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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9. 발레리아 (10/24)

Episode 9. 발레리아

“아슈타르 산 허브 차. 페퍼민트로.”

시종의 말에 가장 어린 하녀가 몸을 일으켰다. 주근깨가 얼굴의 반을 뒤덮는, 다소 수더분한 인상의 하녀는 식사 준비로 소란스러운 하녀들 틈을 건너 옆 창고로 건너갔다. 이윽고 하녀가 준비해 온 티 세트는 황성에서도 특히 비비안느 황녀가 즐겨 마시는 황실 납품 최고급 허브 차였다. 황금빛 라벨이 장식된 양철 상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정도로 사치스러운 외관이었다.

“여기요.”

하녀는 티 세트를 시종에게 건네려 했다. 그러나 젊은 남 시종은 뒷짐 진 채 묵묵히 어린 하녀의 얼굴만 응시할 뿐이다.

“저어. 더 필요한 게 있을까요?”

하녀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몸을 낮출 즈음, 시종이 고개를 돌려 부산스러운 주방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와 발레리아의 눈이 마주친 건 시종의 눈이 넓은 주방을 한차례 훑고 난 뒤였다. 시종은 발레리아를 향해 턱짓했다.

“네가 그나마 괜찮군. 저것을 들고 나를 따라오도록.”

발레리아는 손질하던 마늘을 놓고 얼떨결에 티 세트를 받아 들었다. 그런 그녀를 응시하던 시종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 소리 했다.

“어느 분 앞으로 가는 줄 알고 그 꼴인 거냐? 멍청하기는. 몸가짐을 바로 해라.”

“당황해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곱게 말하면 될 것을 꼭 저렇게 사람의 신경을 건든다. 발레리아가 열심히 손을 닦고 품새를 정리할 동안 멀찍이 선 시종이 혀를 찼다.

“당황? 황성의 하녀가 할 법한 변명인가? 이곳은 무식한 것들에게 자비롭지 않다. 생각이 얕다면 입이라도 조심해라.”

싸늘하게 노려보던 시종이 이내 등을 돌렸다. 발레리아는 티 세트를 양손에 들고 시종의 뒤를 따랐다. 고용인들이 오가는 통로는 일층에서 크게 세 갈래로 나눠지는데, 시종의 걸음은 동쪽으로 향했다. 걷는 내내 발레리아는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아, 세상에. 동쪽은 빌힐름 전하의 구역이잖아.’

그렌페르크 제국의 황성은 대륙에서도 독보적인 크기를 자랑하며 그 외관 또한 비범하다. 상아를 덮어 태양에 새하얗게 빛나는 성벽은 그렌페르크 제국이 자랑하는 황실의 아름다움과 자존심이었으며 동시에 사치의 절정이었다.

그런 황성은 현재 알게 모르게 세 개의 세력으로 나뉜 상태였다. 하녀인 발레리아는 성내 소문으로만 들어왔지, 그 실체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황성 소속의 고용인이라고 해도 그들의 지위는 땅을 기었다. 발레리아처럼 별 볼 일 없는 하녀에게 귀족이라면 모를까, 황족을 마주할 기회는 몹시 적었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하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장부에 구멍이 나거나 귀족과 놀아난 고용인이 있을 시 즉흥적인 구경거리가 발생하곤 했으니까.

“답답하군. 걸음을 늦추지 말고 빨리 움직여라.”

“아, 예.”

창문 너머에 위치한 정원의 거대한 대리석 분수로 향했던 고개가 급히 정면으로 향한다.

‘빌힐름 전하라…. 나도 그분을 만나볼 수 있는 때가 올까?’

어쩌면, 하는 기대에 안 그래도 쿵쿵 뛰었던 심장이 더 가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3층의 가장 안쪽에 있는 응접실로, 그간 들었던 뒷이야기에 의하면 빌힐름 황자가 자신의 측근들과 자주 자리를 찾는 공간이었다. 문 앞에 멈춰선 발레리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바보 같은 발레리아. 더, 더 신경 쓰고 왔어야 했는데!’

머리 모양이 바보 같지는 않을까? 손톱 끝에 마늘 껍질이 끼어 있지는 않을까? 방금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던 걱정이 물밀 듯 밀려왔다. 발레리아는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입술을 깨물었다. 립스틱이 없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혈기를 돌게 만들어야 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나타난 방은 창문틀부터 발아래에 깔린 카펫까지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했다. 적어도 하녀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정말로 높은 사람을 만나러 왔구나, 하는 현실감에 발걸음이 꼬였다. 발레리아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겨우 진정시키며 테이블 위에 티 세트를 내려놓았다.

‘아.’

그러나 곧 엄청난 실망감이 그녀를 찾아왔다. 이곳에 빌힐름 황자는 없었다. 황자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기대한 자리에는 한눈에도 고귀한 출신으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백자기처럼 하얗고 맑은 피부에 가는 허리. 기다란 목, 여유로운 표정, 생기가 도는 발간 뺨에 기다란 속눈썹은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그녀가 아는 전형적인 귀족 여식 그 자체였기에 긴장감이 물밀 듯 빠져나갔다.

‘나는 정말 멍청한 게 맞나 봐.’

그 빌힐름 전하과 눈이 맞을 수 있을 거란 망상에 젖어 있었다니. 시종이 자신을 지목했다는 사실에 주제 파악도 못하고 들떴던 것 같다. 반반하게 생긴 얼굴 때문에 젊은 귀족들의 눈길도 몇 번 받아본 적이 있던 터라 더욱 그러했다.

‘반반해 봤자 하녀는 하녀지. 나라도 하얗고 어여쁜 이 귀족 아가씨가 더 탐나겠다.’

티 세트를 모두 내려놓고 뒷걸음질 치며 힐긋, 여자를 바라봤다. 눈에 띄는 외모의 여자였으나… 글쎄. 여자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탐스러운 적발과 선명한 녹안이 흰 피부를 돋보이게 했지만, 저 정도의 미인은 발레리아도 더러 본 적이 있었다. 책을 읽던 여자가 가볍게 손짓하자, 시종이 발레리아를 떠밀었다. 허브 차라도 우려내라는 의미일까 싶었다. 명령한 대로 차를 우려내면서, 발레리아는 여자에 대한 인상을 결론지었다.

‘별 볼 일 없는 귀족 아가씨. 이 정도면 모자람 없는 완벽한 설명이겠지.’

발레리아는 나름 자신이 상대방의 실체를 잘 꿰뚫는다고 자부했는데 눈앞의 여자는 특히나 더 판단하기가 쉬워 보였다. 눕듯이 앉아 있는 자세, 식기가 있음에도 맨손으로 간식을 집는 모습, 교양 없이 크게 벌어지는 입, 숨길 마음이 없어 보이는 하품까지. 보나마나 뻔했다. 약혼이 무산된 빌힐름 황자에게서 뭐 하나라도 얻어내기 위해 친부를 졸라 쫓아왔을 터였다. 한데 그분이 이토록 부족해 보이는 여자를 상대하실 리 있나?

‘우습기는. 우리 황자 전하를 업신여기는 일이나 마찬가지야.’

빌힐름 황자가 측근으로 둔 귀한 신분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눈에 총기가 돌았다. 그들은 몸가짐이 바르고 현숙하며 총명했다. 한데 눈앞의 여자는 총기는커녕 방탕하고 모자라 보이기만 하니, 빌힐름 전하께서 거들떠보실 리 없었다. 찻잔을 들어 향을 맡은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나가 봐.”

천천히 뒷걸음질 치려 했으나 시종이 발레리아의 등을 다시 한번 밀어냈다. 그는 눈짓으로 가만히 서 있을 것을 명하고 응접실을 나갔다. 발레리아는 저 홀로 여자 앞에 남겨진 상황에 의구심이 들기는 했으나, 두렵지는 않았다. 여자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을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빌힐름 전하에 대해 물어보겠지. 시녀들은 하나같이 저를 피하니까 이제는 하녀인 내게까지 손을 뻗은 거야. 그래봤자 내가 대답해 줄 건 별로 없지만.’

탁. 책을 접은 여자가 발레리아를 향해 화사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네 이름이 뭐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발레리아 몰타입니다.”

“가문이 있구나.”

“우드벨 백작님께서 제 친부의 숙부님 되십니다.”

“한데 황성에서 하녀 노릇을 하는 건가?”

“저를 받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심 좋은 귀족은 먼 인척도 가족처럼 대하지만, 대개는 아니다. 발레리아는 아버지의 노름으로 집이 파산한 후 우드벨에 의탁하려 했으나 하루 만에 쫓겨났다. 당시를 떠올리면 운 좋게 황성까지 와 하녀 일을 하는 생활에 불만을 가질 수 없었다. 곱게 자란 아가씨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암울한 시간들이었다. 여자는 발레리아의 사정을 캐물었고,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기에 있는 그대로 말했다. 가만히 듣던 여자가 발레리아를 위로했다.

“이런. 굉장히 안타까운 사연이네. 안 좋은 기억을 되살리게 해서 유감이야.”

“아닙니다.”

“내 이름은 아니?”

그 물음에 발레리아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황성에서 지내고 있는 귀족은 한둘이 아니었기에 모두를 알지는 못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저는 하녀라 귀족분들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합니다.”

이 정도면 나름 예의 바른 대처겠지. 한데 발레리아의 대답을 들은 여자가 응접실이 떠나가도록 대찬 웃음을 터트린 게 아닌가?

“귀족? 아하하하! 내가 귀족로 보이니? 그것 참 영광이야. 나는 제도 근처를 떠돌던 집시 출신이거든.”

예의이고 뭐고, 발레리아는 너무 놀라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고 말았다. 집시 출신이라니! 아무리 멍청한 티가 난다고 해도 그렇지, 그런 떠돌이에게선 느낄 수 없는 기품이 풍기는 여자가? 여자는 찻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이야기를 이었다.

“우연히 빌힐름 전하의 눈에 들어 여기까지 왔지. 물론 잠자리 친구는 아니야… 정신적으로 고단하던 시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고 할까? 이제는 버려진 인형 취급을 받고 있지만. 고귀한 핏줄을 지닌 사람들이 대개 그렇잖니. 신기한 것에 쉽게 흥미가 생기고, 쉽게 흥미가 지는 거야. 그러면 내 꼴이 나는 거고.”

길어지는 말을 듣고 있자니 집시 출신이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었다. 사용하는 단어들이 신랄하면서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너를 부른 건 따로 이유가 있어서야.”

그의 말을 들으니 잠시나마 들었던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녀를 통해 빌힐름 전하의 총애를 되찾을 생각일 터였다. 발레리아는 절대 경거망동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여자가 나긋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으음. 대단한 건 아니니 기대하지 마. 이곳에서 지낸 지… 이제 일주일인가?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거든. 다들 나를 없는 취급하며 상대해 주지도 않고. 그저 내게는 대화를 나눌 친구가 필요할 뿐인데.”

발레리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상하리만치 긴장감이 차올랐다.

“그래서 최근에는 하녀라도 데리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이왕 데리고 다닐 거면 예쁜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게 좋잖아? 내 체면에도 훨씬 도움 될 테고. 그래서 시종에게 가장 반반한 하녀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했지.”

“그 말씀은….”

여자가 눈을 얇게 뜨며 웃었다. 단 한 번의 미소였을 뿐인데, 발레리아는 어쩐지 남의 보석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다.

‘왜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무려 빌힐름 황자가 눈독들이던 여자지 않은가? 이 집시의 목소리와 태도, 표정에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건 마땅한 사실일 수 있었다. 그리 여기니 편견에 갇혀 있던 시선이 조금은 넓어진 듯했다. 여자에게서는 특별한 생기가 느껴졌다. 화사한 태양 같은 생기가 아닌, 진창에서 피는 독초 같은 생기였다. 황금을 들이키고 초콜릿을 피부에 두르는 귀족들에게선 보이지 않는 세상 밖의 생경한 바람 냄새가 났다. 그 때문일까? 가벼운 몇 마디에도 귀담아 듣게 된다. 여자가 발레리아에게 말했다.

“어때, 내 친구가 될 생각 있어?”

친구. 여자가 말하는 친구의 의미가 수평적인 관계는 아닐 터였다.

“내가 비록 귀족들에게 천대 받아도 전하의 천대는 받지 않아. 그분은 더 이상 나와 어울려 주지 않으시지만, 여전히 후원을 아끼지 않으시거든. 그래도 서로를 위로했던 기억이 꽤 좋게 남으셨나 봐. 나로서는 참 다행이지 않니?”

발레리아는 경거망동하지 않겠다는 직전의 다짐이 점차 희미해짐을 느꼈다.

“나도 이곳에 그리 오래 있지는 않을 거야. 길어 봤자 겨울을 넘지 않겠지.”

이제 막 겨울의 초입이니 그들의 관계도 사 개월이면 끝난다는 의미였다.

“설마, 발레리아. 여기서 평생 썩을 마음은 없을 거라고 봐.”

그 순간 발레리아는 느꼈다. 어쩌면, 이 빌어먹을 하류 인생의 종지부를 찍을 날이 도래할 수도 있다고. 원대한 꿈을 지닌 채 추락하는 하류들은 많다. 하지만 발레리아는 생각을 달리했다. 추락도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녀 인생에 이 여자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수 있었다. 천박한 집시 출신에 빌힐름 전하의 총애를 잃었어도 물질적인 후원이 여전하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이곳을 떠나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다른 하녀들이 똑같은 하루를 이 화려한 황성의 뒤뜰에서 보낼 동안, 이 기회를 붙잡고 여자를 잘 이용하기만 한다면….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 없었다. 발레리아는 여자 앞에 무릎 꿇었다.

“아가씨를 즐겁게 해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자의 눈동자에는 당혹도, 기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발레리아의 대답을 당연시하는 듯했다. 역시 이상한 일이었다. 더없이 가벼워 보이는 인물인데, 어째서인지 눈을 읽을 수 없다. 속이 훤히 보인다고 생각했던 게 바로 아까까지의 일이었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여자가 발레리아를 일으키고 부드럽게 껴안았다.

“내 제안을 받아 줘서 정말 고마워. 장담컨대 오늘은 황성에 온 이래 가장 즐거운 날일 거야.”

탐스러운 적발이 발레리아의 뺨을 건드렸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얌전히 여자의 품에 안겼다.

“내 이름은 수잔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발레리아.”

그날 발레리아의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것은, 수잔에게서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

그날부터 발레리아는 틈만 나면 수잔에게 불려갔다. 불려간 것으로 끝이 아니라 수면을 제외한 하루의 반나절 이상을 그녀의 옆에서 보냈다. 다른 하녀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걸레질을 하고 도마와 싸울 때 발레리아는 수잔의 옆에 앉아 아슈타르 산 페퍼민트 차를 음미했다. 수잔은 발레리아가 바라는 대로 물질적인 풍요가 충분했다. 하루는 그녀가 양철 상자에 둘러진 황금 라벨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자 수잔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게 좋니?”

다음 날, 시종이 발레리아의 방에 똑같은 브랜드의 차를 스무 상자 놓고 사라졌다. 그날 발레리아는 자신이 정말 다른 하녀들과 ‘달라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동료 고용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몹시 시기하거나….

“집시의 뒤나 닦아 주는 년.”

경멸하거나. 후자의 경우는 대개 황성의 시녀들이었다. 황족의 수발을 드는 고귀한 출신의 여자들은 한낱 하녀가 자신들 못지않게 호사를 누리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멍청하기도 하지. 황자의 이목도 끌지 못하는 철 지난 꽃에게 뭘 바라는 걸까나.”

“네 아가씨가 똑똑하기를 해, 매력적이기를 해? 얼굴 말곤 가진 게 없어서 그 꼴이 된 거야.”

누군가는 그녀에게 꽤 진심 어린 조언을 하기도 했다.

“하녀면 하녀답게 굴어라. 괜히 좋지 않은 꼴 보지 말고. 너처럼 굴다가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진 아이들이 한둘인 줄 아느냐.”

기세등등한 시녀들의 폭언은 수잔 앞이라고 조용해지지 않았다. 혹자는 둘이 지나가면 소리 높여 보란 듯이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수잔은 그들의 비웃음을 귓등으로 넘겼다. 얼마나 여상하던지, 처음에는 무시 받는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꼈던 발레리아도 이제는 무던하게 넘길 수 있게 될 정도였다.

“사람들은 모두 똑같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면 시기하고, 내 자리를 타인이 위협하면 경멸하지. 눈앞에서 날 조롱하는 자들? 그들에게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마렴, 발레리아. 자신의 속마음을 꽁꽁 숨긴 채 여우처럼 구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녀의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면 헛소리한다며 코웃음 쳤을 것이다. 그러나 수잔은 그녀가 확언했던 대로 차고 넘칠 만큼 부유했다. 발레리아는 그러한 사실이 몹시 의아했다. 수잔은 정말 빌힐름 전하의 총애를 잃은 게 맞나? 혹시 황자 전하의 약점이라도 쥐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없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수잔에 대한 인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수잔은 발레리아가 보아 온 여자 중 가장 묘한 여자였다. 습관처럼 짓고 있는 미소보다 창밖을 응시할 때의 서늘한 얼굴이 훨씬 더 어울렸다. 아양 떨 듯 높은 음성으로 대화를 나눌 때보다 늦은 밤이 되어야 들을 수 있는 차분하고 선명한 음색이 더 귀에 박혔다. 수잔이 발레리아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되어 줄 ‘그 일’을 시켰을 때의 목소리도 그러했다.

“지금부터 네게 떠오르는 태양의 제조법을 알려 줄 거야.”

“떠오르는 태양이요?”

발레리아의 되물음에 수잔이 짧게 웃었다.

“내가 즐겨 마시는 적포도주 제조법이야. 사실 제조법이라 표현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간단하고 편리하지.”

수잔이 발레리아 앞에서 와인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그 옆의 적색의 액체가 든 자그마한 유리병을 열어, 극미한 양을 잔 안에 떨어뜨렸다.

맛에 변화가 생길지 의문일 정도로 적은 양이었다.

“그 붉은 액체는 뭔가요?”

“피처럼 보이지?”

“네.”

“이건 아주 귀한 재료야. 이 재료가 떠오르는 태양의 제조법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지. 제조는 이것으로 끝이야.”

그리고 수잔은 찰랑이는 포도주, 떠오르는 태양을 창문 밖으로 쏟아 부었다. 그녀의 행동에 발레리아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차라리 저에게 주시지 그러셨어요? 어떤 맛일지 궁금했는데.”

“너는 절대 마셔서는 안 돼.”

빈 와인 잔 또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이 제조법을 아는 이 역시 너와 나 이외에 없어야만 하지. 알겠니? 그 누구에게도 이 유리병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뜻이야.”

발레리아는 영문도 모르는 채 수잔이 내민 유리병을 받아들었다. 분위기를 보아 중요한 물건인 듯해 일단 품 안쪽에 넣어 두었다. 이걸 내게 왜 주는 걸까? 잠시 머리를 굴리던 발레리아가 수잔에게 물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을까요?”

“아니.”

방긋 웃은 수잔이 전시장에서 와인 잔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적포도주를 채우며 말을 이었다.

“나서서 무언가 할 필요는 없어. 그저 누군가 네게 떠오르는 태양을 요구한다면, 그 요구를 들어 주면 된단다.”

그날 발레리아는 술에 진창 취한 채 잠들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야 했으나 잡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닌, 수잔의 시중을 들기 위함이었으므로 힘들지 않았다.

***

수잔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 건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였다.

“발레리아 몰타?”

남자의 부름에 발레리아는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평범한 시종이었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찾아온 시종은 황성에서 발에 차이는 그저 그런 시종이 아니었다. 무려 황제의 침실을 지키는 시종이었다.

“네, 제가 발레리아 몰타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폐하의 명이다. 떠오르는 태양을 진상해라.”

그날부터였다. 그날부터 발레리아는 매일같이 황제의 침실에 떠오르는 태양을 한 잔씩 진상했다. 처음 황제의 앞에 섰을 때, 발레리아는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황제 또한 발레리아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했다. 만인지상 황제에게 한낱 하녀가 눈에 밟힐 리 없었다. 그러나….

“너는 눈이 맑군.”

떠오르는 태양을 바친 지 사흘째 되는 날. 황제가 처음으로 그녀를 아는 체했다. 발레리아는 얼굴이 뜨거워져서 감사하다는 대답만 겨우 할 수 있었다. 눈이 맑다고?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황제에게서 그런 소리를 듣다니. 하루하루가 흐를수록 그들의 대화는 길어졌다. 어느 날부턴가는 황제의 정부가 하던 일을 발레리아가 대신 했다. 그녀는 황제가 떠오르는 태양을 음미할 동안 노인의 두 다리를 주물렀다. 황제의 육신에 손을 대는 것은 귀족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수잔은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 봐. 날마다 네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술을 바치는 청년이 있어. 사지가 멀쩡하고 얼굴도 꽤 준수한 청년 말이야. 네 머릿속에 그 청년은 과연 어떤 존재로 각인될까?”

발레리아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그녀의 말은 즉, 이 모든 상황이 수잔의 계획이었다는 뜻이었으므로.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황제의 입에서 발레리아가 거론되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나흘 무렵이 되었을 땐 수잔보다 황제의 곁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아질 정도였다.

발레리아는 천국의 외나무다리에서 춤추는 기분을 만끽했다. 다른 이도 아닌 무려 황제가 그녀를 옆에 두려 하고 있지 않은가? 며칠이면 사라질 마음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발레리아 자신만 잘한다면 고작 며칠로 끝날 총애가 아닐 수 있었다. 특히 잠자리에서 황제의 마음에 든다면 어떻게든….

“그 술을 마신 황제와 첫 번째로 몸을 섞는 건 무조건 너여야만 해.”

발레리아는 수잔의 그 짧은 한마디를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을 내지었다. 아마, 수잔에게서 받은 유리병의 액체에는 옳지 못한 성분이 함유되어 있을 것이다. 아마, 수잔이 자신을 부른 것은 이 자리를 선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짐했다. 수잔의 줄을 놓으면 안 된다고.

“황제 폐하를 어떻게 하실 작정이신가요?”

쉬이 물을 질문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발레리아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수잔은 대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녀를 이용하는 걸까? 수잔은 대수롭지 않은 낯으로 대답했다.

“뼛속까지 발라 먹은 후에 조용히 묻어야지.”

처음에는 지독한 농담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아! 물론 농담이야, 발레리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렴. 그분을 내가 감히 어찌하겠어?”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수잔이 덧붙인 말을 들으며, 발레리아는 생각했다. 그녀라면….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수잔이라면, 가볍게 던진 말이 아닐 수도 있다고. 그때 발레리아는 자신의 다짐을 내버렸다. 그녀를 이 자리까지 올려준 수잔에게는 늘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마음은 생존과 별개의 일이니까. 발레리아는 황제를 해할, 혹은 그 정도 수준으로 위험한 행동을 불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수잔 아가씨를 선택했을 때와 지금 상황은 다르지.’

이제 그녀의 왼손에는 황제도 쥐어져 있지 않은가? 그러나 발레리아는 태생이 모질지 못하기도 하였고, 자신을 선택해 준 수잔의 손을 바로 내칠 수도 없었다. 황제와 수잔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유지한 채로 며칠이 흘렀던가. 결국은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찾아오고 말았다.

“곱게 밝히거라. 누구의 사주느냐.”

겨울비가 우수수 떨어지던 날의 저녁. 황제의 침실에는 처음 보는 낯의 기사와 측근들이 발레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황제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살벌했다. 발레리아는 황제의 측근이 손에 쥐고 있는 떠오르는 태양을 떨리는 시선으로 훔쳐봤다. 두려움으로 입이 열리지 않았다. 황제가 말했다.

“가문의 수장이 될 후계자들은 날 때부터 독에 대한 면역을 기르지. 무지한 너를 위해 말해 주자면… 황실은 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독 연구가들의 요람이다. 그들을 옆에 두고 자라온 짐 역시 마찬가지야.”

말을 마친 황제가 이제껏 보아 온 그 어느 때보다 상냥한 미소를 만면에 보였다.

“발레리아. 짐은 널 믿고 싶다. 너는 짐이 보아 온 아이 중 가장 순수하고 어여쁜 아이란다. 네가 자진해서 날 해하려 하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바른대로 말하거라.”

황제의 차분한 목소리와 표정이 발레리아에게 안도감을 선물했다. 지금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지 않은가. 신임을 얻어 황제의 정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 바닥에 엎드린 발레리아가 쥐어짜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수잔….”

“더 크게 말하라!”

측근의 호통에 발레리아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품 안에 항시 품고 다녔던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황제에게 내밀었다.

“수잔이라는, 황성에 거주하는 집시가 있습니다. 그 여자가 제게 이것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도, 독이라는 소리는 처음 듣습니다. 그저 술을 제조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가까운 자리에 선 남자가 유리병을 빼앗아 액체를 확인했다. 냄새와 형태를 유심히 살피던 남자가 모호한 표정으로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혈액 같습니다, 폐하.”

혈액이라니? 남자의 판단을 납득할 수 없었던 발레리아가 급히 끼어들었다.

“혈액이 아닙니다! 그 여자가 제게…!”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지만, 발레리아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내게 무어라고 말했지? 단 한 번이라도 저 액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던가? 발레리아가 굳어 있을 동안 황제의 관심은 식어 갔고, 곧 그의 시선이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경. 성분을 알아내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겠는가?”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측근들이 자리를 떠나고, 발레리아는 황제의 침실 안쪽에 자리한 비밀스러운 공간에 갇혀 이틀을 보내야 했다. 이틀 동안 황제는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발레리아는 이대로라면 황제의 총애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뜬 눈으로 이틀을 지냈다.

‘내 마음만은 진심이라고 강조해야 해. 폐하를 한 번이라도 더 뵙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잖아? 그러니 거짓말은 절대 아니지….’

제아무리 냉철한 황제라도, 짧게나마 정을 나눴던 여자를 그냥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는 남아 있다. 그래, 대처만 잘할 수 있다면.

***

하지만 다가온 이튿날 밤. 유리병 속 액체에 관하여 논하는 남자의 주장에 애써 붙잡았던 평정심이 무너졌다.

“순수한 혈액입니다. 그 외에는 어떤 불순물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머릿속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숨구멍을 틀어막는 기분이었다. 발레리아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 그럴 리 없습니다, 폐하! 저는 날마다 폐하께 바치는 술잔에 저 액체를 더했습니다. 그 여자가 직접 저에게 말했어요! 똑똑히 들었단 말입니다. 폐하를 뼛속까지 발라 먹은 후 조용히 묻어 버리겠다고!”

황제에게서는 그 어떤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럴수록 발레리아의 불안감만 커질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발레리아.”

“네, 네. 폐하… 저는 절대 폐하를….”

“그리도 목숨이 귀중하다면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짐을 만족스럽게 하는 답을 내놓기만 하면 돼.”

“폐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녀와 마주하는 황제의 눈빛이 예전 같지는 않았으나, 발레리아는 그가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다. 이윽고 황제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발레리아에게 물었다.

“그 수잔이라는 여자가 너를 짐에게 보냄으로써 무엇을 얻었느냐?”

“…그건.”

없었다. 놀랍도록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발레리아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수잔은 빌힐름 황자의 손님이었고, 그것이 다였다. 그녀의 삶은 황성에서 호화로운 음식과 아름다운 풍경에 둘러싸여 사치를 누리는 게 전부였다. 그런 수잔에게 황제를 해할 이유가 과연 존재할까? 제대로 답하지 못하자, 황제가 시종장에게 명을 내렸다.

“수잔이라는 집시를 데려와라.”

명을 받든 시종장이 다시 돌아온 건 그로부터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폐하.”

놀랍게도 수잔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곁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 것처럼 황홀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가 함께였다.

“네가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느냐, 비비안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비비안느는 애교 섞인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일이랄 것까지 있나요? 친우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폐하께서 찾으신다고 하니 제가 직접 소개하기 위해 따라왔지요.”

“너는 어릴 때부터 마음이 곱고 포용력이 넓은 아이였지… 이제는 집시와 시간도 갖는 모양이로구나.”

“폐하. 부디 그런 불순한 표현으로 수잔을 모욕하지 말아 주세요. 제 친우가 떠돌아다닌 시간이 길기는 했으나, 엄연히 존중받을 만한 가문의 핏줄입니다.”

“호오. 그것 참 재밌는 이야기로군. 존중 받을 만한 가문 태생의 집시라… 그런 경우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대답과 달리 황제는 그리 흥미가 동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조용히 선 수잔을 향해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집시에게 성이 있을 리가. 그러나 수잔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발레리아에게 무척이나 낯선 이름이었다.

“아그레인 캐롤드입니다.”

실내에 이상하리만치 긴 정적이 돌았다. 그 기이한 분위기를 눈치챈 발레리아가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을 낮추었다.

“아. 이런 얼굴들이로군요.”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탓에, 자그마한 수잔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이런 얼굴들이라니, 무슨 의미일까.

“그렇군.”

황제의 대답은 짧은 감탄사와 다름없었다. 힐끔 살핀 황제는 무척이나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깊게 골몰하는 눈동자. 딱딱하게 굳은 채로 눈앞의 상황을 마땅히 받아들이는 표정.

“그래, 그랬어. 그랬지. 그런 일도 있었어. 빌힐름이 그대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으로 알고 있다. 맞느냐?”

수잔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하녀로 일하고 있던 저를 누이라 칭하며 거두었죠. 빌힐름 전하는 이곳이 저의 집이라 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동안은 어디에서 지냈지?”

“트리비아체와 잉고르드입니다.”

두 번째로 긴 침묵이 맴돌았다. 그들의 대화를 멍청하게 엿듣고 있던 발레리아가 입술을 깨물 정도로 불편하고 긴 침묵이었다. 얼음장 같은 고요함을 깨뜨린 건, 이번에도 역시 황제였다. 그의 목소리는 읽어내기 힘든 모호한 감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짐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예. 저는 2년 전에 모든 기억을 잃었습니다.”

“저런.”

짧게 혀를 차는 황제에게선 일말의 안타까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놀란 것은 확실해 보였다.

“짐이 그대를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알겠나?”

“저의 개인적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썩 좋은 이유에서는 아닐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오래 되지 않았어. 저녁 식사 자리에서였지. 그대가 내게 말을 걸었던 장면이 떠오르는군. 기억하는가?”

“물론입니다. 폐하께서는 떠오르는 태양을 마음에 들어 하셨죠. 당시 저는 하녀인 발레리아 몰타가 제조하고 있는 술로, 마음에 드신다면 그 아이를 부르라 말씀드렸습니다.”

뒤쪽에 앉아 한참 딴짓을 하던 비비안느 황녀가 명랑한 목소리로 함께 끼어들었다.

“아아, 그거 굉장히 낭만적인 이름이네요. 떠오르는 태양이라니. 어떤 맛일지 궁금한걸요.”

“궁금해 할 필요 없다, 비비안느. 네 친우가 짐에게 추천한 술은 몹시 고약한 놈이었으니까.”

단호한 부정에 비비안느 황녀가 동그란 이마를 사랑스럽게 구겼다.

“고약하다니요. 폐하께요? 흐음….”

덜컥 겁이 난 발레리아가 목청이 찢어져라 외쳤다.

“제 증언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습니다, 폐하!”

“그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발레리아. 짐이 원하는 답은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뿐이다.”

발레리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강압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귀족들 사이에서 그녀는 다시금 깨달았다. 자신의 위치가 고작 하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이틀간 방 안에 꼼짝 않고 갇혀 고민했으나, 당장 닥친 위기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곧… 곧 폐하를 위협하게 될 테니 그전에 미리….”

사위는 고요했으나, 그 누구도 발레리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발레리아는 다시 한번 더 절망했다.

“분명 제게 폐하를 해한다고….”

“누가 짐을 해한다는 거냐. 확실하게 말해라.”

눈동자만 굴리던 발레리아가 팔을 뻗어 수잔을 가리켰다. 모두의 고개가 수잔에게로 향했고, 발레리아는 잠시나마 숨통을 틀 수 있었다. 하지만 수잔의 반응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황당하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너무나 갑작스러운 흐름인데요. 폐하, 괜찮다면 제가 발레리아와 대화해도 되겠습니까?”

제국의 주인인 황제 앞임에도 수잔의 기세는 당당했다. 그렇다고 거만한 어투나 자세는 아니었던 터라 누구도 그녀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황제가 옅게 고개를 끄덕이자 수잔이 발레리아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안 그래도 새하얗게 어지럽던 머릿속이 더 황망해지는 기분이었다. 발레리아는 몰려오는 죄책감과 두려움에 그녀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내가 왜 폐하를 해할 거라 생각하는 거니?”

이번에도 멍청하게 대응한다면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진실만 말하고 있어. 불리한 건 내가 아니라 저쪽이야.’

발레리아가 대답했다.

“아가씨께서는 저에게 붉은 액체가 든 유리병을 주셨던 적이 있습니다.”

“아아, 그래. 분명 그랬던 적이 있지.”

긍정하는 대답에 발레리아가 용기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 액체를 술과 섞어 폐하께 대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에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던 수잔이 말했다.

“무언가 잘못 알고 있구나, 발레리아.”

“네?”

발레리아가 바닥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른 창문에서 쏟아지는 빛이 그녀의 머리 위로 수잔의 그림자가 지도록 했다. 그늘진 수잔의 얼굴에는 평소 보였던 명랑한 웃음이나 가벼운 시선이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언제 그 술을 폐하께 대령하라고 했지? 멍청한 짓을 했구나. 아아, 이제야 네가 왜 그 자리에서 그 꼴이 되었는지 알겠어.”

수잔이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저으며 눈을 감았다. 발레리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녀가 정말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나? 몇 주나 흐른 일인데 선명하게 기억날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리 없어. 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황제에게 술을 바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발레리아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폐하 앞에서 감히 거짓을 입에 담으시다니요, 아가씨! 분명 그날 아가씨께서….”

“쉿. 발레리아, 진정해.”

각막이 베일 정도로 서늘한 수잔의 시선에, 발레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수잔이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아무래도 발레리아가 큰 착각이라도 한 모양입니다. 제가 이 아이에게 유리병을 준 것은 맞습니다. 이슬라의 환청이 들어 있는 유리병을요.”

“뭐라. 이슬라의 환청?”

황제가 미심쩍은 어조로 수잔을 훑었다.

“그 값비싼 약제를 그대가 어찌 지니고 있는 것이냐.”

이슬라의 환청이라면 황성에서 일하게 된 이후 간간이 소문을 들은 적 있었다. 동대륙과의 무역 길을 뚫은 거대 상단과 귀족 가문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던 최고급 약제, 아니 마약이지 않은가. 수잔의 대답은 간결했다.

“비비안느 전하께서 구해 주셨습니다. 다름 아닌 저를 위해서요.”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비비안느 황녀에게로 향했다. 황녀는 꿈결 같은 화사한 금발을 늘어뜨리며 우아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비비안느 황녀의 나른하면서도 교태 어린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으응. 그랬던 적이 있지. 제 사랑스러운 친우의 말이 맞습니다, 전하. 아그레인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야 손쉬운 일이니까요.”

“네가 무엇을 하든 짐이 크게 상관하지 않는단 걸 알 거다, 비비안느.”

“물론이지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폐하.”

“그러나 빌힐름과 함께 제국의 기둥이며 짐의 자부심인 네가 이슬라의 환청에 절어 산다는 소식은 그리 기쁜 소식이 못되는구나.”

비비안느 황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굽히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네에? 자부심? 세상에나, 폐하. 저를 그리 귀한 딸로 여겨 주시다니….”

발레리아는 기쁨에 젖어 잦아드는 비비안느 황녀의 목소리에서 그녀가 얼마나 감격스러워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발레리아가 아름다운 비비안느 황녀의 얼굴에서 눈을 못 떼는 동안, 황녀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여흥거리로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두 아그레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였으니까요.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곧 황실 사냥 대회가 열리지 않습니까. 사랑스러운 아그레인이 별 볼 일 없는 사냥 실력을 내세워 성과를 내고 싶다하더이다. 그것도 폐하께 바칠 성과를요! 얼마나 고운 마음씨인지.”

이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비비안느 황녀가 수잔을 찾아온 적은 있었다. 하지만 황녀는 황성을 방문한 모든 손님들에게 친절했으며 관심을 기울이려 노력하는 여자였다. 그 누구도 둘의 친분이 두터워서라 여기지 않았다. 황녀가 수잔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진 건 고작 두 번에 불과했다. 반나절 이상을 수잔과 붙어 있는 발레리아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다면, 내가 폐하께 불려오기 시작한 이후에는?’

황제의 시선이 시종장에게로 향했다. 시종장, 카이로 백작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근래 두 분이서 자주 사냥을 즐기셨습니다.”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던 불안감이 점차 커져가기 시작한다.

‘아니야, 진실만 말하고 있는 건 나야.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 있어.’

수잔이 방긋 웃으며 시종장의 말을 받았다.

“한데 제가 피를 못 보는 성정인 터라…. 전하와 함께 사냥을 즐긴 직후에는 늘 밤을 새거나 잠에 들더라도 악몽을 꿨습니다. 전하께서 제게 이슬라의 환청을 선물해 주신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황제의 곁에서 경청하던 측근이 턱을 쓸며 덧붙였다.

“애초 이슬라의 환청이 약제로 사용되었던 이유는 극소량을 투입하면 긴장이 풀리면서 쉬이 잠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값이 천정부지라 잘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요.”

무언가 이상하다.

“또 이슬라의 환청은 혈액과 특별한 반응 없이 잘 섞이기 때문에 둘을 섞어 효능을 죽이고 양을 늘리기도 합니다. 굳이 둘을 섞는 이유는 이슬라의 환청이 지닌 특유의 고약한 향이 혈액과 만나면 감쪽같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혼합액이 오래 되면 이슬라의 환청은 모두 산화되고 혈액만 남습니다. 유리병 안에 순수한 혈액만 남아 있던 것이 그 이유에서라면 말이 됩니다.”

발레리아가 원했던 건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거지? 황제가 수잔을 불렀을 때부터? 불려온 수잔이 비비안느 황녀를 대동했을 때부터? 아니면 한참 거슬러 올라가 그녀가 수잔의 제안을 받아 들였을 때? 수잔이 말했다.

“제가 발레리아에게 약을 믿고 맡겼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한데 그 약이 폐하께 올라가고 있어서였다니. 어쩐지 최근 며칠은 계속 악몽을 꾼다고 했지요. 이토록 황당한 일이 일어날 줄은….”

짧은 정적이 흘렀다. 발레리아는 수잔의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의 하얀 뺨을 올려다봤다. 그늘 아래에 차분하게 가라앉은 녹안이 발레리아를 응시한다. 표정도, 시선도 모두 생기 없는 인형처럼 느껴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왜 이 여자를 모자라고 철없는 여자로 여겼을까? 그런 의문이 들기 시작하자 문득 등 뒤로 소름이 일었다. 그녀는 수잔을 이길 수 없었다. 비비안느 황녀가 그녀를 돕는다면 더더욱.

“또 할 말이 있느냐, 발레리아.”

하지만 발레리아는 살고 싶었다. 황제의 물음에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폐하를… 해할 거란 농은 왜 하셨어요?”

“흐음.”

수잔이 눈을 얇게 뜨고 말을 아끼는 사이, 뒤쪽에서 꺄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아, 재밌어라! 역시 네 하녀는 황성에 있을 만한 아이가 아니야, 아그레인. 내가 그간 그렇게 말렸잖니. 대체 저 하녀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든 건지 모르겠네.”

실컷 웃은 비비안느 황녀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며칠 전에 아그레인와 차를 마시면서 그 이야기를 했었어요, 폐하. 기억나시죠? 작년에 늑대 몰이를 하다가 미쳐 날뛰던 사냥개요.”

“키볼트 말이로군.”

“네에. 폐하를 덮치려 했지만, 자비로운 폐하께선 그 미친개를 가엾게 여겨 죽이지 않으셨죠. 올해도 그 아이를 풀어놓으실지 궁금해서요. 아그레인과 웃으며 떠들었죠, 올해도 그 개새끼가 똑같은 짓거릴 한다면 쏴 버리겠다고요! 중간은 홀라당 빼먹은 주제에 저 혼자 아주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네요.”

가녀린 목소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자극적이고 거친 어투였다.

“저는 아그레인과의 시간을 방해받는 걸 싫어해요. 아그레인의 하녀도 방 밖에 서 있도록 했었죠. 뭐어… 이야기가 자세히 들리지 않았다면 그런 착각을 할 법도 하네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발레리아.”

수잔의 부름에 발레리아가 주먹을 꽈악 쥐었다.

“폐하께 사죄하렴.”

욱한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때로는 질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러했다. 그러나 황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런 마음은 순식간에 증발하고 말았다. 남자의 관심은 이미 발레리아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아니, 멀어진 것으로 모자라 무관심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 것도 아닌데 가슴이 미어졌다. 발레리아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저의 무지와… 멍청함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황제의 시선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얇게 뜬 눈이 수잔과 비비안느 황녀 사이를 오갔다. 옅은 의문이 섞인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네가 이토록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처음이구나, 비비안느.”

비비안느 황녀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그레인은 제 운명의 반쪽이에요. 저는 남은 일평생을 아그레인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우리는 분명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명하며 사랑스러운 단짝이 될 거예요. 정말로요.”

“빌힐름이 데려온 아이가 아니더냐.”

“빌힐름은 믿음직스럽지 않아요.”

방 안에 눈에 띌 정도로 확연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비비안느는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톱을 매만졌다.

“전 빌힐름과 달라요. 가진 것을 죽이는 한이 있어도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그러니 폐하도 저의 사랑스러운 아그레인을 귀엽게 봐주세요.”

그리고 친부에게 부탁이라도 청하듯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황제의 반응은 이를 데 없이 간결했다.

“재밌겠구나.”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발레리아는 황제로부터 버려졌다.

***

쾅.

문이 닫혔다. 발레리아는 무척이나 익숙한, 이제는 어쩌면 자신의 방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수잔의 방을 천천히 훑었다. 어쩌면 이 풍경이 그녀가 보는 마지막 장면일 수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수잔의 입장에서 발레리아는 배신자나 다름없을 테니, 그녀의 미래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깊게 숨을 들이쉰 수잔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

“읏!”

발레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돌아간 뺨이 홧홧했다.

“어땠니?”

억센 손길과 달리 수잔의 음성은 온화했다.

“높은 곳에 올라서니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던? 평생 모르고 살았던 풍경과 세상,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발아래에 둔 황홀함까지. 네가 폐하 곁에서 느껴온 것들 말이야.”

목이 콱 막히는 기분에 발레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 광경은 사람의 욕심과 열정을 끓어오르게 해. 더 많은 세상을 보고 싶게 하고 느끼고 싶게 하지. 나는 그런 욕심과 열정을 지닌 사람이 참 좋더라. 하지만 멍청하고 무지한 건 최악이야.”

“죄송, 죄송합….”

“걱정하지 마, 발레리아. 폐하는 더 이상 너 따윈 신경 쓰지도 않으시겠지만, 자비로운 나는 아니란다.”

무슨 의미일까. 발레리아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목구멍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숨을 멈추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수잔의 시선은 목소리만큼이나 따스했다. 다소 음울해 보이는 낯만 빼면 이전까지의 일이 모두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 계속 더 높은 곳을 갈망하도록 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거야. 내 비위를 넘지 않는 선에서 날 이용해도 좋아. 대신 이것만은 반드시 기억해.”

고개를 길게 뺀 수잔이 발레리아에게 속삭였다.

“네가 오늘처럼 눈치 있게만 군다면… 우린 더 많은 것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아아. 살았다! 살았어, 나는 죽지 않아. 수잔이 다시 발레리아를 거두었다. 그 속내는 알 수 없었지만, 발레리아에게는 그저 살아갈 수 있다는 기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또한 그녀는 확신했다. 이곳에 그녀가 아는 수잔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네. 명심하겠습니다, 아가씨.”

낯선 얼굴을 한 이 여자의 이름은…. 그래, 아그레인 캐롤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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