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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1. 베르크네 (13/24)

Episode 11. 베르크네

톱니바퀴가 돌지 않는 낡은 오르골, 먼지가 얇게 쌓인 낡은 찬장, 색이 바랜 전 잉고르드 직계 혈족의 초상화. 베르크네는 시간이 멈춘 듯 조용한 방을 한차례 둘러 봤다. 이곳은 본래 전 잉고르드 공작들이 대대로 사용했던 집무실로, 지금은 형태만 남아, 옛 물건들의 창고가 된 지 오래였다.

‘뒤엎지 않는 게 다행이지.’

베르크네는 역사를 사랑했다. 특히나 잉고르드 같은 유서 깊은 가문의 과거들은 오랫동안 보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한때는 황실의 핏줄을 지키는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과거지만.

‘이 방이 과연 언제까지 멀쩡할 수 있으려나.’

현 잉고르드의 가주, 리히튼 잉고르드는 이 방의 존재를 경멸했다. 아니, 그는 이 방에서 일생을 보냈던 잉고르드의 모든 가주들을 경멸했다. 그런 리히튼이 여태 이 방을 건드리지 않는 이유는, 그전에 끝마쳐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 일이 끝난다면 이 방의 존재는 아마….

끼익.

다시 문을 닫고 열쇠로 방을 잠갔다. 숨이 매캐할 정도로 먼지가 쌓인 것은 아니니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청소해도 될 듯했다. 리히튼은 하녀들이 이 방을 자주 드나드는 것을 싫어했으므로 최대한 일정을 길게 잡는 게 좋았다.

근래 보기 드물게 화창한 날이었다. 베르크네는 복도를 지나치다가, 무심코 걸음을 멈춰 창밖의 하늘을 응시했다. 초겨울의 맑은 하늘과 달리, 이곳 잉고르드는 금방이라도 무언가 터질 듯 길고 긴 긴장감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나마 피를 보지 않는다는 게 다행인가.’

장마가 일주일이 넘게 지속됐을 때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베르크네는 어렴풋이나마 그 연유에 대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수잔… 아니, 아그레인 캐롤드가 잉고르드를 떠난 후부터 달라진 것은 분명했으니까.

“베르크네 씨.”

그의 이름을 부른 인물은 아즈마리아 윌이었다. 잉고르드 저택의 젊은 손님. 그녀만큼 잉고르드에서 오랫동안 숙식한 손님은 드물다. 에리얼 크로허츠가 한 달을 못 넘겼는데, 아즈마리아 윌은 그녀의 기록을 가뿐히 넘기고 있었다. 대부분의 고용인들은 그녀를 더 이상 손님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아즈마리아 윌 또한 티는 내지 않아도 그들의 그런 대우를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다.

아즈마리아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안주인’이라든가, ‘부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겸연쩍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주인’과 ‘부인’이 할 법한 저택 내의 소소한 일상에 조금씩 관여하기 시작했다면 모를까.

“말씀하시죠.”

“혹시 킨 경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아니요. 딱히 일이랄 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베르크네의 어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마냥 상처 받던 아즈마리아도 이제는 다시 가까워지기를 포기한 듯했다. 아니, 애초에 가까운 관계였던 적도 없었지. 어린 시절의 아즈마리아는 황자의 약혼녀로,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고 베르크네는 그에 맞는 대우를 했을 뿐이었다. 그것을 애정이라 여겼다면 몹시 아즈마리아 윌다운 착각이라 할 법했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하등 없었기에 적당히 선을 그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요? 최근 얼굴도 잘 보이지 않고, 걱정돼서요.”

“있다고 해도 본인 혼자서 잘 해결할 겁니다.”

“역시 문제가 있는 거죠? 알려 줄 수는 없나요? 가능하다면 킨 경을 돕고 싶어요.”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것일 텐데. 베르크네는 열릴 뻔한 입을 천천히 닫았다. 아즈마리아 윌이 상처 받지 않길 바라서가 아니라, 굳이 알릴 필요성을 못 느껴서였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즈마리아를 대하는 킨의 태도가 미세하게 달라졌던 시기가 있었다. 굳이 시간을 들여 말동무를 해 준다거나 외출 호위를 자처하는 수준에 그쳤으나, 상대가 킨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놀라운 관심이라 볼 수 있었다.

‘각하.’

그 이유에 대해 알게 된 건 아즈마리아 윌에 대한 킨의 관심이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아즈마리아 윌은 대체 뭡니까?’

참다 참다 터진 의문이었다. 적어도 베르크네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저는 제가 바보임을 마땅히 인지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바보일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을 여쭤볼 사람이 각하밖에 없더군요.’

‘킨.’

킨은 베르크네의 부름을 가뿐히 무시했다. 창 너머의 자작나무 숲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던 리히튼이 고개를 틀었다. 계속 해 보라는 눈이었다.

‘제 동생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인물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그레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역설적이군. 그녀의 기억을 가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떤 근거로 다른 사람이라 주장하는 거지?’

‘따라하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건가. 베르크네는 그제야 킨이 보였던 의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리히튼이 나타낸 의문과 똑같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조금은 다른 의문이라고 해야 하나. 아그레인 캐롤드는 수잔이다. 한데 아즈마리아 윌이 어째서 그녀의 기억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맞지 않는 틀에 자신을 끼워 넣는 것처럼 느껴지고, 무엇보다 제가 알던 아그레인과 너무도 다르더군요.’

‘내게 답을 구하는 이유는?’

‘각하께서는 저에게 아즈마리아 윌의 말이 모두 진실처럼 들리느냐고 물어보셨었습니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니 물은 거다, 킨. 그럼 너는 아즈마리아 윌의 주장에 귀 기울였다는 거냐? 그 버러지 같은 헛소리에?’

킨이 입을 닫았다. 리히튼은 조금의 미동도 없는 태연한 얼굴로 이어서 말했다.

‘너와의 약속은 그딴 데 이용하라고 나눈 게 아니야.’

‘어떤 말씀이신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하나 남은 혈육이 저와 다른 이를 착각했단 걸 알게 된다면, 아그레인 캐롤드가 퍽 서운해 하겠어.’

베르크네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수잔이 아그레인임을 알게 된 후, 베르크네는 그가 서 있는 이 체스판이 리히튼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음을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았었다. 그에게 ‘만약’, ‘혹은’이라는 가정은 없다. 그걸 알기에 빌힐름 황자도 비비안느 황녀도 아닌 리히튼의 곁에 선 것이다. 그들의 승리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단지 언제 누리느냐의 문제일 뿐.

리히튼이 원한다면 지금 당장 왕좌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제국의 판도를 바꿀, 친 빌힐름파 귀족들의 거대한 치부와 그 이상을 알고 있음에도 그저 알고 있는 것에 그쳤다. 베르크네가 느끼기에 리히튼은 무언가를 진득하게 기다리는 듯했다. 아니, 그건 기다린다기보다 인내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인내의 둑을 터트릴 인물이 수잔… 아니, 아그레인임을, 베르크네는 어느 순간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집무실을 벗어나 계단을 내려가는 길에 베르크네가 킨을 불러 세웠다.

‘킨.’

‘또 한소리 하려고 그럽니까? 조금 피곤한데 내일 하시죠.’

‘네 여동생에 대해서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본다.’

‘뭡니까, 그 위로는. 답지 않게. 내가 그렇게 우울해 보이나? 딱히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위로하는 게 아니라 진심을 말했을 뿐이다.’

헛웃음을 짓던 킨이 미심쩍은 눈을 했다.

‘뭔가 알고 있기라도 합니까?’

‘적어도 아즈마리아 윌이 네 여동생이 아닌 것은 확신할 수 있겠더군.’

킨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베르크네가 그를 지나쳐 내려간 후에야 뒤늦게 걸음을 이으며 조용히 읊었다.

‘베르크네 씨가 나였어도 그렇게 여겼을 겁니다.’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그때 본, 킨의 애써 담담했던 낯은 머릿속에 꽤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에게 수잔의 정체를 알릴 수는 없었다. 그 자신의 입으로 밝히기에는 주제 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즈마리아 윌이 주장하는 킨의 좋지 못한 사정이라면, 아마 그 일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베르크네가 아즈마리아에게 물었다.

“그리 여기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아즈마리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등을 쓸었다.

“요즘…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예전만큼 대화가 잦지도 않고. 그럴 분이 아닌데.”

그럴 분이 아니라고? 킨은 이제 와서 아즈마리아를 멀리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본래 그들의 관계로 돌아간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본인에게 직접 물으시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가능하다면 가까운 사람들끼리는 서로 돕는 게 좋다고 봐요. 베르크네 씨는 킨 경이 걱정되지 않으세요?”

킨에게 듣기로 아즈마리아에게는 마땅히 잉고르드를 벅차고 나갈 만한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즈마리아 윌은 꿋꿋했다. 베르크네조차 무엇이 그녀를 그리 강하게 만드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리히튼은 아즈마리아 윌을 냉대하지도, 그렇다고 자상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늘 그렇듯 손 안에 둔 체스말의 일부로 대할 뿐이다. 아즈마리아 윌은 눈치 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위치를 알기에 더 발버둥치는 것이라면….

“걱정되지 않습니다. 윌 영애의 너그러운 심정은 이해하나, 필요 이상의 관심은 사람을 부담스럽게 할 뿐이라고 봅니다. 정 걱정된다면 킨 경을 직접 찾아가시면 될 듯합니다.”

대화가 더 길어지기 전에 등을 돌렸다. 매정한 태도에 대한 미안함은 일말도 없었다. 잉고르드에 남는 선택을 한 건 그녀였다. 베르크네는 자신의 주인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말에 선의를 베풀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가짜를 연기하는 인물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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