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ㅇㅇ]
공금, 요게X
조연의 반격은 없다 2권
Episode 6. 에고
눈을 떴다.
쉼 없이 떨어지는 가느다란 빗소리가 들렸다. 손등으로 떨어지는 창 너머의 빛이 어두운 회색이었다. 하늘이 검은 것으로 보아 소나기로 끝날 비는 아닌 듯했다. 그 너머에 조용히 앉아 창밖을 응시하는 리히튼이 보였다. 예전처럼 마른 지푸라기와 같이 버석거리는 백금발이 아니었다. 몸을 굽히고 책에 코를 박은 채 몰두하지도 않았다. 남자는 그저 그림처럼 앉아 있었을 뿐이다. 몽롱했던 정신에 지독한 현실감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흐릿했던 기억 속의 소년도,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앉아 있는 남자도 모두 리히튼이 맞았다.
“비를 좋아하세요?”
그가 천천히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긴 장마가 오면 창가에 기대 하염없이 쳐다볼 만큼.”
청회색 눈동자 아래로 보이는 음영이 짙었다.
“영원히 증오하는 여인의 환상이 나타날 만큼.”
“멋대로 내뱉는군.”
“수잔이 아닌 아그레인의 입에서도 못 나올 말인가요?”
그는 내게, 아니 아그레인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형체가 없어 어렴풋이 짐작해 온 것이 다였으나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제가 아그레인이길 바라시잖아요.”
리히튼. 우리는 빌힐름의 개였어. 지금은… 글쎄. 개라고 불릴 만한 건 나밖에 남지 않은 것 같지.
“아니면 수잔이 주인님의 총애를 등에 업고 기어오른다고 생각하시려나.”
리히튼은 반쯤 눈을 감은 채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역정을 내거나 벌을 내릴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주인님이 바라시는 대로 가진 모든 것을 버렸어요. 텅 빈 그릇에는 내 것이 아닌 증오가 대신 채워져 있죠. 그런 제게 멋대로 굴 권리도 없나요?”
“부족해.”
그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그렇게 여겨왔다는 듯 간결하고 확고했다. 완벽하게 거두어진 눈꺼풀 아래로 적발의 창백한 여인이 담겼다. 리히튼은 내 쪽으로 목과 어깨를 내밀고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읊었다.
“그냥 부족한 것도 아니라 턱없이 부족하지. 그러니까 내게 가진 것을 더 바쳐. 이렇게 말한다면 그리 할 건가?”
“그럼요. 남은 건 몸뿐인데 몸이라도 바칠까요?”
리히튼이 웃었다. 적어도 즐거워서 웃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날 자극해서 좋을 것 하나 없어, 수잔.”
광증에 휩싸여 내게 장식 검을 건네던 리히튼과 지금의 리히튼은 무엇이 다른가. 나는 아그레인의 과거를 인지하게 된 대가로, 이전보다 더 수월하게 리히튼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눈에는 예전에는 알 수 없던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 울렁이고 있었다.
분노, 증오, 집착, 후회.
“나는 이미 널 위해 너무 많은 것들을 희생했어. 아니, 전부 희생해서 남은 것이라곤 재가 된 껍질뿐이지. 네가 이곳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건 내게 재만 남았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았으면 난 네 손등에 닿는 그 희미한 빛조차 허락하지 않았을 테니까.”
들끓는 눈동자와 달리 음성은 시를 읊듯 고저 없이 차분했다. 어쩌면, 과거의 아그레인은 새장에서 어둠 속에 웅크려 있던 그를 더 깊은 지옥으로 밀어 넣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열렬한 증오가 나를 향할 리 없었다.
“주인님. 주인님은 스스로를 미쳤다고 생각한 적 있으세요?”
우리의 거리는 세 발자국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내게는 마치 리히튼이 바로 옆자리에 앉은 것처럼 느꼈다. 불이 꺼진 세계에 우리 둘만이 남은 기분이었다. 리히튼을 안 이래 이토록 그가 가깝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남자를 알아갈수록 막연한 공포는 안개 걷히듯 서서히 희미해지고, 정의할 수 없는 진득하고 불결한 마음이 생겨났다.
“아그레인을 향한 증오 때문이든, 혹은 잉고르드의 독 때문이든. 저는 종종 제가 미쳤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요. 특히 두통에 잠 못 드는 날이 사흘에 다다를 때, 관 속에 갇혀 구더기에 머리를 파먹히는 기분이 들곤 해요.”
그리고 겨우 눈을 붙이고 떴음에도 여전히 잉고르드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역시.
“요즘은 꿈속에서조차 신경이 날카롭게 깨어 있어요.”
꿈을 꾸면 꿀수록 아그레인에 동화되는 느낌이 생생했다.
“내게 미쳤느냐고 묻는 건가? 건방지기 짝이 없는 질문이군. 네가 가진 그 권리처럼 말이야.”
그의 투명한 백금발은 넘실대는 벽난로의 불이 비쳐 붉은 노을처럼 보였다. 수십 가지 감정에 흔들렸던 눈동자가 그새 본래의 시린 색으로 돌아온 후였다. 능숙하게 내면을 숨기는 모습에 순수한 감탄이 일 정도였다. 리히튼은 대체 어떤 시간을 살아 온 걸까? 어떤 시간을 버텨왔기에 저리도 태연할 수 있을까.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 나는 미쳤지. 광증이라 묻고 싶은 건가? 하지만 그건 병이 아니야. 순전히 내가 내 손으로 선택한 길일뿐.”
“주인님이 가지신 힘의 대가가요?”
광증을 일으키는 그 힘. 내게서 시선을 거둔 리히튼이 눈을 감은 채 되물었다.
“수잔. 너는 미래를 보았을 때, 네가 본 것이 미래라 확신할 수 있을까?”
착각이 아니라면 그는 조금 지쳐 보였다.
“그 미래가 하나가 아닌 수십 가지로 겹겹이 쌓이면? 그리고 소용돌이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면….”
리히튼의 힘이 미래를 보는 힘이라도 되는 걸까. 장담컨대 아닐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은밀히 자신의 비밀을 내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주어진 모든 것들이 마치 내 것이 아닌 삶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미래를 보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인가? 내가 나인지도 모르게 하는 힘은 저주나 마찬가지일 텐데.”
나는 얌전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대가란 그런 거야. 가진 것이 있느니 못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 맞아. 내가 선택한 길은 그 대가를 감수하는 길이었지.”
리히튼은 다시 눈을 떴다.
“그래서, 수잔… 지금이라면 답할 수 있겠군. 나의 잉고르드가 언제 무너질 것 같냐는 물음에 말이야.”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리히튼이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리히튼은 내가 미래를 알고 있단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 아느냐는 의문에 대해선 당장 죽도록 머리를 굴려 봐도 캐낼 수 없을 터였다. 대가가 있다는 그 힘에 의해서든, 리히튼이 이제껏 사냥해 온 다른 빙의자들 때문이든. 예전의 나였다면 전전긍긍했을 텐데 오히려 지금은 마음 한구석이 가벼웠다. 왜일까. 여타 빙의자들에게 그런 것과 달리, 나만은 죽일 것 같지 않아서?
“무너질 거예요.”
메말라 갈라지는 음성이 나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베르크네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자만하지 말라고 충고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건 자만이 아니다. 리히튼에게 있어 나는 특별한 존재가 맞았다.
“그래야 이 이야기가 완성되니까요.”
“누가 만든 이야기지?”
그런 건 몰라. 내가 아는 건 『태양이 흐르는 강』의 작가가 아닌 등장인물이다. 리히튼은 몰락이 예고된 인물이고, 나는….
“이곳은 무너지지 않아.”
그건 다짐이 아닌 확신이었다. 리히튼은 인기척 없이 유령처럼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홀에 걸린 그림처럼 고아했다.
“적어도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제국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가 될 거다. 누구도 넘볼 수 없겠지. 빌힐름은 물론 황제조차도. 그게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등을 스쳐지나가며, 리히튼의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내 머리칼을 파고들었다. 목덜미에 닿는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는데 이상하게 뜨거웠다.
“너 역시 곧 선택해야 될 때가 올 거다. 우리 내기의 종착점이 보이기 시작했으니.”
리히튼은 그렇게 응접실을 떠났다. 그래, 내기.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어. 우리에게는 그런 것도 있었지. 나는 목덜미에 남은 온기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
텅 빈 잉고르드 저택은 유령의 성이라 여겨도 될 만큼 스산하고 조용했다. 검은매 기사단의 일원은 평소처럼 저택의 안팎을 누볐으나, 겨우 안면만 익힌 정도였고 지내는 공간도 달랐기에 남처럼 느껴졌다. 아즈마리아는 당분간 별관이 아닌 본관에서 지내기로 했다. 저택을 관리할 인원이 나밖에 남지 않았기에 그것이 최선의 방도였다.
오늘 점심부터는 시내에서 고용한 주방장이 올라와 리히튼과 기사들의 식사를 준비했다. 해마다 맡아 온 일이어서 그런지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모두가 능숙했다. 나는 자리를 비운 시종을 대신해, 아즈마리아의 잔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입맛에 맞지 않으시다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시내의 주방장이 대신 요리를 해 주고 있는 터라.”
아즈마리아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민폐를 끼치고 있는 건 오히려 나인걸요.”
잠시간 넓은 식탁과 텅 빈 의자들을 살펴보며, 아즈마리아가 물었다.
“각하께서는?”
“각하께서는 늘 집무실에서 홀로 식사하십니다.”
“아, 그렇군요. 손님이 방문해도 집무실에서 식사하시는 건가요?”
“네.”
손님을 접하는 데 예의는 아니었으나, 잉고르드의 공작쯤 되면 본인의 행동 자체가 예절이며 법규가 되기 마련이다. 아즈마리아의 하얀 얼굴 위로 옅은 실망감이 떠올랐지만,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열여덟이 되는 것으로 아는데 감정을 숨기는 데 꽤 능숙한 여자였다. 하기는. 이 정도는 되어야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베아트리체에게 죽음의 표식을 남길 수 있을 터였다.
“베르크네 씨?”
한적한 다이닝 룸에서 아즈마리아 혼자 조용히 식사하던 때였다. 문 너머로 지나쳐 가던 베르크네를 용케 알아본 그녀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퍽 친숙한 부름이었기에 절로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외침을 들었는지, 한 박자 느리게 다이닝 룸 안으로 들어온 베르크네가 허리를 숙였다.
“아즈마리아 윌 영애.”
“이게 대체 얼마 만이죠? 이렇게 뵙게 되니 너무나 반갑네요.”
제 집 앞마당이었으면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기세로 밝은 목소리였다.
“저도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영애. 예정대로였다면 영애와 제가 다시 만날 일은 다신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한데 베르크네의 표정과 어투는 즐거운 재회의 순간이라 표현하기에 다소 딱딱한 감이 있었다.
“베르크네 씨는 그동안 전혀 늙지 않으셨네요. 예전 황성에서 지내실 때 그대로의 모습이셔요.”
“영애께서는 아리따운 숙녀로 자라셨습니다.”
“괜찮다면 잠깐 시간이라도 내주셔서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또다. 『태양이 흐르는 강』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관계와 이야기. 베르크네가 황성의 사람이었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과거였다. 베르크네 특유의 냉정한 눈길이 짧게나마 나를 향했다.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허리를 숙이며 정중한 거절을 나타냈다.
“지금은 각하의 시중을 드는 중이라 힘들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아, 미안해요. 내가 바쁜 사람을 붙들었군요. 마저 일 보도록 하세요.”
베르크네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다이닝 룸을 나갔다. 나는 씁쓸함이 감도는 아즈마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영애. 저라도 말동무를 해드릴까요?”
평범한 하녀였다면 귀족 아가씨가 경을 칠 태도였지만, 그녀에게 나는 평범한 하녀가 아니니까.
“상냥하네요, 수잔.”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베르크네 씨가 황성에서 일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당연히 잉고르드의 가신일 거라 생각했거든요.”
“아주 유능한 분이셨죠. 저 어릴 때만 해도 빌힐름 전하를 뵙기 위해 황성을 방문하면 정말 즐겁게 맞이해 주셨는데….”
아즈마리아는 그녀 자신만 아는 기억에 잠겨 있는 듯했다. 나는 전혀 공감해 줄 수 없는 추억의 편린 속에. 빌힐름의 이름이 나와 잠시 놀라기는 했지만, 황성의 사람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당연한 묶음이었다.
‘이곳은 무너지지 않아. 적어도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제국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가 될 거야. 누구도 넘볼 수 없겠지. 빌힐름은 물론 황제조차도.’
그때의 그 단단한 목소리가 잊히질 않았다. 그렇다면 베르크네는 리히튼이 요새를 짓기 위해 빼앗은 빌힐름, 아니 황제의 팔다리 중 하나였던 건가. 새삼 그의 처세술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남자를 겁도 없이 도발하다니, 나도 벼랑 끝까지 와 있긴 하구나.
“각하께서는 참 대단한 분이세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바닥에서 여기까지 홀로 올라오셨거든요.”
베아트리체 앞에서 말을 가리던 것과는 꽤 다른 모습이었다. 나로서는 기쁜 일이었다. 적절히 이용해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저의 충고도 무시하고 여기까지 오셨군요.”
아즈마리아는 고민이 깊은 얼굴로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난, 도무지 그럴 수 없었어요.”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의 조언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리히튼을 생각하면, 오랜 시간 버텨 온 마음이… 아, 이런. 내가 쓸데없는 소릴 했군요.”
고개를 젓는 아즈마리아의 낯에 슬픔과 후회가 가득했다. 별다른 감흥이 전달되지는 않았다. 그 과잉된 감정에 공감할 정도로 나는 감성적인 사람이 못 되었다. 이래서 주인공의 연인인 거구나. 나 같은 일회성 조연은 감히 범접 못할 서사의 애절함이 느껴졌다. 비록 주인공의 사랑스러운 피앙세에서 이름만 남은 조연으로 추락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여도.
***
늦은 오후가 되어도 비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름도 아니고, 이틀 내내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려니 장마가 시작된 것처럼 느껴졌다. 밖으로 나갈 상황이 여의치 않은 탓에 검은매 기사단의 일원도 항상 저택 내부에 상주했다. 반나절 이상을 저택 밖에서 보내던 킨 또한 습기를 떨쳐내려 벽난로 앞에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할 말 있으면 하지 그래? 그렇게 사람 뚫어져라 쳐다보지 말고.”
앞머리에 맺힌 빗물을 털어내며 킨이 말했다. 그가 신고 들어온 군화 밑창이 마르지 않은 진흙으로 범벅이었다. 기껏해야 오 초 정도 쳐다본 것 같은데, 생긴 것과 달리 감이 예민하다.
“그걸 어떻게 알아.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어?”
“열렬한 시선은 눈이 없어도 느껴지기 마련이지.”
킨은 큼직큼직한 걸음으로 다가와 난로 위에 놓여 있던 주전자를 집었다. 그대로 찻잎이 담긴 잔에 부어 휘휘 젓더니 한입 삼킨다. 입천장을 데지 않는 게 신기했다.
“베르크네 씨가 황성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어.”
잔을 쥔 상태로 창밖을 살피던 그가 힐끔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 그 깜찍한 아가씨가 말했나 보군.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이제까지 황성의 일은 내게 남 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베르크네가 빌힐름과 한 성에서 살아왔을 거라 생각하니 여러모로 기분이 기묘했던 것이다. 빌힐름은 이 세계의 주인공이지만, 내가 아는 이면이 존재하고… 또 그 이면의 피해자가 아그레인이기도 하니까. 빌힐름과 관련된 일에 관심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유서 깊고 훌륭한 가문의 바깥 자식이라는 걸 알면 뒤집어 나자빠지겠는데.”
헛웃음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한테 딱 어울려.”
“어울린다고? 설마 바깥 자식이라는 부분이?”
“응.”
킨의 표정이 언짢아졌다. 귀족가의 바깥 자식이 기사 서임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다. 보통은 태어난 영지에서 서임을 받으나 가문의 미움을 사면 먼 곳으로 도망가 터를 잡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킨이 잉고르드의 혈통으로 보이지는 않으니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겠지.
“그러고 보니… 내 동생이 지금 딱 너만 하겠군.”
추억에 심취한 얼굴은 아니었으나, 그리 말하는 킨의 낯은 평소에 비해 조금 더 섬세했다. 이죽이거나 비꼬기 바빴던 표정에 보기 힘든 차분함이 감돌았다.
“이복동생?”
“그래.”
“이복동생과 친할 수도 있나? 그것도 유서 깊은 가문에서?”
“친하지 못할 건 없지. 그래봤자 어릴 때의 일이라 얼굴도 희미하지만. 그 애도 날 기억할지 의문이군.”
미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침체된 눈빛을 거둔 그가 묵묵히 찻잔을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너는?”
“나?”
처음에는 무엇을 묻는가 싶었고, 나중에는 그 의미를 파악했음에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수잔은 혼자고, 아그레인 캐롤드에 대해 알려면 캐롤드 가문의 가계도를 뒤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케일 왕국의 제 22왕녀 베아트리체 아덴로지아 케일이지. 스물두 번째 왕녀인 걸 봐선 최소 스물한 명의 형제가 있는 모양이야.”
킨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태양이 흐르는 강』으로 들어오기 전 내게는 어떤 가족이 있었지? 기억이 희미했다. 아니, 희미하기보다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양 기억이 완전히 소거된 느낌이었다.
‘왜지?’
혼란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벽난로에 시선을 고정했다. 킨이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혀를 찼다.
“길을 잘못 들었어, 수잔. 비밀 많은 여자는 매력 없는데 말이야.”
두통이 이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받아쳤다.
“무슨 소리야? 남자든 여자든 있는 대로 다 까발리는 사람이 매력 없는 거야.”
“그런 걸 바로 피곤한 취향이라고 하지. 다른 말로는 사서 고생할 취향.”
그 이상은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극심한 어지럼이 몰려왔다. 킨이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 어디론가 사라졌으면 했다. 나는 이 느낌을 안다. 여기서 두통이 조금만 더 심해지면 줄이 끊긴 인형처럼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 것이다.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사념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갖은 힘을 다했다. 좀 더, 좀 더 쓸모없고 소모적인 생각을 하는 거야. 비는 언제 멈출지, 낙엽은 언제 다 떨어질지….
“이봐.”
그때, 돌연 막혀 있던 숨통에 공기가 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
나도 모르게 길게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킨과 내가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쯧, 좀 사람다운 몰골이 되었나 했더니. 다시 죽을상으로 변해가네.”
킨이 내 턱을 제 손에 쥔 채 이리저리 돌렸다. 눈과 입술 곳곳을 뜯는 시선이 이상하게 매서웠다.
“손 치워.”
“독 때문인가? 하지만 베르크네 씨는 이 정도로 낯빛이 안 좋지 않았는데. 설마 성격이 더러운 만큼 더 고생한다던가.”
내 말은 귓등으로 들었는지, 킨은 보란 듯이 얼굴을 더 꼼꼼하게 뜯어 살폈다. 의자 앞에서 몸을 구부린 그와의 간격이 너무 좁아 이제는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치우라는 말 안 들어? 개새끼라서 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픽. 재수 없는 웃음이 킨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을 때였다. 문 근처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킨의 손을 떨쳐내고 고개를 돌렸다. 활짝 열린 문 앞에서, 베르크네가 우리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실수를 했나? 그래도 이 한마디는 해야겠군. 마음 정은 생겨도 몸 정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라. 잉고르드의 독 때문에 눈이 멀고 귀가 멀….”
“끔찍한 소리하지 마시죠, 베르크네. 제가 그래도 나름 여자 보는 눈은 있어서 말입니다.”
구렁이 같은 웃음과 함께 킨이 다시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뒤통수에 침을 뱉으려다 말았다.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군, 킨. 수잔 정도면 손에 꼽는 미인이잖나.”
“사람은 얼굴이 다가 아니잖습니까.”
킨의 목소리에는 대놓고 짜증이 서려 있었다. 나는 불쾌한 티를 풀풀 풍기는 얼굴에 대고 방긋 웃어 주었다.
“내가 예쁜 걸 인정하긴 하나 보네.”
“들으셨습니까? 바로 저런 점이 학을 떼게 만든단 겁니다.”
“둘이 생각보다 더 가까운 사이란 건 알겠군.”
베르크네 역시 킨과 만찬가지로 습기 젖은 한기를 식혀 줄 따뜻한 차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가 뒤집어 있던 찻잔에 주전자를 부으며 물었다.
“너는 주방이 아닌 이곳에 있어도 되는 건가, 수잔?”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즈마리아 윌은 고용인들에게도 매우 자비로운 여자라서요. 휴일을 맞이한 하녀를 부리기 위해 종을 울리지는 않아요.”
“윌 영애를 잘 아는 듯한 투야.”
“그 여자가 저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베르크네가 조용히 내 눈을 들여다봤다.
“변했군, 수잔.”
짧은 시간이었지만,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사람은 계속 변한다. 날씨만 해도 화창했던 가을 하늘이 지금은 비를 줄줄 쏟아내고 있지 않은가. 흥미로운 주제는 아니었기에 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베르크네 씨. 아즈마리아 윌이 왜 공작 부인이 되려 하는지 아세요?”
“영애의 입으로 직접 듣지 않는 이상 모두 추측에 불과할 테지.”
베르크네는 리히튼만큼이나 표정 변화가 적다. 리히튼이 내내 살결이 떨리는 냉랭한 얼굴이라면, 베르크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덤덤한 얼굴에 더 가까웠다. 지금 역시 그랬다.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아니면 순수하게 관심이 없는 걸까. 상대가 베르크네라면 둘 모두 그럴싸했다.
“빌힐름 황자가 무섭대요.”
“동의하기 힘든 주장이로군. 아즈마리와 윌 영애와 빌힐름 황자의 사이는 친남매와 다름없는 사이였는데.”
꿈을 꾸기 시작한 이후로 내내 궁금했었다.
“제게 몰래 말하던데요. 빌힐름 황자의 개가 싫다고.”
고립된 그 성의 존재는, 아즈마리아의 말대로 물밑에 완전히 숨겨진 진실인 것일까? 베르크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기에 나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걸까요? 고작 그런 이유로 잉고르드에 오지는 않았을 텐데.”
“…윌 영애가 직접 그런 말을 했나?”
그럴 리가.
“무슨 의미인지 아세요?”
“그건 황실의 권력으로 유지되는 치부다. 설마 윌 영애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기밀이라면서 정말 개나 소나 다 알고 있네. 아니, 베르크네는 황성 출신이라 했으니 개나 소에 포함되지는 않는 건가. 하지만 아즈마리아는 소수의 고위 귀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했다. 이는 베르크네의 힘이 그 드높은 황성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래, 너도 조금씩 알아가는 게 좋겠지. 황성 가장 깊숙한 곳에는 두 개의 성이 있다. 힐 성과 예일 성. 이 두 성의 존재는 황실에서도 극비에 해당되며, 극히 일부의 귀족들만이 알고 있다.”
힐 성. 빗물에 젖어 있던 리히튼의 절절한 음성이 뇌리를 스쳤다.
‘내 방은 없어. 우리가 갈 곳은 힐 성이야.’
확실했다. 꿈속에서 내가 갇혀 있던 새장의 이름이 바로 힐 성이었던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킨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예상과 달리 그의 낯빛은 베르크네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다. 그림자가 내려앉은 눈으로 말없이 바닥을 응시한 채였다. 킨도 알고 있었던 건가. 어째서? 리히튼의 최측근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리고 잉고르드 가문과 캐롤드 가문 각각이 황실에 충성하는 의미로 아이를 바친다.”
잉고르드와 캐롤드.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리히튼 잉고르드와, 내가 빙의한 아그레인 캐롤드를 가리키는 소리였으니.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아이를 바치는 게 어떻게 충성하는 행위가 될 수 있죠?”
“평범한 아이가 아니니까.”
순간, 둔기로 뒤통수를 가격당하기라도 한 듯 머릿속이 멍해졌다. 리히튼의 광증은 힘의 대가라고 했다. 만약 그 힘이라는 것이 내게도 존재한다면?
“아이들은 황성에서 사육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처분되지. 윌 영애는 황성의 이면을 받아들이지 못한 모양이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 참 놀라운 일이네요.’라든지 ‘황실에 그토록 더러운 이면이 있었군요.’라든지. 전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무섭고 두려워서. 그 대단한 리히튼조차 이성을 제어하지 못하고는 살인귀로 만든 것이 바로 광증이었다. 그럼 아그레인의 광증은? 언제 어떠한 형태로 찾아오는 거지? 아니면 이미 지니고 있는 것인가? 나만이 모르고 있는 걸까?
“누구라도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이기는 하지. 제국을 번성케 한 유서 깊은 가문의 자손들이 대대로 황실의 개가 되어왔다는 사실이.”
아니야, 이 모든 건 추측이야. 내게도 리히튼과 같은 광증이 있으리란 보장은 없어. 하지만 캐롤드의 마지막 백 년은 혈통 대대로 광증이 휘몰아친 시대라고 하지 않았는가. 정신적 안정을 되찾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 광증에 대해 고민해 봤자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을 거란 자위가 큰 역할을 했다.
짧은 대화가 오가는 것이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밖의 빗소리와 벽난로에서 들리는 불꽃 튀는 소리가 이곳에서 들리는 소리의 전부였다. 킨이 사라지고, 베르크네는 벽에 걸린 유화를 말없이 보았다. 주전자의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창 너머로 검은 인영이 말에 올라탄 채 저택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 실루엣의 주인은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날씨에 사냥을 가셨던 건가요?”
몸 한 번 틀지 않고 그림을 들여다보며 베르크네가 대답했다.
“각하께서는 비를 좋아하시니까.”
이제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문장이었다. 그렇지. 리히튼은 비를 사랑하지.
“조금은, 병적일 정도로.”
이 감상 또한 이견이 없었다.
***
날이 흐린 만큼 해 역시 빨리 졌다. 이 비가 그치면 겨울의 초입이 시작되겠구나. 나는 아즈마리아의 저녁 시중을 든 후 가만히 응접실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대로 짧은 잠에 들었다 깨어나면, 어제처럼 리히튼이 내 옆에 앉아 있을까. 오늘은 종일 그를 만나지 못했다. 저녁 식사하기 전에 스치듯 창밖에서 본 것이 전부였다. 휴가가 끝나고 별관으로 들어가게 되면 더 마주하기 힘들 것이다. 아즈마리아가 공작 부인이 되어 본관에 입성하게 되면 조금 나아질 수 있겠지만.
‘…뭐가 나아지겠다는 건지.’
나는 정말로 미쳐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미친 생각을 할 수 없잖아.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나는 응접실을 벗어나 다리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쏴아아아.
우산을 펼쳐 밖으로 나갔고, 킨이 기대어 있던 울타리를 지나 냇물이 불어난 다리를 건넜다. 까마귀 털처럼 새까만 숲이 눈앞에 나타났다.
‘늪을 지나 사흘을 걸으면 지오르타 초원. 그리고 그 너머에는 지오르타 백작령.’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을까? 주위는 고요했다. 떠돌이 늑대도, 총을 쥔 리히튼도 보이지 않았다. 고민은 짧았다. 나는 까마귀 털 숲 안으로 몸을 던졌다. 산보라도 하듯 천천히 걷다가 나중에는 미친 듯이 내달렸다. 흙과 풀이 치마에 정신없이 튀었다.
“헉, 헉….”
그렇게 당장 눈앞의 시야만을 분간할 수 있는 미세한 빛만이 남았을 때. 어쩌면, 아주 어쩌면. 지금쯤 응접실에 그가 앉아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헛웃음이 났다. 동시에 엇나가 있던 이성이 돌아왔다.
“내가, 여기서….”
무슨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지.
몸의 온기가 급속도로 떨어지는 이 기분. 흡사 산 채로 땅 아래에 매장되는 느낌이 이럴까 싶었다.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잉고르드로 돌아갔다. 길이 잘 다듬어져 있어서 망정이었다. 잠시 정신이 나간 탓에 숲속에서 개죽음을 당할 뻔하지 않았는가. 숨이 차오를 정도로 뛰었던 것 같은데, 얼마 되지 않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잉고르드 저택이 보였다. 흘러내리는 빗물 탓에 마치 작은 강처럼 느껴지는 흙길 또한.
“늦었군.”
그 길 위에, 어둠에 휩싸인 저택을 배경으로 한 리히튼이 서 있었다.
“돌아가지.”
부드러운 힘이 내 팔을 끌었다. 나는 전신에 힘이 풀린 상태로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손아귀에서 우산이 빠져나와 저 뒤로 날아갔으나, 리히튼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반쯤 젖은 내 어깨를 감싸고 산을 내려갔다.
“어떻게 알았어요?”
물은 건 나였으나 대답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항상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겠지. 이제는 그 말이 어느 정도 진심으로 다가왔다.
“내가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요?”
리히튼은 여기서 나를 기다렸다. 마치 돌아오리란 걸 진작 알고 있었다는 양.
“네가 왜?”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는 음성에 울컥 화가 올라왔다. 나 홀로 안달이 난 이 상황이, 문득 너무나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를 밀어내 걸음을 멈추고 피를 토하듯 외쳤다.
“왜겠어요? 잃었던 기억을 찾았으니까요. 당신이 날 증오하게 된 그 기억을!”
반은 거짓이지만, 반은 진실이었다. 나는 아그레인의 기억을 되찾아가는 중이었으나 그가 아그레인을 증오하게 된 경위는 조금도 알지 못했으니까. 이제 더는 눈이 먼 상태로 버틸 수 없다. 나는 리히튼이 아그레인을 놓지 못하는 이유를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그래야 이 역겨운 감정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틀렸어.”
추락하는 빗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만은 매우 선명했다.
“그것도 아주 확실히 틀렸지. 날 속이려면 조금 더 머리를 굴리는 게 좋을 거야. 기억을 찾았다면 너는 더더욱 날 떠나지 못했을 테니까.”
리히튼이 다시 어깨를 이끌었다. 하지만 나는 꼼짝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리히튼은 나를 억지로 끌고 가지 않았다. 내 몸이 하늘에서 완전히 가려지도록 우산을 기울이고, 축축하게 젖은 어깨를 내게로 기울였다.
“변했군. 내 앞에서 설설 기던 트리비아체의 하녀는 어디로 갔을까.”
“변한 게 아니라 돌아가는 거죠. 주인님이 바라는 그 옛날의 아그레인으로.”
“아직도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길 바라는 건가.”
“내 것이 아닌 이름으로 불려서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정말 네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제 것은 이곳에 아무 것도 없어요.”
두 손을 들어, 가진 것 하나 없이 텅 빈 손을 리히튼에게 보였다.
“봉급으로 받는 돈 몇 푼과 주인님께서 주신 수잔이라는 이름이 전부지요.”
“그것도 나쁘지 않군.”
거리가 좁혀졌다. 리히튼이 빗물에 흠뻑 젖은 내 손을 잡아 내렸다.
“아니, 차라리 그게 더 나을 수도 있겠어.”
숲의 어둠 속에서 그의 안광이 내게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아그레인.”
맞닿은 이마에서 미약한 온기가 전달되었다. 나는 호흡을 멈추었다. 안개가 낀 호숫가의 습한 청회색 눈동자. 그 눈동자가 내게 외쳤다. 자신을 삼켜 달라고.
“나는 오직 너 하나만을 보고 여기까지 왔어. 이 끝나지 않는 끔찍한 지옥에서 너 혼자 편한 꼴은 못 보지.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되었는데.”
뜨거운 숨이 내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거기서 끝이었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시선이었지만, 끝내 입을 맞추지는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두 눈을 길게 감았다 뜨며, 리히튼이 허리를 폈다.
“…빌어먹을.”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어깨를 감싸고는 흙길을 따라 걸음을 이었다. 왜일까. 나는 그런 리히튼이 혐오스럽지 않았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내가 점차 아그레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확실한 방증이었다. 내가 그녀의 몸을 삼켰듯, 돌아오는 아그레인의 기억과 감정이 내 정신을 하나둘 빼앗아가고 있었다. 이 길의 끝에서 나는 결국 아그레인에게 패배할 것이다.
“잊지 마, 아그레인.”
…그래. 필요하다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네가 내게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내기에서 이기는 것뿐이야.”
어쩌면 아그레인이야말로 날 이곳에서 벗어나게 할 최후의 방책일지도 모른다. 무거운 몸은 사념과 잡생각에서 머릿속을 자유롭게 한다. 나는 젖은 몸을 질질 끌고 침실로 돌아가려 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리히튼과 나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 아닌, 충분한 휴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바람도 용인들의 공간으로 넘어가는 문 앞에 선 아즈마리아를 마주하면서 저 뒤로 물려야 했다.
“수잔? 괜찮아요? 세상에, 흠뻑 젖었네요!”
귀족 자제들은 이제 막 잠들어야 할 시간대였다. 이 늦은 저녁에 찾아온 걸 봐선 내게 볼 일이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적어도 주전자에 물이 다 떨어진 것과는 좀 더 다른 차원의 볼 일이.
“죄송해요, 영애. 절 찾으셨나요?”
아니나 다를까, 걱정은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겼는지 아즈마리아는 진중해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부탁할 게 있어서 찾아왔는데… 일단 몸을 좀 말리도록 해요.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물에 빠진 생쥐 꼴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벽난로에 불도 붙여야 하고, 그 불에 주전자 물도 끓여야 하며,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한데 그 시간 동안 아즈마리아와 함께 있으라고? 조금도 반갑지 않은 제안이었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아니요. 지금 말씀하세요, 아즈마리아 영애. 어차피 몸을 말리려면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며칠간 살펴본 바로, 아즈마리아는 자기애가 강하지만 상황 파악이 빠름은 물론 기회를 놓치지 않는 타입이었다. 즉 나를 필요 이상으로 귀찮게 하지 않는단 의미였다.
“수잔 양만 괜찮다면, 모레 하루만 시간을 내줬으면 해서요.”
보통 이런 일은 귀족 아가씨의 외출에 동참하는 경우였다.
“어디 가시나요?”
“그리 먼 곳은 아니고, 친우들을 잠시 만나고 올 생각이에요.”
친우라니. 이해하기 힘드네. 빌힐름 황자를 배신하고 리히튼과의 혼인 발표를 앞둔 이 시기에? 연회가 끝난 지 겨우 이틀이었다. 소문이 제국 곳곳에 퍼지기까지는 충분치 않은 시간이었으나,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기에 적절한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아즈마리아는 빌힐름 황자를 전폭 지지하는 윌 가문의 장녀이지 않은가. 그녀의 친우라면 빌힐름 황자의 측근일 텐데,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걱정이 워낙 많은 친구들이라…. 하녀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고, 수잔이 잉고르드의 방계로 이곳에서의 내 친구 역할을 해줬으면 해요. 물론 그들 앞에서만요.”
심지어는 요구조차 어처구니가 없는 요구였다.
“각하의 허락이 필요할 텐데요.”
“이미 허락은 받아 놨어요. 필요한 건 수잔의 허락뿐이에요.”
웃기는 소리 하네. 하녀 따위가 귀족 여식에게 허락을 하고 말고가 어디 있다고. 나는 아즈마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답을 내놓았다.
“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의복을 비롯한 준비는 제가 전부 해 둘게요. 사실 마음에 걸리는 건 귀족 예절이었는데….”
아즈마리아가 날 보며 다소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각하께 수잔이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라는 소릴 들어서요.”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한 조심스러운 음성이었다. 하지만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 아즈마리아는 은근슬쩍 내게 보여 주고 있었다. 자신과 리히튼이 이 정도의 이야기를 나눌 만큼 의미 있는 사이가 되었다고. 이해했다. 여자라면 리히튼처럼 근사하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맞습니다.”
나는 그저 아즈마리아가 가여울 뿐이었다. 명예로도 모자라 마음까지 주게 됐다는 사실이.
“그런데 왜 시녀가 아닌 허드렛일 하는 하녀를….”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요. 영애께 말씀드릴 수 있을 만큼 근사한 이유는 아닙니다.”
“실례되는 질문이었다면 미안해요.”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 일인걸요.”
조금도 기억 못하는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 부드럽게 웃은 아즈마리아가 몸을 돌려 멀어졌다. 아니, 멀어지기 직전에 다시 몸을 돌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수잔. 그때 나에게 왜 포기하라고 말했나요?”
이게 진짜 볼일이었군.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불길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보여서요.”
아즈마리아가 의문이 서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은, 고작 몇 가지 물어본 것으로 나를 어떻게 판단할 수….”
“영애와 제가 같은 처지이기 때문이죠.”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은 말간 낯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 물론 윌 가문의 여식인 아즈마리아 영애와 하녀에 불과한 제 처지가 같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당신도 앞으로의 일을 알고 있나요?”
앞으로의 일을 알고 있느냐니. 이리 갑작스럽게 훅 들어올 줄은 몰랐는걸.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곳에서 나눌 대화는 아닌 것 같군요.”
너랑 달리 나는 리히튼의 무서움을 제대로 알고 겪어봤거든. 이번에는 내 쪽에서 몸을 돌렸다. 그렇지 않으면 질문 세례가 끝도 없이 이어질 판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즈마리아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는 나를 안심시킨다. 잉고르드에는 나만큼이나, 아니 내가 있는 곳보다 더 어두운 늪에 빠진 존재가 있었지. 고맙게도 나는 아즈마리아와 나눈 대화 덕분에 휘몰아치는 사념과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소년의 이름을 들은 이후로 비비안느는 내게 종종 소년의 이야기를 꺼냈다. 신나서 떠든 것은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내게 말했다기보다 내가 그리하도록 종용한 것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는 일부러 그 길로 돌아오길 부탁했다. 살살 간질이기는 했으나 강요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비비는 심통이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가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빙 돌아갔다 와서는 줄줄 내뱉었다.
[있잖아… 그 애는 아그레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더 바보였어. 이제는 나랑 눈이 마주치면 바보처럼 웃어. 불쌍하고 더러워. 내가 자기를 훔쳐보는 것도 모르고….]
소년과의 기억을 떠올리는 비비의 낯은 그녀를 바라보는 빌힐름의 얼굴과 많은 부분이 비슷했다. 멍청하고 더럽고 하찮은 것을 바라보는 시선. 그래서 안도하는 눈빛. 나는 그런 비비를 더없이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찾아갔어. 아그레인이 궁금해 하니까. 나 착하지?]
[응. 착하네.]
비비안느가 유리구슬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녀가 내 옆에 바짝 몸을 대고 물었다.
[저어, 아그레인. 나는 아그레인이 그 바보 같은 아이에게 자꾸 관심을 갖는 이유를 모르겠어.]
[재미있으니까.]
[나보다 더 재미있어? 그 애에게도 개가 되어 달라고 할 거야?]
나만 사랑해 줘. 나만 더, 더 사랑해 줘. 비비안느는 귀여운 데다가 다루기도 참 쉬운 아이다.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니 그에 맞게 대처하기도 쉬웠다. 빌힐름이 나를 대할 때 이런 기분이겠지.
[그럴 리가! 비비는 나의 귀여운 개이고, 아카시아 숲의 그 애는….]
…아니야. 방금 판단은 너무나도 멍청했어, 아그레인. 빌힐름이 고작 이런 기분이었을 리 없었다. 이것보다 훨씬 더 즐겁고 훨씬 더 재미있었을 거야. 내 굴복과 아양을 보면서 단순히 귀엽다는 감상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고양을 느낄 테니.
[우리의 놀잇감이지.]
[하지만… 놀거리라면 여기에도 많잖아.]
비비안느의 투정에 천천히 방 안을 둘러봤다. 그의 말대로 이 방에는 놀 거리 천지였다. 그림, 퍼즐, 새장에서 꾸벅꾸벅 조는 앵무새, 커다란 인형의 집…. 하지만 아카시아 숲의 소년은 달랐다. 이것들은 빌힐름의 것들이지만, 그건 빌힐름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게 필요해. 내게 주어진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훨씬 더 간절히.
[그 애는 특별한 놀잇감이야, 비비. 살아 움직이잖니.]
가엾은 비비안느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괜찮아, 귀여우니까. 나는 우울한 표정의 비비안느를 두 팔 벌려 꼬옥 안았다.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몸이 내 품 가득 안겨 왔다. 비비안느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수줍게 웃었다.
[네게서 평소보다 더 좋은 냄새가 나.]
[정말?]
[응. 기분 좋고, 편안해….]
마음이 안정되었는지, 비비안느는 눈을 감고 내 어깨에 뺨을 비볐다. 더 사랑받길 원하는 그녀의 바람대로 하얀 뺨에 입을 맞추자 호선을 그린 입술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진짜 목줄 달린 개 같아서, 나 또한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오늘은 빌힐름이 오거든.]
비비안느가 굽어 있던 등을 천천히 폈다.
[아, 아그레인은….]
날 향한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빌힐름을 사랑해? 으응? 그런 거야?]
나는 보란 듯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나는 빌힐름을 정말 사랑해. 봄에 피어나는 꽃보다도 훨씬.]
[나보다?]
답지 않게 안정된 분위기였으나, 눈만큼은 나를 처절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거짓말이라도 아니라는 대답을 하길 바라면서. 하얀 눈가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고개를 끄덕이면 금방이라도 빗속으로 뛰어 들어가 호숫가에 몸을 던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안 되겠네. 이러다가는 곧 빌힐름에게 들통나고 말겠어.
[그런 표정은 빌힐름에게 보이지 마, 비비. 오직 내 앞에서만 보여야 해.]
나는 비비안느의 바람대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 대신 자비로운 주인이 되어 구불거리는 금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그래야 내가 널 빌힐름보다 더 사랑할 수 있으니까.]
***
과거의 꿈을 꾸면 불편한 점이 하나 있다. 그날 하루가 뜬 눈으로 밤을 샌 것만큼 피곤하고 고되다는 것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는 나로선 피곤하다는 사실을 특별히 불편한 사안이라 꼽을 순 없었다.
내가 진정으로 불편한 건 몸뿐만 아니라 정식적인 고됨이 배는 더 심해진다는 의미였다. 연회가 끝난 지 사흘째. 아즈마리아의 요구대로 간단한 아침 식사 후 외출을 준비해야 했다. 그녀가 빌려준 드레스는 화려하기 짝이 없었던 베아트리체의 복장보다 훨씬 활동적이고 깔끔한 의상이었다.
“아, 수잔.”
하녀의 의무를 생각해 십 분 더 일찍 나왔음에도, 아즈마리아는 이미 마차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묘하게 들뜬 분위기 때문인지 안 그래도 아리따운 얼굴이 배는 더 환하게 보였다. 문제는 그 옆에 정복 차림의 킨이 말에 올라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자는 왜….”
“아! 오늘 외출에 킨 경도 함께하기로 했어요.”
아즈마리아의 볼이 보일 듯 말 듯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제가 걱정되었는지, 각하께서 다른 기사도 아닌 무려 킨 경을 호위로 붙여 주셨지 뭐예요. 그러실 필요 없는데.”
“그렇군요.”
아즈마리아의 기분은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매우 좋아 보였다. 그녀는 킨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다음 차례로 내 손을 잡은 킨이 자신에게 잡아끌어 귓가에 속삭였다.
“도망치다가 잡히기라도 했냐?”
나는 눈동자만 굴려 그를 노려봤다.
“부정 안 하네. 너는 똑똑한 것 같다가도 한없이 멍청하단 말이야.”
그의 도발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망치다가 잡혔느냐고? 아아, 속을 알 수 없는 리히튼. 내가 절대 도망가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것처럼 굴더니. 킨을 무시하고 아즈마리아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내가 리히튼에게 붙잡혀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붙잡혀 있었다.
“지오르타 백작령은 이곳에서 멀지 않아요. 두 시간 가량밖에 걸리지 않죠. 오고 가는 데 금방이니 그리 피곤하지 않을 거예요.”
지오르타 백작령.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 지오르타 백작령이란 말이지. 늪을 건너 초원을 지나면 나타나는 땅. 어떤 땅인지는 알지도 못하지만 이상토록 내게 도망칠 구멍으로 느껴지는.
리히튼은 나를 골리고 있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킨을 붙이지 않고, 내게 멋대로 해 보라는 양 홀연히 풀어놨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그는 내게 킨이라는 확실한 목줄을 걸었고, 모든 것은 부질없는 희망이란 걸 느끼게 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지독한 미친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수잔… 안색이 어제에 비해 더 안 좋아요. 혹시 비를 맞아 몸살이라도 걸린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제 안색은 늘 안 좋지 않나요?”
창백하다, 다 죽어간다, 시체 같다. 잉고르드의 독을 복용한 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소리였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몸은 아주 괜찮으니까요.”
흘러간 과거를 되새기느라 깊은 잠에 들지 못한 탓이었다. 비비안느. 『태양이 흐르는 강』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 처음에는 별다른 영향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인 줄 알았지. 하지만 과거의 기억이 돌아올수록, 그에 대한 확신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었다. 아즈마리아에게 비비안느에 대해서 물으면 기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오늘은 날이 화창해서 다행이에요. 어제 밤새 비가 와서 걱정했거든요.”
“잉고르드는 날씨 변덕이 심한 편이지요.”
“아. 그렇죠, 잉고르드는 바다와 가깝죠.”
아니다. 아직은 아니야.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그녀의 신뢰다. 아즈마리아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서두르게 행동한다면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저도 익숙해져야겠네요.”
부드럽게 웃는 아즈마리아의 얼굴에는 공작 부인으로서의 책임감이 옅게 서려 있었다. 책임감? 제 입으로 꼭두각시 노릇을 하겠다 선언했으면서, 공작 부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다니.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리히튼 각하와 더 가까워지신 것 같네요.”
내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을 뿐, 그간 둘 사이에는 꽤 많은 대화가 오갔을 것이다. 아즈마리아의 표정이 이토록 부드러워 보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리히튼이 계약 연인 그 이상의 신사적인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거나. 속이 좋지 않았다.
“수잔이 그렇게 말한다면, 어느 정도 사실이겠죠.”
극도로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사자의 아가리에서 살 길을 찾았다는 안도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그러한 변화가 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다행이에요. 아직 풀어야 할 실타래가 많이 남아 있지만….”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그녀의 무엇이 이리도 걸리적거리는 거지? 리히튼을 향한 아즈마리아의 감정은 나로서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그녀는 마치 오래전부터 리히튼과 인연을 지닌 양 행세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양이 흐르는 강』 속에서 아즈마리아 윌과 리히튼 잉고르드는 정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책에 서술되지 않았던 뒷이야기가 있었던 건가? 아즈마리아가 그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모종의 무언가가. 문득 궁금해졌다. 리히튼은 아즈마리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또한.
“아. 이제 다 왔네요.”
그녀의 말대로 마차는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지오르타 백작저에 도착했다. 우릴 맞이한 자들은 아즈마리아의 또래로 보이는 귀족 영식과 영애였다.
“세상에, 아즈마리아….”
둘은 아즈마리아가 마치 지옥에서 돌아온 양 깊게 안도한 얼굴이 되어 마주 껴안았다. 특히 여자 쪽은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양쪽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네가 건강해 보이니 그걸로 충분해.”
기나긴 해후로, 내 차례가 오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아! 내 정신 좀 봐…. 이쪽은 나와 함께 잉고르드에서 온 메어리 잉고르드 양이야. 내가 잉고르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정말 감사한 분이지.”
두 명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남자 쪽은 적의의 시선을 숨기지 않았고, 여자는 누구든 좋다는 듯 눈물 맺힌 밝은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가워요, 메어리 양. 아즈마리아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나 역시 상냥하게 마주 인사했다. 베아트리체가 되기 위해 갈고 닦았던 귀족 예법을 이런 곳에서 활용하게 될 줄이야.
“뭘요. 이 정도야 미래의 잉고르드 공작 부인을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순간 무거운 정적이 돌았으나, 상관 않고 시선을 지오르타 백작저로 돌렸다.
“정원이 아주 멋지네요. 감격적인 재회가 끝났다면 이만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아… 무, 물론이에요. 저희가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 뒀네요.”
말과 함께 힐끔 킨을 훔쳐보는 여자의 시선이 불안감에 차 있었다. 하기는, 그들도 검은매 기사단의 부단장을 집으로 초대하게 될 줄은 몰랐겠지. 조용히 뒤따라 걷는 동안 그들 사이에는 많은 대화가 오갔다.
“네가 우리에게 서신을 보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크렉도 네 걱정을 참 많이 했어.”
“그건 내가 할 소리지, 밀. 사실…. 지오르타 백작께서 내 방문을 한사코 거절하실 줄 알았거든.”
“하아. 가엾은 아즈마리아…. 걱정하지 마. 오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모님 영지로 휴가를 가셨으니까. 이 넓은 저택에 남은 건 우리뿐이니 안심해도 돼.”
쉬이 넘길 수 없는 발언이었다. 이리도 적절한 타이밍에, 느긋하게 휴가를 떠났다니. 아무래도 몸을 조심하는 게 좋을 듯했다.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용인의 안내를 따라 너른 응접실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테이블에 티 세트가 준비되는 와중에도 아즈마리아와 지오르타 백작성의 남매는 문 곁에 서성이며 그들만의 대화에 바빴다. 일부러 나만 먼저 보낸 건가. 독에 중독된 내 감각이 무척이나 예민하다는 걸 몰라서겠지.
“아즈마리아. 너 정말 잉고르드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거냐?”
“크렉. 그 이야기는 이미 서신으로 충분히 전했잖니.”
“너의 오래된 친우로서 마지막으로 묻는 거다.”
나는 안 들리는 척, 허리와 팔을 곧게 뻗어 잔에 물을 부었다.
킨은 지금쯤 밖에서 무얼 하고 있으려나. 무얼 해도 상관없으니 내가 비명을 지르면 황급히 달려와 줬으면 하는데.
“아즈마리아.”
“응. 이미 리히튼 각하와 혼인을 약속했어. 서신에도 언급했듯, 너희에게 자세한 이유는 말해 줄 수 없지만….”
아즈마리아의 목소리에는 짙은 서글픔이 깃들어 있었다.
“이게 내가 선택한 나의 길이야. 정말 미안해.”
오오, 안타까운 아즈마리아! 가족이 아닌 사랑을 선택한 대가로,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비련의 여주인공. 사랑이라. 설마 아즈마리아가 리히튼에게 느끼는 그 애틋함이 사랑인 건 아닐 테지. 대화가 멈추더니, 곧 기척이 다가왔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잉고르드 양.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푸느라 정신없이 바빴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친우와 만나는 기쁨이 바로 그런 것이죠.”
돌아온 지오르타 남매에게 귀족 영애가 지녀야 할 배포를 보였다.
“아, 아즈마리아! 내가 따라 줄게. 이런 건 손님의 역할이 아니지. 너는 밀크티를 좋아했지?”
“아, 응.”
“아즈마리아, 잉고르드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데.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었나?”
밀이 호들갑 떨며 아즈마리아에게서 티 포트를 빼앗아 갔다. 나는 관심 없는 척 고개를 숙인 채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크렉이 그녀의 시선을 빼앗을 동안 밀은 아즈마리아의 찻잔에 홍차와 우유를 섞었다. 의심스러운 행동 없이, 아주 완벽한 방식으로.
“아즈마리아.”
내 부름에 입을 가리며 웃던 아즈마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잊었나요? 이틀 전에 비를 맞고 열병이 나서 속이 크게 고생했잖아요.”
“열병이요?”
그녀가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의아할 만했다. 거짓말이었으니까.
“배탈이 아직 다 낫지 않았을 거예요. 오늘은 우유를 드시면 안 됩니다. 자, 여기 제 차와 바꾸지요. 아직 입을 대지 않았답니다.”
아즈마리아는 묵묵히 내가 두 개의 찻잔을 바꾸는 모습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얌전히 대답했다.
“맞아요. 밀과 크렉을 만난 게 너무 기뻐서 잠시 잊고 있었네요. 하마터면 더 고생할 뻔했어요. 고마워요, 메어리 양.”
너무나도 평온하게 대응하는 모습에 다시 한번 생각이 바뀌었다. 이 상황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날 데려온 거야.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
“이 정도야.”
『태양이 흐르는 강』에는 이와 유사한 상황이 등장한다. 준비된 티 타임에 손님의 잔은 무조건 밀크티로 채워진다. 선호하든, 선호하지 않든 상관없었다. 이건 일종의 규칙이었다. 빌힐름을 배신한 자들이, 그의 측근에 의해 암살당하는 방식. 따뜻한 우유가 담긴 티 포트 입구에는 아마 치명적인 독이 묻어 있을 것이다.
연기를 꽤 하네. 역시 『태양이 흐르는 강』에 대해 모른다던 아즈마리아의 발언은 거짓말이었던 거야. 쉴 새 없이 맞장구치던 크렉이 돌연 입을 다문다. 밀 역시 다소 당황한 낯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메어리? 그냥 새로운 차를 따르는 게 어떨까요? 혹시 아까워서 그런 거라면, 전혀 그리 생각할….”
계속 찻잔을 들고 있던 내가 불안했는지, 아즈마리아가 내 팔을 붙잡았다. 커다랗게 뜬 눈동자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마치 내가 정말로 차를 마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까워서 마신다니요? 그런 구질구질한 생각을 할 리가 있나요.”
신뢰? 요구한다면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아즈마리아가 필요하다. 내가 모르는 수많은 정보, 그녀의 확실한 정체를 비롯해 이용할 수 있는 구석은 전부 이용해야만 했다. 이 차를 마시면 아즈마리아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 아즈마리아의 낯이 창백해졌다.
“메어리? 잔을 내려놓으세요. 하녀를 불러 새로운 잔을 가져오라고 시킬게요.”
이왕 얻을 신뢰, 확실하게 얻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나는 너를 위해 이 정도까지 할 수 있어. 잔에 든 밀크티를 천천히 목 뒤로 넘겼다. 정말 독이 든 게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평범한 맛이었다. 홍차의 맛은 적당히 씁쓸했으며, 달궈진 우유 역시 적당히 부드러웠다. 나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들지 않았다. 어린아이를 위한 세공품처럼 장식된 색색의 디저트를 응시하며 맛을 음미할 뿐이었다.
열은? 쓰림은?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쯤, 식도가 부어오르는 느낌이 만연했다. 급작스레 몰려온 현기증에 쥐고 있던 잔을 놓쳐 버렸다.
쨍그랑!
누군가 내 옆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즈마리아였다.
“수…!”
“충격적일 정도로 형편없는 맛이네요.”
호들갑 떨지 마. 백짓장이 된 아즈마리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판을 짜는 능력은 대단하나,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데는 부족한 듯싶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지오르타 남매를 응시했다.
“너무 충격적이라서 잉고르드로 돌아갈지 말지 고민될 정도예요.”
“시,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
“밀.”
크렉이 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의 눈 속에서 오랜 벗, 아즈마리아에게 보였던 따스한 애정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후였다.
“내가 기대를 너무 많이 한 걸까요?”
이제는 잉고르드 독이 내 몸을 완전히 해독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독으로 독을 해독한다는 말이 다소 우습기는 했으나, 이 정도면 잉고르드 독에 중독된 보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갈 데까지 갔구나, 아즈마리아.”
배신감이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크렉이 중얼거렸다.
“예전의 순수하고 선했던 너는 어디로 간 거냐. 우릴 배신한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같은 여인을 방패로 사용하다니!”
“크, 크렉. 아즈마리아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닐 거야.”
“입 닥쳐, 밀! 아직도 못 믿겠어? 아즈마리아는 리히튼 공작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게 아니야.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뿐이지!”
밀이 애처로운 얼굴로 아즈마리아의 팔에 매달렸다.
“아즈마리아….”
“그의 말이 맞아, 밀. 나는 너희를 배신했어. 이건 리히튼 각하의 뜻이 아닌, 나의 뜻이야.”
아즈마리아의 단호한 목소리에 밀의 눈에서 참고 참았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읏, 흑…. 대, 대체 왜?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아즈마리아? 빌힐름 전하는? 빌힐름 전하에게는 오직 너밖에 없는 걸 알잖아…!”
“그렇지 않아, 밀. 나는 그분을 믿을 수 없기에 내 모든 것을 걸고 리히튼 각하에게로 간 거니까.”
목을 매만지니 목구멍 또한 부어 있는 게 느껴졌다. 쓰러지기 전에 돌아가야 할 텐데. 이 지루한 극은 대체 언제쯤 끝날까.
“하! 각하? 각하라고? 이제 완전히 그 괴물의 사람이 됐구나, 아즈마리아…. 이 더러운 배신자 같으니라고.”
좀 닥쳐줬으면 싶은데. 그리 외치고 싶었으나 목이 부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를 주지. 윌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싶다면 지금 당장 자결해라. 네 그 탐스러운 머리는 내가 직접 빌힐름 전하께 가져다 드리마!”
슬슬 시야도 흐릿해져 가는데, 빌어먹을 아즈마리아는 언제까지 말다툼을 할 생각인걸까? 이러다가 밀이 징징거리며 울기 시작하면 두통에 머리가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럴 시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 킨을 데려오는 것이 더 효율적….
“킨 경?”
고개를 들었다. 아즈마리아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 끝에 커다란 신장을 지닌 익숙한 적발의 남자가 보였다. 남자의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여느 때처럼 사랑스러운 제 애마, 줄리엣의 갈기를 쓸어 주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돌연 안면도 없는 미인이 나타나 자신을 도와달라며 제 팔을 잡아끌더군요. 하나도 아닌 무려 셋이나.”
그리고 대뜸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못 이긴 척, 끌려가 주려 했으나 갑자기 각하께서 해 주셨던 말이 생각나더이다. 세상에 잉고르드의 주인을 직접적으로 노릴 만큼 무지한 놈들은 없다는 말씀이.”
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기다란 다리로 뚜벅뚜벅 걸어 이쪽으로 다가왔다.
“뭐, 구구절절 설명하기는 했으나… 제가 드리려던 말씀은 간단합니다. 이제 슬슬 아가씨들을 모시고 잉고르드로 돌아가 봐야겠다는 거지요.”
벌떡 일어난 크렉이 배에 힘을 꽉 주고 외쳤다.
“무례하군, 킨 경. 이곳은 잉고르드가 아닌 지오르타다. 그대가 멋대로 굴 수 있는 땅이….”
“두 분께서도 제 어마어마한 무훈을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잉고르드의 마차를 노리던 도적놈들 일곱을 맨손으로 제압했다는 소문 말입니다. 아, 위협은 아니니 안심하시길.”
명백하게 조롱하는 투였다. 나를 지나친 킨이 크렉의 코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머리 하나는 더 차이 날 듯한 높이에서 그가 위협적인 눈으로 크렉을 내려다봤다.
“위협은 아니지만 산 채로 지오르타 백작저 앞에 머리가 걸리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제 말에 따르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제 주인과 달리 저는 그래도 자비심이 넘치는 편이라.”
“무엄한 녀석! 네가 지금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리히튼 공작의 이름을 등에 지고 못하는 짓이 없구나.”
킨은 예의상 몸을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특유의 뻔뻔한 웃음을 지으며 역으로 협박했다.
“제 죄를 물으시려거든 각하의 화를 맞이할 준비 역시 하셔야 할 겁니다. 크로허츠 후작 꼴이 나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이, 이 씹어 죽일 빌어먹을 놈이! 감히 크로허츠 후작님의 이름을 입에 담다니!”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것으로 알겠습니다. 윌 영애? 마차로 가시지요.”
킨의 말이 끝난 직후 누군가 날 안아 들었다. 이제는 눈앞이 완전히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킨의 가슴팍에 힘없이 머리를 기댔다. 가까운 곳에서 빽빽 시끄럽게 우는 크렉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말이 너무 길어.”
“이런 게 바로 기선제압이라는 거지.”
걸음이 점차 빨라지고, 그에 따라 내 정신도 아득히 멀어져 갔다. 이제는 숨조차 제대로 쉬기 버거워지고 있었다. 사그라지는 이성 속에서 유일하게 남은 것은 익숙한 킨의 목소리였다.
“편안한 잠에 들도록 해, 메어리 영애. 눈을 떴을 땐 네 침실로 돌아가 있을 테니.”
***
전신이 바늘로 찌르듯 아팠다. 이 고통은 내게 익숙하면서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잉고르드 독에 중독되어 가던 과정과 끔찍하리만치 똑같았기 때문이다. 평생 인연도 없을 줄 알았던 독과 나는 어느새 둘도 없는 단짝이 된 듯했다.
제대로 눈을 뜰 수 있었던 때는 어슴푸레한 새벽의 푸른빛이 밝아 온 시간대였다. 목은 아직 부어 있었고, 시야도 흐릿했으며 꿈속을 헤매는 듯 정신이 몽롱했다. 다만 어지럼은 많이 줄어 두 다리로 제대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타오르는 목을 축이기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확히는 일으키려 했다. 몸이 물 젖은 솜처럼 꼼짝도 못했을 뿐. 그제서야 깨달았다. 지금 누워 있는 방은 내 침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네 몸은 네 것이 아닌 내 것이지.”
익숙한 천장과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팔에 감겨 오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은 생경하기만 하다. 창을 반쯤 가린 커튼의 자수가 화려했다. 가을 연회 직전에 갈아 끼운 커튼이었기에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아마, 리히튼의 방에 걸어 두었었지.
“용기가 가상한 점은 칭찬해 주마. 하지만 두 번째는 용납 못해.”
“용납 못하면?”
이성이 희미했다. 나는 메마른 혀를 움직여 힘겹게 답했다.
“어차피 나를 어쩌지도 못하면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하지만 이대로 몸을 일으키기에는 내 몸이 지칠 만큼 지쳐 있었다. 심해에 가라앉는 기분이 들 정도의 극심한 피로가 날 짓눌렀다.
“이제껏 그래왔듯 나는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할 뿐이야. 너에게 그러했듯이.”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바다 위의 종이배처럼 흔들리는 파도를 따라 입술을 움직였다.
“가엾은 리히튼. 너는… 언제쯤 나를 포기할 수 있을까.”
내 위로 기다란 음영이 졌다.
“너로군, 아그레인.”
꽉 막혀 울렁이는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힘들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네가 내 곁으로 돌아오고 있어.”
그리 말하는 리히튼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상 모든 것을 내려놔 버린 비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해가 한 번 뜨고, 한 번 더 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새 지저귐이 들리는 환한 낮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몸이 움직였다. 목에 모래가 낀 것처럼 텁텁하고 답답했다.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내 어깨를 잡아 오는 손이 느껴졌다. 아즈마리아였다.
“기다려요, 수잔.”
그녀는 내게 물이 든 잔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니요. 그건 내가 할 말이죠.”
물 한 잔에 죽어 있던 정신이 말끔하게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볼품없이 엉킨 머리칼을 넘기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호기롭게 독을 삼키기는 했으나, 고통이란 건 역시 느낄 때마다 새롭고 후회스러운 것이었다. 몸으로 때우는 방식은 앞으로 삼가야겠어. 답답한 분위기에서 먼저 말문을 튼 건 아즈마리아였다.
“수잔, 나는….”
“이제 절 믿으세요?”
아즈마리아의 눈에서는 더 이상 혼란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누워 있는 동안 굳게 마음먹은 듯했다. 그래, 그런 눈빛이어야지. 내가 무엇을 위해 그 아픔을 견뎠는데.
“그래요.”
“그럼 우리, 이제부터는 조금 생산적인 대화를 해볼까요.”
짧은 한마디에 그녀와 나 사이로 흐르던 공기가 변했다. 물을 한 입 더 삼키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수잔이에요. 하지만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아니었지요.”
예전의 이름을 알려 주고 싶어도 방도가 없었다. 숨기려는 의도가 아니라 순수하게 모르기 때문이다. 『태양이 흐르는 강』 속으로 들어오기 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떠올리려고 하면 극심한 두통이 찾아오고 숨이 가빠졌기에 번번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즈마리아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소개로도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당신은 누군가요, 아즈마리아 윌?”
아즈마리아가 차분히 숨을 골랐다. 이윽고 그녀는 무언가 큰 결심을 한 듯, 곧고 총명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아그레인 캐롤드.”
아즈마리아의 목소리는 조금의 떨림도 없이 선명하며 청아했다.
“내 진짜 이름은 아그레인 캐롤드예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병에 걸려 죽은 아즈마리아 윌의 몸에 들어오게 됐죠.”
***
이 이야기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을까?
맨 처음, 트리비아체의 낡은 침대에서 눈 떴던 순간을 떠올렸다. 함께 몸을 구기고 자던 여인을 따라 허겁지겁 일어나던 어슴푸레한 새벽. 나란히 서서 찬물을 뒤집어 써야 했던 서늘한 목욕탕. 도축될 돼지를 끌어오는 것부터 시작했던 주방의 아침. 모든 것이 익숙했으나 낯설었다. 습관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마치 새로운 세계에 홀로 뚝 떨어진 듯 두렵고 생소했다.
나는 하루아침 만에 말을 잃었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마치 그랬던 양 입을 꾹 닫아 버렸다. 고용인들은 내가 기억을 잃은 것이라 판단했다. 그들이 말하길 나는 며칠 내리 지독한 열병을 앓았으며, 그 여파가 가엾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 여겼다. 열병을 전염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흘을 독방에서 돌봤다고 했다. 그 다음 날은 몸을 추슬렀기에 괜찮은 줄 알았다고 덧붙이던 게 기억난다.
한데, 그 상황에서 고작 하루 사이에 내게 많은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태양이 흐르는 강』이라는 제목의 책이었고, 그 책을 통해 읽었던 수천 가지의 미래들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그 미래 속에 나는 없었다. 어째서 없는 걸까? 긴 고민 끝에 가장 그럴싸한 결론을 내렸다. 미래에 내가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이곳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인 거야. 그랬기에 가진 이름도, 몸도, 주변의 모든 것이 다 이토록 생경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아니, 하나 있기는 했지. 미래의 기억을 이용해 내 가치를 좀 더 높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으니까. 다만 예상과 달리 내가 본 미래는 여러 번 어긋났다. 또한 그 중심에는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은 혜성처럼 제국 중심에 등장해 모두의 이목을 끌었지만, 하나같이 석 달을 채 채우지 못하고 잊혀졌다. 만약 저 자리에 내가 있었다고 해서 달라졌을까?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조연의 반격은 없다.
때문에 나는 숨죽여 살아왔고, 그 끝에서 리히튼을 만났다. 이는 아즈마리아의 주장과 동일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어요. 내가 윌 가문의 아즈마리아가 되다니….’
‘아가씨께서는 아그레인 캐롤드의 기억을 갖고 계신 건가요?’
내 물음에 아즈마리아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단순하게 기억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이 몸에 갇혔을 뿐 나는 분명히 아그레인이에요.’
‘그렇다면 아그레인의 몸은 어디로 간 거죠?’
‘…모르겠어요.’
아즈마리아가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혼란에서 기인한 자신 없고 처연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아직 되찾지 못한 기억이 많아요. 천천히 기억해 내고는 있지만… 내가 이 몸에 갇혀 있는 이상 원래 몸은 죽었다고 보는 게 맞겠죠.’
서글픈 미소와 함께 그녀의 축축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그동안 너무 외로웠어요. 이곳으로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던지…. 수잔, 당신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을 듣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즈마리아는 아그레인에 대해서 나와 똑같은 기억을 가졌다. 아니, 어쩌면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빌힐름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나처럼 ‘그로부터 개로 키워진 아그레인’의 과거를 알고, 자신이 그 아그레인이라 여기기 때문이었다.
제기랄.
‘수잔?’
미친 듯이 뛰는 심장박동이 머리를 울렸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빠지는 폐부를 진정시켰다. 아즈마리아가 딱딱하게 굳은 내 손을 힘껏 부여잡았다. 기분이 극도로 안 좋아졌다. 그 손을 떨쳐내고 싶은 욕구를 힘겹게 참았다. 버텨. 그녀와 척을 져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어.
‘죄송해요, 아가씨. 갑자기 어지러워서… 조금 쉬어야겠어요.’
‘이런, 내가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말이 많았네요. 푹 쉬어요. 우리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충분하니까.’
문이 닫혔다. 아즈마리아의 걸음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귓가에 걸리적거리는 소음이 사라진 후에도, 나는 한동안 멍하니 천장만을 올려다봤다. 나는 아그레인이다. 그리고 아즈마리아는 자신의 전생이 아그레인이라 주장한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일이지?
***
“…그래서 누구에게 일을 대신 맡길지 고민이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수잔, 너만큼 눈치 빠르고 일 잘하는 아이도 없는데.”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나고 어둠이 내린 한산한 주방. 들려오는 피오라 부인의 음성에 사흘 전의 기억을 털어내고 느리게 고개를 주억였다. 잔 안에 든 포도주에서는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을 더 구할 순 없나요?”
포상 휴가가 끝난 날 밤에 시녀 한 명과 잡일꾼 한 명이 돌아오지 않았다. 주변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 둘은 새벽마다 저택을 나가 함께 돌아오는 일이 잦았으며, 아마 먼 곳으로 도망쳤을 거라 했다. 여자의 친모인 시녀장, 피오라 부인이 절름발이와의 혼인을 불허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피오라 부인은 놀라기는 했으되 반나절 만에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 곧 잉고르드로 돌아올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기는. 젊은 여자가 절름발이를 데리고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까.
“당장 이틀 후에 손님들이 오는 상황에서 어떻게 구하겠니. 시간에 쫓겨 데려오는 사람은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야. 더군다나 잉고르드의 시녀들은 대대로 가신들만 뽑았고… 너는 모르려나?”
대충 들어 알고는 있었다. 보통 유서 깊은 가문의 기사단과 시녀들은 가신들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잉고르드도 마찬가지였다. 대개 가신들은 가주가 맺어 준 또 다른 가신과 혼인한다. 그들은 대대로 주인 가문을 보필하며 그 일부로 살아갔다. 피오라 부인의 남편 역시 검은매 기사단의 전 부기사단장이었다.
“결국 하녀들 중 한 명을 골라야 하는 건가. 눈에 들어온 아이가 한 명도 없는데….”
“카센 경과 혼인하게 될 하녀인가요?”
카센은 피오라 부인의 막내아들이자 검은매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그 수밖에 더 있니. 마음 같아선 수잔, 널 데려가고 싶은데 각하께서는 아무래도 킨 경과 혼인시키실 것 같으니.”
난 이곳의 기사들과 혼인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게 킨이라면 더더욱 평생을 수절하며 살 예정이었다.
“두고 볼 일이죠.”
시녀장에게 역정 내는 꼴을 보일 순 없었기에, 남 일이라는 표정으로 웃어 주는 것이 다였다.
“한데 킨은 바깥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맞아. 너처럼 어느 날 돌연 각하께서 데리고 왔지. 신뢰가 남달라… 모두 각하의 고된 어린 시절과 연관된 자라 생각하고 있단다.”
리히튼의 고된 어린 시절이라. 그가 개로서 지내 온 삶은 그런 식으로 포장된 건가. 말을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피오라 부인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별말이 다 나오는구나. 이만 내일을 위해 눈을 붙여야겠어. 너도 이만 별관으로 돌아가렴.”
머리를 쓸어 올린 그녀는 느릿한 움직임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별관에서 지내는 동안, 리히튼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었다. 자신을 아그레인이라 주장하는 아즈마리아. 그리고 이 『태양이 흐르는 강』 속에서 수년을 아그레인으로 살아온 나. 무엇이 진실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를 살필 눈이 필요했다.
“메어리는 어떠세요?”
비틀비틀 주방을 나서던 부인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건 단순한 제의일 뿐이었다. 나는 최대한 지나가는 투로 말을 이었다.
“어린 데다가 눈치가 빠르고 순종적이에요. 일도 꽤 잘하고요.”
“그 애는 너무 아담해. 아이를 낳다가 큰일이 날까 봐 걱정이야.”
“신장이 크다고 건강한 건 아니죠. 절 보세요. 키는 하녀들 중에서 눈에 띄게 커도 매일 빌빌대잖아요.”
피오라 부인이 속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그녀가 떠난 자리에서 마지막 술 한 모금을 들이켜고 별관으로 돌아왔다. 역시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었다.
***
다음 날 늦은 오전. 점심 식사가 끝난 후, 담배를 피우기 위해 후문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메어리에게 지나가듯 말했다.
“피오라 부인과 카센 경에게 잘 보이도록 해.”
처음에 메어리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아는 하녀들 중 가장 눈치가 빠른 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깜짝 놀란 표정으로 담배를 내버리곤 코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설마 빈자리에… 절 추천하셨군요? 그렇죠?”
그녀의 음성은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왜 선배가 아닌 저를?”
말을 잇다 말고 메어리가 목소리를 죽였다. 아마 또 자신만의 무한한 상상의 나래에 빠져 있겠지. 나와 리히튼이 어떤 그림으로 이 아이의 머릿속에서 나뒹굴고 있을지, 보이지 않아도 뻔했다. 솔직히 이제는 완전히 틀리다는 말도 거짓이 되지 않았는가.
“나는 말만 꺼낸 게 전부야. 나머지는 네게 달렸지.”
메어리가 감격스러운 감정을 못 숨기는 얼굴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설마 이런 호의를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어요.”
“너도 알겠지만, 메어리. 나는 차기 공작 부인을 모시는 몸이 되었어.”
“네. 저도 선배를 향한 아즈마리아 아가씨의 신뢰가 대단하다고 들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아즈마리아의 신뢰가 완전한 신뢰라 여기기엔 많은 부분이 부족하다. 내가 그녀에게 보여 준 면은 서로가 비슷한 처지라는 것 정도가 전부였으니.
“아니. 이건 날 괴롭히는 행위에 가까워. 아가씨께서 나와 각하의… 그 관계를 눈치채셨거든.”
“아.”
짧은 감탄사에서는 내 거짓말에 대한 그 어떤 의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네 도움이 필요해, 메어리. 여기서는 나 혼자야. 내가 믿을 사람은 너밖에 없어.”
메어리는 더없이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제가 도울게요. 선배와 각하 사이에는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어요. 끼어들어선 안 돼요.”
메어리는 나와 리히튼을 관찰하며 과연 어떤 욕망을 충족하고 있는 걸까? 이루어질 수 없는 남녀 간의 사랑? 혹은 비약적인 신분 상승?
“…제게 비밀을 털어놔 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길게 숨을 뱉으며 최선을 다해 빚은 우울한 웃음을 내보였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원체 우울한 얼굴이려나.
“그건 내가 할 말이야.”
감사하기는. 고마운 건 네가 아니라 나인데.
아즈마리아의 영향력은 알게 모르게 빠른 속도로 퍼져갔다. 잉고르드 저택의 고용인들은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하면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즈마리아를 향한 그들의 관심사는 다양했다. 그녀와 리히튼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진전되는지, 고용인의 복지에 얼마나 관심이 있어 보이는지…. 내가 직접 들은 건 아니었고, 모두 메어리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각하는 여자가 정말 많으셨지. 하지만 단 한 번도 침실에 들인 적이 없으셔.”
“제가 모시는 분이라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가요. 제 친구가 일하는 곳의 주인은 일주일마다 침대에 두는 여자가 다르다던데.”
잉고르드의 하녀들 사이에서는 고용주와 관련된 음습한 소문들이 알게 모르게 돌고 있었다. 주인의 성욕이 동성에게만 반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나이를 꽤 먹은 하인은 어린 하녀들의 의구심을 담백하게 받아쳤다.
“잉고르드는 대대로 핏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가문이야. 선대께서도 공작 부인 외 그 어떤 여인도 침실에 들인 적 없으시거든. 그러니 너희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돼. 종마처럼 이곳저곳에 씨만 뿌리는 귀족보다야 훨씬 품격 있으시잖니.”
안타까운 말이지만, 리히튼이 금욕적인 이유는 단순히 제 침대 위에 시체를 두고 싶지 않아서일 터였다.
“그래서 다들 기대 중이잖아요. 아즈마리아 아가씨가 그 이례를 깰 수 있을지 말이에요.”
“난 각하께서 여인 때문에 별관을 들르시는 건 처음 봤어요. 여인이라면 늘 전시장 안의 전리품처럼 취급하시던 분인데.”
바구니에 아즈마리아가 요구한 홍차를 담으며 눈으로 조용히 메어리를 좇았다. 착하게도 피오라 부인 옆에 다소곳이 앉아 말동무를 해 주고 있었다. 옆에서 감자를 깎는 둥 마는 둥 하던 리냐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번 아가씨가 몇 번째죠?”
“일곱?”
“혹시 모르지. 다른 이들 몰래 아가씨와 밀회를 즐겨 오셨을지도.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 냉혹한 각하께서 정적의 여자를 빼앗아 오시다니….”
딱히 귀담아 들을 만한 이야기가 없었기에 볼일이 끝난 즉시 본관을 나와 별관으로 향했다. 오늘은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한시라도 빨리 일과를 종료하고 침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행히 아즈마리아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을 청했고, 나 역시 자정이 되기 전에 몸을 뉘였다. 잠들기 직전까지도 불안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
날이 유독 흐렸다. 족히 이십 분은 걸어야 나타나는 호수의 안개가 성을 두텁게 휘감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회색빛 하늘과 회색빛 안개 사이로 듬성듬성 보이는 수풀이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창밖의 풍경으로부터 도통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얼마나 빠르고 큰 울림인지 갈비뼈를 뚫고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기억이 나. 리히튼의 그 하녀 이름 말이야…. 분명 제인이라는 이름이었어.]
동그란 턱이 내 정수리에 닿았다. 비비안느는 반나절 만에 이름을 기억해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기쁜지, 두 팔로 내 몸을 부드럽게 안았다.
[으으음. 너무 흔한 이름이어서 잊어버렸던 걸까…? 우리 성에도 제인이라는 이름의 하녀가 꽤 많아서.]
[하녀들의 이름도 일일이 기억하는구나.]
[가끔은. 빌힐름의 밤놀이 상대들은 보통 안 잊어. 콧대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건방져. 아그레인이 혼내 주면 좋을 텐데….]
그들의 성에서 일하는 예의 제인이라는 하녀가 이번 여름 동안 빌힐름의 침대를 뜨겁게 해 줄 여인인 듯했다. 비비안느의 해사한 얼굴이 유리창에 비쳤다. 그의 시선은 울창하고 음습한 숲이 아니라 유리에 비친 나를 훑고 있었다. 해사한 시선이라 뺨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뺨의 간지러움을 거두어내지도, 비비안느의 시선을 털어내지도 못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유유히 걸어 들어오는 기다란 인영에 몸이 바짝 굳었던 탓이다.
[빌힐름.]
그 이름은 내가 아닌 비비안느의 입에서 나왔다. 빌힐름은 혼자가 아니었다. 풍성한 회색 털을 지닌 거대한 짐승이 그의 뒤에서 개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짐승이 찬 흉흉한 입마개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쳐 창문에서 멀어졌다.
[아그레인?]
[가, 비비.]
비비안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하나 친절히 설명해 줄 시간이 없었다.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지.
[돌아가. 아니, 여기서 가장 먼 방으로 가. 가서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가려.]
[아, 아그레인.]
[어서! 당장 나가라고!]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그 대신 꼼짝도 안 하는 몸을 문 밖으로 밀어냈다. 코앞에 보이는 내 손등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나 안 버릴 거지? 으응? 그렇지?]
대답 없이 문을 닫았다. 안 버릴 거냐고?
[읏.]
올라오는 토기를 참았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잘못이라면 비비안느를 믿은 내게 있었다. 아니야, 자책하지 마…. 누구라도 그 애를 믿었을 거야. 저 사랑스러운 얼굴로 내가 전부인 것처럼 행동했잖아. 내 모든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잖아. 비비안느는 빌힐름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모른다. 그랬기에 이제껏 빌힐름 앞에서 언행을 조심하라 했던 내 모든 말을 귓등으로 들었을 터였다. 비비안느는 여전히 빌힐름에게 복속되어 있었는데…. 잠깐이나마 비비안느를 가졌다고 착각했던 내가 너무나 우스웠다.
똑똑.
내가 저에게 무엇을 물었는지, 무엇을 요구했고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가감 없이 모두 빌힐름에게 불었겠지.
똑똑.
[누이.]
그게 비비안느가 살아가는 방법이었을 거야. 그래, 이건 그 애 탓이 아니야. 불쌍한 비비. 나와 다를 바 하나 없는 아이라 증오심이 들지도 않았다. 그저 가엽고 안쓰러웠다.
[누이, 문 열어야지.]
그럼 나는? 나는 누가 가여워하지?
[내가 더는 같은 말을 하게 하지 마.]
쓰러졌던 몸을 일으키고, 그가 바라는 대로 문을 밀었다. 새벽의 달빛을 녹아내린 진한 금발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오늘은 마치 순장이라도 당하는 얼굴이네.]
적색 눈이 설렘을 가득 담고서 나를 내려다 봤다. 그는 유리 인형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물론 누이라면 그 전에 내게서 멀리 도망가겠지만.]
입마개를 낀 거대한 회색 털의 늑대가 그의 뒤에 얌전히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아. 빌힐름은 나를 벌할 것이다.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려 한 죄를 명목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껏 몸을 낮춰 기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빌힐름 역시 그것을 바랄 터였다.
[내가 잘못했어.]
[너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 아그레인.]
[아니야. 내 잘못이야, 빌힐름… 미안해. 사죄할게. 무엇이든 하라는 대로 할게. 그러니까 제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대도.]
다소 질린 듯한 목소리였고, 나는 숨을 들이키며 입을 닫았다.
[앉아.]
짧은 명령이었다. 익숙한 공포가 내 복부를 후려치고 강제로 앉혔다. 식은땀이 턱 아래로 떨어지는 착각이 일었다. 이윽고 한 번 더 문이 열렸다.
[주, 주, 주인님….]
그 소년의 이름은, 당연히 모른다. 문 너머에서 들여보내진 소년은 눈이 가려진 상태였다.
[헉, 헉….]
두려움에 점철된 헐떡이는 목소리가 내 주위를 맴돌았다.
[주, 주, 주, 주인님… 너무 추워요, 무서워요….]
어쩐지 손끝이 따끔한 기분이 든다. 본능적으로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내려다봤다. 손톱에 깊게 팬 손가락 사이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바닥은 이미 늑대의 긴 주둥이에서 떨어진 침으로 흥건했다. 흥분으로 달아오른 짐승의 눈이 빌힐름의 눈처럼 붉었다.
[지금부터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으면….]
부드럽게 무릎을 굽힌 빌힐름이 입마개에 손을 댔다.
[주, 주, 주인님. 어, 어디 계세요?]
그의 복종을 요구하는 시선이 내 턱을 잡아 위로 올렸다.
[알지?]
늑대의 입마개가 벗겨졌다. 아아아아아악! 나의 것이 아닌 비명이었으나, 마치 나의 것처럼 느껴지는 비명이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초점을 흐트러트렸다. 입술을 굳게 닫고 숨을 골랐다. 뜨거운 피가 손등에 튀어도. 안대가 벗겨진 소년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그 도움이 결국 죽음에 묻혀도. 소년이 도륙되는 장면에서 시선을 틀지 못했다. 길고 긴 시간이었다. 얼마나 더 참아야 할까. 반나절이, 아니 하루가 훌쩍 흐른 것 같은데.
[이것도 이제 무료하군.]
빌힐름의 목소리를 기점으로 주위가 고요해졌다. 어느새 전신이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흥건했다. 다행히 오늘은 속을 게워내지 않았다. 다만 역한 피 냄새가 고역이었다. 곧 방을 치울 사람들이 들어왔다. 형체를 알기 힘든 고깃덩이가 늑대와 함께 방에서 사라졌다.
[착해, 예뻐.]
[아…!]
어깨를 감싸오는 손길을 무심코 쳐냈다. 나는 속절없이 떠는 양손을 꽉 맞잡았다.
[겁먹지 마, 내가 하나뿐인 누이를 저리 만들 리 없잖아.]
강한 힘이 날 소파 위로 이끌었다. 그는 겁먹은 나의 얼굴을 감상하듯,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역시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아그레인.]
빌힐름의 뱀 같은 입술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입을 맞추었다. 손은 뜨겁고 등에는 오한이 돌았다. 그가 황홀경이 담긴 술처럼 진득한 붉은 눈동자로 나를 핥아 내렸다.
[이 가느다란 손으로 내 목을 노리다가 구렁텅이에 빠진 그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흥분돼.]
눈이라도 감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지금 당장 손을 뻗어 잡아 뜯고 싶은 낯을 가만히 응시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것이 전부였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빌힐름이 내 손을 떨어뜨리고 오롯이 나를 응시했다. 하얀 손가락이 내 아랫입술을 파고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안쪽 입술이 너덜너덜해 있었다.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너는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아름다고 가장 약하며 가장 처절하고, 가장 추잡하지. 하지만 괜찮아. 난 그런 너를 통해서 살아 있다고 느끼니까.]
개새끼.
[널 안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럴 수만 있다면 평생….]
하지만 개새끼여도 괜찮아. 나는 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네게 웃어 줄 수 있어. 그래서 수줍은 얼굴로 웃었다. 이따위 비참함과 역겨움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이건 일종의 연극이었으니까.
[나를 사랑하지? 누이.]
그의 몸이 점차 나를 향해 기운다. 턱을 잡아끄는 악력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사랑해.]
그가 나를 집어 삼켰다. 집착과 열망으로 물든 숨이 내 혀와 입천장을 잡아먹을 기세로 쓸었다. 입 안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나의 주인, 빌힐름. 이딴 게 그렇게 듣고 싶어? 너만 원한다면 백 번 천 번 해 줄게.
[사랑해… 빌힐름.]
사랑해.
너무 사랑해, 빌힐름.
나는 너를 반드시 죽일 거야.
***
눈을 떴을 땐, 창백한 빛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작하듯 몸을 일으켰다. 뜨거운 온기가 입술과 목 근처에 선연했다. 환상이나, 환상처럼 느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지워야 해.
“하아, 하아….”
정신없이 침실을 달려 나가 후원을 건넜다. 빌힐름의 손길이 전신에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가을 말미에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뺨을 때리고 멀어졌다. 물결이 흘러 내려가는 냇가 한가운데서 미친 듯이 맨살을 문질렀다.
“제발.”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이가 서로 맞부딪힐 정도로 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제아무리 물로 씻어내도 빌힐름의 숨과 온기는 지워지지 않았다.
“제발!”
차라리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까. 발이 닿지 않을 만큼 깊은 곳으로 가야 떨쳐낼 수 있을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전신을 온전히 감싸 줄 깊은 수심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팔을 잡아채는 악력이 있었으나 가까스로 떨쳐냈다.
“…봐!”
몸이 식을수록 내 허리와 뺨과 입술을 쓸던 빌힐름의 온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안 돼, 잡아먹히고 말 거야. 어서 빨리…!
“제기랄, 나를 보라고!”
뒷목이 얼얼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늘만큼이나 흐린 청회색 눈동자였다. 가쁜 숨이 점차 잦아들었다. 맨살에 달라붙어 있던 더러운 숨결도 씻은 듯 사라졌다.
“정신 차려. 여기에는 너랑 나밖에 없어.”
너른 가슴이 턱 바로 아래에서 헐떡였다. 차가워야 할 그의 손이 오늘따라 델 것처럼 뜨거웠다. 살아 있는 온기를 인지하자 가빴던 숨이 점차 차분해진다. 나는 쓰러지듯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극도의 피곤함이 몰려왔다. 리히튼은 무슨 생각을 하며 여기까지 달려왔을까?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던 그의 가슴도 얼마 지나지 않아 평정심을 되찾았다.
“나를 잡아. …아니,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리히튼은 내 몸을 한 손으로 안아 들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주변을 살필 여력도 없이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가만히 안겨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젖은 몸에서 올라오는 한기와 그에 반하여 들끓는 열이 점차 심해졌다. 리히튼이 부드러운 천 위에 나를 눕혔다. 어지러운 시야 너머, 오색의 화려한 천장화가 눈에 익었다. 리히튼의 침실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이다. 곧 마른 장작 타는 냄새가 났다.
“왜 나를 여기로 끌고 왔어요?”
물기 젖은 백금발이 흔들렸다. 날 내려다보는 냉랭한 얼굴에 완벽하게 갈무리 못한 노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아직 완전히 씻어내지 못했는데.”
그는 자신의 외투를 거칠게 벗어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리고 구겨진 채로 물에 빠져 볼품없어진 내 상의의 단추를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손끝도 까딱할 수 없었다. 네 번째 단추를 풀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는 더럽지 않아. 그러니 방금처럼 머저리 같은 짓 하지 마.”
그 말을 끝으로 기다란 손가락이 남은 단추를 마저 풀어냈다. 미세하게나마 가슴께를 짓누르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배 안쪽이 울렁이는 감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당신이 내게 입 맞추지 않는 이유를 알겠어요.”
빗줄기를 뚫고 돌아오는 길에서도, 아즈마리아 앞에서도 그는 의도적으로 나를 회피했다. 물론 그렇지 않았던 날도 있기는 하지.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까지 고려한다면.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리히튼은 나를 증오하고 집착하고, 어쩌면 그에 더해서 역겨운 여자라 여기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던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몹시 쓸모없을 거란 걸 알아둬.”
어깨 바로 위를 내리누르는 무게가 느껴졌다. 느리게 눈을 떴다. 머리 옆쪽에 앉은 리히튼이 침구를 끌어다가 내 몸을 감쌌다. 어느새 위아래로 속옷만 걸친 상태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짧은 시간 내 뺨 위에 머물었던 시선이 멀어진다. 그는 내게 등을 보인 채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셔츠를 붙잡았다. 그리고 돌아본 창백한 낯을 끌었다.
“말만으로는 못 믿어요.”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 얼굴을 감싸 쥐는 손길이 스친 살을 아리게 할 만큼 거칠었다는 점이다. 열기가 내 안으로 침투했다. 우리는 그대로 입을 맞췄다. 숨도 제대로 들이키지 못할 만큼 거친 입맞춤이었다. 나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도 잊고 리히튼을 잡아끌었다. 커다란 손이 침구 사이를 파고들어 내 허리를 바짝 당겼다. 독에 중독된 것처럼 머릿속이 몽롱하고 발끝이 저릿했다. 더, 더 깊은 곳을 삼켜 주길 원하는 마음으로 그의 등에 매달렸다.
등과 허리를 지분거리던 손이 살결을 거슬러 속옷 바로 아래를 맴돌았다. 뜨거운 혀가 입천장을 쓸고 내 안쪽 살 곳곳을 건드렸다.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청회색 눈동자가 날 씹어 먹을 기세로 응시했다. 자제력을 잃은 움직임이 허리춤으로 내려와 젖은 피부를 긁었다. 아픔보다는 흥분이 컸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메스껍고도 한없이 추악했던 기억을 잊기 위해선 이보다 더한 충만함이 필요했다.
허벅지를 꽉 잡고 있던 손이 서서히 위쪽을 향했다. 마르지 않은 천에 닿아 오는 감각이 몸을 뒤흔들었다. 내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을 얼굴만큼은 숨기고 싶었다.
오히려 리히튼은 내 어떤 변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자신에게서 도망치려는 내 턱을 강하게 붙들었다. 이목구비 전부를 샅샅이 살피는 시선에 목이 말랐다. 마른 목을 그의 숨과 혀가 채웠다. 속옷 위를 스치던 허벅지 사이의 손가락이 천 안쪽을 파고들었다. 읏. 소리를 참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동시에 어질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대로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었다. 들뜬 숨이, 들떴으나 조금도 더럽게 느껴지지 않는 숨이 내 목덜미를 따라 가슴 바로 위에서 멈추었다.
“제기랄….”
낮게 가라앉은 욕설과 함께 그가 내 목덜미를 깨물었다.
“아!”
피가 나지는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고통이었다. 곧이어 리히튼이 내게서 몸을 뗐다. 나는 헐떡이는 숨을 참으며 그에게 물린 목을 쓸었다. 새빨간 피가 손톱 아래에 묻어 나왔다.
“아그레인, 이건 명령이야.”
지독할 정도로 쉰 목소리였다.
“너를 더럽다고 생각하지 마. 그게 빌힐름 그 개자식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다시 침구를 끌어 내 몸을 덮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두 팔로 나를 꽈악 끌어안았다. 빳빳한 새 천에 쓸린 목덜미의 상처가 쓰라렸다. 달아올랐던 몸이 서서히 식었다. 열이 식자 다시 한기가 돌았다. 덜덜 떠는 몸을 리히튼이 더 강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나는 그와 어떤 관계이고 싶은 걸까. 그는 나를 도대체 어떻게 여기는 걸까.
리히튼이 욕구를 완전히 풀어낼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오직 나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자제력을 잃지 않는 그가 놀랍기만 했다. 허무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내가 몸으로 대화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무엇이 리히튼을 이토록 이성적이게 만드는지 궁금했다.
“왜 참으세요?”
“이러려고 널 데려온 게 아니야.”
“초야도 아니고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게 더 우스운 일 아닌가요?”
“어떻게 비꼬아도 널 덮칠 일은 없어.”
“참 신사다우시네요.”
가슴 속이 울렁였다. 그와 나 사이에 이리도 평범한 대화라니. 품 안에 가만히 안겨 있다가 무심코 머릿속에 맴돌던 것 중 가장 쓸데없는 속내를 내뱉었다.
“저는 늑대가 싫어요.”
“그렇담 씨를 말려 버리면 되겠군.”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나온 대답이라 농담인지 한참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리히튼이 농담할 위인은 아니니까.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를 밀어낸 후 널브러져 있던 옷을 걸쳤다. 축축한 의복을 걸치는 동안 리히튼의 눈길은 오롯이 나를 향했다.
“내가 한 말 잊지 마.”
그는 내게 늘 명령만 한다. 그런 것이 바로 주종 관계이기는 해도.
“아즈마리아 아가씨에게 오늘 일을 알려도 되나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리히튼은 내 눈을 지긋이 응시하며 대답했다.
“너는 잉고르드까지 찾아온 아즈마리아의 저의를 알아야겠다며 스스로 왕녀 노릇을 했지.”
그가 마르지 않은 베스트와 셔츠를 천천히 벗었다.
“그리고는 아즈마리아가 잉고르드의 공작 부인이 되길 희망하지 않았나? 그 입으로 직접 그 여자의 요구를 허락할 정도로. 그런데 오늘은 내게 오늘 일을 알리겠다는 말장난을 하는군.”
창문을 통해 떨어지는 새벽빛이 그의 널따란 등을 환하게 비췄다. 맞물려 있는 크고 작은 흉터가 마치 별자리 같았다.
“무슨 심보일까?”
저 짐승처럼 크고 단단한 몸이 내 위에 올라타고 있던 건가. 목이 메었다.
“아즈마리아 아가씨는 아마… 제가 오늘 일을 말해도 잉고르드를 떠나지 않으실 거예요.”
“어떻게 구슬렸는지는 몰라도 꽤 사이가 좋군.”
“그럼요. 아가씨는 퍽 솔직한 성정이에요. 주인님께 몹시 절절한 감정을 지니고 있던 것 같았어요. 마치 전생의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왜일까요?”
그는 이제껏 그래왔듯 입을 다물고 나의 무지를 즐겼다. 리히튼은 알까? 그의 이런 반응이 오히려 내 머리를 더 차갑게 식힌다는 것을.
침실의 문을 닫고 별관으로 돌아왔다. 개 같은 꿈을 꾼 대가가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덕분에 리히튼이 아즈마리아의 그 비밀 아닌 비밀을 알고 있음을 파악했으니. 얼마나 재미있을까? 스스로를 아그레인이라 여기는 두 여자라니!
‘아그레인은 나야.’
그리고 아즈마리아 또한 나처럼 여기겠지. 한데 만약 내가 틀리고 그녀가 옳다면….
그때가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