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10. 태풍의 눈(1) (11/24)

Episode 10. 태풍의 눈(1)

그렌페르크 제국.

잉고르드, 캐롤드, 조나단 등 개국공신 다섯 가문의 추앙을 받았던 레그윈 가문의 핏줄을 뿌리로 둔 국가. 그렌페르크 제국은 100년 전 정복군주 메르셀린 2세의 시대를 기점으로 영토를 무한하게 확장해갔으며 현 세대인 다나한 2세에 이르러선 대륙의 정점에 위치한 지 오래다.

다나한 2세는 첩이 많았다. 첩 태생의 반쪽짜리 황족을 다 모으면 두 손으로 세기 힘들 정도였으니, 그렌페르크의 역사 상 가장 황실 계보가 복잡한 시기라 할 수 있었다. 그중 황후 소생은 딱 둘이 존재했는데, 이란성 쌍둥이인 빌힐름 조나단 레그윈과 비비안느 조나단 레그윈이 그들이었다.

오랫동안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해 온 황실은 황후 소생이 이란성 쌍둥이란 사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제국의 둘뿐인 적자임은 엄연한 사실이었기에 쌍둥이들은 그에 맞는 권리를 누리며 황위 후계자로 키워졌다. 그래, 둘의 대우는 몹시 공정했다. 빌힐름 황자와 비비안느 황녀가 열 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그 시기가 기점이었습니다. 그 시기부터 빌힐름 전하와 비비안느 전하의 처우가 극명하게 바뀌었죠. 마치….”

싱긋 미소 지은 남자가 고개를 쭈욱 내밀고 내게 속삭였다.

“주인과 주인이 기르는 개의 관계처럼.”

흠흠. 남자가 헛기침을 했다. 둘뿐인 공간임에도 자신의 가벼운 입이 두렵기는 했나 보다. 텅 빈 응접실을 살핀 남자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비비안느 전하께서 더 대단하시다는 겁니다. 황실의 핍박과 무시를 견뎌내고 이 자리까지 올라오시지 않았습니까?”

“사랑에 빠진 눈이로군요, 백작.”

“사랑이요? 그럴 만하지요. 비비안느 전하께 빠지지 않을 자가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요. 아름답지만 강인하며, 여리지만 강단 있으신 분이시죠. 제 평생 그분만큼 대단한 여성은 보지 못했습니다.”

침이 튀지는 않을까 우려될 만큼 수다스러운 남자였다. 듣자하니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작위를 이었다는데, 그런 것치고는 듬직하기보다 한없이 가볍다.

“그래서 다들 당신을 우러러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그레인 양.”

은근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남자, 벨버른 백작은 황성에 자리를 잡은 귀족들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했다. 기껏해야 나와 두세 살 정도 차이나는 듯했다.

내가 집시 태생이 아닌 캐롤드의 핏줄임이 밝혀진 후, 귀족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대단한 변화는 아니었다. 애초에 캐롤드의 핏줄이라고 해 봤자 황실로부터 가문의 재산을 돌려받은 것도 아니었으니, 내게는 사실상 껍질뿐인 명예에 불과했다. 요점은 비비안느가 나를 퍽 아낀다는 점이다. 황녀의 총애를 받는, 멸문한 공신 가문 출신의 미혼녀. 황녀의 눈에 띄고 싶어 안달이 난 자들에게는 꽤 괜찮은 먹잇감이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벨버른 백작이 상냥한, 아니 생크림을 듬뿍 바른 눈길로 내 얼굴을 훑었다.

“당신이 집시라고 했을 때, 저는 그 소리를 믿지 않았습니다. 떠돌아다니는 여성이라 생각하기에는 기품이 넘쳐흘렀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아름답고….”

고루함에 하품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벌떡 일어선 발레리아가 문으로 다가갔다. 방문자와 짧게 대화를 나눈 그녀가 이내 뛰듯이 걸어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가씨. 조나단 부인께서….”

그러나 그녀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방으로 들어온 중년의 여자가 있었다.

“여기 있었군, 벨버른 백작.”

까칠한 음성의 여자는 가슴을 내민 채 우리 앞에 섰다. 새하얗게 분칠한 얼굴과 드높게 올려 묶은 흑발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여자였다. 조나단 부인. 황실 외친인 조나단 후작 가문의 어른이자 죽은 황후의 자매. 조나단 부인은 방문자임에도 불과하고 내 쪽으로는 그 흔한 고갯짓도 없었다. 서늘한 시선으로 벨버른 백작을 타박할 뿐이었다.

“오늘 저녁이면 힐마르티노 후작께서 도착하실 거란 소릴 못 들었소? 약속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여기서 무얼 하는 거요?”

벨버른 백작이 난처한 표정으로 두 손을 허벅지에 비볐다.

“하하, 조나단 부인! 여기까지 절 찾으러 오시다니. 급히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아그레인 양.”

곁을 지나치기 전에 슬쩍 다가온 백작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대충 어떤 눈빛일지 상상이 갔다.

“나는 당신에게 몹시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음에도 저의 방문을 흔쾌히 맞아 주었으면 좋겠군요.”

좋은 감정이라. 그 감정이 내게 덕을 줄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런 감흥이 떠오르지 않는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끼워 넣었다. 내 웃음을 본 백작은 만족스러운 걸음으로 방을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응시하던 조나단 부인이 냉랭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윗사람이 오면 몸을 일으켜 맞이해야 하는 법이오, 아그레인 양.”

마찬가지로 날 향해서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였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즉시 일어서서 까칠한 조언에 대답했다.

“제가 뭘 몰라 실수했네요. 죄송합니다, 부인.”

“그대의 행동은 곧 비비안느 전하의 행동이 되니 무얼 하든 심사숙고한 후 움직여야 할 거요.”

힐끔, 눈동자만 굴려 날 훑은 조나단 부인이 방을 벗어났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와서 하는 짓이 사람 신경 건드리는 짓밖에 없다니.

“고리타분한 것들.”

다시 의자에 앉아 식은 차를 들이켰다. 황성에 비하면 잉고르드는 몹시 평화로운 땅이었음을 다시금 실감했다. 이 질릴 정도로 널따란 건물에는 명예에 죽는 척하며 시궁창보다 더럽게 구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대체로 하녀들보다 시기와 참견이 심했다. 하나라도 더 가지겠다는 듯 욕망에 충실한 모습이 짐승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개중에서도 조나단 부인은 그나마 품위와 절제를 지킬 줄 아는 자였다. 사사로운 일에 간섭하려 해도 어디나 예법에 한해서였다. 천한 신분을 박해하긴 하지만 이는 귀족이라면 누구나 가질 태도이니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벨버른 백작과 같은 속물을 대하는 것보단 딱딱한 조나단 부인과 대화하는 게 훨씬 편했다. 하지만 편한 건 편한 거고, 답답한 건 답답한 거지.

“나는 잠시 나갔다 와야겠다. 누구든 날 찾으면 어딜 갔는지 모르겠다고 해.”

“네.”

발레리아의 대답을 듣고 방을 나왔다. 조금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기다란 복도가 날 맞이했다. 이런 풍경으로는 가슴의 옥죄임이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황성을 벗어나 후원을 건넜다. 후원 너머에 위치한 호화스러운 별채는 내 눈에도 퍽 익숙한 건물이었다. 어디선가 시린 바람이 불었다. 꿈속에서, 나는 이 안에 발을 디딘 적이 있다. 그리고 내 세계를 다시 정립한 그 ‘그림’을 만났었다. 『태양이 흐르는 강』을.

별채의 계단을 올라 복도 한쪽 벽면을 장식한 『태양이 흐르는 강』 앞에 섰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왔기 때문일까? 이제는 눈을 감아도 앞에 선한 느낌이었다. 잉고르드를 나와 황성의 객식구가 된 지 벌써 한 달이 넘게 흘렀다. 변한 것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쌓여가는 것은 의문뿐이었다. 사방이 막힌 벽 안에 홀로 선 듯 하루하루가 숨통을 옥죄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새삼 과거의 내가 참 대단하다 싶었다.

‘당시의 아그레인은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참 많은 점이 달랐다.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미래를 볼 수 없었다. 어떤 짓거릴 해도 미세한 낌새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두 번 다시 미래를 못 볼 수도 있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눈을 떼지 못하는군요.”

그때, 익숙하고도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렇게 들으니 기이하게도 비비안느가 떠올랐다. 이란성 쌍둥이라 그런 걸까. 한참 다른 음성임에도 유사한 분위기가 풍기다니. 나는 그림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이토록 추상적인 그림은 처음이라서요. 눈길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며칠 전에도 당신은 그 자리에 서서 『태양이 흐르는 강』을 감상했었지요.”

“절 보셨었나요?”

몸을 틀어 목소리의 주인, 빌힐름을 응시했다. 그 역시 턱을 들어 올려 그림의 전면을 훑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시선이 오랜 연인을 마주하듯 차분하고도 따스했다. 이윽고 빌힐름의 시선은 내게로 향했다. 그의 눈빛은 잉고르드에서 마주한 분위기 그대로였고, 그랬기에 나는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뱉어낼 수 있었다.

“인사라도 해 주시지 그랬어요. 이곳에 온 후 뵌 적도 손에 꼽는데.”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더라. 일주일이 흘렀나? 발레리아에게 했던 말 중에서 빌힐름과 관련된 부분은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황성에 도착한 이후, 빌힐름은 내게 더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무관심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의아함을 넘어 언뜻 두려움이 일 정도였다.

이 남자에게 나는 단순히 소유해야 마음이 놓이는 물건에 불과했던 걸까? 차라리 그렇게 간단하게 답을 내릴 수 있었다면 이토록 불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빌힐름은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 했습니다. 앞으로는 아그레인 양이 사흘에 한 번 나를 찾아왔으면 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들려온 소리에 입을 닫았다. 빌힐름에게서 느끼는 두려움의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 그가 바라는 목표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해서 끌려갈 수밖에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털었다.

“생각이랄 것까지 있을까요. 그저 전하께 그 이름을 들으니 퍽 새로운 기분이라.”

“새로운 감정을 느낀 건 오히려 내 쪽 같은데요.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나의 손님 자격으로 황성에 머물겠다더니… 갑작스럽게 이름을 밝힌 이유가 뭡니까?”

붉은 눈동자가 내 낯을 세밀하게 살폈다. 민망할 때는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더라. 손을 들어 귀 밑을 살짝 쓸며 대답했다.

“굉장히 속물적인 이유에서예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빌힐름에게선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다만 그의 시선만은 귀 밑에서 다시 허리춤으로 떨어지는 내 손을 따라 내려갔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내 눈에 비친 당신은 여전히 아그레인입니다.”

“기억을 잃었어도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제가 비슷하다는 의미일까요.”

“다르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제자리를 찾아갈 테니까.”

제자리. 그 자리로 돌아가느니 창문 밖으로 그를 밀어내고 나 역시 따라 떨어지는 게 나을 터였다. 하지만 빌힐름의 눈에 비친 아그레인은 아무 것도 몰라야 했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짓으로 짧게 웃자, 그 역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아직 못 들은 것 같군요.”

사흘에 한 번씩 얼굴을 보자는 제안 말인가? 적을 알려면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한다. 거절할 이유가 하등 없는 제안이었다.

“저야 환영이죠. 언제쯤 찾아뵈면 될까요?”

“내일 해가 진 후 당신에게로 보낼 시종을 기다리시면 됩니다.”

“좋아요.”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몇 분을 더 함께 『태양이 흐르는 강』을 감상했다. 이후 빌힐름은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나를 먼저 별채 밖으로 배웅했다. 그와 멀어지며 나는 익숙하지 않은 상념에 잠겼다. 빌힐름과 함께하는 공간은 일 분 일 초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나, 기이하게도 오늘만큼은 오히려 더 멀어지는 게 불안했기 때문이다. 난 이 불편한 감정의 근원을 알고 있다. 어떤 다짐으로 이곳에 도달했든, 황성에 있어 나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또한 그런 내게 유일하게 이어진 끈이 빌힐름이었다. 원하지 않아도 나의 관심과 시선은 그를 좇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젠장.’

당장 손에 잡히는 무엇이라도 내던지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답답함에 방을 벗어났는데, 얻은 것이라곤 내 자신이 초라하단 깨달음이 전부라니. 길을 틀어 후원이 아닌 서쪽 숲으로 향했다. 높다란 자작나무 사이를 거닐면서 잉고르드를 떠올렸다. 떠올려도 그따위의 땅을 떠올리는 내가 참 우스웠다. 내게는 정말 돌아갈 곳이 없구나 싶었다.

“으으읍!”

“보기와 달리 근성이 있구나.”

얼마나 걷고 있었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동쪽 구역을 뺀질나게 드나든다는 걸 아는데 왜 자꾸 모른다는 말만 반복하는 거냐?”

이어서 들려온 목소리에서 노래하듯 청령한 음율과 미세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피해가야 하나? 그러기에는 이미 늦은 듯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가까운 나무에 몸을 밀착하고 귀를 기울였다.

“큭… 그건 제가 전하의 취향을 가장 잘, 하아. 알기 때문….”

“취햐앙? 무슨 취향? 말귀를 못 알아먹니? 좋아. 어디까지 가나 보자.”

아직 완전히 내려앉지 않은 초겨울의 어둠 속, 나무 사이로 어렴풋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무릎을 꿇고 있는 자는 시종 복장을 하고 있었다. 곧 장신의 남자가 시종의 입을 천으로 틀어막았다.

“으으읍! 으읍!”

서걱. 짧은 소리였지만 등 뒤로 소름이 일었다. 시종이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불현듯 이곳에 오래 있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그들에게로 고정한 채 최대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치지만 않았더라면.

아. 숨 쉬는 것도 잊을 만큼 기이하고 섬뜩한 안광이었다. 사람의 심장을 쥐어 짤 만큼 강렬한 눈빛을 가진 이는 리히튼을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답지 않게 두 발이 묶여 버렸다. 내가 굳은 채로 서 있을 동안 안광의 주인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나는 숨 쉬는 방법을 잊은 것처럼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가온 여자에게선 코가 아플 정도로 짙은 바람의 향이 풍겼다.

“익숙하지 않은 실루엣.”

단번에 알아 차렸다. 남자를 추궁하던, 음율을 지닌 묘한 음성의 주인이 바로 이 여자였다는 사실을.

“처음 보는 얼굴.”

볕에 그을린 옅은 갈색 피부에 밤보다 까만 흑발이 마치 그를 이방인처럼 느껴지게 했다. 왼쪽 눈 아래에 박힌 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눈동자의 색은 바늘처럼 얇고 긴 소나무의 이파리보다 더 채도 높은 초록빛이었다. 여자는 짚고 있던 지팡이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흙의 감촉이 가슴 위로 떨어졌다.

“한데 그런 것치곤 천박해 보이지는 않구나.”

여자에게서 풍기는, 독특하게 무르익은 고아한 분위기가 다소 천진해 보이는 웃음과 함께 흩어졌다. 여자가 내게 물었다.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

안광만으로 리히튼을 떠오르게 하는 여자. 감상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이상 엮일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나는 적의를 최대한 누그러뜨리며 대답했다.

“그쪽의 모습이 너무 섬뜩해서 입이 쉬이 열리지 않네요.”

여자가 천천히 지팡이를 내렸다. 사르르 웃는 낯이 어쩐지 정반대의 분위기를 지닌 비비안느를 떠올리게 했다.

‘리히튼에 비비안느라.’

갈수록 좋지 않다.

“입까지 놀릴 줄 알다니. 예쁘장한 것들은 얼굴값을 하곤 하지. 첫인상도 썩 괜찮아.”

“별채를 방문한 후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내가 물은 질문과 영 딴판인 대답이지 않니?”

웃음을 잃지 않고 있지만 고압적인 시선은 여전하다.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가 몸을 돌려 후원으로 달려갔다. 이런 곳에서 개죽음당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들자 절로 몸이 움직였다.

“끌고 와.”

발돋움을 한 즉시 뒤통수에서 들려온 음성이 나를 더 숨 가쁘게 내달리도록 했다. 그러나 추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팔뚝을 잡아채는 우악스런 손길에 뜀박질을 멈추고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하아, 하아….”

그래, 이런 식으로 도망칠 수 있을 리 없지. 제아무리 미친년이라도 빌힐름의 손님인 이상 내게 해를 끼칠 순 없을 터였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발버둥치지 않고 남자의 손에 순순히 끌려갔다. 상류층의 의복을 걸친 탓인지 거칠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는 여자와 다시 마주보게 되었다.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눈이 더 얇게 접혀진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내 이름은 힐마르티노 조나단. 그렌페르크 제국의 남쪽 요새를 지키는 후작이다.”

힐마르티노 조나단. 조나단 가문의 가주이자, 비비안느를 지지하는 세력 중 잉고르드 공작의 다음 가는 세력. 죽은 황후와 조나단 부인의 자매. 힐마르티노 후작이 여자라는 소리는 들었으나, 이렇게 젊을 줄은 몰랐다.

“네 년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년이기에 내 앞에서 그리 건방진지 궁금하구나.”

여자, 힐마르티노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진심으로 즐겁게 여기는 미소였다.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흐르는 착각이 일었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최대한 몸을 낮춰 비위를 맞춰야 하나? 아니면 비비안느나 빌힐름의 이름을 대고 적당히 빠져나가야 하나?

시선을 살짝 내려 힐마르티노의 등 너머를 살폈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는 시종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당장 비친 여자의 성향을 고려하면… 비위를 맞춘다고 해서 저런 꼴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곧장 사죄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후작 각하. 저는 아그레인 캐롤드입니다.”

“…캐롤드?”

나와 관련된 그 어떤 소식도 알지 못하는 듯한 물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에 힐마르티노 후작이 입성한다고 했었지.

“네가 그 캐롤드란 소리냐?”

반복되는 되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이전까지의 여유는 어디로 가고 살벌한 눈빛이 날 응시하고 있었다.

“네.”

“하.”

짧은 헛웃음을 뱉은 힐마르티노가 고개를 젖힌 채 마른세수를 했다.

“하하하하!”

무엇이 저렇게 즐거울까? 머리를 저으며 웃음을 갈무리한 힐마르티노가 상냥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랬군, 아그레인 양. 좋아! 건방지게 굴만 했다고 치지. 너라면 그럴 수 있어. 가던 길 마저 가렴.”

날 붙잡았던 남자가 곁에서 떨어져 시종에게로 등을 돌렸다. 그러나 힐마르티노는 지팡이를 짚고 농밀하게 웃는 낯 그대로 날 바라봤다. 몸을 틀어 후원을 향하는 길에도, 힐끗 고개를 돌리니 힐마르티노는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웬 미친년에게 잘못 걸려서는.’

방으로 돌아온 즉시 발레리아에게 물었다.

“너 혹시 힐마르티노 조나단 후작에 대해서 아니?”

잠시 멈칫한 발레리아가 처음 보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아, 그분이 벌써 돌아오실 때가 되었군요.”

“아는 부분만 설명해 줘.”

“조나단 후작은 겨울 초입에서 이른 봄까지 황성에 거주하세요. 정확히는 비비안느 전하의 곁을 보좌하시는 것으로 알아요.”

올해를 넘겨 내년 봄까지 부대끼고 살아야 한다니. 적어도 나만은 그때까지 황성에 남아 있지 않았으면 했다.

“조나단 후작은 비비안느 전하의 최측근이자 가장 총애하는 여자예요.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황성에 오시기 전까지는 그랬죠.”

“그 여자는 나를 알고 있겠구나.”

“황성에서는 매일 스무 통이 넘는 서신이 오고 갑니다. 그중에 조나단으로 가는 서신도 있지 않았을까요?”

제국의 남쪽 요새와 수도는 거리가 가깝다. 또한 힐마르티노 후작 즈음 되면 서신을 주고받지 않았더라도 도착하자마자 황성의 상황을 보고받았을 터였다.

“숲속에서 시종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분지르고 있던데 말이야.”

“하녀들 중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가 없었습니다.”

그렇겠지. 귀족들 중에는 고약한 취미와 성정을 지닌 이들이 많고, 그 피해는 대개 고용인들이 감당하기 마련이었다. 그중에서도 힐마르티노의 존재감은… 고작 한 번 마주친 내가 느끼기에도 안광의 잔상이 잊히지 않을 만큼 독보적이었으니까.

“너도 손가락을 잃고 싶지 않다면, 발레리아. 당분간 나 없이 성을 나가지 말도록 해.”

“예.”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 묻어 나오는 대답이었다. 힐마르티노를 제외하고서라도, 발레리아는 황제의 관심을 잃은 뒤부터 내게 퍽 충실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발레리아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

다음날, 중천에 뜬 해가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할 무렵에 후원으로 향했다. 본래라면 비비안느와 동행해야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비비안느는 서로 죽고 못 산다던 힐마르티노와의 재회 때문인지 어제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몇 마리를 준비할까요?”

“평소의 반으로.”

비비안느 없이 사냥총을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비록 황제의 손님이지만, 작위를 갖지 않은 내게 놀거리란 손에 꼽는다. 황제의 애첩이라도 됐으면 조르고 졸라 서재라도 사용했을 텐데 내겐 그럴 권위가 없었다. 그나마 말이 통할 또래의 여자들은 수가 적었고 나머지는 나를 없는 취급하거나 이용하려 애쓰는 자들이었다. 무료함과 부정적인 상념에 젖기 시작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냥이 전부였다.

“올려.”

총을 고정한 채 명하자 시종이 하늘 위로 거위를 날렸다. 탕! 총성과 함께 허공으로 새하얀 깃이 휘날렸다. 내 총을 받아든 발레리아가 탄을 갈아 끼웠다.

‘너의 눈빛은 강렬하고 아름다워, 아그레인.’

문득 비비안느에게서 처음으로 사냥을 배웠을 때가 떠올랐다.

‘대개 그런 자들이 사냥을 잘하지. 사냥감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쫓거든. 그러니 나를 한 번 믿어 봐…. 너는 훌륭한 사냥꾼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리 말하며, 비비안느는 선 자리에서 열 마리의 거위를 사냥했다. 열세 번의 총성이 터질 동안 그녀의 말간 낯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황성에 입성한 순간부터 비비안느는 나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내보였다. 내가 그녀를 낯선 이로 대해도 비비안느의 태도는 여전했다. 정적인 빌힐름의 손님이라는 위치가 무색하게 나는 항상 비비안느에게만 불려갔다. 그리고 빌힐름은 그런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것만은 확실해. 비비안느는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어떻게? 빌힐름이 친절하게도 그녀에게 나의 상황을 귀띔해 준 걸까? 아니면 리히튼과 그 정도 깊이의 대화까지 나누는 사이여서? 비비안느의 속은 빌힐름에 견줄 만큼이나 깜깜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곁에 서는 게 빌힐름과 한 공간에 있는 것만큼이나 불편했다.

“오늘은 혼자 계시는군요.”

그때, 누군가 등 뒤로 가까이 다가왔다. 총구를 내리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보이는 벨버른 백작에게 대답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나의 말에 그가 짧게 웃었다.

“힐마르티노 각하께서도 그렇고, 두 분 모두 전하의 신뢰를 받는 분들 아니십니까? 전 당연히 비비안느 전하께서 당신과 동행하셨으리라 여겼습니다.”

“전하께서 힐마르티노 각하와 재회하는 자리에 절 데려가시다뇨? 저를 놀랍도록 좋게 평가하시네요.”

“제 눈으로 직접 보아 온 것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비비안느가 힐마르티노와 관련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나를 향한 벨버른 백작의 관심이 시들해질 수 있었다.

‘쓸모 있는 남자를 이런 식으로 버릴 순 없지.’

나는 거짓말로 대답을 적당히 포장했다.

“오랜 친우와의 재회잖아요. 제가 감히 방해할 순 없죠. 겨울이 지나가지 않는 한 후작 각하를 뵐 기회는 언제든 있으니까요.”

“사려 깊으시군요. 아그레인 양만 괜찮다면 옆의 빈자리를 제가 채워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벨버른 백작이 좋은 티를 숨기지 못하고 내 옆에 섰다. 내 대답이 어쩔 줄 알고 사냥총을 미리 준비해 온 걸까. 벨버른의 제안을 허락하기는 했으나 나를 위한 허락은 아니었다. 그는 나의 보잘 것 없는 부분에 대해 관심이 너무나 많았다. 더불어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떠벌떠벌 흘렸다.

“비비안느 전하께 배우셔서 그런지 며칠 사이에 실력이 눈에 띌 정도로 느셨습니다.”

준비된 사냥감의 수가 두 명이 즐기기엔 턱없이 부족했기에 사냥은 일찍 막을 내렸다. 해가 지지는 않았으나 어쩐지 먹구름이 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듣기 좋은 말만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런 김에 저녁 식사 후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너와 한참 동안 헛소리를 나눴는데 여기서 더 나누자고?

“정말 아쉽지만, 거절해야 할 것 같아요. 이미 선약이 있어서요.”

일정이 정해져 있어서 다행이었다. 없었어도 억지로 만들었겠지만.

“이런. 혹시 어떤 분과의 선약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빌힐름 전하와의 선약이에요.”

서운함을 표했던 벨버른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갔다. 감정에 꽤 솔직한 편이네. 나는 문제라도 있느냐는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시선을 낮춘 벨버른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내게 속삭였다.

“감히 한 말씀 드리자면… 좋은 시기는 아닌 것 같군요.”

그 말의 속뜻은 명확했다. 힐마르티노가 돌아온 시기에 비비안느가 아닌 빌힐름을 찾아가는 건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의미겠지. 설마 내가 그런 점도 고려하지 못했을까. 호감 있는 이에게나 보일 법한 밝은 웃음을 혼신의 힘을 다해서 지었다. 사냥총을 발레리아에게 맡기고 벨버른의 곁을 지나치며 그의 어깨에 살짝 이마를 기댔다.

“걱정 고마워요, 백작님.”

멀어지는 등 너머로 그의 시선이 끈덕지게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그의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아그레인 양! 내일도 같은 시간에 만날까요?”

‘이 짓거리를 다시 하라고? 내가 미쳤니?’

못 들은 척 귀와 머리를 매만지며 성안으로 돌아왔다. 벨버른의 부름은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 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그날 저녁은 달이 보이지 않은 만큼 하늘이 흐릿했다. 저녁 식사를 가볍게 마친 후, 나는 약속 시간에 맞춰 빌힐름을 찾아갔다. 분명 황성 동쪽 구역에서 지내고 있음에도 통로를 지나치는 기분이 익숙하기보다 어색하다.

빌힐름의 문 앞을 지키던 시종은 내 얼굴을 확인한 즉시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러나 들어선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딱 한 명 나를 기다리고 있기는 했다. 빌힐름의 호위 기사 중 한 명이.

“카인 경?”

“저를 아십니까?”

냉랭한 얼굴로 되묻는 눈길에는 의문이 서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크로허츠에서는 베일을 쓰고 있었지.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빌힐름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죠?”

“잠시 기다리라는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급작스러운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카인의 말대로 의자에 앉아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십 분이 삼십 분이 되고, 더 흘러 분침이 한 바퀴를 돌아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저녁 여덟 시가 되었을 때. 나는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카인 경, 제가 전하를 더 기다려야 된다고 생각하나요?”

한 시간이나 시간을 낭비했지만, 짜증나기보다는 궁금했다. 무슨 일로 나와의 약속을 어긴 걸까? 카인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치 미리 짜놓은 것만 같은 답과 얼굴이었다. 빌힐름의 방을 나오면서 불현듯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더 바쁜 일이 있었겠지 싶었지만, 걸음을 이을수록 그 반대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확신컨대 빌힐름은 일부러 나를 기다리게 했다. 그리고는 심지어 물까지 먹였다.

“빌어먹을 새끼.”

눈앞에서 워낙 고분고분 굴어, 그간 깜빡 잊고 있었다. 빌힐름이 개자식이라는 걸. 방으로 돌아온 후 발레리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

“아가씨. 빌힐름 전하를 뵈러 갔다 오신 거 맞으시죠?”

아. 좋지 않은 감은 항상 들어맞더니. 역시 무언가가 있구나, 싶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빌힐름 전하께서 저녁 만찬을 즐기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한데 아가씨와 선약이 있다고 하셨기에… 알려 준 하녀가 거짓말을 했나 싶어서요.”

나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꽤 믿을만한 하녀네. 거짓말을 한 건 그 하녀가 아니라 빌힐름 황자 쪽이거든.”

발레리아가 역시,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으니 내 앞에서 말을 꺼냈겠지. 만찬이라. 힐마르티노의 입성 때문인가.

“그것 말고는 다른 소식 없니?”

“아… 듣기로 빌힐름 전하의 혼인 상대가 곧 정해질 것 같다고 했어요. 마가렛 헨서웨이라는 이름이었던 같습니다. 아가씨보다 조금 이르게 황성에 왔다는데 비공식적인 빌힐름 전하의 새로운 연인이라고 했습니다.”

“아아.”

“오늘 만찬의 파트너도 그 여자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빌힐름에게도 비비안느에게도 나는 뒷전이라 이거군.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걸까, 발레리아.”

“예?”

내게 필요한 건 그들의 총애가 아니다. 하지만 둘의 관심을 쥐고 있으면 원하는 바를 더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걸 안다.

“흐음… 아니야.”

고작 비비안느와 빌힐름의 관심사 따위로 고민해야 하는 시간들. 잉고르드에서 보낸 가을에 비하면 너무나 평화로운 겨울의 초입. 경험에 의하면 이런 안온함은 항상 거센 태풍을 몰고 왔다. 급한 일도 없겠다, 어디 한 번 그 태풍을 여유롭게 기다려 볼까.

***

어디선가 짙은 피 냄새가 났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선명한 비린내와 시야를 가로막는 캄캄한 어둠. 나는 어디인지 모를 이 공간이 잉고르드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심코 깨달았다. 이것이 꿈속이란 것을.

‘어흑, 어흐흑….’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시야 너머에서 누군가 울고 있었다. 이윽고 가쁜 숨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났다.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채고 더없이 간절한 얼굴로 눈을 맞추었다.

레이나?

‘수잔, 수자안! 제발 나를 살려 줘, 수잔!’

레이나, 네가 왜 이곳에…?

‘리히튼 공작은 널 죽일 거야.’

레이나의 손톱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눈동자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나를 올려다봤다.

‘나를 빌힐름 전하께 보내 줘, 수잔… 제발. 그분만이 널 구할 수 있어.’

구해? 누가, 빌힐름이? 나를? 본능적으로 레이나의 몸을 뒤로 밀어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꽉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점차 멀어진다. 밝아지는 시야 속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하아.”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이마를 거칠게 닦아냈다. 기분 나쁜 꿈이었지만, 덕분에 잊고 있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레이나. 잉고르드에서의 첫 파트너이자, 빌힐름의 간자였던 하녀. 발레리아가 내 시중을 들기 위해 올라온 즉시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여기 레이나라는 이름을 가진 하녀가 있었니?”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맹세코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없다고? 그럼 그날 살아서 도망친 레이나는 어디로 간 거지? 그녀가 내게 거짓말을 한 걸까. 아니면 애초부터 하녀가 아니었던 것일까. 물론, 지금 당장 그녀의 생사여부를 안다고 해서 나의 처지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레이나라는 이름은 몇 시간 되지 않아 머릿속에서 흐릿해졌다. 하지만 찝찝함은 여전했기에, 점심 식사를 마친 즉시 방을 벗어나 별채로 향했다.

***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잠에 들 때마다 파도처럼 밀려오던 과거의 기억들이 더는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내가 계속해서 황성의 별채를 찾아가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태양이 흐르는 강』을 지겹도록 보다보면 어느 순간 한 번쯤은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싶어서. 되살아난 그 기억이 나의 끊긴 이정표를 다시 이어 주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흘러간 시간이 벌써 한 달 반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간들 틈에서, 무언가 단단히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게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또네.”

낙엽이 짓뭉개지는 소음과 함께 간드러지는 음성이 귓등을 울렸다. 두 다리가 멈추고 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이 목소리의 주인은 절대 달가운 인물이 아니었다.

“또야. 숲속을 헤매는 이유가 무얼까. 돌아갈 곳이 이 수풀 사이에 있기라도 한 걸까?”

후. 옆에서 얼굴을 들이민 힐마르티노가 귓가에 바람을 불고 꺄르르 웃었다. 미친 짓은 해가 져 있을 때만 하는 게 아니었구나. 나는 그녀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섰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고작 두 번 마주친 사이에 대단한 뜻이 있을 리가? 단순히 그런 표정처럼 보여서라고 말하면 되려나.”

“제게 관심이 많으시네요.”

힐마르티노의 복장은 상복이라도 걸친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맸다. 어두운 피부톤에 의복까지 검으니 죽음을 알리러 온 사신처럼 느껴졌다. 힐마르티노는 여자치곤 큰 신장인 나보다 한 뼘은 더 컸다. 그녀는 뒷짐을 진 채 말했다.

“너를 향한 관심은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많을 거란다. 황성에는 너처럼 예쁘고 쓸모없는데 권력에 가까운 여자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거든.”

“그 말씀은 각하의 관심도 시기라는 뜻일까요.”

뒷짐을 푼 힐마르티노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긍정도, 부정도 없이 그저 웃기만 한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아진 눈매에서 만연한 즐거움이 엿보였다.

‘전형적인 기분파야.’

기분파는 대하기가 쉽다. 아무리 미친년이라도 이럴 땐 뭐 하나 흘리지 않을까?

“황성의 사람들은 다들 날이 서 있는 것 같아요.”

젖힌 고개를 제자리로 고정시키며, 힐마르티노가 대답했다.

“날이 뭉개진 것들은 이미 다 죽고 없기 때문이지.”

“제가 비비안느 전하께 무얼 받게 될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그것도 당연하단다. 나의 아름답고 황홀한 비비안느의 사랑을 바라는 이가 한둘이 아니거든.”

비비안느의 이름을 입에 담는 힐마르티노의 낯은 행복 그 자체였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는 모습을 보니 배알이 꼴렸다. 이유는 없다. 단순히 성격이 더러워진 탓인가.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이고.”

웃음이 사라진 힐마르티노의 얼굴에는 그림자만 남았다. 나는 그러한 얼굴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정작 당사자인 저는 비비안느 전하의 생각을 조금도 모르겠는걸요.”

힐마르티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비비안느 전하께선 왜 저 같은 아이를 옆에 두시는 걸까요?”

기다란 자작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얼마나 긴 정적이었던가? 한참 만에 눈을 감았다 뜬 힐마르티노가 흩날리는 흑발을 등 뒤로 넘겼다.

“네가 어디서 쓰레기 같은 것들만 상대해 온 건진 몰라도….”

우리의 거리가 다시 좁혀졌다. 등을 숙인 힐마르티노가 내 두 눈을 응시하며 또박또박 한 글자씩 읊었다.

“나를 이용하려면 조금 더 성의를 갖추는 편이 좋을 거다. 생긴 건 이래도 팔 하나는 가볍게 물어뜯거든.”

어이가 없었다. 본인이 개새끼인 걸 자랑하는 건가. 침을 뱉어 주고 싶었으나… 아직은 아니었다.

이곳은 잉고르드가 아닌 황성이다. 내가 그 어떤 짓을 해도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리히튼은 황성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즉 예전처럼 홧김에 침실로 침입해 화풀이를 할 만한 상대가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각하.”

흐흥. 작은 웃음소리가 멀리 흩어졌다. 몸을 돌린 힐마르티노가 나무에 묶여 있던 말의 등 위로 올라탔다. 갈기에 윤기가 도는 커다란 흑마였다.

“어여쁜 아그레인. 네 말대로 너 같은 아이는 황성에 차고 넘치지.”

나를 향해 싱긋 웃은 힐마르티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말의 목을 쓸어내렸다.

“전하께서 어떤 생각이실지 알게 된다면 내게도 귀띔해 주렴. 너무 궁금해서 어제는 밤잠도 설쳤단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 재미있는 단어를 쓰기는! 아,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말을 잊을 뻔했구나.”

말 머리를 돌리려던 힐마르티노가 떨어졌던 시선을 다시 내게로 향했다. 그냥 평생 잊고 가 주었으면 싶은데.

“올해 사냥 대회에서 내 파트너는 네가 될 거다. 이제 사흘 정도 남았을 텐데, 이 일정에 참여하려고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니, 많았으나 차라리 입을 다물고 힐마르티노를 쳐다보기만 했다. 내 반응을 기대했던 건지,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픽 웃음을 흘렸다.

“떨떠름한 티를 숨기지 않네? 깜찍해라. 나는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가장 혐오하니까, 알아서 잘 준비해 오도록 해.”

미친년은 멀리하는 게 옳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멀리하기 전에 당사자가 먼저 자리를 떴다.

‘저 괴팍한 여자와 사냥 대회를 함께 출전해야 한다고?’

비비안느가 허락한 일이 분명할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결과를 만든 건지 모르겠다. 정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의지대로 흘러가기는커녕, 모든 게 엉망이었다. 당장 오늘 일어나는 일조차 조종 범위 밖이지 않은가.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내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걸.

저녁식사가 끝난 후 어제와 마찬가지로 빌힐름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닌 발레리아와 함께였다. 오늘은 빌힐름이 제때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어쩌면 오늘도 어제와 같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빌힐름의 방으로 들어선 즉시 확신이 되었다.

“책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네요. 그렇죠?”

카인은 어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나를 응시했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풍경이었으나 의식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다행히 오늘은 무료하게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테이블 아래를 뒤져 찾아낸 카드로 발레리아와 게임을 즐겼다.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카인은 내내 인상을 구기고 있었지만 알 바 아니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흐를 동안,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내일도 이 시간에 이곳으로 오면 될까요?”

나는 카드를 정리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나를 대신해 뒷정리하려는 발레리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런 건 티를 내려고 하는 거야.

“예.”

카인의 대답은 어제보다 훨씬 더 딱딱했다. 난 그 얼굴에 대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남겼다.

“전하께 세 번은 싫다고 전해 주었으면 해요. 이런 식으로 시간 낭비할 생각은 없어서.”

그리고 난장판이 된 테이블을 그대로 둔 채 방을 벗어났다. 황자의 방을 어지럽힌 게 마음에 걸렸는지 발레리아는 걷는 내내 뒤를 돌아봤다.

“아가씨. 그래도 정리하고 왔어야 하지 않을까요?”

“불만이면 한 소리 하러 오겠지.”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발레리아의 표정이 여전히 어두운 걸 보면 나의 행동을 기이하게 여기는 듯했다. 하긴, 근래 빌힐름과 교류가 없었던 것은 물론 물을 두 번이나 먹은 내가 이리 대처하는 게 이상해 보일 터였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가 방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뒤에서 돌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그레인 양.”

계단 위쪽에 선 벨버른 백작이 빠른 걸음으로 내려와 내 앞에 섰다. 이 남자는 한 번이라도 그냥 지나치는 적이 없다.

“백작님.”

“오늘 얼굴 보기가 영 어렵더군요.”

“절 찾고 계셨어요? 죄송해요, 일전에도 말씀드렸듯 빌힐름 전하와의 선약이 있었어요.”

“아! 기억납니다. 한데 그분은….”

벨버른 백작이 다소 복잡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응시했다. 어떤 의미인지는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모양이지.’

아무래도 어디선가 빌힐름의 얼굴이라도 보고 온 듯했다. 그것도 내가 동행하고 있지 않은 자리에서.

“어떤 말씀을 하시려는지 잘 알아요. 황성 생활이라는 게 제 마음대로 되지 않네요.”

이번만큼은 진담이었다. 내 진심이 전달되었는지 벨버른 백작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우스운 처지인데 네 눈에는 얼마나 안쓰럽게 보이겠어.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그레인 양. 황성이 다 그렇죠. 제 형님은 이곳을 거미줄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성에 발을 딛는 순간 벗어날 수 없는 거미줄에 갇혀 먹이가 되길 기다리는 기분이라더군요.”

“정말 재치 있는 분을 형님으로 두셨어요.”

그런 형님을 밀어내고 작위를 계승한 걸 보면, 형님이 겁먹고 도망이라도 간 모양이었다.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벨버른 백작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이 정도의 불쾌함은 이제 아무렇지 않게 숨길 수 있었다.

“힘들고 지친다면 언제든 절 찾아오셨으면 합니다. 아그레인 양의 문제라면… 어떤 방법을 찾아서라도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 기억해 둘게요.”

무의미한 대화가 더 길게 이어질라, 발레리아를 데리고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그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이 얼굴은 참 쓸모가 많아. 그렇지?”

내내 굳어 있던 발레리아의 표정이 그제야 짧은 웃음과 함께 살짝 풀렸다. 하지만 그녀의 풀린 얼굴이 되레 나의 잠들어 있던 상념을 수면 위로 끌어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언제쯤 잃어버린 과거의 나를 완전히 되찾을 수 있을까.

‘여기서 더 위험을 감수해야 무엇이라도 얻어낼 수 있으려나.’

한데 감수해야 한다면 어떤 식으로? 빌힐름을 찾아가 나 또한 과거의 너를 알고 있다고 고백해야 하나? 안달이 나는 쪽은 누가 보더라도 빌힐름이 아닌 나다. 그 사실은 빌힐름도 비비안느도 알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리히튼 역시.

‘리히튼은 어디까지 봤을까.’

그가 언급한 나의 바람이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복수? 자유? 방으로 돌아가 밤새 고민해 봐도, 마땅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틀은 빠르게 흘렀다.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똑같은 하루였다. 낮에는 흐릿한 하늘에서 소나기가 퍼부을까 걱정돼 사냥을 나가지 않았고, 저녁에는 빌힐름을 찾아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한 후 돌아왔다. 발레리아와 무료한 시간을 보낼 때면 창밖에 펼쳐진 너른 자작나무 숲을 바라봤다. 황성의 서쪽과 동쪽에 넓게 분포된 새하얀 자작나무 숲은 낙엽이 떨어져 반쯤 발가벗겨져 있었다. 저 너머 어딘가에 나와 리히튼을 가두었던 새장이 존재하겠지.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흔적을 찾으려 시도한 적이 없었다. 숲의 안쪽이 마치 바닥없는 까만 늪처럼 느껴져 몸을 들이밀 수 없었던 것이다.

똑똑.

문이 열리고, 그 너머에서 발레리아가 티 카트를 몰며 들어왔다. 이윽고 저녁 식사대용으로 부탁한 간식이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곧 약속 시간인데 다 드실 수 있으시겠어요?”

“상관없어, 그리 배고프지도 않으니까. 너는 네 볼일을 보렴. 천천히 먹을 생각이야.”

고개를 끄덕인 발레리아가 저만치 놓인 벽난로에 다가갔다. 근래 날씨가 쌀쌀해 한 번씩 불을 붙이고 있었다. 발레리아는 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품의 작은 종이를 찢어서 던져 넣었다. 처음에는 지인에게서 받은 서신인가 싶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발치에 떨어져 있던, 발레리아의 것으로 보이는 엽서를 발견했을 때는 조금 달랐다.

<죽음을 이긴 육체에 상념이 깃든다.>

마치 암호구처럼 보이는 문장이지 않은가.

“발레리아, 그게 뭐니?”

한참 종이를 찢고 있던 발레리아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 서신입니다. 며칠 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이상한 엽서가 도착하고 있어서요. 분명 수신자는 제 이름이 맞는데… 전부 같은 내용이라 소름끼치기도 해서 모두 태워 버리려고 해요.”

엽서랄 것도 없었다. 글이 적히지 않은 엽서의 앞부분은 그저 까만색 잉크로 칠해져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발신자와 발신 주소는 텅 빈 상태. 무시하기에는 계속 눈에 걸렸다. 몸을 일으켜 발레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말대로 남아 있는 엽서 세 장 모두에는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죽음을 이긴 육체에 상념이 깃든다.>

죽은 육체.

“정확히 언제부터 왔어?”

“열흘 정도 된 것 같아요.”

열흘 전이면 내가 황제 암살범으로 몰렸던 시기 즈음이었다. 그 시기부터 발레리아에게 도착하기 시작한 엽서. 죽음을 이긴 육체. 상념.

“혹시 그동안 크게 아팠던 적 있니?”

“네? 아니요. 아주 어릴 때라면 모르겠지만, 큰 이후에는 없습니다.”

그럼 내게는 있었나? 문득 뇌리에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나는 홀린 듯 일어서 테이블로 다가갔다. 빵 옆에 놓인 나이프를 쥐고 손끝을 갈랐다. 그리고 지문 위에 맺히는 핏방울을 빵 위에 떨어뜨렸다.

“아가씨?”

아무런 변화가 없다. 모든 게 이상하리만치 그대로였다. 동그란 핏방울은 빵의 표면을 타고 부드럽게 떨어졌다. 썩거나, 탄 부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베이셨나요? 연고를….”

“괜찮아. 약은 필요 없어.”

이것 때문이었어.

‘이것 때문에, 황제가 내 혈액을 마셔도 내상을 입지 않고 멀쩡했던 거야.’

비비안느로부터 이슬라의 환청을 얻었던 일이 거짓은 아니었던 터라, 황제 시해 사건은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유리병 안에 들어 있던 적색 액체는 내 혈액이 맞았다. 특수 재질의 유리병이 아닌 이상 닿는 족족 녹여 버리는 그 혈액. 뒤늦게 깨달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멍청하게 느껴졌다. 확실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체내의 잉고르드 독이 모두 해독되어 있었다.

“하.”

대체 어떻게? 급히 서랍으로 달려가 잉고르드에서 챙겨 온 가방을 뒤졌다. 짐이라고 해 봤자 별 거 없었다. 내가 찾는 것은 그중에 포함된 작은 유리병이었다. 혹여나 잠결에 삼키기라도 한 줄 알았는데, 유리병에 든 검은 액체는 그대로였다. 리히튼이 내게 보낸 해독제. 한데 해독제를 마시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해독되다니?

‘얘, 수잔. 너 요즘 안색이 밝다. 건강해진 것 같아 다행이야.’

잉고르드를 벗어날 즈음 그런 소리를 자주 듣긴 했다. 그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불안정했던 몸의 상태가 어느 날부터인가 말도 안 되게 좋아져가고 있었다. 사흘에 한 번 꼴로 쓰러지거나 밤마다 찾아오는 악몽에 잠들지 못하고, 예민해진 오감에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했던 때의 내가… 지금은 어떻지?

‘독에 적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터 이미 해독되어가고 있던 건가.’

그럼 리히튼과의 내기는?

“…가씨.”

그가 내게 해독제랍시고 준 이 유리병은?

“…가씨?”

죽음을 이긴 육체에 깃드는 상념은?

“아가씨!”

길게 숨을 들이켰다. 혼돈으로 가득 찼던 뇌가 기지개를 펴는 느낌이었다. 발레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괜찮으세요? 이제 곧 나가실 시간이에요.”

그녀의 말대로 시계의 시침이 저녁 6시에 안착해 있었다. 마음은 급했으나 잡념을 떨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또 빌힐름을 기다려야 할 테고, 그때 생각을 정리하면 된다. 찬물을 삼키고 방을 나섰다. 조심스레 쫓아오던 발레리아가 내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오늘 조금 이상하신 것 같아요. 아가씨의 이런 모습은 처음 봅니다.”

“이런 모습이라면?”

“여유를 잃으신 모습이요.”

그 말은 즉 이전까지는 퍽 여유로워 보였단 소리일 터였다.

“황성에 오기 전까지는 늘 이런 꼴이었지.”

혼돈스러워하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잉고르드에서의 나날에 비하면 황성은 휴양지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빌힐름의 손님이라는 지위를 얻기도 했고, 잉고르드의 독은 모두 치유되었으니 이보다 더 안온한 일상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내 안에 잠재된 이성은 아니었다. 나의 이성은 이 안정감을 진절머리 낼 정도로 혐오했다. 나의 이성은 이 평화를 누리기 위해 황성에 오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오늘은 빌힐름 전하의 시종들이 보이지 않네요.”

고개를 드니 그녀의 말대로 문 앞이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시종이 자리를 비웠다는 이유로 약속을 어길 순 없었기에, 노크를 한 후 방 안으로 들어섰다. 늘 우리를 기다리던 카인 역시 방 안에 없었다.

‘이제는 아예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할 생각인 건가?’

이쯤 되니 그들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해졌다.

“아, 아, 아가씨?”

자연스레 의자 위로 몸을 누이려 할 때였다. 발레리아가 당혹감에 젖어 덜덜 떠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 순간, 문득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는 무언가를 느꼈다. 쉬이 정의할 수 없는 그 기묘한 감각에 방향을 틀어 발레리아에게로 다가갔다. 커다란 침대 옆에 서 있던 그녀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나를 향한다. 푸른 눈동자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광대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나는 그런 발레리아의 곁에 나란히 섰다. 우리의 앞에 놓인 것은, 몹시 놀랍게도, 난도질당한 벨버른 백작의 시체였다.

“아아.”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벨버른 백작의 시체를 인지하자마자 머릿속을 스쳤던 그 기묘한 섬광의 정체를 깨달았다.

“빌힐름.”

이건 빌힐름이 나를 위해 파 놓은 덫이었다. 오직 나를 위해 준비한 덫. 그래, 빌힐름 네가 내 앞에서 계속 웅크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가씨, 어서 이 일을 알려야….”

발레리아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땀에 젖은 그녀의 이마를 훔쳐 주며 고개를 저었다. 벨버른의 다리 옆에 떨어져 있는 커다란 검이 굳지 않은 핏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소용없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난 며칠간 절대 열리지 않았던 문이 이제야 열린 것이다. 누구인지 모를 방문자가 우리의 등 뒤로 다가왔다. 연달아 들리는 소리를 봐선 한 명이 아닌 여럿이었다.

“흠? 웬 아가씨가 계시는군. 우리가 방을 잘못 찾아온 겁니까? 빌힐름 전하의 공간….”

바로 뒤까지 다가온 목소리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잠깐의 정적 후 누군가 우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잠깐, 여기 누가 쓰러져 있습니다.”

“벨버른 백작 아닙니까?”

한데 이상하지. 이토록 미약한 불안감도 느껴지지 않을 줄이야.

“젠장, 백작의 팔이… 이 무슨….”

“시종! 시종을 불러!”

주위가 시끌벅적해졌다. 겁을 먹을 발레리아가 내 손을 붙잡은 채 바닥 위로 천천히 무너졌다. 빌힐름의 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리도 잔혹한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 누가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왜 나는 아닐까.’

나는 이 상황이 그저…. 참으로 기이했다. 예측하지 못한, 어쩌면 나를 죽음으로 몰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도리어 마음 한 구석에는 평온한 안정감이 찾아온 것이다. 마치 그동안 이런 상황을 바라왔던 것처럼.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두의 시선이 우리를 향해 있었다. 나를 붙잡는 발레리아의 악력이 강해졌다. 그 손을 천천히 밀어내며,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여기서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죠? 저와 제 하녀도 이제 막 이곳에 들어왔답니다. 전하와의 선약이 있었거든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냉랭하게 굳은 방의 분위기 또한 풀리지 않았다.

“물론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이러면 안 되는데,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다. 아아! 드디어, 길고 길었던 평화의 끝이 찾아온 것이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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