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4. 안개
캐롤드.
제국 북부 울창한 자작나무 숲의 주인. 잉고르드와 더불어 그렌페르크 제국의 건국을 도운 개국공신 가문이자 손에 꼽는 고귀한 혈통. 캐롤드 가문은 대대로 자손이 적었으며 그나마도 대개가 외동딸이었다. 가주는 남자보다 여자인 경우가 잦았으며 혈통 대대로 내려오는 허약한 체질 때문에 후계 생산에 실패하기 부기지수였다.
따라서 캐롤드 가문 최대의 숙원은 건강과 장수에 있었다. 그들은 영지의 번성과 가문의 존속을 위해서 대륙 곳곳의 내로라하는 의원들을 데려오려 노력했다. 그러나 명성이 있다 싶은 의원 그 누구도 캐롤드의 숙원을 이루어 주진 못했다. 가주의 몸이 온전치 못하므로 가문 또한 점차 쇠퇴해 갔다. 잉고르드 부럽지 않던 장부도 하나둘 구멍이 나더니, 가문에는 거대한 저택 두어 채와 다 죽어 가는 영지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멸문을 앞둔 마지막 백 년 동안은 지독한 광증이 캐롤드 가문을 지배했다. 그 사이 가신들 모두 저주받은 캐롤드 저택을 떠났다.
제국 483년. 알려지지 않은 모종의 이유로 캐롤드 가문은 멸문했다. 황실이 직접 나서 후계를 물색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제국 전역을 쥐 잡듯 뒤져도 그 흔한 방계 한 명조차 나오지 않은 핏줄은 캐롤드 외에 전무후무할 것이다. 캐롤드 가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남은 재산과 영지는 황실에 귀속되었다. 제국의 개국공신 가문치고는 너무나도 초라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한데 내 몸의 주인인 아그레인이 그런 캐롤드 가문의 자손이었다니.’
새삼 나도 참 아는 것이 없다 싶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게 아그레인이란 인물은 책 귀퉁이에도 등장하지 않는 조연에 불과했으니까.
“수잔.”
개국공신. 그리고 광증. 단순히 우연이라 여기기에는 캐롤드와 잉고르드 사이를 잇는 줄이 너무나 강력했다. 어쩌면 베르크네가 말한 그 ‘광증’이란 것이 내가 모르는 무언가와 연관된 실체일 수도….
“수잔!”
툭. 손에 쥐고 있던 목재 조각상이 땅으로 떨어졌다. 아주 잠깐 숨을 들이쉰 후, 다소 멍한 느낌의 머리를 가로저으며 떨어진 조각상을 주웠다. 뭉개진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깨지기 쉬운 유리나 자기가 아니라서 천만 다행이었다. 목재 조각상의 바닥을 털어서 다시 전시장 위에 올려 둘 때까지, 리냐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에 나는 장식장의 먼지를 닦으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제야 리냐는 가만히 서 있던 몸을 움직여 다시 옆 장식장을 닦기 시작했다.
“수잔,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나는 또 쓰러지는 줄 알고….”
“아무렇지 않으니 호들갑 떨지 마, 리냐. 그렇게 자주 쓰러지지도 않았어.”
“하아. 너는 너를 그렇게 몰라서 참 어쩌니? 요즘 들어 몸이 더 안 좋아 보여, 보는 내가 다 조마조마할 정도라고.”
잠시간 내 눈치를 보던 리냐는 퍽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뒷말을 이었다.
“혹시 아버지의 일 때문이라면… 하루만이라도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떨까. 다들 널 걱정해.”
아아, 그 일. 아버지의 부고는 거짓말이야. 베아트리체 노릇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지어낸 허구이니 걱정할 필요 없어. 난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니까. 입 안쪽에 머물던 진실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꿀꺽 삼켜졌다. 내가 할 수 있는 반응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됐어, 쉰다고 해서 나아질 것도 아니잖아. 이미 충분히 배려받았다고 생각해. 걱정해 줘서 고마워.”
잉고르드로의 귀성 이후, 나는 돌아와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정감을 되찾았다. 더 이상 투박한 누런빛의 머리칼을 유지할 필요도 없었으며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항시 주변을 살필 필요도 없었다. 머리칼을 붉은색으로 염색한 탓에 결이 반쯤 걸레짝이 되긴 했지만, 못 봐 줄 정도는 아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싸구려 금색보다야 훨씬 보기 좋게 느껴졌다. 그래, 처음에는 분명 그리 생각했었다.
“리냐.”
“응?”
“넌 이곳 출신이잖아… 혹시 잉고르드의 광증에 대해서 들어봤어?
“광증?”
응접실 창문의 커튼을 묶던 리냐가 오묘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 반응이 어떤 의미인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대답에 따라 고용주의 험담이 될 수도 있으니, 눈치가 보이는 건 당연할 터였다.
“곤란하면 말해 주지 않아도 돼. 어쩌다 알게 됐는데 나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라서.”
이윽고 리냐는 이전보다 눈에 띄게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뜬소문이라고도 하고, 핏줄에 새겨진 저주라고도 불리고…. 물론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최소한 뜬소문은 아니란 걸 알았지만… 어떤 의미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지?”
물론이다. 일개 하녀의 시선에서도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의 정신머리는 다분히 문제가 있어 보인단 뜻이었다.
“그렇다고 정말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겠니. 이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디 있다고.”
글쎄. 책 속에 들어온 사람도 존재하는데 저주라고 없을까. 이후 리냐는 자기가 무슨 소리를 했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응접실 청소를 마무리했다. 그녀가 알려 준 정보는 이미 다른 이들에게서 여러 차례 들어온 이야기였기에 특별할 것 없었다. 하녀들의 지식이라고 해봤자 다 거기서 거기였기에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벽 안에 완전히 갇힌 기분이 들게 했다.
“도와 줘서 고마워, 수잔. 네 일도 아닌데.”
“도움이라면 내가 더 받았지.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일을 떠맡아야 했잖아.”
“그런 말 마. 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다른 하녀들이 대신하는 건 당연한 거야. 우리는 동료잖아? 서로 도와야지.”
내 손을 꼬옥 잡고서 고마움을 표시한 리냐는, 커튼을 세탁하기 위해 천을 품 가득 들고 홀로 내려갔다. 여름의 기운이 만연했던 관내도 다가오는 가을을 대비해 곳곳이 차분한 색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나는 적색의 자수가 놓인, 새것처럼 빳빳한 벨벳 커튼을 매만지다가 몸을 돌려 일 층으로 내려갔다.
크로허츠 후작성에서 돌아온 지 보름이 흘렀다. 나의 생활은 이전과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내가 나를 인지하는 시선이 조금 달라진 것을 제외하면. 깨달음은 간결하면서도 당연했다. 아그레인은 이곳의 사람이지만 나는 이곳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 빌힐름에게서 받은 펜던트가 확실한 증거였다. 빌힐름과 달리 나는 과거의 아그레인을 조금도 알지 못하므로. 그 확연한 경계는 나를 이곳으로부터 고립시켰고 단절시켰다. 잉고르드로 돌아온 안도감과는 상이한, 극심한 고독감이 나를 갉아 먹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게 주어진 나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닌 아그레인이지 않은가? 이 몸의 과거, 현실, 혹은 미래조차 모두 내가 알지 못하는 그녀에게 묶여 있었다. 그러므로 리히튼의 증오 또한 나의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증오야말로 오롯이 아그레인의 소유인 것이지. 지금은 존재하지 않은, 오래전 진작 죽고 없는 여인의 소유. 이 세계에서 과연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할까?
“아, 수잔. 수고했다. 몸은 어떠니.”
주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들려오는 것은 콜렌토 부인의 걱정 어린 물음이었다. 나는 그녀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반쯤 굳은 빵을 집어 뜯었다.
“아주 좋아요. 모두들 날 보면 몸 상태부터 물어보는군요?”
“네가 네 낯을 못 봐서 그런 소릴 하는 거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벅차 보이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콜렌토 부인 당사자여야 했다. 하녀장인 콜렌토 부인은 며칠 전부터 유독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근심과 걱정이 얼마나 심하면 고작 사나흘 만에 양쪽 볼이 핼쑥해질 정도였다. 나는 그녀가 쥐고 있는 종이에 힐끔 시선을 두었다.
“설마 그 종이에 적힌 꽃을 전부 주문해야 하는 건가요? 너무 많은데요. 본관에서 연회를 열어도 되겠어요.”
주문서에 적힌 꽃은 평소 주문량보다 족히 여섯 배는 많은 양이었다. 이 많은 꽃이 다 어디에 쓰이는 걸까. 의문은 담배에 불을 붙인 콜렌토 부인이 막 첫 숨을 내뱉으면서 풀렸다.
“아아, 너와 메어리는 올해가 처음이지. 이맘때 즈음이면 가을 연회를 열어 영지 근방의 귀족들을 초대한단다. 사교를 목적으로.”
“사교 말씀이세요? 하지만 여기는….”
“맞아, 안주인님의 자리가 비었지. 그래서 나와 피오라 부인이 배는 더 고생하는 것 아니겠니.”
돌이켜 보면 시녀장인 피오라도 근래에 눈 밑으로 그늘이 져 있던 것 같다. 공작부인의 공석을 대신해 사교 모임을 준비해야 하니 그 압박감이 엄청날 터였다. 연회가 열린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주최자가 리히튼이라는 점은 새삼스러울 만했다.
“각하께서 그런 사교 모임까지 주도하실 줄은 몰랐어요.”
“아니란다, 수잔. 네 생각이 옳아. 각하께선 사교를 목적으로 한 연회나 정찬에 일말의 관심도 없으셔. 단지 황실에서 그러길 바랄 뿐.”
“연회가 열리는 게 황실의 주도 하라는 의미인가요?”
“황제 폐하께서 각하의 혼인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신단 소리가 있지. 충분히 타당한 의견이라고 생각한단다. 이 정신없는 연회를 준비하는 것도 올해로 벌써 다섯 번째니까.”
황제가 직접 리히튼의 혼인을 장려한다는 말인가. 그렌페르크 제국 최고의 명문가가 후계를 두지 않은 상태이니 마땅히 그럴 만했다. 공작부인이라. 리히튼은 과연 자신의 연인에게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했다. 내게 그러했듯 허리를 감싸고 사랑을 속삭일까. 무한한 애정을 담은 눈길로? 왜인지 상상만으로도 가슴 속 언저리가 메스꺼운 광경이었다.
“세간은 이곳과 황실이 척을 졌다는 듯 말하지만, 잉고르드는 황실로부터 굉장한 신임을 받아 온 가문이야. 우리 같은 자들이 무얼 제대로 알겠느냐만은… 유추야 가능하지 않겠니. 각하께서 한시라도 빨리 공작부인을 들여 후계를 낳길 바라는 거겠지.”
“당분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네요.”
복잡한 생각에 빠져 정신력을 소모하는 것보단 훨씬 나을 터였다. 일정이 여유롭다고 해서 나와 리히튼의 과거가 더 빨리 파헤쳐지는 것도 아니니. 피곤한 눈길로 종이를 훑던 콜렌토 부인은 내 얼굴을 보며 짧게 미소를 지었다.
“꽤 볼만할 거란다, 수잔. 있는 집 여식들이 서로 이를 드러내며 기 싸움 하는 모습이 말이다. 의도치 않게 불똥이 튈 때도 있지만. 너처럼 똑똑한 아이는 잘 빠져나가리라 본다.”
아무래도 콜렌토 부인은 날 심히 과대평가하는 듯했다. 내 머리가 비상했다면 이 자리에서 이러고 있을 리 없는데. 지금쯤 어디 조용한 곳에서 여유롭게 자유를 만끽하고 있겠지.
“아, 그러고 보니. 네가 말한 서점의 청년 말이야. 네게 반한 모양이더구나.”
“청년이요?”
“그래. 주근깨가 있던 그 마른 청년. 저번에 가니 너는 안 왔느냐고 묻던데.”
가슴이 물에 빠진 솜처럼 답답해졌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작게 웃었다.
“또 갈 일이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하기는, 하녀에게 독서는 사치지. 그 청년만 안타깝게 됐어.”
공작가 아래쪽에 위치한 시내. 브릿길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삼십육 번 저택. 그 저택 일 층에 자리한 자그마한 서점. 그 서점은 빌힐름이 내게 남긴 쪽지 뒤편에 적혀 있던 주소의 가게였다. 다시 말하자면, 잉고르드의 정보가 빌힐름에게 오고가는 쥐구멍이란 의미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외출이었는데, 순전히 무엇을 하는 곳인가 궁금해서 찾아갔었다.
한데 설마 그 좁디좁은 서점에 콜렌토 부인이 있었을 줄이야. 덕분에 가게는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하고, 잡히는 서적을 닥치는 대로 집어 구입해야 했다. 하마터면 골라온 게 성인 연애 소설이라 서랍 안쪽에 묵혀 둔 상태이지만.
“그냥 부인께 아는 척을 했을 수도 있죠.”
“얘는. 내 나이쯤 되면 그런 의도쯤이야 한눈에 보면 알아. 내게 네 이야길 물으면서 눈도 못 마주쳤어.”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봤자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느라 얼굴도 못 봤는데.
“수잔.”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복도 너머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등을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베르크네임이 분명했다. 콜렌토 부인이 가도 좋다는 의미로 고개를 주억였다.
베르크네가 이 시간대에 날 부르는 데는 보통 그 이유가 뻔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오르는 걸 보면 리히튼의 집무실로 향하는 것일 터였다. 보름 만에 보는 얼굴이다. 잉고르드로 귀성한 이래 리히튼과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후작의 죽음이 예상보다 더 큰 파란을 일으켰는지, 본관 전체가 날마다 방문하는 귀족들로 문전성시였기 때문이다.
“베르크네.”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베르크네는 진저리가 난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더는 아무것도 묻지 마, 수잔. 너는 정말 궁금한 게 많군. 크로허츠에서 어떤 이상한 소릴 듣고 왔는지 모르겠으나… 앞서 말했듯 알려 줄 사항은 없어. 나 역시 이제껏 보아 온 대로 유추한 것에 불과하니까.”
며칠간 리히튼의 광증에 대해서 지겹도록 캐물은 탓일까. 베르크네의 반응은 영 좋지 못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서 사각의 창틀 모양으로 떨어지는 햇빛 위를 걸었다.
“그걸 물으려던 게 아닌데요.”
“아니면? 또 뭐를?”
평소보다 유독 예민하게 구는 걸 보니, 그 역시 콜렌토 부인과 마찬가지로 연회 준비에 골머리를 앓는 듯했다. 나까지 나서서 귀찮게 할 필요는 없지. 베르크네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어서 말하라는 듯이 이마를 대번 구겼다.
“각하께서 정말 공작부인을 맞이하실까요?”
“그렇게 당연한 걸 묻다니.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진다는 사실보다 더 당연해.”
역시 그런가. 막상 말한 후에 되새겨 보니 확실하게 바보 같은 질문이긴 했다. 공작 가문의 가주씩이나 되는 남자가 혼인을 안 할 리 없으니. 그렇다면 나는 리히튼 외에도 안주인을 한 명 더 모시게 되는 걸까. 그의 후계도?
하지만 리히튼은 존재 자체가 독이지 않은가. 그런 그가 후계를 생산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또한 후계를 얻지 못한다면 안주인을 둘 필요가 없을 터였다. 물론 리히튼이 진심을 다하도록 하는 여인이 나타난다면, 이런 가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터였다.
“나야말로 의문이군. 무슨 근거로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근거라고 할 것까지 없어요. 그냥… 상상이 잘 안 가서요.”
나를 평생 증오한다고 말했던 그가, 다른 이에게 평생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못할 건 없다. 하지만 그건, 그거야말로 정말 불공평한 일인데. 유리 세공품처럼 아리따운 고귀한 혈통의 귀족 아가씨. 그런 아가씨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리히튼 공작. 서로를 향한 신뢰의 눈빛. 영원을 약속하는 입맞춤. 아주 잠깐 머릿속에 그려냈을 뿐인데, 스튜 안에 빠진 쥐꼬리를 본 것처럼 속이 역겨웠다.
“귀족이 혼인을 통해 동맹을 결성하는 건 의무에 가깝다. 특히나 각하처럼 함부로 올려다보지도 못할 대단한 위치의 귀족에게는 더더욱. 그분의 혼인은 황제 폐하의 숙원이기도 하지. 시간이 조금 늦춰질 뿐, 잉고르드는 공작부인을 맞이할 수밖에 없어.”
“그렇군요.”
그럼 그 공작부인은 일생을 수절해야 하나요. 자신의 남편에게조차. 혀끝까지 튀어나와 걸리려던 말을 겨우 참았다. 고작 하녀에 불과한 내가 그런 걸 알아 뭐하겠는가.
“수잔.”
“말씀하세요.”
리히튼의 집무실을 고작 몇 걸음 앞두고서, 베르크네의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진다.
“각하께서 우리를 특별히 여긴다 하여, 멍청하게 두 눈을 감고 있으면 안 된다. 자만은 잉고르드의 독과 달라. 널 집어삼키고 종국엔 몰락하도록 만들 거다.”
질문하기 전에 주제 파악부터 하라 이건가. 그러나 베르크네는 그렇게 빙 둘러서 설명할 위인이 아니다. 쓸데없는 질문은 삼가라며 직설적으로 말하면 말했지.
“제 착각이 아니라면 본인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리는데요.”
그가 작게 웃었다.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그저 내 대답이 흥미롭게 들렸던 것 같다. 베르크네의 웃음은 밀랍 인형을 떠올리게 한다. 눈꼬리는 가만히 머무는 상태에서 입꼬리만 올라가다 보니 초상화에 물감을 덧칠한 듯 부자연스러웠다.
“넌 현명하니까 그럴 일 없겠지. 괜한 걱정에 하는 잔소리라고 여겨도 좋다.”
집무실의 문을 두들긴 그가 내게 턱짓했다. 나는 문손잡이를 쥐고 베르크네와 눈을 마주했다. 어서 안 들어가고 뭣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미안하지만, 베르크네. 나는 안 똑똑해요.”
그렇다고 해서 자만에 눈이 머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헛소리였다. 리히튼은 같은 장소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머리칼을 바짝 서게 하는 존재이다. 한데 아주 조금 특별한 개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자만한다고? 장담하건대 그 개는 눈이 멀고 코가 없고 귀가 없는 개일 것이다.
늘 느끼지만 리히튼의 집무실은 문 닫히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고 크게 들린다. 나는 오전의 햇빛이 부서져 내리는 공간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에 교체한 집무실의 카페트는 무늬가 얇고 간격이 멀어 퍼즐 위를 걷는 느낌이 들게 했다. 보름이 흘렀음에도 리히튼은 그대로였다. 그는 너른 창문 뒤, 가을바람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활엽수를 배경삼아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정말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건강을 의심케 하는 창백한 낯도. 속을 가늠할 수 없는 청회색 눈동자도. 머리 꼭대기에서 군림하는, 가진 자의 기품도. 시간이 흐르면 얼마나 흘렀다고, 그의 팔에 엉켜 베아트리체 노릇을 했었던 시간이 모두 환상처럼 느껴졌다. 누구는 작은 실마리라도 잡기 위해 죽어라 머리를 굴리는데 누구는 그저 편히 앉아 내 방황을 관람한다. 그야말로 손바닥 위에서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근래에 얼굴 보기가 힘든 것 같군. 나의 착각인가?”
하녀와 고용주가 보름 동안 한 차례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건 흔한 일이었다.
“칠 일에 한 번씩 찾아와 얼굴을 비출 것.”
종이 위를 유람하는 만년필 소리가 실내의 정적을 더 길게 끌어간다. 나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은 리히튼을 조용히 응시했다.
“…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보름동안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어. 어떻게 생각하지?”
“제 불찰입니다.”
“잉고르드에서의 생활이 아주 편안해진 모양이야. 불찰이란 단어도 입에 담고.”
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조롱하거나 격양된 감정이 느껴지기는커녕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의 수면처럼 잔잔했다. 또한 평화로웠다. 타박하는 기색 하나도 없이, 시라도 낭송하듯 부드럽고 차분했던 것이다.
리히튼은 매우 안정되어 보였다. 동시에 나는 불안해졌다. 잉고르드에서 리히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그는 멋대로 구는 개의 목줄을 흔들어 바로 잡지 않았다. 그 흔한 호통도 없었다. 내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수잔.”
왜지.
“일주일에 한 번이 버겁다면 보름에 한 번으로 미루도록 하지.”
잉고르드로 귀성한 후, 내게는 억제하기 힘든 작고 거센 호기심이 생겼다. 호기심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으나 그것을 둘러싼 수많은 상념을 뿌리째 흔들 정도로 점차 영향을 넓혀갔다.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궁금했다. 리히튼에게 아그레인은 특별한 존재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특별할 것인가?
“그러나 한 달에 한 번으로 미루는 일은 없어야 할 거다.”
“네.”
남자는 명을 어긴 개를 보름 동안이나 풀어놨다. 보름 만에 그를 만나면서, 나는 두려워하면서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얼마나 감정적으로 대응할지에 대하여.
“나가 봐.”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리히튼에게 나는 안중도 없었으니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굳어 버린 입술 안에서 여러 번 혀를 들썩였다. 왜 그렇게 무덤덤한지 묻고 싶었다.
“할 말 있나?”
뒤늦게 고개를 든 그가 나의 눈을 응시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었다.
“아니요.”
느리게 걸음을 옮겨 집무실을 나갔다. 통로를 지나쳐 일 층 홀로 향하는 내내 베르크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각하께서 우리를 특별히 여긴다 하여, 멍청하게 두 눈을 감고 있으면 안 된다.’
갑자기 왜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릴 하나 했지.
‘간파당하고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리히튼 역시 내 속을 훤히 내다봤을 확률도 높았다. 그리 여기면 베르크네가 굳이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에 생각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때문인지 잠잠했던 두통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찬물로 얼굴을 헹구고 싶었으나, 고용인들로 북적이는 장소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후원 너머의 냇가로 가 흐르는 물에 손을 담갔다. 가을의 냇물은 더없이 차가웠다.
“그대로 쭉 가면 늪이 나와.”
멍하니 수면에 비친 창백한 낯을 내려다 볼 때였다. 등 뒤에서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흔들리듯 느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늪을 지나 늑대의 지대까지 건너면 지오르타 백작령이 나타나지. 인기척도 없는 김에 백작령까지 도망가지 그러냐?”
잉고르드에서 목소리 하나로 내 심기를 거스르는 자는 딱 한 명밖에 없었다. 힐긋 뒤를 바라봤다. 나보다 이르게 왔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반쯤 조는 얼굴의 킨이 낮은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누가 집 지키는 개새끼 아니랄까 봐, 말하는 것도 각하를 따라하지 못해 난리네.”
내 대답에 킨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나 보군. 아주 잘 적응했어. 이 오라비가 그간 조언해 준 보람이 있는데?”
누가 누구 보고 오라비라는 건지. 대꾸할 가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입을 닫자 사위는 다시 물 흐르는 소리와 새 지저귀는 노래로 평온함을 되찾았다. 정적 속에서 다시 쓸모없는 상념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두통이 심해지는 것보다야 저 멍청이와 대화를 잇는 게 낫겠다. 나는 말이 끊긴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곳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있어?”
“평화? 허어.”
잠깐 동안 자리를 비우지 않았는지, 이전에 비해 또렷해진 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풀 사이에서 부스럭거리는 소음이 귓등을 울렸다.
“이런 건 평화가 아니란다, 미숙한 수잔아. 차라리 태풍의 눈이라 표현하는 게 옳지.”
물에 담긴 손의 온기는 이미 식을 만큼 식어 있었다. 무게를 실은 걸음 소리가 느긋하게 이어진다. 그 크기가 줄어드는 걸 보아 킨이 공작저로 돌아가는 듯했다.
“너도 몸 사리는 게 좋아. 내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지 않는 건 더욱 좋지. 내가 어디 틀린 소릴 한 적 있나?”
그대로 몇 분이 흘렀을까. 다시 뒤돌아 봤을 때, 킨이 앉아 있던 자리는 뭉그러진 풀 더미만 남긴 채 텅 비어 있었다.
***
오후 일과를 하는 내내 킨의 별 것 아닌 말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잉고르드에 익숙해졌다고? 이곳에 온 지 벌써 반년 가까이 흐르기는 했다. 반년이면 새로운 터전에 충분히 익숙해지고도 남는 시간이지.
그러나 킨의 말은 늘 사람 깊숙한 내부를 건드린다. 고작 익숙해졌다는 한마디가 더는 도망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비꼼으로 들리게 하는 것이다. 유독 고단한 하루처럼 느껴졌던 그날의 늦은 밤. 잠들기 전에 서랍 깊숙이 숨겨 두었던 보석함을 꺼냈다. 크로허츠 저에서 빌힐름이 주었던 것이다. 어째서일까. 잉고르드에 도착한 후에도 리히튼은 내게서 이 보석함을 거두어 가지 않았다.
<아그레인 캐롤드>
<나의 사랑스러운 누이. 언젠가 나의 도움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하며, 곧 다시 만나기를.>
<브릿길 36번 저택 일 층>
빌힐름은 도와줄 수 있다는 의사를 전했지만, 글쎄. 나는 잉고르드 독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다. 불면, 두통, 예민함. 리히튼이 해독제를 주지 않는다면 평생 이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하겠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기에서 이겨야만 한다.
“아그레인 캐롤드.”
빌힐름을 이용한다면 아그레인에 대해서 더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데 내가 반드시 아그레인에 대해 알아야만 할까? 나는 아그레인이 아니지 않은가. 보석함을 다시 서랍 안쪽에 넣어 둔 후 침대에 누웠다. 늘 그렇듯 완전히 잠들지는 못하겠지만… 내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
꿈속에서 나는 두려움에 떨며 통로를 걷고 있었다.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러운, 아주 기나긴 통로였다. 사계가 그려진 천장화와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창틀. 화려한 자수의 카펫이 곳곳에 깔려 눈이 어지러웠다.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이렇듯 늘 나를 뒷목까지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가 무서웠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나의 목줄을 쥔 주인이므로. 끼이익. 문이 열리고 태양처럼 화려한 샹들리에가 나를 맞이했다. ‘그’는 반짝이는 샹들리에 아래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벽에 걸린 액자를 향해 있던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는 산들바람보다 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왔구나. 사랑스러운 나의 누이.]
다가온 청년이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유리 인형을 대하듯 조심스럽고 차분하게. 나 역시 그를 향해 마주 웃었다.
[안녕, 빌힐름.]
그는 내 혀에 감긴 자신의 이름을 되새기듯, 긴 시간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성을 벗어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정원 너머의 숲을 나란히 거닐었다. 빌힐름은 나를 이전의 산책로와는 다른,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아카시아 향으로 가득한 숲이었다.
특별한 대화가 오간 것은 아니다. 그는 마치 이 시간 자체를 음미하듯 고요했고, 나는 얌전히 따르는 척 그의 눈치를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거진 수풀 사이로 낡고 작은 성이 나타났다. 그 앞에 낯선 소년이 보였다. 빌힐름보다 두 뼘은 작은 신장에, 정신없이 뻗친 머리로 얼굴의 반이 가려져 있었다. 이처럼 삼엄한 장소에 거지꼴을 한 존재가 있다니. 말도 안 되게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따라 걷던 걸음을 멈추고 소년을 가리켰다.
[저건 뭐야?]
소년은 가죽 표지가 너덜너덜할 정도로 낡고 오래된 책을 들고 있었다. 소년의 시선은 오로지 그 책에 고정되어 있었다. 활자 하나하나를 삼키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처음 봤어. 저것도 빌힐름이 키우는 거야?]
그럴 리 없었다. 현시점에 빌힐름이 키우는 개는 나를 포함해서 고작 셋이 전부였다.
[아아… 너를 이 길목에 데려오는 건 처음이지.]
그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상냥한 목소리에서는 소년을 향한 일말의 관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건 쓸모없어. 조금의 쓸모도 없는 것이라 성에 묶어 두었지.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도록.]
나는 입술을 닫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수풀 사이로, 외롭게 자리한 작은 성 하나.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소년. 그리고 조금도 쓸모없다는 빌힐름의 첨언까지.
[버렸구나.]
[응.]
소년은 아무래도 빌힐름이 가지고 놀다 버린 개인 것 같았다. 아니, 빌힐름이 긍정했으니 버려진 개가 맞았다. 다만 버려진 것치고는 대우가 썩 괜찮았다. 이제껏 봐 온 버려진 개들은 대개 도륙된 돼지처럼 질질 끌려가거나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곤 했으니. 그러나 소년은 이곳에서 멀쩡히 목숨을 이어 가고 있지 않은가?
[나도 버릴 거야?]
쥐고 있던 빌힐름의 손을 더욱 꽈악 잡았다. 입술을 깨물고 애처로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이 어처구니없는 투정은 내가 가진 최고이자 최선의 무기였다. 빌힐름은 약하고 수동적이며 의존적인 나를 사랑한다. 그는 귀공자처럼 하얀 손으로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너를 버리다니, 누이. 재미있는 농담을 하네. 내 평생에 그런 날이 올까 싶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농담이야.]
[그렇지? 그럼… 저거 내가 가져도 돼?]
빌힐름의 얼굴이 돌연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봤다. 헝클어진 백금발이 지푸라기처럼 푸석푸석했다.
[나한테 줘. 나도 개 키울래, 빌힐름만 키우는 건 불공평하잖아.]
[안 돼. 저건 위험하고 더러운 물건이라 네가 키울 만한 게 못 돼.]
더 볼 것 없다는 단호한 거절. 오늘의 빌힐름은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 상태였다. 이렇게나 좋은 상태에서 그가 내 부탁을 거절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버려졌으나 버젓이 살아 있는 소년. 기분 좋은 날임에도 내 부탁을 거절하는 빌힐름. 모두 내게는 생소한 상황이었다.
[착하지, 아그레인. 이리로….]
나를 이끈 손이 낡은 성을 지나쳐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른 걸음이었다. 소년을 꺼리는구나. 왜일까? 왜 모든 걸 가진 빌힐름이 저 초라한 소년을 꺼려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그와 산책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목구멍 아래로 환호성을 삼켰다.
드디어,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날 이곳에서 벗어나게 할 유일한 탈출구를!
***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내려오는 방 한가운데 누워 있었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볼 즈음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렸다.
똑똑.
“수잔? 너 늦잠 잤니? 빨리 나와, 콜렌토 부인이 화내시겠어.”
그 말에 서랍 위의 탁상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다섯 시 오십오 분. 일과가 시작된 지 벌써 오 분이나 지나 있었다.
“수잔!”
“금방 나갈 거야, 리냐. 제발 문 좀 그만 두들겨….”
말과 달리 몸이 바짝 굳어 꼼짝하기가 버거웠다. 이건 헛된 꿈이 아니다. 전신에 우수수 일어선 날카로운 신경들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내 몸이 기억하고 내 머리가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아그레인의 과거였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빠르게 준비하고 침실을 벗어났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기억 속에서 나는 빌힐름의 말 잘 듣는 개였다. 리히튼이 아닌 빌힐름의 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빌힐름. 네가 그토록 찾고 있던 누이가 고작 개였다고? 토할 것 같았다.
“수잔, 괜찮아?”
안 괜찮아. 나는 다가오는 리냐를 느리게 밀어냈다.
“급하게 준비해서 그런가 봐. 헛구역질이 나오려고 해.”
“너는 참 별거에 다 헛구역질이 나온다.”
다행스럽게도 콜렌토 부인은 나를 타박하지 않았다. 평소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준비했던 보람을 여기서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주방 한쪽에 모인 우리들에게 차례대로 종이를 나누어 주었다. 열아홉 개의 이름 옆으로 간단한 신상 정보가 표기된 종이였다.
“잉고르드에 방문하는 귀족 명단이야.”
이름을 길었고, 나란히 적힌 부연 설명은 더 길었다. 마르델 로네어, 로네어 백작 가문의 차녀, 검은 머리에 목이 긴 주먹코, 열아홉, 고용인에게 호의적이지 못함, 주의 요망…. 분명한 내용이 존재하는 글자였으나,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근처에 맴돌기만 했다.
‘왔구나. 사랑스러운 나의 누이.’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책 속에 묘사되어 있던 빌힐름과 직접 보고 느끼는 빌힐름 사이의 괴리감이 놀라우리만치 커져간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건 악역의 역할이다. 『태양이 흐르는 강』에서 악역은 리히튼이었고, 빌힐름은 항상 정의감과 선한 의무를 지닌 주인공으로 그려졌었다.
그런데 대체 왜? 왜 책의 세계와 다른 거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쳤다. 물론 제대로 떨쳐질 리 만무하다. 나는 당장 닥친 일에 집중하기 위해 하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마르델 로네어는 올해도 또 오는구나? 못생긴 게 욕심은 많아서. 욕심이 많으려면 성격이라도 좋아야지.”
“어쩜 해가 지날수록 명단도 길어진담?”
“그야 각하께서 미혼이시니까. 다들 제 딸을 공작부인에 앉히려고 안달….”
“마리.”
귀 좋은 콜렌토 부인은 시끌시끌한 대화 속에서도 마리의 목소리를 기가 막히게 잡아냈다. 마리는 어깨를 으쓱이곤 개미 기어 다니는 목소리로 마저 속삭였다.
“공작 부인에 앉히려고 안달이 난 거지. 그런 기회가 어디 흔하니?”
“그 얼굴로는 각하께서 눈길도 안 주시겠다, 얘.”
“그분이야 눈이 워낙 높으시니.”
웅성거림이 잦아들면서 하나둘 저택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나는 메어리와 함께 이 층으로 향했다. 메어리가 워낙 열성적으로 명단을 외우는 탓에, 나 역시 접어 두었던 종이를 다시 펼 수밖에 없었다.
“와아. 정말 듣기만 했던 엄청난 귀족들이 찾아오네요.”
“듣기만 했던? 귀족 세계를 잘 아는 모양이구나.”
메어리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 같은 애가 알기는 뭘 알겠어요. 그냥, 다들 어릴 때 그런 꿈을 꾸곤 하잖아요? 멋진 귀족 신사와 눈이 맞아서 커다란 저택으로 시집가는 이야기 말이에요.”
“신랑감을 찾기 위해 귀족 가문을 조사했다는 소리처럼 들리네.”
“그래도 덕분에 이름 외우는 수고는 덜하겠어요. 그때의 그 치기 어린 짓이 이런 행운을 다 가져다 주다니… 한데 윌 가문의 영양이 올 줄은 몰랐네요.”
윌 가문.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크로허츠와 더불어 책 속에서 종종 언급되었던 귀족 가문이 분명했다.
“윌?”
나의 반문에 주변을 살피던 메어리가 내게로 고개를 숙였다.
“아즈마리아 윌이요. 듣기로 빌힐름 황자 전하의 약혼녀라는데… 그쪽 귀족들과 잉고르드는 사이가 나쁘잖아요.”
“별 걸 다 알아.”
“이것저것 주워들었죠. 하녀로 돈을 벌려면 눈치가 생명이잖아요?”
쑥스럽게 웃으며, 메어리가 이 층 첫 번째 침실로 들어갔다.
잠깐, 아즈마리아 윌이라고? 쥐고 있던 명단을 다시 들여다봤다. 메어리의 말이 옳았다.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아즈마리아 윌은 빌힐름 황자의 하나뿐인 약혼녀였다. 주인공인 빌힐름을 고난으로부터 포옹해 주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소중한 연인. 하지만 윌 백작 가문은 크로허츠와 더불어 잉고르드의 주된 정적 중 하나다. 그런 가문의 영양이 잉고르드를 방문한다는 건….
‘책 속에 없던 내용이야.’
없던 내용으로 모자라 빌힐름과 리히튼 사이에 새빨간 도화선을 지피는 일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필이면 아즈마리아라니. 이대로는 위험하다. 급작스러운 변화를 주도하는 자는 이제껏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 오지 않았는가.
“선배, 밖에서 뭐하세요? 혹시 또 쓰러지셨어요?”
“안 쓰러졌어. 지금 들어가.”
명단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침실로 들어갔다. 어차피 내가 끼어들 구석은 조금도 없을 터였다. 다만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랄 뿐.
***
그로부터 이틀 후. 잉고르드 가을 연회의 손님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하녀는 저택에서 존재하되, 없는 사람이다. 고용주의 눈을 피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게 관내를 청소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종종 솜씨가 부족한 시녀를 대신해 귀부인의 치장을 돕는 이도 있지만 이는 극소수의 경우였다. 집사와 시녀, 그리고 시종이 고용주와 손님의 시중을 들 동안 하녀는 그 밖의 일을 해야 한다. 특히 오늘 같은 날 오전에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몸을 굴려야 했다.
“나도 저 밖으로 나가고 싶다.”
리냐가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연회의 기분이라는 걸 느껴보고 싶어.”
“각하께서는 연회가 끝난 후 고용인에게 휴가를 주셔. 연회의 기분은 그때 느끼지 그래?”
“내가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화려한 사교 생활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뜻이지.”
그 말에 접시를 닦다 말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냐를 비롯한 다수의 어린 하녀들이 선망 가득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는 곳으로. 벌써 열댓 번째 즈음 되는 마차였다. 시종이 문을 열자 기다란 흑색 깃을 머리에 꽂은 여자가 우아한 움직임으로 땅을 밟았다. 여인은 시종의 도움으로 번쩍이는 드레스를 뽐내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아마 관내에서는 시녀를 통해 방을 안내받을 것이다.
“네 말은, 귀족 영양들의 시중을 들고 싶단 거야?”
“그래. 이왕이면 시중을 들다가 잘난 신사와 눈이 맞으면 더 좋고.”
“넌 너무 솔직해서 탈이야, 리냐.”
“수잔, 조금 쉬는 게 어때? 요리에 나갈 식기는 이미 다 준비해뒀잖아.”
마침 남은 접시도 없는 터라 손을 털며 대답했다.
“오늘도 힘들었는데 내일부터 사흘간은 지옥이겠어.”
“저 많은 인간들이 먹다 남긴 음식과 엉망이 된 침실을 생각하면….”
“쉿! 저길 봐, 저 여자가 아즈마리아 윌이야.”
뿔뿔이 흩어지던 하녀들의 이목이 다시 한번 집중됐다. 이번에는 나 역시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즈마리아는 귀부인들의 찬양을 한 몸에 받는 귀족 여식이다. 품행과 언행에 기품이 서려 있고 활기와 현명함을 모두 지닌 여자라 뭇 남자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는 여자이기도 했다.
“소문대로네.”
“또래 친구들을 따라 쫓아왔나 봐. 참 겁도 없다. 나 같으면 절대 못 와, 무섭잖아.”
마차에서 어린 귀족 여식들이 차례로 내렸다. 둘, 아니 셋인가. 그중에서도 아즈마리아의 미모는 단연 빼어났다. 남들과 같은 흑발에 남들과 같은 하얀 피부였음에도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기다란 팔과 갸름한 턱, 춤추듯 나부끼는 걸음. 과연 주인공의 연인이 될 인물다웠다.
“쳄벨 자작님도 오셨대.”
툭.
발등 위로 떨어진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주웠다.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졌다. 테라스 아래로 추락하던 그의 마지막 표정이 잔상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수잔에게 구애하더니! 시집은 리냐가 아니라 수잔이 가겠네.”
“그분 정도면 괜찮지.”
“괜찮은 정도니? 신분이 상승하는 건데!”
그들 마음속에서 나는 이미 쳄벨 자작의 예비 부인으로 낙점된 듯했다. 괜찮다고? 내가 그를 어떻게 죽일 뻔했는지 알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그림이라 못 들은 척 뒷문으로 저택을 나왔다. 고작 보름이 흘렀는데 어떤 꼴로 잉고르드에 왔을까. 목발을 짚고? 그도 아니라면 누워서? 입 안은 걸레짝이 된 채?
“솔직히 조금 실망했어요.”
메어리였다. 대답 않고 겹겹이 쌓아 올린 과일 상자 옆에 주저앉았다. 곧장 옆에 쪼그려 앉은 메어리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놨다.
“귀족 영애들 말이에요. 차라리 수잔 선배가 제가 기대했던 귀족 여식에 더 알맞은 느낌이에요.”
그야, 내가 몸을 차지한 아그레인은 유복하고 명망 높은 귀족 가문 출신이 맞으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괜히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가지런히 모은 무릎 사이로 코를 박았다. 날고 긴다는 잉고르드의 하녀들보다 메어리의 눈치가 훨씬 더 빠르다는 게 우스웠던 것이다.
***
손님들이 각지에서 모이고 있었기에, 입성은 해가 지고도 계속됐다. 열아홉 모두가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면 만찬 준비로 바빴을 텐데, 하녀로서 상당히 다행인 일이었다. 연회가 시작되기 전날은 그렇게 무난하게 지나가는 듯했다.
쨍그랑!
평온함이 어긋나는 소리는 자정이 훌쩍 흘러 모두가 잠든 시간대에 들려왔다. 흐릿하게 유영하던 정신이 맑아졌다. 고용인들의 침실이 아닌 이 층에서 난 소음이었다. 독으로 인해 청각이 예민해지지 않았다면 나 또한 모르고 지나쳤으리라. 그러나 두 번째는 없었다. 대신 쏟아지는 장대비 소리가 저택을 잡아먹었다.
조심스럽게 침실을 나서 이 층으로 올라갔다. 열아홉 명의 손님이 공작저를 방문했음에도, 새벽의 저택은 유령 성만큼 스산했다. 어느 순간, 어둠 속에서 흐릿한 빛이 보였다. 리히튼의 집무실에서 나오는 불빛이었다.
“…주인님?”
언제나 닫혀 있던 공간이다. 한데 문이 반 이상 열려 있는 것은 물론 방의 주인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노란 빛 아래에서 조각조각 해체된 화병이 보였다. 내 잠을 깨운 소음의 주범인 듯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은하수조차 보이지 않는 황량한 어둠 속에서, 밝은 빛 하나가 점차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등불에 어렴풋이 보이는 뒷모습이 익숙했다.
“리히튼.”
그의 걸음은 참으로 기이했다. 곧고 거침없었던 기색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외줄을 타듯 위태위태한 남자의 발자국이 저 먼 냇가 너머의 숲으로 향했다. 그에게 문제가 생긴 거야. 하지만 리히튼은 남에게 허점을 보일 남자가 아닐 터인데. 생각은 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나는 홀로 내려가 우산을 쥐고 저택을 벗어났다.
쏴아아아아.
내 숨소리보다 귓등을 치는 빗소리가 훨씬 컸다. 멀어지는 빛을 향해 열심히 다리를 놀렸다. 그의 보폭이 너무나 커 따라잡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들었다.
“주인님.”
가까이서 본 리히튼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워낙 빗줄기가 굵어 빗물에 쓸린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우산을 높게 들고 흠뻑 젖은 팔을 가까이 끌었다.
“주인님.”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그의 시선은 새카만 숲 어딘가를 멀거니 향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듯한 모습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리히튼이, 보이지도 않는 괴이한 것에 홀렸다고?
“리히튼!”
너무나 이상했다. 그의 목을 붙잡아 내려 시선을 맞추었다. 새하얀 입김이 우리 사이를 메우고 흩어졌다.
“아그레인.”
그리고 한참 만에 나온 이름이, 아그레인. 머릿속이 텅 비는 기분이었다. 리히튼을 잡아끌던 손 안의 힘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그의 속눈썹 아래에 맺힌 자그마한 물방울이 턱, 땅으로 추락했다.
“이제야 찾았군요. 당신처럼 허약한 여자가 가을비를 맞는 게 죽자는 행위란 걸 모르는 겁니까?”
우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면 이런 추위가 찾아올까. 몰아치는 한기에 쥐고 있던 우산까지 덜덜 떨렸다.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리히튼이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내 손등을 감쌌다. 그의 눈은 나를 보고 있었지만, 또한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어서 성으로 돌아갑시다. 고작 몇 분이 지났다고 그리도 낯이 창백해.”
리히튼이 내 어깨를 잡아끌어 안았다. 지하 냉동고에 갇힌 것처럼 뼈를 훑는 스산함이 날 덮쳤다. 그의 손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보다 차가웠다. 그는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 걸까.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나요.”
“당신의 침실로.”
“나의 침실은 어디 있나요?”
“나와 질답 놀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오늘은 정말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군. 당신의 침실이 힐 성에 있지 않으면 어디 있겠습니까.”
광증. 잊고 있던 그 짤막한 단어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광증이 버리지 못하는 과거로 인해 고통받는 것이라면….
“여기에 힐 성은 없어요, 주인님.”
걸음을 멈추고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을 털어냈다. 리히튼이 의아한 얼굴로 등불을 들어 내 뺨 가까이 들이밀었다.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할 만큼 숨 가쁘고 지쳐 보이는 낯을 하고선.
“내가 아는 아그레인 캐롤드는 이런 얼굴을 하지 않는데.”
“그야 나는 당신이 아는 아그레인이 아니니까.”
리히튼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젖은 백금발이 이마를 가리고 그의 속눈썹 사이사이를 가렸다.
“빌힐름입니까?”
내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그는 젖은 땅 위로 천천히 등불을 내려놓았다. 이윽고 시체처럼 딱딱하고 차디찬 손이 내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아니, 빌힐름밖에 없지. 그 빌어먹을 개새끼가 당신에게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그자는 나와 아무런 상관없어요.”
리히튼은 마치 팔다리가 잘린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일 수 없었다. 씹어 문 입술에 잇자국이 선연했다. 코끝의 거리가 너무나 가까워 뜯긴 입술의 형상이 하나하나 섬세하게 보였다.
“그런 말, 내게 더는 안 통해.”
안 통해서 무엇 할 건가. 과거의 그가 아그레인 탓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느냐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나는 그 여자가 아니야. 리히튼의 손 안에서 목을 비틀어 얼굴을 빼냈다.
“지금 주인님의 몸이 얼마나 차가운지 아세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만큼 창백해요. 송장으로 보인다구요. 더는 이곳에 있으면 안 돼요. 당신의 방으로 돌아가야겠어요.”
“내 방은 없어. 우리가 갈 곳은 힐 성이야.”
“정신 차려요. 이곳에 힐이란 이름의 성은 없으니까.”
앞서 걸으려는 내 몸을 리히튼이 다시 돌려 세웠다. 내가 막 집어들려고 했던 등불도 빼앗아 갔다. 그리고 강한 악력으로 숨이 닿을 거리까지 내 뒤통수를 당겼다. 날 향해 구부러진 그의 몸이 안 그래도 캄캄한 시야를 더 어둡게 가렸다.
“아그레인, 제발 내 말을 들어….”
리히튼은 이렇게 절절한 목소리를 지닌 남자가 아니다. 모르는 이를 대하는 것 같아 속이 답답하고 뜨거웠다. 나는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한 글자씩 천천히 읊었다.
“이곳은 잉고르드야.”
행여 그에게 들리지 않을까 더 크게 소리쳤다.
“알겠어? 이곳은 힐 성이 아니라 잉고르드라고. 당신이 트리비아체에서 날 개처럼 끌고 와 목줄을 맨 잉고르드! 아그레인을 버리고 수잔으로서 살게 한 잉고르드!”
악을 쓰며 리히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그는 강인한 힘으로 날 끝까지 가두었다.
“당신이야말로 나를 제발 아그레인이라 부르지 마! 나는 아그레인이 아니라고, 그 애는 죽었어. 오직 나만 남았어. 내게 모든 걸 빼앗겼단 말이야….”
착각이 아니라면 청회색 눈동자 속에 고여 있던 그림자가 조금은 거둬진 것 같았다. 그가 조금은 평소에 가까운, 검처럼 잘 벼려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수잔.”
“나는 누구지?”
“나의 주인.”
리히튼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눈꺼풀을 감았다가 떴다. 숲을 울리는 빗소리를 제외하고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
“그렇다면 눈을 감아.”
그의 말을 따르지 않자 커다란 손이 내 눈을 감겼다. 얼마나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흘렀을까. 입술에 옅은 숨이 닿았다. 시리면서 따뜻한 무언가가 입술을 덮었다. 가까이 닿으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모래성을 대하듯, 허약하면서 겁을 한가득 먹은 움직임이었다. 나는 태산에 짓눌린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이윽고 시야를 가리던 커다란 손이 멀어졌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남자의 전신이 다시 빗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내가 너의 주인이라니. 지랄 맞게 과분한 꿈이로군.”
창백한 얼굴에 그려진 자조적인 웃음이 번진 잉크처럼 서서히 사그라졌다.
“어서 돌아가, 아그레인. 내가 이 꿈에서 깰 수 있도록.”
그 한마디를 끝으로 리히튼은 나를 밀어냈다. 나는 멍하니 뒷걸음질 치다가 우산을 든 채 저택으로 내달렸다. 그는 기어코, 끝까지 나를 수잔이라 부르지 않았다.
“읏….”
말로 표현 못할 격한 감정이 목구멍 바로 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억울하고 비참했다. 수잔이라는 이름을 준 리히튼의 앞에서조차, 수잔일 수 없다니! 나는 아그레인이 아니었으나 아그레인이어야 한다. 이곳에서 ‘진짜 나’를 인지하고 ‘진짜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돌아온 침실에서 나는 한참을 멍하니 새까만 천장만 올려다봤다. 빗물에 젖은 머리와 옷 때문에 침대 역시 물 잔을 엎지른 듯 빠르게 축축해져 갔다. 전신이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무겁고 아팠다.
“외롭다.”
차라리 아그레인인 척할까. 그게 훨씬 편하려나. 언제나처럼 잠은 오지 않았고, 비가 내리는 밤은 길었다.
***
평생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던 해도 결국은 밝았다. 물론 아침이 찾아왔다고 해서 비가 그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친 듯이 쏟아 내리는 장대비도 연회 일정에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못했다. 해가 지기 전에 시작한 연회는 자정이 넘은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음악은 멈추지 않았고 저택을 뒤흔드는 크고 작은 웃음 또한 여전했다. 이러한 분위기면 해가 다시 떠오를 즈음에야 연회장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요? 어땠어요?”
“어떻기는, 각하는 얼굴 뵙기도 힘들었어. 꽃에 모여든 꿀벌도 아니고, 어린 여자들이 얼마나 우르르 붙어 있던지!”
설거지하기 바쁜 하녀들 사이에서 시종 한 명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요?”
“그리고? 무슨 말을 해 주길 기대하는 거야?”
“그냥, 어린 여자들 말고 다른 귀족들은 어떠냐는 거죠.”
“정신없어서 기억도 안 나. 내 팔을 징그럽게 매만지던 늙다리는 기억나는군.”
“어머나, 귀부인이요? 나이 먹고 추하게 뭐하는 짓이람.”
“빌어먹게도 남자였어.”
연회장만큼은 아니어도, 주방과 식료품 창고 역시 잡일을 처리하느라 시끌벅적했다. 고성이 오가는 와중에 한차례 소란이 일어난 건 막 새벽 한 시가 다 되던 때였다.
“일 층 서재의 등불에 기름 채우는 걸 잊었다고?”
“하,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한참 연회 중이잖아. 상관없지 않을까?”
“상관없기는! 그러다 음악에 싫증난 귀족이 서재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아무래도 오전 일과를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실수가 일어난 듯했다. 콜렌토 부인은 절대 실수하지 말라 당부하긴 했지만, 일이 워낙 많았어야지.
접시 닦이를 마무리하던 중 누군가 내 팔을 두들겼다.
“저기, 수잔.”
아무런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한데 한참 서재의 등불에 대해 논하던 자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얼굴들은 다 뭐야. 나보고 가란 의미는 아니겠지?”
이마를 구기며 묻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씩 내뱉었다.
“콜렌토 부인은 네게 너그러우시잖니.”
“여차하면 베르크네 씨 뒤에 숨으면 되지!”
그들과 길게 말을 섞을 기운이 지금의 내게는 없었다. 어차피 내게 맡겨질 일이라면 빨리 끝내고 돌아오는 게 나았다. 어쩔 수 없지. 등불에 쓰이는 기름이 든 병을 들고 조심스럽게 서재로 향했다. 지겹다 못해 끔찍한 현악 사중주가 아직까지도 연회장에서 울리고 있었다.
끼익.
숨어들어와 문을 닫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직후 바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서재 안쪽에 외부인의 것으로 보이는 하얀 빛이 고여 있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우려대로 귀족 중 하나가 번잡한 연회 도중에 서재를 방문한 것이다. 걸음 소리를 줄이고 책장을 돌아 가장 바깥쪽 등불을 분리시켰다. 아무래도 이 등불의 기름만 채우고 자리를 떠야 할 듯했다.
“누구죠?”
하지만 사람 일이란 게, 늘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아서 문제였다. 급히 기름병을 채우고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봤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는 말간 낯의 여인과 눈길이 부딪혔다. 아아. 하필이면, 정말 하필이면 그 열아홉의 귀족 중에서 아즈마리아라니.
“하녀?”
“죄송합니다. 기름만 채우고 금방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아아…. 천천히 해요. 나에게는 내 몫의 빛이 있으니까.”
명랑한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이 묻어 있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구나. 모르는 척 허리를 숙이고 남은 기름을 빠르게 채웠다. 빌힐름의 연인인 만큼 가까이 해 좋을 것이 하등 없을 터였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서재를 나가려던 때였다.
“이봐요. 이름이 뭐죠?”
젠장,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다가 놓았다.
“수잔입니다.”
“잉고르드에서 얼마나 일했나요?”
그리 달갑지 않은 물음이었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몇 걸음 앞에 선 아즈마리아가 내게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괜찮다면 하나만 묻고 싶어요.”
아즈마리아는 고명한 윌 백작가의 여식이고, 나는 가진 것이라곤 독에 오른 몸뚱이가 전부인 비루한 하녀다. 나에게는 그녀를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조심스레 몸을 숙여 다가간 나에게, 아즈마리아가 품에 안고 있던 자그마한 물건을 건넸다. 값비싼 반지나 목걸이에 박혀 있을 법한 세공된 다이아였다.
“수잔, 잉고르드의 광증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이런.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어쩌면 이 다이아는 보잘 것 없는 하녀에게 죽기 전 베푸는 마지막 자비일 수도. 나는 소위 입막음용 뇌물을 건넨 아즈마리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잡티 없이 반짝이는 또렷한 눈동자 속에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의지? 그녀는 과연 무엇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가. 사랑하는 빌힐름을 돕기 위해 어줍지 않은 잉고르드 하녀의 정보라도 훔쳐 가려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즈마리아가 겁도 없이 설치는 건 나와 관련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건 도리어 역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이지 않을까.
“잉고르드의 광증은….”
천천히 입을 열자 아즈마리아의 결 좋은 낯이 집중으로 빳빳하게 굳었다.
‘내가 너의 주인이라니. 지랄 맞게 과분한 꿈이로군.’
떠올리지 마. 깊은 바닥에서 꾸역꾸역 올라오려는 리히튼의 목소리를 막으려 애썼다. 대답은 거짓으로 적당히 꾸미면 된다. 어차피 아즈마리아에게 진짜를 알릴 필요도 없지 않은가?
“저, 영애. 제가 말씀드렸다는 건 비밀로 해 주실 거죠?”
“물론이에요. 윌 가문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게요.”
크로허츠가 리히튼에게 농락당한 시점에서 그리 신뢰 가는 약속은 아니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각하께서는 늘 무언가에 쫓기시는 것처럼 보여요. 저는 잉고르드의 광증도 이와 관련되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로지 내 목소리에 집중한 아즈마리아는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분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굉장한 통찰력이 존재해요.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꿰고 계시죠. 그럼에도 늘 불안감이 느껴져요. 그분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이를테면 저 같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외로움이라든가….”
아즈마리아는 마치 대단한 세기의 비밀이라도 듣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내게는 기이하게 느껴졌다. 정적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릴 적에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적의와 불쾌함이 아즈마리아의 눈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저는 광증이 그분께서 통찰력을 얻은 대가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그분은 너무나 외로워 보이세요. 영애도 아실 거예요, 그 광증이 각하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지.”
“아니요, 나는….”
“각하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파요. 그 외로움을 이해해 줄 누군가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미세하지만 아즈마리아가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였다. 마치 진심으로 리히튼을 동정하기라도 하듯이. 나는 입술을 비집고 기어 나오려는 헛웃음을 힘겹게 참았다. 잉고르드의 하녀가 하는 헛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는 모습이 정말 어처구니없었다. 그녀는 진정으로 선량하고 정의로운 심성을 지닌 여자였다. 문제라면 잉고르드의 멍청한 하녀가 아닌 리히튼의 개를 만났다는 것이지.
“역시 잉고르드에 내려오는 ‘그 힘’은 양날의 검이었구나.”
그 힘?
“각하께서는 많이 괴로워하시나요?”
“네.”
“그러겠죠, 아마 앞으로도 순탄치 않을 거예요. 빌힐름이 지금은 비록 웅크리고 있어도 나중에는… 아, 방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줘요.”
황급히 손을 저은 아즈마리아가 고민에 잠긴 얼굴로 바닥을 노려봤다. 그리고 나는 경악했다.
‘이 여자는 미래를 알고 있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왜? 설마 나처럼? 머릿속이 정리되기도 전에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당신도 책….”
책 속에 들어온 건가요? 그렇게 묻는다면, 그 다음은? 아즈마리아는 뒷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녀가 나처럼 『태양이 흐르는 강』에 떨어졌다는 걸 알면? 그 다음에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신세 한탄? 제국을 집어 삼킬 작당 모의?
“하려던 말 계속해요, 수잔.”
하지만 그들은 모두 비참한 끝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고개를 젓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다시 생각해도 이 여자와 가까이 해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 빨리 마무리 짓고 내 자리로 돌아가야….
“아즈마리아 영애.”
그때, 내 등 바로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깜짝 놀란 아즈마리아의 시선이 내 정수리보다 두 뼘은 높은 허공을 향했다.
“당신은….”
“대화 도중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저는 검은매 기사단의 일원, 킨입니다.”
기가 막히게 적절한 순간이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을 느끼며 킨을 쳐다봤다. 그의 눈길은 내가 있든 말든 오직 아즈마리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 당신이 킨 경.”
그녀는 킨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킨이 속한 검은매 기사단은 제국에서도 이름 난 명기사단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이야기 소리가 들려서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한데 이 하녀는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하녀라서 말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내게로 향한 아즈마리아의 얼굴에 미세한 걱정이 서렸다. 주제파악 못하고 농땡이를 쳤기에 한 소리 들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친절은 감사하지만, 잠시 쉴 겸 잉고르드의 서재를 구경하고 싶어서 왔을 뿐이에요. 저는 이만…. 아아, 등불에 기름을 채워 주어서 고마워요.”
상냥한 아즈마리아는 날 보호하기 위해 거짓 감사 인사까지 남겨주었다. 둘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얌전히 허리를 숙이는 일이 전부였다. 그녀가 나간 후, 불 한 점 없이 어두운 서재에는 나와 킨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덕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게 무슨 대화를 했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등불에 기름이라.”
“이상한 생각하지 마. 남의 실수를 대신 메꿔 주고 있는 중이니까.”
킨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괜히 다 보이게 숨기는 것보다는 사실을 밝히는 게 더 나은 방도일 듯했다. 리히튼의 사람인 내가 아즈마리아를 위할 이유는 하나도 없지 않은가. 반대쪽 등불에 기름을 채우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광증에 대해 물었어.”
“아하, 너에게? 그런 깜찍한 아가씨가 다 있나.”
“아는 게 없어서 되는대로 지껄였지.”
“허. 아는 게 없다니. 베르크네 씨를 들들 볶았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볶는다고 말해 줄 사람이 아닌 거 알잖아?”
어차피 나갈 장소이니 불을 켤 이유는 없었다. 안쪽 등불에도 기름을 채우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 하자 킨이 나를 불러 세웠다.
“헛짓은 그만 하고 따라와. 각하께서 부르셨으니.”
그 한마디에 양 어깨가 무거워졌다. 무어라 대답하고 싶었으나 목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새벽에 그 일이 있고서 만날 생각을 하니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연회는?”
물음에 대한 답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얌전히 킨의 뒤를 따라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과 달리 이 층으로 이어지는 홀은 기척 없이 조용하고 음산했다.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네가 느낀 평화는 허구에 불과하다던 이 오라비의 조언.”
정적 속에서 앞서 걷는 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를 뵙기 전에 숨을 깊이 들이쉬는 게 좋을 거다. 뭐, 너라면 필요 없을 수도 있고.”
“긴장하라는 뜻이라면, 매일같이 그러고 있으니 괜한 참견 마.”
하하. 그가 반쯤 갈라진 건조한 음성으로 웃었다. 가슴 한 구석에 기이한 불안감을 일으키는 웃음이었다.
“이런 일도 곧 익숙해질 거야. 이미 한 번 겪어 봤잖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정신적 단련이라 생각하라고, 수잔.”
“아까부터 계속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대로 멈춰 섰다. 나를 따라 몇 걸음 앞에 선 킨이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아주 쉬운 일이야. 총애라 생각하면 공포도 평안으로 느껴질 테니까.”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약간의 소음도 없이 미끄럽게 열렸으나, 내게는 진창으로 떨어지는 입구처럼 느껴졌다. 들어선 방 안에는 알 수 없는 열기가 옅게 들끓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나는 눈을 감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내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리히튼, 베르크네, 킨. 그리고 고치를 감고 있는 애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제물까지.
‘인사는.’
그때의 그 무감각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당시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자리에 서 있었더라. 이것만은 확실했다. 적어도 지금은 그때처럼 입 안이 마르거나 손끝이 덜덜 떨리지 않았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주인님, 절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기억하나, 수잔. 너에게는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서릿발처럼 냉랭한 리히튼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감정적인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새벽의 일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날도 이러했지. 트리비아체 삼남의 웅크린 등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고개를 들어라.”
제물은 꽁꽁 묶인 채로 리히튼의 발치에 웅크리고 있었다. 비록 얼굴은 안 보여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랬기에 더더욱 리히튼이 이해되지 않고, 생각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의 두 번째 제물은 다름 아닌 쳄벨 자작이었던 것이다.
“왜 완벽하게 죽이지 않은 거지? 그간 베르크네에게서 배운 건 인형 놀이에 불과했나?”
킨의 표현대로 내가 익숙해지긴 익숙해졌나 보다. 이런 분위기에도 그 한마디에 욱하는 걸 보면.
“주인님과 뜻을 함께하는 자를 감히 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한 소리이지만 즐거움은 단 일 푼도 느껴지지 않는 미소였다.
“뜻을 함께하는 자라.”
나지막한 음성을 따라서 쳄벨 자작이 금방이라도 발작할 듯 덜덜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히튼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가만히 눈을 감고 읊조렸다.
“쳄벨 자작은 적당한 선을 지키고 적당히 눈치가 빠르지. 어떻게든 내 눈에 들기 위해서 갖은 수를 썼던 것도 마음에 들어. 나는 열정적인 사람을 좋아하거든. 그런 면에서 자작은 퍽 훌륭한 개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빌힐름의 개라는 점만 제외하면.”
마지막 대목에 혀로 입 안쪽 살을 건드렸다. 당시 억지로 깨물었던 흉터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빌힐름이 보는 앞에서 그의 사람에게 입을 맞췄던 건가. 당시의 감각이 선연하게 살아나는 기분이라 억지로 머릿속을 비웠다.
“자작께서는 과연 나를 장님이라 여겼던 걸까? 어떤 개가 내 개인 줄도 구분할 줄 모르는?”
스르릉. 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바닥으로 떨어뜨렸던 시선을 본능적으로 들어 올렸다. 서슬 퍼런 장식 검이 리히튼의 손 안에 쥐여 있었다.
“그럴 리가 없지. 너는 그저 날 업신여겼던 거야.”
“으읍!”
미약한 비명과 함께 쳄벨 자작이 몸을 비틀었다. 그는 이미 반쯤은 시체나 다름없었다. 움츠러들었던 가느다란 목에 핏줄이란 핏줄은 전부 솟아나 있었다. 검이 박힌 손등 아래로, 새로 마련한 가을 카펫이 붉게 물들어 갔다.
“대체 얼마나 업신여겼으면 내가 보는 앞에서 내 것을 탐냈을까? 정말 궁금하군, 자작… 너무나도 궁금해. 정말 장님이라도 된 기분이야.”
리히튼이 몸을 숙여 검의 날을 바닥 더 깊숙이 박아 넣었다.
“으으읍!”
미친놈.
“으읍!”
그래, 리히튼은 처음부터 미친놈이었지. 빗속에서의 그가 너무나 인간적이었기에 잠시 헷갈렸던 것 같다. 리히튼에게 사람은 도구, 아니면 개일 뿐이란 사실을.
“이제 어찌해야 할까, 수잔.”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아연했던 감각은 어느새 한 줌의 재로 사라진 뒤였다. 힘들다. 그보다 더 무섭다. 입 안이 바짝 메말랐다. 나는 그저 이 순간이 한 시라도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대답해. 너까지 나를 업신여기지 않겠지?”
“죽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가 바라는 답을 내놓아야 한다. 리히튼은 내 대답에 즉각 반응했다. 끝이 붉게 물든 검을 자작의 손등에서 뽑아 나에게 내민 것이다.
“주인님.”
“내 눈앞에서 스스로 두 다리를 절단하려 한 네가, 설마 숨어든 쥐새끼의 다리를 못 자를까.”
트리비아체의 삼남을 시체로 만들었을 때의 리히튼과 너무나 똑같다. 그는 내게 자신을 따라서 인간성을 상실하길 종용하고 있었다. 몸이 굳어 눈꺼풀을 오랜 시간 깜빡이지 않았는지, 눈이 따갑고 건조했다. 삼 층에서 떠미는 것과 내 손으로 완전히 숨을 끊어내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나는….
“죽기 싫으면 죽여야만 해. 이건 당연한 이치야, 실제로 그는 네게 한 번 죽었었지. 자작은 오롯이 네 몫이다, 수잔. 시작했으면 끝을 봐.”
쳄벨 자작이 멍으로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날 응시했다. 자비를 구걸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작은 철천지원수인 양 노려보고 있었고, 그 점이 날 안도하게 했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미약하게 남은 동정심을 자극하지는 않았으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뒷걸음치고 있었던가. 등 뒤로 맞닿은 킨이 내게만 들릴 만큼 작게 속삭였다.
“도망칠 생각 마, 수잔. 지금의 각하는 널 죽일 수도 있어.”
지금의 각하? 사방이 어둠뿐인 공간에서, 돌연 머릿속에 두꺼운 유리 장막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리히튼을 응시했다.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강압적인 분위기, 피 냄새가 느껴지는 폭력성. 한 번 문 먹이에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복수를 가장한 그의 행위는 오히려 유흥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거였구나. 이게 바로 리히튼의 광기였어. 캐롤드 가문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잉고르드 대대로 내려왔을 그 광증. 아즈마리아가 말한 ‘그 힘’의 양날의 검.
‘이런 일도 곧 익숙해질 거야. 이미 한 번 겪어 봤잖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정신적 단련이라 생각하라고, 수잔.’
헛소리로 치부했던 킨의 말이 뒤늦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리히튼의 광증은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잔혹하면서 비인도적인 악취를 여지없이 풍기면서.그렇다면 광증의 원인인 ‘그 힘’은 대체 무엇이지?
“약자에게 진정한 자비는 죽음뿐이지.”
다가온 리히튼이 창백한 손을 뻗어 내 팔을 이끌었다. 그는 내게 장식 검을 쥐여 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누구보다 너와 내가 가장 잘 알아.”
네가 잘 안다고? 듣는 내가 다 억울했다. 웃기는 소리, 채찍을 든 리히튼이 그 심정을 알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발악하며 그의 검을 밀어내지 않았다. 해야만 하니까. 그래, 나는 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을 감수하기 위해 트리비아체에서 여기까지 왔다. 살아남기 위해 독을 먹고 사람을 찔렀다. 외딴 섬에 홀로 남은 고독을 절실히 느껴야 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버려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수잔.”
이대로 머저리처럼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