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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0. 태풍의 눈(2)(3권) (12/24)

[안경] [ㅇㅇ]

공금, 요게X

조연의 반격은 없다 3권

Episode 10. 태풍의 눈(2)

그날의 가장 피곤했던 사건을 거론하자면, 발레리아가 내 발치에 속을 게워냈다는 점이다. 악취가 워낙 지독했기에 있는 자리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벨버른의 시체가 발견된 직후부터 나와 발레리아는 방에 감금되다시피 했다. 다음날 정오까지 문 앞을 지키는 기사들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가씨,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시체를 목격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는지, 발레리아의 낯이 하루아침 만에 핼쑥해졌다. 잊을 만하면 질질 짜는 모습이 질리기 시작했으나 타박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이 너른 황성에서 유일한 내 사람이었기에 잘 달래야만 했다.

“걱정하지 마렴, 발레리아. 내게 다 방도가 있으니까.”

“저, 저는 아가씨만 믿어요.”

“그럼.”

물론 방도 따위가 존재할 리 만무했다. 가진 무기라곤 힐마르티노에 정신이 팔려 내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비비안느와 나흘째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빌힐름, 그리고 나는 벨버른 백작의 살해범이 아니라는 진실이 전부였다. 빌힐름이 나를 해치우기 위해 이런 번거로운 상황을 만들었으리라 여기지는 않는다. 다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빌힐름은 내가 지금보다 더욱 난처한 상황에 놓이길 원한다는 것. 꽉 닫혀 있던 문이 열린 건 해가 진 이후였다.

“미안합니다, 아그레인. 제가 많이 늦었군요.”

문 너머에서 나타난 자는 이름 모를 기사 다수, 시종 다수, 귀족 다수, 그리고 빌힐름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러했듯 한없이 자상한 얼굴로 말했다.

“시체가 많이 훼손되었기는 했지만… 벨버른 백작의 영지로 잘 인도되었습니다.”

그랬구나.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들어오자마자 하는 말이 가장 궁금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라니. 속을 알 수 없는 빌힐름을 대신해 내가 먼저 속내를 비추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전하. 며칠 만이죠? 적어도 열흘은 흘러야 다시 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요.”

그런데 빌힐름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나 뜬금없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터진 웃음이었다. 안 그래도 서늘했던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었다. 묵묵히 뒤따라 온 자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아. 기쁨을 음미라도 하는 것처럼 길게 한숨을 내쉰 빌힐름이 다시 눈을 맞추었다.

“미안합니다. 당신을 비웃으려는 의도는 절대 아닙니다. 그저….”

실컷 웃고 난 뒤 무슨 소릴 할까 싶어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빌힐름은 소리를 목 아래로 삼키고 말을 돌렸다.

“나는 이 사건과 당신이 관련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나의 신뢰만으로 부족하다는 걸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어제 당신과 당신의 하녀를 발견한 자들 말입니다.”

빌힐름의 뒤편에 선 자들을 가리키는 소리일 터였다. 하나같이 딱딱한 표정의 귀족들을 훑은 뒤 빌힐름에게 물었다.

“저분들은 그 시간에 왜 전하를 찾아뵈러 왔나요?”

“우리는 술잔을 나눈 사이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서로를 만날 수 있지요.”

“하지만 저녁 6시에서 7시까지 전하를 뵈러 간 사람은 오직 저뿐이었어요. 나흘 동안요.”

빌힐름이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무려 나흘 동안 당신에게 커다란 실례를 했던 점을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당당하신데요.”

듣기에 꽤나 건방졌는지, 귀족 중 한 명이 날 나무랐다.

“전하의 앞이오. 언행을 조심하시오.”

그의 타박에 빌힐름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무례한가요?”

“아닙니다. 체네바 자작, 나는 괜찮으니 말을 아꼈으면 하는군.”

“전하께서 그러시다네요, 체네바 자작님.”

얄미우라고 얼굴의 온 근육을 사용해 활짝 웃어주었다. 물론 전혀 즐겁지 않았다. 질질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빌힐름이 기다리고 있을 말을 먼저 꺼냈다.

“무고를 입증하기 위해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방법은 많습니다. 우선… 오늘 이후로 비비와의 개별적인 만남은 없어야 할 겁니다.”

인상이 구겨졌으나 일단은 입을 닫았다. 다만 그의 입에서 비비안느의 애칭이 나왔다는 게 퍽 놀라웠다. 담담한 얼굴로 내 표정을 살피던 빌힐름이 뒷말을 이었다.

“당신과 비비의 친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이자들이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그 부분에 있기 때문이지요.”

대놓고 비비안느와 척을 진 사이라 말하다니. 그동안 나와 그녀가 붙어 다닌 꼴은 어떻게 봤을지 의문이었다.

“이해했어요. 그 다음은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번에는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그것으로 전 벨버른 백작을 살해했단 오명을 지울 수 있단 소리인가요?”

“예.”

“납득하기 어려운데요.”

“납득할 필요가 있습니까? 애초에 범인은 당신이 아닌데.”

빌힐름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작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나의 비비안느 사이에 커다란 벽이 생긴 듯했다. 그의 주장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빌힐름이 어떤 의도로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는 대충이나마 짐작이 갔다.

그가 벨버른의 살해를 주도했다고 확신할 순 없다. 하지만 때때로 심장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직감이 이성을 지배할 때가 있지 않은가. 무고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비비안느와의 독대를 금지시키는 것만 봐도 태가 났다. 빌힐름은 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다만, 나는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고개를 돌려 체네바 자작에게 물었다.

“체네바 자작님. 제가 비비안느 전하와의 친분을 끊으면, 그때는 제 무고를 인정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우리는 빌힐름 전하의 말씀에 따를 뿐이오.”

“충성스러우시군요.”

혀 위에 그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판에 박힌 대답이었다. 빌힐름이 재차 내게 물었다.

“그래서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아그레인.”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예, 아니오, 에 불과할 텐데. 뭐라도 하나 더 건지기 위해 체네바 자작에게 다시 한번 더 물었다.

“체네바 자작님. 괜찮다면 제 상황을 비비안느 전하께 설명 드려도 될까요? 다른 의도는 없어요. 그게 비비안느 전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요.”

체네바 자작은 미묘하게 당황스러운 얼굴로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돌아간 그의 시선은 빌힐름을 향해 있었다.

“그건….”

“아그레인.”

빌힐름의 나긋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진심으로 묻는 것이라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의 눈빛은 단호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비비는… 당신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을 테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기억하는 비비안느와 빌힐름의 관계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수직적 관계였다. 한데 지금은 빌힐름이 비비안느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문득 궁금해졌다. 비비안느는, 빌힐름의 개나 마찬가지였던 비비안느는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그렇담 어쩔 수 없네요. 저도 제 목숨이 더 소중한 사람이라서요. 한데 제 무고가 입증되면 전 벨버른 백작님의 사건은 어찌 되는 건가요?”

“앞으로 범인을 색출해야겠지요.”

“그럼 이제 전하를 뵈러 갈 때 더는 기다리지 않아도 될까요?”

하하. 이전보다는 덜했으나 빌힐름의 웃음소리는 확실히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들렸다.

“그 부분에 대해선 송구스러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없으리라 약속드리겠습니다.”

미약한 신뢰도 느껴지지 않는 약속이었다. 순순히 고개를 주억이자 방을 뜨려는 듯, 빌힐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 볼 일은 정말 그것 하나였구나. 돌아서는 그의 등을 응시하다가, 문득 떠오른 일정에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곧장 등을 돌리는 빌힐름을 향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내일 사냥 대회 말이에요. 제가 힐마르티노 각하의 파트너로 정해졌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힐마르티노는 비비안느의 최측근이니 빌힐름의 허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짧은 틈이었으나, 마냥 선했던 그의 인상이 삐걱거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빌힐름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금세 표정을 풀며 대답했다.

“이미 결정된 사안까지 제가 무를 수는 없지요. 근래 아그레인 양의 연습이 잦다고 들었습니다. 힐마르티노 후작 또한 실력이 출중하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때때로 믿기지 않는다. 저렇게 정직한 얼굴로, 저리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남자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전하.”

내게 정신 나간 짓을 서슴없이 하곤 했다니. 빌힐름과 그의 측근들이 나간 후 방의 공기가 다소 음울해졌다. 겁에 질려 있던 발레리아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어.’

이번에는 정말 완벽하게 이용당했다. 자괴감이 들기보다는 정신이 번쩍 든 기분이었다.

“이제는 마음 놓고 다른 이들을 찾아가지도 못하겠네. 그렇지 않니, 발레리아?”

그늘이 진 얼굴로, 발레리아가 조용히 대답했다.

“비비안느 전하께서 아가씨를 많이 아끼신다고 들었어요. 분명히 울적해하실 거예요.”

“내가 그분께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면 어떻게든 해 주시겠지.”

“…없다면요?”

옅게 떨리는 목소리를 봐서는 내가 비비안느에게 버림받기라도 할까 불안한 모양이었다. 나는 차마 그녀의 얼굴에 ‘포기하는 게 좋아’라고 놀려댈 수 없었다.

***

다음날 역시 날이 흐렸다. 그대로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어둑한 하늘이었지만, 날이 날인만큼 대회는 취소되지 않았다.

“오늘이 폐하의 탄생일 10일 전이라고 들었습니다. 축하의 의미로 진행되는 대회라, 천둥 번개가 치지 않는 이상 취소될 일이 없다고 합니다.”

내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 나온 발레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전날도 아니고 10일 전이라고?

‘별 난리를 다 치는군.’

준비된 말에 오르자 발레리아 역시 뒤따라 안장에 올랐다. 중간중간 시간을 할애해 승마를 가르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회의 분위기는 이제껏 봐 온 황실의 분위기 중에서 가장 활기찼다. 피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없던 활기까지 되찾은 것일까. 각자의 파트너를 알고 있는지, 하나둘 자리를 이동해 팀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나는 힐마르티노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크고 잘생긴 흑마에 오른 미인이 요란스럽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안녕, 어여쁜 아그레인. 그간 연습은 많이 했을까?”

힐마르티노는 승마복조차 빈틈없는 흑색이었다. 자작나무 숲에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시종의 손가락을 베던 장면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들키지 않고 그 짓거리를 하기 위해 즐겨 입는 것일까.

“죄송하지만 최근 연습을 잘 못 했어요. 아무래도 저는 짐만 될 것 같네요.”

“새삼스럽긴. 열심히 했어도 짐인 건 여전할 거야. 뭘 해도 쓸모없단 소리니 너무 시무룩해 있지 마렴.”

매혹하듯 끌어올린 입꼬리로 아무렇지 않게 폭언한다.

“나의 아름다운 주군께서 앓다 죽을 얼굴로 널 보고 계시는구나.”

“제가 아닌 각하를 보고 계시는 거겠죠.”

힐마르티노의 시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어깨 너머의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답지 않은 감성적인 얼굴이 되어서.

“얼마나 마음이 여린지. 절 버린 것에게 폐가 될까 말 한 번을 못 거는 모습이 가엽기도 하여라.”

힐마르티노의 입에서 나오는 비비안느는 종종, 아니 대체로 공감되지 않는다. 여리다느니, 뭐뭐 한다느니. 실제 곁에서 본 비비안느가 여성적인 면에서 충분히 매력적이기는 해도 그런 묘사는 어울리지 않았다.

‘핏줄은 못 속여.’

황제도 개새끼고 그 자식도 개새끼인데, 둘과 혈연인 비비안느만 다를 수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했다. 힐마르티노의 눈에는 다시없을 세기의 천사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탕!

사냥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직전까지 내게 한 번쯤 고개를 돌려 주라는 듯 꾸준히 비비안느를 언급하던 힐마르티노도, 총성이 터진 후에는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하고, 어느새 대기 지점에는 그녀와 나만이 남게 되었다.

‘여유롭네.’

실력이 좋다던 빌힐름의 평가가 입 발린 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중한 사안이 걸린 대회였다면 빨리 가자고 보챘을 테지만, 상품도 걸리지 않은 황제 탄생일 10일 전 기념 대회 따위 내 알 바 아니지 않은가.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힐마르티노가 고삐를 당기며 지나가듯 말했다.

“아무리 볼품없는 실력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을 거야. 역대 사냥 대회의 우승자들은 꽤 거창한 것들을 가져갔거든.”

그 거창한 것이 무엇인지 눈빛으로 묻자, 힐마르티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건방진 것. 이제는 눈에 뵈는 게 없군… 폐하께서 내리신 거창한 선물이 뭐겠느냐? 적어도 우승자가 바라던 평생의 소원 정도는 되겠지. 이랴!”

힐마르티노가 쏘아진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나도 놓칠까 싶어 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벌써 곳곳에서 총성이 터지고 있었다. 숲에 들어선 후 힐마르티노는 꽤 여유로워 보였다. 누군가는 벌써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치는데, 그녀에겐 그런 소음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최선을 다하라고 한 것치곤 영 딴판인 모습이었다.

“너는 황성에 무엇을 바라고 왔지?”

처음에는 내게 하는 말이 맞는가 싶었다. 너무나 뜬금없는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내 주위에는 그녀와 나를 제외하곤 수발을 드는 이들이 전부임을 깨달았다. 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편안한 삶.”

“편안?”

“배를 곯지 않고 세상을 방랑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요.”

힐마르티노가 코웃음을 쳤다.

“우리 아그레인은 말이야. 재밌는 건지 멍청한 건지 영 모르겠어. 세상천지에 황성을 편안하다고 표현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혹시 모르죠. 각하께서도 하녀 노릇만 3년 정도 하면 생각이 바뀌실지.”

“너는 해 봤다는 소리니?”

말을 멈춘 힐마르티노가 나를 돌아봤다. 무심코 그러리라 여겼던 그녀의 표정과 실제 마주한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 많은 점이 달랐다. 일단 습관처럼 달고 다녔던 은은한 웃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가늘어졌던 눈매 또한.

“글쎄요.”

스릉. 귀에 익은 날것의 부딪힘. 턱 아래로 닿아오는 차디찬 쇠의 감촉. 그리고, 그날 밤하늘 아래에서 보았던 초록빛 안광까지.

“자꾸 꼬리 말려 하지 말고 대답해 보렴. 너는 대체 누구냐?”

검 날의 날카로운 끝이 살을 파고들었다. 발레리아의 숨 삼키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뭘 하는 년이기에 그 미친 새끼가 널 가지질 못해 안달이지? “

웃음기 하나 없는 살벌한 눈빛이 내 뺨을 꿰뚫듯 쏘아졌다.

“비비에 버금갈 정도로 미인이길 하나? 얼굴이 꽤나 쓸 만하기는 해도 그 정도까진 아니야. 그렇담 머리를 잘 굴리기라도 해? 미친 새끼의 잔꾀에 넘어간 걸 보면 그래 보이지도 않아. 아니면 황실의 금고는 호주머니로 보일 정도로 막대한 부를 가진 거냐? 그렇담 이곳에서 그런 취급을 받고 있진 않겠지.”

말이 길어질수록 살을 파고드는 검의 날 또한 깊어진다. 이러다 멀쩡한 목에 구멍이 뚫릴 것 같아서 검을 손으로 쳐냈다. 그에 눈을 동그랗게 뜬 힐마르티노가 몸을 젖히며 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그러고는 언제 웃었냐는 듯 정색하곤 코앞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무언가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승마복 위로 뚝 떨어져 내린 건 잘린 적발과 귀걸이였다.

“그쪽 귀를 떨어뜨리려고 했는데. 마지막 이성이 날 붙잡아서 다행이지 뭐야.”

힐마르티노의 얼굴은 평온했다. 덕분에 그녀가 얼마나 미친년이지에 대해서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다.

‘역시 잘못 걸렸어.’

빌힐름이 내게 목을 맨다고 표현한 만큼, 이런 장소에서 갑자기 죽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미친년이라는 정신 상태에 걸맞게 요란스러운 미친 짓을 할 수도 있으니, 최소한의 선을 지키며 사리는 게 맞는 듯했다.

“저에 대해서 다 알고 계시는 거 아니었나요?”

“그럴 리가? 너 같은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단다.”

“처음 뵈었을 때 제 이름을 분명 아는 듯 반응하셨어요.”

“이름이야 지겹도록 들었지. 비비가 내게 보내는 서신에 네 이야기를 어찌 늘어놓던지. 나중에는 짜증이 나서 찢어 버리고 싶을 정도였어.”

그런 거였나. 나는 힐마르티노가 ‘아그레인 캐롤드’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는 줄 알았다. 황제를 보좌하던 그 늙은 백발의 귀족들처럼.

“아하. 네 이름에 대단한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는 건가? 우리 그 비밀을 나눌 수 있을까?”

“별 거 없어요. 내가 가진 건 멸문한 가문의 이름이 전부예요.”

낙엽이 짓밟히는 미약한 소음이 났다. 작은 동물이 근처를 배회하는 기척이었다. 하지만 힐마르티노의 시선은 오롯이 나를 향해 있었다.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고요했다. 곧 장식검보다 훨씬 둔탁한 윤기를 지닌 검의 날이 검집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캐롤드 가문의 일원은 모두 적발이었지.”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지나가듯 나온 소리에 불과했다. 한데 급작스레 심장이 쿵쿵 튀기 시작하면서 머릿속이 울렁이는 기분이었다. 캐롤드 가문의 일원은 모두 적발. 누군가에게서 가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일까?

“내가 널 처음 봤을 때, 너는 눈을 뜬 지 고작 1년도 안 된 갓난아이였어.”

이 기분은… 그래, 솔직하게 말해서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적어도 기억을 잃은 후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단연코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이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 도통 정의하지 못하겠다. 힐마르티노가 고개를 저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군. 어때, 이제 나를 좀 공경할 마음이 생기더냐?”

“…이제껏 제게 캐롤드 가문에 대해 말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바라지 않았음에도 목구멍이 꽉 막힌 듯한 음성이 나왔다. 힐마르티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누가 자신의 목을 걸고 네게 옛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까? 캐롤드는 반역죄로 멸문했다. 그러니 적어도 황성에서는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중죄란다.”

반역죄. 황성에 입성한 지 근 한 달 만에 처음으로 얻은 정보였다. 캐롤드의 멸문 이유가 반역죄구나. 상상하지도 못한 뒷이야기였다.

“하지만 너는 살아남았지. 네 부모도, 저택의 고용인들도 모두 죽었는데 너는 살아남았어.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폐하와 같은 성에서 숨을 쉬고 있군. 흥. 나라면 눈에 띄는 순간 눈알부터 확실히 도려냈을 텐데!”

언급 자체가 중죄라 했으면서, 힐마르티노는 아무렇지 않게 캐롤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시종에게서 총을 건네받은 힐마르티노가 안장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내게 물었다.

“그러니 이만 털어놓아 봐. 네까짓 게 대체 뭐기에 빌힐름이 그 번거로운 짓까지 일삼은 게냐?”

얼마나 궁금하기에 포기하려 하질 않는지. 그녀가 지닌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한가?’

나는 그저 단순히, 내가 그의 개이기 때문이라고 여겨왔다. 기억에 의하면 빌힐름은 어린 시절부터 소유욕과 파괴욕에 점철된 진성 미친놈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를 풀어내기 위한 수단이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재회한 후에도 빌힐름이 굳이 나를 쥐고 있으려는 이유는, 글쎄.

“제 생각에는요.”

잠시 주위를 살피던 힐마르티노의 시선이 내게 고정된다. 나는 그녀를 따라 발레리아에게서 총을 받고 땅을 밟았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말을 이었다.

“빌힐름 전하는 저를 아주 열렬하게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하?”

힐마르티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각하의 말씀대로 저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얼굴은 쓸 만하지만 대단한 미인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고, 아는 것도 없고, 가진 것은 더 없는, 비루하기만 한 몰락 가문 출신. 전하께서 그런 저를 원하실 이유가 사랑 말고 또 있을까요?”

아무런 생각 없이 개소리만 늘여놨지만, 이거 꽤 논리적이지 않은가? 힐마르티노가 살갗을 꿰뚫는 차가운 시선으로 내 낯을 하나하나 뜯었다. 무언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은 듯하면서도 그 이상의 부정적인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너는… 그래, 역시 끔찍한 소릴 아무렇지 않게 하는구나. 끼리끼리 모인다는 소리가 헛소리는 아니었어.”

눈알부터 도려낸다느니 뭐니 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우리의 잡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힐마르티노는 별말 없이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고, 대회에 아무런 지식이 없던 나는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힐마르티노의 사냥 솜씨는 대단했다. 사냥에 대해 아는 구석이 별로 없는 내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마음에 드는 부분이 하나 없는 여자라지만, 총구를 사냥감에 겨눌 때의 눈빛 하나에만큼은 절로 눈이 쏠렸다. 그 순간만큼은 특유의 타인을 깔보는 눈빛이나 강압적인 분위기, 미친년다운 흉포성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작나무 숲을 벗어난 건 그로부터 두 시간 가량이 흘러, 해가 하늘 한가운데 떠 있을 즈음이었다. 오전 사냥이 끝난 직후라 그런지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던 귀족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때. 성과는 괜찮았을까, 후작?”

또한 그 틈에는 빌힐름도 있었다. 정복이 아닌 승마복을 걸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눈을 쉬이 뗄 수 없는 우아함이 전신에서 흘러 넘쳤다. 빌힐름은 힐마르티노에게 말을 걸면서도 나와 눈을 마주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가볍게 목례하고 힐마르티노의 뒤편으로 말을 물렸다. 거칠게 장갑을 벗은 힐마르티노가 진저리난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아, 최악이에요. 파트너가 이런 놀이에는 영 소질이 없는 모양입니다. 혼자서 개새끼가 된 양 뛰어다녔지 뭡니까!”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아그레인 양은 사냥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설마 몰랐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데.”

빌힐름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정적이라 여기기에는 몹시 친절한 눈빛이었다. 직접적이지는 않았으나, 근처의 시선이 은근슬쩍 이곳으로 몰리는 게 단번에 느껴졌다. 힐마르티노가 속 모를 표정으로 웃었다.

“흐흥.”

“이유가 뭔지 궁금한데 말이야, 말해 줄 수는 없나?”

“어떤 이유 말씀이십니까?”

“우리 사이에 오갈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후작이 아그레인 양을 선택한 이유.”

착각일까. 힐마르티노의 유유자적한 낯에게서 옅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저 미친년이 사람 앞에서 긴장을 한다고? 착각이겠지.

“사람은 때때로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죠.”

“하하. 낭만적이군. 공은 승부욕이 꽤 강한 편으로 알고 있는데.”

“말씀드리지 않을 겁니다. 우리 둘 사이의 비밀이라서요. 그렇지, 아그레인 양?”

나머지 한쪽 장갑도 벗으며, 힐마르티노가 내게 동의를 구했다. 설마 내가 그런 말장난에 동조할 거라 여긴 건 아닐 터였다. 예전이었다면 몰라도 비비안느와의 줄이 끊긴 지금은 달랐다. 빌힐름 앞에서 힐마르티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비밀일 것까지야. 저에 대해 무척 궁금해 하시기에,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어요. 하나하나 말씀드리기에는 너무 사소한 이야기들뿐이네요.”

그렇다고 해서 대화 내용을 알릴 필요까지는 없겠지. 힐마르티노의 손이 내 어깨를 가볍게 툭, 건드리고 떨어졌다.

“비비안느 전하께서 아쉽게 여기시니…. 저라도 그 역할을 대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할이라면?”

“물론 아그레인 양과 건전하게 교류하는 친우 관계이지요.”

자리가 영 불편하다. 그리 가깝지도 않은 이들과 친분이라도 자랑하듯 모여 있으려니 답답함이 일었다. 멀어진 줄 알았던 빌힐름의 관심이 돌아온 것은 반가운 일이었으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자면 불편함과 찝찝함이 압도적으로 더 컸다.

“공의 말이 옳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생기는 건 즐거운 일이지 않은가.”

다행히 그는 대화를 더 이어갈 마음이 없어 보였다. 미련 없이 힐마르티노에게서 시선을 떼고 내게 미소 지어 보였다.

“내일 뵙겠습니다, 아그레인 양.”

“네.”

빌힐름이 몸을 돌리자 빼곡했던 주변이 둘로 갈라졌다. 아닌 척해도 다들 이쪽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음을 안다. 혹시 모르지,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길 바랐을지도.

“아, 힐마르티노 후작.”

그러나 서너 걸음을 옮긴 직후, 빌힐름이 다시 몸을 돌렸다.

“대화를 나누느라 일은 잘 해결됐는지 묻는 걸 잊었군.”

그 일이 어떤 일일지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이 필요 없었다. 소란스러웠던 공기가 찬물을 맞은 듯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정적 속에서 들리는 또렷한 목소리는 힐마르티노의 것이 유일했다. 그녀는 여상한 낯으로 빌힐름의 물음에 대답했다.

“일이랄 것까지 있을까요? 그저 뜻을 함께하던 친우가 돌연사를 당했고 모두 안타깝게 여길 뿐이지요. 사냥 대회만 겹치지 않았더라면 모두들 상복을 걸친 채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을 겁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쓸모를 잃는 건가. 고작 서너 번 스쳐 지나간 것이 다인 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의 죽음도 전 벨버른 백작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될까?

“그런가? 죽은 전 백작이 고마움에 눈물을 흘리겠어.”

비꼬는 문장과 대비되는 차분한 목소리는 물론, 그 둘과 선한 인상 사이의 괴리감이 엄청났다. 빌힐름이 자리를 뜬 후 힐마르티노를 훔쳐보던 사람들도 빠르게 흩어졌다.

준비되어 있던 야외 식탁의 자리가 어느새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두 시간 동안 몸을 썼는데도 이토록 입맛이 없을 수가 있나. 남들이 고기를 썰 때 나는 생크림이 듬뿍 올라간 조각 케이크를 한 시간 내내 잘라 먹었다. 죽어 마지않도록 사랑하는 비비안느와의 식사를 마쳤는지,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힐마르티노가 턱을 괴곤 속삭였다.

“사랑이라는 게 마냥 개소리는 아니었구나?”

“갑자기 나타나선 이상한 소릴 하시네요.”

힐마르티노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날 훑었다. 그에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다가, 뜬금없이 찾아와 헛소리를 하는 그녀가 우스워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왜 웃니?”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그 찰나를 봤을 줄이야. 고개만 돌려 그녀를 바라보고, 이번만큼은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세상에는 사랑처럼 보이는 것들이 참 많은 것 같아서요.”

나는 바보가 아니다. 경험해 보지 못했어도 무엇이 다르고 틀린지는 충분히 파악할 머리가 있었다. 이를테면, 빌힐름의 집착은 애정이 아닌 오롯이 소유와만 관련되어 있다거나. 가소롭다는 눈으로 웃던 힐마르티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우같은 것.”

거기서 한 시간 가량이 더 흐른 후 오후 사냥이 시작되었다. 오후 사냥에 참여하는 귀족들은 그 수가 무척이나 적었지만, 그만큼 더 진중한 자세로 대회에 임했다. 새삼 힐마르티노가 말한 우승 상품의 값어치가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물론, 그런 것 치고 그녀와 나는 퍽 여유로웠다. 사냥감을 찾기 위해 백방을 뛰기보다는 뛰다가 잡힌 사냥감을 사냥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대회의 막바지를 향해 한창 달려가던 중이었다. 힐마르티노가 갑작스럽게 사냥의 끝을 선언했다.

“여기까지만 하지.”

아무런 미련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녀의 말에 나는 슬쩍 고개를 틀어 시종과 발레리아가 말 뒤에 이고 다니던 사냥감을 확인했다. 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많다고 하기에도 영 모호한 숫자였다. 힐마르티노가 말했다.

“널 내 파트너로 정한 순간부터 우승은 글렀어. 비비에게 바칠 사냥감은 이것으로 충분한 것 같으니 더는 거머리처럼 붙어 다니지 마렴.”

“불편했다면 다른 사람을 고르지 그러셨어요?”

“내 마음이니 따박따박 말대꾸하지 말길 바라. 나머지 한쪽 귀걸이도 찢어 버리긴 싫거든.”

그러고선 코를 찡긋거리며 웃는 모습이 예뻤지만 징그러웠다.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내내 끌려다녀야 했던 사냥이 막을 내리는 건 내게도 반가운 일이라 얌전히 뒤를 따랐다. 안 그래도 흐릿한 하늘에 해까지 내려가자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우중충했다.

후원은 이미 사냥을 포기하거나 끝낸 귀족들로 드넓은 사교장이 되어 있었다. 시종들이 사냥감의 수를 세는 동안 나는 안장 위에 가만히 앉아 후원의 풍경을 구경했다. 그러고 보니 동쪽 숲으로 사냥을 갔던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각하. 저쪽 숲은 출입 금지인가요?”

힐끔, 내가 가리킨 손끝을 확인한 힐마르티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황실에서 서쪽 숲에만 사냥감을 풀어놓으니 하나같이 이쪽으로 몰릴 뿐이야.”

“그렇군요.”

“동쪽 숲은 안개가 심하고 관리가 되지 않아서 지리가 험악하단다. 괜히 들어가서 그나마 쓸 만한 얼굴에 생채기 만들지 마라.”

입만 열었다 하면 얼굴 이야기가 나온다. 그 정도로 내가 쓸모없단 의미인지, 아니면 마음에 드는데 안 드는 척을 하는 건지. 한데, 관리가 되지 않았다던 동쪽 숲이 계속 시야 한 구석에 걸렸다. 왜일까. 왜 굳이 황성 내에 저런 야생적인 공간을 방치하고 있는 걸까. 나도 모르게 동쪽 숲을 향해서 말을 몰고 있었던 것 같다. 뒤따라 달려온 발레리아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아가씨. 이 숲은 위험해요.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거짓말은 아닌지 발레리아의 안색이 그림자가 진 것처럼 어두웠다.

“곰이라도 나오니?”

“안 좋은 소문이 무성한 곳이에요. 불길한 땅이라 황실에서도 관리하지 않는데, 조금만 깊게 들어가도 발에 차이는 게 시체라고 했습니다. 사형 선고보다 끔찍한 벌이 동쪽 숲에 버려지는 벌이라 할 정도로….”

“그게 전부야?”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발레리아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예? 아니요. 물론 소문은 무성하지만….”

“따라와.”

시체가 쌓여 있다는 이유로 등한시 되는 장소라면 문제될 것 없었다. 아니, 되도 않는 소문이 돌고 있단 말에 오히려 눈앞이 선명해지고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곳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황궁까지 도달하게 된 이유가.

“아가씨!”

발레리아는 잔뜩 겁먹은 목소리를 내면서도 끝까지 날 쫓아왔다. 숲의 내부는 서쪽 숲보다 조금 더 어지럽고 풀이 길게 자라 있을 뿐, 크게 다르다고 볼 부분이 없었다. 시체는커녕 벌레와 새소리만 가득한 장소라 언뜻 잉고르드의 그 숲을 떠올리게 했다.

“이것 때문에 안개가 생겼던 건가.”

십여 분 가까이를 달리자 눈앞에 자그마한 호수가 나타났다. 그렇게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던 때였다.

“…이건.”

아아. 이 심경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꿈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오랜 기억 너머, 그림처럼 박혀 있던 풍경이, 형태만 달리한 채 내 눈앞에 살아난 이 심정을.

호숫가 옆, 듬성듬성 자란 잔디밭 한가운데 자리한 것은 본래의 형상을 완전히 잃고 무너진 성이었다. 리히튼이 갇혀 살아야 했던 새장. 내게로부터 억지로 끌려 나와야 했던 악취 구덩이.

“오래 전에 무너뜨렸나 봐요. 풀과 이끼로 뒤덮여 있어요.”

발레리아가 무너진 석벽 주위를 따라 돌았다.

나 역시 한 박자 늦게 석벽 가까이로 다가갔다. 사람이 살아온 흔적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내부의 모든 물건을 태우고 무너뜨린 듯, 까만 재가 주변에 넓게 분포하고 있었다.

‘리히튼은 어떻게 가문을 되찾은 걸까.’

무너진 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고 가슴 안쪽이 무겁다. 오랜 과거의 순간들이 마치 환상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리히튼이 코를 박은 채 책을 읽고 있었지.’

기억에 남아 있는 자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내가 제인을 끌고 나간 건 이 길이었어.’

잔디로 무성했던 땅은 이제 없었다. 마른 흙과 자갈, 그리고 재로 뒤덮인 메마른 땅이 전부였다.

“이곳은 뭘 하던 곳이었을까요? 황성의 비밀을 발견한 기분이 들어요.”

발레리아의 음성에는 미약한 흥분과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한 그녀가 바라보는 수풀의 저 너머.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조차 어둠에 가려진, 저 수풀 너머에. 내 성이 있을 거다. 툭, 툭. 하늘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이 콧등에 부딪혀 떨어진다. 나는 말의 옆구리를 찼다. 확실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의 새장이 나올 것이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더 깊은 곳은 위험해요!”

긴장으로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굵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이 뺨과 이마를 때렸다. 그렇게 까맣게 변한 땅을 건너, 어둠 속으로 몸을 던지기 직전.

“그만.”

돌연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은 백마에 고삐를 당길 수밖에 없었다. 허공에 발길질을 하는 말을 진정시키고 숨을 바로 했다. 새까만 숲과 대조되는 새하얀 낯의 여자. 내 앞을 가로막은 말의 주인은 비비안느였다.

“가만히. 그대로 멈춰 줘.”

다정한 목소리에는 이제껏 들은 적 없는 단호함이 녹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을 황망해진 기분으로 쳐다봤다. 뭐지? 왜야? 왜 하필 지금이야? 비비안느는 품에 쥐고 있던 장우산을 펼쳤다. 코앞으로 말머리를 이끈 그녀가 내 손에 방금 막 펼친 우산을 쥐여 주었다. 그리고 더없이 사근사근한 미소와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비가 오기 시작했어, 아그레인. 이제 곧 하늘이 어두워질 거야. 여기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생각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위험한 행동은 지양하는 게 옳잖아?”

머리 위의 회색빛 하늘이 밝게 터진다. 번개였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어느새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마른 땅에 꽂히기 시작했다. 나는 번개를 따라 뒤늦게 터지는 천둥소리를 들으며, 불현듯 눈앞의 현실을 인지했다. 비비안느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기억을 되찾았단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됐다. 그래, 나는 여기서 들키고 싶은 마음이 죽어도 없어. 빗물에 젖은 손으로 뜨거워진 이마를 적시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저는… 저는, 절 들여보내 주세요, 전하. 확인해야 할 장소가 있어요.”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어.”

비비안느가 나긋한 음성으로 다시 한번 나를 타일렀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불안한 척, 아니 불안한 심정을 숨기지 않으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이곳에서 그녀와 마주친 이상 모든 것을 숨길 순 없을 터였다. 차라리 한두 가지 정도만 떠올렸다는 사실을 내색하는 게 더 현명하리라고 생각했다.

“전하께선 모르실 거예요. 꿈에서 이곳을 여러 번 봤어요. 분명 이 너머에 절 부르던 성이….”

“하지만 그 성도 이곳과 마찬가지로 무너졌는걸.”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 저는….”

“그곳은 네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거야. 그 성은 네게 아무런 가치도 없어. 심지어는 흉측하게 무너져 잔재만 남았지. 더는 돌아가지 못하도록.”

무언가, 말로 확실하게 꼬집을 수 없는 이 찝찝함. 그 찝찝함이 비비안느의 또렷한 적안에서 풍겼다. 그녀의 눈동자는 정확히 나의 두 눈을 향했다. 무언가를 숨기려 하거나, 잃어버린 내 기억을 북돋으려 하는 것도 아니었다. 비비안느는 천천히 말을 몰아 내 앞에서 물러섰다. 먹구름보다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난 그녀는 천천히 빗물에 젖어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날이 이렇게 어두워지고 있잖아. 나는 아그레인, 널 보내지 못해.”

너는 나를 이해할 거야. 비비안느의 눈빛은 내게 그리 말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비비안느는 내가 적어도 이 장소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비안느가 수줍은 표정으로 턱을 내렸다. 설렘이 분명해 보이는 색채로 그녀의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 줘. 무너진 나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게 될지 몰라. 단언컨대 절대 좋지 않아.”

그렇다면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이름뿐인 개이기를 희망할까?

“귀한 몸이신데 비에 젖겠어요. 도로 가져가세요.”

그러나 비비안느는 다시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그때, 비비안느의 뒤편에서 길고 얇은 팔이 뻗어 나와 또 다른 우산을 씌어주었다. 그 우산을 든, 눈에 익은 흑마의 주인이 나를 무정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힐마르티노였다. 아그레인. 비비안느가 나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네게서는 이곳 사람들에게선 볼 수 없는 생기가 느껴져서 좋아. 정말로, 너무나.”

생기라. 동의할 수 없는 그 단어에 잊고 있었던 잉고르드의 독이 떠올랐다. 독으로부터 해방된 이래 처음 듣는 소리지 않은가. 비비안느는 더없이 행복한 꿈을 꾸는 얼굴이 되어 내게 말했다.

“나는 너의 그 눈에 사로잡혀서 여기까지 따라왔어. 그건… 몹시 길고 끔찍한 여행이었지.”

거센 빗소리 사이사이로 비비안느의 텅 빈 유리알 같은 목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문득,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그녀의 모습에서 리히튼이 연상됐다. 그는 나를 잊었을까, 아니면 잊지 않았을까? …발레리아의 새까만 엽서를 보낸 발신자가, 정말로 그일까?

“그러니까, 더 괴로워도 된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내기를 이겨낸 보상으로 그에게 받았던 해독제는.

“모든 걸 버렸을 때의 네가… 내게는 더 눈이 부시게 빛나거든.”

해독제가 아닌, 나를 위해 준비한 잉고르드의 독이었던 걸까.

“어서 가, 아그레인.”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옷과 머리 모두가 빗물에 흠뻑 젖어가고 있었다. 언제 놓쳐 버린 건지 모를 우산이 말의 발굽 옆에서 동그랗게 굴렀다. 비비안느가 재차 내 이름을 불렀다.

“어서. 나는 네가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해야겠어.”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호숫가를 다시 돌아 왔던 길을 그대로 내달렸다. 검게 재가 된 리히튼의 새장은 더 이상 내 안에 남아 있지 않았다. 동쪽 숲을 건너는 내내, 머릿속에는 오직 잉고르드의 독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잘 생각해 보면….’

더는 과거의 꿈을 꾸지 못했던 즈음부터 몸이 완전한 건강을 되찾았었다. 잉고르드에서 황성까지 달려왔던 일주일. 그 일주일 동안 미약하게 남아 있던 독기조차 전부 해독되었다고 여기면….

‘그러면 황제에게 내 독이 통하지 않았던 이유도 설명이 돼.’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차가운 빗물에 몸의 온기가 식어갔지만 내 흥분조차 꺼트리지는 못했다.

내가 말의 속도를 늦춘 것은 굵어진 빗줄기로 시야를 분간하기 어려워지면서였다.

“제가 말을 마구간에 돌려주고 오겠습니다. 아가씨는 어서 방으로 돌아가세요. 이러다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 나요.”

허겁지겁 말에서 내린 발레리아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웃겼다. 너나 나나 고작 승마복 하나 걸치고 있는 건 똑같으면서, 누군 감기에 걸리고 누군 안 걸려?

타앙!

히이이잉.

그때였다. 발레리아를 뒤로 물리고 안장에서 내리려던 순간, 말이 펄쩍 뛰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눈앞이 뒤집히는 찰나의 간격에 다시 한번 총성이 울렸다.

타앙!

아, 제길.

“아가씨!”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웠다. 처음에는 갈비뼈가 부서지면서 폐를 꿰뚫은 줄 알았다. 그 정도로 강렬한 고통이 전신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아….”

바로 옆에 쓰러진 말이 헐떡이고 있었다. 빗물에 번진 동물의 피가 하얀 바지를 붉게 물들인다. 뒤늦게 제정신을 차린 나는 두 팔을 땅에 대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끝끝내 자력으로 일어서지 못하고 발레리아가 날 붙잡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눈앞이 어지럽게 돌았다. 어지러운 시야 틈새로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흐릿하게 흔들렸다.

‘뭐지?’

귀가 아플 정도로 커다란 이명이 들렸다.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수백 명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몰려오는 구역질에 머리를 흔들었다. 다행히 환청이었는지, 이명과 웅성거림은 금방 진정되어 사라졌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이게 무슨….”

“아니야. 왼쪽, 팔이 안 움직여.”

진흙이 튄 턱을 쓸고 고개를 들었다. 발레리아는 반쯤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빗물이 뺨을 적시고 있으니 이미 울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하게, 심하게 다쳐서 그런가 봐요. 아, 아프지는 않으세요?”

“아파.”

발레리아가 몸을 틀어 내 오른쪽 어깨를 부축하려 했을 때였다.

“이런. 이걸 어쩐다….”

장화의 굽 소리를 내며 거칠게 다가온 누군가가 성치 못한 나의 왼 어깨를 잡아 당겼다.

“읏!”

힘없이 휘청거리는 시야로 젖은 흑발이 흔들렸다. 푸른 불꽃이 튀는 힐마르티노의 눈동자가 날 씹어 먹을 기세로 내려다봤다.

“재수가 없었다고 여겨야지, 어쩌겠어. 내 평생 비비가 그런 눈으로 누굴 쳐다보는 건 처음 봐서. 마음을 아무리 다스려 봐도 질투가 나 미칠 것 같네?”

누가 터트린 총성인가 했더니, 힐마르티노였던 건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내게 모멸감이라도 줄 생각인지, 힐마르티노는 어깨를 잡지 않은 손으로 내 뺨을 툭, 툭 건드렸다.

“그 얼굴로 태어난 일을 천만 다행으로 여겨. 난 예쁜 건 잘 못 죽이거든.”

그래? 잘 못 죽인다니 할 말은 해야겠다.

“미친년.”

환멸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이었을 텐데 힐마르티노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내 어깨를 잡아 돌렸던 순간과 똑같이 격정적으로 달아올라 있다는 뜻이었다.

“아픈 걸 꽤 잘 참는구나. 황실의 의원들은 제국에서도 소문난 명의들이니, 골절쯤 문제없이 치료할 수 있을 거다.”

“고맙다고 해 줄까?”

나머지 한 쪽 어깨도 부서질라, 차마 그녀의 얼굴에 대고 침을 뱉을 수 없었다.

“그딴 건 필요 없단다. 꼴 보기 싫으니 며칠은 방 안에 처박혀 있으렴.”

약 올리듯 내 어깨를 한 번 세게 쥐었던 힐마르티노는 굽혔던 등을 펴 사라졌다. 반은 진흙, 반은 말의 피범벅이 되어 여유롭게 멀어지는 흑마를 멍하니 쳐다봤다. 저걸 어떻게 죽이지. 지금 이 기분이라면 고통이고 뭐고 잉고르드의 독을 거리낌 없이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멍청하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몸이 일으켜졌다. 누군가 했더니 발레리아는 아니고, 처음 보는 시종들이었다.

“바보처럼 서 있기만 하지 말고 당장 아가씨를 옮기지 못해!”

누군가는 죽어가는 말을 어찌 옮길지 고민했고 누군가는 다친 내 왼팔을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그 사이에서 발레리아는….

“누가 보면 네가 낙마한 줄 알겠어.”

창백해진 입술을 연신 깨물며 낯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엉엉 우는 꼴이 되어서. 그녀는 시종의 옆에 바짝 붙어 걷는 내내 연신 뺨을 닦아 내며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왜 다들 아가씨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죠? 왜 가만히 계시는 아가씨를 여기저기서 물고 늘어지는 거냔 말이에요.”

“좋은 거야.”

“좋기는요? 설마 머리라도 다치셨어요? 그러면 저는 어떡하라고….”

늘 어른스러움을 유지하던 발레리아가 이토록 애 같아 보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쩐지 메어리가 떠오르는걸. 덕분에 나는 내 몸 하나 간수하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그녀를 위로해야 했다.

“좋은 거야, 발레리아. 그래야 내가 먼 길을 돌아서라도 이정표를 찾을 수 있거든. 알지? 내게 좋은 건, 네게도 좋은 거야.”

몸이 놀랍도록 무겁다. 누적된 피로로 눈이 감길 것만 같았다. 리히튼, 너는 알고 있었을까? 우리의 새장은 무너진 지 오래라는 것을. 왜인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리히튼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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