 맞추고 있을 동안 왼쪽에서 세 번째, 중앙에서 위쪽 잔을 잡는 척, 손가락의 피를 포도주에 털어냈다.

“그 애가 네 이야기를 종종했지. 꼭 한 번 말을 걸어보고 싶다고. 그전에 집으로 돌아가 버렸지만.”

시종이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피가 흐르는 손을 자연스럽게 떨구고 반대 손으로 다른 술잔을 쥐었다.

“네 얼굴을 보니 발레리아가 그리워지는구나. 이만 가 보렴.”

시종이 말 사이를 누볐다. 그의 트레이는 곧 황제에게 가까워졌다. 황제가 손을 뻗어 잔을 잡았다. 내가 피를 털어 넣었던 그 잔이었다. 잠시의 틈도 없었다. 황제는 즉시 술을 목구멍 뒤로 넘겼다. 그 순간 나는 기이한 공허함을 느꼈다. 황제든 하녀든, 허무한 죽음이란 지위를 가리지 않는구나.

“폐하?”

말 머리를 돌렸다. 어디선가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그들이 그곳을 향해 천천히 이동할 동안 나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폐하!”

고작 한 모금에 불과한 술에, 그 만큼의 피를 털어 넣었으니….

“시종! 당장 의원을 불러와! 지금 당장!”

다시 장갑을 꼈다. 언뜻 확인한 새끼손가락의 손톱 아래 살이 뭉텅 잘려나가 있었다. 아팠지만, 동시에 아프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위가 고요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푸흡.”

아, 제기랄.

“아하, 아하하하!”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몸을 가누지 못해 말에서 떨어질 뻔했어도 나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커다란 눈망울들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해요. 제 찢어진 장갑이 너무 우스워서.”

“푸훗.”

그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비비안느였다.

“후후…!”

비비안느가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게 한마디 하려는 듯 붉으락푸르락한 낯으로 달려 나오던 늙은 귀족이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모두가 유령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비비안느와 나를 쳐다봤다. 하하하. 정적이 내려앉은 그곳에서, 오직 나와 비비안느만이 미친 듯이 배를 잡고 웃었다.

누군가가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 여자가 폐하를 죽였다!’ 하지만 어떤 이도 그 발언에 동조하지 않았다. 여자, 남자, 청년, 노인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혼돈에 빠진 채 입을 닫았다.

그 즈음에는 나도 입꼬리가 아파 더는 웃을 수 없었다. 헐레벌떡 뛰어온 의원이 잔디 위로 추하게 엎어진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황제의 맥박과 숨을 확인했다. 의원은 곧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타계하셨습니다.”

타계! 한차례 파문이 일었다. 안장에 올라가 있던 귀족들이 하나둘 땅을 밟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 말에서 내려왔다. 시종장이 황제의 눈을 감겼다. 극심한 고통에 눈을 뜬 채로 죽은 건가. 나쁘지 않네. 자리에서 일어난 시종장이 귀족들을 향해 선언했다.

“이번 일의 전말이 밝혀질 동안 그 누구도 황성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는 이어서 리히튼과 모리타트가 선 방향을 향해 차례로 허리를 숙였다.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물론이지. 이번 일은 우리 잭 가문에서도 쉬이 넘어갈 생각이 없소. 제국의 명예가 달린 일이니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범인을 밝혀내야 할 거요.”

엄숙하게 발언하는 모리타트 공작은 내가 알던 모리타트와 상이했다. 이윽고 모두의 시선이 리히튼에게로 향했다. 리히튼은 감흥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틀까지는 시간을 내주지. 그 이상 이곳에 머물 생각은 없다.”

“각하. 재고해 주십시오. 이 사안은 그렌페르크의 명예가 달린….”

“더 시급한 사안은 새로운 황제 폐하를 모시는 일일 텐데.”

그의 한마디에 노골적인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젊은 귀족들은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반대로 죽은 황제를 둘러싸고 있던 늙은 귀족들이 분통한 눈빛으로 리히튼을 노려봤다.

“아직 폐하의 옥체가 채 식지도 않았습니다!”

“시체는 하루면 식지. 그렇담 내일이면 새로운 황제 폐하께서 제위에 오르시겠군.”

“어찌 그리 무정하십니까? 폐하께서는 언제나 각하를 존중하셨습니다!”

나는 시종장과 늙은 귀족들이 무엇에 화를 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의 별세를 애도하는 것보다 리히튼의 무정한 태도에 목청을 높이는 것이 더 앞선 일인 걸까?

“그거 참 감읍할 일이군.”

한마디를 끝으로 리히튼은 거리낌 없이 등을 돌렸다. 사람들 사이로 스쳐지나가는 그의 시선이 짧게나마 나를 향했다. 착각이 아니었다면 눈이 마주친 순간 웃었던 것 같다.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곧 얼음송곳 같은 빗물이 우르르 떨어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가린 귀족들이 바퀴벌레처럼 흩어졌다. 시종장을 제외하고 그 자리에 가장 오래 남아 있던 건 비비안느와, 그녀의 머리를 가리는 힐마르티노, 그리고 나였다. 빌힐름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 빠르게 성 안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

방으로 돌아온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황실 기사 두 명이 붙었다. 그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내 곁을 지킨다고 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호위보다는 감시에 가까운 배치였다. 그들은 특수 상황이라는 명목으로 내 방 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일부러 승마복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방 안을 활보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재미없었다.

똑똑.

빗줄기가 강해질 무렵, 시종이 방문자를 알리기 위해 들어왔다. 시종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급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원하는 반응이었다.

“흐음.”

날 찾아온 이는 모리타트였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문 양 옆에 선 기사들과 속옷만 걸친 내 꼴을 천천히 훑었다.

“내가 실수를 한 걸까, 아그레인 양? 기사들과 재미를 보는 중이었다거나.”

“원한다면 각하도 껴 줄 마음은 있어.”

모리타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의자 위에 걸쳐 있던 담요를 내 어깨 위에 덮었다.

“당신은 뭘 좀 아는 여자야.”

그의 고개가 기사들을 향해 돌아갔다.

“나도 아그레인 양과 재미를 좀 봐야겠는데… 남정네들 앞에서 쇼를 할 생각은 없어서 말이야.”

내 속옷차림에도 무덤덤하던 기사들이 눈에 띄게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저희는 시종장님의 명으로….”

“이해해. 시기가 시기인 만큼 아주 중요한 명을 받았을 거야. 안 그래? 그러니 잠시만 나서 망 좀 봐달라고. 아가씨의 명예를 위해서 모르는 척해 달라는… 설마 머저리처럼 못 알아듣지는 않겠지?”

모리타트는 주춤거리는 기사들을 향해 미소 지으며 검지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나 모리타트 잭이라고. 알지?”

못 봐줄 정도로 유치하네. 하지만 그 유치함이 잘 통했는지, 기사들이 주춤거리며 방을 나갔다. 황제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처럼 저리 선선하게 자리를 비켰을까? 다나한 2세의 죽음은 여러모로 유익했다. 나는 모리타트에게서 몸을 돌려 타오르는 벽난로 앞의 의자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봐, 아그레인 양. 혹시 의뢰도 받나?”

무슨 말인가 싶어 의자에 앉다 말고 그를 쳐다봤다.

“의뢰?”

“모르는 척하기는. 청부 살인 말이야.”

“…하?”

“솜씨가 아주 기가 막혀. 의뢰금은 얼마지? 다나한 2세까지 골로 보냈으니 천정부지로 솟았으려나? 성 한 채? 아니면 두 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너무나 큰 웃음이었기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의자 앞에 쓰러져야 했다. 모리타트는 그런 나를 아주 진중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는 몹시 진지해, 아그레인 양. 그대는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완벽한 암살자란 말이지.”

이쯤 되니 그가 내게 농을 던지는 건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암살자? 아하하, 어처구니가 없네. 나는….”

헛소리하지 말라고 말하려다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면 베르크네에게 짧게나마 암살 교육을 받은 전적이 있기는 했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야.’

의자에 제대로 앉아 그를 올려다봤다. 황제가 죽었다. 그것도 황위 후계자가 결정되기 직전에. 당분간 황성의 분위기는 외나무다리에 오른 것처럼 아슬아슬할 것이다. 한차례 피바람이 불 수도 있었다. 비비안느는 몰라도 빌힐름은 충분히 그럴 인물이었다. 한데 빌힐름의 최측근이자 그를 편하게 이름으로 부를 만큼 친밀한 사이인 모리타트가, 대책 회의를 해도 모자를 시간에 나를 찾아왔다?

“설마 비비안느 황녀를 죽여 달란 소리는 하지 않겠지.”

“위험한 소리를 하는군, 아그레인 양. 방금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

“그렇다면 누굴 말하는 건데?”

“누구인지 묻는다는 것은, 가능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현 상황에 나를 부리나케 찾아온 그의 의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답 없이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능글맞고 속을 알 수 없는 미친놈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조금 달랐다. 꽤 진실해 보였던 것이다.

‘힐마르티노라면 이런 식으로 먼저 자기 패를 보이지 않았겠지.’

아니나 다를까, 잠시 고민하던 모리타트가 맞은편 의자에 자리하며 입을 열었다.

“내 부인.”

“네 부인을 죽여 달라고?”

“부디, 목소리를, 낮춰서.”

그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빌힐름이 황위에 오르는 것보다 부인을 처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니.

“착수금은 무엇이든 가능해. 돈, 땅, 명예….”

“진심이구나, 각하.”

그런데 어쩌지. 나는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할 용의가 눈곱만큼도 없는데.

쾅!

그때였다. 누군가가 거칠게 문을 걷어찼다. 이윽고 늘씬한 여자가 비에 젖은 상태 그대로 성큼성큼 방 안에 들어섰다. 힐마르티노였다. 나를 발견한 그녀는 찬바람이 부는 싸늘한 얼굴로 다가왔다. 모리타트가 있든 말든 조금치 괘념치 않아하며. 오늘은 손님이 많네.

“너, 이….”

발길질로 테이블을 밀어낸 힐마르티노가 내 멱살을 쥐려 했다. 그러나 내가 담요만 걸친 속옷 차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빠진 얼굴을 했다. 그녀는 나와 모리타트를 번갈아 쳐다봤다.

“설마?”

“절대 아니니 이상한 오해 말게.”

모리타트가 평정심을 잃지 않고 대처했다.

“아하. 이상한 오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내가 찾아 왔을 때 아그레인 양이 속옷 차림이었을 뿐이야.”

“보통 속옷 차림인 숙녀의 방을 방문하지는 않지요.”

그리 관심 있지도 않으면서, 힐마르티노는 모리타트의 말을 물고 늘어졌다. 하나하나 따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내게는 축객령처럼 들렸다. 모리타트도 다르게 느끼지는 않았던 듯했다. 미친개에게 물리기 전에 모리타트는 혀를 차며 방을 나갔다. 힐마르티노는 그가 나간 즉시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이를 갈았다.

“너 대체 뭐하는 미친년이니?”

“뭐야. 자기소개 해?”

“얼마나 대단한 사냥감일까 했지… 그래, 그래. 아주 대단한 사냥감이었어. 인정할게.”

제국의 귀족이란 작자들이 황제의 죽음에 탄복하기는커녕 하나같이 기뻐하기에 바쁘다. 그녀는 가슴팍에서 쪽지를 꺼내 내게 던졌다.

“네가 바라던 모리타트 잭의 약점이다.”

사람을 시켜 전달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르르 몰려오면 누가 봐도 내가 가장 수상할 텐데.

‘하긴. 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이니까. 누군가 날 챙겨 줄 필요는 없지.’

하지만 힐마르티노는 여기서 그녀의 볼일을 끝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늘 쥐고 다니는 검은색 로드에서 튀어나온 기다란 검이 내 턱 아래에 닿았다.질린 눈으로 힐마르티노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자아, 예쁜아. 다나한 2세처럼 개죽음 당하기 싫다면 그때의 그 쪽지 내용이 어떤 의미인지 말하렴.”

어떤 쪽지를 가리키는 건지는 뻔했다.

“개와 주인? 말 그대로인데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으려나.”

“이번에는 귀걸이가 아니라 귀야.”

날카로운 날이 귀 아래를 파고들었다. 살이 베였는지 따끔거렸다. 문득 날아간 귀도 다시 생길지 궁금해졌다.

“이제 와 알아서 무슨 소용이야?”

나의 물음에 힐마르티노는 이제껏 보아 온 얼굴 중 가장 짐승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너 같은 정신 나간 년을 비비의 곁에 둘 수 없어.”

“자기소개 하지 말래도.”

그때,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번 방의 문이 열렸다. 내가 이토록 인기 많은 여자였던가? 세 번째 방문자는 조나단 부인이었다. 그녀는 미쳐 날뛰는 힐마르티노를 힐긋 보고는 문을 연 자세 그대로 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일에 힘쓰지 말고 나오세요, 각하. 드릴 말씀이 있어 모시러 왔습니다.”

힐마르티노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해. 난 이 아이에게서 반드시 받아 내야 할 답이 있거든.”

“검을 거두세요.”

“후우…. 오늘따라 왜 그래? 같은 말 반복하게 만들지….”

“폐하의 유서가 공개되었습니다.”

황제의 유서. 힐마르티노의 몸이 바위처럼 굳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조나단 부인이 천천히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황위는 빌힐름 황자가 잇게 될 거예요.”

***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뭐가 문제야.]

꿈속에서 리히튼은 혼자였다. 그는 경사적인 날에 걸맞게 몹시 화려하고 멋진 차림을 하고 있었다. 가슴팍에 새겨진 잉고르드 가문의 문장과 금색 견장에서는 빛이 나는 듯했다. 뒤로 넘긴 백금발 덕분에 멀끔한 이마가 훤히 보였다.

[무엇이 문제냐고. 멍청하게 서 있지만 말고 입을 열어, 아그레인.]

오늘은 비비안느의 황위 즉위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새장에 갇힌 개에 불과했던 우리가 결국 이 자리까지 왔다. 리히튼의 뒤에 서서, 그의 고군분투를 가만히 지켜만 보던 내게 지금 이순간은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도래할 비비안느의 시대에, 그녀의 머리 꼭대기 위에 서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될 리히튼. 나는 그런 그가 자랑스러웠으며, 사랑스러웠고 또한 존경스러웠다.

[널 사랑해, 리히튼.]

그러니 그것으로 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내 삶은 가치가 없어.]

황제는 죽고 빌힐름은 참수됐으며 비비안느가 황좌에 오르고 리히튼이 그렌페르크를 통치하는 이곳에, 나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오늘도, 내일도… 마치 파도를 눈앞에 둔 모래성 같아.]

나는 모든 것을 이루었어. 내가 그리던 나의 미래는 여기서 끝이었다.

리히튼이 마른세수를 했다.

[아그레인. 거기서 떨어지면 너라도 죽어.]

그러기 위해 이곳을 고른 것이다. 황성 별채의 꼭대기. 영화로운 즉위식 날 그 누구도 찾지 않을 공간. 하지만 리히튼만은 턱 아래의 땀까지 훔쳐가며 나를 만나러 온 공간.

[제발, 내 이야기를 들어. 네가 없으면 이 세계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미안해.]

발코니 뒤로 몸을 눕혔다. 리히튼이 이를 악물고 내게로 뛰어왔다. 하지만 내 몸은 이미 차가운 겨울 공기가 감싸 안은 뒤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내가 추락하는 모습을 끝까지 내려다 봤다. 그가 처음으로 텅 비어 보였다. 그렌페르크를 쥐락펴락하고, 종국에는 황위마저 제 입맛대로 뒤바꾸어 버린 남자에게선 절대 볼 일이 없으리라 여긴 얼굴이었다.

리히튼은 지친 듯했다. 이상하지. 죽음을 앞둔 순간에는 과거의 기억들이 조각처럼 흩어져 주마등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한데 나는 왜 마지막까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멀어지는 와중에도 리히튼의 얼굴이 기묘하리만치 선명하게 보였다. 리히튼은 내게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끝끝내 입을 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것이 나의…. …번째 죽음이었다.

***

촤악!

전신을 뒤덮은 한기에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머리가 띵했다. 세상이 둘, 아니 셋으로 쪼개졌다. 그러다가 곧 숨소리가 진정되며 잠들어 있던 청각과 시각이 원상태를 되찾았다.

‘꿈이었나.’

한참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내 몸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앞으로 끌고 와.”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였다. 거센 악력이 내 두 팔을 잡아끌었다. 누군가가 축 처진 내 머리를 붙잡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눈앞에는 황성의 시종장, 카이로 백작이 앉아 있었다.

“당신에게 진실을 고할 기회를 주겠소.”

주위는 어두웠다. 한겨울에 바깥 활동을 하는 것만큼 춥지는 않았으나 뼈 깊숙이 에이는 한기가 느껴졌다. 꿉꿉한 냄새가 나는 것을 보아 황성의 지하임이 확실한 듯했다.

‘빌힐름을 생각해서라도 사릴 줄 알았는데. 설마 납치할 줄은.’

잠에서 덜 깬 척을 하며 고개를 늘어뜨렸다. 시종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캐롤드 영애.”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곳에서 나갈 방도는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쉰 목을 가다듬은 후 대답했다.

“반역죄로 멸문한 핏줄에게 영애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캐롤드는 그렌페르크 제국과 역사를 함께한 건국 공신의 가문입니다. 비록 멸문했으나 그 후예는 귀족의 대우를 받아 마땅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제 꼴이 귀족에게의 대우로 생각되지는 않은데요.”

“황족, 그것도 황제 폐하를 살해한 용의를 받고 있는 인물에게 사람대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장정들이 구속하듯 붙들고 있던 내 팔을 놓았다. 시종장은 하룻밤 사이에 놀랄 만큼 핼쑥해져 있었다. 나는 엉망이 된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제가 용의자가 맞기는 합니까?”

“그건 캐롤드 영애가 더 잘 알 테지.”

“차라리 황족 모욕죄를 물으시지요. 그때 웃음을 참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은 저도 충분합니다. 충분하다 못해 넘쳐서 그날 사용했던 장갑을 불태워 버렸거든요.”

거짓말이었다. 어제 사용한 피가 묻은 장갑은 아마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을 것이다. 시종장이 노한 얼굴로 외쳤다.

“어찌 황제 폐하를 모욕하는가!”

“정확히 말씀하셔야지요. 선황 폐하입니다.”

시종장이 휘두른 팔에 얼굴이 돌아갔다. 늙은이 주제에 힘도 좋네, 제기랄. 너무 골렸나.

“이래서 반역의 핏줄은 죄다 싹을 잘라 버려야 해.”

시종장이 내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더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너희 캐롤드가 결국 일을 칠 줄 알았지. 죽은 캐롤드 후작이 성스러운 『태양이 흐르는 강』 협약을 위반하고 가짜를 가져다 바칠 때부터 알아 봤어. 반역의 핏줄은 못 속이는군.”

나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크게 웃을수록 근엄하던 시종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핏줄로 따지자면 그 누가 레그윈을 이기겠습니까? 그 피에 미친 정신병자들을 말이에요. 별채로 끌려갔던 제 하녀는 어디에 묻혔나요? 아, 너무 많아서 잊으셨을까 봐 덧붙이는데 그 아이의 이름은 발레리아 몰타….”

숨이 턱 막혔다. 극심한 고통이 복부를 후려치고 심장까지 짓눌렀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입술을 깨물며 바닥을 굴렀다. 구르는 순간에도 하루면 나아질 상처라 생각하니 위안 아닌 위안이 되었다.

“하아, 하아….”

“폐하를 향한 그 악의! 네년이 일의 주범임이 틀림없군.”

“저는, 하아…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인데요.”

“폐하는 남들과 조금 다를 뿐이다.”

시종장이 주름으로 자글자글한 이마를 한껏 구겼다.

“제국을 통치하는 레그윈의 핏줄이 범인들과 같을 리가! 선정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어린 여자 몇으로 제국이 형통하다면 그것이야말로 만사형통인 것이야.”

“아주 레그윈의 개를 자처하네….”

욱신거리는 복부에 힘을 주고 상체를 들었다. 시종장 옆에 나란히 선 두 명의 기사는 호위를 명목으로 내 방에 들러붙어 있던 그자들이었다.

“이봐요, 카이로 백작.”

말이 통하지 않는 자와 오래 대화할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다나한 2세는 내 손에 죽었으니 시종장이 그 어떤 개소리를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백작에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시종장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빌힐름 전하께서 널 거두셨다 하여 시건방지게 굴지 마라. 여자는 오래 가지면 질리는 법이고, 너만 한 얼굴은 제국에 차고 넘친다. 적발에 녹안을 지닌 여자의 빈자리는 대체품으로도 충분히 채울 수 있음이야.”

빌힐름? 내가 빌힐름의 이름을 대고 목숨을 구걸할 거라 생각하는 걸까? 아니, 나는 더 이상 빌힐름의 발아래에서 등을 웅크리고 있을 마음이 없었다. 비비안느도, 조나단 자매도 마찬가지였다. 내게는 내 뜻대로 휘두를 기회가 있는, 그러나 누구에게도 쉬이 휘둘리지 않을 존재가 있었다.

“됐어요. 빌힐름 전하는 제 알 바 아니에요. 나는 모리타트 각하와 긴밀한 비밀을 나누는 사이입니다. 남녀 간의 정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는 사이란 뜻입니다. 죽기 전에 그분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모셔와 주세요.”

시종장은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얼굴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뻔하디 뻔한 거짓말을 대하는 얼굴이었다.

“증표로 각하로부터 사냥 대회 우승 상품을 인도 받았습니다. 그분께 여쭤보시지요. 그 정도는 확인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시종장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의심이란 것을 하는 눈이었다.

‘지독한 충성이야.’

레그윈에 죽고 레그윈에 사는 자가 황위 후계자로 빌힐름을 점찍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무려 10년도 훨씬 전부터 비비안느를 제치고 황태자 대우를 받던 후계자니까.

“맞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모리타트 각하께 ‘바라는 대로 부인을 죽여 드리겠다’라 전해 주세요. 그 문장이 우리의 신호입니다.”

“거짓말이면 넌 죽는다.”

“어차피 이 상태로는 어떻게든 죽을 처지 같은데요.”

시종장으로부터 무언가를 전달받은 기사가 지하실을 벗어났다. 나는 그런 시종장의 얼굴을 보며 궁금해졌다.

‘개를 자처하면 세상이 살만한가?’

나는 말 그대로 개 같았는데. 그마저도 잃고 모든 걸 받아들이면 편한 건가.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 게 문제였던 걸까. 카이로 백작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끼익.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무거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낡은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윽고 들어선 모리타트의 곁은 여섯이 넘는 기사가 지키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미간을 구기고 혀를 찼다. 걸어 나온 기사가 내 어깨를 두터운 담요로 감쌌다. 모리타트는 나의 턱을 이리저리 돌려 얼굴 상태를 확인한 후 다소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시종장에게 말했다.

“하루를 못 참은 모양이오, 카이로 백작.”

“그것이 폐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선황 폐하겠지. 말은 똑바로 하시오.”

시종장이 눈을 치켜떴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모리타트가 단호한 얼굴로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백작은 아그레인 양에게 접근할 수 없소.”

꽤 세게 나가는데? 부인을 그렇게 죽이고 싶은 건가. 나는 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복부가 아린 탓에 등을 펼 수 없었다. 시종장이 목청을 높였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 여자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절대….”

“빌힐름 전하로부터.”

내 꼴을 보다 못한 기사가 짧은 사죄와 함께 내 몸을 업었다. 여섯 명의 장정 전원이 나를 호위하며 지하실을 벗어났다. 내 방에서와 달리, 말 그대로 ‘호위’를 하면서. 습한 계단을 올라가는 중, 멀어지는 등 뒤의 지하실에서 모리타트의 목소리가 웅웅 울려 퍼졌다.

“아그레인 캐롤드 양은 곧 황후 폐하가 되실 몸이니 귀히 모시라는 명을 받았소.”

…뭐?

“그러니 언행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백작. 하루라도 더 평탄한 삶을 살고 싶다면 말이지.”

그 순간 머리가 번쩍 뜨였다. 내가 그렌페르크 제국의 황후가 될 예정이란 망언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모리타트가 당장의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즉흥적인 헛소리에 불과할 테니까. 나는 기사의 등에서 내려 다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이제 막 지하실을 벗어나던 모리타트가 나를 발견하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를 지나쳐 시종장에게 다가가 주먹을 휘둘렀다.

한 대 맞고 멍한 표정이었던 시종장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진노했다.

“이, 이 미친 계집애가 어디서 감히 손찌검을!”

“목청 높이지 마세요. 내가 황후가 되는 날이 네 장날입니다. 알아들었어요?”

시종장이 황망한 눈으로 입을 다물었다. 역시 권력이란 좋은 거구나. 황당하다는 얼굴의 모리타트를 지나서 다시 기사에게 업혔다.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더니 안 그래도 아픈 복부가 더 아렸다. 밖은 아직도 캄캄한 새벽이었다. 뒤늦게 폭소를 터트리며 따라오던 모리타트가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한 배를 타는 겁니까? 그렇죠? 예비 황후 폐하.”

그가 입에 담은 끔찍한 단어에 진저리를 치며 대답했다.

“충분히 도움 되었으니 그만 언급해.”

“으음? 도움이 되었다니?”

“각하 덕분에 목숨은 부지했다는 소리야.”

내 말을 가만히 듣던 모리타트가 헛웃음을 뱉었다.

“아그레인 양. 설마 농담이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한마디에 핏속이 서늘해졌다. 모리타트는 늘 지니고 있던 옅은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고 말했다.

“국법에 따라 빌힐름 전하의 황위 즉위식은 다나한 2세가 타계한 지 정확히 한 달 후에 열리지. 그날 아그레인 양은 전하의 옆자리에 서게 될 거야. 황후로서.”

그야말로 없던 입맛까지 뚝 떨어지는 소식이었다. 빌힐름의 옆에 서서 관을 쓰고 ‘황후 폐하’라 불려야 한다고?

‘황후로 만들어 줄까? 누이.’

나비 경주에서 빌힐름이 스치듯 했던 발언이 떠올랐다. 그 누구라도 그 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황후. 트리비아체 저택의 하녀에 불과했던 내가, 황후라고? 나는 기사의 등에 얼굴을 박고 웃음을 숨겼다. 그동안 모리타트는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황후 폐하께서 나의 청원을 들어주신다니! 이보다 더 돈독한 관계가 있을까? 응? 나비 경주에서 아그레인 양을 만난 건 내 천운이야. 아암, 그렇고말고.”

나는 진심을 다해서 모리타트에게 물었다.

“빌힐름이 미쳤나?”

“빌힐름은 원래 미쳤지.”

우문현답이었다. 나는 질문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나는 반역 가문의 딸이야. 그리고 다나한 2세를….”

죽였지. 마지막 말은 입 안으로 삼키고, 우리를 감싸듯 따라 움직이는 황실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은 마치 귀가 없는 듯 오직 정면만을 응시한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미 모두 빌힐름의 사람인 걸까.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모리타트가 흥분에 격양된 음성으로 대답했다.

“바로 그 점이야! 아그레인 양…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빌힐름이 왜 그렇게 아그레인 양을 특별 취급하는지.”

글쎄. 네가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을까?

“강력한 황제는 역사조차 바꿀 수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반역 가문? 단언컨대 일주일 안으로 오명이었다고 발표될 거다.”

그러면 뭐하나. 죽은 아버지와 내 하인들은 되돌아오지 않을 텐데. 기사들은 나를 방 안까지 배웅한 후 방을 나갔다. 물론 모리타트는 아니었다. 그는 마치 절친한 친우의 방에 놀러온 양 이곳저곳을 뒤지며 구경하기에 바빴다.

“죄다 구하기 힘든 물건들뿐이군. 빌힐름이 갖다 바친 건가?”

“내가 그의 재물을 물 쓰듯 사용하긴 했지.”

“흐음. 역시 신기하단 말이야.”

나는 창문 아래의 메마른 정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황성의 2층. 죽지는 않겠지만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높이었다.

“각하. 부인은 왜 죽이려 하는 거야?”

그는 갑작스레 변한 대화 주제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딱히 숨기고 싶어 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내 부인은 어여쁘고, 똑똑하고, 나와 빌어먹게 안 맞지. 그녀는 가문에 꽤나 충성스러운 여자라 나와 갈라서려 하지도 않을 거야. 뭐, 서로 정부가 있는 마당에 신경 쓸 일은 아니었어.”

미약한 오르골 소리가 방 안을 울려 퍼졌다. 나는 소리가 나는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벨버른 백작이 내게 구애하며 갖다 바쳤던 소형 오르골에서 들려오는 음악이었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물건을 모리타트가 건든 모양이었다.

“빌힐름이 황위를 계승하기 전까지는.”

모리타트는 넋을 놓은 채 발레리나가 하염없이 돌고 있는 오르골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여자들이야말로 그런 꿈이 있지 않나? 사랑하는 자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꿈.”

“그래서 각하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데?”

끔찍하게 로맨틱한 남자였다. 사랑하는 여자와 혼인하기 위해 부인을 청부 살인하겠다는 건가. 시기가 시기인 만큼 대업을 위해서라 여겼는데, 이토록 인간적이면서 싸구려 같은 연유에서였다니. 문득 힐마르티노에게서 받은 물건이 떠올랐다. 나는 가슴 안쪽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쪽지를 꺼냈다.

<아즈마리아 윌>

동시에 모리타트가 웃음기 서린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걸 밝힐 수는 없지.”

그 밝힐 수 없는 존재가 아즈마리아 윌이라 이거군. 미약하게나마 눈치채고 있던 참이었다. 나비 경주에서 아즈마리아를 언급하던 모리타트의 표정이 유독 씁쓸해 보였기 때문이다.

‘부인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목을 맨다더니.’

부부 둘이서 닮은 점이 참 많은 듯했다. 원래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오래 함께하기 힘든 법이지.

“그래서, 예비 황후 폐하. 제 청원은 언제쯤 이루어 주실 수 있으신지?”

모리타트가 기대를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나는 쪽지를 잘게 잘라 입 안에 넣고 삼켰다. 그리고 짐승을 구경하는 눈으로 바뀐 모리타트에게 말했다.

“그보다 앞서 중요한 일이 있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지하실에서와는 차원이 다른 한기가 몸을 덮쳤다. 한 번 주춤하면 두려움이 밀려 들어와 다리를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나는 곧장 창틀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모리타트에게 말했다.

“빌힐름에게 전해 줘. 황후가 되느니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고.”

겨울의 메마른 정원 위로 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경악에 물든 모리타트의 얼굴이었다.

“이런 미친, 잠깐…!”

그에게선 처음 듣는 커다란 외침이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모리타트에게 남긴 말은 진심이었다. 내 마음을 알아 줘, 빌힐름. 나는 거리낌 없이 투신을 할 정도로 네가 끔찍하단 말이야.

‘이번에 보일 미래도 쓸모 있으면 좋을 텐데.’

큰 충격이 전신을 덮쳤다. 이윽고 긴 이명이 들려왔다. 눈앞이 흔들리고 시야가 뒤집힌다.

나는 어느새 푸른 초목이 자라나기 시작한 너른 초원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듯 새까맸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어서 이리로 와. 누이가 돌아와야 할 곳은 내 곁이야. 꽤 즐거웠지? 이제 그만 이 장난을 끝내자.]

나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뜨거운 적색 불꽃이 날개처럼 솟았다. 푸른빛이 펼쳐진 눈앞의 초원과, 새까만 재가 되어 무너지는 등 뒤의 저택이 마치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나는 등을 돌렸다. 그곳에는 리히튼이 서 있었다. 어떤 얼굴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를 괴롭히는 건 빌힐름도, 저주와도 같은 그 힘도 아닌 바로 나다. 리히튼에게 말했다.

[이건 명령이야. 나를 잊고 너를 위해 살아.]

두 다리가 허공에 떴다. 나는 아마, 죽었다.

***

눈을 떴을 때는 낯선 방에 누워 있었다. 침대도, 천장도, 방 안을 구성하는 가구들도 내가 알던 내 방의 풍경과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마를 짚기 위해 팔을 들었으나 붕대로 꽉 감겨 있는 탓에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아….’

칼로 자상을 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후유증이었다. 다신 뛰어내리지 말아야지. 머리에 피가 통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괘종시계의 시침은 숫자 10을 가리키고 있었다. 근래에는 눈을 뜰 때마다 새벽 아니면 밤이라, 햇빛을 본 일이 적은 듯했다. 나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안 그래도 예민한데, 잠자리마저 뒤바뀐 탓이었다. 더듬더듬 걸음을 이어 복도를 건넜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의 형상을 보아하니 이곳은 황성 서쪽 구역의 3층이었다.

‘2층에서 3층… 신분 상승인가?’

즉위식과 함께 황후가 될 예정이라던 모리타트의 말이 처음으로 피부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힘겹게 도달한 내 방의 문은 단단하게 잠긴 후였다. 벽에 기대어 잠시 숨을 돌렸다. 내 물건이 하나도 없는 그 방에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여기서 잠들어 버릴까? 얼어 죽지는 않겠지.’

쉴 곳. 잠깐이라도 쉴 곳이 필요했다. 그러다 비척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움직여 또 다른 방 앞에 도달했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방 안은 어둡고 따스했다. 벽난로에서 들려오는 불꽃 튀는 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나는 그 앞에 머리를 대고 웅크려 누웠다. 침구는 없어도 그 방보다 훨씬 따스하고 평화로웠으며 고요했다.

“아그레인.”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변명하듯 허공에 대고 입을 열었다.

“그 방은 내 방이 아니야. 내 방은 잠겨 있어서 돌아갈 수도 없어.”

“네가 사용했던 방도 진짜 네 방이지는 않지.”

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그의 음성은 어느새 내 지척에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 리히튼이 내 몸을 안아 들었다. 이미 두 팔,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진 뒤라 인형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리히튼의 체온을 느끼며 바짝 마른 입술을 열었다.

“나는 내 방을 기억해. 이곳이 아닌 캐롤드에서의 내 방 말이야.”

리히튼은 내 몸을 조심스럽게 소파 위에 뉘였다. 온몸이 쑤셨으나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꿈속을 헤매는 듯한 몽롱한 감각이었다. 두터운 침구가 차갑게 식은 내 몸을 덮었다. 나는 바로 옆에 자리 잡은 리히튼의 인기척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입이 절로 움직였다.

“캐노피 색이 황색에 가까운 노란색이었어. 책장에 가득한 물건은 책이 아니라 내가 어디선가 주워 온 형형색색의 돌멩이와 말라비틀어진 생화였지.”

그날 이후 캐롤드의 꿈을 꾼 적도 없었는데, 먼지 아래에 묻혀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드문드문 고개를 들었다.

“킨은 내 방에 올 때마다 새로운 꽃을 한 송이씩 가져와서 상태가 가장 좋지 못한 꽃과 바꾸었어. 하루는 데이지, 하루는 로즈마리….”

내가 기억하는 행복한 시간에는 항상 아버지와 킨이 함께했다. 킨이 나의 배다른 형제가 된 이후 이어졌던 일 년이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해였다. 황제 탄신일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캐롤드를 벗어나지 못했던 내게, 킨은 유일한 친구이자 형제였다. 우리는 늦은 밤까지 캐롤드 저택 곳곳을 누비며 함께 공부하고, 함께 놀았다. 아버지는 그런 우리를 타박하지 않고 그저 다치지 않길 당부하며 돌봐 주실 뿐이었다.

“지금은 전부 재가 되어 땅 아래에 묻혔겠지만.”

리히튼은 아무런 대꾸 없이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킨이 언급되어도 그러려니 여겼다. 나는 그의 앞에서 킨 캐롤드를 내 가족인 양 언급하는 이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실제 나의 형제가 맞다는 사실 또한.

“리히튼.”

그의 숨소리는 차분했다. 마치 내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가 황후가 되면 빌힐름을 더 고통스럽게 끝낼 수 있을까?”

잘 생각해 보면, 내가 빌힐름을 증오한다는 것 외에 그 대단한 지위를 거부할 이유도 딱히 없지 않은가.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첫날밤을 가지는데, 내 몸은 독물인 거지. 빌힐름은 황제가 된 지 하루 만에 다나한 2세와 똑같은 꼴이 되는 거야.”

가능한 머릿속에 그려내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으나, 빌힐름의 비명을 상상하니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다.

묵묵히 입을 닫고 있던 리히튼이 느릿하게 대꾸했다.

“나는 내일 오후에 잉고르드로 돌아갈 거다. 그리고 즉위식에 맞춰 다시 황성을 찾아오겠지.”

벌써 그렇게 됐나. 내게는 그다지 즐거운 소식이 아니었다. 말문이 막혔다. 그는 내게 무슨 대답을 바라기에 다른 말도 아닌 떠난다는 소릴 곧장 한 걸까? 이제까지 잘 지내왔음에도 불구하고 돌연 그가 없는 황성에서 한 달을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깜깜했다.

‘리히튼은….’

리히튼은 혹시 내가 그와 함께 잉고르드로 돌아가길 바라는 걸까? 황성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길 바라는 걸까?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그를 따라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 황후가 되지 말라는 소리를 안 해?”

그 사실을 알기에, 이런 물음을 건네는 내가 몹시 우습게 느껴졌다. 나의 결정에 리히튼의 의사가 얼마나 큰 영향을 준다고.

“네가 원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해, 아그레인.”

무언가가 얼굴 위로 닿아 왔다. 리히튼의 시원한 손끝이 식은땀으로 축축한 내 이마를 상냥하게 쓸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나는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개가 되지만, 너는 늘 힘없이 사그라지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 귀에 익은 문장이었다.

‘오늘도, 내일도… 마치 파도를 눈앞에 둔 모래성 같아.’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단번에 기억이 난 것이다. 지하실에서 찬물을 맞고 정신 차리기 직전, 꿈속에서 내 입으로 내가 직접 뱉은 말이었다. 이어진 리히튼의 목소리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읊조리듯 허무하고 고요했다.

“너는 나를 원하지만, 딱 너를 위한 만큼만 나를 원하지. 네가 바라는 모든 것 중에서 나는 가장 뒷전이야. 이 비참함도 이제는 익숙하군.”

‘널 사랑해, 리히튼. 하지만 그보다 더 내 삶은 가치가 없어.’

이 말도.

“네가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세계인데.”

‘네가 없으면 이 세계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이 말도 모두. 꿈속에서 죽기 직전에 그와 내가 나눈 대화지 않은가. 하지만 그 꿈은 미래가 아니었다. 육신의 고통이 따라야만 미래를 볼 수 있으니, 이 꿈들은 잉고르드의 독을 섭취한 이후부터 보아 온 과거의 파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왜 독물을 마셔야만 과거를 볼까?’

독에서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내 몸은 끝없이 재생한다. 독에서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내 몸은 끊임없이 고통을 겪는다.

‘아아. 이제 이해했어. 육신을 해하면서 볼 수 있는 건…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 역시 마찬가지였던 거야.’

나는 꿈을 통해 과거를 엿본다. 과거의 나는 이미 두 번 목숨을 잃었다. 어쩌면 두 번이 우습다 여겨질 만큼 더 많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심장은 아주 멀쩡하게 뛰고 있었다. 죽었던 내가 어찌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네 바람대로 모든 것을 바꾸어도 나쁘지 않겠지. 당장 해가 뜨면 황성의 모두를 죽여 버리고 너를 왕좌에 올려 줄까?”

새장의 개에 불과했던 리히튼은 어떻게 그렌페르크를 손아귀에 쥘 수 있던 걸까? 리히튼은 어째서 모든 일을 아는 양 행동하는 걸까? 리히튼은 왜 지친만큼 그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걸까?

“대신 너는 약속해야만 해.”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 그저 무던하고 평온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확인한 리히튼의 눈은 그렇지 않았다. 심해보다 더 깊숙한 바닥으로 떨어진 그의 눈은 내게 멈추라고 말하고 있었다. 포기하라고. 이만 포기하고 그를 선택하라고.

“이번 기회 또한 포기하게 되더라도, 날 죽인 후에 포기하기로.”

죽었던 내가 멀쩡히 살아 있는 이유. 리히튼이 그런 나를 탓하는 이유.

‘그가 나를 살렸으니까.’

빌힐름의 머리를 베는 일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

‘이미 여러 번 베었으니까.’

고작 수년 만에 그렌페르크 제국을 집어 삼킬 수 있었던 이유.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

리히튼에게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존재한다면, 이 모든 이유가 설명된다. 나는 확신했다. 리히튼의 힘은 회귀였다. 그는 나를 위해서 기꺼이 수십 번의 과거를 반복해 온 것이다.

아아.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막연한 공포가 밀려들어왔다. 리히튼이 겪어온 길고도 끔찍한 시간들은, 고작 짧은 기억의 조각들로만 내 머리에 남아 있었다. 리히튼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은 당연했다. 리히튼이 나를 증오하는 것 역시 너무나 당연했다. 빌힐름이 내게 악마라면, 리히튼에게 있어 악마는 나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투신했다더니,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지고 있나 보군.”

멍하니 얼굴을 쓸었다. 불에 델 듯 뜨거운 눈물이 뺨을 가로질러 떨어지고 있었다.

“…아파.”

내가 앓는 소리를 내자 리히튼이 짧게 혀를 찼다.

“내가 네 손을 괜히 찌른 게 아니야. 너는 조금 더 현명한 방법으로 몸을 써야 할 거다. 육체는 완전해도 정신은 완전하지 못하니까.”

“아파.”

“물론 너라면 홧김에 떨어져 내렸을 확률이 더 높겠지만.”

맞아. 그는 항상 옳은 소리만 한다. 몸을 일으킨 리히튼이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진통제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가 건넨 약을 거절했다. 대신 곁에 앉은 리히튼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느리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등을 울렸다. 리히튼에게 고백하듯 말했다.

“미안해.”

리히튼은 나를 당겨 안지 않았다. 다만 꼼짝 않고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아는 말 중 가장 끔찍한 소리야.”

아니, 이제는 안다. 나는 죽음 앞에서 그에게 늘 미안하다고 말하곤 했다.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이. 머리 위가 무거워졌다. 리히튼이 내게로 몸을 기댄 것이다.

“너는 내게 미안한 짓을 해선 안 돼, 아그레인. 네가 나를 바라는 마음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

다음날 아침에는 이상하리만치 정신이 맑았다. 몸은 거대한 바위에 짓눌린 것처럼 무겁고 아프고 불편했으나 오감은 또렷하고 선명했다. 나는 이 느낌을 안다. 오늘은 꽤 산뜻한 일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가 맑을 때는 대개 그러했으니까.

빌힐름은 직접 날 찾아오지 않는 대신 타인을 시켜 살뜰하게 나를 보살폈다. 방도, 사람도, 음식도 모두 황제가 즐길 법한 최고의 것들이었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하나하나 모두 받아들였다. 좋은 건 좋은 거니까. 그러나 갑작스러운 방문객들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날 오전부터는 얼굴도 모르는 자들이 차례로 문병을 왔다. 하나같이 선물을 품에 안은 시종을 대동하고서.

“몸을 소중히 하셔야 합니다, 아그레인 캐롤드 양. 이 로오얄 루이보스는 황금을 먹고 자란 루이보스가 원재료인 잎으로, 여자의 몸에 그만입니다. 피부를 보호하고 깊은 잠에 들게 하는 것은 물론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수 있도록 돕는다지요!”

아직 정오도 안 된 시각이었다. 네 번째로 날 찾아온 방문자는 드레스가 터지지 않는 게 용할 만큼 비대한 몸집을 가진 귀부인으로, 역시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나는 번거로움을 숨기지 않은 채 그녀에게 말했다.

“그 말은 즉 내가 지금 혼외 임신을 했다는 소리인가요?”

“예?”

“불쾌하군.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트리고 있는 겁니까?”

귀부인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내 엄지 손톱만한 진주가 그녀의 손등 위에서 번쩍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순전히 로오얄 루이보스의 효능에 대해서….”

그녀의 시종에게서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철통을 빼앗았다. 그리고 오늘 오전부터 내내 나를 호위하고 있는 기사에게 건넸다.

“이 기분 나쁜 철통을 마구간에 버려 줘요. 지금 당장.”

귀부인은 커다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시름시름 앓으며 방을 나갔다. 뻔뻔하게 문병 올 낯짝은 있는 주제에 눈앞에서 선물이 버려지는 걸 목도할 용기는 없나 보다. 다섯 번째로 찾아온 방문자는 오늘 날 찾아온 문병인들 중 가장 젊은 귀부인이었다. 그녀의 시종은 금색 채집장을 들고 있었다. 어찌된 게 하나같이 금칠한 물건들만 들고 다닌다.

“이 아이는 제가 돌보는 온실의 나비여요, 캐롤드 영애.”

어린 귀부인은 수줍게 웃으며 내게 채집장을 건넸다. 역광에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꽃잎 같은 게 들어가 있는 것 같기는 했다.

“행운을 불러오는 아이라 황성에도 데리고 왔는데 영애에게 꼭 선물해 드리고 싶어요.”

나비 경주가 떠올라 순식간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나는 몸을 일으켜 창문을 활짝 열고 채집장 안의 나비를 날려 보냈다. 경악한 귀부인이 두 뺨을 부여잡고 창밖으로 몸을 숙였다.

“꺄악! 마리!”

“걱정 마세요. 마리는 좋은 곳으로 갔을 겁니다. 아름다운 수컷을 만나 성공적으로 종족을 보전하겠지요.”

“읏….”

“아니면 마리는 수컷이었나요?”

“으흑, 흑. 마리이!”

뭐. 수컷이 수컷을 못 만난다는 보장은 없지. 다섯 번째 방문자가 나간 후에는 방이 썩 조용해졌다. 드디어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리히튼은 오늘 오후 떠난다고 했지.’

그렇다면 이제 슬슬 아즈마리아와 모리타트를 만날 때가 되었다. 다행히 둘 중 한 명은 따로 부를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점심 식사 시간이 지난 직후 모리타트가 날 찾아왔기 때문이다.

“댁을 찾아올까 말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캐롤드 영애.”

그의 안색은 영 좋지 못했다. 눈에 띄게 조심스러운 감도 느껴졌다. 눈앞에서 뛰어내린 여자와 하루하고 반나절 만에 다시 만났으니 그럴 만했다.

“안 어울리게 존칭은.”

“화제의 아그레인 캐롤드 양과 너무 가까우면 추문이 돌 게 분명하거든요.”

모리타트는 오늘 문병 온 방문자 중 유일하게 시종을 대동하지 않았다. 그는 창문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연스레 의자에 자리 잡았다.

“성격 파탄이라는 소문이 황성 곳곳에 돌고 있더이다, 아그레인 양. 선물이란 선물은 죄다 망가뜨린다기에 이 모리타트 잭은 빈손으로 왔지요.”

칭찬이라도 해 주길 바라는 건가? 모리타트는 건조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음소리를 냈다. 좋게 말해도 시체 꼴을 겨우 면하고 있는 나의 상체 곳곳을 그의 눈길이 살폈다. 미약한 씁쓸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좋게 생각하세요. 사랑으로 맺어지는 혼인은 적어도 귀족 사회에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런 말도 할 줄 아는 남자였던가?

“그 사랑 때문에 부인을 죽이려는 남자의 입에서 나올 소린 아닐 텐데.”

“살다 살다 황후 자리가 싫다는 여자는 처음 봐서 그럽니다.”

나는 서랍 한 구석에 쌓아 두었던 초콜릿의 은박지를 까며 그에게 물었다.

“잉고르드의 마차는 떠났을까?”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곳에 있어도 되는 거야?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는데.”

모리타트는 한 치의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는 능숙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슨 소릴 하시는 건지 영 모르겠군요.”

“순수한 마음으로 놀라워서 그래. 친우의 약혼자였던 것으로 모자라, 적장의 아성으로 도망친 여자를 아직까지 잊지 못한다는 게.”

무려 잭 가문의 수장이자 그렌페르크 제국의 공작인 남자였다. 원한다면 방 하나를 제 취향의 미인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인물이, 고작 여자 한 명을 못 잊어 인간성까지 상실하려 하다니.

“그래서 사랑이라는 건가?”

적어도 내가 이해할 만한 영역은 아닌 듯했다. 모리타트는 입을 꾹 다문 채 그 어떤 맞장구도 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통보했다.

“각하. 오늘 오후 12시에 별관 ‘태양이 흐르는 강’ 앞으로 나와.”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던 모리타트가 미간을 좁혔다.

“밀회입니까? 말했듯 저는 아그레인 양과 추문을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만?”

“내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한 모리타트 잭인데… 이쯤 되면 간절히 바라는 청원 하나쯤은 이루어 줘야 하지 않겠어?”

반응이 영 미덥지 않다. 나는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걱정 마, 죽는 건 포기했으니까. 앞으로 각하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일 일은 없을 거야. 장담할게.”

그제야 모리타트의 표정이 평온을 되찾았다. 보기보다 담이 작단 말이지. 나이에 맞지 않게 소년다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에게 퍽 어울린다 생각됐다. 아, 그래서 아직도 한 여자를 잊지 못하는 건가?

“정확히 정오야. 늦어서도, 일러서도 안 돼.”

“기대하겠습니다.”

모리타트는 형식적인 안부 인사를 몇 번 건네고는 아쉬움 없이 방을 떠났다. 정오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 나는 시종을 불러 명했다.

“아즈마리아 윌에게 찾아가서 내 말을 전해라. 네 스스로가 누구인지 궁금하다면, 곧장 별관 3층의 서쪽 구역으로 오라고.”

그렇게 십여 분가량을 하늘만 쳐다보다가 모피를 걸치고 방을 나갔다. 방구석 의자에서 가만히 책을 읽던 기사가 황급히 쫓아 나왔다.

“아가씨, 제가 부축을….”

“따라오지 마.”

“전하께서 아가씨의 호위를 명하셨습니다.”

“오랜 친우를 만나러 갔다 올 뿐이야. 아즈마리아 윌 알지? 그 애와 잠시 만나기로 했거든.”

그래도 떨어질 생각을 안 하기에 걸음을 멈춰서 눈을 마주했다.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따라온다면, 속옷만 입고 황성을 나도는 아그레인 캐롤드 아가씨를 모시게 해 주겠어.”

이번에는 말이 통했다. 오전 내내 귀부인들을 홀대하던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듯했다. 다행이네. 나라고 해서 뼛속까지 한기가 드는 날씨에 맨몸으로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가볍게 등을 돌린 나는 몇 걸음 옮기다 말고 다시 기사의 앞으로 돌아갔다. 그에게 물어볼 이야기가 있었다.

“있잖아, 경. 모리타트 잭 공작과 아즈마리아 윌은 어린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나?”

기사는 신중한 고민 끝에 대답했다.

“잭 공작 각하 내외분과 윌 영애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셨습니다. 황성을 방문하실 때도 늘 세 분이서 함께였죠. 밝은 웃음소리가 황성 안을 가득 채웠었는데….”

그런가. 셋이 꽤 각별한 사이였던 모양이지. 그래봤자 지금은 한 명이 한 명을 청부살인하는 관계가 되었지만. 나는 얼어붙은 겨울의 정원을 건너 별채 안으로 발을 디뎠다. 아즈마리아는 반드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그레인 캐롤드’가 차기 황후로 간택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분명히.

별채는 여전히 조용하고, 기괴했으며 추웠다. 귀를 기울이면 어디선가 유령 우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그리고 『태양이 흐르는 강』 앞에는 곧게 등을 펴고 선 흑발의 여자, 아즈마리아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즈마리아는 한눈에 담기에도 벅찬 거대한 그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게 뭔지 알아?”

흠칫, 어깨를 굳힌 아즈마리아가 날이 선 표정으로 나를 바라 봤다.

“기억해? 내가 예전에 네게 물었었잖아. 『태양이 흐르는 강』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고.”

아즈마리아의 경계 어린 시선은 풀릴 줄 몰랐다. 나를 살피던 그녀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당신과 사담이나 나누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야.”

사담이라. 그녀의 말을 인정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이 거대한 그림에 관해 논하는 일이 사담에 불과하겠지. 사교장에서 친분을 쌓기 위해 활용되는 많고 많은 미술 작품들 중 하나에.

“그렇게 말하니 서운하네. 『태양이 흐르는 강』이야말로 아그레인 캐롤드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인 것을.”

아즈마리아가 완전히 내게로 돌아섰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내게 물었다.

“너는 대체 누구지?”

아마 그 물음을 받아야 하는 건 내가 아닌 아즈마리아 스스로가 아닐까.

“누구기에 나를 사칭하고, 아그레인이라는 이름이 네 것인 양 뻔뻔하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지?”

내가 잉고르드를 떠난 지 벌써 두 달이었다. 두 달 동안 아즈마리아는 제자리걸음만 반복한 것처럼 들렸다.

“그 자리라면 혹시 빌힐름의 옆자리를 말하는 걸까? 곧 황후가 될 내 위치? 이해할 수 없구나, 아즈마리아. 빌힐름이 무서워 도망친 건 너야.”

두 눈을 부릅뜨며, 아즈마리아가 내게로 달려들었다. 연약한 손이 내 양어깨를 쥐고 밀어냈다.

“이 악독한…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할 생각 마! 너는 진짜 아그레인 캐롤드가 아니야. 나는 알고 있어. 아그레인 캐롤드는….”

“너라고?”

아즈마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차오르는 분을 힘겹게 참아 내는 눈이었다. 그 눈을 보자 나도 모르게 커다란 웃음이 터졌다.

“왜 말을 못해? 네 입으로 말해 봐. 네가 아그레인 캐롤드라고.”

“닥쳐.”

“아니면 네가 생각해도 내가 진짜 같니?”

“입 닥쳐!”

커다란 울분이 터졌다. 달걀 껍데기처럼 새하얗던 아즈마리아의 흰자위로 붉은 핏발이 섰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내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날이 기억나네… 네가 내게 처음으로, 아그레인 캐롤드가 자신의 진짜 이름이라며 밝혔던 그날이.”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 시간으로부터 이제 겨우 한 계절이 흐르지 않았던가. 아즈마리아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 어깨를 부여잡은 그녀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맞아, 나는 가짜야. 그게 편하다면 그리 여기도록 해. 나는 네가 리히튼의 곁을 비운 그 시간 동안 아그레인 캐롤드 행세를 하며, 그를 빼앗았지. 진짜인 너에게서… 이봐, 아그레인. 너 정말 한심하구나?”

아즈마리아가 휘두른 손에 뺨이 돌아갔다. 아팠지만 눈물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당장 복부를 차이고 이 층에서 떨어졌던 날이 어제 새벽이었으니까. 그녀는 내 몸을 그림 위로 밀쳤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실실 웃으며 아즈마리아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휘둘려 주었다. 그녀의 내부 깊숙이 박혀 있던 아그레인이라는 정체성이 휘둘리는 게 너무나 즐거웠다. 아즈마리아가 외쳤다.

“그래… 너 때문이었어. 너 때문에 리히튼이 나를 미친년 취급하고, 너 때문에 내가 있을 자리를 빼앗기고… 도대체 네 목적이 뭐지? 무엇이 목적이기에 날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인 거야!”

늘 느끼지만 아즈마리아는 자의식 과잉에 피해망상이 크다. 애초에 스스로가 아그레인 캐롤드라고 믿는 것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주어진 삶을 포기하고 시궁창을 자청한 것부터가 문제라고.

“너, 킨이 아그레인 캐롤드의 이복형제인 건 아니?”

“뭐?”

아즈마리아가 긴장이 풀려 버린 멍청한 얼굴을 했다. 물론 그녀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빌힐름이 캐롤드 저택을 불태운 건 기억나?”

이것 역시.

“내가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는?”

이것 역시도.

“불사에 가까운 육체를 지녔는지는?”

이 애는 정말, 죄다 남 일인 양 머저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뻗쳤다. 아는 것이라곤 고작 ‘황성에서 개처럼 굴려져 불우했던 아그레인 캐롤드의 어린 시절’이 전부였던 주제에, 누가 누구라고?

뎅.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나는 아즈마리아를 가까운 문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모피 안쪽에 걸어 두었던 단검을 꺼냈다.

“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누가 들으면 팔 한쪽이 날아간 줄 알 것이다. 기껏해야 단검이 오른쪽 손등을 뚫고 그림에 박혔을 뿐인데.

“아쉬운 일이야, 아그레인… 안타깝게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지.”

“아, 흐으…!”

“당연해. 아주, 아주 당연해. 너는 가짜거든.”

아즈마리아가 덜덜 떠는 왼손을 들어 단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나는 그 손을 붙들고 검을 더 깊숙이 박아 넣었다. 정오를 알리는 종이 다섯 번까지 울리고, 발작하듯 몸을 뒤틀던 아즈마리아가 울음과 같은 웃음을 지었다.

“내가… 넘어갈 것 같아? 너는 마녀야, 수잔. 내 세계를 망치러 온 마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네 진짜 이름도 버리고 악마의 발 아래로 기어들어갈 마녀라고….”

“어느 정도는 옳아. 하지만 이거 어쩌니? 세상은 내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걸.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리히튼 각하께서도.”

아즈마리아는 숨을 헐떡이며 이를 드러냈다.

“빌힐름 조나단 레그윈이 어떤 악마인지 알고 난 후에도 그렇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남자는 살인마야!”

“그건 리히튼도 마찬가지지.”

축 처진 흑발이 고개를 저었다.

“리히튼, 리히튼은… 그는 어쩔 수 없었어. 그는, 으읏, 그는 더러운 황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에 어쩔 수 없다는 선택지는 없어, 아즈마리아.”

뎅.

정오를 알리는 마지막 종이 울렸다. 둘이 전부였던 복도에 세 번째 인물이 나타난 건 그 순간이었다.

“아즈마리아?”

낯설지 않은 목소리다. 나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림자가 걷히고 얼굴이 드러났다. 모리타트였다. 아즈마리아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모리타트! 도와 줘, 모리타트! 이 여자는 미쳤어!”

모리타트의 호박색 눈 속에 혼란이 회오리쳤다.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하는 여자를 위협하는 미친 여자 사이에서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아니, 미친 여자라기보다는 황후가 될 여자인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거리를 좁히는 모리타트에게 명령했다.

“아니. 거기서 멈춰, 각하.”

모리타트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즈마리아의 눈물이 뺨을 타고 목선을 따라 떨어져 그녀의 드레스를 적셨다.

“제발, 모리타트!”

나는 딱딱하게 굳은 모리타트를 향해서 말했다.

“내가 어떤지는 잘 알지? 나는 꽤 이성적인 사람이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우리는 이 사단을 평화롭게 끝낼 수 있을 거야.”

“듣지 마. 이 여자는 아그레인 캐롤드가 아니야, 진짜 아그레인 캐롤드는 나라고!”

이성을 잃어가는 아즈마리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모리타트가 커다란 목청으로 소리쳤다.

“아즈마리아? 일단 진정해. 진정하지 않으면 상처가 더 벌어질 거야.”

“이 미친 여자에게서… 읏.”

문 바로 아래에 붉은 피가 고였다. 나는 아즈마리아를 무시하고 모리타트와의 대화를 이었다.

“아무래도 각하의 어린 아가씨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그렇지?”

그는 차분하게 내 말을 받아쳤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모리타트 잭의 약점은 아즈마리아 윌이다. 나는 힐마르티노로부터 받은 쪽지의 내용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주억일 수밖에 없었다. 리히튼이 아즈마리아를 내치지 않은 데는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리히튼은 아즈마리아를 이용해서 모리타트를 엎어뜨리려 했던 것이 아닐까? 과거를 반복하면서 그렌페르크 제국 수뇌부의 모든 정보를 얻게 된 그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패는 내가 사용하게 되었지만.

“일단 정정해야 할 부분이 있어, 각하. 나는 암살자가 아니야.”

모피 안쪽에 걸어 두었던 두 번째 단검을 꺼내 아즈마리아의 목을 겨누었다. 그녀의 고통은 십분 이해하나, 시끄럽게 난리를 치는 통에 머리가 다 울렸다.

“하지만 어느 부위가 목숨에 치명적인지는 아주 잘 알고 있지.”

“모, 모리….”

퍽 효과적이었는지 아즈마리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때처럼 게임을 하자, 모리타트.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다면… 아즈마리아도 목숨에 지장 없이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어때, 쉽지?”

모리타트는 헛웃음을 지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제 머리를 쥐어뜯고는 다시 등을 폈다.

“하, 빌어먹을. 창문에서 뛰어내렸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할 마음이 없었기에 곧장 볼일을 물었다.

“『태양이 흐르는 강』 서약을 묵과한 가문이 어디지?”

모리타트가 두 손을 높이 들고 나를 타이르려 했다.

“아그레인 양. 이전에도 말했지만, 그런 걸 알아봤자….”

창문에서 뛰어내렸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더니, 또 멍청한 짓을 하네. 단검을 들어 아즈마리아의 목 아래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크게 다치지는 않되, 위협이 될 정도로. 그새 힘이 빠진 아즈마리아는 문에 쓰러지듯 기대어 울기만 했다.

“으흑, 으흐윽!”

“젠장. 알겠다고! 잭, 크로허츠, 윌, 헨서웨이 이 넷이야.”

그놈이 그놈이구나. 서로 참 예쁘게 연관되어 있다 싶었다. 하기는, 함께 서약을 묵과할 만큼 깊은 관계인데.

“다나한 2세가 비비안느가 아닌 빌힐름을 선택한 이유는?”

“…힘을 가졌으니까.”

“아악!”

단검에 힘을 주자 새하얀 목선 위로 한 가닥의 핏줄기가 떨어졌다. 내가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알맹이가 빈 정보만 얻어갈 순 없지. 모리타트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잉고르드와 캐롤드를 제약할 수 있는 힘을 가졌으니까!”

“있잖아, 각하. 대답할 때는 열 살 아이에게 설명한다는 생각으로 친절하게 대답해 주면 안 될까?”

긴 한숨과 함께 그가 입을 열었다.

“너도, 제기랄. 아그레인 양도 알겠지만… 레그윈과 잉고르드, 캐롤드에는 혈통 대대로 전해지는 특별한 힘이 존재하지. …하아. 레그윈 혈통의 힘은 ‘제어’야. 레그윈의 힘을 지닌 자가 원한다면 잉고르드와 캐롤드는 능력을 사용할 수 없어. 이 정도면 됐나?”

이거였구나. 과거의 내가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황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지금도, 과거에도 미래를 볼 수 있는 거지?’

생각해, 아그레인. 제어의 힘을 지녔으면서도 빌힐름이 나와 리히튼의 능력을 막을 수 없는 이유. 그 사실을 아직까지도 이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

“비비안느.”

꿈속에서 비비안느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의 그 힘 역시, 오직 나만 알고 있어야 하는 거야. 알겠지?’

그 힘이 만약 빌힐름의 것과 동일한 힘이라면? 두 힘이 상충되어 빌힐름의 힘을 무효화시켰다면? 과거의 내가 비비안느를 놓지 못했던 것도, 리히튼이 비비안느를 선택한 것도. 이 모두를 단번에 이해시킬 수 있는 가정이었다. 희한하지. 원하는 답을 얻어냈음에도 기쁘지 않았다.

무언가 체념한 듯, 공허했던 빌힐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우린 그렇게 타고났어. 수백 년을 반복해 왔지. 개와 주인일 수밖에 없는 운명. 평생을 서로의 곁에서 썩어가야 하는 운명. 태어날 적부터 거스를 수 없는….’

그 빌어먹을 운명은 대체 누가 만든 걸까. 얼굴 한 번이라도 봤으면 좋겠네. 나는 단검을 쥔 팔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충분해, 아주 만족스러워… 이제 오른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육십을 세고 나오면 나는 이곳에 없을 거야.”

모리타트는 내 말에 따라야 하는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더 이상 아즈마리아를 위협하며 재촉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어서. 나는 약속을 지켜. 각하는 내게 평생을 감읍하게 될 거라고. 우리, 앞으로도 계속 얼굴을 볼 사이잖아?”

이윽고 그가 발을 떼었다. 방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호박색 눈동자는 오롯이 아즈마리아를 향해 박혀 있었다. 참 지고지순한 마음이었다.

“방금, 방금 그게 무슨 말이야? 서약이라니?”

그래도 용케 무슨 대화가 오가고 있었는지는 알아들었나 보다. 아즈마리아는 하얗다 못해 창백해진 낯으로 내게 끝없이 질문했다.

“잉고르드의 힘? 레그윈 가문의 힘이 제어라고? 그게 대체….”

“이제 정신 차려, 아즈마리아.”

나는 그런 그녀가 아주 조금 가엾었다. 아즈마리아는 어떤 경로로 나의 기억을, 정확히는 리히튼이 시간을 돌리기 아주 오래전의 내 기억을 지니게 되었을까?

아즈마리아뿐만이 아니다. 이 여자는 그저 일부에 불과했다. 그녀 이전에 혜성처럼 나타나고 사라진, 내가 소설 『태양이 흐르는 강』에 들어온 외부인이라 여겼던 존재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들 모두가 아즈마리아처럼 내 과거의 기억을 자신의 것인 양 여겼을 터였다.

‘설마 과거가 여러 번 되돌려진 부작용인가.’

며칠 전만 해도 이 여자를 눈앞에서 지워 버리고 싶다 여겼었는데. 끝도 없이 무지한 머리로 바닥을 기는 모습을 보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즈마리아의 코앞에 다가가 한마디 한마디를 또박또박 읊었다.

“너는 아그레인 캐롤드가 아니야.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거야. 이곳에서 나를 보고 확신했잖아.”

아즈마리아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

잉고르드 때와는 달랐다. 나는 아즈마리아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필요에 의해 살려두는 것에 불과했다.

“부정도 그만 둬, 불쌍한 것…. 리히튼은 너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 지금이라도 네 이름을 되찾고, 널 보호해 줄 수 있는 이에게로 돌아가. 이렇게 한심한 너여도 보살펴 줄 사람에게 매달리란 말이야.”

이를테면 아직도 널 잊지 못해 안달이 난 모리타트 잭이라든지.

“그게 너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야. 나는 우리를 여기까지 추락하게 만든 너희를 두고 보지 않을 생각이거든.”

메말라 있던 아즈마리아의 뺨이 다시 눈물로 젖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내가? 내가, 내가 아그레인이… 그럴 리 없는데….”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모리타트가 들어간 방을 건너가기 무섭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거친 발걸음이 빠르게 멀어지고, 아즈마리아의 우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저 멀리서 모리타트의 부름이 들려온 것은, 이제 막 계단을 내려가려던 시점이었다.

“아그레인 캐롤드.”

반쯤 몸을 돌렸다. 축 처진 아즈마리아를 안은 채, 모리타트가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복수는 너만 괴롭게 할 뿐이야. 차라리 빌힐름의 곁에서 그렌페르크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려라. 그게 진정한 복수일 테니까.”

그리고 후회했다. 모리타트의 조언은 멈칫한 시간도 아까울 만큼 쓸데없는 참견이었던 것이다.

“너나 잘해. 여자 한 명 못 꼬셔서 제 부인을 죽이려는 머저리 각하.”

작은 웃음이 들렸던 것 같다. 나는 모리타트의 헛소리가 계속되기 전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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