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8. 아그레인 (9/24)

Episode 8. 아그레인

해가 지고 자정에 가까워지면서 저택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나는 침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텅 빈 방에 멍하니 앉아 거칠게 낙하하는 빗물을 감상했다. 벽난로에 불을 피워 놓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앞으로 어떡해야 할까.

당장 내일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리냐의 말이 맞다면 지금쯤 빌힐름이 리히튼을 독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화의 끝은 무엇으로 결론이 날까? 장담컨대 아즈마리아는 윌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리히튼은 그녀의 의사를 존중할 것인가? 혼인 자체가 나의 의사를 따른 것이라 표현했지만… 글쎄. 리히튼의 말을 신뢰하는 것만큼 멍청한 행위는 없을 터였다.

그때, 지척에서 불붙는 소리가 났다.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붉게 일렁이는 벽난로 앞에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위층의 소음도 구분해내는 내가 바로 앞의 인기척도 못 알아채다니. 그림자의 주인이 소파에 몸을 파묻고 내게 시선을 틀었다. 빌힐름이었다.

“이곳은 마치 바닷속처럼 습하군요.”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빌힐름에게선 리히튼과 같은 안광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온전히 어둠에 녹아들어 일부처럼 느껴졌다.

“익숙한 곳도 아닐 텐데 저를 잘 찾아내셨네요.”

“습관은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이런 면은 여전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면?”

빌힐름이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두렵거나 무섭지 않았다.

“하늘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벽난로 앞에 앉아 그 운치를 즐기는 일 말입니다.”

그런가. 하지만 이곳은 응접실도 아닌 고용인들의 구석진 공간일 뿐인데. 곰곰이 돌이켜 보니 그의 주장은 매우 타당했다. 비가 내릴 때마다 나는 늘 벽난로 앞에 앉아 창 너머를 응시하곤 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리히튼도 빌힐름과 같은 생각을 했었을까?

“당신은 나에 대해 정말로 잘 아네요.”

대답이 들려오는 대신에 빌힐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딱딱해졌다. 하얗고 고운 손톱 끝이 내 턱에 닿았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얼굴을 잡아 당겼다. 누추한 공간에 오로지 빌힐름의 존재감만이 선명했다.

“누가 이랬습니까?”

고개를 비틀었지만 악력이 강해지는 걸 봐선 놓아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말하면요?”

“무언가 바뀌겠지.”

문득 궁금해졌다. 빌힐름도 아즈마리아가 아그레인의 기억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아즈마리아 윌?”

얼굴을 가까이 한 빌힐름이 내게 물었다.

“그녀입니까?”

“어떻게 그리도 잘 아시는 걸까요?”

“맞군.”

빌힐름이 부어오르지 않은 내 반대쪽 뺨을 천천히 쓸어 내렸다. 그리고 오랜 기억을 되짚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즈마리아는 몹시 사랑스러운 아이였습니다. 여리고 순수하며, 아랫것들의 사정도 깊게 헤아려 주는 착한 아이였지요. …마치 나의 소중한 여동생처럼.”

비비안느. 빌힐름의 입에서 언급되는 존재에 숨이 멈추었고, 곧이어 지독한 현실감이 나를 덮쳤다. 턱을 비틀어 그에게서 급히 몸을 떼었다. 빌힐름의 등 뒤로 보이는 새까만 어둠이 나를 삼키기라도 할 듯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돌연, 홀연히 내 손을 떠나더군요.”

빌힐름이 텅 빈 자신의 손끝을 무덤덤한 눈길로 내려다봤다. 꿈처럼 느껴졌던 호수 바닥에서 현실이라는 뭍으로 기어 올라온 기분이었다. 나는 떨리기 시작하는 손끝을 꽈악 잡아 눌렀다.

“마치 무언가에 지독하게 겁먹은 것처럼. 수잔 양은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하녀에 불과한 제가 감히 무엇을 알겠어요.”

“…그들은 마치 작당 모의라도 한 듯 모두가 같은 패턴을 보입니다. 나와 잉고르드 공작에 대해 무엇이든 아는 양 행세하며, 이해할 수 없는 자신만의 감정에 푹 빠져 있고, 나를 괴물 대하듯 하더군요. 하루아침 만에 바뀐 태도가 얼마나 날 마음 아프게 하던지.”

그들. 빌힐름이 말하는 ‘그들’이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나를 포함한 『태양이 흐르는 강』에 들어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러나 나는 돌연 머리를 얻어맞은 양 말을 잃고 말았다. 내 귀에는 ‘그들’이 마치 ‘아그레인의 기억을 지닌 그들’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수잔 양은 모를 겁니다. 그들이 내게 아주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빌힐름의 눈이 그리운 꿈이라도 꾸듯 편안해졌다. 나는 가까스로 입술을 떼었다.

“당신의 말은, 아즈마리아 윌 아가씨가 ‘그들’이기 때문에 제 뺨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건가요?”

빌힐름은 싱긋 웃을 뿐,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그레인의 기억을 가진 이가 나와 아즈마리아로 끝이 아니라면? 내가 생각한,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네요.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요? 당신을 괴물 취급하는 것으로 모자라 내 뺨을 이렇게 만들다니.”

“이제와 누구인지 알아서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 때문에 가슴이 아픈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대로 목구멍으로 심장을 게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나의 표정은 과연 어떨까. 빌힐름처럼 흐르는 강을 내다보듯 평화로울까? 아니면 굉장한 혼란에 물들어 있을까? 그도 아니면 극도의 공포로?

“세상에 소용없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빌힐름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죽은 자가 과연 어떤 소용이 있을까요?”

그때, 나는 아마 참을 수 없을 만큼 속이 안 좋았던 것 같다. 이러다가 정말 그의 앞에서 심장을 게워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나는 힘 빠진 두 다리로 중심을 겨우 잡고 일어섰다. 눈알을 찔러오는 두통에 이마를 부여잡고 말했다.

“말씀 중에 죄송해요. 두통이 심해서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이런, 제가 붙잡고 있었군요.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빌힐름의 앞을 지나치기 무섭게 그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등 뒤로 그의 몸이 닿자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재차 강조했다.

“정말, 괜찮아요.”

“내 사촌 누이가 혹여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되어서 그럽니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못했다. 빌힐름은 기어코 나를 쫓아와 침실의 문 앞까지 도달했다. 문손잡이를 당기기 직전, 짧게 입을 열었다.

“하나만 여쭈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잉고르드에는 왜 오셨어요?”

빌힐름이 가만히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등불에 비춰지는 하얀 얼굴이 이보다 즐거울 수 없다는 듯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수잔, 당신을 구해내겠다고 했던 말… 벌써 잊은 건 아닐 테죠.”

그는 익숙하다는 듯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돌아갔다. 나는 문을 닫고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이마를 소매로 미친 듯이 닦아냈다. 빌힐름이 날 구한다고? 구렁텅이에서 심연으로 끌고 내려가겠다는 뜻일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웠다.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절대로 없을 거야.

***

불안한 기운을 직감한 때는 다음날 해가 진 직후였다.

“각하께서 부르신다.”

지겹도록 들어온 베르크네의 그 한마디가,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불길하게 다가왔다. 나는 대답 없이 베르크네의 뒤를 따랐다. 저택의 공기가 한겨울 서리처럼 차가웠다.

“안에는 윌 백작님께서도 계시니 말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말실수할 거리도 없을 텐데. 그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고개를 주억이자,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내부에는 익숙한 탄내가 났다. 낯선 중년의 귀족이 걸치고 있는 담뱃대에서 나는 냄새였다. 윌 백작. 그리고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리히튼과 아즈마리아. 그 뒤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킨. 문이 닫힌 후, 집무실 안의 일원은 나와 베르크네를 합쳐 여섯으로 늘었다. 이 자리에 빌힐름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적어도 숨통은 트이니까.

“홍차를 가져와. 아주 뜨거운 물로.”

처음에는 단순히 일을 시키기 위해 불렀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윌 백작의 명령에 집무실을 나간 쪽은 내가 아닌 베르크네였다. 그가 문을 닫고 사라지자 나 홀로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윌 백작은 내가 선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래서 각하의 의사 결정을 도울 자는 언제 오는 건지 궁금합니다. 그자를 만나려면 또 한나절은 기다려야 됩니까?”

“수잔.”

그때, 리히튼이 갑작스레 내 이름을 불렀다.

“이리로.”

그의 옆으로 다가갈 동안 아즈마리아의 시선이 나를 뒤따랐다. 이전처럼 꾸며진 친절과 신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랫것을 낮추어보는 교만함과 숨겨지지 않는 불안감이 공존하는 눈이었다. 그런 아즈마리아의 양손에는 새하얀 레이스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수잔.”

리히튼의 시선이 나의 부어오른 뺨에 아주 오랜 시간 머물렀다. 아즈마리아의 행태임을 고발할까 싶었지만, 제대로 된 증거도 없는 상태인 터라 가만히 입을 닫았다.

“네.”

“내가 널 왜 불렀는지 알겠나?”

나는 얌전히 양손을 모으고 서서 그의 물음에 담긴 의미를 되새겼다. 정확히는 윌 백작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뱉었던 말을.

“제가 각하의 의사 결정을 도울 수 있어서인가요?”

“정확해.”

윌 백작이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각하. 절 농락하시는 겁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모르겠다니요? 고작 하녀에 불과한 여자가 이 논의에 참여한다는데 그것이 어찌 저를 농락하는 행위가 아닐 수 있습니까?”

“농락이라니, 윌 백작.”

리히튼이 느릿하게 미소 지었다. 조금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수십 겹의 피로와 나른함으로만 점철된 미소였다. 돌연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로 비가 내린 지 며칠째지?’

그날의 기억이 내 숨을 옥죄었다. 리히튼의 저 얼굴은 사람을 죽이는 얼굴이었다.

“아즈마리아 양께서는 내가 어떤 뜻으로 하는 말인지 매우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리히튼의 말에 아즈마리아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각하. 제가 무지하여 도통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그대가 내게 그 제안이란 것을 부탁하러 왔을 때 말입니다.”

아즈마리아의 말간 얼굴이 석고상이라도 된 양 급속도로 생기를 잃었다.

“그때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이였지요. 기억합니까?”

“그건… 이미 지나간 이야기 아닌가요?”

“아즈마리아,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게냐?”

격해지기 시작하는 분위기 속에서 리히튼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정하도록 해, 윌 백작. 지금부터 내 하녀가 백작의 딸을 윌로 돌려보낼지 말지 결정할 테니까.”

윌 백작의 고개가 나를 향해 돌려졌다. 예민한 성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주름진 얼굴에 갖가지 감정이 만연했다. 분노, 수치, 격정….

“이러실 순 없습니다, 각하! 하녀, 고작 하녀라니요!”

내가 기억하는 윌 백작은 몹시 깐깐할 뿐,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하녀에 불과한 나를 철천지원수인 양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우매한 부녀라 한들, 어찌 저희를 우롱하려 하십니까? 한낱 계집애가 알기는 무얼 알겠습니까. 저들이 주워듣는 소문은 실체도 없는 자극적인 소문일뿐더러….”

“언성을 높이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데.”

나직한 경고에 윌 백작이 입을 닫고 숨을 골랐다.

“나는 지금 몹시 피곤한 상태야. 사흘간 눈 한 번 붙이지 못했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나?”

그리 말하는 리히튼의 낯은 맞은편의 아즈마리아보다도 훨씬 창백했다. 내 눈에 비친 리히튼은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와 수년을 대치해 왔을 윌 백작도 리히튼이 무엇에 대해 경고하는지 모르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나보다 잘 알았으면 알았겠지. 그가 사람이든 짐승이든 목을 비트는 데 도가 튼 남자라는 걸.

“납득할 수 없다면 묻는 게 맞지. 물론 내가 아닌 백작의 따님에게.”

아즈마리아가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녀의 눈빛은 실내에 자리한 인원들 가운데서 가장 또렷했다. 난관을 헤쳐가기 위해 칼을 빼어 든 선구자처럼. 나는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듯 당당해 보이는 그녀의 꼬라지가 무척이나 불쾌했다.

“각하. 방금 저는 아주 짧은 시간… 각하께서 왜 이런 자리를 만드셨을까, 왜 저 하녀를 불러 오셨을까 생각해봤어요.”

나를 노려볼 때는 논외로 눈이 날카로웠다.

“그 누구도 완벽하게 신뢰하실 수 없으신 거겠죠.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모든 것을 잃었다가 모든 것을 되찾으신 각하 앞에서, 고작 짧은 몇 마디로 마음을 돌리려 했다니….”

또 시작됐군. 시련 앞에서 절대 무릎 꿇지 않는 여주인공, 아즈마리아가 그녀의 친부에게 말했다.

“각하의 말씀이 옳아요, 아버지. 이 약혼이 유지될지 말지는 저 하녀에게 달렸습니다. 죄송스럽지만 아버지께 자세한 이야기는 알려드릴 수 없어요. 잉고르드의 내부 사안을 외부인에게 밝힐 수는 없으니까요.”

윌 백작이 이보다 더 황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즈마리아, 지금 네 입으로 이 아비를 외부인이라 말하는 게냐?”

“네. 저는 남은 평생을 잉고르드에 속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게 저의 속죄니까요.”

속죄. 그녀가 말한 속죄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대비 속에서 도축된 돼지인 양 끌려가던 제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그 일에 대한 속죄는 아니겠지.

“오오, 샤릴! 당신 보고 있소? 우리의 사랑스러운 딸이 어쩌다….”

윌 백작이 기다란 탄식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다시 생각해 보거라. 아즈마리아, 너는 아직 어려. 그릇된 신념을 옳은 길이라 여기기에 충분할 만큼 어리숙한 나이란 의미다. 대체 그 속죄가 무엇이냐?”

“말 그대로예요, 아버지. 저는 각하께 지은 커다란 죄의 값을 갚아야만 해요. 저분을 이 지옥으로 끌고 내려온 죄 말이에요.”

속이 메스꺼웠다. 격렬한 슬픔에 젖은 아즈마리아의 목소리가 내 목구멍에 오물을 들이붓는 기분이었다.

“리히튼. 나의 리히튼, 정말… 진정으로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나요?”

윌 백작이 당황한 낯으로 아즈마리아의 손을 잡았다.

“아즈마리아?”

“나는 당신이 날 알아볼 줄 알았어요. 비록 내가 이런 껍질에 이런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해도, 당신만큼은….”

“아즈마리아! 각하께 그 무슨 실례냐?”

“당신만큼은 날 알아 줘야지! 그래야지!”

그러나 아즈마리아의 눈에는 오직 리히튼만 담긴 듯했다.

그녀의 시선이 애타는 울분으로 일렁였다. 소리 없이 입을 여러 번 달싹이다 각고의 끝에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가 아그레인이에요.”

푸흡. 의도한 바는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헛웃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킨을 포함한 세 쌍의 눈이 순식간에 나를 향했다. 리히튼은, 글쎄. 그는 날 바라보기보다 차라리 눈을 감지 않았을까.

“아,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즈마리아의 얼굴을 응시하며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아가씨의 속죄가 너무 우스워서요. 하마터면 속을 게워낼 뻔했지 뭐예요”

“뭐?”

“못 들으셨어요? 아가씨의 속죄가….”

말끝이 떨렸다. 웃음을 참기 위해 숨을 들이켠 탓이다.

“속죄가 말이에요. 저는 너무 우스워서….”

무언가 뺨을 스치며 날아갔고, 곧장 유리 부서지는 파공음이 터졌다. 무엇이 날아갔는지는 확인할 필요 없었다. 당장 그녀의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의 자리가 비워져 있었으니까.

“네가 뭘 알아! 빌어먹을 수잔! 네가, 네가 뭘 안다고 자꾸 날 방해하는 거야! 응?”

아즈마리아의 하얗고 얇은 목덜미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게 갖은 힘을 다해 날 파악한 척하지 마! 리히튼의 그림자? 고작 그따위로 날 조롱하고 우리를 이해하려 드는 거야? 넌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를 이해할 수 없어. 나도, 리히튼도, 빌힐름도! 우리가 어디서 어떤 삶을 버텨왔는지 네가 아느냔 말이야!”

“아가씨, 거기까지만 하세요.”

“잘 들어! 우리는, 그 더러운 늪에서 긴 시간 지옥처럼 굴렀어….”

“아가씨.”

“이래도 이해 못하겠니? 내가 리히튼을 그곳으로 떠밀었단 말이야….”

테이블을 더듬어 몸을 일으킨 아즈마리아가 리히튼의 옆으로 기어갔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진주처럼 반짝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리히튼… 이래도 모르겠나요? 내가 돌아왔어요.”

리히튼의 뒷모습은 여느 때처럼 곧고 고요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그의 낯을 확인할 자신이, 아니 용기가 없었다. 리히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아즈마리아의 사고방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녀는 리히튼을 절절하게 사랑하는 듯 행동하는 걸까? 왜 그 사랑을 아그레인이기에 지닐 수 있는 감정이라 표현하는가? 어째서 리히튼이 당연히 그녀를 그리워하고, 다시 만나기를 바랐을 거라 여기는가? 나는 그의 증오를 받고, 언제 맞이할지 모를 죽음만 기다리고 있는데.

“아즈마리아, 너는 대체….”

자신의 친딸을 살피는 윌 백작의 표정은 흡사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 같았다. 킨 또한 평소 보이지 않던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눈앞의 깜짝 연극과 같은 상황에 놀라서라기보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 아즈마리아의 손이 천천히 리히튼의 턱으로 향했다. 그녀는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미, 믿기지 않겠죠. 이해해요. 그러니 제발 내게 아그레인임을 증명할 시간을 줘요. 모든 것이 진실이란 걸 입증할….”

그녀의 손끝이 닿기 직전이었다. 리히튼이 느릿하게 고개를 틀었다.

“킨.”

이윽고 경멸 섞인 음성이 킨을 혼란 속에서 깨워냈다.

“지금 당장 이 버러지를 내 곁에서 떼어내.”

킨의 행동은 재빨랐다. 너무나 재빠른 행동이라 오히려 아즈마리아를 보호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할 정도였다. 그는 아즈마리아의 양팔을 붙잡아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리히튼?”

아즈마리아가 멍청한 얼굴로 눈꺼풀을 깜빡였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나는, 나는 그저….”

“윌 백작. 그대의 여식이 아무래도 미친 것 같군. 백작은 어떻게 생각하나?”

윌 백작이 멍한 눈으로 아즈마리아를 응시했다.

“스스로가 아그레인 캐롤드라 주장하는 아즈마리아 윌이라… 설마, 백작. 아그레인 캐롤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무지한 건 아닐 테지?”

리히튼이 재차 묻자 윌 백작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녀에 대해서는….”

“모를 수가 없을 거야. 백작은 우리를 손수 그 새장 안에 가둔 몸이지 않나.”

순간, 머릿속의 피가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하녀라는 위치도 잊고 윌 백작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차가워진 머리에 비해 가슴 속은 응어리가 터진 듯 뜨거웠다. 뒤늦게 이 자극적인 감정이 증오라는 것을 인지했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선명한 증오를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나를 황성에 구겨 넣은 남자. 그곳에서 빌힐름의 개가 되도록 마땅히 도운 남자.

“수잔.”

리히튼이 나지막이 부르며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날 이끌어 자신의 옆 자리에 앉혔다.

“아무래도 네게 물을 질문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지?”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과 다른 흥분이 느껴졌다. 지루하고 무덤덤했던 청회색 눈동자에 활기가 돌았다. 지금 이 순간, 리히튼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광증에 물든 그가 늘 그러했듯이.

“네 의견이 궁금하군, 수잔. 아즈마리아 윌을 굳이 살려 둘 필요가 있을까?”

“각하!”

윌 백작이 튀어 나올 기세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지, 리히튼의 서늘한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한 채였다.

“아즈마리아는 윌 가문의 적녀입니다. 아무리 각하의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 한들, 죄 없는 귀족 여식의 목숨을 논한단 말씀이십니까!”

“고리타분한 소릴 하는군. 빌힐름 황자가 아그레인 캐롤드를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알고 있을 텐데도.”

말과 함께 리히튼이 손에 쥔 내 손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다시 묻도록 하지. 아즈마리아 윌 영애, 영애는 스스로가 진정 아그레인 캐롤드임을 확신하는가?”

킨이 손을 놓자 아즈마리아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이어서 그 사실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악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다면 백작. 내가 지금 여기서 저 아그레인 캐롤드 영애를 놓아 준다면, 그대는 아그레인 캐롤드를 다시 빌힐름 황자에게 갖다 바치는 꼴이 되겠군.”

“아닙니다. 아즈마리아는 그저… 예, 그저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대체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군요. 아그레인 캐롤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지 않았습니까? 한데 그 무슨….”

윌 백작의 눈은 어느 때보다 동요가 심했고, 리히튼은 그러한 백작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여전히 내 손을 쥔 채, 리히튼이 아즈마리아를 향해 물었다. 웃음기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아그레인 캐롤드 영애. 과연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어…. 지옥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던, 그때의 당신을 말이야.”

리히튼이 내 손을 놓았다.

“돌아온 그대를 위해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그레인 캐롤드, 빌힐름을 따라 그 지옥으로 돌아갈 텐가? 아니면 여기서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겠는가?”

리히튼의 목소리는 윌 백작조차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단호했다. 아즈마리아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히튼. 그때의 그 말을 기억해 주고 있었군요. 나는, 나는 당신이 날 잊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어쩌면 아즈마리아가 아그레인의 더 많은 기억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어떻게 아그레인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가. 리히튼은 그러한 사실을 어찌 알 수 있었는가. 고민은 늘 제자리만 맴돈다. 곧 리히튼이 그녀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귀를 기울여도 내 물음에 대한 답은 일체 없군. 아그레인 캐롤드 영애께서는 마땅한 선택지를 고를 자신이 없는 모양이야. 그러니 수잔, 네가….”

“그 하녀는 나를 죽이려 했어요, 리히튼!”

작은 덩치에서 나온 비명이라고는 절대 생각되지 않는 외침이었다. 아즈마리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레이스 장갑을 벗어냈다. 고약한 물집이 져 붉게 문드러진 손등이 드러났다.

“이, 이 상처! 이 끔찍한 상처를 남긴 게 바로 당신 옆의 그 하녀란 말이에요. 어젯밤은 내내 눈물을 삼키고… 타는 듯한 고통에 잠들지도 못했어요. 당신을 등에 업고 패악을 부리는 하녀에게 대체 무얼 맡기겠다는 건가요?”

리히튼의 표정에는 조금의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랑스럽고 가녀린 아그레인 캐롤드 영애께서, 문드러진 손등에 고통을 표하시다니. 내가 아는 아그레인 캐롤드는 손목을 바쳐서라도 원하는 바를 빼앗아 내는 여자인데.”

형체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리히튼은 아즈마리아의 입에서 아그레인이 언급되는 것을 매우 달갑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눈치도 없이 제 명을 재촉하네.’

그녀가 요절할지 말지는 관심 없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받게 될 피해로부터는 최대한 멀어지고 싶었다.

“아즈마리아 아가씨께서는 마음이 무척 여리고 자애로우시죠. 저 같은 볼품없는 하녀에게도 진주 귀걸이와 함께 친애를 표하실 정도니까요.”

리히튼이 헛웃음을 지었다.

“진주를 받고 그 뺨을 내주었나 보지.”

“어느 쪽도 거절할 수 있었어야지요.”

“그렇담 네 뺨을 내주게 한 대가로 목을 잘라내면 될까?”

다정한 목소리였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각하.”

무엇이 마땅한 대답일지 고민하던 때였다.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킨이 대뜸 앞으로 나섰다.

“저와 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부디 그 약속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킨이 이런 식으로 리히튼의 의사를 거스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보다도 더 잉고르드의 개처럼 부려지던 그였는데.

“약속이라…. 킨. 네게는 저 여자의 발언이 모두 진심으로 들린다는 뜻인가?”

“적은 가능성이라도 제게는 더없이 소중합니다.”

“그래서, 아즈마리아 윌 영애의 목숨을 보장해 달라?”

무슨 약속일까? 무엇과 연관되어 있기에 리히튼이 한 수 무르는 걸까?

“…예.”

늘 여유롭던 킨도 리히튼 앞에서는 항상 긴장을 잃지 않는다. 그들 사이의 약속을 언급했기 때문일까? 어쩐지 오늘은 더욱 그러해 보였다.

“킨 경? 그게 무슨….”

아즈마리아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킨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킨은 끝까지 리히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를 주목했지만 응접실은 고요했다. 리히튼은 나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복종을 기다리는 개처럼.

살릴까? 굳이 살려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있다면 킨이 그것을 바란다는 것 정도. 그를 더는 신뢰하지 못할 뿐, 악감정이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한 번 그에게 빚을 지지 않았는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세상에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도 많으니까.

“죄 없는 아가씨를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주인님.”

“자비로운 처사로군.”

“그녀를 빌힐름에게 보내죠. 모든 것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혹시 몰라요. 주인님의 말씀대로, 손목을 바쳐서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 할지. 이를테면… 주인님이라든가.”

그때, 아즈마리아가 발작하듯 몸을 일으켰다. 핏발에 붉어진 눈이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그녀는 날 잡아끌어 바닥에 쓰러뜨렸다.

“닥쳐, 닥쳐! 입 닥쳐어!”

위태로이 흔들리는 망막에 내 얼굴이 맺힌다. 문득 크로허츠 후작가의 에리얼이 떠올랐다. 왜 다들 알아서 시궁창으로 발을 디디는 걸까?

“그의 곁은 철옹성과 같은 새장이야!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이라고!”

아즈마리아는 성하지 못한 양손으로 내 목을 힘겹게 졸랐다.

“네가 빌힐름의 곁에서 그의 발을 핥아 봤어? 짖는 게 전부인 온순한 개새끼가 되어 봤어? 기껏해야 시중을 드는 일이 고난의 전부였던 주제에. 내게 다시 돌아가라는 소리는….”

“그럼 벗어나.”

마음 같아선 추하게 일그러진 낯에 침을 뱉고 싶었다. 그러나 고막을 찢는 비명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기에 이죽거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애새끼처럼 우는 소리만 내는 게 전부지. 두려워? 두려우면 네 양 날개를 잘라서라도 그 새장에서 벗어나지 그래? 아니면 벗어나는 것조차도 두렵나? 우스워라, 날 죽이기 위해서는 개 같은 짓도 불사했던 아가씨가 두려워하다니.”

여기서 더 발악하기 전에 아즈마리아의 몸을 밀치고 일어섰다. 분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녀는 순전히 나의 말을 납득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겠지. 아그레인이 아닌 여자가 아그레인을 아는 척했으니.

“이제 논의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군, 백작.”

리히튼의 한마디에 윌 백작이 신음했다. 나는 극도의 피곤함을 느꼈다. 차라리 죽이도록 내버리는 게 속 편했을까 싶을 수준이었다.

“그럼 전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터는 동안 리히튼이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베르크네에게서 제대로 된 약을 받아가라.”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응접실을 벗어났다. 나는 텅 빈 복도를 가로질러 가는 내내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나를 왜 부른 거지?’

내 선택에 따라 아즈마리아와 혼인을 약속했으니, 그 이후도 내 선택에 따르겠다고? 리히튼이 날 부른 것이 고작 그런 이유에서일 리 없었다.

“아그레인.”

누군가 내 팔을 가볍게 당겨 등불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으로 끌었다.

빌힐름. 그렇지, 네가 이곳에 왔었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아냈다. 여기서 그런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꽉 막힌 목구멍에서 억지로 목소리를 끌어냈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뺨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군요.”

“겨우 하루가 흘렀으니까요.”

빌힐름이 다정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늘 속에서 어둡게 빛나는 적안에는 평온함이 흐르고 있었다. 꿈속의 그라고는 조금도 상상되지 않는 낯이었다.

“제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매끄러운 손끝이 흘러나온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와 수 싸움을 할 기력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쩌면 빌힐름이 바라고 있을지도 모를 대답을 뱉었다.

“당신이 말한 ‘그들’을 봤어요. 각하에 대해 무엇이든 아는 양 행세하며, 당신을 괴물 취급하는 자를.”

“아즈마리아 윌 영애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존재로 인해 당신이 부정당할까 봐 두렵습니까?”

“그런 때도 있었죠.”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로군요. 그건 부정당해도 상관없다는 의미입니까? 아니면….”

그의 매끄러운 웃음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럴 일이 없다는 의미이려나.”

내가 과거의 그를 기억한다고 말한다면, 빌힐름은 과연 어떤 태도를 보일까? 그때도 지금과 같을까? 혹은 과거의 그처럼…. 쓸모없는 생각을 하느라 대답하는 데 한 박자 늦어 버렸다. 고개를 저으며 한 발자국 더 물러섰다.

“너무 가까워요. 제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겁나네요.”

“제 심장 소리는 들리지 않나 보군요.”

그런 데까지 신경 쓸 만큼 여유롭지 못하니까. 빌힐름은 내가 물러선 것보다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첫 만남 때 인지했던 진중하고 선한 인상은 여전했다. 다만 그때와 달리 속을 알 수 없는, 습윤한 이끼색의 그늘이 눈동자 안에 일렁이고 있었다. 오래 마주하면 속을 읽힐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내렸다.

“그거 아세요? 처음 봤을 때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조금 달라요.”

“나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를 보는 수잔 양의 눈이 달라졌겠죠.”

빌힐름이 천천히 내 어깨를 쓸었다. 기분 나쁜 의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날 안심시키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내 곁으로 돌아온다면 누이는 누이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꾸준하네요. 아그레인이 당신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인가요? 친누이도 아닐 텐데.”

“혈연이라는 건 가장 가까운 공동체 집단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곤 특별할 것 없지요. 그리고 따지자면 우리는 혈연관계가 맞습니다. 내 어머니와 수잔 양의 어머니가 육촌 지간이기 때문이죠.”

육촌이면 남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수잔. 내게 중요한 건 혈연을 통한 유대가 아닙니다. 세상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지 않겠습니까? 즐거움, 쾌락, 흥분, 만족감….”

나열되는 단어를 들을수록 꿈속의 빌힐름이 떠올랐다. 숨겨놨던 공포가 되살아나기 전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연인이 줄 법한 감정들이네요. 당신의 친척 누이인 나와는 일절 관계없는. 공교롭게도, 빌힐름. 당신에게 돌아갈 사람은 내가 아닌 아즈마리아 윌일 거예요. 각하께서 그리 정하셨으니까.”

“글쎄요.”

빌힐름의 음성은 더할 나위 없이 나직했다.

“리히튼 공작이 진정으로 아그레인 캐롤드를 증오한다면… 내게 가짜가 아닌 진짜를 보낼 겁니다. 그자도 그것이 최고의 복수라는 것을 아니까.”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합니까?”

대답하지 않았다. 빌힐름도 내게 그 이상의 답을 종용하지 않았으며, 나는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다행이라. 대체 무엇이 다행인 것일까? 안도하는 내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다. 빌힐름은 내가 긴 복도를 벗어나 도망치는 모습을 끝까지 눈으로 좇았다. 직접 본 것은 아니었으나 그리 느껴졌다.

***

다음날, 며칠을 내리꽂던 비가 멈추고 마지막 만찬이 끝난 후. 베르크네가 주방으로 찾아와 나를 조용히 불러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빌힐름 황자가 너를 데려가길 원했고, 각하께서 그 요구를 받아들이셨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즈마리아가 아닌 나라고?’

나도 모르게 죽어 버린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머릿속이 텅 비었다.

“베르크네 씨.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될까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잉고르드에 오기 전에는 황성에 있었다고 하셨죠.”

“그래.”

“아그레인 캐롤드를 직접 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다면 베르크네 씨가 보기에… 아즈마리아 윌은 아그레인이 맞는 것 같나요?”

“그런 걸 왜 묻는지 모르겠군.”

“모를 만해요. 왜냐하면 아그레인은 그 여자가 아닌 나거든요.”

베르크네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에게선 보기 드문 순수하게 놀란 모습이었다. 그 정도로 놀랄 일일까? 그럼, 몹시 놀라운 일이지. 수잔, 너는 더 이상 책 귀퉁이의 이름 없는 조연이 아니잖니. 어쩐지 알 수 없는 웃음이 나왔다.

“대단한 이유는 없어요. 그저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을 뿐이니까…. 타인이 나인 척하는 것보다 불쾌한 게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 주방을 벗어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통로를 지나 계단에 오르고 복도를 가로질러 걷는 내내 숨구멍으로 빨려 들어오는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혹시, 나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미래에 지레 겁먹어, 불안감에 살아가던 하루하루가 이제 질렸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믿지 못하고 홀로 고립된 채 외롭게 버티느니, 차라리 이 모든 것들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루 빨리 리히튼에게서 버려지는 게 더 마음 편하다 여긴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런 상념도 리히튼의 침실 앞에 서자 마법처럼 증발했다. 형용할 수 없는 배신감이 내 이성을 뒤엎었다. 왜일까? 기대한 것도 없는데 배신감이 들다니. 어찌 이토록 역설적이란 말인가?

문을 열었다. 리히튼은 잠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기다린 듯, 등불 세 개를 밝힌 채 석상처럼 앉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 도달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느새 그의 목을 양손에 쥐고 있었다. 내 목에서 내 것이 아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작 이딴 게, 네가 말한 증오의 결말이야?”

리히튼은 제 몸 위로 올라탄 내 허리를 천천히 감싸 안았다. 나는 손아귀의 힘을 더 강하게 쥐었다.

“말해 봐, 리히튼. 네게 제인이 그렇게 소중한 존재였어? 여태껏 잊지 못할 만큼?”

“제인… 그리운 이름이군. 오랜 시간에 풍화되어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이름.”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할 생각 마. 넌 잊은 게 아니라 잊고 싶었던 거야.”

리히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조르라는 듯 턱을 치켜세우고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정말 그럴 리가, 아그레인. 내가 고작 그딴 것 하나 때문에 복수심에 휩싸여 널 바깥으로 보낼 리 없지.”

“그런데 결국 이런 결과잖아!”

소리를 내지르는 목이 뜨거웠고, 그런 내 모습에서 아즈마리아가 떠올랐다. 나 역시 그녀와 다를 바 없었다는 사실이 몹시 분했다. 이런 지독한 패배감이라니! 리히튼에게 속절없이 휘둘리는 내가 너무나 한심했다.

“너는… 그저 날 비참하게 만들려 했을 뿐이야. 난 그런 네게 머저리처럼 이용당한 거지.”

“그럼 내게 명령해.”

리히튼의 단단한 팔이 옴짝달싹 못할 힘으로 내 허리를 끌어 당겼다.

“지금 당장 명령해, 아그레인.”

상체가 맞닿자 양팔의 힘이 풀렸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그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제기랄… 왜 아무런 말이 없지? 널 가지라고, 그 개새끼에게 보내지 말라고 명령하란 말이야!”

왜 그는 내게 다른 무엇도 아닌 명령을 요구하는가. 굴복해야 하는 건 그가 아니라 나인데. 이 남자에게 복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했는데.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하지 마. 그 명령이야말로 내게 가장 간절한 바람이니까. 아그레인이 아닌 수잔으로서 내 곁에 머물러도 좋아. 그러니 빌힐름을 포기해.”

명령. 곰곰이 돌이켜보면 그는 나의 요구를 거리낌 없이 수용하곤 했다. 혹은 나의 결정을 기다리거나.

‘베르크네. 수잔에게 적당한 신분을 구해 주도록.’

‘내게 혼인을 요구하는데, 소중한 연인의 의사를 묻지 않을 수 없지.’

‘지금부터 내 하녀가 백작의 딸을 윌로 돌려보낼지 말지 결정할 테니까.’

그래, 그는 오로지 나의 말을 따랐다. 순종적인 사냥개처럼.

“모든 걸 잊고 이곳에 머물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아니, 그래야만 해. 내게 이번만큼 완벽한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테니….”

퍼붓는 빗줄기가 땅이 아닌 그의 눈을 적신 듯했다. 메마른 시선이었으나, 그의 눈동자에는 파문이 끊이지 않았다. 광증일까? 지금의 그는 미친 걸까? 나를 빌힐름에게 내보낸 주제에, 이곳에 머물라고?

“복수는 내가 대신 해 주지. 무엇을 원해? 제도의 가장 높은 성에 빌힐름의 머리를 달아 주면 될까?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얼굴을 창에 꽂아 전시해 주면 되는 건가? 아니면 살아 있는 그 새끼의 사지를 네 앞에서 포 뜨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리히튼의 코끝이 내 목을 쓸고, 턱을 타고 올라 뺨에 머물렀다. 그리고 죽은 연인의 이름을 부르듯 절절한 음성으로 나를 삼켰다.

“그러니까 떠나지 마, 아그레인. 제발. 제발….”

목이 메었다. 리히튼이 내게 매달리며 울고 있다. 눈물만 흐르지 않았을 뿐, 애처럼 매달리며 이별을 거부했다. 가슴 안쪽이 오랜 염증이 생긴 것처럼 쓰리고 아렸다. 그의 입술은 내 입과 코와 눈을 오가며 끝없이 자국을 남겼다. 종종 뜨거운 숨이 내 입 안쪽을 쓸기도 했다. 그의 두 다리와 두 팔이 나를 완전히 옭매었다.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이제껏 그래 왔듯… 남은 평생 역시 날 이용해도 돼. 나는 지쳤어. 이제 그만 쉬고 싶어. 그러려면 네가 필요해.”

순간, 뜨겁게 녹아내려가던 정신이 이성을 되찾았다.

“내가, 널 이용했다고?”

그가 날 버리면서, 떠나지 말라고 매달리는 이유. 리히튼이 바라지 않는 바를 강요할 수 있는 인물.

“나구나.”

모두 나였다.

“내가 네게 명령한 거야. 대체 언제? 어떻게?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는 내 발로 직접 황성에….”

“하루를 주지.”

그의 울음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멎어갔다. 동시에 리히튼의 두 팔이 나를 밀어냈다.

“이 하루가 내게서 벗어나, 네 일생의 목적을 실현할 마지막 기회가 될 거다. 이건 내 마지막 자비이기도 해. 어쩌면 병신처럼 평생을 후회하게 될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겠군….”

리히튼은.

“부디 네가 아닌 나를 선택하길.”

그렇게 내게 작별 인사를 남겼다.

나는 그런 리히튼을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완전하게 밀어냈다. 내가 보일 수 있는 행동이라곤 리히튼의 침실을 벗어나는 게 다였다. 아. 만약 내가 아즈마리아를 죽였다면, 지금과 결과가 달라졌을까? 의미 없는 추측이란 걸 알면서도 머릿속에서 쉬이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야, 지워내.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잖아.

‘리히튼은 날 버리지 않았어.’

그래, 리히튼은 날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내게 자신을 내버리지 말라며 애걸복걸했다. 영혼이 불타오르는 것 같던 그의 시선을 떠올리자 자책과 불안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나는 이대로 만족해. 그래, 여기서 더는 필요 없어. 리히튼이 나를 바란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만족감과 고양감이 어디서 파생된 감정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바라온 결과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나는 빌힐름이 아닌 리히튼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어리석은 선택일지라도.

***

그날 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또 꿈을 꾸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이전보다 시야가 조금 더 높아져 있었다. 두 팔이 흔들리는 느낌은 이전과 확실히 달랐다. 어렴풋이 나의 육체가 꽤 자라 있다는 걸 인지했다. 기다리는 이가 있었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내가 전부였다. 이윽고 하녀가 내게 다가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가씨. 리히튼 경께서 곧 방문한다는 의사를….]

[어느 때?]

[정확한 시간은 전달 받지 못했습니다.]

[곧이라. 리히튼이 말하는 곧은 과연 언제일까?]

찻잔이 비었다. 사실 잔이 빈 지는 꽤 되었다.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채워 두지 않았을 뿐. 나는 새것과 다름없는 조각 케이크를 자르며 하녀에게 물었다.

[어제는 리히튼으로부터 어떤 소식을 전달 받았었지?]

[곧 오신다고….]

[그가 언제 내 성을 방문했더라.]

[한동안 방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제는?]

[고, 곧 오신다고….]

[그러면 그제에는 그가 내 성을 방문했었나?]

하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대답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리히튼은 그제도, 그제의 그제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이 주간 매일같이 초대해야 겨우 한 번 얼굴을 비추는 그였다. 마지막으로 그가 내 초대에 응한 게 언제였더라. 적어도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비비안느가 보고 싶어. 그 애를 만나러 가자.]

하녀가 한층 밝아진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녀 전하께서 필히 반갑게 맞이해 주실 거예요.]

내 성에서, 아니 내 새장에서 황녀의 거처까지 이동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그럼에도 비비안느는 날마다 꾸준히 내게 서신을 보냈다. 몇 날 몇 시에 다시 날 찾아와 줄 거냐고. 마치 내가 리히튼에게 그러하듯. 비비안느의 성에는 마차에 오르고 십여 분 가까이 흐른 후에야 도착했다. 시종들이 나란히 서 나를 맞이했으나 그들 중에서 어떤 이도 내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비비안느가 경을 치기 때문이다.

응접실로 들어서기 위해 시종의 뒤를 따랐다. 2층 오른쪽 끝 복도. 시간의 멋이 든, 한눈에 겨우 담아낼 거대한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림의 형상은 매우 난해했다. 타오르는 태양을 붉은 강줄기가 감싸 안은, 비현실적인 감상이 여실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시선을 내려 금패에 음각된 작품의 이름을 훑었다.

<태양이 흐르는 강>

…아, 이런. 나는 이런 걸 예상한 게 아닌데. 심장이 갈비뼈를 꿰뚫고 나올 만큼 거세게 뛰었다. 태양이 흐르는 강. 나를 이 끔찍한 세계로 끌고 온 작품. 나는 시종에게 들리지 않을, 몹시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그림을 잘 봐 둬, 수잔. 그리고 잊지 마. 지금 나는 네가 그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개처럼 구르고 있거든.]

‘나’는 입을 닫았다. 하지만 입을 다문 ‘나’와 달리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수잔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 준 이름이려나. 내가 너의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알지는 못해서. 한데 많고 많은 이름 중, 하필이면 그 이름이라니… 기분이 몹시 이상해지네. 어쩌면 모든 진실을 잊은 널 조롱하는 걸 수도.]

마치 한 사람이 서로 다른 몸을 지니기라도 한 것처럼, 아그레인은 내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수잔, 네 진짜 이름은 그게 아니잖니? 우리의 정체성은 아그레인이야. 그렇지?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내가 진짜 너라는 의미지.]

조심스럽게 팔을 뻗은 나, 아그레인이 벽 한 면을 장식하고 있는 웅장한 유화 작품을 천천히 쓸었다.

[태양이 흐르는 강… 캐롤드의 태양, 잉고르드의 강. 그리고 이 둘을 담은 하늘, 제국의 주인인 그렌페르크. 후후, 이 얼마나 끔찍한 그림이람?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눈앞에서 찢어발기고 싶군.]

아그레인이 작게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런 그녀를 마치 타인이 된 양 관찰했으나, 우리는 여전히 한 몸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으로 그림을 올려다봤으며 그녀의 손끝으로 말라붙은 물감의 감촉을 느꼈다.

[아그레인… 나는 너무나 궁금해. 지금 너의 세상은 어떠니?]

아그레인이 황홀한 눈길로 그림 속 태양을 올려다봤다.

[행복하니? 아니, 그럴 리 없지. 나는 네가 죽어서야 그 감동을 느낄 존재란 걸 너무나 잘 알아. 그래…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장의 현실에 안주하고 있을까? 그저 살아가고 있음에 만족하고 있니?]

그녀에게 대답할 수 있었다면 나는 아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그거야말로 맹세코 용납 못하지.]

그런 내 대답을 들었다는 듯, 아그레인이 냉랭한 음성으로 이를 갈았다.

[우리… 아니, 나의 숙원. 너는 절대 잊어선 안 돼, 잊느니 죽어 버리는 게 나아.]

아그레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장미가 수놓아진 벨벳 카펫을 따라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너는 모르겠지만, 그간 꽤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어. 지금의 너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버리고 싶어 할까…. 그러다 문득, 가장 중요한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단 생각이 들더구나.]

그녀가 목소리를 더 낮춰 속삭이듯 읊었다.

[그거 아니? 너는 미래를 볼 수 있어, 아그레인.]

당장 내재된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은 아니었다. 내가 미래를 본다고? 그럴 리가. 갑작스러운 건 둘째 치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태양이 흐르는 강』에는 그런 능력을 지닌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리고 이 악몽의 시작 또한 바로 거기서부터 비롯되었지. 그러니 끝 또한 마찬가지일 거야. 네 미래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 그렇다면 황성으로 돌아오렴, 아그레인.]

착각이 아니라면, 이제까지와 달리 아그레인의 목소리에는 익숙하지 않은 초조함이 느껴졌다.

[돌아와서….]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점차 가까워지는 인영이 보였다. 황금을 흩뿌린 듯 찬란한 금발이 파도처럼 요동쳤다. 햇살보다 화사한 미소를 지닌 여자가 아그레인을 발견하자마자 걸음을 옮겼다. 멈춰 선 아그레인은 여자가 당도하길 기다리며 작게 웃음을 삼켰다.

[아아, 이 말을 잊을 뻔했네. 리히튼을 너무 괴롭히지 말아 줘. 그 애만큼 불쌍한 애가 또 없거든.]

그리고 코앞으로 뛰어온 여자가 입을 열기 전에 눈앞이 하얘졌다. 시야가 어지러이 일그러지는 동시에 내 정신이 깊은 수조 안으로부터 끌어 올려졌다.

***

그런 상상을 해 본 날도 있었다.

이 세상이 책 속이 아닌 내 진짜 세계라면 어떨까? 그저 운이 나쁘게 과거의 기억을 잃었을 뿐이고, 돌아가야 할 세상 없이 지금의 삶을 이어가야 한다면 어떨까? 그야말로 끔찍한 가정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버텨갈 수 있는 힘은, 다름 아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자각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아니야.’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때의 가정은 옳았다. 나는 이 세상의 일부다. 과거의 내가 알려 주지 않았는가? 『태양이 흐르는 강』을 통해 보았다고 인지했던 세상은, 내가 본 미래의 일부였다고. 나에게는 미래를 볼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고. 나는, 아그레인 속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 아그레인 본인이었다고.

“하.”

나는 아그레인이다.

“아하하.”

어떡해야 할까.

이제 나는 무얼 해야 하지?

“아그레인 캐롤드.”

과거의 나는 어떤 심정으로 수잔이라는 이름을 불렀을까?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까지 예견했을까? 예견했다면 그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얻길 바랐을까. 도통 알 길이 없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저택을 나갔다. 안개가 걷히지 않아 흐릿한 새벽하늘 아래, 장마로 한껏 거세진 냇물이 콸콸 쏟아졌다. 나는 고민 없이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바보 같이 주저앉지 마. 머리를 써, 아그레인.

“내게 필요한 것.”

당장 떠오르는 건 잉고르드 독의 해독약이 전부였다.

“치워야 하는 장애물.”

아즈마리아에게는 이제 관심 없었다. 의문이 있다면 왜 그녀가 내 기억을 갖고 있느냐 정도일 뿐. 그렇다면 빌힐름? 빌힐름을 치워야 하는 걸까? 날 이곳까지 끌고 온 리히튼은?

“내가 해야 하는 일.”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것.”

과거의 나에게는 복수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에게도 복수여야 하는 건가?

“젠장.”

정말이지, 하나도 모르겠어…. 냇물은 머릿속의 혈관 하나하나가 꽁꽁 얼어 버릴 정도로 차가웠다. 나는 허리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물을 건너며 리히튼의 말을 되새겼다.

‘하루를 주지. 이 하루가 내게서 벗어나, 네 일생의 숙원을 실현할 마지막 기회가 될 거다.’

문득, 그라면 알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히튼이라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줄 수 있을까? 그가 내게 길을 제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나에게는 여기서 더 떨어질 바닥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리 여겼다. 뭍으로 기어 올라와 스산함이 감도는 통로를 지나 곧장 리히튼의 침실로 향했다.

까만 장막이 드리워진 방은 겨울밤보다 어두웠다. 내가 그러하듯, 리히튼 역시 작은 인기척에도 눈을 뜬단 사실을 안다. 보이지 않아도 내게는 충분히 익숙한 장소였다. 물에 젖어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침대 위로 몸을 걸쳤다. 두 팔로 무게를 받치고 천천히 허리를 숙이니, 그늘 속에서 빛나는 청회색 눈동자가 소리 없이 날 뜯어 살피고 있었다.

“답을 말해 줘, 리히튼.”

긴 정적 끝에, 밀랍 인형처럼 굳어 있던 리히튼이 움직였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을 내 젖은 머리칼 사이사이로 쑤셔 넣었다. 눈빛은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라 생각되지 못할 정도로 선명했다. 긴 밤이 지나는 동안 내가 자신에게 도달하길 기다려온 것처럼.

“너는, 정말… 내 앞에서만큼은 끔찍하리만치 잔인하지.”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 아래로 자조적인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늘 멍청한 짓거리를 해 왔어. 마치 후회하길 바라기라도 하는 양.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반복이라 할 수 있겠군.”

내 젖은 머리칼을 지분거리던 그가 이내 자신의 코앞으로 나의 뒤통수를 끌어 내렸다.

“네가 원한다면 난 해야만 해. 그러니 네가 바라는 대로 해 주지.”

이어진 그의 목소리는 칼날에 찢어 발겨진 커튼처럼 너덜너덜했다.

“빌힐름 황자를 죽여라, 아그레인.”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는 그렌페르크 제국의 직계 황자였으며, 킨의 말에 따르면 비비안느와 황위 후계를 두고 다투고 있는 제도의 실세 중 한 명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떻게 그를….”

“이건 명령이야, 아그레인. 네 손으로 직접 그를 죽여. 목에 창을 꽂고 머리를 잃은 사지를 내 앞으로 끌고 와. 그리고 내 앞에서 놈을 완전히 죽였다고 말해.”

그의 말에 과거의 기억과 잉고르드의 시간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그를 죽이는 게 네가 말한 나의 숙원인 거야?”

“그래. 하지만 나는 너의 복수가 실패하길 바라. 그럴 수만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네 두 눈과 두 귀를 가리고 내 영지에 가둬 둘 수 있겠지.”

긴 한숨이 이어졌다. 리히튼의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 아래쪽이 아렸다. 그의 집착에서는 뜨거운 애정이 아닌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긴 시간 갈고 닦은 복수의 칼이 나를 향한 것처럼. 얼마나 짧은 정적이 흘렀던가. 그가 내 머리를 조금 더 가까이 끌었고, 우리의 이마가 맞닿았다.

“너는 알 거야. 네 바람은 내가 이룰 수 있다는 걸….”

어제와 똑같이 날 타이르는 어조였다.

“놈의 머리를 바칠 수 있어. 나는 네게 거짓말하지 않아. 너는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면 돼.”

전날 밤만큼의 애절함과 간절함은 전달되지 않았다. 리히튼은 이미 내가 내린 답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더욱 심장 한 구석이 미어졌다. 이 감정이 죄책감인지, 아니면 그것과 다른 형태의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왜 날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도대체 왜? 차마 이유를 묻지는 못했다. 그가 어떤 대답을 들려줄지 겁이 나서.

“…하지만 너는 그리 하지 않겠지. 이제껏 그래 왔듯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숨을 남기고, 리히튼이 내게 입을 맞추었다. 작별 인사라도 되듯 길고 정적인 입맞춤이었다. 목이 메었다. 나도 모르게 깨문 아랫입술을 그가 부드럽게 당겨 풀었다. 리히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첨예하고 조심스러우며, 무거운 회한이 느껴졌다. 입술을 뗀 리히튼은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날 끌어안았다.

“내기는 네가 이겼다.”

나는 그의 견고하고 처량한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우리 사이에 무엇이 있지? 리히튼이 내게 남긴 건 고통스러운 독과 개로서 보여야 할 복종의 덕목이 다였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건가.

‘네가 내게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내기에서 이기는 것뿐이야.’

그의 두 팔이 나를 밀어냈다. 냉혹한 잉고르드 공작의 얼굴이 되어서.

“그러니 지금 당장 내 땅에서 사라져, 아그레인. 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두 번 다시 잉고르드에 발을 디딜 수 없을 거다. 그 귀중한 목숨을 걸지 않는 이상.”

무슨 생각으로 두 다리를 질질 끌어 침실에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 동이 완전히 텄고, 문 너머가 점차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이곳을 떠날 짐을 싸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자, 뼈를 훑는 한기가 몸을 덮쳤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방을 나서 하녀들을 따라 몸에 냉수를 끼얹었다.

하루 일과를 준비하는 틈에 끼어 흠뻑 젖어 엉망이 된 의복을 벗어 던지고 여분의 의복을 걸쳤다. 그래봤자 잉고르드의 하녀 의복이었지만. 그리고 콜렌토 부인에게로 가 리히튼의 명령을 전달했다.

“저 오늘부로 잘렸어요. 아무래도 새 사람을 구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에 콜렌토 부인은 본 적 없는 몹시 기이한 얼굴을 했다.

“지금 날 놀리는 거니?”

“그럴 리가요. 리히튼 각하의 명이에요. 제가 더는 쓸모없으신가 봐요.”

내가 할 말은 그뿐이었다. 질문이 이어지기 전에 곧장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와 짐을 쌌다. 사실 내게는 나가기 위해 준비할 짐이랄 것도 없었다. 잉고르드에 오면서 입고 있던 옷은 버린 지 오래고, 기껏해야 손과 얼굴에 바르는 크림을 비롯해 빗, 머리 핀, 초콜릿이 서너 개 남은 양철 상자가 전부였다.

‘…아니야, 내게는 하나가 더 남아 있지.’

서랍 안쪽에 팔을 집어넣어 보석함을 꺼냈다. 내부에는 눈에 익숙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짝 없이 남아 있는 귀걸이 한쪽. 갈색 머리칼의 소녀가 그려진 펜던트. 처음에는 구분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머리색이 다르기는 해도 이 소녀는 내가 맞았다. 그간 확신하지 못했다는 게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아그레인 캐롤드가 맞았다. 가만히 펜던트의 그림을 살피던 때였다. 끼익, 낡은 나무문이 거칠게 갈라지는 소음을 내며 열렸다.

“저, 수잔 선배.”

조심스레 들어온 메어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끄덕이자 눈치를 보다가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제가 방금 콜렌토 부인께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요. 선배가 오늘부터 일을 그만둔다고….”

“부인 말씀이 맞아. 안 그래도 지금 짐을 싸던 참이야.”

“네?”

화들짝 놀라 메어리가 내 옆으로 뛰어 들어왔다.

“간다니요? 어디로요? 잉고르드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가시는 거예요?”

난해한 물음이었다. 황성이니 공작령보다 더 좋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게 나에게까지 통용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건 아니야. 자의 반, 타의 반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나요?”

“아니.”

알릴 사람은 콜렌토 부인과 메어리로 충분했다.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며 양쪽 귀에 걸고 있던 흑진주 귀걸이를 빼 그녀에게 건넸다. 의아한 눈으로 귀걸이를 받아 든 메어리에게 말했다.

“흑진주 귀걸이야. 윌 가문에서 받은 물건이니 가품은 아니겠지. 팔아서 네게 필요한 데 사용하도록 해.”

“네? 이 귀한 걸 왜 저에게….”

메어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귀걸이를 털어내려 했으나, 차마 내던지지는 못하고 손에 쥔 채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내게는 메어리가 아니면 순수한 호의를 베풀 존재가 없었다. 그녀는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호감만 나타낸 유일한 인물이었다. 베르크네도, 킨도 어떻게 생각하면 본인이 피를 보지 않기 위해 날 도왔을 뿐이다. 그것이 잘못된 행위라는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을 대할 때보다는 메어리를 대할 때가 훨씬 심적으로 안정된다는 뜻이었다.

“정말, 안 돌아오세요?”

“난 잉고르드의 가신이 아니야. 한 번 나가면 끝인 거지.”

이 아이에게 어떤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아즈마리아는 이미 썩은 줄이었기 때문에 차마 열과 성의를 대해 아양 떨라는 말은 못할 것 같았다. 사실 그 부분은 제외하면 더는 무어라 조언할 구석이 없기는 했다.

메어리는 이미 피오라 부인과 콜렌토 부인에게 인정받은 시녀다. 귀족 가문의 하녀로 전전하던 아이가 잉고르드 공작가의 가신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 성공적인 인생도 없을 터였다. 귀걸이를 한 손에 꽉 쥔 메어리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도, 도움이 필요하면 꼭 찾아오세요.”

그리고 내 팔을 끌어 가볍게 끌어안았다.

“꼭이요, 선배.”

맞아, 포옹이라는 게 이런 느낌이었지. 어깨 한쪽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느낌이라, 나 역시 다소 어색한 움직임으로 메어리를 마주 안았다. 그래도 수잔이 잉고르드에 남긴 건 있구나. 어차피 더는 만날 일도 없겠지만.

콜렌토 부인이 내 소식을 전한 건 메어리와 마리, 리냐가 전부인 듯했다. 세 명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차례로 날 찾아와 작별 인사를 건넸다.

특히 리냐는 혈육이 죽기라도 한 것처럼 끅끅 소리를 내며 오열을 했다.

죄책감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한 연기? 그녀의 울음에는 공감이 가질 않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킨은 찾아왔으나 내가 거부했다. 얼굴을 마주하면 아즈마리아를 죽이지 못했던 순간이 떠올라 자괴감에 빠질 것 같아서였다. 차라리 주먹질이라도 하면 나아질까 생각했지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머저리 같은 킨. 내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즈마리아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해 보시지.’

얼마나 애처로운 뒷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날 찾아온 사람은 베르크네였다. 그는 저택 후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날 일으켜 세우며 옆에 던져두었던 내 가방을 들었다.

“네가 정말 아그레인 캐롤드라면… 참 너다운 결정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는 한동안 내 얼굴을 꼼꼼하게 살피더니 뒷말을 이었다.

“머리색이 달라서 못 알아 본 건가? 다른 사람으로 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캐롤드의 아그레인이 확실해.”

“베르크네 씨는 나를 아시나 봐요.”

“황성에서 일할 때 종종 스쳐지나가듯 만난 기억이 있지. 너무 강렬한 인상이라 쉬이 잊히질 않더군.”

과거의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은 리히튼과 빌힐름을 제외하고 처음이었다. 폭우로 무릎 아래까지 자란 풀밭을 지나며 물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난해한 질문이야. 역시 황성에서의 기억은 모두 잃은 건가? 너의 인생도 참 기구하군.”

숨을 고르던 베르크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는 네가 빌힐름 전하를 휘둘러 제국을 삼키는 천하의 요부가 될 줄 알았다.”

“요부?”

너무도 그다운 표현이라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베르크네는 머쓱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전하의 잠자리 시중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그분의 정부나 마찬가지였어.”

“세상에 어떤 사내가 잠자리도 들지 않는 여자를 정부로 두나요? 첫사랑의 순정을 못 잊은 남자가 아닌 이상 누구도 그러지 못할 거예요.”

“속단하지 마라. 빌힐름 전하께서 그러셨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 부분에서 나는 웃음을 멈추었다. 일말의 재미도 느껴지지 않는 시답잖은 농담이라 입매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모두들 네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얼 하는 여자인지 궁금해 했지만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다. 전하는 물론 폐하께서도 네 존재를 쉬쉬하셨기 때문이지. 하지만 황성에 터를 잡은 자들은 모두 네 말에 개처럼 기었어. 아그레인 캐롤드가 빌힐름 황자의 총애를 독차지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즈마리아 윌도 알았을까요?”

“말했듯 너는 페하께서도 극도로 예민하게 구셨던 존재다. 적어도 그 시절에는 윌 백작이 알지언정 윌 영애는 알 수 없었을 테지.”

멀지 않은 곳에 정차한 마차가 보였다. 눈에 익지 않은 외관을 봐선 최소한 잉고르드의 마차는 아닌 게 분명했다. 나를 이끄는 베르크네의 걸음은 정확히 그 마차를 향하고 있었다.

“한데 너는 그곳으로 왜 돌아가려는 거냐?”

“황성 사람들이 모두 내 앞에서 개처럼 긴다는데, 못 갈 이유가 있겠어요?”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너라면 충분히 알고 있을 거다, 아그레인.”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오늘 하루 동안 수백, 수천 번을 고민해 왔다. 그렇게 도달한 결론은 탈출구가 없는 줄로만 알았던 상념 속에서 나를 구원해 주었다.

“내 삶의 이유가 거기에 있으니까요.”

나는, 긴 시간을 『태양이 흐르는 강』 속의 조연으로 살아왔다. 또한 그 시간 동안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오직 그것만이 내 삶의 목표였으며 이정표였다.

“그러니 마땅히 맞이하러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과거의 나는 아니란다. 과거의 나는 나를 황성으로 불렀다. 내가 평생을 꿈꿔 온 일생의 바람과 복수가 거기에 있다고.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베르크네의 걸음은 마차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가방을 마차에 실으면서 내게 자그마한 상자를 건넸다.

“각하와 내기를 했었나? 이건 내기에서 이긴 네게 주는 선물이라더군.”

그렇게 잠시간 서 있던 베르크네는 몸을 돌려 건너 왔던 초원으로 다시 향했다. 마부가 문을 닫고, 멍하니 베르크네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사이에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잉고르드를 떠나고 있다. 빌힐름은 마차에 오르지 않았다. 아무런 언질도, 설명도 없이 마차는 빠른 속도로 흙길을 따라 달렸다. 마차 뒤로 점차 멀어지는 저택이 보였다. 이상했다. 저 안에 무언가 두고 오기라도 한 듯, 불안한 느낌이 끊임없이 내 신경을 자극했다.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베르크네에게서 받은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물건은 단출했다. 불온해 보이는 칠흑빛의 액체가 작은 유리병 안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이건….”

잉고르드 독의 해독제인가. 나는 유리병을 조심스레 쥐었다. 내기에서 이긴다면 받기로 했던 그 해독제가 맞는 것 같았다.

‘지금의 나에게 필요할까?’

이미 내 몸은 잉고르드 독에 완전히 적응한 상태였다. 이전처럼 예민한 오감을 못 견뎌 시도 때도 없이 두통에 시달리거나, 돌연 정신을 잃는 일도 기하급수로 줄었다. 변하지 않은 점은 내 혈액이 지닌 맹독성이 전부였다.

‘당장 해독하는 건 여러모로 손해야. 나중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도 있으니까.’

상자는 버리고 가방 안에 유리병을 숨겨 두었다. 병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위치를 여러 번 옮겼을 땐 어느새 해가 진 뒤였다.

마차는 그렇게 수일을 달렸다. 도시를 건너는 날이면 값비싼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가까운 민가에서 하루를 청했다. 몸과 마음이 이토록 자유로웠던 적은 없었다. 일주일간은 리히튼도 빌힐름도 아즈마리아도, 모두 잊은 채 사람과 풍경, 그리고 그들이 내는 소리만을 눈에 담았다.

“아.”

잉고르드를 떠난 지 열흘이 조금 안 되던 날. 나는 그렌페르크 제국의 아성, 황성에 도착했다. 백색의 고아한 황성은 마치 상아로 빚어진 조각상 같았다. 끝도 없이 늘어진 화려한 천일홍 정원을 지나서 바퀴가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렸을 때, 허리를 곧게 편 한 여자가 나를 기다리는 게 보였다. 그 여자에게서는 『태양이 흐르는 강』 속 최고의 미인인 아즈마리아 윌과는 단연코 비교되지 못할 비이상적인 아름다움이 흘렀다. 부서지는 햇빛이 여자의 머리 위를 감돌았다. 신이 평생을 걸쳐 완성한 선명한 이목구비에는 완연한 환희가 만발했다.

다가온 여자는 말없이 내 얼굴을 살폈다. 눈과 코, 입, 표정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훑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내 어깨를 당겨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마치 자신이 지닌 모든 걸 내줄 듯 깊고 조심스러운 포옹이었다. 어쩐지 나는 여자의 이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그녀는 입을 열었다.

“집으로 돌아온 걸 환영해… 나의 사랑스러운 주인님.”

여자는 나의 사랑스러운 개이자 그렌페르크 제국의 황녀, 비비안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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