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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 수레바퀴 (6/24)

Episode 5. 수레바퀴

그는 나를 길들이고 있었다. 빌힐름은 알고 있을까, 내가 그 사실을 자각한 지 오래라는 걸. 굴욕과 비참함마저 내 것처럼 익숙해진 후라는 걸.

[누이.]

어쩌면 빌힐름은 그러한 사실조차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신컨대 빌힐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마냥 백치만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눈에도 보이겠지. 빌힐름의 애정은 그 진실을 앎으로써 시작되는 것일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서 무릎 꿇고 굴복하는, 나약하고 순종적인 소녀에 대한 애정.

[기대해도 좋아. 오늘은 누이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거든.]

눈을 크게 뜨고 빠르게 깜빡였다. 이는 내가 그의 발언에 대해 기뻐하고 기대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빌힐름이 맞잡고 있던 손을 풀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너는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 아그레인. 그때 원하는 것을 안겨 주지 못해 어찌나 아쉬웠던지.]

[내가? 난 아무 것도 필요 없는데. 지금으로 충분해, 빌힐름만 있으면 온 세상이 아름다워.]

그가 내 손등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나는 평생을 바쳐 사랑하는 이의 열렬한 구애를 마주한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웃었다.

[그날의 너는 개를 가지고 싶어 했지.]

[내가? 기억나질 않네.]

[벌써 잊은 거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나 봐.]

내게 중요한 일은 오롯이 빌힐름이 엮인 일뿐이다.

빌힐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만족스러워 웃는 것인지, 아니면 가소로워 웃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멍청한 얼굴로 마주 웃는 게 좋다.

[이 넓은 성에 혼자 있을 너를 배려하지 못했지. 내 실수였어, 아그레인. 네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한 내 실수.]

우리는 침실 앞에 멈춰 섰다. 산책하는 사이에 빌힐름이 사람을 시켜 예의 그 ‘개’라는 걸 가져온 모양이었다. 버려진 터에 고립되어 있던 소년을 떠올렸다. 은발에 가까운 백금색의 머리카락, 작은 덩치, 여기저기 까져 성치 않았던 몸, 책에 빠져 들어갈 듯 숙이고 있던 고개. 과연 어떤 개이기에 빌힐름의 악의를 온몸으로 받고, 그럼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갖고 싶었다. 아니, 가져야만 했다. 바깥세상과 완전하게 차단된 이 외딴 섬에서 소년은 내게 유일하게 주어진 기회였다. 그가 지닌 ‘그것’을 이용할 기회. 하지만 과연 빌힐름이 내가 원하는 것을 줄까?

[기뻐해, 아그레인.]

문이 열렸다. 동시에 초여름의 찬란한 햇빛이 발등으로 쏟아져 내린다.

[누이에게 또 다른 나를 선물할게.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오직 누이만의 개야. 어때? 이제는 내가 성을 비워도 외롭지 않겠지?]

빌힐름이 내게 준 선물은 버려진 개가 아니었다. 그건 외면할 수 없는 고약한 사랑스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금빛 머리칼이 어깨 위에서 파도쳤으며, 백합보다 흰 얼굴은 유리 인형처럼 곱고 가련했다. 별이 박힌 것처럼 화사하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갓 피어난 장미꽃처럼 탐스러운 눈이 수줍음을 담고 있었다. 이윽고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피를 지닌 소녀가 볼을 발그스름하게 붉히며 웃었다.

[안녕, 아그레인…. 날 초대해 줘서 고마워. 듣던 대로 네 성은 숲속의 낙원처럼 아름답구나.]

빌힐름의 선물은 그의 하나뿐인 쌍둥이이자 버려진 황녀, 비비안느였다.

***

딸랑딸랑.

귓등을 울리는 종소리에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어렴풋이 들어오는 시야는 등불의 옅은 광원을 제외하면 깊숙한 밤의 동굴처럼 어두웠다.

딸랑딸랑.

언제 부엌에서 잠들었던 것일까. 잠들기 이전의 기억이 흐릿했다. 리히튼의 집무실에서 나온 후, 속 긁는 킨의 뺨을 때리다가 날 찾으러 올라온 콜렌토 부인을 따라서…. 맞아, 오늘은 내가 야간 담당이었지. 예상과 달리 연회는 새벽 두 시가 되자 칼같이 막을 내렸다. 이제 내일 저녁 만찬만 끝나면 이 지겨운 손님들도 잉고르드를 뜨겠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흔들리는 종 앞으로 걸어갔다. 종의 숫자는 305. 연회의 손님이 거주하는 침실이었다. 밤늦게 하녀를 호출하는 경우는 대개가 목이 말라서다. 준비해 놓은 물이 담긴 포트와 함께 삼 층으로 올라갔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똑바로 걷기가 영 버거웠다.

“비비안느.”

비비안느는 『태양이 흐르는 강』에서 언급도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아니, 책 속의 빌힐름에게는 애초에 쌍둥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

이쯤 되니 진심으로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태양이 흐르는 강』이라는 소설을 정말 읽었던 게 맞나? 미래와 조금 유사할 뿐인 꿈을 꾸었던 게 아닐까?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문이 열렸다.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여인이 내 얼굴을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아, 마침 목이 말라서 불렀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하녀의 기본입니다.”

종을 울린 침실의 객은 공교롭게도 아즈마리아였다. 그녀는 몸을 틀어 나를 방 안으로 들였다.

“수잔 양. 내가 먼저 자리를 뜬 후 문제는 없었나요?”

“걱정 마세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즈마리아가 잠시 입을 닫았다. 내가 거리낌 없이 언급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테이블에 놓인 빈 포트를 열고 물을 채웠다. 아즈마리아의 상냥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잠깐 물으려고 붙잡았던 게 피해를 주게 될 줄은 몰랐어요. 당신을 도울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도운다’라, 빌힐름도 내게 그런 비슷한 말을 했었지. 물이 완전히 채워진 포트의 뚜껑을 닫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아즈마리아가 잉고르드에 대해 알아보려는 이유 하나로 방문했으리라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을 하게 되든 리히튼의 귀에 들어가게 될 터였다.

“포기하세요.”

그러니 내가 아니면 누가 그녀에게 조언을 해 줄까.

“이런 말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영애께서 하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작 연회에 참석하는 손님의 수를 열아홉에서 스물로 늘리는 게 전부겠죠.”

긴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의미 없이 포트를 닦던 행위를 멈추고 등을 돌렸다. 평정심을 잃지 않은 동그란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도 당황한 기색을 완벽히 숨기지는 못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영애의 그 놀라운 힘이 도리어 영애의 목숨을 갉아 먹을 거란 소립니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누군가 내게 하루 더 일찍 트리비아체를 떠나라고 조언해 줬다면, 지금의 나는 달라져 있지 않을까. 코웃음 치며 흘러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혹시라도.

“그게 대체….”

“저도 영애의 약속을 지켜 드렸으니, 영애도 부디 입을 가벼이 하지 말아 주시길.”

말과 함께 안쪽 주머니에 보관해 두었던 세공된 다이아를 꺼냈다. 아즈마리아에게서 받았던 그 물건이었다.

“이건 돌려 드리겠습니다. 좋은 밤 보내십시오.”

조용히 문을 닫고 아즈마리아의 방을 나왔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말은 그녀의 마음을 조금 헤집기만 할 뿐 돌이키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어쩌면 나는 잉고르드의 개로 살아가는 이 순간이 차라리 운명이었으면,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 운명을 아즈마리아를 통해 증명받으려는 것이다. 선택지가 늘었어도 결국 똑같은 길을 걸었으리란 걸.

“포기한다면 실망할 거야, 아즈마리아.”

하지만 포기하지 않더라도 실망할 터였다. 이 이중적인 마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주방으로 돌아간 나는 빈 포트에 다시 물을 부으며 다음번에 울릴 종을 기다렸다. 적어도 침실에 가만히 누워 있는 시간보다는 덜 외로운 시간이었다.

***

야간 담당은 보통 당일 오전 일과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연회 이튿날의 내 업무는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저녁 만찬을 돕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오늘 각하의 기분이 상당히 괜찮아 보이셨어요.”

성에 객이 방문하면 안 그래도 좁은 고용인의 행동반경이 배로 더 줄게 된다. 덕분에 만찬 준비로 소란스러운 주방은 다른 일을 맡은 고용인들까지 모여 포화 상태였다.

“밤새 좋은 꿈이라도 꾸셨나?”

“그분이 고작 좋은 꿈 따위로 기분의 척도를 정할 분이시니?”

“혹시 모르지, 저 장작처럼 활활 불타는 밤을 보내셨을지.”

혹여나 콜렌토 부인이 듣기라도 할까, 고개를 낮춘 리냐가 마리에게 속삭였다.

“사실 난 베아트리체 왕녀를 초대하셨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주방을 도와 감자를 깎던 마리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고용인들 보는 앞에서 그 정도의 애정을 보였던 건 왕녀가 처음이었거든.”

“아, 너는 못 봤지? 얼마나 격정적으로 허리를 껴안으시던지, 왕녀의 개미허리가 두 동강 날 줄 알았다니까.”

못 봤을 리가 있나. 다른 이도 아닌 내가 베아트리체 왕녀 본인인데. 허리를 감아 오던 그 단단한 손끝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히 박혀 있었다. 작게 고개를 주억이자 옆에서 열심히 엿듣고 있던 메어리가 내게 속삭였다.

“사실 별거 없었어요. 선배들이 과장하는 거예요. 그래봤자 더는 보이지도 않는 여자잖아요.”

마치 나를 위로하려는 목소리였기에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도 기분이 묘해졌다. 누가 들으면 나와 리히튼이 대단한 비밀 연애라도 하는 줄 알 터였다.

“그래서 공작님은 어떠시던가요? 각하의 다음 연인이 될 귀족 아가씨는?”

말없이 맞은편에 앉아 담배만 피던 피오라 부인이 짧게 웃었다. 며칠 간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고생했는지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아무도 몰라, 리냐. 공작님께 이 연회는 그저 귀찮고 번거로운 행사일 수도 있다고.”

그러나 연회를 향한 리냐와 마리의 궁금증은 마를 줄 몰랐다. 그들은 반쯤 송장이 된 피오라 부인을 상대로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메어리까지 가세하니 가만히 서서 감자만 다듬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아즈마리아가 과연 어떤 답을 내놓을 것이냐에 대해서. 시침이 두 시를 가리켰을 때는 여기서 마냥 궁금해 하기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됐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맡은 일을 다 끝낸 즉시 리히튼의 집무실을 찾아갔고, 요구했다.

“주인님, 괜찮다면 저도 오늘 저녁 만찬에 참석할 수 있을까요?”

앉은 자세에서 허리를 편 리히튼이 가벼운 눈짓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적어도 내게 살인을 강요했던 어제보다는 훨씬 생기가 더는 얼굴이었다. 그래봤자 창백한 건 그대로였지만.

“어젯밤 아즈마리아 윌이 제게 잉고르드의 광증에 대해 물었어요. 그것도 세공된 보석을 쥐여 주면서요. 그 여자가 무슨 생각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절 이용해 주세요.”

툭, 툭. 펜촉을 거두고, 손끝으로 책상 두들기는 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내 얼굴을 샅샅이 뜯어내는 눈빛이 매서웠다. 그러나 이전처럼 잡아 삼키려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광증에서 벗어난 리히튼은 저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구나.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안정되어 보였다. 마치 다른 존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베르크네. 수잔에게 적당한 신분을 구해 주도록.”

고작 몇 초 만에 얻어낸 답이었기에 베르크네와 더불어 나 역시 놀라고 말았다. 잠시간 내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리히튼이 느리게 덧붙였다.

“베아트리체 왕녀도 나쁘지 않겠군.”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베르크네에게 이끌려 집무실을 벗어났다. 공작저의 이 층 동쪽 복도는 오직 리히튼의 공간이었기에 손님이 꽉 찬 시기에도 공허하며 차분했다.

“너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수잔. 어느 순간부터 네 생각을 도무지 따라가기가 힘들군.”

베르크네는 자신의 당혹감을 조금 내보였을 뿐, 나를 다그치지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요, 베르크네. 내게 크게 상관하지도 않으면서.”

“너는 상관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어. 대체 무슨 미친 생각으로 각하께 그런 말을 올린 거지?”

그게 미친 행동이었나. 베르크네의 말을 천천히 곱씹으니 그 말의 뜻이 확실하게 이해가 갔다. 리히튼 앞에 서면 기껏해야 할 말만 겨우 내뱉는 네가 무슨 배짱으로 요구를 하느냐는 뜻인 듯했다.

“동태가 기이한 귀족 영애를 살피는 게 왜 미친 행동이에요? 나는 주인님의 개로써 주어진 마땅한 일을 하는 거예요.”

“이미 킨으로부터 전달받은 사안이다.”

“그 힘만 센 멀대가 뭘 할 수 있다고요? 고작 여자들 옆에서 얼쩡대다가 발정난 개라는 의심만 사겠죠. 뻔해요.”

“신랄하군. 킨이 어디 가서 그럴 취급을 받을 기사는 아닌데 말이지.”

남들이 킨을 어찌 취급하는지는 내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가 리히튼 앞에서 더는 벙어리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지.

나는 어젯밤 그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이건 고작 성욕을 채우는 행위나, 열렬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 이상의 것을 리히튼에게 넘겼다. 내가 나임을 잊지 않기 위해 힘겹게 붙잡고 있던 마지막 이성을.

그러니 나에게는 리히튼에게 원하는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것이 공교롭게도 주인의 안위와 관련된 사항이라면 더더욱. 개도 배가 고프면 주인에게 앓는 소리를 하지 않는가. 나는 리히튼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니 이 정도는 당연한 권리인 거야.

석양이 지고, 가을 연회를 마무리하는 만찬의 시간이 찾아왔다. 리히튼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제아무리 베일로 가려도 리히튼의 시선은 늘 모든 장애를 꿰뚫어 맨살에 맞닿아 오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리히튼. 오는 도중 번거로운 일이 생겨서 이틀이나 늦어 버렸지 뭐예요.”

연회에 참석하는 손님들 중 그 누구도 리히튼의 직접적인 환대를 받지 못했다. 한데 만찬을 앞둔 와중에도 날 마중 나온 것을 보니, 그의 옆자리는 아직 베아트리체의 것인 듯했다.

“이틀 내내 퇴짜를 맞은 건 아닌가 고민했습니다, 왕녀. 이걸로 체면은 차리겠군요.”

성의 내부는 바깥에서 봐도 이른 아침처럼 환했다. 그 빛 사이사이를 관통하는 수십 개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이왕 하는 왕녀 노릇, 즐기면서 하면 좋겠지. 나는 리히튼의 팔에 매미처럼 붙어 부채로 입을 가린 채 크게 웃었다.

“농담하시기는. 나는 이미 당신의 포로인걸요. 당신이야말로 길들여진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걸 잊지 마요.”

그가 내 손을 잡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황홀한 미소였다. 도착한 만찬장에는 사람이 하나둘 차고 있었다. 은은하게 빛을 내는 꽃 모양 등불과 벽에 즐비한 그림, 고아한 천장화가 만찬장의 그윽한 분위기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잉고르드에 황홀한 꽃향기가 진동을 한다 했더니만… 제국의 아름다운 귀족 영애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군요.”

“그대만 하겠습니까.”

리히튼이 나를 에스코트한 자리는 본인의 옆자리가 아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 자리 옆에는 아즈마리아와 다소 낯익은 귀족 여식들이 오순도순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등장에서부터 자리에 착석할 때까지 내게서 떼어지지 않았다.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러했다. 우스갯소리로 ‘공작 부인 선발회’라 불리는 잉고르드 가을 연회에서 그의 현 연인인 베아트리체의 등장은 퍽 이목이 쏠릴 만한 일이기는 했다.

“우리 구면 아닌가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참 기쁘네요. 그때는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는데.”

그때의 만남이 내게 이런 식으로 도움을 줄 줄이야. 아즈마리아와 나란히 앉은 귀부인들은 크로허츠 가에서 함께 쟈스민 부인의 흉을 보던 그자들이었다. 아즈마리아가 격식 있게 몸을 숙였다. 여인들이 내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아즈마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어라 속삭였는지 가늠해 보자면…. 크로허츠 후작과 황제의 정부인 쟈스민 백작 부인의 외도를 목격한 여자 정도로 소개하지 않았을까.

“나는 베아트리체 아덴로지아 케일이에요. 그쪽의 아름다운 영애는 누구신지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아즈마리아 윌입니다, 전하. 편하게 아즈마리아라고 불러주세요.”

“아아! 빌힐름 황자의 정혼자. 반가워요, 아즈마리아. 설마 이런 자리에서 당신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다소 무례한 언행이었음에도 아즈마리아는 선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저 친우들과 연회를 즐기기 위해 참석했을 뿐인걸요.”

수잔을 대할 때와는 또 다른 차분한 말솜씨와 표정이 과연 주인공의 하나뿐인 연인다웠다. 나는 그녀 뒤의 귀부인들을 응시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친구가 말해 주더이다. 그대가 사자의 아가리로 들어가려 한다고.”

아즈마리아는 당황하지 않고 내 말의 숨은 뜻을 천천히 되새기는 듯했다. 곧이어 그녀가 나만치 작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하녀와도 친분을 유지하는 분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하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요?”

“그게 왜 궁금할까. 정체라고 해봤자 고작 하녀일 뿐인데.”

만찬이 시작되고, 열아홉의 참석자들 앞으로 애피타이저가 준비되었다.

“하녀 이야기는 그만하고, 조금 더 재밌는 이야기를 해 보는 게 어때요? 이를테면 서로의 연인이라든가.”

아즈마리아의 맑은 눈동자 위로 숨겨지지 않는 경계심이 떠올랐다.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빌힐름 황자의 평이 퍽 좋더군요. 연인에게는 어떻던가요?”

“…좋은 분이시죠, 아주요.”

“정말?”

살아 숨 쉬는 빌힐름이 『태양이 흐르는 강』 속 빌힐름과 판이하다는 것을, 이 여자도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진담이에요?”

어쩌면 자신의 약혼자 앞에서는 한없이 다정한 남자일 수도. 꿈속에서 보았던 빌힐름을 떠올렸다. 개처럼 부리던 소녀에게도 과도한 상냥함을 보이던 빌힐름이니 약혼자에게는 얼마나 애틋했을까.

“왕녀께서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듣고 싶은 소리는 딱히 없어요. 그저 서로의 연인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니까.”

아즈마리아는 절제된 표정으로 포도주를 삼켰다. 생각보다 더 입이 무거운 편인 것 같아 먼저 말을 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애가 말을 아끼니 내 이야기라도 해 볼까요? 리히튼에 대해 궁금한 점 있어요? 아니면 잉고르드라도.”

무르익어 가는 분위기의 시끌벅적한 만찬장에서, 오직 아즈마리아와 나 사이에만 사선 위를 걷는 듯한 적막감이 맴돌았다.

“아, 이런 건 어때요? 서로 한 질문씩 교환하는 거예요. 남자라는 게 그리 중요한가요, 굳이 연인에 관련되지 않은 일이라도 서슴없이 묻는 걸로 하죠.”

잉고르드로 한정된 범위가 도리어 그녀를 부담스럽게 했던 것이라면…. 덤덤했던 그녀의 표정에 예상대로 복잡한 감정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부드럽고 선량한 목소리를 내어 그녀를 떠밀었다.

“어서요, 아즈마리아. 잘 생각해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는 걸 알 텐데.”

하하! 어디선가 남자들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 번째로 포도주를 느릿하게 삼킨 아즈마리아가 한참 후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저부터 여쭐게요. 왕녀 전하는 리히튼 각하와 혼인을 약조하셨나요?”

범위의 제한을 풀어도 첫 질문이 리히튼에 대해서라니. 성미가 급한 건지, 솔직한 건지.

“그게 가장 궁금했군요. 대답은, 아니요.”

이미 예상한 답인 듯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질문한 이유가 뭘까. 그녀 입장에서 이런 대화가 지루해서는 아닐 테고, 확신이 필요했던 건가. 아무래도 그녀에게 이 시간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어야 할 듯했다.

“내 차례군요. 빌힐름 전하가 기르는 개에 대해 알고 있나요?”

아즈마리아의 손이 잔을 내려놓던 그대로 허공에서 멈추었다. 혼란에 물든 눈이 내 얼굴에서 떠날 줄 몰랐다.

“어떻게 그 이야기를…?”

“내가 물밑 소문에 관심이 많아서요.”

“그건 황실 관계자도 모르는 사안입니다. 전하께서 알고 계실 수 없어요.”

“황실 관계자도 모르는데 우리 아즈마리아 영애께서는 어찌 아실까… 정혼자라서?”

빌힐름의 꺼림칙한 과거는 책에 일절 언급되지 않았으며, 나도 아그레인의 꿈을 통해서나 확인할 수 있던 사실이었다. 한데 아즈마리아는 어찌 알고 있는 걸까. 역시 정혼자라서? 서로의 역린을 공유할 만큼 신뢰가 깊은 건가?

“내 질문에 대한 답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겠네. 다음은?”

아즈마리아의 고운 얼굴이 한층 신중해졌다. 나는 그녀의 변한 태도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긴 고민 끝에 나온 질문은 신중에 신중을 가한 듯 느리고 차분했다.

“리히튼 각하께서… 어떤 여자를 찾고 계시지는 않은지.”

“없어요.”

답은 곧장 나왔으나 머릿속이 다소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질문의 의도는 확실했다. 아즈마리아도 아그레인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아그레인을? 어떻게? 실망을 숨기지 못하는 낯에 대고 말을 이었다.

“대신 아주 절절하게 증오하는 여자는 있던 것 같은데.”

비통한 표정이 된 아즈마리아가 장밋빛의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짧은 후회와 회한이 벽안 아래로 머물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슬퍼하고 있었다. 마치 리히튼이 지닌 증오의 그릇이 자기 것이라도 되는 양.

“아즈마리아.”

“네, 전하.”

“리히튼에게 관심 있어요?”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즈마리아는 무언가 이상했다. 아니, 수상했다.

빌힐름의 과거를 알고, 아그레인의 존재를 알고, 리히튼의 증오마저 본인이 삼킨 양 대하다니. 내 앞에 앉은 여자가 혹시 아즈마리아가 아닌 아그레인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아그레인은 그녀가 아닌 이 몸의 과거인데.

“나는 빌힐름 전하에게 관심 있는데. 우리 서로의 애인을 바꿔 보는 건 어때요?”

“전하. 바라건대 저를 더 이상 능욕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헛짚었나요? 리히튼을 향한 영애의 관심이 지대해 보이기에.”

“각하께서는 이 연회의 주최자이시니, 참석자인 제가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요?”

아즈마리아는 내 무례한 발언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이 순간을 위해 미리 준비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부인하고는 했지.”

이번 도발에 대한 답은 준비하지 못한 모양이다. 천천히 나이프질을 하며 아즈마리아가 한마디, 한마디를 씹어내듯 뱉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전하께서는 절대 이해 못하실 테지요.”

“아하. 본인은 특별하다, 이 뜻인가?”

그리 여겼던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예컨대 우리와 같은 처지였던 자들 말이다. 결국 아즈마리아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공허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나는 아즈마리아가 그들과 달리 정말 ‘특별’하길 바랐던 것 같다.

“기분 상하게 할 의도는 아니었어요. 이런 분위기에 다시 속을 뒤집고 싶진 않으니, 내 질문은 수잔의 것으로 대신하도록 하죠. 안 그래도 그 아이가 영애에게 대신 물어 주길 부탁했거든.”

입을 열기 전에 말라가는 목을 물로 축였다.

“『태양이 흐르는 강』이라는 제목의 책을 아나요?”

그래. 나는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이 자리에 왔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에 귀가 멀 것 같았다. 떨리는 손을 숨기기 위해 옷매무새를 매만지는 척 식탁 아래로 팔을 내렸다. 그러나 들려온 답은 나의 기대를 완전히 틀어 버렸다.

“아니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책이에요. 소설인가요?”

“…정말 단 한 번도?”

아즈마리아가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리 되새겨도 없습니다.”

아.

그럴 리 없어.

혹시, 라는 기대를 배반당하자 실망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아니야. 아즈마리아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태양이 흐르는 강』을 모른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나는 이미 여러 대화를 통해 그녀가 나와 같은 처지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즈마리아가 보이는 모든 말과 행동이 그 증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한데 만약, 그녀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왕녀 전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감히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정신을 가다듬고 아즈마리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시종에게서 펜과 종이를 전달받아 적었는지, 그녀는 한 손에 작은 서신을 쥐고 있었다.

“아, 물론이에요. 내게 가능한 일이라면.”

“감사합니다. 이 서신을 수잔에게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직접 전달하는 건 여러모로 피해를 주는 행위 같아서요.”

나는 그녀가 내민 서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물음에 대한 또 다른 답이라고 하면 알아들을 겁니다.”

그 말에 나는 마음속으로 미소 지었다. 이것 봐. 그녀는 나처럼 책 속으로 들어온 것이 맞았다. 『태양이 흐르는 강』을 모를 리가 없어.

“그러도록 하죠.”

만족에 가까운 답을 얻어내 억지로 입을 열 필요가 없던 탓일까? 우리의 대화는 그것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나의 신경은 만찬이 진행되는 내내 오직 아즈마리아만을 향해 있었다. 메인 음식이 비워져 갈 때도, 그녀가 조심스럽게 시종을 부를 때도.

“부탁해요.”

아즈마리아의 곁을 떠난 시종이 리히튼에게로 다가가 입을 가리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즈마리아의 전언인 듯했다. 착각이 아니라면, 전언을 듣는 동안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즈마리아가 아니라, 정확히 내게로.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리히튼이 만찬장을 벗어났다. 만찬장은 이미 곳곳이 비워진 상태였다. 아즈마리아까지 자리를 비운 것을 확인한 후, 그의 말을 전했던 시종을 붙들고 물었다.

“각하께서는 어디로 가셨지?”

“아….”

“걱정하지 마라. 잠시 얼굴만 뵙고 오려는 것이니까.”

안절부절못하던 시종이 재빨리 답하고 자리를 떴다.

“각하께서는 후원의 목련나무로 가셨습니다.”

내일이면 고용인들 사이로 자극적인 소문이 하나가 더 퍼질 듯싶었다. ‘왕녀와 아즈마리아가 공작을 두고 서로 머리채를 잡았다’ 수준이면 정확하겠지. 잉고르드의 하녀인 내게 후원의 목련나무를 찾는 일은 매우 손쉬웠다. 리히튼을 뒤따라 근처 정원 벤치에 자리를 잡고 숨을 죽였다. 곧이어 덤불 하나를 사이로 두고 그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각하.”

“아닙니다. 그보다는 용건이라는 게 뭔지 궁금하군요. 이런 장소에서 만나니 마치 밀회라도 나누는 기분이라.”

긴 침묵 끝에 아즈마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용건은 꽤, 아니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각하, 저와 결혼해 주세요.”

들리는 말끝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나름대로 가진 모든 용기를 쥐어짜 뱉은 말이었나 보지. 이보다 더 어리석을 수 있을까? 아즈마리아는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비틀려는 자의 대가가 늘 죽음이었다는 것을.

“물론 저 역시 알고 있어요. 당신에게는 마음을 채워 줄 여자가 아닌, 공작 부인의 자리를 채워 줄 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즈마리아의 숨 들이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때문에 리히튼 각하께 제의 드립니다. 절 허울뿐인 공작 부인으로 맞이해 주세요. 혼인이 성사되더라도 잠자리는 물론 각하의 사생활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작게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리히튼의 것임이 분명했다.

“삼 년. 삼 년이면 돼요, 그 이후에는 자진해서 잉고르드를 떠날게요.”

“무려 황자의 약혼자씩이나 되는 신분으로 날 이용하겠다는 소리인가? 무슨 생각인지 궁금하군요.”

“이대로 빌힐름 전하와 혼인을 진행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째서?”

“어떻게 여기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분이 무섭습니다.”

정적을 눈앞에 두고 빌힐름의 약혼자가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저는… 저는 그분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리고 머릿속이 하얘져요. 각하께 많은 것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삼 년 후에 절 버리시면, 각하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조용히 숨죽이고 살게요. 부디 빌힐름 황자로부터 도망칠 구실을 제게 빌려 주세요.”

아즈마리아는 마치 빌힐름에게 개로 부려졌던 이들이나 할 법한 소리를 했다. 설마 그가 약혼녀에게까지 비인도적인 행위를 했던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었다. 『태양이 흐르는 강』에서 둘은 서로를 위하고 아껴 주는 바람직한 약혼 관계였는데. 두려움에 물든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런 그녀의 낯을 관망하는 리히튼의 시선까지. 리히튼은 과연 아즈마리아를 앞에 두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각하. 지금 당장은 각하께 밝힐 수 없지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베아트리체?”

갑작스러운 부름에 긴장으로 몸이 굳었다. 내가 따라오리라 짐작함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끌어들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명령받은 이상 나의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덤불을 돌아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리히튼이 내 손을 잡아 자신에게로 당겼다. 언뜻 보인 아즈마리아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굳어 있었다.

“내게 혼인을 요구하는데, 소중한 연인의 의사를 묻지 않을 수 없지.”

소중한 연인에게 다른 여자와의 결혼 허락을 받다니, 이보다 더 악질일 수 있을까.

“상냥한 리히튼. 내가 무르라면 무르기라도 할 건가요?”

“당연한 말씀을 하는군요. 말했듯 나의 연인은 당신밖에 없지 않습니까.”

미온의 입술이 사로잡힌 손등에 닿았다.

“그 말은 즉, 저 사랑스러운 영애의 미래는 제 손에 달렸다는 뜻이겠네요.”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아즈마리아는 예상 외로 금방 담담해졌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걸 수 있는 건 모두 걸었다는 의미일 터였다.

나는 그런 그녀가 우스우면서도 어여뻤다. 아즈마리아가 바라는 것이 리히튼과의 혼인에서 끝나지 않을 거란 걸 안다. 하지만 그건 내게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이것 봐, 결국 아즈마리아도 길을 틀지 않았잖아. 트리비아체에서의 내가 멍청했던 게 아니야. 아즈마리아의 무지한 선택은 나에게 안도감을 선물했다.

“그렇게 하세요.”

리히튼을 향해 더할 나위 없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게 바로 우월감이라는 걸까? 진정한 연인도 아니고, 기껏해야 리히튼의 개에 불과한 내가 우월감을 느끼다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재밌게 됐네요, 리히튼. 나는 이제 부인이 있는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게 되는 건가? 삼 년이라 했으니 기간 한정 불륜인가요?”

“그래서 화났습니까?”

리히튼이 내 허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한 뼘도 되지 않을 거리에서 청회색 눈동자가 그림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리히튼의 입술은 내 코 바로 아래에서 멈추었다. 이대로 비만 내린다면 그날을 그대로 재연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서로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읊조렸다.

“설마 내게 입 맞출 생각은 아니겠죠. 비가 내리던 그날의 일도 모르는 척하는 당신이.”

그의 청회색 눈동자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음기를 띠고 있어, 되레 그에게 잡힌 내 허리가 굳어 버리고 말았다.

“마치 내게 애정을 갈구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왕녀.”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차가운 온기가 입꼬리 바로 위에 깃털처럼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진짜 입을 맞춘 것도 아닌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무겁고 진득한 시선에 내 얼굴이 그대로 뚫릴 것만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올린 리히튼이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왕녀께서 허락하셨으니, 이제는 모르는 척할 수도 없겠군.”

멍하니 우리를 쳐다보고 있던 아즈마리아가 급히 제정신을 차렸다.

“그 말씀은….”

갖가지 감정으로 일그러져 있던 얼굴에 기대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윌 백작은 그대와 나의 혼인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아즈마리아 영애.”

“아니요. 각하이시기에 가능한 일이에요. 제가 각하를 원하고 각하께서 저를 원하시는데 감히 누가 막을까요?”

“황제 폐하께서는 황실의 체면을 중히 여기십니다.”

“잉고르드의 후사만큼이나요?”

변화는 찰나에 일어났다. 리히튼의 표정이 이를 데 없이 차갑게 얼어붙은 것이다. 그 반응을 자신에게 허가 찔린 것이라 여겼는지, 아즈마리아는 더욱 신이 나 말을 이었다.

“제 아무리 빌힐름 전하와 관련된 일이라도, 황제 폐하께서는 각하의 혼인을 더 우선시….”

“그만.”

킨이 있었다면 다 들리는 소리로 혀를 찼겠어. 리히튼이 그대로 아즈마리아를 잡아채 씹어 먹을 것처럼 읊었다.

“하나같이 아는 척 입에 담는 소리가 똑같아. 그 멍청한 혀를 도려낼 수도 없고.”

아즈마리아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닫았다. 소름이 돋을 만큼 냉랭한 반응에 의문을 가지기보다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분위기였다.

“아즈마리아.”

“네.”

짧은 대답이었다. 아즈마리아의 애절한 목소리는 마치 고난 끝에 재회한 오랜 연인을 대하는 듯했다.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정적에게 빠진 멍청한 여인이라는 별칭 정도야 미래를 생각하면 한없이 가볍습니다.”

“내가 해 드릴 건?”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고 싶어요. 절 데리러 올 윌 가문의 마차를 막아 주세요.”

리히튼은 재주가 좋은 걸까, 아니면 운이 좋은 걸까. 발 벗고 나서지 않아도 먹이가 제 발로 목줄을 차러 들어오다니.

“그리고.”

아즈마리아는 어찌하면 리히튼에게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을지 신중하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적어도 그 얼굴에서 이 모든 계획이 충동적인 계획은 아니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수잔을 제 하녀로 쓸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러니까, 이런 식의 전개도 그리 놀랍다고 여길 수 없지. 하지만 리히튼이 옆에 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아무렇지 않은 척 손톱을 매만지고 있었으나, 내 오감 모두가 리히튼을 향해 고개를 트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윌 영애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줄이야.”

리히튼의 음성은 차분했다. 괜찮아. 겁에 질리지 않아도 돼. 나는 그를 기만하는 행위 같은 건 일체 하지 않았어. 아즈마리아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은 킨을 통해 리히튼에게 고한 이야기가 전부잖아.

“이 또한 당신의 허락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왕녀. 그 아이는 왕녀가 아끼던 아이지 않습니까?”

나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아즈마리아를 살피기 위해 자발적으로 베아트리체가 된 나였다. 따라서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리히튼도 빌려 주는데 고작 하녀 한 명 못 빌려 줄 이유는 없죠. 곧 그대의 하나뿐인 부인이 될 분인데, 그 정도 부탁이 별거겠어요?”

나의 충고 아닌 충고는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즈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오직 본인 외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을 테니.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럼 두 분이서 나눌 이야기가 아주 많으실 것 같으니… 불청객은 이만 자리를 피하도록 하죠.”

리히튼을 돌아보자, 그가 허리를 숙여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서늘해진 피부 위로 입술이 머무는 시간이 인사치고는 길었던 것 같다.

“불쾌한 농담을 하는군. 그대는 내 삶에서 단 한 번도 불청객이었던 때가 없었습니다, 왕녀.”

허리를 끌어당기던 단단한 팔이 멀어졌다. 리히튼은 나에게 연인의 애정 표현이 분명한 상냥하고도 따스한 미소를 남겼다. 마주 웃을 자신이 없어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노란 달이 본관과 별관 사이로 동그랗게 솟아 있었다. 고아하고 정갈한 잉고르드의 별관이, 내 눈에는 너른 유리 어항처럼 보였다.

다음 날에는 이른 오전부터 저택이 어수선했다. 크로허츠 후작저를 떠나던 날과 유사한 분위기였다. 품위를 잃지 않은 차분하고 정적인 이별이었으나, 다소 서두르는 듯한 그런 분위기. 아즈마리아가 잉고르드에 남게 되었단 소식이 고용인들 사이로 퍼진 것이다.

“나 말고 어느 분이 공작저에 남아 계시느냐.”

“아즈마리아 윌 영애께서 남으셨습니다.”

정오도 되기 전에 잉고르드의 모든 손님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극은 무대에 서서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석에 앉아 관람하는 것이다. 귀족들 또한 이 흥미롭고 놀라운 소식을 코앞이 아닌 한 발자국 멀어져 느긋하게 관람하고 싶은 거겠지. 나는 가발과 베일이 완벽하게 착용되었음을 확인하고 홀로 내려갔다. 내가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아즈마리아가 굳이 인사를 전하러 나왔다. 마치 이 저택의 안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사랑스러운 아즈마리아 영애. 버려진 정부를 위로하러 내려오신 건가?”

“그런 말씀 마세요, 전하. 순수하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온 거니까요.”

아즈마리아의 얼굴색은 첫날과 이튿날에 비해 눈에 띄게 좋아 보였다. 지난 새벽에 마음을 다잡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삼 년 후에는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와 있을 겁니다. 약속드릴게요.”

과연 삼 년씩이나 걸릴까.

“내게 서신을 전해 달라 부탁할 필요도 없었네요.”

서신을 꺼내 아즈마리아에게 건넸다. 간밤에 확인한 서신의 내용은 짧은 단어 하나가 전부였다.

<표적>

그 의미에 대해 긴 시간 고민했지만, 마땅한 답을 찾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마음이 급해진 것은 아니다. 별관의 하녀로 지낼 시간은 충분히 길 테니까.

“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녀가 내게 서신을 도로 건넸다.

“사실, 이 서신의 수신자는 수잔이 아니라 전하입니다. 잉고르드를 벗어나면 꼭 읽어 주세요.”

고작 <표적>이 적힌 서신을 전달해 무엇 하겠다는 건지. 읽은 티를 낼 수는 없으니, 다시 내가 거두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도록 하죠.”

리히튼은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더는 베아트리체의 존재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나를 태운 마차는 시종과 시녀, 그리고 아즈마리아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벗어났다.

우리는 서쪽으로 달렸다. 이대로 오 분가량을 더 달려서 버려진 초소에 도착하면 약속대로 마부와 호위 기사들은 마차를 버린 채 잉고르드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 나는 수잔으로 돌아가면 된다. 의복과 가발을 가방에 쑤셔 넣고, 덩그러니 남은 말에 올라….

덜컥.

그때였다. 마차 바로 옆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너는 누구… 크윽!”

“습격이다! 마차를 지켜라!”

어디쯤까지 와 있는 걸까. 마차가 멈추고 호위 기사들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쇠 부딪치는 소리와 더불어 거친 잡음이 울렸다. 후두둑. 창문으로 피가 튀었다. 거칠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곱게 접어 두었던 서신을 다시금 펼쳤다.

<표적>

이런 의미였구나. 생각보다 똑똑한 여자였네. 그래도 덕분에 마음 놓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으니,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교환이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굳게 닫혀 있던 마차의 문이 열렸다.

“베아트리체 왕녀 전하 되십니까?”

나타난 이는 마부도, 호위 기사가 아니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는 곧장 내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리지 않았다.

“혹시 맡겨둔 서신 한 장 없으신지요.”

펼쳐둔 서신을 그에게 건넸다. 내용을 확인한 남자가 내게 깍듯한 자세로 말했다.

“얌전히 저희 말에 따라 주신다면, 욕보이지 않고 고통 없이 빠르게 끝내드리겠습니다.”

마지막 체면은 지켜주겠다는 의미인가. 우스웠다. 지금 누가 누굴 위해 준다는 건지. 나는 이미 비슷한 위기에 봉착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너 같은 놈들의 약점이 무엇인지 아주 확실히 알고 있지.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남자의 팔을 잡아 당겼다. 나약하고 여린, 죽음을 앞둔 여자의 표정을 보이며.

“괘, 괜찮다면 조금만 더 가까이 와 줄 수 있을까요…?”

금방이라도 끊길 실타래처럼 미약한 음성을 선택한 게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마차 안으로 남자를 이끈 후 베일을 거두었다. 경계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 시선에 진한 호기심이 스며들어 있었다. 사냥된 토끼를 연기하는 일은 이토록 쉽다. 어느 누가 이 창백한 왕녀의 혈관에 독이 흐른다고 생각하겠는가?

“죄, 죄송해요. 소, 손이 너무 떨려서… 설마 이런 식으로 끝을 보게 될 줄은 몰랐, 흐윽…. 자, 잠깐이라도 잡아 주시면 안 될까요?”

장갑을 벗은 맨손으로 그의 손등을 천천히 쓸었다. 덜덜 떠는 손은 내가 봐도 애처롭게 보였다. 경계심이 서려 있던 남자의 눈동자에 서서히 열기가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호, 혹시 나를 위로해줄 수 있다면….”

개소리를 입에 담으려니 혀가 따가웠다. 남자의 눈은 조금도 예쁘지 않았다. 눈동자는 구정물처럼 혼탁한 검회색이었고, 눈가에는 검버섯 핀 주름이 듬성듬성했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들어 얼굴을 가까이했다. 금방이라도 날 잡아먹을 것 같은 눈이었다. 모르는 척 순진한 얼굴로 남자의 복면을 벗겼다.

“벼, 별 뜻은 없어요. 내 마음 이해하죠? 나는… 그저, 너무나 허무해서….”

혀 안쪽 살을 씹어 피를 내고, 남자에게 몸을 기댔다. 기다렸다는 듯 남자의 새까만 입술이 나를 삼켰다. 숨을 참고 그 안에 내 모든 상처를 들이부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혀끝에 맴돌다가 멀어졌다. 일 초도 더 버틸 수 없이 더러웠다. 혈액을 넘겼다면 그것으로 볼 일은 끝이었다. 남자의 흥분한 몸을 온 힘을 다해 밀어낼 필요도 없었다. 기다림은 짧았다. 헐떡이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큭.”

목을 부여잡은 남자가 힘겨운 움직임으로 마차에서 벗어났다.

퍽.

순식간의 일이었다. 비틀거리던 남자의 고개가 옆으로 거세게 꺾였다. 주먹의 주인은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이윽고 적발의 남자가 마차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언뜻 보이는 검 표면에 굳지 않은 붉은색의 피가 선연했다. 눈이 마주치자 비죽 웃는 낯이 그렇게 평화로워 보일 수 없었다.

“좋아… 아주 잘했어, 수잔.”

대답해 줄 기분도 아니었다. 입 안에 남은 모든 역한 냄새를 끌어모아 바닥에 뱉어냈다. 아침을 굶어서 다행이야. 열심히 헛구역질을 해도 넘어오는 음식물이 없었다.

“사내새끼들이 어디에 정신을 못 차리는지 정확히 알고 있군. 베르크네 씨에게 배운 건 아닐 테고… 아닌가? 배운 건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데 그래.”

“시끄러우니까 제발 입 좀 닥쳐.”

킨을 밀치고 마차에서 내렸다. 구두 아래에 지그시 밟힌 시체는 흙길에 비하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누가 사주한 거냐?”

“아즈마리아 윌.”

“아하, 그 깜찍한 아가씨 말이지? 시도는 좋았으나 상대가 나빴군. 먼저 도착해 있길 잘했어.”

킨이 시체를 뒤질 동안 나는 가발을 벗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마차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 더러운 놈의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귀족 가문의 아가씨들은 참 대단해. 얇은 옷을 꼼꼼하게 몇 겹이나 껴입으니. 한창 어깨와 팔에 걸친 레이스를 뜯어내기 위해 발악할 때였다.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바라보는 킨과 눈이 마주쳤다.

“뭘 쳐다 봐?”

“…넌 부끄러움도 없냐? 내가 남자로 보이지 않나 보지?”

“헛소리할 시간에 등을 돌리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 킨. 물론 구경한다고 해서 말리지는 않을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가 내게 등을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킨에게 쓴 소리를 뱉은 것을 후회해야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허리 부근의 끈 가봉이 풀리지 않았던 탓이다. 한숨이 나왔다. 어쩔 수 없이 그를 불렀다.

“킨.”

그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이것 좀 풀어 줘.”

이번에는 내 쪽에서 등을 돌리고 섰다. 쯧, 혀를 찬 킨이 뒤쪽에서 내 허리를 붙잡았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세게 묶여 있는 상태라 푸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릴 터였다.

“얇은 천 쪼가리만 입히면서 꼼꼼히도 묶어놨네.”

“아. 세게 잡아당기지 마!”

멀찍이 떨어져 있던 킨이 바로 등 뒤에 서 있던 탓일까. 그와 가깝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반쯤 훤히 드러난 가슴이 의식되기 시작됐다. 어깨를 덮고 있던 레이스를 다 벗어낸 탓에 코르셋만 겨우 가리는 드레스만 남은 상태였다. 이런 건 침실에서나 보일 법한 모습인데. 살짝 고개를 틀어 살피니, 킨의 시선을 오롯이 내 허리로만 향해 있었다. 조금은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마차에 홀로 남게 됐을 때부터였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다. 굳은 어깨가 조심스럽게 풀어지며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반쯤 헐벗은 몸을 보니까 좀 떨리니?”

늘 잘난 체하기 바빴던 킨이 내 앞에서 긴장을 한다는 게 재미있었다. 날 괴롭히던 게 이런 재미였다, 이거군. 뒤로 몸을 기울여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강렬한 적발 사이의 짙은 녹안이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키스라도 할까?”

물론 너는 조금, 아니 많이 아프겠지만. 진심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장난이었다. 그를 골리고 싶은 마음에 더 고약하게 군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무뚝뚝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그가 돌연 내 어깨를 잡고 돌려 세웠다. 허리를 거칠게 잡아당기고 숨을 전부 집어 삼키기라도 할 기세로 고개를 숙였다.

“이봐. 내가 이렇게 낭창한 몸을 두고 병신처럼 굴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킨에게선 죽은 남자에게 느꼈던 역겨운 냄새가 나질 않았다. 허리를 더 강하게 끄는 팔의 힘이 느껴졌다. 격한 감정으로 일렁이는 시선이 보란 듯 내 가슴께를 노골적으로 훑다가 입술을 쓸었다.

“나는 가진 게 자존심뿐이라 너 같은 계집애에게 도발 당하고는 못 살거든. 차라리 혀가 녹아내려서 벙어리가 되는 걸 선택한다면 모를까.”

우드득, 등 뒤에서 천이 찢기는 소리가 났다. 팔을 들어 너덜해진 등 쪽을 매만졌다. 킨이 악력을 이용해 끈이 달린 천 자체를 뜯어 버린 것이다. 끈을 풀어 달라던 부탁이 무섭게 이런 짓을 하다니, 무식하기는. 킨이 예의 그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내게서 몸을 뗀 그가 말에 걸어 둔 짐 가방에서 내 의복을 꺼내 던졌다.

“가진 게 자존심밖에 없다며? 왜 이렇게 얌전해?”

마차에 기댄 킨은 리히튼만큼이나 큰 골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래봬도 내가 꽤 혈통 좋은 종마라서. 신사로서 일을 치르기 전에 한두 번 정도는 경고해 줄 용의가 있지.”

“아쉽네. 네 그 뱀 같은 혀를 없앨 수 있는 기회였는데.”

넝마가 된 드레스를 마차 안으로 구겨 넣고 킨의 앞에 올라탔다. 그는 말 머리를 돌려 마차 근처를 가볍게 돈 후 왔던 길로 다시 향했다.

“저것들은?”

“내버려 둬.”

고개를 돌렸다. 등 뒤로 마차와 널브러진 시체들이 점차 멀어져갔다. 자세히 보니 날 호위하던 자들은 검은매 기사단의 일원이 아닌 듯했다. 고용된 용병이었나. 하긴, 그러니 그렇게 맥없이 무너졌겠지.

“찝찝해. 내 얼굴을 본 남자가 있어.”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걸 잊지 마.”

바보 같은 소리이긴 했다. 킨이 암살자들의 목숨을 붙여 놓을 리 없는데. 리히튼의 개가 그리 허술할 리 없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보통 명망 있는 귀족 가문에서는 연회가 끝난 후 고용인들에게 나흘간 포상 휴가를 내린다. 잉고르드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연회가 끝난 지 겨우 하루가 흘렀을 뿐인데 잉고르드 저택에 남은 하녀는 나와 콜렌토 부인이 전부였다.

“본래는 가주도 저택을 비우고 휴양지로 떠나는 게 관례야.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각하께서 그런 성정은 아니시잖니.”

주방이 이토록 고요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트리비아체에서는 연회가 끝나면 동갑내기 하녀를 따라 그 댁에서 묵고는 했다. 화목한 가정 한가운데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었지. 그곳이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 그 시절을 상기하면 적어도 휴가 때의 처우는 잉고르드가 훨씬 마음이 편했다.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이곳에 머물 수 있으니까.

“그래서 네가 남은 게 참 다행이구나. 너만 갑작스러운 휴가를 받은 일에 분개하던 아이들도 그 이야기를 꺼내니 다들 수긍했지.”

새하얀 담배 연기가 콜렌토 부인의 얼굴을 감고 올라갔다. 나는 그녀가 건넨 담배 한 개비를 손안에서 천천히 굴렸다.

“전 휴가가 필요 없어요.”

“왜?”

“갈 곳이 없거든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콜렌토 부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꼭 어딘가로 돌아갈 필요는 없어. 너도 알고 있으리라 본다. 각하께서는 널 특별히 아끼시니, 곧 가신들 중 하나와 혼인을 맺게 해 널 평생 거두실 거야.”

콜렌토 부인이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날 특별히 아낀다, 라.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구나. 잉고르드에 온 지 벌써 다섯 달이 훌쩍 흘렀다. 처음에는 오직 이곳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하루하루를 버텼던 것 같은데. 이제는 리히튼과의 내기도 까마득하게 잊는 날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이런 날이 과연 얼마나 더 지속될까. 하녀장인 콜렌토 부인은 휴가에도 이곳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지만, 올해는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다. 콜렌토 부인은 내게 감사 인사를 남기고 모레 저녁까지 저택을 비우기로 했다.

덕분에 그녀의 눈치를 볼 필요 역시 사라졌다. 나는 평소라면 청소 같은 볼일이 없을 때는 얼씬도 못할 응접실로 가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하녀 주제에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타들어 가는 불꽃을 구경했다. 그 이후에는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따스한 온기가 주는 노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아주 오랜만에 잠에 들었던 것 같다.

***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 밖에는 굵은 빗줄기가 주룩주룩 내렸고, 곧 도착할 방문자가 그 비에 젖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애탄 마음이 들거나 흥분되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다림은 아니었다. ‘해야 하는 일’이었을 뿐. 이윽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내 기다림은 끝을 맞이했다. 그 너머에서 나타난 이는 빌힐름이 내게 준 선물, 비비안느였다.

[비비.]

뛰어든 소녀가 빗물에 젖은 상태 그대로 날 껴안았다. 자신의 품 안에 나를 가득 채우고 내 목덜미에 코를 박아 깊게 숨을 삼켰다. 나는 간지러움을 떨쳐내기 위해 목을 움츠리며 웃었다.

[아그레인. 날 기다린 거야? 너, 너무 기뻐! 오늘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이야.]

나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내려다봤다. 언뜻 보이는 뒷목의 상태가 영 좋지 않다. 날카로운 날에 베인 듯 기다란 흠집이 셔츠 안쪽의 등까지 이어져 있는 듯했다. 그리 오래된 상처가 아닌지 주위 살이 붉게 일어나 있었다. 고통스러웠을 게 분명한, 잔혹한 자국을 살살 쓸며 말했다.

[비 맞기 전에 들어오라고 했잖아. 자꾸 이럴 거야, 비비? 내 말을 듣지 않을 거면 돌아가.]

[으응… 싫어. 날 빌힐름에게 보내지 마. 그 애가 날 네게 준 거야, 돌아가지 않을래.]

투정부리며 절레절레 흔드는 머리칼 사이에서 짙은 아카시아 향이 났다.

[난 친구가 필요 없어, 비비.]

비비안느를 끌어 의자에 앉히고, 준비해 놓은 타올로 젖은 머리를 털어 주었다. 소녀는 두 다리를 감싸고 앉아 내 말을 묵묵히 들었다.

[내가 필요한 건 내 말을 아주 잘 듣고 내 말에만 복종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개야. 한데 넌 개가 아니잖니.]

아니. 개이기는 개인데, 내 것이 아닌 빌힐름의 개지. 비비안느는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상처받은 티를 여실히 냈다. 그러다가 문득 제 머리칼을 말리기 바쁜 내 손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가 끊임없이 비가 떨어지는 숲을 내려다봤다. 빌힐름이 내 성을 방문할 때마다 지나치는 길목이었다. 비비안느는 그렇게 한참 동안 창 너머를 내려다 봤다. 누군가 이 행복한 시간을 해하러 오는지 감시하는 것처럼. 손안의 물기가 말라갈 때 즈음 그녀가 내 곁으로 돌아왔다.

[개가 되면 네 옆에 있을 수 있어?]

축 처진 장미꽃색 눈동자에는 약간의 우울과 약간의 기대가 서로 뒤엉켜 있었다.

[응.]

[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이리로 와.]

나는 비비안느를 의자 위에 앉히고 서랍 안의 연고를 꺼내왔다. 조심스레 비비안느의 뒤로 다가가 옷을 벗겼고, 흉측하게 자리 잡은 등 위 상처에 연고를 발랐다.

[개가 되려면, 가장 먼저 내게 상처를 숨기면 안 돼.]

고통에 젖은 숨이 내 머리 위에서 퍼지고 사라졌다. 익숙한 상처여도 늘 그렇듯 아픔이란 감각만은 선연하기 마련이다. 비비안느는 긴 시간 폭력과 무관심에 노출되어 왔다. 그녀는 빌힐름의 터전에서 없는 이로 치부되어 살아왔고, 그러한 취급을 당연시 여겼다. 그래서일까. 비비안느를 향한 나의 작은 애정과 관심은 고작 몇 주 만에 소녀의 세계에서 가장 큰 일부가 되어 있었다. 연인보다 사랑하고 친우보다 가깝지만 가족은 아닌 그런 존재가.

[빌힐름이 내 피는 불결하댔어.]

[왜?]

[나, 나도 잘 몰라. 원래 쌍둥이는 불결한 거래.]

차분한 음성은 남 일을 읊듯 무덤덤했다.

[그런데 쌍둥이가 아니라 아그레인의 개가 되면… 더는 불결하지 않겠다. 그렇지?]

비비안느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내 앞에서 늘 그래왔듯,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다는 듯 행복한 얼굴이었다. 고작 제 머리의 물기를 털어 주고,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는 것이 다인 날 본인 세계의 창조주라도 되듯 올려다봤다.

[아그레인처럼 상냥한 주인님은 내가 질렸다고 해서 버리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아카시아 숲의 개처럼?]

[으응, 그 애처럼. 빼빼 마르고 불쌍한 금색 허수아비를 말하는 거잖아. 여우의 밥을 챙겨 주러 갈 때마다 몰래 봤지….]

[빌힐름이 그곳은 아무도 못 들어간댔어.]

[나는 아니야. 불결한 쌍둥이어도 황족이니까.]

풍성한 속눈썹 아래의 부드럽게 굽어 있던 눈매가 싸늘해진다. 그 순간만큼은 마치 날 가르치기 위해 매를 든 빌힐름 같았다. 그러나 한기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양, 찰나에 모습을 감추었다. 빌힐름과 같은 배에서 같은 양분을 먹고 자란 아이. 악랄한 금색 매의 형제가 쥐새끼일 순 없지. 나는 모르는 척 상처에 연고를 바르며 입을 열었다.

[그 아이 이야기를 해 봐.]

[이야기? 으음. 밖에 나와서 늘 책을 읽는데, 늑대 우는 소리가 나면 성으로 돌아가. 안개가 짙으면 문 옆에 등불을 달고, 비가 오면 숲속을 떠돌면서 홀로 비를 맞지.]

비비안느의 음성은 마치 애완 새가 노래하듯 맑고 고왔다.

[딱 두 번 웃는 얼굴을 봤어. 하녀가 식사를 가져다 줄 때랑, 비를 맞을 때. 긴 장마에는 창가에 기대서 하염없이 밖을 봐.]

[이름은?]

비비안느의 눈이 나를 향했다. 처음에는 의문을, 그 다음은 신경질적인 진심을 띄고서. 왜 자꾸 물어? 소리 없는 언어가 내게 몰래 묻는다. 무해한 눈빛에는 악랄한 금색 매의 탐애와 일그러진 욕심이 담겨 있었다. 그런 시선을 마주할 때면, 나는 이제껏 그래왔듯 살며시 웃었다. 내가 모르니까 너도 모르는 거야. 나에게 필요한 건 비비안느의 집착이 아니었다. 집착에서 비롯되는 충성심이었지. 그랬기에 내가 웃으면 소녀도 마주 웃는다. 아름다운 장밋빛 눈동자에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 느껴졌다.

[리히튼. 빌힐름은 그 애를 리히튼이라고 불렀어.]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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