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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2. 리히튼 (14/24)

Episode 12. 리히튼

하녀, 제인은 리히튼에게 있어 퍽 쓸모 있는 인물이었다.

황성에 갇혀 오랜 시간 버려진 개처럼 길러진 그에게 삶이란 끔찍할 정도로 지겨운 것이었다. 너른 숲속 한 가운데 자리한 낡은 성. 식사와 청소를 위해 하루에 한 번씩 찾아오는 하녀들은 대개 겁이 많으면서 무식했고 또한 그를 환멸했다. 빼빼 말라 거지같은 꼴을 한 리히튼을 업신여겼으며, 최대한 말을 섞지 않으려 했다. 사람과의 대화는커녕 책 한 권도 볼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머리가 굳어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또한 그 기분이 비단 착각일 리는 없었다. 그랬기에 리히튼에게 하녀, 제인은 특별한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하녀는 짧으면 반 년, 길면 두 해에 한 번 바뀌었다. 이유는 일괄적이었다. 바뀔 시기가 되면 하녀 생활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식만 들려 왔다. 제인은 그가 황성에서 만난 다섯 번째 하녀로, 그가 보아 온 하녀들 중 가장 덜 무식했다.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아 대화도 잦았다. 융통성도 훌륭해서 종종 낡은 서적을 들고 오곤 했다. 물론 리히튼은 이 모든 것이 빌힐름의 의도임을 알고 있었다. 무엇을 원해서 버려두었던 그에게 최소한의 인정을 베푸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랬기에 리히튼은 부러 모자란 행동과 말을 보여 제인의 경계를 낮추었다.

제인은 진심으로 리히튼의 처지를 동정한지라 웬만큼 횡포를 부려도 곱게 넘어갔다. 리히튼은 제인의 그런 점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삶이 덜 지루해져서. 그래서 그날. 그를 찾아온 적발의 미친년이 제인을 데려간 날, 리히튼은 정말 오랜만에 후회라는 것을 했다. 제인이 사라지면 그녀만큼 쓸모 있는 하녀를 다시 얻을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인이 사라진 후 무료한 시간이 반복됐다. 그는 이런 시간이 끔찍하게 싫었다. 부디 쓸모 있는 무언가가 자신을 다시 찾아와 주길 바랐다. 어느 날은 허무함을 참지 못하고 적발의 미친년, 아그레인을 찾아갔다. 뒤늦게라도 제인을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물론 그는 제인을 돌려받지 못했다.

‘그 애는 널 기다리다가 죽었어. 외로워서.’

둘 사이에 날카로운 대화가 여럿 오고 갔다. 아그레인의 반응은 한결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찔러.’

죗값을 치루겠다며 그에게 나이프를 건네기까지 했다. 그가 반응하지 않자, 아그레인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찔렀다. 그리고 보란 듯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이것 봐. 나는 널 위해서라면 그 애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미친년. 진짜 제대로 정신 나간 계집애였어. 리히튼은 제인을 포기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정신 나간 아그레인에게서 제인을 돌려받을 방도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무료한 삶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날부터 아그레인은 이틀에 한 번 꼴로 찾아와 그를 괴롭혔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리히튼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열흘 가까이가 흐른 후.

‘내가 멍청했어, 리히튼.’

다섯 번째로 방문한 날의 아그레인은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정말 너무… 너무 멍청하게 시간을 낭비했지 뭐야.’

리히튼의 방은 엉망이었다. 제인의 존재로 가득하던 성은 다시 고약한 나무 썩은 내를 풍기고 있었다. 제인… 아니, 굳이 제인일 필요는 없었다. 누구라도 살아갈 목표가 되어 주었으면 했지만 그게 아그레인은 아니었다. 리히튼에게 아그레인은 유일한 안식을 깨뜨린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게다가 제정신이 아닌지라 무슨 괴상한 짓거릴 할지 예측할 수도 없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저 미친 계집애의 뜻대로 움직일 일은 없을 거라 마음먹은 게, 고작 몇 주 전의 일이었다.

‘오늘 아침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너처럼 겁 많고 뒤끝도 긴 애가, 날 선택한다고 해서 내 요구를 순순히 들을까?’

‘개소리하지 말고 당장 꺼져.’

아그레인은 태연한 얼굴로 다가와 먼지가 옅게 쌓인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너는 그런 자상한 위협도 안 지겹니? 나처럼 나이프라도 빼들지 그래. 그래야 내가 겁을 먹고 도망가지.’

저 뻔뻔한 낯짝. 리히튼은 고작 열흘밖에 지나지 않은 일을 신이 나 지껄이는 아그레인을 노려봤다.

‘너 같은 미친년에게 낭비할 체력은 없어.’

그에게는 아직도 열흘 전의 기억이 생생했다. 빵을 자르는 나이프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옆구리 살을 파내던 아그레인의 얼굴이 코앞에서 되살아날 것 같았다. 그날 리히튼은, 아마, 제인이 끌려가던 날에 버금가는 비대한 충격을 먹었던 것 같다. 내가 매달릴 수 있는 게 너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도 아주 잠시 했었다.

‘그거 알아? 내가 비록 여기서 개처럼 길러지고 있지만, 몸 하나만큼은 황위 후계자에 버금가는 아주 귀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거.’

궁금하지 않았다.

‘너도 그런 게 있지 않아? 쓸모없는 개새끼 취급을 당해도, 하나쯤은 그들에게 떠받들어 모셔지잖아.’

리히튼은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없어.’

‘정말?’

목을 길게 빼고 들이대는 얼굴에는 불그스름한 생기가 돌고 있었다. 리히튼은 그 생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아. 이해해, 그런 대단한 비밀 말이야… 누구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겠지. 어쩌면 그게 우리의 유일한 가치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 소리도 할 줄 아는 건가.

‘…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리히튼?’

그래, 그럴 리 없지. 까무러칠 만큼 부드러운 살결이 리히튼의 턱을 잡아 돌렸다.

‘제발, 그런 역겨운 자기연민 속에 빠지지 말아 줘. 너는 내가 유일하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존재란 말이야!’

짙은 녹색 눈동자가 더없이 애절했다. 그녀의 얼굴은 하얀 캔버스와 같아서, 어떤 표정을 지어도 진심인 듯 느껴지게 심장을 쿵쿵 울렸다. 리히튼은 그 점조차 끔찍했다.

‘널 볼 때마다 토할 것 같아.’

리히튼이 속삭임에도 아그레인은 그의 턱을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졌으면 좋겠어. 네 말이 맞아, 아그레인… 너는 내 삶을, 모르는 척 이 새장에 영영 갇혀 살 수 있었던 희망을 망친 주범이야. 네가 살아 있는 동안 난 평생 불행하겠지.’

‘지금처럼.’

입을 열기 무섭게 잠시간 말이 없다. 아그레인은 가만히 눈을 깜빡여 리히튼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서서히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아그레인은 말할 때마다 절반은 헤프게 웃고 있지만, 이상하게 그런 간질간질한 웃음은 처음이었다. 그건 진짜 웃음이었다.

‘지금처럼 네가 그렇게 길게 말하는 거, 처음 봐.’

숨이 차올라서 기분이 더러웠다. 리히튼은 가볍게 얼굴을 틀어 그녀에게서 턱을 빼냈다. 아그레인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앞에 놓인 테이블 위로 등을 구부리고 앉았다.

‘목소리를 들어도 기분 나쁘지 않아. 빌힐름은 늘 살인 충동이 이는 소리만 해대고, 비비는… 아니야, 비비는 그래도 괜찮아. 그 애는 날 사랑하거든.’

멍하니 아무 소리나 지껄이던 아그레인이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리히튼은 경련하듯 몸을 떨며 그녀의 손을 쳐냈다. 하지만 쳐내기 무섭게 하얀 손등이 다시 그의 손을 잡아 왔다.

‘놔.’

‘앞으로 네 번이야.’

그리 말하는 아그레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불현듯 기시감이 느껴졌다. 리히튼은 꽃잎이 흩날리는 듯한 아그레인의 향기로운 미소에서 불쾌함을 느꼈다.

‘네 번만 아프면 엿볼 수 있을 것 같아. 이곳을 벗어나게 된 우리의 진취적인 미래가 말이야….’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말릴 기회도 없었다. 이번에도 나이프였다. 그날의 그 빌어먹을 나이프가 분명했다. 은색의 식기는 아그레인의 붉은 드레스를 뚫고 화살처럼 박혔다. 무엇이 천이고 무엇이 피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씨발, 진짜!’

발작하듯 몸을 일으켰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왜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이런 꼴을 보는 건 벌써 두 번째였다. 아무리 썩어가는 쥐새끼처럼 살아가고 있는 그라지만, 아그레인의 정신머리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여자는 무얼 바라기에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자상을 내는 걸까. 그것도 웃으며 넘어갈 수 없는 치명적인 흔적을.

‘죽고 싶으면 죽고 싶다고 말해, 내 앞에서 이딴 개 같은 짓 하지 말고!’

‘죽기, 싫어.’

가지런히 눈을 감은 아그레인이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고통을 참는 듯 입술을 악물고 있었다. 출혈을 생각하면 나이프를 쉬이 뽑을 수도 없었다.

‘절대 안 죽어. 누구 좋으라고? 나는 여길 나갈 거야.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이 고성에는 이틀에 한 번 하녀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한 번은 공교롭게도 오늘이 아니었다. 리히튼은 성 밖의 누구라도 데려오기 위해 몸을 돌렸다. 왜 자신이 이런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찔렀다고 말해, 리히튼.’

미세하게 떠는 목소리가 나서려는 발걸음을 붙잡았다.

‘무슨 수작이야?’

‘내 것이 되고 싶지 않다면… 그 정도의 거짓말은 하란 말이야….’

리히튼은 조금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아그레인이 지내는 성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쉽사리 시종을 데려올 수 있었다. 그들은 정신을 잃어가는 아그레인을 부축해 나가며 리히튼에게 사건의 경위를 물었다. 누군가는 이 상황을 책임지길 바라는 얼굴로. 긴 정적 끝에 뱉은 리히튼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찔렀어.’

왜 그런 대답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리히튼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시종은 창백해진 얼굴로 서둘러 성을 나갔다. 리히튼은 미친 여자가 사라진 자리에 홀로 서서 열린 문을 말없이 응시했다. 쿵쿵. 심장 소리가 들렸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살아 있는 기분이었다.

객관적으로 아그레인이 입은 상처는 절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리히튼은 적어도 한 달은 그녀와 볼 일이 없을 거라 확신했다. 날렵한 날이 아닌 굴곡진 날이었기에 내상도 더 심할 거라 생각했다. 황성 생활에 미쳐 버린 걸까. 그런 것치곤 퍽 멀쩡하지 않은가. 정신 나간 소리를 밥 먹듯 지껄이긴 했지만 소통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으니. 한데 그 일이 있고 정확히 일주일 후, 아그레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

리히튼은 헛웃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옆구리가 갈라졌던 것치곤 놀랍도록 멀쩡한 모습이었다. 마치 다른 몸을 달고 온 것처럼.

‘안녕, 리히튼.’

허락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선 아그레인은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테이블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멀쩡한 걸음에 허리가 조금도 굽어지지 않은 곧은 자세였다. 보름 만에 완치라니, 믿기 힘든 일이었다.

‘너….’

아그레인의 안색은 보름 전보다 훨씬 검었다. 그녀는 그날보다 조금 흐릿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걱정 마. 피는 싫지? 오늘은 다른 방식으로 할 거야.’

무엇을. 묻기도 전에 아그레인이 창문을 거칠게 밀었다. 초가을 숲의 바람이 농밀하게 밀려 들어왔다. 가녀린 몸이 그의 얼굴을 살짝 돌아봤다.

‘우리는 오늘도 다퉜던 거야. 그러니까 네가 밀었다고 해.’

보름 전과 똑같이, 리히튼은 그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창틀로 올라간 아그레인이 그 너머로 몸을 날렸다. 놀라서 혀를 씹을 뻔한 리히튼이 급히 창문으로 튀어 나갔다.

‘아그레인! 젠장!’

저 아래 쓰러진 몸에 미동도 없다. 머릿속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비록 이층이어도 죽을 사람은 죽을 높이였다. 결과적으로 아그레인은 죽지 않았다. 시종에게 안겨 나가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빛이랄 게 없었다. 죽은 생선의 눈깔처럼 탁하고 구정물처럼 어두웠다.

‘빌어먹을.’

리히튼은 그날부터 악몽을 꿨다. 제인? 그런 이름은 잊은 지 오래였다. 대신 아그레인이라는 존재가 모세혈관 곳곳을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그것이 목표였다면 아그레인은 제 할 일을 아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고 볼 수 있었다. 어느 날부터는 그녀를 잊기 위해 청소와 운동 같은 시답잖은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아그레인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었다.

미친 여자를 향한 동정? 아니면 그저 죽음에 가까운 장면을 여럿 봄으로써 얻은 정신적인 충격인 걸까. 무엇이 정답인지는 몰라도 아그레인 때문에 하루가 길어진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또 보름이 흘렀다. 그렇게 또, 아그레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리히튼을 찾아왔다.

‘안녕, 리히튼.’

그때 리히튼은 처음으로 격렬한, 폭력적인 욕구를 느꼈다. 변함없이 태연한 낯짝을 일그러뜨리고 싶었다. 내가 보름 동안 어떤 기분이었는데, 날 이렇게 만든 너는 어떻게 그리 멀쩡할 수 있는 거지? 느릿하게 걸어온 아그레인의 목을 잡고 쓰러졌다. 낡은 침대가 커다랗게 출렁거렸다. 손 안에 느껴지는 목은 그의 팔목만큼이나 얇았고 가녀렸다. 손끝으로 전달되는 심장 박동소리가 크게 울렸다.

‘네가 원하는 게 대체 뭐야?’

아그레인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힘없이 침구 위에 널브러져 자신을 노려보는 리히튼과 눈을 맞추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었다.

‘죽고 싶어서 그래? 그럼 차라리 죽어. 그렇게 바라는 내 손으로!’

얇은 눈꺼풀이 조용히 닫혔다. 모든 걸 포기한 듯 정적이고 힘없던 눈이 가려졌다. 낮게 깔리는 정적에 리히튼의 숨이 덜컥 멈추었다.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아무런 말도 없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죽기 싫다고 말해.’

‘죽기 싫어.’

닫혀 있던 녹안이 다시 드러났다. 그제야 막혀 있던 혈관에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목이 졸린 채, 아그레인이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 리히튼. 나는 죽을 생각이 없어. 우리 정말 많이 왔잖아? 딱 두 번만 더 하면 돼.’

그러니까, 무엇을. 아그레인이 말하는 두 번이란 뻔했다. 멀쩡해질 육신을 또 한 번 망가뜨리는 일이었다. 그날도, 그날로부터 보름이 흐른 네 번째 날도. 리히튼을 찾아온 아그레인은 리히튼에 의해 망가진 인형이 되어 돌아갔다.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었어도, 그녀의 회복 속도가 비인간적이란 것만은 확실했다. 네 번의 정신 나간 행위가 끝난 이후부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즈음 리히튼은 생기가 돌아 사람 같은 낯을 하고 있었다. 성을 방문하는 하녀의 시선이 날이 갈수록 변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찾아오던 방문은 하루에 두 번으로 늘었다. 성에 방문하는 하녀들은 늘 리히튼에게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수준의 장단만 맞춰 줘도 황성의 이야기가 술술 흘러 나왔다.

‘아그레인 아가씨는 외출을 금지당하셨어요.’

그 소식을 들은 건 마지막으로 아그레인을 만난 지 일주일이 흐른 뒤였다.

‘빌힐름 전하께서 무척 화가 나셔서요. 아가씨가 제멋대로이기는 해도 늘 선을 지키는 분이셨는데….’

‘사이가 좋나 보군.’

그의 말에 하녀가 은근하게 떠보는 얼굴을 했다.

‘도련님과의 관계를 미심쩍게 여기시는 듯해요. 아그레인 아가씨는 빌힐름 전하의….’

잠시 입을 닫은 하녀가 말을 골랐다.

‘소중한 사촌 누이거든요.’

사촌 누이라. 요즘은 키우는 개도 사촌 누이라 부르는 건가 싶었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잊고 있던 아그레인의 위치가 제대로 인지되었다. 아그레인은 주인 있는 개였다. 황자 빌힐름의 개. 그 순간 리히튼은 수년간 살아온 낡은 성이 너무나 좁게 느껴졌다. 벽을 무너뜨리고 달려 나가고 싶을 만큼.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던가.

‘안녕, 리히튼.’

호숫가에서 책을 읽고 있던 늦은 오후였다. 그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아그레인이 또 한 번 그를 찾아 왔다.

‘너 꽤 사람 같은 몰골을 하고 있구나?’

그녀의 말이 맞았다. 아그레인이 네 번 죽어가는 동안 리히튼은 점차 생기를 채워가고 있었다. 마치 아그레인의 것을 빼앗기라도 한 듯.

‘왜 온 거지?’

리히튼의 물음에 아그레인이 작게 웃었다. 그녀의 분위기는 이전과 너무나도 많은 부분이 달라 보였다. 땅을 파고들 듯 우울해졌다거나, 눈에 띄게 밝아진 건 아니었다.

아그레인은, 그냥 텅 비어 있었다. 반대로 걸치고 있는 장신구란 장신구 모두가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했다. 마치 무도회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그녀의 외양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일까.

‘네가 말한 네 번은 진작 끝났어. 더는 찾아오지 않기로 했잖아.’

‘그래… 네 덕분이야, 리히튼. 네가 온순하게 나의 부탁을 들어준 덕분에 나는 바라는 걸 모두 얻었지.’

‘돌아가. 너와 정분났느냐는 더러운 소리 같은 건 듣기 싫으니까.’

눈을 크게 뜬 아그레인이 허리를 뒤집고 웃었다. 리히튼은 아닌 척 그런 아그레인의 모습을 훔쳐봤다. 그가 알던 아그레인이 아닌 것 같았다. 저리도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아하하! 너도 들었니? 맞아, 빌힐름이 오랜만에 내게 화를 냈어. 꽤 볼만한 얼굴이었지. 그 뽀얀 얼굴에 침 뱉고 싶은 마음을 얼마나 힘겹게 참았는지 몰라.’

언제 웃었냐는 듯, 맑게 펴졌던 낯이 다시 냉랭해졌다. 표정이 참 다채롭다. 다채롭지만 그 어떤 것도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본 아그레인의 진심은 방금 전에 웃은 그 웃음이 유일했다.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아그레인은 턱을 들어 올리고 눈이 가늘어질 만큼 웃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쁘냐고 묻고 싶은 거지? 내가 예쁘기는 해. 그나마 쓸모 있는 이 얼굴은 가면 같은 거야… 나약한 내면을 숨기고, 더 강한 내가 될 수 있도록 돕는 가면.’

확실했다. 오늘따라 아그레인이 이상하다. 그런 웃음에 그런 말은 아그레인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곧 구두를 벗고 호수에 발을 디뎠다. 리히튼은 흰 발등이 수면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물어본 적 없어.’

‘물어본 적 없어도 조용히 들어 주는 게 어때? 우리가 그 정도 사이는 되잖아.’

역시 오늘의 아그레인은 이상했다. 발을 담그는 것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수면은 어느새 아그레인의 허벅지까지 차올라 있었다.

‘설마 다섯 번까지 필요한 건 아니겠지. 나는 물에 빠진 너까지 건져 올릴 생각은 없다.’

대답이 없다. 그녀의 등이 호수의 중심을 향해 점차 멀어졌다. 수면이 아그레인의 허리 위로 올라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멈춰. 리히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발목이 시렸다. 어느새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 호수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그레인이 몸을 돌렸다. 파란 호숫물이 그녀의 가슴께에서 찰랑였다.

‘미안해, 리히튼. 너를 지옥으로 데려와서.’

리히튼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야, 그러지 마. 굳어 있던 두 다리가 다시 움직였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그레인이 두 팔을 허공 위로 들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기회가 온다고 해도… 나는 또 같은 선택을 하고 말 거야.’

아그레인이 쥔 은색 날이 태양빛을 받아 번뜩였다.

‘우리, 다시 만나자.’

‘…안 돼.’

이번에 아그레인이 가져온 건 케이크를 자를 때나 쓰는 나이프 따위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검 날이 아그레인의 심장을 게걸스럽게 삼키자, 얇은 몸이 수면 아래로 추락했다.

‘아그레인!’

어떤 정신으로 물길을 헤엄쳤는지 알 수 없었다. 주변이 순식간에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물 안을 헤집으려 해도 붉게 물든 탁한 시야가 그를 가로막았다. 언뜻 멀어지는 손가락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팔을 뻗어도 절대 닿지 않았다.

아그레인이 죽었다.

그날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날부터 리히튼은….

***

리히튼은 눈을 떴다. 청량한 공기가 폐부에 차오른다. 전신을 감고 있던 수중의 무거운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럼에도 습관처럼 손을 들어 확인했다. 꿈속의 자신이 지녔던 손보다 훨씬 더 커다란 손이었다. 그때처럼 작고 약해빠진 손이 아닌, 커다랗고 단단한 손. 길게 숨을 내쉰 그가 종을 울렸다. 올라온 하녀에게 베르크네를 불러올 것을 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렸고, 익숙한 남자가 침실로 들어왔다.

“베르크네.”

“예, 각하.”

“내일 곧장 황성으로 떠난다. 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전부 미뤄.”

“알겠습니다.”

베르크네는 늘 그랬듯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주인의 명을 받들 뿐이었다.

‘우리, 다시 만나자.’

리히튼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미간을 구겼다. 예상컨대, 오늘 하루는 아그레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그의 뒤를 따라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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