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7. 공명
타앙!
벌써 일곱 번째 격발이었다. 아즈마리아의 머리를 빗으며 힐긋 창 너머의 풍경을 응시했다. 깃털을 휘날리며 추락하는 새라든가, 다음 차례의 사냥감을 든 시종이라든가, 하다못해 승마복을 걸친 리히튼조차 보이지 않는다.
“당분간 저택이 조금 시끄러울 거예요, 수잔. 각하께서 일대의 늑대 사냥을 명하셨거든요.”
그랬었구나. 사냥이라…. 그것도 하필이면 늑대라니. 어제 이른 오전의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늑대의 씨를 말리겠다던 농담 같은 목소리도.
“얼마나 상냥한 분이신지.”
꿈결에 젖은 표정인 걸 봐선 리히튼을 가리키는 표현인 듯했다.
“어젯밤에 악몽을 꿨어요. 커다란 늑대 두 마리가 어린아이들을 사냥하는 꿈을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잉고르드가 아직 익숙하지 않으신가 봐요.”
“그런가 봐요. 윌에서 잉고르드가 먼 축이기는 하죠. 각하와 담소를 나누다가 얼떨결에 그 이야기가 나왔는데… 잉고르드에서만큼은 그런 위협을 느낄 필요 없다며 안심시켜 주시더군요.”
그 말을 끝으로 아즈마리아가 하얀 낯에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내 귀에는 이어지지 않은 뒷말이 들렸다. 그래서 늑대 사냥을 시작하셨나 봐요. 알리고 싶은 티를 숨기지 못하는 아즈마리아도, 안심시켜 줬다던 리히튼도,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는 나도 우스웠다.
“고용인들도 다들 신기해하고 있어요. 각하께서 이토록 정성을 쏟았던 사람은 아가씨가 처음이에요.”
“아니에요. 그냥 제 체면을 살려 주시는 걸 거예요.”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는지 그녀의 양쪽 어깨가 위로 솟았다.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솔직해지는 아즈마리아. 그녀는 들려오는 거친 총성을 두 눈을 감고 감상했다. 마치 현악 사중주라도 되는 것처럼.
이건 다분히 의도적이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인정해 가고 있었다. 리히튼에게 ‘의도치 않은 일’이라거나, ‘우연히 발생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수를 계산해 두는 남자였다. 그렇다면 그 계산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혹시 내가 아즈마리아라는 존재로 인해, 스스로가 아그레인임을 부정하게 되는 단계까지 포함되어 있는 건 아닐까? 모든 게 리히튼의 손바닥 위에 놓인 양.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그 손바닥을 찢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항상 나만 말을 하네요. 정작 수잔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는 하녀였어요. 예전에도, 지금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나요?”
“물론이죠. 제 주제에 부합하는 일인걸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내 말은….”
“더 많은 것을 넘보다가 추락하게 된 경우는 많이 들어왔죠. 전 그러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역시 현명해요, 수잔. 그때 당신이 날 말리려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겠죠. 미래를 바꾸려했던 이들 중에서 좋은 결과를 본 자는 없으니까요.”
너도 비슷한 생각이었구나.
“리히튼 각하가 무섭지는 않나요, 수잔?”
“아니라는 말은 못하겠네요. 하지만 전 그분에게서 봉급을 받는 처지니까요. 감사한 마음이 더 크죠.”
“지오르타에서 돌아왔을 때 상당히 놀랐어요. 설마 각하께서 수잔을 침실로 데려가실 줄은….”
여태 마음에 담아둔 건가. 이쯤에서 적절한 변명거리가 필요하기는 했다.
아니야.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지.
“저는 그분의 그림자예요. 베르크네 씨가 각하의 팔이고, 킨이 각하의 검이듯.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크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아즈마리아가 무언가 깨달은 듯,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그래서 아낀다는 말이….”
하녀들에게서 리히튼이 나를 아낀다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걸까. 아즈마리아는 한시름 내려놓은 얼굴이었다.
“네. 각하께서는 저를 통해 아가씨를 살피고 계세요. 공작 부인이 되실 소중한 분이니까.”
“하지만 수잔, 당신을 고른 건 리히튼 각하가 아닌 나예요.”
“굳이 절 고르지 않으셨어도 제가 아가씨를 돕게 되었을 거예요.”
최대한 다정한 미소를 짓기 위해 얼굴의 온 근육을 활용했다.
“아가씨께서는, 그렌페르크 제국에서 각하의 비호를 받는 유일한 존재니까요.”
아즈마리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아도 그녀의 거세진 심장박동이 내 귓가에 도달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이 기분을, 대체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너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계속 안도하도록 해, 아즈마리아. 그래야 내가 편히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
늦은 오후. 아즈마리아에게 요깃거리를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두 다리가 멈추었다. 창문 너머로 평소와 다른 분위기의 정문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가을 연회가 열렸을 때처럼 정문에 마차가 길게 서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휘황찬란한 마차에서 내리는 방문객으로 북적였다. 콜렌토 부인에게 며칠간 저택이 시끄러울 거란 소리는 들었지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방문할 줄은 몰랐다.
“잉고르드파. 다른 말로는 반 빌힐름파지.”
한창 창문 밖으로 내다보며 그 숫자를 짐작하던 때였다. 익숙한 음성의 기사가 지척에 다가와 창문에 기대어 섰다.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다, 킨일 테니까.
“저래 보여도 대단한 작자들이 꽤 많아. 조나단 후작에 헨져 백작…. 한 자리에서 보기 힘든 인물들이지.”
가만히 듣다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빌힐름 황자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반대파가 있는 거야? 적통은 그 황자 말고도 존재할 텐데.”
킨이 이상한 얼굴을 했다.
“너 어디 가서 그런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쯧. 이제 좀 사람이 됐나 했는데.”
“한 번 더 물려 볼래?”
“정말 개라도 된 거냐? 그런 어처구니없는 위협이라니. 빌힐름 황자는 비비안느 황녀와 함께 황실을 양분하고 있는 실세야. 크로허츠 후작도 죽고, 지금은 각하의 기세가 워낙 강해 몸을 숙이고 있을 뿐.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모를 일이지.”
머릿속이 멍했다. 비비안느라니, 이토록 갑작스럽게?
“설마 반 빌힐름파라는 의미가….”
리히튼이 비비안느를 돕고 있다는 건가? 답을 기다리며 가만히 킨을 올려다봤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에 이른 봄 새싹처럼 옅은 녹안이 투명하다. 늘 느끼지만 남자치고, 그것도 상당히 듬직한 남자치고는 쓸데없이 맑은 눈동자였다.
“흐음.”
대답은커녕 반응이 영 미적지근하다. 알고 보니 본인도 잘 모르는 거 아니야? 의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무언가 내 입술을 강하게 깨물고 멀어졌다. 그 주체가 킨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저절로 손이 나갔다.
“이… 미친 새끼!”
하지만 내 손은 킨에 의해 허무하게 막혔다. 그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뒤늦게 손을 놓았다.
“아. 한 대 맞아 줄까?”
뭐가 어쩌고 어째? 나는 그의 정강이뼈를 온 힘을 다해 걷어찼다.
“윽!”
그리고 입술에 남은 감각을 소매로 열심히 훔쳤다. 너무 어이가 없으니 이 이상 반응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킨이 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바보 같은 표정 지으래? 괴롭히고 싶게.”
“계속 입 열어 봐.”
“뭐, 멍청한 얼굴이 그나마 귀엽기는 하네.”
킨은 나머지 한쪽 정강이도 차이고 나서야 좀 조용해졌다. 사람 열 받게 하는 방식이 날이 갈수록 진화한다. 나는 정강이를 붙들고 소리 없이 아우성을 치는 킨을 지나쳐 침실로 돌아왔다.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에 힘을 쭉 빼고 침대로 몸을 던졌다. 고요한 공기 속 규칙적으로 울리는 초침이 불안감을 자극했다.
‘나는 그대로인데….’
주변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리히튼을 중심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러다가는 휘둘리기만 하다가 가루처럼 분쇄될 게 분명했다.
‘아니야.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돼.’
지금 내게 가장 큰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즈마리아가 아그레인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래, 우리 두 명의 아그레인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둘 존재한다.
하나, 아즈마리아는 『태양이 흐르는 강』을 알지 못한다. 둘, 아즈마리아는 책 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죽어서 타인의 몸속에 들어온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공통점도 존재했다. 스스로가 아그레인임을 입증할 수 있는 완벽한 증거가 없다는 것. 리히튼의 증오는 믿을 수 있지만, 리히튼 자체는 믿을 수 없다. 미래가 불투명하니 언제 개죽음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이용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필요해.’
잉고르드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너무 폐쇄적이며 일방적이다. 또한 나에게는 그나마 얻은 정보조차 사실 유무를 파악할 판단력도 부족했다. 나보다 많은 진실을 알며, 손을 뻗으면 닿는 존재가 필요했다. 등불을 켜고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던 보석함을 꺼냈다. 메모장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누이. 언젠가 나의 도움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하며, 곧 다시 만나기를.>
빌힐름. 내가 과연 그를 이용할 수 있을까? 나의 주인이었으며 황실의 실세이자 리히튼과 대적해 온 그를. 하지만 빌힐름 외에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또한 나에게는 두 눈을 가리고 있는 암막을 거둘 필요성이 존재했다. 나는 만년필을 들어 브릿길 삼십육 번 건물에 전달할 서신을 작성했다.
<도움이 필요해요.>
어차피 여기서 더 막다른 길도 없을 테니까.
***
다음 날 늦은 오후에 아즈마리아가 독서하는 틈을 타 본관으로 건너갔다. 메어리는 며칠 사이에 피오라 부인과 퍽 가까워진 듯했다. 오전 일과로 모두가 바쁜 시간대에 부인 옆에서 시시덕거리는 모습이 그 증거였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메어리는 오늘 오후 번화가로 외출할 것이다.
진심으로 반했든 단순한 이용거리로 인식하든, 피오라 부인의 아들인 카센 경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꾸밀 수밖에 없다. 하녀는 장식품을 걸칠 수 없으니 머리에 바르는 오일이나 향유를 고르는 데 고심할 게 분명했다. 다행히 내 판단은 옳았다. 나는 메어리가 저택을 나가기 직전에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메어리. 이 서신을 브릿길 서점 주인에게 전해 줘.”
“서신이요?”
메어리의 호기심을 잠재우기 위해 가장 위협적인 이름을 빌렸다.
“각하께서 내게 몰래 부탁하신 명령이야. 한데 나는 아가씨의 수발을 거드느라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서.”
“각하의 명령….”
서신을 품에 갈무리한 메어리의 안색이 단숨에 무거워졌다.
“제가 감히 선배의 일을 대신해도 될까요?”
“당연히 너라서 부탁하는 거잖니, 메어리. 누구도 알게 해서는 안 돼.”
메어리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네. 잘 숨길게요.”
***
남자들로 북적이는 저택은 가을 연회 때와 또 다른 분위기였다. 반 빌힐름파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서일까. 가을 연회가 정말 연회처럼 느껴졌다면 이들의 모임은 무겁고 진중했다. 응접실에 모여 친목을 나누거나 후원을 감상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작은 방에 모여 반쯤 술에 취해 토론하고 서로 언성을 높이느라 바빴다. 시종을 부를 때도 누구를 데려오라, 음식과 술을 가져오라 명할 때가 전부였다. 그 엄숙하고도 거친 공기에 고용인들 역시 절로 말수가 줄었다.
“윌 백작이 각하와 아즈마리아 아가씨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고 있나 봐요.”
만찬 준비가 한창인 시간대였다. 내 심부름을 빌미로 별관까지 찾아온 메어리가 의자에 앉으며 속삭였다.
“오늘 만찬이 열린 이유가 그 문제 때문인 것 같아요. 귀족들 사이에서 윌 백작을 무시하고 결혼식을 속행하느냐, 아니면 돌려보내느냐로 계속 언쟁중이에요.”
“그래서야 오늘 안에 어디 결정이 나겠나.”
“피오라 부인 말씀에 의하면 저녁 만찬에서 강압적으로라도 의견이 모아질 거라던데요?”
메어리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그녀 앞으로 아즈마리아가 내게 선물한 초콜릿 상자를 밀었다. 예전이었다면 비명을 내지르며 받아먹었을 텐데, 이제는 그럴 기운도 없는지 종이 포장지를 까는 손길이 느릿했다.
“콜렌토 부인과 피오라 부인 사이에 은근한 신경전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그만큼 두 분이 우리에게 최대한 피해 가지 않게 하려고 신경 쓰시니까.”
“전에 있던 곳에서는 하녀들끼리도 파벌 싸움이 엄청 심했거든요. 역시 잉고르드구나 싶기도 하고….”
“피오라 부인의 사람이 된 만큼 콜렌토 부인에게 더 깍듯이 대하는 게 좋을 거야.”
“네. 그럴게요.”
별관에서 지내니 원하지 않아도 외딴 섬에 동떨어진 기분이 들곤 한다. 그런 나를 배려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마음 털어놓을 곳이 필요한 건지는 몰라도 메어리는 종종 별관을 찾아와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남기고 갔다. 나로선 본관의 소식을 빠르게 들을 수 있는 기회인 만큼 메어리의 방문이 기꺼웠다.
<깃이 초록색으로 바뀌었을 때.>
그리고 어젯밤에는 서점에서 답신까지 받아왔으니…. 이제 하루에 한 번씩 번화가로 내려가 서점 간판에 걸린 깃의 색만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저 모레부터 따로 방이 생겨요.”
“그거 축하할 일이네. 카센 경과는 어때?”
“나쁘지 않아요. 이야기해 보니 각하와 검밖에 모르는 남자더라고요. 차라리 그게 낫다 싶어요.”
“멋진 로맨스를 꿈꾸던 아가씨는 어디로 가고.”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잖아요. 전 지금으로 만족할래요.”
메어리는 변했다. 늦여름에 잉고르드 저택을 찾아왔던 어린 여인은 이제 다소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작 한 계절도 안 되어 메어리는 잉고르드에 순응하고 성숙해졌다. 베르크네가 내게 했던 말이 이런 의미였을까 싶었다.
“수잔.”
그때, 주방 밖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르크네 씨.”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메어리가 눈치 좋게 몸을 일으켜 주방을 벗어났다. 베르크네는 선 자세 그대로 내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군.”
“제가요? 그럴 리가요.”
베르크네가 나를 찾아오는 경우는 하나밖에 없다. 바로 리히튼에게 데리고 갈 때. 그러나 베르크네는 딱히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할 말 있으세요?”
말을 고르듯, 잠시간 턱을 쓸던 베르크네가 내게 물었다.
“수잔. 킨과 결혼할 생각 없나?”
“미치셨어요?”
베르크네를 안 이래로 그에게서 들은 말 중 가장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피오라 부인도 비슷한 소릴 했었지. 엮여도 하필 킨이랑 엮이다니. 당장 어제의 헛짓거리만 상기해도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었다.
“킨은 유서 깊은 귀족 가문 혈통이야. 역모 죄를 뒤집어쓰고 영지와 재산을 몰수당한 터라 무고를 입증할 시간이 필요할 뿐.”
“그 입증을 각하께서 해 주실 거란 소린가요?”
거래를 한 건가. 어렴풋하게나마 킨이 나와 베르크네처럼 잉고르드 독에 중독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돌아갈 곳이 있었던 거야.’
그를 나와 같은 개로 취급했던 과거의 행적들이 의도치 않게 우스워졌다.
“킨의 가문은 네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집안이다. 남은 혈족이 킨뿐이니, 무죄가 입증되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에 오를 거야. 그의 부인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전 각하의 개잖아요.”
킨이 비록 나와 다른 처지라고는 해도 베르크네의 헛소리가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백 번 양보해서 죽지 못해 사는 내 꼴에 동정심이 일었다고 치자. 그런데 왜 하필이면 킨이란 말인가. 그것도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게다가 살아 숨 쉬는 독이나 마찬가지죠. 이런 저보고 결혼이요? 제가 비록 킨을 싫어하긴 하지만, 그에게 몹쓸 짓까지 하고 싶지는 않네요.”
“해독제는 있어. 킨이 각하께 부탁한다면 들어 주실지도 모르지.”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만을 하는 베르크네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너무나 두루뭉술한 소리지 않은가. 어물쩍 넘기기에는 상대가 상대다. 내게 무엇을 알리려는 거지?
“아즈마리아 아가씨의 영향력이 그렇게 큰가요?”
“영향력? 기사와 고용인들이 시끄러워졌다는 것 외엔 솔직히 모르겠군.”
알고는 있었지만 베르크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마치 제가 더는 필요 없다는 듯 이야기하시기에. 각하께서 아즈마리아 아가씨의 열렬한 구애에 못 이겨 홀라당 넘어가신 줄 알았어요.”
“그것과 이게 무슨 상관이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잔혹하고 비열했던 과거의 흔적들을 지우는 거죠. 이를 테면 잉고르드 독이나 저 같은.”
“건방진 소리는 삼가라, 수잔.”
“그것도 아니면 무슨 일 있나요?”
대체 무슨 일이기에 별관까지 찾아와 내게 결혼이나 하라는, 평범해서 더욱 수상한 잔소리를 해대는 걸까. 긴 침묵 끝에 베르크네가 입을 열었다.
“당분간 킨 옆에 붙어 있도록 해. 녀석이 좋아하는 사과 파이로 꼬셔서 별관에 붙여놓든지, 아니면 억지로 끌고 다녀서라도.”
그 말이 끝이라는 듯, 베르크네는 반쯤 몸을 돌린 채 내게 대답을 종용했다. 그것도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노력할게요.”
그가 떠난 후 나는 주방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 주인에 그 측근 아니랄까 봐. 속 시원하게 알려 주는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것이 베르크네의 최선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크네가 조심할 정도라.”
설마 리히튼이 날 처리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하지만 아니라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그는 모종의 이유로 날 증오하고 있지 않은가. 아아. 지친다.
***
해가 진 후, 아즈마리아와 함께 본관에서 열리는 만찬에 참석했다. 나는 멀찍이 선 시종들 사이에 껴서 아즈마리아만을 보필했다. 일렁이는 촛불 속에서 간간히 보이는 얼굴이 백옥처럼 곱고 아리따웠다. 만찬의 분위기는 좋게 표현해도 무난하다고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리히튼은 가만히 앉아 음식만 삼켰다. 힐끔 그를 훔쳐보기 바빴던 아즈마리아도 나중에는 지쳤는지 얌전히 식사에만 집중했다.
“하다못해 그 간악한 빌힐름이 보낸 간자라는 생각은 안 드는 것이오!”
“자네, 윌 영애를 앞에 두고 무례하군.”
“우리는 죽어도 찬성할 수 없소. 그래,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아! 이제껏 쌓아온 것들이 단숨에 무너지는 꼴은 절대 못 보오.”
아즈마리아는 자리에 없는 취급을 당했다. 마른 등이 지쳐 보였다. 그녀는 내가 시중을 들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을 때만 숨통이 트이는 얼굴을 했다.
공교롭게도 만찬은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끝났다. 일부 귀족들이 더는 한자리에 있을 수 없다며 자리를 뜬 탓이다. 의견은 모아지지 않았다. 내일 이 지겨운, 토론 아닌 다툼을 더 참아내야 한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피곤하네요. 오늘은 일찍 누워야겠어요.”
아즈마리아의 불은 밤 아홉 시도 되지 않아 꺼졌다. 나는 그녀가 잠든 모습을 확인한 후 몰래 저택을 벗어났다. 그리고 번화가로 뛰듯이 걸었다. 내일은 더 바쁠 테니 지금이 아니면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헉, 헉….”
그리고 도착한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서점의 문 위쪽에 짧은 천이 펄럭이고 있었다. 녹색의 깃. 심장박동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갈비뼈를 뚫고 터져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저 안으로 발을 디디면 나는 빌힐름의 흔적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걸 알기에 두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너는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아름다고 가장 약하며 가장 처절하고, 가장 추잡하지. 하지만 괜찮아. 난 그런 너를 통해서 살아 있다고 느끼니까.’
시를 낭송하듯 조화로운 음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는 내게 있어 살아있는 공포다. 과거에는 극복해야 할, 혹은 죽여야 할 적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내게는 증오심보단 두려움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모두 과거의 일이지.’
굳게 닫힌 문 앞에 멈춰 섰다. 빌힐름이 이 문 너머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것도 아닌데, 극심한 긴장감으로 손이 뻣뻣했다. 나는 왜 빌힐름을 올곧은 길을 따르는 정의의 대변자라고 여겼을까? 빌힐름의 약혼자는 어째서 자신을 아그레인이라 여기는가. 빌힐름은 어째서 내게 아그레인의 초상화가 그려진 펜던트를 선물했는가. 나에게는 그 진의를 알아내는 것이, 이곳에서 도망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왜.”
왜냐하면….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나의 모든 호흡이 멈추었다. 기다란 그림자가 등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내 어깨를 스치고 뻗어 나온 팔이 문을 밀어냈다.
“왜,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 계시는지.”
이다지도 다르다. 과거의 꿈을 꾸기 전까지, 그는 나에게 있어 『태양이 흐르는 강』 속 주인공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허구를 지워낸 진짜 빌힐름이 내 안에서 똬리를 틀어 가고 있었다. 그의 이름에는 쇠로 만든 가시가 돋쳤고 악취가 나는 구정물이 떨어졌다. 수 년 전의 기억일 뿐인데, 내게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했다.
“혹시 절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까?”
괜찮아. 나는 지금 잉고르드에 있어. 그의 개가 아니야.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그 자리에 내가 알던 꿈속의 그 소년은 없었다. 밤하늘을 등지고 선, 부드러운 미소를 걸친 성숙한 남자만이 존재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려다가 숨을 고르기 위해 다시 입을 닫았다. 베일 아래의 얼굴을 본 적 없는 빌힐름이 나를 아는 체한다. 이는 내가 아그레인이라는 완벽한 방증이기도 했다. 안도감은커녕 과도한 긴장으로 입 안이 마르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한다면 여러모로 불리해질 수 있었다. 최대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자.
“누구시죠?”
“모르는 척하실 필요 없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당신의 얼굴은 그대로니까.”
빌힐름이 부드럽게 웃었다.
“덕분에 하마터면 몹쓸 짓을 할 뻔했지만… 안으로 들어가지요. 날이 꽤 쌀쌀하군요.”
직접 문을 열어 날 안으로 들이는 모습에는 여유가 넘쳤다. 나 역시 그의 미소를 따라하며 대답했다.
“제국의 황자씩이나 되시는 분이 저를 알고 있을 줄이야…. 진실로 이 현실이 믿기지 않네요.”
“현실이라. 내가 당신을 안다는 현실을 말하는 건지, 당신이 잉고르드에서 하녀 노릇을 하는 현실을 말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요.”
빌힐름의 물음은 꽤 노골적이었다. 나를 떠보려는 심산이구나. 그가 지금의 나에 대해 아는 건 고작 잉고르드의 하녀라는 점이 전부일 것이다. 이는 그와의 대화에서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잉고르드에서 지내는 게 그쪽에게 놀라운 일인가요?”
“놀랍습니다. 그것도 몹시.”
“이해할 수 없는 소릴 하시네요. 내가 말한 현실은 전자였는데.”
서점은 어둡고 건조했다. 메마른 공기가 살갗에 닿아 오자마자 문이 닫혔다. 일렁이는 등불, 고립된 공간, 그리고 빌힐름. 최대한 느리게 숨을 골랐다. 아그레인은 잊자. 지금부터 나는 수잔이야.
“제 서신 때문에 잉고르드까지 오신 건 아니겠죠?”
“왜 아니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군요.”
“어제 보낸 서신이 하루도 안 되어서 황성까지 날아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요.”
“잉고르드에 정착해 당신이 나를 부르길 하염없이 기다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고저 없이 차분한 음성이었다. 빌힐름은 오래된 나무 의자를 내게 밀고, 자신은 낮은 사다리에 걸터앉았다. 눈앞의 빌힐름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니, 내가 오랜 시간 알던 빌힐름에 걸맞았다는 표현이 더 옳을 터였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수많은 시련을 이겨내고 최후의 승리자가 될 남자. 리히튼의 목을 자르고 제왕이 될 남자. 그의 태도와 표정, 어투에서는 고압적이거나 서늘한 분위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신사다운 기품과 고고함이 당연하다는 듯 몸에 배어 있었다. 꿈속의 소년은 마치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그레인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아니요, 수잔이라고 불러 주세요. 아그레인은 너무나 남의 이름 같아서.”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으며 대답했다.
“익숙하지는 않아도 마땅히 당신의 것입니다.”
그가 긴 팔을 뻗어 테이블 위 등불에 불을 붙였다.
“내가 당신의 친척이라고 했었죠.”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황실일 리는 없고… 그렇다면 나는 귀족 가문의 영양인 건가요?”
은근한 기대감이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빌힐름의 개로서 살아온 역겨운 과거는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예. 수잔, 당신은 그렌페르크 제국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가문의 일원이자, 마지막 후계자입니다.”
“그곳이 어디죠?”
“캐롤드.”
수 년 전 멸문한 가문의 이름을 아는 하녀는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처음 들었다는 듯 어색한 표정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 놀랍네요. 나는 내가 부모도 모르는 고아라고 생각했는데. 한데 마지막 후계자라면….”
“당신이 사라진 후 멸문했습니다. 캐롤드는 그 흔한 방계도 없던 가문이었으니까요.”
“이런, 그런 비극적인 일이 있었다니.”
옛 이야기를 하는 그의 얼굴은, 착각이 아니라면 조금 지루해 보였다.
“저는 조금 더 놀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셨을 수 있어요. 하지만 솔직히 남의 일처럼 느껴지니까요.”
“이상한 일이군요. 진심으로 남의 일처럼 느꼈다면 제가 서신을 받는 일도 없었을 텐데요.”
빌힐름의 귀공자처럼 새하얀 얼굴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제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고 계시네요.”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어요. 어떻게 아는 거죠?”
빌힐름이 턱을 괸 채 내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과거를 모르는 수잔은 그의 시선을 피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나는 처음부터 당신이 빌힐름 황자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오히려 내가 모르는 척하는 거라 여길 수 있지 않나요?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꽤 돈독한 사촌지간이었나 보네요.”
돈독한 사촌지간. 내 입으로 나온 말이지만 역한 기운이 명치로부터 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수잔 양.”
“네.”
빌힐름이 길게 숨을 들이켰다.
“크로허츠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 그때의 내 심정을….”
지루함을 참아내던 얼굴에 흐릿한 환희가 떠올랐다.
“수잔 양은 죽는 그날까지 모를 겁니다.”
알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으나 눈을 뗄 수 없었다. 빌힐름이 내게서 단 일 초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신을 받고 꽤 고민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도움이 무엇을 위한 도움인지 곧바로 파악하기 힘들더군요.”
“제가 너무 두루뭉술하게 적기는 했죠. 죄송해요.”
“아니요. 수잔 양을 돕는다는 건 내게 아주 즐거운 고민이니까요.”
진심이라는 듯, 빌힐름이 처음으로 따스한 미소를 띠었다.
“기억을 잃은 당신이 고작 첫 만남이 다인 내게 도움을 요청했으니… 그만큼 급박한 상황일 거라 여겼습니다.”
대답하지 않고 옷깃을 매만지며 머뭇거렸다. 그의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이, 가능하다면 최대한 허술하고 속이 얕은 사람으로 보이길 바랐다.
“리히튼 공작입니까?”
“제 고용주가 리히튼 공작 각하이시긴 하죠.”
“수잔 양. 고용주는 하녀에게 살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니요. 저는 하녀가 맞아요. 다만 그분이 하라는 대로 움직일 뿐이에요.”
“그가 두렵습니까?”
빌힐름의 목소리는 몹시 다정했다. 여유롭고 정중한 태도를 보이며 최대한 내가 긴장감을 느끼지 않도록 유도했다. 그것도 아주 능숙하게. 과거의 그를 몰랐다면 내 속마음을 거리낌 없이 모두 털어놨을 것이다.
“어느 누가 리히튼 각하를 두려워하지 않겠어요?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감당할 수 없는 살의가 느껴지고, 어쩔 수 없이 두 다리가 덜덜 떨려서….”
“그가 수잔 양을 정부처럼 대하지는 않습니까?”
순간 모래를 삼킨 듯 목구멍이 턱 막혔다. 아아, 바보 같은 수잔. 수 초가 흐른 후 내 표정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동요한 모습을 보인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
“아, 죄송합니다, 표현이 너무 노골적이었군요.”
“그게 대체 무슨 의미죠?”
이건 기회였다. 내가 모르는 리히튼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기회. 빌힐름이 굳게 닫힌 입술을 짧게 쓸었다.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수잔 양, 잘 들으십시오. 리히튼 공작이 진정으로 무서운 이유는 사람을 손바닥 위에 둔 채 가지고 놀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는 저도 충분히 알고 있어요.”
“당신은 모릅니다. 그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요, 공작은 시궁창보다 더 낮은 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남자입니다.”
조소할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그 시궁창의 주인이 바로 빌힐름 본인이라는 걸, 내가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하겠지.
“공작은 사람이 무엇에 끌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묘하게 이용하지요. 상대가 하녀라면 더더욱 쉽겠군요. 당신이라는 존재가 공작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굴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내가 더는 조소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어느 날은 욕망을 비추고, 어느 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행세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냉혹하지만 당신의 말에는 귀를 기울인다거나, 혹은 당신 앞에서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거나.”
동요하고 싶지 않아도 빌힐름이 뱉은 낱말 하나하나가 귀에 틀어 박혔다. 리히튼과 나눈 대화, 그가 내게 보인 표정들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오르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내가 너의 주인이라니. 지랄 맞게 과분한 꿈이로군.’
‘아즈마리아 윌 영애가 내게 혼인을 요구하는데, 소중한 연인의 의사를 묻지 않을 수 없지.’
‘난 오직 너 하나만을 보고 여기까지 왔어. 이 끝나지 않는 끔찍한 지옥에서 너 혼자 편한 꼴은 못 보지.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되었는데.’
힘겹게 떨쳐내자 이번에는 기억 깊숙한 곳에서 떠오른 베르크네의 조언이 리히튼의 목소리를 뒤덮었다.
‘수잔. 각하께서 우리를 특별히 여긴다 하여, 멍청하게 두 눈을 감고 있으면 안 된다. 자만은 잉고르드의 독과 달라. 널 집어삼키고 종국엔 몰락하도록 만들 거다.’
빌힐름이 말을 이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즈마리아 윌에게 보이는 호의는 가짜이고, 수잔 양에게 보이는 감정의 파도는 진실한 마음으로 느껴졌겠지요. 리히튼 공작에게는 손쉬운 일입니다. 그런 식으로 원하는 것을 빼앗고 정복해왔으니까.”
휘둘리면 안 된다. 하지만 휘둘린 것처럼 보여야 해.
“거짓말하지 마요. 아니야, 리히튼은 내게….”
얼굴을 감싸며 꽉 맞물린 입술을 열었다. 아닌 척해도 반쯤은 진심이나 다름없다는 걸, 나 또한 인정하고 있었다. 빌힐름은 모르겠지만 그의 주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 나는 리히튼에게 있어 아즈마리아 윌이나 에리얼 크로허츠와 전혀 다른 존재다. 그들과 달리 리히튼에게 빼앗길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빌힐름이라는 사슬을 통해 과거를 공유하고 있었다.
“공작과 수잔 양이 과거에 인연이 있다는 사실은 압니까? 정확히는 인연이 아니라 악연이겠군요. 그 손으로 직접 공작이 가장 소중하게 대하던 것을 완벽하게 박살냈으니.”
심장이 뛰었다. 빌힐름의 발언이 이제껏 내가 가장 궁금하게 여겨온 정보였기 때문이다. 아그레인은 어찌하여 리히튼의 증오를 받게 되었는가? 그 진실을 아는 자가 눈앞에 있었다.
“소중한 것이라니요?”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말해 봤자 혼란만 가중될 뿐입니다.”
“이미 충분히 혼란스러워요. 오히려 잊어버린 과거를 알려 주는 게 내게 도움이 될 수 있어요.”
“도움이라…. 그것이 어떻게 당신에게 도움이 됩니까? 리히튼 공작의 증오가 당신을 향하게 된 이유를 알면, 가서 무릎 꿇고 사죄라도 할 생각입니까? 그가 과연 당신을 용서할까요? 용서하지 않는다면 남은 수는 도망치는 것뿐이겠군요. 사냥감을 절대 놓치지 않는 리히튼 잉고르드에게서.”
다정한 음성이지만 가슴 안쪽을 강하게 후벼 파는 말들이다. 더욱 개 같은 건 그의 말에 틀린 소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리히튼은 요새와도 같은 남자다.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돌연 나타나 날 저택 안에 가둬두고 사라진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하며 실제로 빌힐름의 심복들은 하나둘 그의 손에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리히튼이 짜 놓은 계획의 일부라면…. 빌힐름의 말대로 나를 향한 리히튼의 감정은 껍질만 남은 채 오래전에 쇠퇴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공작은 오직 복수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리히튼에게는 아즈마리아도 에리얼도 수잔도 아그레인도 모두 수단에 불과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완벽하게 설계된 수단.
“그러니 수잔 양을 죽일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또 고통스럽게.”
어느새 다가온 기다란 손가락이 내 턱을 끌어 올렸다. 등불에 일렁이는 빌힐름의 붉은 눈동자가 용암처럼 뜨거운 울림을 발했다.
“당신이 모든 불안을 떨친 후 완전히 마음을 열었을 때. 누구보다 가장 비참하고 잔혹하게.”
“그건 당신도 포함된 결말인가요?”
“공작이 내 이야기를 했습니까?”
“그분은 당신을 항상 평생의 철천지원수인 양 언급하셨죠.”
리히튼의 소중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무엇이었기에 아그레인은 그를 짐승처럼 가둬 두었던 빌힐름과 비견되는 증오를 받아야 하는 걸까.
“나는 이제 어쩌면 좋죠?”
그의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평온함이 깃든 시선으로 어린아이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나와 돌아갑시다, 누이. 누이의 핏줄을 증명해 가문을 재건하고, 스러졌던 캐롤드의 역사를 다시 세우는 겁니다.”
“제가 돌아갈 곳은 어디죠?”
“황성.”
헛웃음이 났다. 꿈에서 아그레인이 그랬듯, 쇠창살에 갇혀 길러지던 그 핏줄임을 증명받고 또 다시 갇히라는 소리가 아닌가. 망발도 그런 망발이 없다.
‘빌힐름은 아직 날 포기하지 않았어.’
이유가 뭐지? 옛적의 그 추잡한 감정이 남아서? 아니면 또 다른 노림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하지만 저는 그분이 아니면 안 돼요.”
고개를 젓고 뺨에 닿은 그의 손을 조심스레 털어냈다. 아즈마리아가 종종 지었던 그 가련한 표정을 따라했다. 떨쳐내지 못하는 미련과 미약한 기대감이 엿보이는 그 표정을.
“저는 리히튼 각하를 사랑해요.”
숨 막히는 눈빛이 날 잡아먹을 기세로 훑었다. 직전까지의 친절함과 기품이 느껴지던 분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빌힐름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본성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기억 속 잔상으로만 남은 두려움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것 같았다.
“…더는 늦출 수 없겠군. 내가 당신을 데리러 가겠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서점을 나갔다. 손바닥에 땀이 고이는 느낌이었다. 문 앞에 선 그는 가볍게 날 껴안았고, 이마 위로 짧게 입맞춤을 남겼다.
“그곳에서 누이를 구할 나를 기다리세요.”
빌힐름은 나를 배웅했다. 마치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올 것을 예감한다는 듯 여상한 얼굴이었다.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떴다. 길목에서 방향을 틀 때까지 수십 번 뒤를 확인했고, 고개를 틀 때마다 빌힐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미친 새끼.”
날 구하겠다는 개소리를 하다니. 뛰듯이 걸어 번화가를 벗어났다. 등 뒤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뒤따라오는 착각이 일었다. 어둠을 헤치고 잉고르드 저택 후문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십 분 가량이 흐른 뒤였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 커다란 느릅나무가 선 자리에 노란 불이 떠올라 있었다.
“킨.”
긴장으로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리도 큰 신장에 저런 껄렁한 자세로 기대어 있을 남자는 한 명뿐이었다.
“설마 기다린 거야?”
가까이 다가가자 희미한 빛에 그림자 진 얼굴이 드러났다. 나를 응시하는 킨의 표정은 몹시 차가웠다.
“너, 베르크네 씨의 충고를 잘 새겨듣는 편이 좋을 거다.”
“충고?”
“쯧. 멍청한 얼굴로 모르는 척하기는. 혼자 다니지 말란 충고가 기억 안 나는 거냐?”
킨이 앞장서서 저택으로 몸을 틀었다.
“이유도 알려 주지 않고 그런 충고를 하면… 잘 지켜질 리 없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리 말해 두는데, 나도 몰라.”
“바라지도 않으니 괜한 걱정 말아 줄래?”
어딜 갔다 왔느냐고 묻지 않는 점이 안도되면서도 불안했다.
“베르크네 씨에게도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지.”
말라가는 초원을 건너며 킨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겠지.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인물과 연관됐다거나. 입에 담을 수 있어도 확신할 수 없다거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는 건 리히튼의 얼굴뿐이다. 하필이면 빌힐름이 확신하는 투로 내게 경고한 뒤라 더욱 그러했다.
“베르크네 씨의 말은 참 잘 듣는단 말이지.”
킨이 힐끔 나를 돌아봤다. 밤바람에 그의 붉은 머리칼이 거세게 휘날렸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
“감에 따르는 편이었어?”
“나 정도 되는 기사는 감도 믿을 만하다고. 그러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수잔.”
조심이야 늘 하고 있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 소리가 스산하다. 어쩐지 저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내일은 태풍이 오겠군.”
빨라지는 킨의 걸음을 뒤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별관 밖에서 올려다보는 아즈마리아의 방은 밤하늘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어두웠다. 조용히 문을 열고 주방을 지나쳐 침실로 향했다. 아니, 지나치려고 했다.
“수잔.”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식탁에 앉아 있던 아즈마리아가 천천히 의자를 밀어내며 일어섰다. 예상하지 못한 인기척에 몸이 굳었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물었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아즈마리아는 입을 닫고 물끄러미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정적 속에서 희미했던 빗소리가 점차 선명해졌다.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침대에 누워서 공상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수잔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도 제대로 고마움을 나타내지 못한 것 같다고.”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다소 갑작스럽다고 느껴지는 고백이었다.
“몸은 이제 완전히 나았나요?”
“네.”
“아, 놀랍네요. 몹시 치명적인 독일 텐데.”
무슨 의도일까. 굳이 이 시간에 내게 감사를 표하며 몸 상태를 묻는 이유.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최대한 몸을 사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제게는 웬만한 독이 안 통합니다. 면역이 있어서요.”
“그것도 리히튼 각하의 그림자이기 때문인가요?”
“네.”
아즈마리아의 얼굴에 씁쓸한 감정이 떠올랐다.
“미안해요. 제가 괜한 것을 물었네요.”
“괜찮습니다.”
설마 정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나를 기다린 건 아닐 테지. 아즈마리아가 식탁에 놓여 있던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흐릿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분명 고급 종이 상자였다. 짧은 고민 끝에 그녀의 손에서 상자가 열렸다.
“하녀들에게는 장식품 착용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수잔은 내 아이의 유모가 될 사람이니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아즈마리아는 자신의 입으로 아이는 만들지 않을 것이라 단언했었다.
“제가 가진 귀걸이 중에서 가장 값비싼 흑진주예요. 일부러 눈에 많이 띄지 않는 물건으로 골랐어요.”
그녀가 내민 물건은 먹물을 먹은 듯 까맣고 부드러운 윤기가 도는 흑진주 귀걸이였다.
“아가씨, 이런 건 받을 수 없습니다.”
“값비싸다는 수식언을 붙였기 때문인가요? 하지만 나는 이 귀걸이를 더는 즐겨 사용하지 않아요.”
“저는….”
“당신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에요, 수잔. 부디 내가 체면 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반강제로 받는 선물을 과연 선물이라 할 수 있을까. 더는 거절할 수 없었기에 그녀에게서 귀걸이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내가 도와줘도 될까요?”
대답하기도 전에 아즈마리아가 귀걸이 한쪽을 손으로 집었다.
‘왜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지.’
굳이 지금. 머리를 귀 뒤로 넘기자 아즈마리아가 한쪽씩 차례대로 귀걸이를 끼워 주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네요.”
하녀복에 진주 귀걸이라. 정말 잘 어울리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항상 착용해 줄 거죠?”
“네, 그러겠습니다.”
아즈마리아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녀가 주방을 벗어난 한참 뒤에 침실로 돌아갔다. 많고 많은 것들 중 왜 하필 귀걸이일까. 왜 하필 가장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귀걸이일까. 아즈마리아는 베아트리체 왕녀에게도 선물을 건넨 적이 있었다.
<표적>
귀걸이는 서신보다 더 한눈에 들어오고 사람을 구분하기에도 쉬운 물건이지 않은가.
‘베르크네 씨가 조심하라고 했던 이유는 리히튼이 아니라 아즈마리아였던 건가….’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처리하려 하는 건 너무나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다.
‘아니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닐 수도 있어.’
리히튼의 최측근을 차례대로 죽이려는 계획이거나, 미래를 아는 존재가 본인 하나면 족하다는 판단 하에 세운 계획이거나.
‘전자는 아니야. 그럴 낌새였다면 베르크네 씨가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아즈마리아의 타겟이 오롯이 나로 한정된다고 볼 수 있었다. 무슨 의도인지 궁금했다. 아즈마리아는 홀로 미래의 정보를 독점하고 싶은 걸까? 혹은.
“날 연적으로 여긴다거나.”
미래가 아니라 리히튼을 독점하고 싶은 건가. 귀에 걸린 진주를 조심히 쓸었다. 사실상 암살자에게 죽여 달라고 알리는 표식이나 다름없었다.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을까. 그렇게 밤새 빌힐름과 아즈마리아에 대해 고민하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
태풍이 몰아쳤다. 나는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빗속을 거침없이 걷고 있었다. 이제는 인지할 수 있다. 이곳은 내 꿈속이다. ‘그 시기’의 황성에서 빌힐름의 개로 지내는 꿈.
[하아, 하아….]
차갑게 식은 온기에 어깨가 덜덜 떨렸지만, 머릿속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손에 쥔 단검이 그 어느 때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나는 리히튼을 만나러 간다. 비비안느에게 그러했듯 소년의 약점을 이용해 천천히 가까워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도 오늘로써 완전히 불에 타 사라졌다. 비비안느가 여전히 빌힐름의 개였기 때문이다. 비비안느는 여전히 그에게 복종했고, 여전히 나와의 일상을 그와 공유했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했다.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나는 개가 필요해.]
비비안느를 통해 사탕을 이용한 꿀 발린 복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배웠다. 복종에는 공포가 필요하다. 빌힐름이 나와 비비안느에게 그러했듯이.
[하아, 하아….]
그렇게 얼마나 깊은 숲을 헤치고 들어갔을까. 고대하던 낡고 병든 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낮아지는 온기에 몸이 무거워지기는커녕 갈수록 가벼워진다. 흥분으로 머리에 열이 쏠렸다. 나는 거리낌 없이 문을 열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방문하는 장소였으나 낯선 감각은 없었다. 나의 목표는 오롯이 하나였다. 그 목표를 위해 태풍 속에서 비까지 뚫고 이곳에 도달한 게 아니겠는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근처에서 오래된 나무의 삐걱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누구세요?]
목소리의 주인은 황성에서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초라한 행색이었다. 비비안느의 말이 정확했다. 낡은 하녀 복에 푸석푸석한 갈색 머리카락, 야윈 뺨, 그럼에도 밝은 기운이 도는 까만 눈동자. 리히튼이 이곳에 감금될 때 함께 왔다는 하녀, 제인이었다.
[누구세요?]
[빌힐름 전하의 심부름을 왔어. 괜찮다면 지금 당장 리히튼에게 안내해 줄래?]
[누구신지 여쭈었어요.]
제인이 경계서린 눈빛으로 노려봤다. 나는 최대한 무해한 미소를 보이며 어수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분의 침실 하녀.]
제인은 나의 표현을 단숨에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를 이층으로 안내했다. 성은 심하게 낡은 것치고 퍽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저 하녀 혼자서 이곳을 관리하겠지. 멍청하지도 않은 데다가 맡은 바에 충실한 하녀라니. 마음에 드는 여자였다.
똑똑.
[리히튼 님. …빌힐름 전하께서 손님을 보내셨습니다.]
나 같은 이의 방문이 처음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작고 불결한 성에 찾아와 빌힐름의 무엇을 전했을까. 이윽고 나타난 방 안은 구석구석에 자리한 수십 개의 등불로 눈이 아프게 환했다. 그리고 활짝 열린 창문 너머에서 쏟아지는 빗물로 인해 바닥이 엉망이었다.
[리히튼 님!]
소년은 고인 물웅덩이 위에 서 있었다. 이리저리 뻗친 뒤통수가 온전히 어둠 속에서 들이치는 빗발을 향해 있었다.
[리히튼 님. 그러다 감기 걸리세요.]
제인은 익숙한 듯 그에게 달려가 창문을 닫았다. 마른 이불을 끌어 리히튼의 젖은 머리칼과 얼굴을 세심하게 닦았다. 나는 그 광경을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응시했다.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저기에 있다.
[리히튼 님. 빌힐름 전하의 손님이 오셨어요.]
소년이 내게로 몸을 틀었다. 앙상한 몸이었으나, 얼굴은 꽤 볼 만했다.
[…빌힐름?]
리히튼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년은 멍한 표정으로 비척비척 다가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가만히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정말 개 같았다.
[빌힐름이 네게 그러라 가르치던?]
대답은 없었다.
[빌힐름이 네게 개처럼 굴라고 명했느냐 묻잖아.]
역시 대답은 없었다.
[가엾은 리히튼. 너 역시 나와 같은 방식으로 평화를 얻었구나. 그 평화 속에서 행복하니?]
[네.]
처음으로 듣는 목소리였다. 듣기에 거북함이 일 정도로 거칠었다. 비록 목소리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리히튼의 대답은 만족스러웠다. 미약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구나. 행복하구나.]
문을 닫고 제인의 종아리뼈를 걷어찼다.
[악!]
숙여지는 머리를 쥐고 우비 안쪽에 달아 놓았던 단검을 빼들었다.
[왜 행복해? 나는 이곳에 온 이후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는데.]
벽을 짚고 허우적거리는 손등에 검을 박았다. 힘이 모자라 완전히 관통시키지는 못했다. 박힌 단검을 다시 빼 제인의 목을 위협했다. 귀를 괴롭히던 비명이 그제야 잦아들었다.
[아, 아아!]
[납득할 수 없어, 리히튼. 어떻게 행복하다는 말을 해? 이런 더러운 시궁창에 갇힌 인생이 행복하다고?]
제인의 몸은 내가 태풍 속을 헤치고 왔을 때보다 더 강하게 떨었다.
[아….]
무감각하던 리히튼의 얼굴에 드디어 감정이라는 것이 피어났다. 아주 익숙한 표정이었다. 후두둑 눈물을 떨어뜨린 소년이 엉금엉금 기어서 내 쪽으로 다가오려 했다.
[멈춰.]
[죄송해요. 자, 잘못했어요. 죄, 죄송해요. 다, 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시끄러우니 조용히 좀 해줄래?]
[저, 저를 벌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벌을 받을….]
[리히튼 잉고르드.]
소년이 울음을 멈추었다. 뚝 그친 그의 얼굴에 대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 리히튼. 이 새장에 끌려온 이후부터 매일 매일이 그래. 그 개자식들에게 힘을 봉인당하고, 종처럼 부려지는 날들이 말이야. 죽이고 죽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날마다 수십 번은 참아내지.]
리히튼의 멍청하기만 했던 낯 위로 색이 깃들기 시작했다. 마치 가면을 벗은 양 이전과는 상반되는 분위기의 인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소년이 나를 불렀다.
[캐롤드.]
[안녕, 리히튼. 앞으로는 아그레인이라고 불러 줘.]
제대로 마주하게 된 리히튼 잉고르드는 진중하면서 차분한 눈을 지닌 소년이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도 이전에 비해 훨씬 듣기 좋았다. 그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서 나가야겠어.]
[어리석은 생각이야.]
[나갈 방법이 있어.]
[성공하지 못할 거다.]
제인의 떨림이 어느새 완전히 멈춰 있었다. 나는 손목을 틀어 그녀의 왼쪽 귀를 잘라냈다.
[아아악!]
[말을 잘 골라서 하는 게 좋을 거야, 리히튼. 나는 네가 상냥한 제인을 죽이지 않길 바라.]
피비린내가 강하게 풍겼다. 제인의 두 번째 비명에 리히튼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안도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우스웠다. 멍청하게 황성에서 약점을 만들어 놓다니!
[으, 흑….]
제인의 울음보다 빗소리가 더 컸다. 그녀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리히튼이, 내게는 애착 인형을 버리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빌힐름이 오늘 일을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건가?]
[빌힐름은 이런 나를 가장 사랑하거든.]
너를 얻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그 끔찍한 벌을 열 번은 더 받을 수 있다고.
[차라리 나를 죽여.]
[우리 왕자님… 아주 근사한 말을 하시네.]
제인의 전신은 이미 죽은 듯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턱 아래에 고정시켜 놨던 단검을 더 강하게 눌렀다.
[아아아!]
[나를 죽여, 제발….]
더, 강하게.
[흐흑… 흑….]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더.
[윽….]
[씨발, 당장 멈춰! 차라리 나를 죽이란….]
[내게 명령하면 안 되지, 리히튼.]
손에 힘을 빼지 않고 그를 향해 싱긋 웃음을 보였다.
[다시 말해 봐.]
얼마나 악물었으면 뜯긴 입술에서 피가 났다. 상처가 난 사람은 제인인데 죽어 가는 쪽은 리히튼이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여자가 그렇게 소중해? 일그러진 눈가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제발, 제인을… 그 애를….]
빌힐름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딴 걸 그렇게 재미있어 하다니. 역시 개새끼였어.
[너 정말 쓰레기처럼 약해 빠졌구나.]
손에서 힘을 뺐다. 행복을 느껴온 리히튼이 너무나 증오스러웠지만,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타게 될 사이가 아닌가. 나는 필요한 만큼의 고통만을 심어 주고 싶었다.
[제인은 네가 내 말을 잘 들으면 돌려줄게. 그전까지 내 성에서 귀빈처럼 지내게 될 거야. 이딴 곳에서 먼지 먹으며 하녀 노릇하는 것보다는 훨씬 행복하겠지.]
품 안의 몸이 굳는다.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던 가슴이 돌연 멈추었다. 이내 도망치려는 듯, 힘겹게 날 밀어낸 제인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물론 내내 온 힘을 다해서 머리채를 쥐고 있던 터라 제인의 시도는 허무하게 실패했다.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껴안고 리히튼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기다릴게.]
리히튼이 멍하니 선 채로 굳어 있는 동안, 우리는 느릿느릿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어쩐지 끌려가는 것치고는 이상하리만치 얌전하다 했는데, 제인은 성을 벗어나자마자 간절한 눈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
[무, 무언가 잘못 아신 것 같아요. 저는, 저는 빌힐름 전하의….]
빌힐름의, 뭐? 리히튼을 감시하는 눈이라도 된다는 뜻일까. 놀라울 건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빌힐름다운 행위라 웃음이 새어나올 정도였다.
[아! 걱정 마. 나는 널 데리러 온 거야. 연극이 너무 거칠었지?]
깊게 안도한 듯, 제인이 고여 있던 눈물을 다시 한번 후두둑 쏟아냈다. 무엇에 안도한 걸까. 처음부터 끝까지 다 거짓말투성인데. 풀내음 자욱한 비를 뚫고 성으로 돌아갔다. 얌전히 모여 날 기다리고 있던 하녀들에게 제인을 건넸다.
[버려.]
제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고개를 거칠게 들어 올렸다.
[아, 빌힐름에게는 내가 잘 말할게. 쓸모가 없어져서 처리했다고.]
[안 돼….]
빌힐름의 이름이 나오자 엉거주춤 서 있던 하녀들이 하나둘 제인의 팔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제인의 목에 붉은 핏발이 섰다.
[아, 안 돼애! 나를 리히튼 님에게 보내 줘요! 그분은 내가 있어야 해. 그분은 내가 없으면 삶을 포기하실 분이에요. 제발요, 아가씨. 리히튼 님을 위해서라도….]
[걱정하지 마, 제인. 소중한 게 모두 죽더라도 사람은 살아지더라고. 내가 직접 경험해 봤으니 의심하지 않아도 돼. 너는 죽음으로 마지막 쓸모를 다할 거란다.]
공포와 분노, 그리고 간절함에 일그러진 음성이 수십 번 나를 불렀다. 그녀의 울부짖음에 안온한 열이 전신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간 그 애에게 충성하는 척하느라 수고했어.]
흥분과 쾌락으로 인한 열은 단연코 아니었다. 이건… 그래, 안도감이었다. 리히튼이 누려온 행복 또한 모두 거짓이었다는 안도감.
***
발끝이 저렸다. 덮쳐오는 한기와 두려움으로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눈을 떴는데 이곳이 황성이면? 온몸이 붉게 물든 채로 그 화려한 침실에 누워 있다면? 몰아치는 빗소리 너머로 천둥이 울렸다. 억지로 눈을 떴다. 찰나에 하얗게 밝아진 천장에는 캐노피가 아닌 둔탁한 나무 천장이 보였다.
“하아, 하아….”
다행이다. 이곳이 현실이야. 하지만 검을 쥐었던 감각이 여태 손아귀에 남아 있었다.
“내가….”
죽였다, 그 여자를. 이로써 분명해졌다. 빌힐름이 말한 ‘리히튼의 소중한 것’은 제인이었던 거야. 아카시아 나무숲의 낡은 새장. 그 새장 속에서 유일한 빛이었던 제인. 리히튼에게 있어 제인은 어머니이자 형제이고 친구이자 연인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주인이 비록 빌힐름이었다 하더라도.
‘증오.’
새로웠다. 우리는 황성에 갇혀 버려진 개새끼 신세였다. 나는 황성에서 벗어나길 포기하지 않았지만, 리히튼은 달랐던 것 같다. 또한 나는 그 차이를 견디지 못했다.
‘리히튼은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거지.’
과거에 그가 그러했듯, 내가 자신에게 굴복하길 원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제인에게 그러했듯, 결국엔 내게 칼을 박고 길가에 내버릴까? 기억을 되찾을수록 혼란은 가중된다.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되었어도 해는 뜨지 않았다. 지독한 태풍이었다. 빗줄기가 약해지기는커녕 정오가 되어도 비바람은 더 강해졌다. 우비에 우산까지 쓰고 본관에 들어왔으나 치마와 머리칼이 물에 빠진 양 축축했다.
“수잔. 귀에 그건 뭐니?”
리냐의 한마디에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진주 귀걸이? 엄청 고급스러워 보인다, 얘.”
“애인 생겼어? 설마 킨 경?”
“그럼 킨 경이지 누구겠어. 축하해, 수잔!”
킨의 이름이 언급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안 좋았다.
“아니야. 아즈마리아 아가씨께서 주신 선물이야. 혼자 별관에 남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셨어.”
“아가씨가?”
몰려들었던 여인들이 흥이 깨진 얼굴로 하나둘 흩어졌다.
“그분은 참 신기하단 말이지. 고작 하녀에 불과한 우리를 친구처럼 대하시잖아.”
“아가씨가 정말 우리 마님이 되셨으면 좋겠다. 태풍의 여파로 꼬장꼬장하고 늙은 귀족들이 잉고르드에 고립됐는데, 많이 불편하시겠어.”
고용인들의 마음은 이미 아즈마리아에게 반 이상 기운 것 같았다. 너희의 그 아가씨가 날 죽이려는 건 알고 있니. 고급스럽다고 칭찬한 이 진주 귀걸이가 그 방증인데.
“요즘 수잔의 안색이 좋아져서 그런가, 까만 진주도 참 어울리네.”
“아가씨 밑에서 일하면 나 같아도 얼굴이 펴겠어. 수잔, 아가씨께서 혼인하신 후에 하녀를 한 명 더 둔다고 하시면 나를 추천해야 해. 알았지?”
처음부터 끝까지 허튼 소리였기에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잉고르드 독이 갑작스레 해독된 것도 아닐 텐데, 내 안색이 좋아질 리 없었다. 그리고 아즈마리아의 혼인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 맞을까.’
이제는 모르겠다. 가슴을 내리누르는 답답함에 종일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나의 미래도, 리히튼도, 하물며 아즈마리아조차 더는 내 손으로 휘두를 수 없을 거란 사실이 날 불안하고 위태로운 마음이 들도록 했다. 불현듯 리히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너 역시 곧 선택해야 될 때가 올 거다. 우리 내기의 종착점이 보이기 시작했으니.’
어쩌면, 우리의 내기는 처음부터 승패가 정해져 있었을 수도. …아니야, 그럴 순 없지. 과거의 나는 빌힐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이길 포기했다. 벗어난 지금은? 과연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는 빌힐름으로도 모자라 리히튼까지 날 쥐락펴락하고 있지 않은가.
“수잔.”
“네.”
“각하께서 부르신다.”
베르크네의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아그레인이었기에 황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나 역시 아그레인이 되어야 한다.
‘아그레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지?’
때에 따라 확실히 복종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살인까지 마다않는 인물? 하나하나 뜯어보니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그리 여기니 더욱 의문이 든다. 옛적의 아그레인은 무엇이 달랐기에 황성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인가. 리히튼의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아즈마리아가 의자에서 일어나 나를 반겼다.
“수잔!”
다가온 아즈마리아는 내 손을 잡아끌어 제 옆자리에 앉혔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가씨.”
“할 말이 있어서요. 수잔을 제 시녀로 추천하던 참이에요. 의견을 듣고 싶어서 불렀어요.”
공작가의 시녀쯤 되려면 보통 친척 가문 출신이이거나 오랜 가신이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둘 중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잉고르드에 정착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신참이었기에 아즈마리아의 발언은 어불성설이었다.
“저는 그럴 신분이 못 될 텐데요.”
“그렇지 않아요. 가문에 작위가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증명할 수만 있다면 리히튼 각하께서 고려해 주실 거예요.”
한숨이 나올 뻔했다. 되도 않는 헛짓거리에 반응해 줘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났다. 리히튼은 특유의 사람 좋은 가면을 쓰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말해요, 수잔.”
“제가 시녀가 된다면 이후 태어나게 될 아기님의 유모가 될 수 있는 건가요?”
“…태어난다면요.”
계약 결혼이라는 걸 몰랐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어색한 웃음이었다. 잠시 리히튼의 눈치를 보던 그녀가 활기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껄끄럽다면 다른 방식도 있어요. 수잔이 잉고르드의 가신 가문과 연을 맺으면 될 텐데….”
하나같이 내 결혼에 참견하고 싶어 안달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아즈마리아의 입에서 킨의 이름이 나오기 전에 급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제가 시녀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혹시 하녀인 지금의 저는 아가씨를 충분히 돕지 못하고 있을까요?”
아즈마리아가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전혀 아니니까 그런 말 마요. 수잔은 내가 잉고르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 최고의 친구인걸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즈마리아는 싱긋 그려낸 듯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웃음은 금방 자취를 감췄고 그 자리를 숨겨지지 않는 아쉬움이 대신했다.
“아아. 으음… 한데 거절할 줄은 몰랐네요, 수잔. 보통은 이런 제안을 좋게 생각하니까….”
그렇겠지. 나만 해도 잉고르드가 아닌 트리비아체였다면 진작 감격을 표했을 테니까. 다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이유야 다양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이즈마리아가 나를 언제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란 사실이었다.
“혹시 내 제안이 불편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가씨. 제 분에 넘칠 만큼 감사합니다. 다만 저는 아가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너무나 부족한 사람입니다. 부디 재고해 주세요.”
“그것 말고 정말 다른 이유는 없나요? 맹세코?”
별것도 아닌 일에 매달리는 아즈마리아가 귀찮았다. 그녀는 내게서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걸까. ‘리히튼 각하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아가씨의 시녀가 될 수 없습니다.’ 정도의 변명을 기대하는 건가. 나는 살며시 손을 들어 흑진주 귀걸이를 건드렸다.
“아가씨께서 주신 이 귀걸이에 걸고, 맹세코 없습니다.”
그러나 아즈마리아의 다소 불안한, 다른 말로는 못마땅한 분위기의 표정은 나아질 줄 몰랐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바라는 게 확신을 심어 주는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아즈마리아는 아마 그녀 스스로를 불안케 하는 착각에 빠진 듯했다. 독에 중독됐을 때에 대해 물었을 때도 그렇고… 분명 리히튼과 관련되어 있을 테지. 그녀라면 나를 리히튼의 정부라 여길 수 있다고 생각됐다. 가만히 지켜보던 리히튼이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멋진 귀걸이야. 내 생각보다 둘의 관계가 더 돈독한가 봅니다, 아즈마리아 양.”
리히튼을 향해 홱 몸을 돌린 아즈마리아가 곧장 답했다.
“가능하다면 더한 것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인걸요.”
웃음도 나오지 않는 말이었다. 짧은 웃음과 함께 이번에는 리히튼에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수잔. 외출은 즐거웠나?”
정작 나는 대수롭게 여기지 못할 물음이었다. 그 한마디로 풀려 있던 긴장이 다시 내 어깨를 조이기 시작했다. 그래, 언제나 날 지켜보고 있다고 했지. 놀라지 마, 수잔.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잖아.
“그럼요, 각하. 얼마나 유익한 시간이었던지.”
“유익하다? 글쎄, 나는 시간 낭비였다고 말해 주고 싶은데 말이지.”
심문보다는 조롱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몸은 괜찮은 듯하군. 근래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일은 준 것 같아.”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은 게 벌써 몇 주 전이었다. 안색이 좋아졌다며 안심하던 하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독에 완전히 적응되면 육체에도 나름대로의 안정이 찾아오는 건가. 종종 건강 상태를 물어오던 리히튼의 저의가 이해 갔다.
“네. 이제는 무리 없이 일할 수 있을 겁니다. 동료들에게 더는 피해 줄 일이 없어서 다행이죠.”
리히튼은 아즈마리아의 앞에서 보이던 가식적인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런 수고조차 불필요하다는 의미일까.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아즈마리아가 밝은 음성으로 내 손을 살짝 쥐었다.
“저만 빼고 재미있는 대화를 하시네요. 어떤 이야기인지 굉장히 궁금한데요?”
리히튼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아즈마리아 양께서 흥미롭게 생각하시는군. 수잔, 너 역시 그리 생각할지 궁금해지는데.”
내 손을 쥔 아즈마리아의 악력이 미세하게 강해져 갔다. 계약 결혼이라고 못 박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리히튼에게 완전히 푹 빠져 버린 모습이었다. 맛이 가 버렸어. 나는 그런 아즈마리아의 장단에 맞춰 줄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허락하신다면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응접실을 나왔다. 감히 하녀가 보일 태도는 아니었으나, 둘 모두 날 벌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았다. 눈앞에서 리히튼이 사라지자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라면 내가 어디에서 누굴 만났는지도 마땅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리히튼의 앞에서 빌힐름의 이름을 입에 담을 용기까지는 없었다. 그가 빌힐름을 얼마나 처절하게 증오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도 담화는 계속 길어지는 듯했다. 아즈마리아에게서 별관으로 돌아간다는 전언이 들리지 않았다. 비가 퍼붓는 탓에 저택 안에만 갇혀 있으려니 고용인들 사이의 분위기도 전체적으로 습하고 어두웠다. 정리가 끝날 즈음에는 모두들 일과가 완전히 마무리되길 기다리며 애꿎은 식기들만 한두 번씩 매만졌다.
쾅!
굳게 닫혀 있던 주방의 문이 열린 건, 대부분의 하녀들이 잠자리에 들기 위해 사라진 때였다. 거칠게 걸어 들어온 메어리는 눈에 띄게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리냐가 그녀에게 물었다.
“표정이 왜 그러니, 메어리? 유령이라도 봤어?”
메어리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게….”
곁에 앉은 메어리는 빈 잔에 물을 따라 들이켠 후,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방금… 빌힐름 황자 전하께서 입성하셨어요.”
그때,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은 주방장을 도와 주문한 식재료의 목록을 확인하던 콜렌토 부인이었다. 그녀는 드물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곧 매서워진 눈매로 고요해진 주방을 한차례 훑었다.
“누가 저택을 방문하든 우리 같은 고용인들이 신경 쓸 일은 아니지. 가볍게 입을 열다가 맨몸으로 쫓겨나는 일은 없어야 할 게다.”
콜렌토 부인이 주방을 나가기 무섭게 리냐가 속삭였다.
“싸움 중에 제일 재미있는 싸움이 치정 싸움이래….”
하지만 내 귀에는 리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 내 서신을 받고 고작 하루 만에 잉고르드에 도착했을 리 없지.’
서두를 필요가 없다며 날 조롱하던 리히튼의 말이 이제야 이해 갔다. 빌힐름의 방문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즈마리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 미친놈이 정말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건가.’
상상만으로도 역겨운 가정이었다. 차라리 자존심을 굽히고서라도 아즈마리아 윌을 빼앗기면 안 될 모종의 이유가 있다는 가정이 더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수잔. 너 괜찮니?”
무슨 의미인가 싶어 리냐를 쳐다봤다.
“손을 왜 그렇게 떨어?”
그녀의 시선은 내 얼굴이 아닌, 접시를 닦고 있던 두 손을 향해 있었다. 마치 수전증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잘게 떠는 내 손을.
“그간 이상하게 건강하다 했어. 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는 거 아니야?”
“어깨가 아파서 그래. 어제 무거운 걸 운반하다가 근육을 다친 것 같아.”
접시를 떨어뜨리기 전에 손을 털었다.
“미안, 리냐. 잠깐만 쉬고 올게.”
“그게 좋겠다.”
주방을 나와 통로를 가로지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곳은 잉고르드야, 수잔. 빌힐름은 너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못해. 어쩌면 그는 네게 더는 관심이 없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이 빌어먹을 떨림을 멈추란 말이야. 숨을 돌리고 온 후, 잡생각이 들지 않을 만한 가장 번거로운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별관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드는 순간에도 손의 떨림은 가시지 않았다.
***
다음 날 이른 오전. 장대비는 그치지 않았고 저택의 분위기 또한 몹시 흉흉했다. 하녀인 내가 느낄 정도이니, 빌힐름과 윌 백작의 방문이 잉고르드 저택에 지대한 여파를 주고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아즈마리아는 어젯밤 별관에 돌아오지 않았다. 듣기로 공포에 질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본관에서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빌힐름 때문이겠지.
“밤새 각하의 침실에 계셨을 게 분명해. 그분이 아니면 누가 아가씨를 위로해 주겠어?”
“콜렌토 부인이 하셨던 말 기억 안 나? 각하께서는 단 한 번도 침실에 여자를 들인 적이 없으시다잖아.”
“아즈마리아 아가씨가 어디 흔한 귀족 영애니? 무려 공작 부인이 되실 분인데 그깟 침실이 대수야?”
그들의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간단했다. 오늘 아즈마리아가 산 채로 발견된다면 열띤 밤이 없었을 테고, 만약 기척도 없이 증발했다면….
“수잔! 아가씨 방의 종이 울렸어.”
생존 신고가 들린 것으로 보아 간밤은 고요했던 모양이다. 텅 빈 찻잔을 내려다보며 고민할 때였다. 맞은편의 누군가가 내 앞의 식탁을 짧게 두들겼다.
“저어, 수잔.”
리냐였다.
“괜찮다면 내가 대신 아가씨께 올라가 봐도 될까?”
“네가?”
“으응. 큰 이유는 없고….”
주위 눈치를 살피던 리냐가 목을 길게 빼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분께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쉬이 찾아갈 수 있는 분은 아니니까.”
“뭘 여쭈려고?”
“자세히는 못 말해. 그냥… 마음에 드는 기사가 있다고 넌지시 말씀드렸을 때 아가씨께서 조언을 여러 번 해 주셨거든. 한데 잘되고 있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서.”
나로선 환영할 만한 제안이었다.
“좋아.”
안 그래도 리냐나 마리에게 대신해서 올라가 주길 부탁할 생각이었으니까. 아즈마리아에게는 공교로운 일이겠지만… 나 역시 가능하면 빌힐름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아즈마리아를 위로하고 그녀의 공포를 공감해 줄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표적까지 된 마당에 억지로라도 그녀의 비위를 맞춰줄 마음이 더는 들지 않았다.
“리냐! 마차가 도착했대!”
나는 리냐를 대신해 후문으로 향했다. 문 앞에는 이미 장정 여럿이 식재료 상자를 옮기고 있었다. 진흙탕이 된 땅에 발이 푹푹 꺼졌다. 빗줄기는 거세도 바람이 약해져서 다행이었다. 어제 날씨 그대로였다면 손님과 고용인, 그리고 기사를 합한 백 명의 인원이 배를 곯아야 했을 것이다.
“어어. 오늘은 늘 뵙던 그 아가씨가 아니로군.”
장정들 중에서 가장 젊고 훤칠한 남자가 내게로 다가왔다. 우비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일꾼답지 않게 퍽 하얘 보였다.
“아가씨의 성함이?”
“수잔이에요. 물건은 이것으로 끝인가요?”
남자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부인이 오리 고기를 추가로 주문하셨는데, 그쪽이 한 번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소. 기존에 사용하던 그 농장 고기가 아니라서.”
“공작저에 납품될 품질의 고기라면 상관없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물건을 제대로 못 받았다고 말하면 우리만 손해지. 그쪽에서 확인을 안 하면 우린 그냥 갈 거요.”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리려던 남자를 불러 세웠다.
“이봐요. 주문량을 제대로 못 채우면 그건 그쪽 탓이에요.”
“우린 잘못 없소. 어차피 추가 주문이라 힘들 수도 있다고 말해놨으니까.”
“…콜렌토 부인이 언제 추가로 주문하셨죠?”
가만히 내 눈을 응시하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걸 어찌 알겠소? 내가 하는 일은 물건을 대신 옮기고 확인받는 게 전부인데.”
내가 아는 콜렌토 부인은 그런 실수를 할 위인이 아니었다. 휴가 복귀 날에도 약속된 시간을 칼같이 지켜 돌아오는 그녀다. 해마다 열리는 가을 연회를 준비하고, 주방의 장부를 관리하는 그녀가 ‘추가 주문’을 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것도 하필이면 내가 리냐의 일을 대신하는, 거센 태풍이 몰아치는 날에.
“어디로 가면 되나요?”
“멀지 않소. 여기서 오 분 정도 내려가면 돼. 사람이 부족해서 끌고 오지 못한 마차가 하나 있는데, 거기까지만 가면 되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줘요. 금방 돌아올게요.”
주방으로 돌아갔으나 콜렌토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말을 확인할 구실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미친 듯이 찬장을 뒤졌다. 다행히 구석에 오래된 찻주전자가 남아 있었다. 남 몰래 준비할 여유는 없다. 이를 악물고 식칼로 손바닥을 그었다.
“읏.”
나뒹구는 천을 주워 상처 사이로 솟아오르기 시작한 핏물을 닦았다. 그리고 찻주전자에 물과 함께 쑤셔 넣은 후 한 번 꽉 짜고 뚜껑을 닫았다. 설마 내 독이 자기까지 녹이지는 않겠지. 우비를 뒤집어쓰고 찻주전자를 든 채 저택을 나갔다. 꽤 깊게 그었음에도 이상하게 상처가 욱신거리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내 손에 들린 찻주전자를 보며 물었다.
“그건 뭐요?”
“고기의 질이 좋은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물이요. 어서 가죠.”
남자를 따라서 번화가로 향하는 흙길이 이어진 숲으로 들어갔다. 여섯 걸음 앞서 걷던 남자가 드문드문 몸을 돌려 나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귀걸이가 예쁘군. 잉고르드의 하녀들은 그런 것도 걸 수 있나 보지?”
나 역시 빗소리를 이기기 위해 크게 외쳤다.
“아가씨가 주셨어요.”
“아가씨? 누구인지는 몰라도 배포가 크신가 보오.”
확실히 크다고 할 수 있었다. 하녀 한 명을 죽이기 위해 귀한 흑진주 귀걸이를 바치는 걸 보면. 나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 남자는 무고할 수 있다.
“어이! 뭣하오? 안 오고.”
아즈마리아와는 조금도 관련이 없는 사람일 수 있다. 그래, 오히려 그럴 확률이 더 농후했다. 콜렌토 부인이 평소답지 않게 오리 고기를 추가로 주문했을 수도 있었고, 귀걸이는 아무런 의도 없이 꺼낸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가정은 더 이상 의미 없었다. 내게는 혹시 모를 최악의 확률이 더 중요했으니까.
“손에 상처가 났어요.”
앞서 걷던 남자가 내게로 돌아왔다. 그에게 지혈하지 않아 피로 엉망이 된 손바닥을 보여 주었다.
“쯧, 아파 보이는군. 어디서 그런 상처를….”
말을 채 끝마치기 전에 찻주전자를 열어 남자의 얼굴에 부었다. 분홍빛으로 물든 핏물이 빗물과 뒤섞여 점차 옅어진다. 황당함에 구겨져 있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큭!”
남자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주전자를 꽉 움켜잡으며 뒷걸음질 쳤다. 두꺼운 손가락 사이로 붉어진 눈이 나를 노려봤다. 찰나에 숨이 멈췄다.
‘착하지, 아그레인. 이리로….’
흐릿하게 들려오는 빌힐름의 목소리가 두 발을 묶었다.
“이… 이 미친 계집애가!”
남자가 혈안이 되어 내 팔을 움켜쥐었다.
“아윽!”
팔이 뜯겨져 나갈 듯한 악력에 눈앞이 핑 돌았다.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남자의 몸은 꼼짝하지 않았다.
“너는 내가 곱게 못 죽인다. 살 한 점 한 점 포를 떠서 죽여 달라고 사정할 때까지….”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온 힘을 다해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흘러나오는 피를 모아 남자의 얼굴에 내뱉었다.
“크아악!”
남자가 본능적으로 휘두른 팔에 내 고개가 돌아갔다. 입 안의 상처는 아프지 않았지만 주먹에 맞은 뺨은 머릿속이 얼얼해질 정도로 아렸다.
“제기랄, 죽여 버리겠어! 당장 이리 와!”
그때부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도망쳤다. 맞은 뺨에 빗물이 닿을 때마다 이가 시렸다. 얼마나 뛰었을까. 멀지 않은 시야에서 가까워지는 인영이 보였다. 킨이었다. 순간 스치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즈마리아가 킨도 빼앗아간 건 아닐까.’
하지만 내게는 더는 도망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가온 그가 황망한 표정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너 얼굴이….”
나는 그의 손을 쳐냈다. 우비의 소매가 떨어지는 피에 젖어 붉었다.
“네 도움은 필요 없어.”
리냐가 날 버렸다. 이제 내게는 킨이라고 해서 그러지 않으리란 확신이 없다. 그를 지나쳐 저택으로 향했다. 그제야 무감각했던 입 안의 고통과 손바닥의 고통이 선연하게 살아났다. 리냐는 내가 이런 꼴을 당하리란 걸 알고 있었을까?
‘이제 상관없지.’
정말 아무 의미 없는 물음이지 않은가. 그녀가 몰랐다고 해서 부어오른 내 얼굴이 가라앉지는 않을 테니까.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내가 찾아간 사람은 콜렌토 부인이었다.
“부인. 혹시 추가로 주문한 식재료가 있나요?”
“추가 주문? 아니, 전혀 없단다.”
“오리 고기라고 하던데요.”
그 말에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강 고개만 끄덕이던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내 위아래를 훑었다.
“수잔, 그 꼴은….”
“추가 주문한 오리 고기가 없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그렇기는 한데….”
내 얼굴과 몸을 세세히 살피던 콜렌토 부인이 피범벅이 된 손의 상태를 확인하곤 경악했다. 그녀는 주방 안쪽 찬장에서 자그마한 약 상자를 꺼냈다. 주름진 손이 뺨과 손바닥 상처에 닿을 때마다 고통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약을 다 바른 후, 콜렌토 부인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경위를 물었다. 나는 나오지 않는 눈물을 억지로 짜내며 그녀에게 거짓을 고했다.
“그래서, 널 구해줬다던 남자는?”
“모르겠어요. 허겁지겁 도망치느라….”
“다른 것보다 무사해서 천만 다행이구나. 여자를 잡아다 파는 파렴치한 놈들이라니! 아이들에게 조심하라고 일러두어야겠어. 식료품 거래처도 슬슬 바꿀 때가 되었지.”
깊고 느린 한숨이 들려왔다.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런 얼굴로 아즈마리아 아가씨를 모실 수 있을까요?”
“넌 어떻게 생각하니?”
“그분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요. 제 상태를 보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콜렌토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 이후로, 내 거처는 별관이 아닌 본관으로 돌아왔다. 할 수 있는 일이 줄기는 했으나 딴지를 거는 이는 없었다. 다들 나의 상태를 한 번 확인한 후에는 가엾게 여기기 바빴다.
“너는 어쩜 그렇게 아픈 구석이 많아? 나는 네가 어느 날 갑자기 객사한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을 거야.”
말은 그렇게 해도 마리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날 리냐는 몹시 울었다. 일을 떠넘긴 자신의 잘못이라며 내 앞에 무릎까지 꿇었다. 그녀의 울음이 진심일지 연기일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오롯이 아즈마리아의 이름만 가득했다. 그날만큼은 빌힐름도 리히튼도 내 속에서 안개처럼 흐릿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손바닥이 갈라지던 그 고통을 돌려줄 수 있을까?
딸랑딸랑.
늦은 오후, 익숙한 번호가 각인된 종이 울렸다. 아즈마리아가 지내는 방이었다. 가만히 그 소리를 듣다가 몸을 일으켰다.
“제가 갈게요.”
눈치를 살피던 리냐가 날 뜯어말렸다.
“아니야. 너는 쉬어, 내가….”
“이번만 갈 거야. 앞으로 못 모시잖아. 직접 말씀드리는 게 예의 같아서.”
리냐는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의 시야를 피해 아즈마리아를 위한 차를 준비했다. 새하얀 티 포트에 물을 붓고, 식칼로 그은 손끝을 그 안에 담갔다. 서서히 피어나는 빨간 독이 한여름의 아지랑이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나이프를 챙긴 후 몸을 일으켰다. 주방을 나서기 전에 멍하니 서 있는 리냐를 향해서 지나가듯 물었다.
“황자와 윌 백작은 뭘 하고 있다니?”
“아. 각하와의 면대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 이르면 오늘 저녁에 일을 치룰 것 같기도 하고….”
이르면 오늘 저녁이라. 계단을 올라 아즈마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기다란 통로에는 인기척 하나 없이 거센 빗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조차 지독하게 먹먹해 깊은 호수 아래로 가라앉은 기분이 들었다.
똑똑.
대답이 들려오기 전에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영 좋지 못한 안색의 아즈마리아였다. 그녀는 내 얼굴을 확인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잔? 세상에, 그 얼굴은 대체….”
“아즈마리아.”
문을 잠그고 테이블 위에 티 포트와 찻잔을 내려놓았다. 의아한 시선이 내 걸음걸이를 뒤따른다.
“네게 있어 두려운 건 빌힐름뿐인가 봐.”
아즈마리아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을 감상하며 천천히 차를 따랐다.
“이해해. 나도 비슷하거든.”
“무슨 말을 하는 거죠?”
“귀걸이는 버리지 않을게, 팔면 값이 꽤 나올 것 같아서.”
귀걸이를 매만지며 티 포트의 물을 찻잔에 부었다.
“빌힐름은 왜 이런 시기에 잉고르드에 왔을까. 궁금하지?”
찻잔을 쥔 채 아즈마리아에게로 다가갔다. 경계를 풀지 않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지금부터 비명을 잘 참아 보도록 해. 그럼 내가 친절하게 알려 줄 테니까.”
그리고 아주 천천히, 하얀 손등 위로 붉은 독을 쏟아 부었다. 치이익. 살 썩은 내가 나기 시작한 건 고작 삼사 초가 흐른 뒤였다.
“아, 아아…!”
아즈마리아가 경악한 얼굴로 손을 내뺐다. 리히튼을 궁지로 몰아넣었을 때의 나는 어떤 식으로 행동했더라? 기억을 더듬어 품속에 숨겨 두었던 나이프를 쥐었다. 썰기 위해서가 아니라 찌르기 위해서 쥐는 건 처음이었는데 이상하게 손에 딱 맞았다. 처음에는 나이프로 위협할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아즈마리아 옆에 조용히 앉았다.
“잘 참아 보래도. 네 주인님께서 친히 잉고르드까지 행차하신 이유를, 내가 알려 주겠다잖아.”
아즈마리아가 크게 발버둥 칠 수도 있을 거라 여기고 있었다. 같은 기억을 지녔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우리 둘은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졌으니까.
“으, 흐….”
하지만 아즈마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침구에 남은 핏물을 닦아내며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아냈다. 웃음이 나왔다. 너 빌힐름을 진심으로 무서워하는구나?
“울음 그쳐. 나는 더 아팠으니까. 뺨 보이지? 입 안이 다 터져서 종일 피 맛이 나더라.”
“이게, 대체 무슨….”
열에 붉어진 뺨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구슬 같은 눈물 한 방울을 친절하게 닦아 주며 말했다.
“좋아, 잘 견디고 있으니 선물을 줘야겠네. 질문에 답을 해 주지. 딱 두 개뿐이야. 어때?”
“…당신이었군. 당신이 베아트리체였어.”
“그게 첫 번째 질문이야? 그렇다면 대답해 주지. 맞아.”
아즈마리아가 넋을 잃고 나를 응시했다.
“날 속인 거야? 나는, 나는 당신을…!”
“죽이려 했다고? 아니면 설마 믿고 있었다는, 씨도 안 먹힐 개소리를 할 생각은 아니겠지. 가련한 아즈마리아…. 주인님은 두려워도 나 같은 하녀 따위가 어디 두려웠겠어?”
고통을 잊었는지, 아즈마리아가 목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쳤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그 남자가 얼마나 끔찍한지 전혀 모른다고!”
“그래서 그 무서움을 아는 리히튼에게 찾아왔구나.”
흥분에 거칠어진 숨소리가 드넓은 침실을 가득 메웠다. 아즈마리아가 옅은 공포에 젖은 얼굴로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멍청한 얼굴만 보려고 이곳에 온 건 아니었다. 나는 침구를 꽈악 쥐고 있는 손등을 나이프로 살짝 건드렸다. 아즈마리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읏.”
“아플 텐데 참을성이 꽤 좋네, 이제 두 번째도 들어 줄게.”
넋을 놓고 있었던 것도 잠시, 제정신을 차렸는지 아즈마리아가 돌연 헛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못 배운 하녀들은…. 리히튼의 총애를 등에 업고 선을 넘다니, 내가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나는!”
큰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나이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대로 빌힐름에게 달려가 네 진짜 이름을 밝힐 저의가 충분히 있어. 당신의 사랑스러운 전 약혼자가, 아그레인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상당히 이성적이라 생각하는 아즈마리아도 빌힐름의 이름만 나오면 금세 창백해지고 만다.
“하아. 잃어버린 개까지 찾아내다니! 황자 전하께서 너무 좋아하겠다.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설마….”
아즈마리아가 핏물이 고인 손으로 내 옷을 움켜잡았다.
“아니겠지만, 설마, 리히튼이 너를 내게…. 아니, 그럴 리 없어.”
리히튼이 나를 그녀에게 보내 죽이려 했냐고 물으려던 걸까. 그러면서도 끝까지 아니라고 믿고 싶은 듯했다.
“아니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리, 리히튼은….”
“알겠지만, 아즈마리아. 리히튼은 네가 아그레인인 걸 조금도 몰라. 그가 소중하게 다루던 제인에게 흠집을 내고, 종국엔 죽이기까지 한 아그레인임을 전혀 모른단 뜻이지.”
그래서 리히튼은 나를 증오한다. 그의 행복을 부수었기 때문에 그도 나의 행복을 부수려 한다. 너무도 타당한 증오이지 않은가?
“그런데 알면 바뀔까?”
“…당신, 누구야?”
“알면 정말 바뀔까, 아즈마리아? 그가 과연 옛정을 생각해 너를 거두어 줄까? 함께 시궁창 속에서 발버둥 쳤던 시절을 생각해서, 제인을 내버린 널 용서할까? 과연 그 증오를 포기할까?”
찰나의 순간, 새하얀 아즈마리아의 얼굴 위로 수십 가지의 감정이 섞여 들었다. 그녀는 악을 지르며 내 멱살을 잡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닥쳐!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입 열지 마. 오직, 오직 나만이 리히튼의 절망을 이해해!”
손등이 썩어 문드러진 것치고는 손아귀의 힘이 퍽 간절했다.
“바로 나야! 내가… 내가 리히튼을 여기까지 끌어 올렸어. 내가 없었다면, 내가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리히튼은 평생 그곳에서….”
“꾸며진 행복이라도 느꼈겠지. 소중한 제인과.”
“리히튼에게는 나만 있으면 돼.”
아즈마리아는 더 이상 내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맞아. 아아… 우리는 서로가 있어야만 완벽해져. 리히튼도 느꼈을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왜 여태껏 혼자겠어? 그는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자신의 아그레인이 돌아오길 기다렸던 거라고. 이곳 잉고르드에서 계속, 계속….”
고통의 눈물인지 동정의 눈물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아즈마리아의 눈물이 내 턱 위로 떨어졌다. 아즈마리아를 이해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녀가 그리는 미래는 오롯이 빛으로 감싸여 있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미래뿐이었다. 리히튼에 의해 비참하게 죽어 가는 미래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은 듯했다. 아즈마리아가 가진 공포 기제는 빌힐름이 전부였다. 반대로 리히튼은 그녀를 보호하는 아성이며 요새에 가까웠다. 그것 외에는 모든 것이 안온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군. 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곳까지 기어들어 온 거야? 나라면….”
나라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적어도 이곳으로 기어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리히튼을 모르니까! 그리고 빌힐름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지! 모르니까 그렇게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아즈마리아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렇기에 쉽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너 같은 건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어! 아즈마리아의 외침은 내게 그런 의미로 들렸다. 덕분에 힘이 완전히 빠졌다. 그리고 미세하게나마 남아 있던 증오도 완전히 사그라졌다.
이 여자와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아그레인으로서 반드시 보여야 할, 살아남기 위한 고뇌나 그로 인한 행동 같은 건 아즈마리아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빌힐름은 너를 데려가기 위해 이곳에 왔어. 물론 내 입으로 직접 당신의 정체를 고할 일은 없을 거야. 그쪽 역시 입단속만 잘해 준다면.”
빌힐름의 입으로 직접 아그레인을 데리러오겠다고 말한 적이 있으니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나에게 한 말이었지만. 아즈마리아의 손을 떨쳐 내고 티세트를 쥔 채 문 앞으로 걸어갔다.
“네 뭘 믿고?”
문을 열기 직전,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에 살짝 등을 돌렸다.
“못 믿으면? 리히튼 각하에게 고하려고? 아니면 이번에는 다이아 귀걸이를 선물로 주려나.”
아즈마리아에게서는 더는 얻을 게 없다. 잠깐이나마 기대했던 내가 한없이 멍청하게 생각됐다. 아즈마리아는 입을 닫았고, 나는 그녀의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