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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3. 발화 (15/24)

Episode 13. 발화

<죽음을 이긴 육체에 상념이 깃든다.>

다시 봐도 두루뭉술한 표현이다. 동시에 꽤 그럴싸한 문장이기도 했다. 특히나 내게는 잉고르드의 독을 이겨야만 과거의 꿈을 다시 꿀 수 있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림처럼 유려한 필체를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끝내 엽서를 내려놓았다. 근사한 필체라는 건 알겠으나 리히튼의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팔을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의원이 입을 열었다. 놀랍다는 얼굴이었다.

“외상이 정말 빠르게 아무셨습니다. 믿기 힘들 정도군요. 그러나 어제도 말씀드렸듯, 골절이 아니라고 해서 쉽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푹 쉬셔야 하고 웬만하면 침대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꾸역꾸역 목숨을 유지하다 보니 황실 의원에게 치료받는 날도 다 온다. 물론, 기분은 개 같았다.

“빌힐름 전하께서 아그레인 아가씨에게 내리셨습니다. 하나같이 귀하고 몸에 좋은 것들이니 꾸준히 드셔야 합니다.”

의원 뒤의 조수들이 두 손 가득 들고 온 짐을 구석에 쌓아 놓고 사라졌다. 방이 비워지자 발레리아가 그전부터 도착해 있던 선물의 발신자를 하나하나 읊었다. 그래봤자 빌힐름과 비비안느를 포함해 고작 세 명뿐이었는데, 나머지 한 명은 힐마르티노였다.

“병 주고 약 주네요. 이 여자의 선물은 버려도 되겠어요.”

발레리아가 질색을 하며 상자를 내던졌다.

낙마한 지 이틀이 흘렀다. 다행히 다수의 타박상과 어깨뼈에 금이 간 것을 제외하곤 퍽 멀쩡했다. 재수 없었으면 그대로 숨을 거둘 뻔한 위기였다. 그걸 알면서도 코앞에서 나를 골리던 힐마르티노를 떠올리니 기분이 금세 저조해졌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하는 그녀의 질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다른 목적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한두 시간 가량을 고민하다가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미친년은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발레리아, 할 말이 있으니 그만 정리하고 이리로 와.”

“아, 네.”

다가온 발레리아가 내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어제 겪은 일련의 사태 이후 나를 대하는 발레리아의 태도가 미세하게 변한 것이 느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늘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옅어졌다고 해야 하나. 내게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이 잦아진 듯했다.

“나는 당분간 아주 심하게 앓을 거야.”

나의 말에 발레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잘 간호할 테니 걱정 마세요. 팔이라면 금방 나으실 거….”

“이 빌어먹을 팔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 더하게 앓을 거란 소리야. 열 때문에 눈도 제대로 못 뜰 거고 소리 없이 정신을 잃을 때도 많겠지. 하지만 명심해. 내가 앓다 죽을 것 같더라도 의원을 부르면 안 돼.”

발레리아가 납득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왜죠?”

“벌써 잊었니, 발레리아? 더 높은 곳을 갈망하기로 했잖아.”

발레리아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내 말을 되새기듯 가만히 눈길을 내리고 있던 발레리아가 뒤늦게 대답했다.

“그건… 더 높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선 아가씨가 그렇게 끔찍하게 앓아야만 하는 건가요?”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너무 도박성이 강한 선택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발레리아의 어깨를 두들겼다.

“내가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마렴. 빌힐름 황자도, 그 누구도.”

발레리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걱정이 내게는 몹시 어색하게 느껴졌다.

‘정말 가능할까?’

혈관이 타오를 것 같았던 그 고통 속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주울 수 있을까? 고민에 대한 답은 이미 진작 정해 두었다. 이제 실천하는 일만 남았을 뿐.

그날 밤. 발레리아가 그녀의 침실로 돌아간 틈을 타 유리병에 든 액체의 일부를 물에 풀어 삼켰다. 앞으로 세 번. 세 번을 더 이렇게 마시면 될 거야. 목구멍 아래로 넘어가는 매캐하고 뜨거운 감각을 느끼며, 나는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만족감도 아주 잠깐의 일이었다. 예상한대로 나는 그날의 선택을 수십, 수백 번 후회했다. 한두 달 편안했다고 끔찍했던 고통을 잊고 있었던 게 잘못이었다. 대가는 몹시 컸다. 쉴 새 없이 타오르는 아픔에 하루가 한 달처럼 느껴졌다. 이 독을 마시고 잉고르드에서 어떻게 하녀 생활을 했었는지, 다시 되새겨도 놀라운 일이었다.

언뜻 정신을 차릴 때마다 느껴지는 날씨는 내 정신만큼이나 오락가락했다. 천둥이 칠 때는 뇌가 거세게 흔들렸고 햇볕이 내리쬘 때마다 피부가 벗겨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통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한 사흘째 밤. 독을 삼키고 처음으로 어렴풋이나마 잠들었던 그날 밤에. 나는 꿈속에서 리히튼을 만났다.

[아그레인.]

리히튼은 내가 알고 있는 그보다 훨씬 어린 티가 났다. 기사 정복을 걸친 그는 새장에 갇혀 있던 버려진 개가 아닌, 명망 있는 가문의 자제처럼 보였다.

[어서 힐 성으로 돌아갑시다. 고작 몇 분이 지났다고 그리도 낯이 창백해.]

어투는 정중했으나 태도와 표정은 불순했다. 리히튼은 다소 급히 내 어깨를 감싼 채 끌어 당겼다. 내 머리 위에 우산이 덧씌워지고 나서야 비가 내리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꼼짝 않고 리히튼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달려오기라도 했는지, 꽤 거칠게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물었다.

[빌힐름입니까?]

어쩐지 이 대화,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아니, 빌힐름밖에 없지. 그 빌어먹을 개새끼가 당신에게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날 잡아당기던 리히튼이 이제는 몸을 틀어 얼굴을 마주하고 섰다. 그의 눈 속에서는 평소 느낄 수 없는 격정적인 감정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나를 위해 화를 내 주는구나. 늘 숨기려고만 하는 리히튼이었기에, 이런 식으로 확인당하지 않는 이상 그의 마음을 알기 어려웠다. 나는 어지럽다 못해 텅 비어 버린 듯한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너는… 내가 부를 땐 단 한 번도 순순히 오지 않더니….]

[닥치고 대답해.]

보이지는 않아도 그의 등과 뒷머리가 빠르게 젖어가고 있음을 안다. 나는 내 몸을 빗물로부터 완전히 가리고 있는 그의 우산을 천천히 밀었다. 어차피 비를 맞아야 한다면 리히튼이 아닌 내가 맞는 게 나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였어.]

적어도 그는….

[그 개자식을 내가 죽였다고.]

황족 살해 죄를 명분으로 처형대에서 목이 잘리지는 않을 테니까. 빗소리가 우리 사이를 갈랐다. 내 어깨를 쥔 그의 손이 서서히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드물게 평정심을 잃고 흔들리는 눈동자가 호수 위에 핀 안개처럼 예뻤다.

[…도망치면, 그러면 됩니다.]

이윽고 리히튼이 입에 담은 말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소리였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도망치자는, 조금도 리히튼답지 않은 소릴 하는 의도를 알기 위해서. 그러나 그의 낯을 샅샅이 뜯어 살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팔목을 잡아끄는 악력이 더 강해지기만 했다.

[그래. 나와 같이 이곳을 나가자, 아그레인, 그러면 돼. 그러면 모든 게 끝나.]

[리히튼.]

리히튼은 몹시 급해 보였다. 마치 내가 아닌 그가 시해범이 된 것처럼.

그는 아마 긴 시간 이 순간만을 고대해 왔을 것이다. 리히튼을 빌힐름의 호위 기사로 만든 이가 바로 나지 않은가. 평생을 나와 빌힐름의 도구로 살아온 가엾은 리히튼. 알고 있다. 리히튼은 나를 빌힐름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환멸한다는 사실을.

나는 그 부정적인 감정을 온전히 감수할 마음이 있었다. 리히튼을 향한 동정심보다 빌힐름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더 비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기다리고 있던 결말에 그와 도망치는 그림은 없었다. 그런 건 말이 되지 않잖아. 단단한 손아귀 안에 잡힌 손목을 억지로 비틀어 빼냈다.

[빌힐름은? 목격자가 있는 장소에서 죽인 건가? 그렇다면 시간이 더 촉박….]

[나는 가지 않아.]

[…뭐?]

청회색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저런 얼굴을 한 리히튼이 대체 얼마 만인지. 수년 전, 홧김에 입을 맞췄던 날 이후로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그런 시기도 있었지. 그래서 리히튼도 나를 완전히 놓지 못하는 것일 터였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서로밖에 없으니까.

[빌힐름을 죽였으니 끝이야. 나는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가치 없고 구차하기만 한 시간을 꾸역꾸역 버텨왔어.]

아아, 가여운 리히튼. 그가 살아가는 데 하등 도움 되지 않는, 나라는 미련을 버리길 바랐다. 그런 마음으로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웃음을 지었다.

[괜찮지? 나도 할 만큼 했어. 이제 더는 버틸 필요 없는 거잖아.]

그때, 리히튼의 푸르스름한 낯 위로 그답지 않은 선명한 감정이 떠올랐다. 깨달음과 후회. 무엇에 대한 깨달음이고 무엇에 대한 후회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 감정이 나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증오만큼이나 오랜 시간 잊히지 않는 감정이 후회라고 생각한다. 나에 대한 후회로 리히튼이 평생 동안 나를 기억한다면… 그것도 썩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성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하나뿐인 적장자의 관이 땅 아래에 묻힐 때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의 분노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듯했다. 관례에 의하면 빌힐름이 관이 묻힌 후 10일은 흘러야 진행될 처형식이었다. 그러나 처형식은 예정일보다 족히 15일은 당겨졌다. 빌힐름의 피가 모두 굳기도 전에, 나는 처형대 위로 올랐다. 그날은 죽음을 받아들인 내 마음이 묘하게 울렁거릴 정도로 맑은 날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 비비안느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안 돼요, 폐하! 폐하, 제발…!]

처연했다. 리히튼이 잊고 싶어도 날 잊지 못한다면, 비비안느는 죽어서도 날 잊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비비안느는 그런 아이였다. 그 애의 심장에는 피가 아닌 내 이름이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때때로 나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나를 사랑하는 아이였다. 아마도 나 자신보다 더.

[아, 아그레인은 아무런 잘못 없어요. 아그레인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차라리 저를….]

[비비안느를 데려가라.]

[폐하! 안 돼, 아그레인! 제발 도망쳐, 아그레인!]

그녀의 처절한 슬픔은 내게 그리 와닿지 않았다. 내가 왜 도망쳐야 해, 비비안느? 이게 바로 내가 원한 결말이야. 나는 평생 바라마지않았던 나의 시나리오를 완성했어. 심지어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죄인을.]

죄인과 황제 사이를 가로막고 선 기사들의 창이 나를 향했다. 심장 박동이 터질 듯 뛰는 찰나의 순간. 그들 사이에 선 리히튼이 눈에 들어왔다.

[죽여라.]

창끝이 나를 향해 달려올 동안, 오직 리히튼만이 제자리에서 쥐고 있던 창을 떨구었다. 그의 메마른 입술이 느려져가는 세상 틈에서 내게 말했다.

[괜찮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

그리고 눈앞이 점멸했다.

***

무언가 뚝, 끊겼다. 눈앞이 암전하고 나는 눈을 떴다. 심해 속에서 긴 시간 숨을 참아 내다 올라온 것처럼 숨이 가빴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토기가 올라왔다.

“하아, 하아….”

흔들리는 시야에 익숙한 적색 캐노피가 잡힌다. 창틀과 똑같은 무늬로 어렴풋이 떨어지는 달빛이 내가 누운 침대를 비추고 있었다. 나의 예상이 옳았다. 잉고르드의 독을 삼키자, 과거의 기억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하아.”

두통에 뇌가 흔들리는 것은 물론 목 언저리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라던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건 좋다. 한데 오늘 떠올린 과거는 영 납득할 수 없는 기억이었다.

‘과거의 기억이 맞아. 나는… 그날 분명히 죽었어.’

빌힐름도 죽고, 빌힐름을 죽인 나도 죽었다.

“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빌힐름과 나는 지금 이 순간, 같은 성에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가?

‘그 사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라도 한 건가.’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으나, 과거의 나에게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을 상기하면 마냥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 같았다.

콰앙!

폭풍을 뚫고 천둥이 떨어졌다. 달빛이 아니라 번개였구나. 더듬더듬 침대를 지지대 삼아 일어섰다. 창문에 달라붙은 빗방울 때문에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차?”

한데 저 아래에 작은 등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란히 선 거대한 사륜마차가 보였다. 이런 날씨에 황성을 방문하는 사람이 다 있다니.

“아가씨?”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방금까지 소파에 누워 뒤척이고 있던 발레리아였다. 나를 간호하기 위해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창가로 걸어오는 그녀에게 물었다.

“황성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

발레리아의 흐릿한 시선이 나와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아, 귀족들 말인가요. 일주일 후가 황제 폐하의 탄신일이라, 이르면 오늘부터 속속들이 도착할 거란 소리를 들었어요.”

그 사이 일주일로 앞당겨졌다는 건가. 아무래도 꼬박 하루 동안 정신을 잃은 듯했다. 황제의 탄신일을 축복하기 위해 황성을 방문하는 귀족들. 머릿속 구석에서 계속 맴도는 이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잉고르드도 황성을 찾아올까?”

“잉고르드? 아, 공작 각하 말씀하시는 걸까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분은 매해 참석하셨습니다. 한데 올해는 모르겠네요. 윌 가문의 여식이 잉고르드에 몸을 의탁했다고 하니… 아마 빌힐름 전하와 면대하기에는 서로 불편하지 않을까요?”

발레리아의 아리송한 답은 오히려 그가 황성을 방문할 거라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리히튼이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오지 못한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코웃음도 치지 않을 소리였다.

‘베르크네와 킨도 오겠지.’

그 둘을 황성에서 만난다니. 상상만으로도 우스운 재회였다.

“아가씨. 어서 침대로 돌아가요. 안색이 너무 파리해요.”

발레리아의 어투에서 풍기는 걱정과 근심이 매우 짙었다. 나는 그녀가 켜 놓은 등불을 들고 천천히 화장대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며, 어쩐지 이 모습이 진짜 나일 수도 있다는 기묘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노란 불이 비춤에도 낯빛이 스산하다. 눈 아래가 검게 물든 탓인지 더욱 그러했다. 탁해져 생기가 돌지 않는 눈동자와,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입술까지. 잉고르드의 수잔이 그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내 몸 안에 다시 독이 돌고 있을까? 화장대 옆에 활짝 핀 붉은 꽃송이를 쥐었다. 눈에 익숙하지 않은 물건이다.

“발레리아. 이 시클라멘, 혹시 네가 아끼는 꽃이니?”

“예? 아니요. 그 화분은 전 벨버른 백작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이에요. 기억나지 않으세요?”

그자가 일주일 사이에 내게 바친 물건이 한둘이어야지. 길게 뻗은 적색 꽃잎을 내려보다가, 등을 숙여 깊게 향기를 들이마셨다. 몸을 떼기 직전에 코끝에 닿은 잎을 가볍게 핥았다. 반응은 빨랐다. 파릇파릇했던 꽃잎이 빠른 속도로 수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이 붙은 나무처럼 검게 산화되어 흙 위로 떨어졌다. 때마침 다가온 발레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으음, 왜 죽어 있담? 어제까지 분명 활짝 피어 있었는데….”

“방에 죽은 꽃을 둘 수는 없지. 해가 뜨면 시종에게 말해 버리도록 해.”

“예.”

이걸로 다시 쓸모 있는 몸을 갖게 됐다. 예민해진 오감. 날카로워진 신경으로 인해 사그라지지 않는 두통. 뻐근한 눈과 무거운 어깨. 그럼에도 불과하고 느껴지는 이 완전한 안정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어.’

과거의 내가 지녔던, 미래를 보는 힘만 다시 사용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복수를 달성해낼 수 있었을 텐데. 문득 궁금해졌다. 무려 미래를 보는 힘이었다. 그런 대단한 힘을 지녔으면서, 나는 왜 긴 시간을 힐 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 받아야 했던 걸까. 아직 찾아야 할 퍼즐 조각이 너무나 많았다.

***

저녁 식사가 막 끝난 시간대였다.

“사흘 전에 낙마했다고 들었소.”

조나단 부인의 입에서 나온 소리치고는 너무나 어색했다. 평소의 무관심하고 사람 얕잡아 보던 눈빛과 어투는 어디로 가고, 누그러든 음성에서 옅은 걱정이 묻어 나왔다.

“네. 그런 것치곤 멀쩡하지만요.”

왼쪽 어깨를 붕대로 단단히 고정시킨 상태라 팔을 움직이기가 영 불편했다.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눈에 띄었는지, 눈을 감은 부인이 짧게 혀를 찼다.

“며칠 사이에 송장이라 해도 무방한 안색이 되었군. 크게 다치지 않은 건 다행이나, 몸 관리에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내가 이리 말하지 않아도 빌힐름 전하께서 다 알아서 해 주겠지만.”

그리 말한 조나단 부인이 등을 돌려 멀어졌다. 내 얼굴을 훑는 마지막 시선이 싸늘했다. 서쪽 황성 사람들에게 있어, 이제 나는 완전한 빌힐름 황자의 사람이었다. 이게 맞아. 비비안느가 내게 열렬한 관심을 보이면서 잠시 헤맸을 뿐.

‘내가 죽을 때 목 놓아 울었었지.’

꿈속에서의 그 장면을 되새기니, 비비안느의 관심을 순전한 흑심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순수한 호의로 날 돕는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런 인물이었다면 그 자리까지 올라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비안느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무엇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 내게 무얼 바라는 걸까? 고민하는 사이, 저만치 앞에서 넓은 보폭을 가진 여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읏.”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거칠게 어깨가 잡혔고, 찌릿한 고통에 본능적으로 손을 쳐냈다. 손의 주인은 힐마르티노였다.

“건방진 것으로 모자라 이젠 손버릇까지 고약하네.”

이 미친 여자는 내 냄새를 기억하기라도 하는 걸까? 방에서 나온 지 몇 분 되지도 않아 저 빌어먹을 얼굴을 마주 봐야 한다니. 그런 내 생각이라도 읽은 듯, 힐마르티노가 한 쪽 입꼬리를 끌어 당겨 웃었다.

“그 사이 벙어리라도 됐니? 윗사람이 안부를 물었으면 다소곳이 대답해야지.”

“안부라도 묻고 그런 소리 하시죠.”

“흐흥. 그래도 말은 높이는구나. 나는 또 그때처럼 정신 나간 년 취급하며 침이라도 뱉을 줄 알았는데.”

“본인이 미친 건 아시나 봐요.”

히죽 올라가 있던 힐마르티노의 입꼬리가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그대로 베낀 채 물었다.

“이해해요. 비비안느 전하께서 저처럼 보잘 것 없는 애를 그리 귀중하게 보살펴 주시는데. 그 성격에 확 돌아 버리지 않고 배기겠어요?”

힐마르티노의 복장은 늘 그러했듯 완벽했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새까만, 잘록한 허리와 탄탄한 허벅지가 잘 드러나는 승마복에 높이 올려 묶은 흑발. 거기에 조나단 후작 가문의 영주라는 완벽한 지위까지. 이런 여자가 무엇이 아쉬워 날 이리 건들려고 할까.

“저에 대해서 그렇게 궁금하세요?”

짧은 틈도 없었다. 내 입술이 닫힌 즉시 힐마르티노가 왼쪽 팔을 들었다. 누가 시정잡배 같은 여자 아니랄까 봐. 나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팔을 붙잡았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힐마르티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

“차라리 왼쪽을 때리시지. 내가 오른팔은 멀쩡해서.”

“아하하하!”

그녀답게 웃음을 터트리기에 이번에는 주먹이라도 날아올까 싶었다. 그러나 힐마르티노는 그리하지 않았다. 손목을 잡힌 그대로 부드럽게 팔을 내리더니, 내 귀 옆을 살짝 건들고 웃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건 하얀 실밥이었다.

“전에도 말하지 않았니? 난 어여쁜 애들은 거칠게 안 다뤄. 보는 입장에서 여러모로 손해거든.”

그리고 꼼짝도 않기에 내 쪽에서 먼저 손을 거두었다. 한데 손을 완전히 빼내기 전에, 힐마르티노가 다시 붙잡아 자신에게로 당겼다.

“너….”

채도가 낮아 볕을 쬐는 낙엽에 가까운 녹안이 내 얼굴을 꼼꼼하게 살폈다. 악력이 어찌나 센지, 밀어내려 해도 쉬이 밀리지 않았다. 힐마르티노는 자신의 기억을 상기하듯,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이 핼쑥해지긴 했어도, 그 집안 특유의 분위기는 확실히 풍긴단 말이지. 하나 남은 피붙이랑 똑같아. 그 집안은 목숨이 참 질기나 봐. 너도 그래 보이긴 하구나.”

하나 남은 피붙이. 설마 캐롤드에 또 다른 생존자가 있다는 뜻인 건가. 내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는지, 힐마르티노가 훨씬 여유로워진 분위기로 내 팔을 놓았다.

“보는 재미가 있는 우리 아그레인 양. 폐하의 탄신일이 가까워질수록 이 언니의 기다림은 더욱 커져갈 뿐이란다. 하하. 얼마나 재미있을까? 10년은 더 훌쩍 흘러 재회하게 되었는데, 서로를 몰라 볼 거 아니니?”

좋아 죽으려는 꼴을 보니 확실했다. 캐롤드 가문에는 나 외의 또 다른 생존자가 존재한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니면 운명에 이끌려 서로를 한눈에 알아볼까? 마치 마법처럼?”

“혼자 즐거워하지 말고 같이 즐기는 게 어때요?”

아, 젠장. 아무리 궁금했어도 이런 말을 하면 안 됐는데. 힐마르티노가 미쳤다고 곱게 밝힐까. 아니나 다를까, 씨익 웃은 힐마르티노가 턱을 쳐들고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더는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힐마르티노의 어깨를 밀어내고 복도를 지나쳤다. 뒤통수 너머의 얄미운 웃음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캐롤드의 일원이 살아 있다면 빌힐름이 모를 리 없어.’

마침 빌힐름을 찾아가던 차라 걸음을 빨리했다. 나를 발견한 시종이 문을 두들기기 전에 손잡이를 밀고 들어갔다. 어차피 이 정도의 무례는 신경 쓰지도 않을 터였다.

“전하.”

독서를 하고 있었는지, 빌힐름이 책을 편 자세 그대로 나를 응시했다.

“저의 형제가 살아 있나요?”

이윽고 그가 천천히 책을 덮으며 물었다.

“누가 당신에게 그런 소릴 했는지 궁금하군요.”

말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에 빌힐름이 자답했다.

“힐마르티노 후작입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당신에게서 그 족제비의 역겨운 냄새가 묻어 나와서.”

어라. 눈앞의 남자가 빌힐름이 맞나? 내가 아는 빌힐름은 저런 식의 천박한 어투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사용하지만 적어도 내 앞에선 아니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그의 입술에서 작은 웃음이 흩어졌다.

“농입니다. 힐마르티노 후작을 제외하곤 내가 영역 표시한 자에게 함부로 입을 열 인물이 생각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영역 표시. 오늘의 빌힐름은 무언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진심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앞에서는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하던 그였는데.

“그래서, 저를 제외한 캐롤드의 일원이 남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걸음을 옮겨 빌힐름의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그는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설마 모르고 있을 줄이야. 아그레인, 역시 당신을 잉고르드에서 데리고 나오길 백 번 잘한 것 같습니다.”

“알아듣게 말씀해 주세요.”

“리히튼 공작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검은매 기사단의 부단장, 킨 경이 누구인지.”

누구라고?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가격당한 느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의 등장으로 사고가 잠시 정지했다. 나는 평정심을 잃은 채 되물었다.

“설마, 전하. 킨이 저의….”

“당신과 킨 경은 캐롤드 가문의 후계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킨 경은 직계가 아니었지만… 듣기로 남매의 우애가 퍽 좋았다지요.”

정확히 가리키지는 않았어도 그가 말하는 남매가 나와 킨을 뜻함은 확실했다.

‘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래. 잉고르드에서 킨이 짧게나마 자신의 과거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복 여동생과 친할 수도 있나? 그것도 유서 깊은 가문에서?’

‘친하지 못할 건 없지. 그래봤자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 얼굴도 희미하지만. 그 애도 날 기억할지 의문이군.’

황당하다 못해 충격적인 과거였다. 이복 남매? 그와 내가? 불현듯 잉고르드를 떠나기 직전, 킨이 아즈마리아의 죽음을 막았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답지 않게 혼란에 빠져 리히튼에게 간청하던 그가.

‘약속이라… 킨. 네게는 저 여자의 발언이 모두 진심으로 들리나 보군.’

‘적은 가능성이라도 제게는 더없이 소중합니다.’

‘그래서, 아즈마리아 윌 영애의 목숨을 보장해 달라?’

‘…예.’

그때는 킨이 왜 아즈마리아를 살리려 하나 싶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즈마리아가 아니라, 아그레인의 죽음을 막으려던 거였어. 킨은 잉고르드 가문의 가신이 아니었음에도, 검은매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리히튼이 ‘모종의 이유’로 캐롤드의 핏줄인 킨을 거둔 것이라면… 그와 관련된 의문이 모두 풀리게 된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언을 이런 데서 되새기게 될 줄은 몰랐다.

“리히튼 공작이 이 사실을 단 한 번도 언급한 적 없습니까?”

“네. 아마 그곳에 계속 있었더라면 평생을 몰랐겠죠.”

“아그레인 양이 원한다면 킨 경을 황성에 초대해 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글쎄. 매력적인 제안이었으나 그 필요성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킨을 만나면? 이복 남매간의 감격적인 재회라도 하라고? 그 끔찍한 장면에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말씀만으로 감사해요. 하지만 전하와 리히튼 각하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아요.”

“원만하지 않다는 이유로 내 초대를 거절할 것 같지는 않군요. 보통의 사람들은 잃어버린 혈연을 찾고 싶어 합니다. 그자라고 다르지 않을 겁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 주세요?”

마치 정말로 내 호감을 얻으려는 것처럼. 나는 그에게 순수한 의문을 표했다. 죽은 줄 알았으나 살아 돌아온 친척 누이, 그래 좋은 명분이기는 하지. 하지만 속내는 그와 전혀 관련되지 않다는 걸 안다. 날 향한 빌힐름의 감정은 애착하는 물건을 향한 소유욕에 불과했다. 그걸 알기에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줄 것 같은 그의 태도가 불안하고 껄끄러웠다.

“내 호의가 불편합니까?”

빌힐름이 웃는 낯으로 되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불편하니까 적당히 친한 척하자고 말해 주고 싶었다.

“아니요. 그저… 전하의 호의를 받기에는 제가 너무 형편없는 사람 같아서요.”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고작 ‘형편없다’로 끝이라면, 상당히 실망할 것 같은데.”

실망? 빌힐름의 발언은 영 이상했다. 그의 권력을 무기 삼아 활개라도 치라는 소리인가.

“알을 깨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늘 그렇듯 다정한 음성과 표정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마저도 껄끄럽게 다가왔다.

“저는 제가 알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요.”

“아그레인 양은 말과 행동이 늘 다르군요. 잉고르드에서 재회했을 때도 내가 이와 비슷한 소릴 했었는데 말입니다. 기억납니까?”

서점에서 나눈 대화를 뜻하는 건가.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저의 알이, 혹시 잃어버린 기억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대로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살 테냐, 아니면 과거의 나를 되찾을 테냐. 한데 빌힐름에게서 듣는 나의 과거가 과연 신뢰할 만한 정보일까.

“단순히 그것만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빌힐름이 두 모금 정도 남아 있던 보드카를 단번에 비우곤 말했다.

“캐롤드 가문의 재건이라든지.”

가문의 재건. 함부로 대꾸하기에는 가볍지 않은 주제였다. 너무나 허무맹랑한 소리지 않은가.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호의지 않나요?”

“아그레인 양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렇담 캐롤드 가문은 재건될 가치가 있는가? 캐롤드 가문이 빌힐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가문이긴 했다. 전 조나단 후작의 처, 그러니까 빌힐름의 외조모가 캐롤드 가문의 장녀였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사촌 누이라 칭하는 이유도 여기서 기인했다. 하지만 그 사촌 누이를 위해 반역 가문을 재건한다? 이성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빌힐름 자체가 미친놈이라 하더라도.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란 것을 압니다. 시간을 드릴 테니 충분히 고민해 보세요.”

무슨 생각일까.

“그럼… 남은 시간은 카드 게임이나 할까요?”

시종이 빌힐름의 빈 술잔을 채우고, 빌힐름은 테이블 아래의 카드를 꺼내 섞기 시작했다.

‘너희 남매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니.’

여우같다는 표현은 내가 아닌 저들에게 더 걸맞은 듯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빌어먹을 카드 게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사흘마다 두 시간씩은 이런 짓거릴 해야 하는 건가. 갈수록 둘만 있기 버거운데, 사흘 후의 저녁은 또 얼마나 숨 막힐지. 문을 닫자마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 아가씨! 전하와의 대면은 끝나셨나요?”

걸음을 떼기 무섭게 창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발레리아였다.

“발레리아? 왜 여기까지 나와 있어? 무슨 일 있니?”

“아니, 아니요. 그냥 마중 나온 거예요.”

그냥이라니.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으면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할 때는 보통 두 가지 경우다. 양심상 껄끄러운 부분이 있거나, 다른 마음을 먹었거나.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해.”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의심 가는 구석이 없으니 캐물을 것도 없었다.

‘혹시 힐마르티노를 조심하라는 조언 때문인가?’

흐음. 그건 꽤 그럴싸한 가정이었다.

***

탕!

하늘을 울리는 총성에 허공의 흰 깃이 무참히 흩어졌다. 거위의 사체가 빠르게 잔디 위로 추락했다. 나는 그 모습을 확인한 후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확실히 효과가 있어. 사냥감을 힐마르티노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니 적중률이 말도 안 되게 높아졌다.

“실력이 좋군. 후작이 말한 것과 영 딴판입니다.”

전혀 놀랍지 않은 음성으로 조나단 부인이 감탄했다. 나는 발레리아에게 총을 넘기며 대답했다.

“각하께서 어떤 식으로 제 실력을 묘사하셨을지 궁금하네요.”

“쓰레기라고 했소.”

힐마르티노다운 저렴한 표현이었다.

“그 정도로 하찮지는 않은 것 같은데….”

“후작의 표현이 워낙 직설적이니.”

이번에는 조나단 부인의 차례였다.

탕!

볼 것도 없이, 다섯 번 연속으로 완벽한 적중이었다. 감탄의 의미로 가볍게 박수를 쳤다. 부인은 무던한 표정으로 시종에게 총을 건넸다.

“장단은 이 정도 맞춰 주면 충분하다고 봅니다만. 그래서 내게 용건이 뭡니까, 아그레인 양? 예정에도 없던 그대와의 사냥이 썩 즐겁지는 않아서.”

같은 조나단의 핏줄이라 그런가, 조나단 부인 역시 힐마르티노 못지않게 직설적이다.

그녀의 말대로 둘이 함께하는 사냥은 예정된 일정이 아니었다. 조나단 부인이 홀로 거위를 맞추는 모습을 창 너머로 확인한 후, 뒤늦게 내가 끼어든 것이다. 덕분에 불청객 취급을 받아야 했으나 상관없었다. 함께 보내는 여가 시간이 불편하다고 하니, 더 시간을 끌 필요도 없을 것 같아 바로 볼일을 밝혔다.

“킨 캐롤드에 대해서 아시나요?”

“황성에서 캐롤드 가문의 일은 언급이 금지되어 있소.”

칼 같은 대답이었다.

역시 조나단 부인답네. 그걸 알고서 찾아온 거지만.

“아, 그렇죠. 그렇다면 질문을 달리할게요. 검은매 기사단의 킨 경에 대해서 아시나요?”

총을 넘겨받은 부인이 무슨 수작이냐는 눈빛으로 날 응시했다. 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요즘 그 기사분에게 관심이 많아서요.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은데, 인맥이 좁다 보니 여쭐 분이 부인밖에 없어요.”

“그렇게 면전에 대고 물어보면 내가 순순히 대답해 줄 줄 알았습니까?”

탕!

내 차례임에도 불구하고, 총을 쏜 쪽은 조나단 부인이었다. 썩 꺼지라는 의미일까? 푸드덕거리는 날갯짓과 함께 추락하는 거위. 무려 여섯 번 연속으로 명중이었다. 물론 나는 여기서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저에 대해 잘 모르시죠, 부인.”

“궁금하지도 않다만.”

솔직담백한 건 오히려 힐마르티노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았다. 조나단 부인은 수년을 황성에서 살아온 여자였다. 저 여자의 눈에는 내 수작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원하는 바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게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제 위치가 꽤 재미있다고 생각하는데. 황자의 손님이랍시고 온 여자가 알고 보니 캐롤드의 핏줄이었고, 그런 여자를 황녀께선 애지중지 대하시고. 심지어 황자 전하께서는 더러운 수를 마지않으며 황녀 전하로부터 돌려받으셨죠.”

조나단 부인은 대꾸 없이 음료로 목을 축였다. 딱딱하기는. 나는 그녀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뭘 가지고 있게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제야 부인이 얇게 뜬 눈으로 나를 흘겨봤다.

“맹랑하군. 자네가 귀인이었다면 폐하께서 진작 거두셨겠지.”

“그분께 은혜를 받기는 했죠.”

“어린 애 같은 짓 말고 곱게 들어가시게.”

“전 처음부터 지금까지 진담이었는걸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굳이 부인을 찾아올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부인에게만 알려 드릴게요. 제가 뭘 가지고 있는지.”

조나단 부인이 날 지나쳐 다시 총을 쥐었다.

탕!

연속 명중은 여섯 번으로 끝이었다. 푸드덕거리는 깃 소리와 함께 허공에 던져진 거위가 땅 위를 굴렀다. 그리고는 곧 멀쩡하게 일어나 걸음을 옮긴다. 담담했던 조나단 부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정말 귀중한 거예요. 알면 깜짝 놀라실걸요? 장담할 수 있어요.”

아즈마리와의 접촉이 금지된 상태에서 킨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조나단 부인이 전부였다.

“질기군.”

그때, 조나단 부인이 거칠게 장갑을 벗어 던지며 입을 열었다.

“검은매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은 5년 전에 잉고르드 공작으로부터 기사 서임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부기사단장으로 임명되었지. 젊은 나이에 대륙에서 제일가는 기사단의 부단장이 되고, 실력도 출중하다고 하니 모두가 관심을 보였어. 잉고르드 공작은 워낙 칼 같은 작자라 그런 면에서는 엄중했으니.”

앞으로 며칠은 더 귀찮게 할 요량이었는데, 이렇게 시원하게 입을 열어 줄 줄은 몰랐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출신이 밝혀진 후, 사교계는 한창 시끄러웠다. 폐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고 황실도 고요했던 터라 다들 의아하게 여겼지. 뒷방에서야 여러 번 말이 나왔다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히 관심이 끊겼어. 황실 연회가 열린다 하더라도 잉고르드 공작은 대개 다른 기사를 호위 기사로 대동했기에 불거질 말도 없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나?”

캐롤드 가문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으나 옅게 아쉬움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조나단 부인.”

조나단 부인은 검 끝에 찔리더라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래서. 아그레인 양이 가졌다는 그 귀한 비밀은 뭡니까?”

아, 내 비밀. 이럴 때는 가진 비밀이 많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얼 말해도 그럴싸하게 들리거든.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숙이고 작게 읊듯 말했다.

“부인만 아셔요. 저의 비밀은….”

긴장감을 고취시키기 위해 숨을 한 번 멈췄다.

“제가 리히튼 각하의 사람이란 점이예요.”

꽤 쓸모 있는 정보였나 보다. 조나단 부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

“이 정도면 꽤 공정한 공유 아닌가요?”

“잉고르드 공작의 사람이 황자 전하를 모신다? 납득이 되지 않는군.”

“제 말에는 거짓이 없어요.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부인뿐이죠.”

물론 비비안느를 제외하고.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부인. 킨 경이 황성을 방문하지 않는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오겠죠.”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의 주군은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이니까.”

주군이라. 빌힐름을 가리키는 걸까, 아니면 리히튼을 가리키는 걸까.

“듣자하니 아그레인 양 앞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하지만….”

뒷말을 봐선 리히튼이 아닌 빌힐름을 가리킨 듯했다.

“저도 알아요.”

조나단 부인이 오묘한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어떤 태도를 보이기에 하나같이 빌힐름을 경계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장갑을 벗어 던졌다.

“설마 절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진심으로 감동 받았어요, 부인. 부인께 여쭙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발레리아가 나의 장갑을 받아 들었다. 그렇게 황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다가, 다시 조나단 부인을 쳐다봤다.

“아, 조나단 부인. 힐마르티노 각하나 비비안느 전하께 말씀드리지 않았으면 해요. 그렇게 되면 제 비밀을 부인께만 알려 드린 보람이 없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분명 오늘의 일을 비비안느에게 알릴 것이다. 내가 아는 조나단 부인은 그런 여자였으니까. 뭐, 내가 잉고르드에서 온 건 사실이니 꿀릴 건 없지.

“가자, 발레리아.”

총과 장갑을 든 발레리아가 몸을 바짝 붙어 따라 왔다. 착각이 아니라면, 주변을 샅샅이 살피는 게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시선이었다.

“너 괜찮니?”

“예? 물론이죠. 아무런 문제없어요.”

빌힐름의 방 앞에서도 그렇고, 문제가 없어 보이지 않는데.

‘그래도 멍청하지는 않으니 때가 되면 입을 열겠지.’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면 먼저 사정을 캐묻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날 새벽. 밤부터 서너 시간을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잉고르드에서는 혼자 방을 써서 몰랐는데, 안 그래도 잠 못 드는 몸 상태에서 누군가와 함께 방을 쓰니 미칠 노릇이었다. 고요한 들숨과 날숨이 시계 초침 소리보다 날카롭게 재련되어 신경을 괴롭혔다. 바스락거리는 소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야 말로 죽을 맛이었다.

“발레리아.”

잠 들 시간이면 꼬박꼬박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던 발레리아였다. 한데 근래 내가 잉고르드 독의 여파로 계속 앓은 탓인지는 몰라도, 발레리아는 한 시도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했다. 지금도 굳이 내려가지 않고 침대에 엎어져 잠든 것을 봐선 간호를 하려던 생각 같았다. 느릿하게 일어난 발레리아가 나를 쳐다봤다.

“아, 네… 약이 필요하세요?”

“네 방으로 돌아가서 자. 새벽까지 여기에 있을 필요 없어.”

“하지만 아직 몸이 불편하실 텐데요.”

네가 옆에 있는 게 더 불편해. 참다 참다 일어난 것이니 말 다 했다. 나는 이어서 입을 열었다.

“너는 내 하나뿐인 사람이야. 네가 그런 식으로 몸을 함부로 쓰다가 병이라도 나면, 그게 내게 더 불편할 거야.”

잠결 때문인지 아닌지, 발레리아는 다소 우울해진 낯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은하수의 빛만 내리쬐는 밤인데도 그녀의 표정 변화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저….”

문 앞까지 다가간 발레리아가 걸음을 멈추고 살짝 몸을 틀었다. 그렇게 짧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아니에요. 내일 말씀 드릴게요. 주무세요, 아가씨.”

확실히 무언가가 있어. 붙잡아서 이유를 물으려다가 조용히 그녀를 내보냈다. 굳이 내일 말하려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래도 먼저 입을 연다니 다행이었다. 며칠을 더 기다릴 필요가 없을 테니.

공교롭게도 그날이 내가 발레리아를 본 마지막 날이었다.

***

정오가 지났다.

괘종시계가 울린 후 나는 종을 흔들었다. 오늘로 벌써 일곱 번째 종이었다. 이윽고 찾아온 하녀는 이름도 모르는 여자였다. 나는 그녀에게 명했다.

“고용인들 중에 발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하녀를 데려와.”

또야. 금방 표정을 갈무리한 하녀가 허리를 숙이며 방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하녀의 입에선 일곱 번째로 똑같은 말이 흘러 나왔다.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하녀를 내보내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누구에게 물어야 발레리아의 행방을 알 수 있을지는 그간 살아온 경험으로 쉬이 알 수 있었다. 주방에서 일을 지휘하고 있는, 누가 봐도 하녀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에게로 다가가서 발레리아의 근황을 물었다.

“발레리아 몰타를 말씀하시는 거죠? 오늘 아침부터 보이지 않아 시종이 찾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찾게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야.’

하지만 그 누구도 모르는 행방을 억지로 쥐어짜 알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며칠간 유독 불안해 보였던 발레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아, 제기랄.’

꼭 일이 벌어지고 후회하지. 하녀의 안내로 발레리아가 지냈던 방을 찾았다. 잉고르드에서의 내가 그러했듯, 발레리아의 방 역시 물건이라고 할 게 몇 없었다. 마침 방을 뒤지고 있던 어린 하녀가 내게 작은 쪽지를 건넸다.

<가족의 병이 악화되어 급히 집으로 돌아갑니다. 제 물건은 필요한 하녀들에게 적당히 배분해 주세요. 아그레인 아가씨에게 죄송하단 말씀을 전해 주세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 방에서 발견한 거니?”

“예, 예.”

“발레리아의 필체가 맞아?”

하녀가 도르륵 눈알을 굴리며 대답했다.

“저, 저희 중엔 글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하녀장을 찾아가 물었으나 모르겠다는 대답만 들려왔다. 그래, 일개 하녀가 글을 적을 일이 얼마나 있겠어. 하지만 발레리아에게는 가족이 없다. 그리고 작금의 그녀라면, 자고 있는 나를 깨워서라도 사정을 말한 후 사라졌을 터였다.

‘빌힐름.’

아니야,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자. 벨버른 백작이 죽은 지 이제 겨우 일주일 정도가 흘렀다. 더군다나 이틀 전의 만남에서도 분위기가 썩 괜찮았지 않았던가. 발레리아의 흔적을 추가로 발견한 건 멍하니 내 방 안을 둘러보던 때였다. 그날 이후로도 계속 익명의 엽서가 왔었는지, 벽난로 위쪽에 까만 서신들이 쌓여 있던 것이다.

<누군가 계속 지켜보는 느낌>

엽서의 뒷면, 이제는 익숙한 문장 아래로 발레리아의 것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쪽지에 쓰여 있던 것과 필체가 달라.’

발레리아의 글은 다른 엽서에서도 발견됐다.

<내가 아닌 아가씨를 지켜보는 것일 수도>

<말씀드리기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단순히 예민해져서일까>

고작 네 줄의 흔적이었으나, 이보다 더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 누군가 발레리아를 데려갔다. 그것도 우발적인 결정이 아닌, 철저한 사전 탐색 후에.

“누구지?”

빌힐름. 비비안느. 그리고 황제의 침실에서 내 이름을 듣자마자 반응한 귀족들까지. 하나하나 따지려니 그 수가 적지 않다.

‘아, 빌어먹을. 머리 아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걸 찾자. 발레리아가 끌려갔을 만한 곳이 어디지? 인적이 드물거나, 사람들이 꺼림칙하게 여기는 장소….

‘안 좋은 소문이 무성한 곳이에요. 불길한 땅이라 황실에서도 관리하지 않는데, 조금만 깊게 들어가도 발에 차이는 게 시체라고 했습니다.’

동쪽 숲. 깊게 고민할 정신도 없었다. 나는 급히 동쪽 숲으로 달려 나갔다. 장마가 끝나고 차가워진 초겨울 바람이 숲을 에워쌌다.

“발레리아!”

찬바람이 나무 사이사이로 흐르면서 섬뜩한 소리를 만들었다. 언뜻 사람의 비명처럼 들릴 소리였다.

“발레리아!”

그렇게 몇 십 분을 헤맸을까? 이대로는 절대 찾지 못할 거란 무언의 깨달음이 있었다. 내 발은 절로 숲 입구를 향하고 있었고, 멍하니 땅 아래를 살피던 때였다.

“아.”

마르지 않은 빗물에 축축해진 낙엽 사이로, 썩어가는 고깃덩이가 보였다. 단번에 알아봤다. 그때, 힐마르티노에게 잘린 시종의 손가락이었다. 힐마르티노.

‘하녀들 중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가 없었습니다.’

왜 그녀를 잊고 있었지? 그 미친년이라면 발레리아를 데려가 해코지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행위가 너무나 힐마르티노스러웠다. 나는 그녀가 범인임을 반쯤 확신하고 힐마르티노를 찾아갔다.

시종에게 알리는 시간도 아까워 곧장 문을 열고 들어섰다. 힐마르티노는 승마를 준비하는 중이었는지 하녀의 도움을 받으며 환복하고 있었다. 나는 하녀를 밀어내고 힐마르티노의 앞에 섰다.

“발레리아를 돌려 줘.”

그녀에게선 잠시간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커다란 방 내부를 둘러봐도 사람으로 보이는 건 하녀를 포함한 우리 셋이 전부였다. 곧 힐마르티노가 몸을 젖히며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뭐어? 아하하! 대뜸 찾아와선 무슨 헛소리람? 뭐라 했니? 발레리아? 네 그 예쁘장한 하녀를 말하는 건가?”

그리고는 불쾌함을 나타내기는커녕,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내 방문을 기꺼워했다.

“너의 더러운 성미를 못 이겨서 도망가기라도 했나 보지? 한데 도망간 아이를 왜 내게서 찾을까나….”

힐마르티노의 반응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래, 그녀가 진짜 범인이었다면 오히려 날 골리려 했겠지. 기이한 상실감이 찾아왔다. 그건 당사자인 나조차 이해되지 않는 상실감이었다. 발레리아, 그 애가 뭐라고….

한참 미친 듯이 웃던 힐마르티노가 조용해졌다. 이제야 갑작스레 쳐들어온 내게 화가 나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막상 마주한 그녀의 얼굴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화도, 슬픔도, 기쁨도 느껴지지 않는 말 그대로 미묘한 표정이었다.

“그 하녀, 혹시 집으로 돌아갔니?”

“발레리아에게는 가족이 없어.”

“흐흥.”

그렇단 말이지. 그래, 그럴 때가 되었지. 답지 않게 혼잣말을 지껄이던 힐마르티노가 돌연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너 말이야… 내 언니와 재미있는 놀이를 했던데. 어때? 이 언니와도 하지 않으련? 서로 한 가지씩 교환하는 거지. 아! 물론 나는 알려 주고 싶은 걸 알려 주고, 너는 내가 하는 질문에만 대답해야 해.”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내가 왜?”

힐마르티노는 인심 쓴다는 듯, 부츠를 마저 신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쁜 조건 아니잖아? 네 어깨에 대한 내 사죄라고 여기도록 해.”

양심이라는 게 쥐똥만큼이라도 남아 있긴 하군. 아니면 이마저도 날 이용해 먹으려는 속셈일까.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힐마르티노가 곧장 자신의 질문을 던졌다.

“비비와 무슨 관계니?”

이런 걸 순정이라고 말하던가. 비비안느와 내가 어떤 관계냐고? 그건 그녀의 의문만이 아닌 나의 의문이기도 했다. 비비안느는 왜 아직도 날 못 잊은 것처럼 행동할까? 내가 뭐라고? 이대로 순순히 알리기에는 이용해 먹을 구석이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적당하게, 거짓말을 섞지 않고 오히려 더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하녀로부터 종이와 만년필을 받아 짧고 굵게 작성했다.

<개와 주인>

그리고 훔쳐볼 수 없도록 서너 번 접어 힐마르티노에게 건넸다.

“내가 나가고 난 후에 확인해 봐. 하녀까지 잃은 마당에 남은 한 쪽 팔도 문제가 생기면 안 되거든.”

헛웃음도 잠깐, 힐마르티노는 바로 종이를 받아 하녀에게 건넸다.

“우스운 짓거릴 하는구나. 얘, 대답이 제대로 적혔는지 확인해 보렴.”

종이를 확인한 하녀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녀는 내 얼굴을 슬쩍 확인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적히기는… 적혔습니다.”

“으응? 반응이 왜 이렇게 떨떠름해? 관련 없는 답이라도 적은 거야?”

“아, 아니요. 그렇다기보다는….”

쓸데없는 소리가 길어지기 전에 하녀의 말을 끊었다.

“사실만 적었어. 됐으니 어서 그쪽도 말해, 여기에 한 시라도 더 있다간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

안 그래도 하루 종일 편두통에 시달리는데, 지금처럼 피곤한 인물을 상대해야 할 때는 그 강도가 더했다. 쪽지를 다시 건네받은 힐마르티노가 하녀에게 턱짓했다. 하녀가 방을 비운 후, 힐마르티노는 한동안 말없이 내 얼굴만 응시했다.

“뭘 봐?”

짜증스레 묻자 힐마르티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턱을 쓸었다.

“네 얼굴이 확실히 내 취향이기는 한 것 같아서. 흐음, 내가 그렇게 얼굴에 약했나? 이상하단 말이지. 나는 내가 꽤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시시때때로 개소리를 하느라 바쁘네. 힐마르티노는 겨울용 가죽 장갑까지 꼼꼼하게 착용하며 창가에 몸을 기댔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탄신일? 그래, 탄신일 10일 전. 탄신일의 10일 전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큰 의미 없는 숫자지. 한데 그날에 왜 황성에서 사냥 대회가 열리는 줄 아니?”

이미 지나간 사냥 대회는 왜 언급하는 거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가만히 듣고만 있자, 힐마르티노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밝히듯 엄중한 얼굴로 자답했다.

“다 사냥에 미친 다나한 2세를 위해서야.”

사냥에 미친 귀족이 어디 한둘이랴. 기대한 것과 달리 김이 확 새는 대답이었다.

“황제의 사생활 따윈 조금도 궁금하지 않아.”

힐마르티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번 역시 그녀의 표정은 모호했다. 할 말과 못할 말을 고르듯 신중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인 느낌이 느껴졌다.

“그렌페르크 제국의 주인인 레그윈 황실은 대대로 광기를 물려받지. 따뜻한 피를 봐야 심신의 안정을 찾는다는, 매우 야수적인 광기가 말이야. 흐흥. 짐승도 아니고… 사람에게 광기가 무엇이야? 미쳤다는 소릴 참으로 고상하게 표현하지 않니?”

“…광기라고?”

리히튼이 가지고 있는 그것? 날 향한 시선을 거두고 가만히 눈을 감은 힐마르티노가 자신의 뺨과 귀를 매만졌다.

“내가 봤을 때 그들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피가 아닌 비명이야. 사냥감의 고통 속에서 쾌감과 황홀함을 찾는 거지. 죽기 직전의 짐승이 내는 최후의 발악처럼!”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무언가를 참아 내듯, 힐마르티노가 자신의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나는 저 표정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빌힐름을 떠올릴 때 저런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물론. 고작 동쪽 숲을 뛰어다니는 동물을 사냥하는 것에 그치지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힐마르티노가 빈 찻잔에 각설탕을 하나둘 집어넣기 시작했다. 도합 일곱 개. 일곱 개의 각설탕이 든 찻잔 안으로 붉은 홍차가 떨어졌다.

“가엾은 비비… 그 끔찍한 가문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생각만으로도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리네.”

말과 함께 힐마르티노가 손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척이 아니라 속눈썹 아래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저 여자가 보이는 감정의 기복은 도무지 공감하기가 힘들다. 각설탕 일곱 개가 든 홍차보다도.

‘사냥.’

사냥이란 귀족에게 놀이에 불과하지.

‘피를 보면 흥분한다고?’

그건 황제뿐만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피를 보면 흥분한다. 따라서 고작 사냥에 미친 행위를 광증이라 표현한다는 건, 제국 사교계의 풍토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이 정도면 답이 됐니? 됐다면 한시라도 바삐 썩 꺼지렴. 이 언니는 어여쁜 아그레인이 적어 둔 답을 어서 확인해 보고 싶거든.”

그렇다면 힐마르티노는 왜 황제의 사냥을 광증이라 묘사했는가. 그녀의 축객령에 망설임 없이 방을 나왔다. 내가 느낀 감정은 만족감이 아닌,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이한 흥분이었다. 명치 아래가 뜨거워지고 머릿속은 차가워지는, 그런 흥분.

‘사냥.’

사냥이란 귀족에게 놀이에 불과하다.

‘아니, 정말 놀이에 불과할까?’

레그윈 황실에 대대로 내려오는 광기. 사냥에 미친 다나한 2세. 발레리아의 행방불명. 모든 사항을 고려했을 때, 힐마르티노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했다.

황제가 사냥하는 건 인간이다. 그리고 발레리아는 아마….

***

그날 밤에는 오랜만에 완전한 무력감을 느꼈다. 이런 기분을 언제 느꼈더라. 트리비아체가 멸문했을 때? 독을 처음 섭취했을 때? 결국 잉고르드에서 도망치지 못했을 때? 이런 패배감을 계속 느끼고 싶지 않았다. 오지 않는 잠에 들기 위해 억지로 술 잔을 비웠고, 세상이 빙그르르 돌기 시작할 때쯤 겨우 정신을 잃을 수 있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나는 눈물에 젖은 비비안느를 만났다.

[아, 아그레인!]

비틀비틀 달려온 비비안느는 생명줄을 붙잡듯 날 애절하게 끌어안았다. 오래 울었는지 뺨에 닿아 오는 살결이 뜨거웠다.

[폐, 폐하께서 결국 그 애를 데려가셨나 봐! 베니, 내 하녀 말이야… 아무리 찾아도 없어. 고작 서신 한 장만 남겨두고선 집으로 돌아갔대! 내, 내게 그럴 애가 아닌데!]

겨우 하녀가 한 명 사라졌을 뿐이다. 한데 그게 그토록 서글픈 일인가? 나는 비비안느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 축 처진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흑, 내가 울면 밤새 위로해 준 아이란 말이야….]

[비비. 내가 말했지?]

비비안느가 내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점차 축축해지는 느낌이 달갑지 않았다.

[황성에서 약점을 만들어 놓는 건 멍청한 짓이야. 이것 봐, 결국 눈물까지 흘려가며 아파하는 건 너잖아.]

[하, 하지만….]

[특히나 너처럼 약해 빠진 아이에게는 나처럼 깨지지 않는 장식품 외엔 아무런 가치도 없어.]

사실을 고하자면, 나는 그녀의 하녀가 사라질 것을 알고 있었다. 베니라는 이름의 어린 하녀는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그 아이는 뒷머리를 잡힌 채 수백 미터를 질질 끌려갔다. 도축장에 팔려가는 돼지처럼. 황제의 비밀스럽고 역겨운 취향을 위해서.

[응, 아그레인. 나도 알아….]

하지만 나는 비비안느에게 알리지 않았다. 어차피 너에게는 나밖에 없잖아. 앞으로도 나밖에 없어야 해. 계속해서 나만 필요로 해야 해. 내가 너를 손 안에 넣고 굴릴 수 있도록.

[그러니 어떤 것에도 애정을 주지 마. 오직 너와 나를 위해 움직이고 너와 나만을 생각해.]

훌쩍이던 비비안느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금실 같은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안도감을 선사했다.

[너의 그 ‘힘’ 역시, 오직 나만 알고 있어야 하는 거야. 알겠지?]

[으응.]

나를 껴안은 두 팔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응. 알았어. 반복되는 그녀의 긍정은 내가 아닌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꼭 그럴게. 걱정하지 마, 아그레인.]

나는 너를 걱정 안 해. 나는 나만 걱정해.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나를 위해 삼켰다.

***

다음날 오전에 일어나면서 지긋지긋했던 두통이 적게나마 가시는 걸 느꼈다. 이럴 수 없는데. 신경 쓰이는 사건이 일어났을 땐 본래 몸 상태가 더 최악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사실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었으나, 이상하게도 온종일 그 이유에 대해 고민했다. 해답은 그날 해가 지는 저녁, 빌힐름을 찾아가는 길에 찾을 수 있었다.

‘죄책감이나 동정심 같은 건 느끼지 않아도 돼. 나에게는 나만 중요하니까.’

그것이, 과거의 내가 알려 준 명쾌한 해답이었다. 과거의 나는 타인의 슬픔에 일말의 동정과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라면, 나 역시 불필요한 감정 소모는 여기서 그치는 게 옳을 터였다. 그래, 내가 가져야 할 건 발레리아를 잃은 슬픔이 아니었다. 내 것을 해친 자들에 대한 복수심이라면 몰라도.

“전하께서 오늘은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로 시간을 내지 못하신 터라, 아그레인 님의 이해를 구하셨습니다.”

빌힐름의 전언과 함께 시종이 내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이런 걸 받고 화를 풀라는 뜻인가? 선물까지 갖다 바친 것을 봐선 그의 전언이 변명은 아닌 듯했다.

“전하께선 어디로 가셨니?”

시종이 눈길을 내렸다. 말하지 못한다는 의미인가. 방에 돌아왔을 때, 흐릿했던 하늘에서 결국 우박이 쏟아졌다. 추운 날씨에 얼어 버린 눈비가 창을 쳤다. 안개 낀 풍경 너머, 빛 한 줌 비추지 않는 별채가 들어왔다. 서쪽 숲에 유일하게 자리 잡은 건물. 상시 말끔하게 관리되지만,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건물.

“비비는… 항상 별채에서 나를 만나곤 했지.”

어렴풋이 기억난다. 수년 전 과거에, 우리는 늘 별채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그 시절의 나는 황성에 단 한 발도 들인 적이 없었다. 마치 밀회라도 하듯이. 우산을 쥐고 별채로 향했다. 꼭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박의 크기가 주먹만 했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들어오고 싶었다. 그리고 『태양이 흐르는 강』 앞에 선 순간, 몹시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 그래. 과거에도 분명 지금과 비슷한 순간이 있었다.

“기억났어, 빌힐름.”

발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지척에서 들려오는 숨소리에는 그의 이름이 각인된 듯, 붉은 존재감이 선연했다.

“그때 비비의 하녀를 데려간 것도 다름 아닌 너였지.”

목울대만 겨우 울릴 정도의 미세한 웃음소리가 났다.

“모르는 척 비비를 위로하기가 얼마나 마음 아프던지.”

“마음 아팠어?”

왼쪽 귀의 귀걸이가 무언가에 부딪혀 작게 흔들렸다.

“비비가 아무리 여려도 그렇게 목 놓아 우는 일은 적거든.”

“그런 시절도 있었지.”

“그 애가 우는 일의 대부분은 너와 관련 있는 일이었어.”

“어쩐지 그리운 마음이 드네. 더 괴롭혀 줄 것을.”

뜨거운 손끝이 내 목덜미를 부드럽게 쥐었다. 피부로 전달되는 박동을 확인하듯, 여러 번 턱 아래를 쓸다가 떨어졌다. 짙은 아쉬움을 한가득 풍기고서.

“그간 고민이 많았어. 왜 하필 발레리아였을까? 많고 많은 하녀들 중, 왜 하필 그 애였을까.”

“어린 하녀의 행방불명이 안타까운 모양이구나, 아그레인.”

“왜 자꾸 나를 자극시키려고 하는 걸까.”

고개를 틀었다. 오롯이 나의 그림자만 기다랗게 놓여 있던 자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위에 선 빌힐름이 보였다. 짙은 금발이 명암 속에서 분위기를 달리 했다. 그의 머리칼, 표정, 자세 하나하나가 전부 밀랍으로 만들어진 인형처럼 느껴졌다. 나지막하게 내려앉은 시선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환상에 젖게 한다. 이전과 달리 마냥 상냥하지만은 않은 눈빛에는 차가운 열기가 엿보였다.

내 눈앞에 그가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그레인의 목줄을 쥐고 있던 빌힐름이.

“내가 그렇게 그리웠던 거야? 빌힐름.”

번개가 쳤다. 실내의 어둠이 깔려 있던 그의 낯에 하얀 빛이 쏟아졌다.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은 탓일까. 더더욱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빌힐름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태연한 얼굴의 빌힐름이 말했다. 그럼 내 얼굴을 바라보느라 넋을 잃기라도 한 걸까.

“지금 이 순간을 평생 머리에 새기고 싶어서.”

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파문 하나 일지 않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설마 했던 진실을 깨달아야 했다. 다 알고 있었구나. 다 알고 나를 기만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거였어.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눈이 맞아, 아그레인… 그렇지?”

빌힐름은 내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두 발이 묶여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옅은 눈웃음에 혈관이 얼어붙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체내 모든 혈액에 서리가 낀 것처럼 소름이 일었다.

‘아아….’

빌힐름이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황제의 이면을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그 이면은….

“내가 너의 그 눈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를 거야, 아그레인. 날 씹어 먹고 싶어 하는 그 눈.”

빌힐름의 목소리는 시를 낭송하는 듯했다. 그에 나는 억지로 입을 떼어 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착각이야. 나는 그런 생각을 조금도 하고 있지 않아.”

“그런 대답도.”

“나는….”

“거짓말에 능숙한 네가 내 앞에서만은 늘 티를 내곤 하지.”

어두운 동굴의 바닥을 기는 목소리였다.

“온 세상에서 오직 내 앞에서만. 리히튼도, 비비안느도 아닌 오직 나의 앞에서. 아그레인… 너로부터 내가 느끼는 그 환희를, 너 역시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입 안이 바짝 메말랐다.

“나를 볼 때의 네 표정이 어떤지도.”

빌힐름과 나는 대화를 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양 목이 타들어 갔다.

“봤으니 만족했겠네. 그렇지?”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란 게 있지.”

“채워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발레리아를 데려간 거구나.”

빌힐름이 처음으로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조금만 더 거리가 멀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미세한 반응이었다.

“황성 안에 있는 건 모두 폐하의 것이니, 그 무엇이든 바치라면 바치는 수밖에.”

“날 바치라고 하면 바칠 거야?”

하하. 빌힐름이 고개를 떨구며 웃었다.

“내가 너를? …그럴 리가, 아그레인.”

기억 속 흐릿한 그의 모습과 눈앞의 빌힐름이 서서히 겹쳐진다. 과거에 그러했듯 금방이라도 내게 다가와, 손을 잡고 뺨을 쓸어내릴 것 같았다. 하지만 빌힐름은 꼼짝도 안 했다.

“너는 이 지루한 인형극에서 유일무이한 내 작품이야.”

붉은 눈동자에 선연한 만족감이 떠올랐다.

“내가 정말,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살아 숨 쉬는 작품.”

미친 새끼.

“발레리아를 내놔.”

무언가 생각하듯, 빌힐름이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목덜미를 쓸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입을 떼었다.

“팔 한쪽이라도 괜찮다면.”

진짜 미친 새끼.

“아니면 다리가 좋아?”

그래, 너는 그 누구보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새끼였지. 분명한 이유는 망각 속에 묻혀 떠오르지 않았으나 확신할 수 있었다. 네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이유는, 황제의 이면을 그대로 빼다 박았기 때문이야.

“나는 너를….”

몹시 끔찍한 성정을 지닌 너는 열에 다다랐던 개들 중에 오직 나만을 살려두었고.

“너를….”

내가 고통 받기를 그 누구보다 고대했으며, 그런 너를 나는….

“기다릴게.”

코앞으로 숨이 떨어졌다. 나는 눈꺼풀만 겨우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빌힐름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너라면 평생도 기다릴 수 있어, 사랑스러운 나의 아그레인.”

검지가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발걸음이 멀어진다. 나는 여전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던가. 피가 식어가는 이 끔찍한 기분을 도무지 버틸 수 없었다. 나는 『태양이 흐르는 강』과 마주보고 걸려 있는 장식검의 날을 붙잡아 창문으로 내던졌다. 손바닥이 찢어질 듯 아팠다. 기다란 두 개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읏.”

순간, 머리가 둘로 쪼개져도 이상하지 않을 극심한 어지럼증이 나를 덮쳤다.

‘어?’

눈앞에 흐릿한 환상이 나타났다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눈앞이 빙그르르 도는 탓에 제대로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 낙마했을 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단순히 충격을 받아서인가?’

고통이 몰아친 후에야 숨통이 트였다. 뒤늦게 현실로 돌아온 나는 별관을 나와 방에 틀어 박혔다. 의원은 상처에 바를 연고와 함께 붕대를 자주 갈기를 당부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

그날 밤. 잉고르드의 마차가 황성에 도착했다.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의 동행에는 아즈마리아 윌이 포함되어 있었다.

황성에 전에 없던 선연한 긴장감이 돌았다. 시중을 드는 종들이 그토록 바짝 얼어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사람 한 명으로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싶을 수준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리히튼과 내가 지금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그것도 다시 돌아온 황성에서. 침대에서 일어난 후부터 그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공작 각하를 뵈러 가지 않는 겁니까?”

그래… 정말이지, 리히튼의 방문은 황성의 많은 부분을 바꿔 놓았다. 오죽하면 딱딱하던 조나단 부인이 나와 함께 점심 식사를 들 정도였으니까.

“벌써 세 번이나 똑같은 걸 물으셨어요. 이러다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체하겠어요.”

“나는 죽을 땐 죽더라도 손해 보는 건 못 참는 성격입니다. 아그레인 양이 내게 밝힌 그 비밀이란 것의 진위를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

“아아. 제가 부인께 그 정도 신뢰밖에 못 드렸다는 사실이 안타깝네요.”

“안타까울 게 뭐가 있죠? 딱 그 정도가 우리의 관계인 것을.”

어제부터 입맛이 없던 터라 식기를 이르게 내려놓았다. 다친 손 때문에 나이프를 사용하기가 영 불편하니, 억지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멀리 달아났다. 조나단 부인은 내가 힐마르티노에게 건넸던 쪽지의 내용을 알고 있을까?

“후작은 몹시 즉흥적인 성격이지만, 나는 아니에요.”

묵묵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알고 있나 보군. 닮은 점 하나 없어도 자매는 자매이다 싶었다.

“내게 황성의 물을 흐리는 자는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예요. 후작처럼 오냐오냐해 줄 마음이 추호도 없단 소립니다.”

“그래서 저를 내쫓기라도 하시게요?”

조나단 부인은 코웃음도 치지 않고 우아한 자세로 고기를 썰었다.

“빌힐름 전하의 손님을 그리 할 순 없지. 내쫓아달라고 빌게 만든다면 모를까.”

“그거 굉장히 겁나네요.”

“나는 그대와 기 싸움할 생각도, 좋은 관계가 될 생각도, 그렇다고 적대시할 생각도 없습니다.”

“힐마르티노 각하께서 제게 하는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세요. 그런 마음은 금방 사라지실 거예요.”

그래서 어쩌라는 표정이었다.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었으나, 조나단 부인에게는 힐마르티노에 대해 무슨 소릴 하든 조금도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언가 가늠하듯, 나이프로 토마토를 툭툭 치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당신의 하녀가 정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어라.

“표정을 봐선 뒷이야기가 있다는 걸 아는 모양이군.”

설마, 저 여자 입에서 발레리아의 이야기가 나올 줄이야.

내색하지 않았으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빌힐름도, 비비안느도, 힐마르티노도 아닌 조나단 부인이 먼저 언급한다고?

“부인. 저에게 바라는 것이라도 있으세요?”

조나단 부인은 말을 아꼈다. 이제야 그녀가 날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목적이 있어서였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재차 입을 열었다.

“있다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부인께서 왜 저 같은 사람의 눈치를 보시는지 모르겠네요.”

날이 선 눈빛이 내 의중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힐마르티노와 같은 미친년의 안광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눈이었다.

“우리는 비비안느 전하께서 이 황성을 바꿔 주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땅히 그러실 분이시죠.”

“잉고르드 공작이 함께하는 이상 빌힐름 전하의 시대를 맞이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자신만만하시네요.”

“그러니 아그레인, 내가 당신을 도울 여력은 충분합니다.”

식사를 끝마치길 잘했다. 음식을 씹거나 삼키고 있었다면, 장담컨대 목에 사레가 걸렸을 것이다.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서 물었다.

“도와요? 무엇으로부터요?”

날 돕는다고? 아하하… 하고 크게 웃지 못한다는 게 빌어먹게 아쉬웠다.

“빌힐름 전하는 제게 잘해 주세요. 놀라울 정도로요. 어쩌면 그분의 총애를 받는다는… 누구였죠? 마가렛 헨서웨이? 그 아가씨보다 내가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나를 머저리로 아는군요. 아그레인 양이 빌힐름 황자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쯤, 조금만 상황을 파악하면 손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점차 황폐해져가는 당신의 주위를 살핀다면 말이죠. 설마 그대의 하녀가 사라진 게 단순히 재수 없어서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황폐라. 아니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황성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나보다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부인께선 확신하시나 봐요.”

“확신할 수밖에. 황자를 키운 사람이 다름 아닌 이 몸이니까.”

퍽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죽은 황후의 자매였으니, 빌힐름의 유모가 되기에 마땅한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에게 빌힐름은 애지중지 키운, 자식 같은 황자라 이건가. 그런 자에게서 등 돌리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한데 그녀는 과거의 내가 황성에 갇혀 살았었단 사실을 왜 모르는 걸까? 아즈마리아와 황제의 최측근들조차 사실을, 무려 황자의 유모씩이나 되는 여자가 모른다는 게 이상했다. 부인이 말을 이었다.

“의도치 않게 말이 길어지는데… 아그레인 양이 정말 리히튼 각하의 사람이라면, 나 역시 그대를 도울 용의가 충분하다는 겁니다.”

더 설명할 필요 없는 완벽한 선의였다. 적어도 지금 당장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아아, 레이나.’

네가 이 자리에 없어서 참 아쉽다. 참 재미있지 않니? 여기 너와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어. 공교롭게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구원자는 빌힐름이 아니라 리히튼이지만. 조나단 부인에게 내가 리히튼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보다는 빌힐름에 복종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 같았다.

“개와 주인에 대해서는 안 물어보세요?”

힐마르티노에게서 분명히 전해 들었을 텐데.

“물어봤자 입을 꽉 닫을 테니까. 생산성 없는 대화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식기를 내려놓은 조나단 부인이 남은 물을 삼켰다.

“아그레인 양이 나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군요.”

“사실과 별개로 그런 제의를 하시는 의도가 궁금하네요. 혹시 자선이 취미이신가요?”

“말했지만, 나는 죽으면 죽었지 손해 볼 마음은 없습니다. 이 모든 건 전부 비비안느 전하를 위한 일일 뿐.”

조나단 부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변함없이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즐거운 식사였습니다, 아그레인 양. 나와의 식사가 불편했다고 부디 체하지는 말기를. …아, 그 불편해 보이는 손도 어서 낫길 바라야겠군요.”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어서 배웅하라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나는 귀찮은 티를 풀풀 풍기며 조나단 부인을 밖으로 내보냈다. 곧 식탁을 치우기 위해 시종들이 들어왔다. 멍하니 깨끗해지는 식탁을 구경하다가 그들에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불쌍하게 생겼니?”

제대로 된 대답이 들려올 리 없었다. 나는 우물쭈물하는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됐어. 이만 가 봐.”

조나단 부인에 이어 시종들까지 나가자 방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우박이 퍼붓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하늘이 화창했다. 벽난로의 온기와 내리쬐는 햇빛, 그리고 째깍거리는 괘종시계의 소리가 내 방의 전부였다. 나는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탄생일을 고작 사흘 남긴 오늘, 평소보다 훨씬 많은 수의 마차가 도착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우연인지. 마침 그 앞을 지나가는 아즈마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무척이나 빠른 걸음이었다.

“역시 뻔뻔해. 황자를 팽한 주제에 방 밖으로 잘도 나오고 말이야….”

아즈마리아는 내게 갖가지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몇 없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째서 나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 리히튼의 옆이라면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그 빌어먹게 긍정적인 태도에 대한 가소로움. 그럼에도 나와 비슷한 처지라는 동질감. 그날 죽이지 못했다는 후회.

‘후자가 가장 크지.’

되새기니 당시의 나를 또다시 원망하게 된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역시 내가 아닌 타인을 동정할 필요는 없어. 내게 불쌍한 건 나로 족해. 그리 여기니 머리가 트였다. 오늘 아침의 다짐과는 차원이 다른, 기분 좋게 가슴을 울리는 흥분에 고취됐다. 문을 열고 시종을 불렀다.

“얼굴은 상관없어. 하녀들 중 가장 건방지고 욕심 많은 아이를 데려 와.”

시종은 내가 건넨 금화를 주머니 안으로 조심스럽게 챙겼다.

“이왕이면… 개처럼 사느니 죽기 전에 한 탕 뛰고 싶어 하는 아이로.”

몇 시간이 흘렀을까. 시종이 낯선 하녀를 데려왔다. 발레리아처럼 어려 보이는 하녀는 아니었다. 갈색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독기도, 간절함도 느껴지지 않는 흔하디 흔한 하녀였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니?”

고개를 든 하녀가 답했다.

“아버지의 노름으로 가세가 기울어졌습니다. 어머니와 두 동생은 불치병으로 침대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늙은 노부가 판 약초로 제 가족 모두가 겨우 입에 풀칠하고 있습니다.”

조금의 떨림도 느껴지지 않는, 완벽하리만치 차분한 목소리였다. 마음에 드네.

“이름은?”

“나타샤 폴입니다.

“그 이름은 잊어. 오늘부터 네 이름은 발레리아 몰타야.”

하녀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곧 시선을 내리깔고 길게 숨을 들이켰다.

“알겠지, 발레리아?”

“예.”

서랍을 열어 금화가 든 주머니와 유리병이 든 상자를 꺼냈다. 그중에서 주머니는 발레리아에게 던지고, 상자는 내가 직접 열었다. 발레리아는 어안이 벙벙하게 주머니를 받았다.

“이건….”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면, 아그레인 캐롤드가 네게 구애하느라 재산을 탕진하는 중이라 말하렴.”

말과 함께 상자에 들어 있던 작은 유리병을 들었다. 나의 혈액. 다른 말로는 잉고르드의 독이 든 유리병이었다.

“내일부터 너는 근 나흘간 앓을 예정이야, 발레리아.”

두 개의 유리병을 천으로 곱게 감싸 발레리아의 품 안에 넣어 주었다.

“이 병은 딱 두 개만 줄 거야. 하나는 오늘부터 세 번 나눠 삼키고, 나머지 하나는 지옥이 눈앞에 보일 때 삼키도록 해.”

“이게 무엇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네 미래.”

나름대로 평정심을 유지하던 발레리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걱정하지 마. 사람은 죽기 직전의 고통까지는 참을 수 있어.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밝은 미소를 보였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될 때면… 어쩔 수 없지. 네 가족을 생각하며 잘 참아보도록 해. 그 정도 마음은 먹고 왔잖아. 그렇지?”

“…예.”

발레리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너를 과연 어디까지 이용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우리 잘 지내 보자, 발레리아. 너와 나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가능하면 세 번째 발레리아는 없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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