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 악연
내 일과는 특별한 일정이 생기지 않는 이상 대체로 똑같다. 새벽에 눈을 뜨면 새로운 파트너와 함께 침실을 청소하고, 정오 즈음 리히튼의 집무실을 정리한다. 오전 일과 때 함께 처리하면 될 일을 꼭 나중에 따로 청소하게 하는 걸 보면 기어코 날 괴롭히려는 속셈일 터였다. 고립된 공간에서 리히튼과 단둘이 보내야 하는 시간 자체가 내게는 고역이나 마찬가지니까. 힘겹게 마무리를 하고 돌아오면 고용인들의 식사 시간은 항상 끝물이곤 했다.
그래도 오늘은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날이었다. 되도 않는 귀족 사교 예절을 배우느라 고상한 척 식기를 드는 연습도, 무도회에서 춤추는 연습도 대강이나마 끝마친 상태였다. 리히튼이 내게 출신 모를 왕녀 노릇을 대신해 달라 명령하지만 않았어도 조금 더 편안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었으리라.
“수잔 선배, 그거 아세요?”
여느 때처럼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정리하려던 때였다. 새로 들어온 하녀, 메어리가 내게 바싹 몸을 대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엊그제 저택에서 귀족 분들의 사교 모임이 있었잖아요. 그중에 유독 젊고 잘생겼던 쳄벨 자작 기억하세요?”
기억하기 싫어도 기억할 수밖에 없는 귀족이었다. 내 생에 그 남자만큼 하녀들에게 치근덕대는 귀족은 처음 봤으니까.
“오늘 새벽에 그 자작이 선배 앞으로 서신을 보냈지 뭐예요.”
“서신?”
“네. 콜렌토 부인이 고민하시다가 우선 각하께 말씀드렸대요. 그런데 각하께서 그 이야기를 들으시자마자 서신도 뜯지 않고 벽난로에 불을 지펴 쑤셔 넣으셨다네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래요.”
그런 일이 있었나. 나는 물기를 대충 닦은 찻잔에 차를 부었다. 리히튼의 얼굴이 어땠을지 안 봐도 뻔한 그림이었다. 경멸이 가득한 시선이었겠지.
“수신자에 분명 ‘친애하는 수잔 양에게’라고 적혀 있었어요. 혹시 그 자작….”
언제까지 계속할까 싶어, 짜증스레 쳐다보자 메어리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닫아 봤자 근처에 남아도는 입은 한둘이 아니었다.
“시종들에게 몇 번 묻기는 했었다지? 저 매혹적인 하녀의 이름이 무어냐고. 흐음. 뭐라 했더라…. 아, 사연이 느껴지는 눈매에 대비되는 선명한 녹안에 빠져들었다며 홀로 장문의 시를 읊었대. 참 징글맞은 묘사기도 해라.”
사연이 느껴지는 눈매? 이건 단순히 장기간 잠을 뒤척이면서 생긴 색소침착이다. 독이 완전히 전이된 후부터 깊게 잠들지 못하고 중간중간 깨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인상이 침침해지는 건 물론, 최근 들어 성격이 더 예민해진 듯하여 일부러 말수를 줄이고 있었다. 고용인들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반응하지 않고 조용히 차만 마시자, 옆의 또 다른 하녀가 눈을 얇게 뜨며 날 살폈다.
“확실히, 수잔이랑 눈이 마주치면 조금….”
한두 명 입을 열기 시작하자 이제는 우루루 몰려 말을 거든다.
“시선을 못 떼겠다고 해야 하나?”
“맞아. 그런 느낌 있기는 해, 몸이 굳고 빨려 들어가는 기분? 눈동자에 생기가 없어서 그런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지금과는 전혀 달랐는데 말이야.”
“그때는 적어도 건강했지. 지금은 워낙 위태위태해서 눈을 뗄 수가 없어.”
“요즘 악몽도 자주 꾼다며? 수잔, 내가 준 약은 챙겨 먹고 있니?”
어느새 부엌은 날 동정하는 하녀들로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날 애처롭게 여기는 그들의 시선이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나도 사람인지라 애정을 갈구할 수밖에 없다. 미친놈의 삐뚤어진 관심이 아닌 순수한 호의가.
킨은 고용인들 앞에서 유독 빈틈을 보이는 나를 약아빠진 계집애라고 불렀다. 알게 뭔가? 리히튼이 트리비아체를 멸문시키지만 않았어도 애초부터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내 건강에 대한 잡담이 무르익어 갈 때 즈음 베르크네가 부엌으로 내려왔다.
“수잔.”
자연스레 몸을 일으키고 부엌을 나섰다. 그가 날 찾아오고, 한차례 고개를 돌린 내가 잔말 없이 베르크네를 따라나서는 건 이제 잉고르드에서 당연한 풍경이 되었다. 그들 중 누구도 알지 못하겠지. 베르크네에게 불려간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이제 더는 수업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다른 일이다. 각하께서 부르셨어.”
리히튼은 최근, 아니 근 몇 달간 사나흘에 한 번씩 날 불러 놓고 시답잖은 물음을 던지곤 했다. 독에 적응한 후의 몸 상태, 다른 고용인들과의 관계는 물론 저택 밖으로 외출을 하고 오면 어디서 무얼 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열거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바라보는 모든 세상을 장악해 자신의 손바닥 위에 두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킨과 그만 으르렁거려. 내가 굳이 한마디 해야만 멈출 건가?”
“아니요. 그 재수 없는 놈이 좀 사람다워지면 멈추지 않을까요.”
“하여간 어느 쪽 하나 물러서려 하질 않는군.”
고개를 저은 베르크네는 나와 함께 집무실로 향하지 않고, 곧장 삼 층으로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리히튼이 날 찾을 때마다 슬그머니 사라져 독대를 유도하고 있다. 단순히 귀찮아서인지, 아니면 따로 리히튼의 언급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똑똑.
리히튼과 마주하는 순간이 살 떨릴 만큼 두려웠던 시기도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뭐랄까, 마냥 두렵지는 않았으나 불편한 감은 여전했다. 가슴이 턱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를 코앞에 둔 기분이 된다. 평소처럼 노크 직후 문을 열었지만 리히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문을 닫고 집무실 내부를 아주 느리게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가죽 소파 위로 흐트러진 백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님.”
깨워야 했지만 정작 그를 향한 발걸음은 조심스러워진다. 이렇듯, 리히튼은 종종 날 불러 놓고 겉잠에 들 때가 있었다. 올라오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닌데. 부르면 곧장 일어났던 것과 달리 오늘은 유독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주인님.”
두 번째 부름에도 답이 없다. 죽었나 싶다가도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그렇게 바보 같을 수 없었다. 나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소파 위로 기다랗게 누운 리히튼을 내려다봤다. 아마 이토록 무해하고 평화로운 외모는 또 없지 않을까. 창백한 낯 위로 쏟아지는 백금발을 보자니 괜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 모든 것을 잊기라도 한 듯 안온해진 얼굴이 괘씸했다.
“리히튼.”
마치 마법의 주문이라도 된 양 꿈쩍도 안 하던 눈꺼풀이 천천히 뜨였다. 그림자가 진 리히튼의 눈동자는 본래의 색보다 훨씬 더 어둡고 무거운 빛을 품고 있다. 착각일 게 분명했으나 아주 잠깐, 우리 사이의 시간이 멈췄던 것 같기도 하다. 무슨 생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느냐 물으면 마땅히 답할 구실은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눈 깜빡임을 뒤따라서 바위에 쇠 긁히듯 거친 목소리가 리히튼의 입을 통해 나왔다.
“괜히 자극하고 싶지 않으면 함부로 부르지 마.”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자극은 내가 아니라 그쪽이 한 것 같은데.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고, 리히튼이 몸을 일으켰다. 소파 옆으로 튀어나와 있던 기다란 다리가 제자리를 찾는 것도 금방이었다. 먹다 남은 커피로 목을 축인 그는 손가락을 까딱여 나를 불렀다. 정말 개라도 부르는 듯한 손짓이었다. 불만 가득한 의사를 피력하면 또 어떤 피곤한 상황이 찾아올지 몰랐기에, 얌전히 맞은편 의자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리히튼이 내게 건넨 것은 고급스러운 양피지로 만들어진 서신이었다. 아.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적색 문장이 찍힌 봉투를 받아 들었다.
“연회는 사흘 후. 잉고르드를 떠난 시점부터 네 이름은 베아트리체 아덴로지아 케일이다. 남대륙 케일 왕국의 제 22왕녀. 친모는 폐위된 상태고. 왕위 쟁탈에서 밀려난, 철딱서니 없는 열아홉 살 여인이지.”
무려 사 개월 전부터 리히튼이 입에 담았던 그 연회였다. 나는 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백 일이 가까운 기간 동안 귀족 소양을 익혀야 했다. 연회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전해 들은 적도, 들을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개라는 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니까.
“실존 인물이 아닌 것치고는 신상 정보가 꽤 상세하네요.”
“실존 인물이었어, 작년에 행방불명되기 전까지는. 케일 왕국은 워낙 극남쪽에 있는 국가라 제국과 교역이 전혀 없고 정보도 극미한 상태다. 전통적으로 왕가의 여인들은 혼인 전까지 베일을 쓰고 행동한다. 얼굴을 보일 일 없으니 편하게 행동해도 돼.”
말은 저리 해도 연회 내내 옆자리에서 떨어뜨리지 않을 게 분명하다. 리히튼은 내가 자신의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이미 잉고르드 독이라는 목줄을 걸고 있으면서 말이지. 그의 병적인 집착은 내가 어찌한다고 해결될 게 아니었다. 잠에서 깬 직후 내내 인상을 구기고 있던 그가 소파 등에 몸을 기대며 날카롭게 벼린 목소리를 냈다.
“문제는 불참 의사를 밝혔던 황자가 다시 참석하겠다고 말을 바꿨다는 점이지.”
빌힐름 황자. 서신의 내용을 읽던 난 힐끔 시선을 들어 리히튼을 살폈다. 황자와 연관된 일에서는 특히나 더 비인도적인 행위의 자제를 모르는 그였다.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나는 벌써부터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리히튼이 느리게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알아 둬, 수잔. 내가 옆에 없을 때는 반드시 황자를 멀리해라.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힘들면요? 그 사람 얼굴에 샴페인을 붓고 도망가도 되나요?”
“돼. 내 말을 잘 듣는다는 전제 하에.”
요점이 무엇인지 아직 파악할 수 없었다. 그만큼 빌힐름 황자가 위험한 인물이란 뜻일까? 하지만 빌힐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태양이 흐르는 강』을 보아 온 내게 그리 위협적인 경고가 되지 못했다. 독자의 시점에서 작중 최악의 악당은 눈앞의 리히튼 잉고르드였으니까.
“내일 바로 잉고르드를 떠난다. 준비하고 있도록.”
“네.”
***
갑작스러운 일정이었지만 그리 놀랍지만은 않았다. 반쯤 모든 걸 내놓고 지내 왔기 때문일지도 몰라. 리히튼의 옆에 자석처럼 붙어 있기만 하면 될지, 아니면 그 외 다른 역할을 수행하게 될지에 대해서도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마는 거잖아. 리히튼의 연인 역할만 아니면 무엇이든 할 만할 것 같았다.
다만 궁금한 점은 있었다. 레이나는 황자에게 무사히 도착했을까? 도착했다면 정말 나의 이야기를 그에게 전했을까. 모든 일에 무덤덤해졌을 줄 알았기에, 설마 밤새 잠을 뒤척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몇 달 만에 잉고르드를 벗어나는 거지. 나는 침대에 누워 새벽을 보내는 내내 수천, 수만 가지의 다채로운 상상을 했다. 공작에게서 멀어졌을 때, 미친 척 먼 곳으로 도망가는 그림. 살아 돌아온 트리비아체 백작이 날 데리고 돌아가는 그림. 임무가 끝나도 아무렇지 않게 잉고르드로 돌아오는 그림까지. 그곳에는 레이나 제닌도 있었다. 빌힐름 황자 옆에 당당하게 서서 날 구하러 왔다고 선언하는 그녀가. 그러나 이 각양각색의 상상들은 전부 자조로 끝났다. 멍청하기는… 너도 알고 있잖아, 그 정도로는 리히튼에게서 절대 도망칠 수 없다는 걸.
***
“베아트리체.”
리히튼의 부름에 굳어 있던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시야가 좁아질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그러쥐었다. 베아트리체 아덴로지아 케일. 오늘부터 일주일 간, 나는 케일 왕국의 제 22왕녀가 되어야 했다.
“말씀하셔요, 리히튼. 아아! 오늘 날이 참 화창하지요? 나가서 산책하기 참 좋겠어요. 식사는 하셨나요? 입맛에 맞으셨어요?”
한마디라도 더 하기에 바쁜 내 입술을 그는 감흥 없이 응시했다.
“하아… 이동하는 데만 네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어요. 속이 든든해야 문제없이 제 시간에 도착할 거 아니에요. 평소처럼 끼니를 거르셨을까, 걱정되네요.”
“준비를 마쳤다면 이제 나가도록 하지요.”
그 리히튼에게서 경칭을 다 듣게 될 줄이야. 등 뒤가 오싹해질 만큼 어색했다.
“그건 드셨다는 말씀이시죠?”
리히튼은 대답 없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몸을 바짝 붙여 걸었다.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과 더없이 가깝고, 사랑스러운 연인이 되어서. 하필 가장 아니길 바랐던 연인 노릇을 해야 한다니. 나는 왜 이리도 재수가 없는 걸까.
다행히 그는 내가 만들어 낸 베아트리체라는 인물에 큰 불만이 없는 눈치였다. 다만 잉고르드의 고용인들은 대뜸 나타난 공작의 연인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구불거리는 금발에 필요 이상으로 해맑은 성격을 지닌 외국인에 불과했다. 금발로 염색하고, 하얀 베일로 얼굴을 가린 덕에 ‘베아트리체 놀이’는 생각보다 더 쉬웠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주인님. 제 나름 대로 그럴싸하게 만들어 봤는데.”
저택을 벗어나 마차 앞에 도착하기 전, 그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엇이 마음에 드느냐고 묻는 건지 모르겠군.”
“베아트리체요.”
대답하기 무섭게 그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벗어날 수 없는 강한 힘이 상체를 올가미처럼 옥죄면서 품 안으로 끌어 당겼다. 리히튼의 심장박동이 지척에서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마음에 차지 않을 리가 없잖습니까. 무려 나의 하나뿐인 연인인 그대를.”
리히튼은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이었지만, 적어도 내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의 절제된 숨은 나의 얇은 피부막 안으로 긴장감을 주입한다. 전신이 긴장한다는 건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새삼 이 베아트리체 놀이가 내게 얼마나 번거로운 놀이인지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마차를 두 대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나, 이렇게 갑자기? 저와는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으신가요?”
시종이 마차의 문을 열고 나는 리히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안으로 올라탔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서리만큼이나 차가운 청회색 눈동자가 나를 비췄다.
“그럴 리가. 그저 내 욕망이 넘쳐서, 그대를 흩뜨릴까 염려하기 때문이지.”
미친놈이라서 그런 걸까. 마음에도 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아닌가. 이제는 마음에 없는 소리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지.’
나를 향한 리히튼의 이유 모를 집착을 생각하면 마냥 헛소리라 치부하기도 어려웠다.
“낭만적이신 분. 농담 그만하고 어서 마차에 올라타세요.”
“농담? 내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손을 잡아 빼려 해도 리히튼은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농담이 아니라면 더 좋지요. 지체하지 말고 한시 바삐 들어오시래도요? 당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예요.”
잡힌 손을 끌며 재촉하자, 가만히 서 있던 리히튼이 결국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가식으로 한껏 달아올라 있던 공기는 문이 닫힌 즉시 사라졌다. 나는 열과 성의를 다해 까르르 소리 내 웃던 입꼬리를 다시 늘어뜨렸다. 어쩐지 출발하기 전부터 지쳐 버린 기분이다.
“주인님, 저는 도착하기 전까지 조금만 쉴게요. 혹시 주의해야 할 점 있을까요?”
“일정이 끝나기 전까지는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말도록. 습관처럼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니.”
“알겠어요. 조심할 테니 염려 마세요.”
리히튼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나도 모른다. 말이 끝나자마자 눈을 감았으니까. 시야가 어두워지자 턱 막혔던 숨이 그나마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작고 좁은 공간에서 그와 단둘이 있어야 한다니, 장담컨대 선잠도 들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디인가. 사 개월 전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정신적으로 퍽 자유로운 편이었다.
‘거창한 이유는 없어. 그저 내가… 기나긴 시간을 오직, 너만 갈망하고 살아왔으니까.’
미친 척 그를 죽이기 위해 침실로 숨어들어 갔던 그날. 그날 이후, 리히튼의 비인도적이면서 강압적인 행위는 놀라우리만치 사그라졌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엄청난 변화였다.
우리 사이의 긴장감은 그대로였다. 리히튼은 내게서 항상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앗아가려 했고, 나는 내주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거란 작은 희망과 함께.
“각하.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짐은 현재 옮기고 있는 중입니다.”
마차가 멈춘 지역은 제도에서 가장 가까운 국경인 말타. 우습게도 그와 내가 참석하는 연회는 크로허츠 후작의 생일 연회였다. 별관이 무너져 크로허츠 여식이 대피하던 날, 놀라운 우연으로 잉고르드를 방문했던 그 인물의 생일 연회. 정적을 직접 초대하고, 또 그 초대에 응하는 건 대체 무슨 문화일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태양이 흐르는 강』에서도 이런 풍경이 잦았다. 서로를 감시하기 위해 더 가까이 두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리히튼. 우리 방은 따로 쓰나요?”
“안타깝게도. 왕녀 전하의 명예를 지켜드려야 하니까.”
“베아트리체 아덴로지아 케일에게 명예가 어디 있나요? 내가 가진 건 당신의 사랑이 전부인데.”
“참으로 감동적인 고백이군요.”
호텔의 샹들리에 아래를 걸으며 리히튼이 작게 웃었다. 누가 봐도 고혹적이고 눈부신 미소였지만, 내겐 가당치도 않단 표정으로 느껴질 뿐이다. 일렬로 늘어서서 허리를 숙인 호텔리어의 수는 수십 걸음을 반복해도 끝나지 않았다. 역시 잉고르드의 리히튼이구나. 국경지대라고 해서 그의 위엄이 약해지지는 않았다. 우리가 오른 엘리베이터는 호텔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킨은 오늘 하루 네 방 앞에서 대기할 거다.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 질러서 그를 불러. 멍청하게 혼자 해결하겠단 생각은 일절 말아.”
“주인… 당신은요?”
“제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감히 내 방에 침입할 생각은 안 하겠지.”
우리의 걸음은 가장 안쪽의 방문 앞에서 멈췄다.
“베아트리체.”
“네.”
몸을 돌린 그가 나와 시선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 눈앞의 남자는 호텔 앞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리히튼 공작이 아니었다. 내 목줄을 지닌 잉고르드의 주인이자, 공작 리히튼이었다.
달칵.
그가 막 입을 열려던 순간, 등 뒤에서 부드럽게 문이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히튼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내 뒤편으로 향했다. 이렇게 커다란 호텔을 그와 나만이 사용할 리 없지. 얼굴 모를 방문객의 발걸음이 점차 멀어져 간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선약이 많아, 그대와 함께 도심을 구경하지 못 할 것 같습니다.”
예의 낯선 이를 경계하는 어투에, 나 역시 방긋 웃어 주며 대꾸했다.
“저도 오늘은 푹 쉬고 잠들 생각이에요. 그래야 연회를 후회 없이 즐길 수 있지 않겠어요? 오늘 하루는 내가 미친 듯이 보고 싶어도 참아요, 리히튼.”
그는 마지막 인사라도 하듯, 날 부드럽게 품 안으로 이끌었다. 전신으로 느껴지는 리히튼의 온기는 한파가 휩쓸고 간 것보다 훨씬 더 차갑고 서늘했다.
“그렇다면 딱 한마디만 하도록 하지요. 내 울타리 안에서 멀리 벗어나도 됩니다, 베아트리체.”
대수롭지 않은 척하려 해도 딱딱하게 경직된 입매가 느껴진다. 이윽고 리히튼이 가진 것 중 가장 따뜻한 체온이 내 귓가에 닿았다. 그러니까, 그의 입술이.
“영원히 자유로울 자신이 있다면.”
“…그런, 서운한 말하지 마세요. 그럴 생각 없어요. 내가 가기는 어딜 간다고.”
“내가 없더라도 좋은 밤 보내기를.”
경고를 담은, 무덤덤하면서도 살벌한 청회색 눈동자가 오롯이 내 얼굴을 향했다. 아니, 오히려 그는 내게 도망치라 종용하고 있을 수도. 몰이사냥을 즐기는 리히튼의 성정을 고려하면 오히려 그게 더 어울렸다. 나는 리히튼의 바람대로 얌전히 방에 들어갔다. 잉고르드의 공작이 예약한 방답게 실내는 마치 또 다른 성을 방문한 듯 호화로웠다. 내부를 둘러보고 서재에 배치된 서적을 읽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근래에 내가 이렇게 여유로웠던 적이 있었던가? 꿈꾸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우스운 일이었으나, 나는 리히튼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약이 쌓였단 소릴 듣고도 은연중 그가 날 찾아올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주인 기다리는 개새끼도 아니고.’
자괴감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이미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모르게 깜빡 잠들었던 것 같다. 베일도 채 벗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불청객은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에 찾아왔다.
***
“읏!”
“쉬이. 조용히.”
잉고르드 독에 중독된 후, 나는 단 하루도 숙면을 취한 적이 없었다. 온몸을 감도는 한기와 예민해진 감각은 나의 정신을 깊은 잠의 수렁에서 헤어나도록 했다.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휴식이라 생각될 만큼 고단한 시간이었지. 그러나 오늘만큼은 변한 체질에 감사함을 느꼈다.
“지금부터 입도 뻥긋 하지 마. 숨소리라도 내면 평생 경험하지 못할 고통이 무엇인지 맛보게 해 주지.”
복면을 두른 남자가 단도를 들어 내 목을 위협했다. 침대 위에 바짝 엎드리며 베일 아래의 얼굴을 미친 듯이 주억였다. 이미 인기척이 들린 순간부터 베개 아래의 단도를 움켜쥔 상태였다. 생에 두 번째로 느끼는 생명의 위협. 기이하게도 공포보다는 놀라움이 먼저 들었다. 왜 이렇게 마음이 평온할까? 리히튼이라는 악마 옆에서 몇 달을 버틴 결과로 봐야 하나.
“지금부터 묻는 말에만 고개를 젓거나, 끄덕인다.”
“읍… 흑….”
“질질 짜는 건가? 왕족의 자존심이고 뭐고 다 갖다 팔았군. 걱정 말라고, 고귀하신 아가씨. 조용히 군다면 아픔은 없을 테니까.”
덤덤한 심리와 반대로 양쪽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새삼 베일을 쓰고 잠든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무표정으로 눈물만 줄줄 흘리면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일 테니까.
“혹시 모르니 미리 말해 두지. 나에게는 네 말의 진위를 알 수 있는 마도구가 있으니, 되도록 사실만 고하는 편이 좋을 거다.”
베르크네는 말했다. 겁먹고 유약한 여인 앞에서 경계를 풀지 않을 남자는 없다고. 그리고 내게 주어진 기회는… 상대가 긴장을 푸는 그 순간이 전부일 거라고.
“리히튼 공작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다면 고개를 끄덕여라.”
나는 곧장 고개를 주억였다. 협박? 장담하는데 침입자는 내가 어떤 취급을 받으며 명줄을 유지하는지 모를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선을 타고 떨어진 눈물이 침입자의 손등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의 내 몸은 순도 높은 잉고르드의 독 그 자체. 눈물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사실이군…. 역시 그분의 말씀이 옳았던 건가.”
치이익.
곧 남자의 손등에서 살갗이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창밖에서 투과된 달빛에 침입자의 일그러진 이마가 보였다.
“이게 무슨…?”
목을 짓누르고 있던 힘이 허술해짐을 느꼈다. 침착하자. 베르크네가 말한 것처럼 기회는 한 번밖에 없어. 그렇게 팽팽했던 긴장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베개 밑의 단도를 손에 쥔 순간.
“손을 거둬라, 젠.”
멀지 않은 곳에서 낮게 읊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허공에 흩어질 만큼 고요하고 작은 울림이었으나,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꽂히는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에 내 목을 압박하고 있던 검 날이 자취를 감췄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베아트리체 왕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떨어지는 은하수 빛 아래로 남자가 걸어들어 왔다. 언뜻 갈색으로 착각할 만큼 짧고 짙은 금발에 또렷한 붉은색 눈동자. 리히튼이 스치기만 해도 몸이 덜덜 떨리는 냉기의 소유자라면, 눈앞의 남자는 반대였다. 남자는 나와 리히튼에게선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선명한 생동감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 버리다니. 반응 없이 어깨를 부르르 떨고 있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정하시길. 왕녀를 해할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진심을 다해 사죄하는 눈빛과 멀찍이 떨어져 날 진정시키려는 행동. 남자의 번지르르한 외양과 태도 모두 범인이라 여기기에는 넘치는 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날 위협한 침입자를 말 한마디로 쫓아내지 않았는가?
“우리는 당신을 구하러 왔습니다.”
“구해? 뻔뻔한 소릴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는군. 구하는 게 아니라 죽이려고 왔겠지. 지금 당장 나가지 않는다면 소리를 지르겠어.”
킨은 대체 어디서 뭘 하기에 여태 감감무소식인가. 소리치기 위해 여러 번 입을 벌렸으나, 쉬이 고성이 튀어나오지 못했다. 구하러 왔다는 남자의 말이 내 목구멍에 모래를 쑤셔 넣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개월이 지나도록 못 버리고 있던 바람이었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잉고르드를 눈여겨 왔습니다. 리히튼 공작의 사상, 행보, 그의 최측근과 정부의 출신까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감시해 왔지요.”
“그렌페르크의 정쟁 같은 건 내 알 바 아니야.”
“아니요. 당신이 그와 함께 움직이는 이상 남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왕녀처럼 아무런 기조도 없이, 어느 날 돌연 나타난 존재라면 더욱더.”
“그래서 이번에는 날 감시하러 왔다는 건가? 지금 그의 정부가 바로 나이니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 할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남자 역시 내가 소리치지 않으리란 걸 눈치챈 듯싶었다. 리히튼에게는 이제껏 대체 몇 명의 여자가 있었던 걸까. 충분히 예상한 일임에도 기분이 미약하게 가라앉았다. 남자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감히 그 누가 왕녀에게 정부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하.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필요 없어. 사실이라면 아무런 변명이라도 해 보지 그래? 이 야심한 시각에, 케일 왕국의 왕녀인 이 몸의 침실을 급습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리히튼 공작이 우리의 적이기 때문입니다.”
리히튼 공작의 적. 그 짧고 강렬한 문장에 윤곽만 잡혔던 남자의 얼굴이 더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곧고 반듯하지만 날카롭지 않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콧대. 단단하고 또렷한 턱선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무게감 있으면서도 선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다만 그 분위기를 짙은 적색 눈동자가 더 강렬하게 받쳐 주고 있었다.
‘그분이라면 마땅히 충성을 바쳐도 모자람 없는 분이오.’
‘쇠락하는 그렌페르크 제국의 유일한 희망!’
책 속의 구절이 떠오르는 동시에, 머릿속을 가리고 있던 암막이 거두어졌다.
“빌힐름.”
남자는 『태양이 흐르는 강』의 주인공이자, 그렌페르크 제국의 황자였다. 리히튼이 홀로 먹이를 모는 포식자라면 이 남자는 무리를 이끌어 가는 우두머리였다. 어느 쪽이든 마주하는 내 상황이 최악이란 건 달라지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뱉어낸 이름에 침대 옆에 서 있던 복면의 남자가 다시 검을 빼들었다.
“왕녀. 당신이 우리 제국의 상황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능한 제 이름은 입에 담지 마십시오. 당신이 위험해지니까요.”
빌힐름은 남자를 제지시키며 아주 차분한 어조로 내게 경고했고, 동시에 제안했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베아트리체 왕녀.”
“내가 그쪽의 무얼 믿고?”
“우린 이미 리히튼 공작에게 억류된 가신들을 여럿 구한 적 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우리의 보호 아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지요.”
“그 말도 거짓이면?”
“어차피 왕녀의 상황에서는 밑져야 본전일 텐데요. 공작의 잔혹함은 겪어봐서 알 것 아닙니까.”
“당신을 돕다가는 그 잔혹함을 내가 겪게 되겠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를 도와준다고 약속만 한다면, 당장 내일 연회에서 왕녀를 데려갈 생각입니다. 공작의 손이 뻗치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이상했다. 실제 소설에서는 빌힐름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리히튼을 견제하지 않았다. 제국에 피바람이 부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이 더 흘러야 한다. 한데 이런 식의 전개는… 다른 빙의자들의 개입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 아닌가. 머리가 아팠다.
“지금 당장 답을 요구하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충분히 심사숙고해야 할 일임을 알고 있으니까요. 내일 연회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반쯤 열린 테라스의 창문 너머로 몸을 던졌다. 마치 어떤 선택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망설임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때, 침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제 막 사라진 빌힐름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자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나 역시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서 열린 문 쪽을 바라봤다.
“빌힐름의 개새끼들은 경우도, 때도 없이 몰려들기 바쁘지.”
방문자는 다름 아닌 킨이었다. 감정 없이 파리한 얼굴을 확인하자, 기억 한구석 구겨 놓았던 트리비아체에서의 그날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그래, 그때도 저 눈이었지. 킨은 평소 마주해 온 낯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그는 남자가 빌힐름의 사람임을 아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날 회유하려 한 사실 역시 알고 있을 수 있다. 리히튼이 의심할지도 몰라. 나는 본능적으로 베개 아래에서 쥐고 있던 단도를 휘둘렀다.
“큭!”
당황한 복면인이 검을 빼는 것보다 킨의 발길질이 더 빨랐다. 심문도 뭐도 없었다. 킨은 아주 능숙한 움직임으로 남자의 목을 그었다. 분수처럼 튀어 오르는 핏물과 함께 카펫이 붉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내가 찔렀어. 내가 사람을 찔렀다.
“하아, 하아….”
“초보치고는 꽤 강단 있는 결정이었어. 칭찬해 주지, 수잔.”
공교롭지만 전혀 즐겁지 않은 칭찬이다. 정말로, 내가 이 남자를 찌른 거야. 손바닥에 감겨 오던 심장박동은 딱딱하게 굳은 시체를 찔렀던 것과 차원이 다른 감각이었다. 나는 손끝에 생생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아무렇게나 입을 열었다.
“어떻게,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각하의 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으니까.”
킨은 침대 위의 이불을 끌어모아 내 머리와 어깨를 덮었다.
“그게 내 방을 들어온 거랑 무슨 상관인데?”
“쯧. 오늘도 변함없이 멍청하구나, 수잔. 그걸 내가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하다니. 각하께서 습관처럼 하시는 말이 하나 있지. 세상에 잉고르드의 주인을 직접적으로 노릴 만큼 무지한 놈들은 없다고. 그러니 각하에게 초대하지 않은 방문자가 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겠지?”
그들의 진짜 목표는 나였다는 소리다. 베르크네의 말이 맞았다. 사람 찌르는 기술 같은 건 시간 낭비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해서든 쓸모가 생기는구나. 표현하기 힘든 황망함이 전신을 덮쳤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그의 손에 이끌려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킨은 반대편 복도 끝의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구조가 조금 다르다는 것 빼곤 내게 주어졌던 방과 똑같은 크기였다. 그는 나를 가장 안쪽의 침대로 내던졌고, 옆 침대의 이불까지 전부 모아 내 몸을 덮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역시 너는 못 미더워. 내가 방을 지킬 테니 입 닥치고 잠이나 자라.”
“자라고? 여기서?”
“네 임무는 오늘보다 내일이 더 중요해. 밤을 꼬박 새서 일을 그르칠 생각은 아니겠지.”
“말은 참 쉽구나. 누구는 살면서 처음으로 사람을 찔렀는데….”
“이제 그만 받아들이지 그래?”
까칠한 어조와 함께, 킨이 발버둥 치며 일어난 내 몸을 다시 침대 위로 내리눌렀다. 고작 한 뼘의 거리를 두고 우리는 서로를 노려봤다. 늘 봐 오던 신경질적이고 가벼운 얼굴이 아니었다. 음성에도 조롱보다는 진중함이 더 짙게 깔려 있었다.
“전혀,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잖아.”
나는 조용히 숨만 내쉬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지. 트리비아체에서 말이야… 수잔, 너는 이상할 정도로 침착해. 겁을 먹으면 입술을 덜덜 떨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의 일 아닌가? 네게 타인의 죽음이란 이용할 수 있는 것과 이용할 수 없는 것으로 나뉠 뿐이야. 아닌 척해도 내게는 보여. 음습하기로는 베르크네 씨보다 한 수 위로군.”
“함부로 말하지 마. 누구든 절벽에 내몰리면 나처럼 변하기 마련이야.”
“글쎄… 과연 그럴까? 예의 보통 사람 노릇은 그만 둬. 넌 처음부터 우리와 같은 존재였어. 각하께서 그 본능을 일깨워 주셨을 뿐.”
그 말에 갑자기 정수리로 열이 확 뻗쳤다.
“닥쳐,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떠들어? 산수도 제대로 못하는 깡통 머저리가!”
“다 선배의 조언이니 감사하게… 윽!”
쓸데없는 소릴 더 떠들기 전에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인정사정없이 고기 씹듯 물어 버린 탓인지, 킨이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재수 없게 누가 누굴 가르치고 난리야? 킨보다는 뒷골목 떠돌이 개에게 한 수 배우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하… 각하께 주인님, 주인님 거리더니 정말 개새끼 다 됐군.”
“알았으면 좀 꺼져 줘, 킨. 그 수다쟁이 혀를 씹어서 다 녹여 버리기 전에.”
위협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긴 킨이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나는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입가를 쓸었다.
퍽 근래에 알게 된 정보였는데, 잉고르드에서 독에 완전히 감염된 존재는 나와 베르크네밖에 없었다. 잉고르드에서 평생 살아야 하느니 뭐니 떠든 주제에 킨은 독의 정체만 알 뿐 그 힘과 완전히 무관했다. 이는 억지로 입을 맞추거나 내 피를 먹이면 혀와 입천장을 다 녹여 버릴 수 있단 의미였다.
“물에 피라도 타서 먹여야 하나. 그럼 며칠 간은 조용할 텐데.”
내가 처음부터 너희와 같은 존재였다고? 코웃음도 나오지 않는 헛소리였다. 애초에 난 이 소설 속 인물도 아니었어. 책 속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는.
…나는 어떤 사람이었더라? 머릿속의 등불이 훅 꺼지면서 암전이 찾아왔다.
‘됐어. 중요한 일도 아니니 나중에 생각하면 돼.’
피곤해서 그런 거야. 두통이 이는 고민을 포기하고 몸을 구부려 누웠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마치 심해에 잠긴 것처럼. 빌힐름이 날, 아니 베아트리체를 만나러 왔다는 걸 리히튼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왜 찾아와 닦달하지 않는 걸까. 숨어든 빌힐름의 잔당을 심문하기 바빠서? 별일 아니라 여기기 때문에? 나는 개에 불과하니까?
‘제국을 달라면 주고 하늘을 무너뜨리라면 무너뜨리겠어. 대신, 빌힐름을 선택해선 안 돼.’
그럴 리가 없다. 내게 그를 선택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는데. 역시 저 방에 숨어든 자를 고문하느라 바쁜 것일 터였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나는 들려오지 않는 비명을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
“전하.”
벌써 다섯 번째 부름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시녀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반복된 말로 혹여 날 기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여섯 시 십칠 분입니다.”
“네가 뭘 모르는구나. 약속 시간에 맞춰 나가는 일이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데.”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왕녀 전하.”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시간만큼 즐거운 때가 어디 있겠느냐? 이제 곧 나갈 테니 그만 재촉하렴.”
베아트리체 놀이는 생각보다 꽤, 아니 상당히 즐거웠다. 메인 홀에서 날 이십 분 가까이 기다리고 있을 리히튼을 생각하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피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그를 골려 보겠는가. 나는 정확히 삼십 분을 채운 후 몸을 일으켰다. 베일로 얼굴을 가린 만큼 시종의 도움을 받아 걸음을 이어야 했다. 해가 지는 시간대의 호텔은 휘황찬란한 샹들리에로 곳곳이 환했다.
“리히튼!”
아. 공교롭게도, 곧장 그에게 뛰어들 수가 없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눈을 마주치기 어려울 정도로 고고한 신사였던 탓이었다. 가벼운 실내복이나 피 묻은 셔츠만 보아 온 내게 그의 격식 차린 모습은 너무나도 낯선 풍경이었다.
창백한 안색과 그보다 더 하얀 백금발. 더해서 호수 위에 낮게 깔린 안개 같은 눈동자 색이 그를 비현실적으로 돋보이게 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목이 그에게로만 쏠리는 착각이 들었다. 저 아름다운 얼굴로 정적의 가슴에 칼을 꽂겠지. 나는 한 박자 늦게 리히튼의 앞에 섰다.
“아름답군요.”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같은데. 우리는 나란히 호텔의 홀을 걸었다.
“조금 늦었다고 화내는 건 아니겠죠? 미안해요, 조금이라도 더 완벽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애타기는 하더군.”
“어머, 애탔어요? 내가 나오질 않아서?”
“그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날 애타게 만들지. 그걸 알고서 날 괴롭히니, 왕녀는 참으로 고약한 분이십니다.”
진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어투였다. 그러면서 낯간지러운 말은 잘도 하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사람은 누구나 확인받고 싶어 하잖아요. 나의 연인이 내게 진심인지, 나에게 얼마나 안달이 나는지.”
“확인받으면 내면의 욕구라도 충족되는 모양이로군요.”
“마음 한 구석이 아주 풍족해지지요. 아, 나는 이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구나.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구나, 하는 안도감에 말이에요.”
말은 그럴싸해도 못 느낀 지 오래되어, 이제는 헛것처럼 다가오는 감정이었다. 트리비아체에선 이 세상에 적응하기 바빴고, 잉고르드에 온 이후에는 내 몸 하나 간수하기 바빴다. 몸에 독을 품게 된 것으로 모자라 어제는 사람까지 찔렀지. 이런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사랑하기는커녕 받을 날도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홀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점점 늘어났다. 그들 중 대부분은 연회에 참석하는 귀족이라, 하나같이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이었다.
“왕녀의 마음이 일방적이라면?”
대뜸 날 향한 물음에 리히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베일의 촘촘한 틈으로 파고들어, 내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 살폈다.
“당신은 과연 일방적인 사랑에 지쳐 굴복하는 사람일지, 아닐지 궁금하군요.”
“굴복? 포기할 거냐는 물음인가요? 글쎄… 그런 고민은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내게는 영원한 사랑 리히튼이 있으니까?”
“모범 답안이로군.”
“리히튼은요? 리히튼은 일방적인 마음에 굴복하는 남자인가요?”
“물을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내게도 영원한 사랑은 당신밖에 없는데.”
그의 대답은 더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보통 사람은 연인이 있는 이의 옆자리를 탐내지 않죠. 당신도 상대방의 옆자리에 이미 누군가 있다면, 혹은 없더라도 절대 당신의 것이 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포기할 건가요?”
“가져야지. 어떻게 해서든.”
착각이었을까. 리히튼의 음성에는 미세한 한숨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길들여야겠지, 어떻게 해서든 말입니다.”
누가 될지는 몰라도 리히튼의 사랑을 받게 될 여자는 여러모로 피곤해질 게 뻔했다. 피곤한 것으로 끝날까. 어쩌면 지옥으로 추락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잉고르드의 마차는 호텔 앞, 가장 가깝고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들처럼 이러저러한 대화에 바빴던 우리는 마차에 오른 즉시 입을 닫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실내는 숨 막힐 정도로 고요해졌다. 어제 빌힐름이 찾아온 걸 아냐고 물어볼까? 그 생각만 몇 분을 했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긴 고민이었으면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정도였다. 연회가 열리는 크로허츠의 저택은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에서 화려하게 빛났다.
“제가 황자 외에 조심해야 할 사람이 또 있을까요.”
마차에 내린 직후, 꽃향기 그윽한 연회장 입구를 거닐며 속삭였다. 개미조차 듣지 못할 아주 작은 목소리로.
“황자 측 인물들.”
“여인 중에서는요?”
“어차피 내일이면 멀어질 텐데, 무얼 그리 걱정하는 거지?”
“실수하면 안 되니까요.”
“그런 자세로도 충분해. 조심하되 겁먹을 건 없어. 너는 내 연인 자격으로 함께하는 거니까.”
리히튼 잉고르드의 연인이니 마음 편히 있으란 건가. 역시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하늘이 흐릿해진 탓에 리히튼 옆으로 더 바짝 붙어 걸어야 했다. 베일을 쓰면 이런 점이 번거롭다. 그렌페르크 제국에선 보편적인 차림도 아닌 터라, 주변의 시선이 더 노골적이었다.
“리히튼 잉고르드 각하와 베아트리체 아덴로지아 케일 왕녀 전하 입장하십니다!”
우렁찬 외침과 함께 문이 열렸다. 시끌벅적했던 분위기가 잠시나마 조용하게 가라앉는다.
“아.”
귀족들의 연회는 이런 풍경이구나.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는 눈이 아플 만큼 환했고, 이리저리 뒤섞인 향수가 확 풍겨왔다. 구애하는 새처럼 화려하게 치장한 남녀가 곳곳에 즐비했다. 그들이 몸에 건 보석과 천은 평민 입장에서 구경조차 하기 힘든 물건들이었다. 테이블을 장식하는 꽃 역시 온실에서나 구해올 수 있는 값비싼 꽃이다. 주방에 앉아 하녀들과 차만 마셨던 내겐 낯설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당신의 역할을 잊지 마십시오, 왕녀.”
“리히튼을 열렬히 사랑하는 역할 말이죠?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는 동안, 이곳저곳에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으로 인해 오감이 예민해지지 않았다면 절대 알아차릴 수 없을 속삭임이었다.
“케일? 흐응. 설마 남쪽에 있는 그 작은 왕국?”
“한데 얼굴에 큰 흉터라도 있는 걸까요. 베일을 쓰고 계시는군요.”
“왕가의 여성이 바깥 활동에서 베일을 쓰는 건 케일 왕국의 전통이에요. 우리 입장에선 아주 고리타분한 전통이죠. 촌뜨기인 왕녀에겐 또 어떨지 모르겠네.”
“대단하신 리히튼 공작 각하. 이젠 하다하다 외국 여성까지 들이셨군.”
“난 보름에 걸지.”
“너무 안전하게 가시는 거 아니에요, 백작님? 그럼 난 이틀에 걸겠어요.”
베아트리체의 출신이 남쪽에 위치한 작은 왕국이라 그런 걸까. 반응은 호의나 적의보다 무시에 가까웠다. 그래, 이런 느낌이란 말이지. 귀족들은 리히튼을, 아니 그 옆에 선 나를 마치 철창 속 신비의 동물이라도 보는 양 유심히 살폈다. 몇몇은 얇은 베일 속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각하.”
잉고르드 가문은 그렌페르크 제국의 개국공신이면서 제국에서 가장 넓은 땅과 호화로운 재산을 소유한 가문이다. 부, 명예, 권력.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가문인 만큼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렸다. 땅 위에 핀 단 한 송이 꽃에 몰려든 꿀벌들처럼.
“귀하신 분과 인사를 나누어도 될는지요.”
빌힐름 시점에서 서술되는 리히튼은 제국에서 가장 잔혹한 악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어디까지나 정적에게만 보이는 숨겨진 내막에 가까웠다. 『태양이 흐르는 강』 속 연회장에서 묘사되는 리히튼은 늘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인기인이었다. 학살자라는 그의 이명에 상반되게도, 리히튼을 따르는 귀족은 그렌페르크 제국에 널려 있었다. 당장 내 옆에 선 그의 표정만 해도 잉고르드에서와 달리 여유가 흘러 넘쳤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왕녀?”
“물론이죠. 저야말로 리히튼의 친우들과 한시라도 빨리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걸요. 나는 케일 왕국에서 온 베아트리체예요. 따분하게 왕녀 취급할 필욘 없답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의 남자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저는 콜린 가문의 쳄벨입니다. 제국어가 놀랍도록 유창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 정도야 왕족의 기본 소양이죠. 만나서 반가워요, 쳄벨 자작.”
누군가 했더니 그 쳄벨 자작이었다. 내게 서신을 날렸다고 했지. 리히튼이 회수해 갔다던 소식이 그 서신의 마지막 행방이었던 게 기억났다. 리히튼의 옆자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지루했다. 대화의 반은 연회장에 대한 소감이었고, 나머지 반은 뒷담화였다. 그리고 종종 튀어나오는 리히튼을 향한 무한한 찬양까지. 나는 그의 옆에서 인형처럼 서 있기만 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셨을지 상상이 갑니다.”
내 베일을 향한 아쉬운 소리 또한 시도 때도 없이 터졌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베일 아래의 얼굴은 경국지색이 아닌, 시체처럼 창백한 낯의 천박한 하녀인데.
“각하. 잠시 드릴 말씀이….”
“그러지. 왕녀,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예정된 물음에 나는 밝은 미소로 고개를 주억였다.
“물론이에요. 이곳은 화려하고 시끄러워서 혼자 놀기에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네요.”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부르시길.”
가볍게 껴안은 그가 한 늙은 귀족과 함께 자리를 떴다. 리히튼이 사라지자 내 주변은 마치 보이지 않은 벽이라도 세워진 듯 텅 비었다. 물론 줄어든 관심과 달리 은근슬쩍 훑는 시선은 여전했다. 아는 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새로운 세계. 리히튼은 내가 여기서 무얼 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미안한데, 저 적색 머리칼의 여성이 누구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트자, 둥그렇게 모여 한참 웃기 바빴던 귀부인들이 고개를 들었다. 아름답고 청초한 꽃송이들. 똑같은 사람임에도 잉고르드의 고용인들과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였다. 귀부인들은 탐탁잖은 시선으로 내가 가리킨 방향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뿜는, 열화처럼 붉고 뜨거운 적색 머리칼의 여인이 서 있었다. 나는 입술 위로 가려진 얼굴에 대한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 더 밝게 웃어 보였다.
“이곳과는 이질적으로 다른 분위기의 여인이라서요. 보아하니 외국인이라기보다는….”
귀부인들의 눈동자에는 경계가 가득했지만, 다행히 매정하게 등을 돌리진 않았다.
“실례가 될까 싶어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겠네. 왜, 저희 아버지께서 총애하던 귀부인이 저런 분위기였거든요.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한 단색 드레스에, 천장까지 닿을 것 같은 모자 깃까지.”
그다지 대단한 거짓말도 아니었는데 냉랭했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풀렸다.
“어머. 혹시 제가 뭣도 모르고 입방정을 떤 거라면….”
“쟈스민 백작 부인이어요.”
“폐하의 정부죠. 그것도 아주 천박한 뒷골목 땅바닥 출신의.”
리히튼이 준 연회 참석인 리스트 속 묘사와 완벽하게 들어맞는 여자라 했더니, 예상했던 인물이 맞았다. 쟈스민 부인은 우리가 훔쳐보고 있단 것도 모르는 채 옆의 시종을 신경질적으로 밀어냈다.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혹시 황제 폐하의 아이를…?”
내 기억이 맞다면, 쟈스민 백작 부인은 황제의 아이를 갖지 않는다. 이 연회의 주인인 크로허츠 후작의 아이라면 모를까. 그 사건을 빌미로 가문이 폭삭 내려앉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떻게 밝혀졌더라. 크로허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목 뒤의 커다란 반점 때문에 밝혀졌었나?
“다들 쉬쉬하지만 결국 그럴 거라 보고 있죠. 하루 종일 침대에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던데, 아이가 안 생기고 배기겠어요?”
“예의범절 같은 건 하나도 모르는 천박한 여잘 대체 왜 총애하시는지, 참.”
“식탁 앞에선 트림 하느라 바빠, 연회장에선 경박하게 소리 내어 웃느라 바빠. 그 입 안에 든 음식물을 볼 때마다 얼마나 기분이 더럽던지.”
눈치를 살피던 귀부인들이 서서히 목소리를 줄였다. 부채를 팔랑거리는 세기가 이전보다 훨씬 강했다.
“흠흠. 뭐어, 그런 이야기들이 있답니다.”
“어차피 늘 그러했듯, 한 달도 가지 않아 버려지겠지만. 그때는 뱃속의 아이만 불행해지겠지요.”
할 말은 다해 놓고서 이제 와 체면을 차린다. 그래도 마냥 어색했던 분위기는 어느 정도 잠잠해진 상태였다. 그들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던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다 들으라는 의도였다.
“흐음…. 제가 예상했던 것과 좀 다르네요. 크로허츠 후작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것 같은데.”
“네?”
“아니. 확실치는 않아요. 그렌페르크에 오면서 이곳저곳 구경하느라 바빴거든요. 그때 본 남녀를 생각하면 후작과 백작부인이 떠올라서.”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눈을 크게 뜬 귀부인들이 서로에게 눈짓했다. 누구 하나 나서서 진짜냐고 물어보길 바라는 분위기였다. 지어낸 이야기이므로 여기서 더 깊게 파고들면 곤란하다. 나는 화제를 돌리는 척, 진심으로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빌힐름 전하께서 그리도 대단하시다던데, 여러모로 눈엣가시겠어요.”
그에 주위를 살피던 귀부인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입에 담기 위험한 말이면 자제해도 될 텐데, 굳이 속삭이는 친절함이란.
“전하께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시지만, 그분의 최측근들은 다르죠. 황성은 이미 후계자 싸움으로 치열한데….”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낳아 봤자 황제의 아이는 아닐 테니까.
“그러나 심성도 능력도 그분에게 견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옳은 말씀이에요. 빌힐름 전하는 황제가 될 재목이시거든요. 전 모르겠지만, 남편이 그리 말하더라고요.”
“가장 중요한 건 얼굴이 완벽하시다는 점이에요.”
“오호호! 그럼요, 그게 가장 중요하죠!”
빌힐름의 외모를 언급하는 귀부인들의 얼굴에 대낮의 태양이 떴다.
“한데, 아까 케일에도 비슷한 일이 있다고….”
귀를 쫑긋 세운 여인들이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순히 시선을 끌려고 한 소리였는데. 결국 이번에도 있지도 않은 추문을 억지로 지어내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홀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감에 따라 귀부인들이 넘기는 술잔 또한 늘어났다. 어느새 우리는 십년지기라도 된 양 하하호호 웃으며 떠들기에 바빴다. 귀족들의 알고 싶지 않은 사생활들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그러던 중, 테이블 뒤편에 서 카드 게임을 구경하던 그때. 장신의 남자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가면서 몽롱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았다.
“아.”
“어머나, 괜찮으셔요? 예의 없게 사과도 없이 가버릴 건 뭐람.”
“애인에게 차이기라도 했나 보죠.”
여인들이 남자의 흉을 대신 봐주는 동안 나는 허리를 숙여 떨어진 물건을 주웠다. 오래되었지만 관리가 잘된 압화 펜던트였다. 남자의 물건인 듯싶어 주위를 둘러봤으나, 펜던트의 주인은 어느새 저 멀리 나아가 있었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한걸음, 한걸음 옮기기가 이렇게 피곤할 줄이야. 술과 마약, 그리고 단 디저트 속에 파묻혀 있던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정신도 차릴 겸 남자를 따라 자리를 벗어났다. 화려하고 시끄러운 홀과 달리 기나긴 복도에는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몸에 한기가 일 만큼 차갑고 어두운 공간이었다. 한참 동안 샹들리에 아래에 있던 탓일까? 눈앞에 이어지는 길이 유독 더 까맣고 스산했다.
“어젯밤 드린 제의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달빛이 떨어지는 창가 앞에, 내 어깨를 치고 멀어졌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하.’
전신에 흐르는 피가 순식간에 식는다. 이런 뻔한 수법에 걸려들 줄이야. 날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다름 아닌 빌힐름 황자였다.
“누가 들으면 밤 정이라도 든 사이인 줄 알겠네요. 도통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영 모르겠군요. 저는 그저 물건을 떨어뜨리신 것 같아 돌려 드리려 왔답니다.”
나는 방긋 웃으며 붉은 작약이 장신된 펜던트를 보여 줬다.
“본인 물건, 맞죠?”
“예, 맞군요. 감사합니다. 소중한 물건인데 하마터면 영영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생각보다 더 뻔뻔하네. 창틀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빌힐름이 내게서 펜던트를 받아 갔다. 가벼운 움직임이었으나 눈동자는 여전히 내 베일에 고정된 채였다. 너무나도 나직한 시선이라 천을 뚫고 시선이 마주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소중한 물건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되죠. 그럼 전 이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베아트리체 왕녀는 십 년 전 혈우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그래, 처음부터 펜던트가 어디에 떨어져 있든 무시했어야 했다. 아니지. 정신 차리려고 따라 나온 게 화근이라면 애초에 홀에서 주는 대로 받아 마시면 안 됐다. 등을 반쯤 돌린 채 가만히 서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라고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왕녀께서 몸소 말타에 나타나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리히튼은 주도면밀한 남자다. 이미 죽은 여자의 이름을 내게 줬을 리 없다. 그리 생각하자 빌힐름의 발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대국의 후계자이셔서 그런가, 초면에 굉장히 무례하시네요. 제가 어떤 대답을 하길 바라시는 건가요? 눈앞에 있는 베아트리체는 움직이는 시체라고? 아니면, 가짜라고?”
“왕녀.”
“제국은 다 이런 식인가요? 안면도 없는 이가 무례하게 아는 척하지 않나, 멀쩡한 사람을 시체로 만들지 않나!”
“입 닥쳐.”
처음에는 빌힐름에게서 나온 욕지기인가 했다. 하지만 귓가에 들려온 사포처럼 거친 어투와 달리 그의 얼굴은 여전히 진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목 아래로 차가운 쇠붙이가 밀려들어 왔다. 마치 어젯밤처럼.
“감히 저분 앞에서 겁도 없이 날뛰다니. 간사하게 혀 놀리지 말고 네 주제를 알아라.”
격양된 감정에 들들 끓는 목소리였다. 나는 갑작스레 등장한 인물이 바라는 대로, 얌전히 입을 닫아 주었다. 정면에서 마주하는 빌힐름의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카인. 검을 물려라.”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젠장, 주군은 너무 안일하십니다. 고작 하루가 지났는데 벌써 잊으신 겁니까? 이 여자가 젠의 등에 검을 꽂아…!”
“왕녀께서는 이미 부인하셨다. 여기서 더 무례하게 군다면 마땅한 대가를 받아야 할 거다.”
카인. 누구인지 기억났다. 그는 빌힐름에게 충성을 맹세한 호위 기사였다.내 목에 검을 들이민 카인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그 정의롭고 올곧은 빌힐름이 이런 곳에서 함부로 겁박할 리 없지. 그런 것치곤 어젯밤의 일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긴장감 속에서 날 향한 위협이 거두어졌다. 소설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종종 등장했었다. 빌힐름을 향한 과격한 충성심 때문에, 제멋대로 구는 가신이 하나둘 생겨난 탓이다. 카인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잉고르드의 주종 관계에 익숙해진 탓일까. 빌힐름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행동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먼 나라까지 와서 이런 취급을 받게 될 줄은 몰랐네요. 지금 많이 불쾌한 상태인데, 이만 돌아가 봐도 될까요?”
이렇게 위험할 때는 되도록 끝까지 잡아떼야 한다. 그러나 상대는 내 바람만큼 녹록치 않았다.
“불편하셨을 왕녀의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는 국가의 안전과 직결되는 사안입니다. 왕녀의 신분이 확인되면 즉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개소리하고 있네. 어젯밤 날 회유하기 위해 몰래 침실까지 쳐들어왔으면서. 그냥 끌고 가려는 속셈일 게 분명했다.
“고작 그런 걸….”
나는 허공에 멈춘 혀를 조용히 내렸다. 고작 그런 것에, 황자인 네가 움직이냐 물을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하면 이제껏 발뺌한 게 다 헛수고가 되지 않는가. 그러나 이대로 끌려간다면 어떤 꼴을 면할지 짐작하기 어렵다.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졌다. 지금 당장 리히튼에게로 가야 해. 상황은 내 선에서 마무리하기에 너무나 멀리 와 있었다. 나는 급히 몸을 돌렸다.
“이게 어딜…!”
그러나 그것도 금방 실패하고 말았다. 도망치려는 내 팔을 카인이 잡아챈 것이다.
펄럭이는 베일 아래로 살벌한 카인의 시선과 마주쳤다. 팔 근육이 으스러질 것만 같은 지독한 악력이었다.
“…아그레인?”
동시에 빌힐름에게서 넋이 사라진 음성이 들려왔다. 아그레인… 아그레인이 누구 이름이었지? 아아, 그래. 나도 참 머저리다. 세상에 잊을 게 따로 있지, 아그레인은 내가 차지한 몸의 진정한 이름이잖아.
“그럴 리가. 누이가 어째서 리히튼 공작 옆에….”
한데 그 이름을 빌힐름이 어찌 아는 것일까. 진중하면서 견고한 그의 표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복도 등불에 일렁이는 적안은 이미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고작 몇 초 사이에 복도의 공기가 급변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양, 허망한 눈빛의 빌힐름이 내게로 손을 뻗었다.
“읏.”
도망치려 했으나 안 그래도 강한 카인의 악력이 더욱 세졌다. 커다란 빌힐름의 손이 내 얼굴, 아니 베일을 향해 다가올수록 심장박동 소리 또한 커다랗게 귓등을 울렸다. 발끝에서 올라오는 불안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갔다. 이 느낌은 대체 뭐지. 리히튼에게서 느꼈던 감정이 원초적인 본능에 의한 공포라면, 빌힐름은 어쩐지 그 반대의 느낌이었다. 학습된 본능에 의한 공포.
‘제국을 달라면 제국을 주고, 하늘을 무너뜨리라면 하늘을 무너뜨리마. 대신, 빌힐름만은 선택해선 안 돼.’
그때의 그 리히튼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혔다. 처음에는 왜 그런 대중없는 소릴 하나 했다. 만약, 내 몸의 주인인 아그레인이 리히튼 뿐만 아니라 빌힐름과도 관련된 인물이라면? 하지만 그럴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아그레인은 책 속에서 잠깐의 묘사도 없는 먼지 중의 먼지다. 숨겨진 관계는 리히튼만으로 족했다. 흔한 이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동명이인에 불과할 것이다.
“거기까지.”
빌힐름과 나 사이로 끼어든 목소리에 이제 막 베일을 감아쥔 빌힐름의 손이 멈췄다. 『태양이 흐르는 강』의 주인공이라 여기기 힘들던, 이유 모를 욕망과 기대로 물들어 있던 시선이 느리게 이성을 되찾았다. 고막을 터트릴 것 같던 심장 소리가 마법처럼 가라앉기 시작한다. 이윽고 목에 닿았던 검보다 더 차가운 냉기가 내 허리를 끌어 당겼다. 살아생전 이 남자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뒤통수가 아릴 만큼 시린 감촉이었음에도, 급격한 안도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나는 이 안도감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내가 정말 리히튼에게 길들여진 것 같아서.
“설마 이런 음습한 곳에서 왕녀의 베일을 벗기려 할 줄이야. 황자씩이나 되시는 분이 그러셔야겠습니까? 최소한 나라 망신이 되지 않게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팔을 쥐어짜고 있던 힘이 저 멀리 사라졌다. 나는 욱신거리는 팔을 부여잡고 리히튼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리히튼…. 아아, 이제야 오시면 어떡해요? 너무 두려웠어요!”
으득.
카인에게서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를 붙잡고 있던 리히튼의 손이 떨어졌다. 그는 내내 카인에게 붙잡혀 있던 나의 팔을 아주 조심스럽게 잡아 올렸다. 어깨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끔찍하리만치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잠시간 온 세상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숨도 내쉬기 힘든 무거운 침묵 끝에, 내 팔을 내려놓은 리히튼이 말했다.
“설마… 그런 무례를 범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입을 다무시는 겁니까. 제가 아는 빌힐름 전하는 그럴 분이 아니신데 말입니다. 명예와 신뢰를 중시하던 그렌페르크의 황자는 어디로 가신 건지.”
리히튼의 작은 코웃음 소리는 텅 빈 복도에서 유독 크게 들렸다. 글자로만 접하던 둘의 신경전을 코앞에서 구경하는 날이 오다니. 리히튼의 존재감이 워낙 비대한 탓에, 이전까지의 공포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칼로 벼른 듯한 긴장감이 채워졌다.
“무례하시군요. 황자 전하 앞에서 예의를 차리십시오, 공작 각하.”
금방이라도 검을 내뺄 표정이 되어, 카인이 리히튼을 향해 외쳤다. 책을 보면서 늘 생각했었다. 카인은 왜 자꾸 나서서 분위기를 위험하게 만드는가, 하고 말이다. 마치 지금처럼. 그것도 잔악무도의 원천인 리히튼을 눈앞에 두고. 빌힐름은 확실히 호수 같은 포용력의 소유자였다. 카인 같은 자를 내치지 않고 옆에 두는 것을 보면. 하지만 리히튼은 아니다.
“그 눈은 장식인가.”
리히튼은 포용하지 않고 지배하는 남자다. 안 그래도 낮은 음성이 심해로 침전하는 쇳덩이처럼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그는 나를 등 뒤로 밀고 느릿한 움직임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
“빌힐름 전하와 잉고르드 공국의 왕인 내가 대화를 나누는데, 어느 안전이라고 주둥이를 놀리는 거냐. 하긴… 주제파악 못하고 왕녀의 옥체에 손을 댈 정도인데. 대가리가 안 굴러갈 만해.”
“전하께서는 제국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하셨을 뿐입니다.”
“장식이 맞았군.”
그리고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에, 장면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컥!”
카인의 신장은 작지 않다. 그러나 그것도 나나 다른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눈에 띄게 큰 신장을 지닌 리히튼 앞에서는 그조차도 한 뼘 이상 차이가 났다. 그러니까, 리히튼이 기다란 팔로 카인의 목을 움켜쥐는 것쯤은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장식이 맞다고 하니, 가만둘 수 있나. 네 방 장식장에 자랑스레 걸 수 있도록 두 쪽 다 빼 주마. 지금 당장.”
리히튼의 목소리는 저녁 식사 메뉴라도 읊듯 건조하며 무덤덤했다. 카인은 그의 팔목을 붙잡고 발악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리히튼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같은 성인 남자임에도 어떻게 저리 차이날 수 있을까. 심지어 상대는 황자의 호위 기사인데.
“커, 헉.”
“아,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이 정도 마음 씀씀이야 내게는 별 것 아니니.”
창백해지는 카인의 안색이, 마치 지난날의 나를 보듯 처참했다. 미친놈. 베아트리체 연기를 하느라 이틀 간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리히튼은 리히튼이라는 사실을. 제국의 황자 앞에서 그의 호위 기사를 아무렇지 않게 위협하는 존재. 이게 바로 잉고르드 공작의 위치구나. 현시점에서 빌힐름의 세력은 그리 크지 못하다. 소설 속 빌힐름이 왜 그리 고전해야 했는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공작. 그만 하십시오, 카인의 실수는 내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리히튼이 팔을 거두었다. 그를 마주하는 빌힐름은 생각보다 훨씬 차분했다. 상대와 자신의 차이를 마땅히 받아들이는 얼굴이었다.
“쿨럭, 쿨럭….”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군요. 카인, 당장 사죄드려라.”
“하아, 큭…. 죄송합니다, 각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이보다 더 억울할 수 없단 얼굴로, 카인이 허리를 숙였다. 내 팔을 아주 으스러뜨릴 듯 잡더니, 꼴좋네.
“전하. 사과는 제가 아닌 베아트리체 왕녀께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과 함께 리히튼이 반쯤 가리고 서 있던 내 시야에서 완전히 물러섰다.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카인 옆, 빌힐름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왕녀, 정말 죄송합니다.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입 발린 사과 따위는 필요 없어요. 내 베일을 벗기려던 파렴치한 남자들이 어디 한둘이었어야죠. 하아. 됐으니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났으면 해요, 리히튼.”
빌힐름. 『태양이 흐르는 강』을 읽으면서 늘 응원했던 주인공. 수많은 역경을 헤치면서 동료를 모으고, 점차 강해져 가는 그를 진심으로 응원했었다.지금이야 리히튼이 옆에 있으니 매정하게 대한다지만, 앞으로의 전개를 생각하면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곳이 소설 속인 이상 악역이 주인공을 이길 수는 없다. 나는 어쩌면 리히튼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해 봤자 늦었다. 그렇게 리히튼의 팔을 붙잡고, 밤보다 더 어두운 복도를 향해 걸어갈 때였다.
“잠시 멈춰 주십시오, 왕녀.”
다소 급한 감이 느껴지는 빌힐름의 목소리가 내 발목을 잡아챈 것이다.
“염치없는 부탁이란 걸 알지만… 잠깐의 시간을 내주실 수 없습니까?”
등을 돌려 마주한 그의 표정은 속을 가늠키 어려웠다.
“하.”
“당신이 아닌 왕녀에게 물은 겁니다, 공작.”
리히튼도 바로 옆에 있으니, 무슨 볼일인지나 한번 들어볼까. 어차피 베아트리체는 내일부터 없는 인물이니까. 리히튼은 내 판단을 타박하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여 빌힐름의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에도. 품에서 펜던트를 꺼낸 빌힐름이 뚜껑을 열어 내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몇 분 전에 내가 주워서 돌려준 그 압화 펜던트였다.
“오래전 제가 잃어버린 아이입니다. 혈육은 아니나, 친동생 같은 아이지요. 언뜻 확인한 왕녀의 얼굴이 제 아이와 너무도 비슷했습니다. 실례라는 걸 알지만… 왕녀만 괜찮으시다면 베일을 한 번만 올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자그마한 면적 안에 그려진 소녀는 기껏해야 열일곱 즈음 되어 보였다.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칼에 짙은 녹안을 지닌 사랑스러운 아가씨. 설마 이 소녀가 아그레인이라는 건 아니겠지.
“머리 색부터가 다르지 않나요? 나는 금발인데 전하의 소녀는 아주 선명한 갈색 머리칼이군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려앉은 목소리에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진득한 집착이 느껴졌다. 그래 봤자 내 머리카락은 적색인 것을.
“그거 참 웃기네. 내 얼굴을 확인하면 사라진 아가씨가 돌아오기라도 하나요?”
“거절하셔도 됩니다.”
“아니요. 내가 죄인도 아닌데 도망칠 필요 없죠.”
여기서 도망치면 오히려 더 의심스러울 것이다. 허락을 받기 위해 힐끔 리히튼의 얼굴을 훔쳐봤다. 정작 리히튼은 내가 아닌 빌힐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도 기분이 영 좋지 않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면서.
괜찮겠지. 이름도 같고 눈동자 색도 같지만, 머리색이 다르잖아. 설마 나겠어. 그래, 설마. 리히튼으로도 모자라 빌힐름과 엮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에게 접근한 빙의자들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사교계에서 매장되지 않았는가. 나는 지체 없이 베일을 들어 그에게 얼굴을 보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빌힐름을 통해 직접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어떤가요. 자세히 봐도 아그레인이라는 분과 많이 닮은 것 같나요?”
이왕이면 실망한 표정을 지어 주면 안 될까? 그러나 지루한 극단이라도 관람하듯, 빌힐름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리히튼이 아닌 남자에게 민낯을 보여 주는 건 처음이에요. 기분이 참 이상하네.”
붉은 눈동자가 내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뜯어 살핀다. 겨우 얼굴 하나 내보이는 일인데 불안감이 엄습했다. 천적에게 자발적으로 허점을 내보인 기분이 들었다. 이만하면 충분할 것이다. 빌힐름이 더 자세히 훑기 전에 베일을 내렸다. 흐릿한 천의 존재는 안 그래도 어두운 시야에 암막을 덮었다. 빌힐름의 눈빛은 그 암막조차 뚫어 내는 끈질김과, 집요함을 지니고 있었다.
기이하지.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데. 고대했던 존재를 만난 희열도, 고대했던 존재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실망도. 그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데. 그럼에도 빌힐름은 베일의 존재 따위 인지 못한다는 듯 오롯이 나의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다소 거친 숨을 내쉬며 리히튼의 한쪽 팔을 움켜쥐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숨이 턱 막혀 있던 것이다. 리히튼은 순순히 내게 팔을 맡겼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찰나의 적막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왕녀.”
빌힐름의 시선이 리히튼을 쥐고 있는 내 팔로 향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만 더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하지 마세요.”
“왕녀의 손을 한 번만 잡아 봐도 될는지요.”
“싫어요.”
내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그는 나의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서웠다. 빌힐름이 아니라, 그에게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는 내가 무서웠다.
“리히튼.”
이제 그만 가자고 말해 줘,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나는 마지막 구원이라도 된 양 리히튼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장갑 아래의 손가락 사이사이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사랑스러운 나의 베아트리체. 빌힐름 전하께서는 당신에게 이해할 수 없는 미련이 남은 모양입니다.”
그의 반대쪽 손이 내 손등을 덮었다. 천장 아래에서 날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무한한 애정, 안심시키려는 안온함, 거부하기 힘든 위압이 한데 공존했다.
“그대를 새장 밖으로 날아간 애완조처럼 취급하는 것이 내 마음에 들지는 않으나….”
뒷말은 없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언어가 있었다. 내 귓가에 빌힐름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라 명하는 것이 들렸다.
‘왜?’
다시 숨이 거세졌다. 하지만 리히튼은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고, 내게 그를 거부할 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마치 어른의 말을 억지로 뒤따르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신경질적으로 장갑을 벗고 빌힐름을 향해 내밀었다. 그가 나의 손등을 바라본다. 그러나, 바라보는 것으로 끝이었다.
“죄송합니다, 왕녀.”
한 발자국 다가온 빌힐름이 찢어 버릴 기세로 벗겨 놓은 장갑을 가져갔다.
“부디 용서해 주시길. 그렇게까지 질색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달빛보다 창백한 손등이 그의 움직임 아래에서 서서히 모습을 감춘다. 그가 내 손에 장갑을 완벽히 끼우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앞으로는 그렇게 억지로, 꾸역꾸역 역겨움을 참아가며 행동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가, 역겨워 했다고요?”
보란 듯이 미간을 와락 구겼다. 킨도 그렇고, 하나같이 내 속이 훤히 읽힌다는 듯 지껄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거야말로 역겨웠다.
“그런 적 없어요. 걱정은 고맙게 받을게요.”
“누군가를 마냥 경계해야 할 일도 없을 겁니다.”
나는 구겼던 미간을 더 일그러뜨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우리 지금 같은 대화 하고 있는 거 맞나요?”
빌힐름이 싱긋 웃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신뢰를 주는 미소. 책 속 어느 구절에 적혀 있던 묘사 그대로의 웃음이었다.
“곧 다시 뵙겠습니다.”
미안한데 그럴 일 없을 거야. 나는 잉고르드를 벗어날 때까지 잉고르드에만 갇혀서 살 예정이거든.
“아.”
미련 없이 등을 돌렸던 빌힐름이 돌연 걸음을 멈춰 섰다.
“왕녀의 친우가 왕녀를 많이 그리워하더군요. 한 번쯤 만나러 찾아오십시오. 저 역시 환영할 테니.”
레이나. 머리가 물속에 잠긴 듯 멍해졌다. 레이나, 날 배신하지 않았구나. 거짓말하지 않았어. 나와의 약속을 지켰어. 약속을 지켰는데…. 결국 빌힐름은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아니야, 레이나가 내 외양을 알렸다 하더라도 지금 나는 염색까지 했다. 그렇다면 베일을 벗은 뒤에? 고작 길바닥에 널리고 널린 녹안이라는 사실 하나로?
누군가 내 팔을 이끌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린 후 리히튼의 안색을 확인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고 여겨질 정도로, 무덤덤하다 못해 무감각한 얼굴이었다.
“찾아갈 일 없어요.”
내 혀에 담긴 말이었으나 한없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비루한 변명 같지 않은가. 버려지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의 곁에 있는 동안은 오직 그의 명을 따르는 충직한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 그 이유라서야. 리히튼은 배신자를 살려 두지 않으니까.
“절대 없을 거예요.”
한 번 더 못 박듯 말하자 조용히 걸음만 옮기던 리히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수잔.”
어둠의 그림자로 감싸진 복도의 저 끝. 환희와 행복에 젖은 연회의 노란색 빛이 점차 가까워진다.
“우리의 내기를 잊은 건 아니겠지.”
그 한마디가 기점이었다. 이유 모를 불안감으로 쿵쿵 뛰던 심장이 서리 태풍이라도 몰아친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아. 울컥 솟은 화에 입술이 찢기는 이 기이한 기분이란.
‘내기는 내가 널 완벽하게 길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하여.’
내게 장갑을 벗으라고 명령했으면서. 그랬으면서 내게 길들여지지 말라고 조언을 하다니. 수치심에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참 친절하시네요. 덕분에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다시 떠올렸어요. 역시 모든 숙녀가 애타게 욕망하는 대단한 신사다우셔요.”
“쓸데없이 기운 빼며 자극하지 마.”
“자극한 건 당신이잖아요!”
인정한다, 내가 그에게 화낼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쯤. 어쩌면 나는 빌힐름이라는 존재에게서 느꼈던 혼돈을 리히튼에게 풀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조차 초라한 변명일 수도.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했다. 리히튼의 별것 아닌 한마디는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연회장에 가까워지자 은밀한 시선과 함께 복도를 배회하는 연인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서는 리히튼과 나 역시 사랑을 속삭이는 한 쌍의 남녀에 불과했다.
“쉬이.”
주위를 의식한 리히튼이 내 어깨를 감싸고 품 안으로 더 가까이 당겼다.
“황자 때문입니까? 필요 이상으로 흥분했군요. 내가 계속 옆을 지킬 테니 화를 가라앉히시길.”
사랑스러운 연인을 달래는 양, 더없이 상냥하고 차분한 음성이 귓가에 맴돈다. 날 응시하는 표정, 태도, 걸음, 시선, 분위기 그 모든 것이 완벽했다. 지금 눈앞의 그는 완벽하게 날 사랑하는 남자였다. 정말 완벽하게.
“리히튼.”
“말씀하시죠.”
“당신은 연기를 정말 잘해요. 나도 나름 대로 꽤 소질이 있다 여겼는데, 당신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네요.”
그 누가 이자를 카인의 눈알을 도려내려던 남자와 동일시할까. 누가 이자를 트리비아체의 멸문을 주도한 남자로 생각할까. 이럴 때의 그는 다른 사람 같다. 그래, 광증이라고 말한 레이나의 표현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둘 다 나입니다, 베아트리체.”
떠돌이 개를 쫓아서 도망가던 나를 데려왔던 그때. 그때의 리히튼도 마치 지금 같았지. 나를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굴지만 때때로 그마저도 연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그를 장시간 상대할 때는, 몸속의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착각이 들었다.
“둘 모두 당신을 사랑하는 나라고 생각하면, 아주 편해질 겁니다.”
광증. 눈부신 샹들리에 아래로 들어서며, 나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을 수면 위로 꺼냈다.
‘각하께서 제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무슨 일을 하던 중이었더라. 선명하게 떠오르지는 않지만, 여느 날처럼 잠들지 못한 밤이었다. 유령처럼 저택을 떠돌다 우연히 마주친 베르크네에게 대뜸 그런 소리를 털어놨었지. 새벽이었던 탓에 명치 아래로 꽁꽁 숨겨놨던 진심이 술술 기어 나왔다.
‘한참을 고민했는데, 여전히 모르겠어요. 종종 보이는 안광은 다리가 덜덜 떨릴 만큼 두려워요. 어떨 때는 귀족 신사처럼 상냥하시고, 어떨 때는 상종 못할 인간처럼 잔혹하시죠. 그분의 비위를 맞추는 게 힘들고 지치네요.’
‘그런 것치곤 아주 능숙해지지 않았나.’
‘적응한 거죠. 일단 지금 내 삶의 터전은 이곳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먼 곳으로 떠날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베르크네는 나의 상념을 대수롭지 않게 대했다.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대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누구든 그리 생각할 것이라는 듯, 당연하게 여겼다는 의미지.
‘주인님은 미쳤어요.’
나의 진심에 베르크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잉고르드의 광증은 신의 축복이다.’
그러니까,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제 주인이 미쳤음을 인정했다.
‘…라는 말이 제국에 전해지고 있지. 왜인 줄 아나? 그 광증으로 제국와 잉고르드가 무한히 번성했음을, 세상이 인정하기 때문이다.’
신의 축복. 제국의 번성.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래도 수잔. 네가 온 이후로 각하의 광증이 퍽 안정되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부분은 나도 고맙게 여기고 있어.’
그 말을 남기고 베르크네는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속마음을 털어 놓고 싶었던 건 나인데, 오히려 그가 더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의 대화를 상기하면 아직도 우스웠다. 사람이 미친 게 신의 축복이라고? 그건 베르크네 같은 사람이 할 법한 말이 아니었다. 차라리 책 속 세계관의 한계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터였다.
“각하.”
그때였다. 알코올 냄새를 풀풀 풍기며 모여들기 시작한 귀족들 사이를 커다란 남자가 비집고 들어온 것이. 남자는 다름 아닌 킨이었다.
“크로허츠 후작이….”
무슨 일이기에 저리 급하게 달려온 걸까. 나는 잡생각을 떨치고 킨의 입 모양에 정신을 집중했다. 킨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연회의 주인인 크로허츠 후작이 죽었다고.
***
크로허츠 후작이 죽었다.
예정된 전개였느냐고 묻는다면, 최소한 삼 년은 지나야 ‘그럴 수도’라는 대답이 가능할 터였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앞으로의 삼 년. 그 삼 년 동안 『태양이 흐르는 강』에서의 크로허츠 후작은 너무나 무탈했으므로. 따라서 후작의 죽음은 이제껏 겪어 온 원작의 변화 중 단연코 가장 독보적이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간 누구도 이 세상의 주된 흐름을 바꾸지 못했다. 빙의자로 예상되는 자들 모두가 갑작스레 등장했듯, 갑작스레 사라져 갔다. 그런 와중에 크로허츠 후작이 죽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허억…!”
한겨울처럼 차갑고 시린 공기가 폐부를 뚫을 듯 밀려들어 온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두 눈을 번쩍 떴다. 주위는 아주 약간의 빛을 제외하곤 온통 어둠뿐이었다.
“하아, 하아….”
내가 왜 여기 있지? 숨을 고르며 어젯밤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되짚었다. 그래. 이곳은 말타에 있는 크로허츠 후작의 저택이었다. 본래의 일정이라면 호텔로 돌아가 밤을 보내고 잉고르드에 귀성해야 했다. 그러나 나와 리히튼을 비롯해 연회에 참석한 그 누구도 후작성을 떠날 수 없었다. 크로허츠 후작의 죽음이 살인으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물, 물이….”
나는 더듬더듬 벽을 짚고 걸어 테이블 위의 티 포트를 쥐었다. 잉고르드 독에 중독된 이래 이 정도로 깊게 잠든 건 처음이었다. 아니, 잠든 것이 아니라 눈 깜짝할 새 죽었다 깨어난 느낌에 더 가까웠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피가 억지로 혈관을 따라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나는 베아트리체 아덴로지아 케일… 남대륙 케일 왕국의 제 22왕녀. 친모는 폐위, 왕위 쟁탈에서 밀려난, 철딱서니 없는 열아홉 살 여인.”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해 역할을 수없이 되새기며, 꽉 닫혀 있던 침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복도를 건넜다. 현재 후작성에는 연회에 참석한 모든 손님이 잠들어 있다. 내가 할 일은 이 수십, 수백 개의 방 중 리히튼의 방을 찾는 것이었다.
‘사 층의 오른쪽 복도 끝. 오른쪽 방. 잊지 마.’
희미했으나 휴식을 취한 후 방으로 찾아오라던 리히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비록 지금이 새벽이기는 해도 시간 같은 건 내 알 바 아니지. 쉴 만큼 쉬고 찾아오라 한 건 그이지 않는가. 나의 방문이 그의 숙면을 방해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에 걸음이 빨라졌다. 어떠한 방식이어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리히튼이 불쾌했으면 싶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고 싶었다.
“아아.”
그런데 여기가 대체 어디일까. 계단을 오르긴 올랐는데 몇 층을 올랐는지 헷갈렸다. 잠결에 무심코 잉고르드 저택의 구조를 따라 움직였던 탓이다. 주변을 살피다가 곧장 복도 끝의 테라스로 향했다. 창밖의 시야를 통해서 층수를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유리문을 열자 무수한 은하수 아래에서 고요히 잠든 도시가 보였다.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베일을 걷어 올리고 몸을 숙여 테라스 아래를 확인하려 했다. 그래. 그저, 아주 잠깐 걷어 올리고 층수를 세려 한 게 전부인데.
끼익.
문제는 다음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라 그대로 몸을 돌리고 말았다. 동시에 은은한 등불이 내 코앞을 밀고 들어왔다.
“…수잔 양?”
나는 발작하듯 숨을 삼키며 입술을 달싹였다. 남자의 얼굴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계획을 망쳤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회오리치며 탄식을 종용하고 있었다. 지금 내 머리색이 어떻더라. 이마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집어 들었다. 누가 봐도 금색이다. 얼굴은? 손을 내려 더듬더듬 뺨과 입가를 다듬었다. 내 얼굴은, 베일을 쓰지 않은 내 얼굴은 수잔일 수밖에 없잖아. 테라스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등불을 천천히 내렸다.
“수잔 양이 맞군요. 콜린의 쳄벨 자작입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기억나지 않느냐고? 당연히 나지. 고작 몇 시간 전 연회에서 짧은 인사까지 나눈 사이 아닌가. 당혹감에 반쯤 떨리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쳄벨 자작의 얼굴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혼란에 젖어 있었다.
“한데 그 베일과 복장은… 수잔 양이 어찌 왕녀의…?”
이제 막 방에서 나온 듯한 차림의 쳄벨 자작이 한 걸음 더 가까이 섰다. 그와 나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서로가 한 발자국 더 움직이면 코끝이 닿을 간격이었다.
‘오늘 새벽에 그 자작이 선배 앞으로 서신을 보냈지 뭐예요.’
아아. 하필이면. 쳄벨 자작은 하녀인 내게 개인적 용무로 서신까지 보낸 남자였다. 들켜도 내 얼굴을 가장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남자에게 들키다니. 여기서 베일을 내려 봤자 더 수상한 꼴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 서신에 대한 답장이 도작하지 않기에….”
남자의 목소리는 물먹은 종이의 잉크처럼 번져 저 멀리 흩어졌다. 내게는 그의 말을 온전히 담아낼 정신이 없었다. 바라는 건 오직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오늘 일이 그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
“듣고 싶은 말이 많지만, 수잔 양.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공작 각하만큼이나 입이 무겁습니다. 당신만 괜찮다면 일단 처신을 위해 방으로 가서….”
더 길게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나는 입 안쪽 살을 고기 씹듯 강하게 짓이기며, 쳄벨 자작의 손을 다소 우악스레 이끌었다.
“쳄벨.”
“수잔?”
“거부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왔어요.”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아 남자에게 입 맞췄다. 파충류의 비늘에 키스하는 기분이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기도 잠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등불을 쥐지 않은 손으로 내 허리를 휘감았다. 동시에 입 안의 숨이 들끓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벌레 같아. 등줄기를 더듬고 올라오는 손에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내 몸의 온기가 낮아 남자의 살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급히 테라스 위로 등불을 올려놓은 남자가 나를 더 깊숙이 껴안았다. 손가락 끝이 내 허리를 맴돌며 뱀처럼 기어 올라왔다.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내 뒷목이 덜덜 떨었다. 아니야, 멈춰, 제발, 수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마. 사고를 멈추고 머리를 비워. 이건 고작 숨 한 번 쉬면 지나갈 일이잖아.
“큭.”
그래, 지금처럼.
“읏!”
쳄벨 자작이 나의 가슴을 거칠게 밀쳤다. 목을 뒤로 젖힌 그는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며 고통스러워 했다. 무언가 토해 내려 했지만 토해 낼 게 있을 리 없었다. 입 안의 피는 고작 한두 방울에 불과했으나, 지금쯤 남자의 목 안은 살갗이 녹아내려 활활 타오르고 있을 터였다. 왜일까. 힘겨워하는 쳄벨 자작을 보면서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나는 수잔이 아니랍니다, 자작. 당신은 눈을 더 똑바로 뜰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연회에서 분명 내 이름을 말해 줬던 것 같은데… 이리도 사람 서운하게 만들 줄이야.”
나는 멍하니 서서 되는 대로 입을 움직였다.
“게다가 아는 것이라곤 서로의 이름 밖에 없는 사이에, 갑작스레 침실로 초대하면 어쩌나요. 당신은 참 예의가 없군요.”
그리고 비틀거리는 남자의 어깨를 있는 힘껏 밀쳤다. 목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눈도 제대로 못 뜨던 남자였다. 테라스는 내 허벅지의 반을 겨우 가리는 높이였고, 그의 몸은 제대로 된 저항 한번 없이 허무하게 뒤집혔다. 추락하면서도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나뭇가지와 추락한 몸체의 마찰음이 고요한 은하수 아래에서 요란스럽게 퍼졌다. 울창한 이파리가 시야를 방해했기에 떨어진 남자의 상태는 알 수 없다. 기절했는지 어떠한 구호 요청도 없다. 나는 그 사실이 참 다행이라 생각됐다. 불안감에 요동치는 심장박동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아.”
두 번째는 처음보다 쉬웠다. 그러니 아마도, 세 번째는 더 쉽겠지.
“하나, 둘, 셋….”
층을 확인한 후 테라스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있는 곳은 건물의 삼 층. 그렇다면 내가 서 있는 곳 바로 위가 리히튼의 방이겠구나. 지독할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사람을 해하고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한다고? 허무함을 뒤로하고 테라스를 벗어나려던 순간, 불현듯 느껴지는 시선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겨우 성인 남자의 다섯 걸음 폭 너머, 커튼이 펄럭이는 또 다른 테라스에. 그 테라스에, 빌힐름이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던 것이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남자의 눈동자는 트리비아체를 집어삼킨 불씨처럼 까맣고 붉었다. 언제부터? 어둠 속 빌힐름의 얼굴은 흐릿한 선만을 남길 뿐, 모든 것이 모호했다. 가늠되지 않는 그의 표정이 나의 공포심과 회피 욕구를 자극했다. 그래서 도망쳤다. 멀리, 밤보다 캄캄한 복도로. 그 복도 너머의 계단으로. 더 빨리. 더, 더 빨리!
“하아, 하아….”
빌힐름이 서 있던 테라스는 귀빈만이 사용할 수 있는 복도 끝 방의 테라스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 층 복도 끝 방이 리히튼의 것이었으니, 삼 층 복도 끝 방의 주인이 될 사람은 빌힐름 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사 층에 올라서자마자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다. 힘들었다. 어제부터 풀리는 일이 단 한 개도 없었다. 신이 빚다가 내버린 인간도 이보다는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낼 텐데. 내 평생의 불운은 리히튼을 만났던 날 다 쏟아부은 줄 알았다. 하지만 제대로 비워 내기에는 그 양이 한참은 더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
안 그래도 종일 두통에 시달리는데, 스트레스가 몰려오니 자그마한 충격에도 두개골이 깨질 것 같았다. 쳄벨 자작을 삼 층에서 밀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빌힐름 황자가 목격했다.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최악일 수 있지?’
심지어 쳄벨 자작은 리히튼의 최측근이었다. 혹여나 리히튼이 대업을 맡긴 인물이기라도 한다면? …아니야, 길게 생각하지 말자. 나는 해야만 하는 일을 한 거니까.
똑똑.
습관적으로 두드리기는 했으나, 기다림 없이 바로 문을 밀었다. 한시라도 더 빨리 내 죄와 잘못을 덜어 내고 싶었다. 홀로 감당하지 못하여 목구멍 바로 위까지 잠긴 답답함을 없애고 싶었다. 그러나 곧바로 드러난 방 안의 풍경이 너무나 생소해, 직전의 생각은 몽땅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하여, 드리려던 말은.”
사그라지는 유약한 음성과 함께 정확히 내게로 집중되는 시선. 리히튼의 방에는 주인 말고도 다섯 명의 인물이 더 있었다. 왼쪽 의자에 앉은 사람부터 차례로 남자, 남자, 남자, 남자. 그리고 나와 고작 몇 발자국 떨어진 자리에 서 있는 여성까지. 도합 다섯의 낯선 이들.
“…드리려던 말은.”
여인의 금발은 염색으로 만들어진 내 탁한 금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투명했다. 도자기처럼 하얗고 혈색 좋은 피부와 곧은 자세에서 풍기는 우아한 기품. 부러질 듯 얇은 허리, 늦은 밤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외양.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이목구비였으나 어쩐지 기억이 흐릿하다. 찾아올 시간을 잘못 맞춘 건가. 의자에 앉은 리히튼은 극도로 피곤해 보였다. 안 그래도 창백한 낯이 검게 죽어 있을 정도였다.
“중요한 이야기 중이셨나요, 리히튼.”
그렇다고 양해를 구하며 다시 나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케일 왕국의 왕녀이자, 리히튼의 여자인 베아트리체이므로. 당당하게 문을 닫았지만 불청객이 된 듯한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잠시 입을 닫았던 여자가 내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한 글자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읊었다.
“의도치 않게 잠깐 끊겼네요. 드리려던 말은, 각하.”
아아, 이제야 떠올랐다. 내가 여인의 얼굴에서 연상해 낸 인물은 크로허츠 후작이었다.
“제가 각하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저 여인의 정체는, 한때 잉고르드 별관의 손님이었던 에리얼 크로허츠라는 소리다.
“내일 아침 이 일을 모두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발언에 나는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적막한 가운데 웃음소리가 퍼졌고, 곧 에리얼의 고개가 내게로 향했다. 네가 감히 그런 반응을 보이느냐는 눈빛이었기에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해요. 그냥 조금, 웃겨서.”
“왕녀께서는 행태가 너무 가벼우시군요.”
“미안해요. 앞서 말했듯이 조금, 웃겨서.”
말이 곱게 나갈 리 없다. 안 그래도 리히튼에게 전해야 할 말이 산더미인데, 되도 않는 헛소리로 시간을 잡아먹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임신. 리히튼의 아이를 가졌다고?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이 있을 수 있나! 온 혈관에 혈액 대신 독이 흐르고 있는 리히튼이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 내장이 녹아내릴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제국의 귀족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는 않다. 에리얼이 임신을 주장하면 증거는 없더라도 심증은 생길 수 있었다. 그녀의 주장대로 잉고르드의 별관에서 지냈던 시기가 리히튼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실제 에리엘과 리히튼의 관계가 순결하지 않다는 보장도 없지. 그래. 당연한 일이야. 제국의 실세라 불리는 남자인데 그간 얼마나 많은 여자가 스쳐 지나갔겠어. 나는 말라가는 입술을 핥으며 이상하게 뻣뻣해지는 뒷목을 주물렀다. 왜 이럴까.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수잔은 고작 주인이 기르는 개에 불과한데.
“베아트리체.”
리히튼의 부름이었다. 나는 조용히 눈동자만 들어 올려 그와 눈을 맞췄다.
“일이 끝나면 내가 그쪽으로 찾아갈 테니, 방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왕이면 왕녀에게는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군요.”
“…찾아가요? 찾아간다고?”
어디선가 비명이 터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고한 낯으로 내 베일을 훑던 에리얼이, 핏발이 선 눈을 부릅떴다. 손끝으로는 날 가리켰다.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구겨진 얼굴에 그림자가 꼈다.
“각하께서 저 여인을 찾아간다고요? 몸소?”
리히튼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에리얼은 마치 ‘그렇다’라는 소리라도 들은 양 와르르 무너지는 얼굴을 했다.
“너였구나.”
날 향한 손끝이 평정심을 잃고 위아래로 흔들린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런 기분은 전에도 느껴봤어. 레이나가 날 붙잡고 구제를 갈구했던 그때와 똑같았다.
“너였어, 이 교활한 년!”
“킨.”
에리얼이 날 향해 갈퀴처럼 구부린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킨이 뒤에서 나타나 내 앞을 가로막았다. 커다란 등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으나, 송곳처럼 날카로운 외침은 양쪽 귀를 쨍쨍 울렸다.
“저년인가요? 이제는 저 촌뜨기 왕녀를 이용하려 하시는 거예요? 제게 주시던 그 약이 전부 저년에게 가고 있군요! 그렇지요?”
약.
“언성을 낮추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에리얼. 이 저택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저년에게 주느라 더 이상 내 것이 없었던 거야!”
새하얀 손등이 킨의 팔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꼼짝 않는 팔이 제 생명줄이라도 된 것처럼 애처롭게 매달린다. 에리얼의 손톱은 쥐가 파먹기라도 한 듯 흉하게 뜯겨 있었다. 금단현상인가. 그렇다면 여자가 말한 약의 존재는 정황상 잉고르드 독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말로는 물에 희석시킨 리히튼의 혈액.
“내가 그렇게… 그렇게 자존심 다 버려 가며 개처럼 매달렸는데… 비참하게 울었는데….”
미량을 섭취하면 환각, 환청, 마비는 물론 극심한 중독 현상을 일으키는 독. 리히튼이 저 여자에게 독약을 줬구나.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독약을 먹였어. 마치 나에게 그러했듯이.
“…아이가 있다는 건 사실이에요.”
끄윽. 여자가 죽을힘을 다해 숨을 삼키며 읊었다. 마치 죽은 이를 위한 시를 낭송하듯 감정의 무게에 짓눌린 목소리였다.
“잉고르드 별관에서 지냈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해요. 곧 작위를 잇게 될 오라버니는 빌힐름 전하의 손을 놓고 싶어 하시죠. 당신과 나의 결합이 이뤄진다면, 크로허츠 또한….”
“참 안타까운 일이지.”
줄줄 새는 목소리를 리히튼이 틀어막았다. 일말의 안타까움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크로허츠 후작 말입니다. 쾌락에 눈이 먼 딸 때문에 결국 죽음으로 내몰린 것 아닙니까.”
에리얼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창백한 그의 손이 와인 잔을 흔들었다. 이윽고 킨이 천천히 내 앞에서 물러났다.
“아이의 아비는 머른 트리비아체이겠지. 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머른 트리비아체? 각하. 죽은 트리비아체의 장남 말씀하시는 겁니까?”
익숙하고도 반갑지 않은 이름에 절로 어깨가 떨렸다. 머른 트리비아체는 한때 내가 섬겼던 고용주의 큰 도련님이었다. 남자의 물음에 리히튼이 고개를 끄덕였고 사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오직 에리얼만이 연인을 죽인 남자 앞에서 소리 없이 울부짖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끊임없이 고개를 저으며.
“아주 뜨거운 사이였던 것으로 아는데. 그런 것치곤 여름 밤마다 지치지 않고 내 침실을 찾아 왔지만.”
리히튼의 시선이 짧게나마 나를 향했다. 온몸을 옭아매는 분위기라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아니면, 가련한 에리얼 양. 그 한 몸 바쳐 죽은 연인의 복수를 대신하려던 생각이었나? 안타깝군. 내가 단 한 번도 응하지 않은 탓에 모든 기회가 날아가 버렸으니.”
“아아악! 이 살인마!”
달려 나간 킨이 앞으로 튕겨 나가려는 에리얼의 몸을 붙잡았다.
“머른은 그렇게 죽을 남자가 아니었어! 그렇게, 그렇게 대역죄인 취급받으며 산 채로 태워질 남자가 아니었단 말이야…. 우리는, 우리는 향나무 아래에서 평생을 약속한 사이였는데… 네가.”
“많고 많은 자들 중 후작의 딸이 그런 소리를 하니 우습군. 당신의 친부가 어디서 무얼 하고 다녔는지는 압니까?”
“입 닥쳐어!”
욕지기를 내뱉기 무섭게 에리얼이 몸을 벌벌 떨며 발작했다. 안 그래도 성하지 못한 손톱으로 쉴 새 없이 바닥을 긁었다. 나는 차마 그 꼴을 더 보지 못해 고개를 돌렸다. 속 깊숙한 곳에서 기분 나쁜 응어리가 울렁였다. 차라리 삼 층에서 떨어진 쳄벨 자작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덜 역겨울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에요! 아니에요, 각하… 머른은 제게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 나에게는 약이 필요해요. 나는 그저….”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밑바닥의 밑바닥. 그 끝을 확인하는 게 이런 기분이라니.
“야, 약이 필요해요….”
와인 잔을 비운 리히튼이 무감각한 어조로 물었다.
“후작을 죽였습니까?”
허억, 허억. 에리얼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후작을 죽였습니까, 에리얼.”
아마 그녀는 끝까지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혹은 자신이 초래한 결과가 무엇인지 뒤늦게 깨달았거나.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 못 하며, 에리얼이 느리게 고개를 주억였다.
“말 잘 듣는 아이는 상을 받아 마땅하지.”
리히튼이 옷깃 안에서 자그마한 유리병을 꺼냈다. 내 눈에는 한없이 익숙한 물건이었다. 리히튼의 집무실에는 저것과 똑같은 크기의 유리병이 수십 개 장식되어 있었다. 킨이 그로부터 유리병을 받아 에리얼에게 건넸다. 허겁지겁 일어난 에리얼은 마치 잃어버린 자식을 되찾은 어미처럼 보였다. 그녀는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유리병을 소중하게 껴안았다.
이런 식이구나. 이런 식이었어. 리히튼은 이런 식으로 제국을 손에 넣은 거구나. 목 안쪽이 빠짝 말랐다. 에리얼이 느끼고 있을 무력감은 지척에 선 내게로 전달됐다. 리히튼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때 그 공포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살아남기 위해서 리히튼의 발밑으로 기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 공포가.
“킨. 에리얼 양을 침실로 모셔다 드려라.”
에리얼이 킨의 부축을 거부하고 아이처럼 고개를 저었다.
“내일, 내일 말할 거예요. 내 아이가 각하의 아이라고 모두에게….”
“아까부터 계속 이해 못할 소릴 하는군. 설마 당신의 아이가 그 썩은 몸뚱어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예?”
리히튼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얼굴로 손을 저었다.
“아, 아니야.”
그 간결한 손짓에 방 안에 모여 있던 모든 손님이 걸음을 옮긴 건 물론이요, 킨 또한 억지로 에리얼의 몸을 일으켰다.
“아니야! 아, 아니야! 각하,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킨의 두꺼운 손이 에리얼의 입과 턱을 틀어막았다. 천장을 울리던 고성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여인은 짐짝처럼 질질 끌려가 방 안에서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양손은 유리병을 소중히 감싸고 있었다.
“수잔.”
그리고 방에는 마침내 그와 나만이 남았다.
“이리로.”
날 부르는 리히튼의 음성에는 새벽을 지새운 노곤함과 약간의 신경질이 묻어났다. 그래, 지쳤겠지. 피곤하겠지. 하지만 오늘은 나도 지칠 대로 지쳤어. 몸도, 마음도, 머리도 허용 이상 범위의 너무 많은 일을 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 고립된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지 않고 문 앞에 선 그대로 용건을 전달했다.
“쳄벨 자작에게 제 얼굴을 들켰어요. 그대로 삼층 밖으로 밀어 버렸는데, 그 장면을 빌힐름 황자가 본 것 같아요.”
그리고 들려온 것은.
“금방 발견될 거다. 저택 안팎으로 경비가 삼엄한 상태니까.”
너무나, 너무나 허무할 정도로 무덤덤한 음성이었다. 왜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거지? 나의 부주의로 당신의 측근을 해쳤는데. 그 광경을 당신의 정적에게 들키기까지 했는데!
“주인님.”
에리얼 크로허츠에게는 그렇게 악랄하고 매정했으면서.
“그 아이는, 정말 주인님의 아이가 아닌가요?”
겁이 났다. 그녀와 똑같이, 내다 버린 쓰레기 취급을 받을까 봐. 그런 마음에서 기인한 걸까? 리히튼에게 직접 아니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나의 가치를 확인받고 싶었다. 잠시간 말이 없던 그는 한숨을 내뱉듯 낮게 읊조렸다.
“수잔. 설마 네가 그렇게 멍청한 질문을 할 줄이야.”
의자에 깊게 기대고 있던 장신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커다란 보폭으로 걸음을 옮겨 내 앞에 섰다. 황금으로 조각된 액자 속 한 폭의 그림 같은 남자가 오롯이 나를 향했다.
“내게 몸을 맡기고 사지가 멀쩡할 수 있는 자는 너뿐이다. 다른 이라면 고통에 몸부림치며 천천히 죽어 가겠지.”
이미 알고 있는 바였으나, 그 사실을 리히튼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알면서 왜 물었느냐는 질의에 현명하게 답할 자신이 없었던 탓이다. 말없이 올려다보기만을 몇 초. 리히튼은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것처럼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못 믿겠나? 원한다면 지금 당장 확인시켜 줄 수도 있어.”
돌연 이로 짓이겨 놨던 뺨 안쪽 살이 시큰해졌다. 방금까지 아무런 기별도 없었는데, 바늘로 찌르기라도 한 양 너무나 갑자기. 그의 눈동자가 내 눈보다 살짝 더 아래로 향했다. 나는 그의 눈길이 어디로 떨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혀 안에 맴돌던 쓸모없는 말을 내뱉었다. 가슴께가 미동도 없이 바짝 얼어 입술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이런 식으로 다른 여인들을 이용했군요. 에리얼 크로허츠에게 그런 것처럼.”
뱉은 말을 다시 입 안에 쑤셔 넣고 싶을 만큼 후회되는 물음이었다. 눈꺼풀을 가만히 내리깐 리히튼에게선 고요하고 차분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그는 내 물음을 진지하게 되새기기라도 하듯 단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신장이 워낙 컸기에 미려한 속눈썹 한 올 한 올이 전부 시야로 들어찼다.
“필요하다면.”
이윽고 리히튼은 내 베일을 걷어 냈다. 한 박자 늦게 마주한 시선에, 한 박자 늦게 선명한 감정이 깃들었다.
“마치 변명해야 할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얼굴이로군.”
그 감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표현하기 힘든 감정의 발현으로 인해, 리히튼의 낯에는 보기 드문 생기가 돌았다. 표정이라고는 기껏해야 경멸, 비웃음, 고단함 수준에서 머물렀던 그다. 그나마도 평소에는 눈꺼풀의 깜빡임 외에 얼굴의 그 어떤 부위도 꼼짝 않는 일이 과반수였다.
살아 숨 쉬는 리히튼이라니. 이 어찌 생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베일을 내 머리 뒤로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넘겼다. 할 일을 잃은 손은 자연스레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변명하게 만들어 놓고선 그대로 입을 닫는 건가?”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리히튼의 눈동자 속에는 붉은 등불이 춤추듯 일렁이고 있었다. 까만 잉크가 세상에 드리우고 오직 그 눈동자 속의 빛만 깜빡깜빡 점멸했다. 리히튼에게 묻고 싶은 말은 언제나 부족함 없이 입 안을 맴돈다. 이 남자는 왜 나를 악귀라 칭하는가. 이 남자에게 나는 어떤 의미인가. 이 남자는 나의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주인님.”
십 년 만에 입을 처음 열기라도 한 듯 목소리 끝이 흉하게 갈라졌다. 이런 기회는 흔히 찾아오지 않는다. 나는 당장의 불안을 잠식시키고 싶었다.
“혹시 제가 끔찍하신가요? 저를 증오하세요?”
그렇지 않다면 남자가 나를 악귀라 칭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직전까지만 해도 혈기가 느껴지던 리히튼의 낯은 다시 평소의 냉랭함을 안고 있었다. 그 온도차가 너무나 커, 마치 내가 보았던 광경이 허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사람이 사람을 잊지 못할 때는 오직 두 가지 이유밖에 없어요. 미친 듯이 사랑하거나, 미친 듯이 증오하거나.”
상상만으로도 숨구멍이 턱 막히는 감정이다. 같은 의미에서 나 역시 평생 리히튼을 잊지 못할 터였다.
“아니, 셋이겠네요. 둘 다일 수도 있으니.”
“그 셋 중에서도 하필 증오라. 내가 널 미친 듯이 사랑해서라 여기지는 않는 건가.”
“주인님의 사랑은 가학을 의미하나요. 그렇다면 확실히 절 사랑하고 계신 게 맞겠어요.”
고작 한 걸음 간격으로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얼음 꽃이라도 핀 것처럼 어둡고 푸르렀다.
“불안해 하는군. 아니면 두려운 건가, 내 증오의 주인이 되는 것이.”
“저는….”
“어젯밤에도 말했듯이, 수잔. 나에게 길들여지면 내기는 지는 거다.”
그럴 리 없겠지만, 리히튼은 내가 자신에게 길들여지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려진 걸까, 아니면 당시의 내가 너무나도 순진했던 걸까. 당장 눈앞에서 내 속을 훤히 내다보는 리히튼과 그때의 내기를 종용하던 리히튼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날의 위태롭던 리히튼 잉고르드는 혹시 조작된 기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 남자는 늘 그래 왔었으니까. 어쩌면 그때부터 난 리히튼의 손바닥 위에서 의미 없는 몸부림을 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에게 엄청난 의미를 지닌 여인이라 착각하며.
‘아니야, 그만하자. 더는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지 마.’
남자는 내가 너무 많은 생각과 부질없는 고민에 빠지도록 만든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추측에 불과한 것인데.
“또 하나 간과한 것.”
조용히 팔을 든 리히튼이 베일 옆으로 힘없이 흘러내린 내 옆머리를 귀 뒤로 천천히 넘겼다.
“사랑은 시간 앞에서 한낱 모래성에 불과하지만, 고통과 증오는 열화에도 녹지 않는 만년설과 같아. 잊히고 무던해지기는커녕 더 차갑게 얼어붙어. 절대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써 내가 나임을 오롯이 느끼도록 하지.”
리히튼은 내가 모르는 내 안의 더 깊은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남긴 이가 바로 너라고. 그는 자신의 노골적인 감정을 숨길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 곧이어 차가운 손끝이 귓가에 닿았다. 얇은 피부막 위로 그의 심장박동이 전달된다. 살아 움직이는 게 놀랍다 여겨질 정도로 정적이고 고요한 소리였다.
“내게 널 증오하느냐고 물었나? 정확해. 수잔, 너는 날 벗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몰아넣었고, 평생을 후회하게 만들었으며, 그럼에도 절대 포기하지 못 하도록 만들었다.”
거짓말.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고? 장난감 취급을 받고 있다고 여기니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기만하는 것처럼 들렸다. 얇게 뜬 청회색 눈동자가 내 얼굴 곳곳을 파먹을 기세로 훑는다. 단순히 귓가에 머물던 그의 손은 떨어질 생각 않고 내 귓바퀴를 부드럽게 쓸었다.
쳄벨 자작과 맞닿았던 순간의 기억은 한 줄기 연기가 되어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이건 마냥 역겹고 불결한 감각이 아니다. 그랬기에 모든 신경이 리히튼과 닿아 있는 귓가로 향했다. 꼼짝 없이 굳어 있는 와중에도 내 입술은 본능적으로 열렸다.
“내가 당신에게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거죠?”
“궁금하다면 스스로 깨달아라. 그 정도의 수고는 해야 내가 보람이 있을 테니.”
“이건 불공정해요, 주인님.”
그의 손은 어느새 귀를 따라 내려와 턱 아래를 쥐고 있었다. 정신이 온통 그의 움직임으로 향해 있었기에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은 원래 불공정해. 그건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아.”
“당신은 나를 잉고르드에 가두었어요.”
“그래야만 했으니까.”
“내가 벗어나지 못하도록 끔찍한 족쇄에 묶어놓고, 당신을 평생 증오하게 만들었죠.”
“나쁘지 않군. 네 말대로라면 너는 영원히 날 잊지 못할 테니.”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답답함에 뭐라도 잡아서 내던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킨이었다면 소리 지르며 덤벼들었을 테고, 베르크네였다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어떻게 해서든 입을 열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히튼은 아니다.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주제파악 못하고 소리치는 일이 전부다. 나는 그의 깊이를 가늠 못 할 어둡고 잔잔한 수면이 항상 두려웠다.
“불안해 하지 마, 수잔.”
턱에서 떨어진 손이 내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악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눈길 역시 늑대를 총으로 쏴 죽인 그날처럼 평온할 뿐이다. …아. 나는 이 순간을 기억한다. 마치 한번 경험한 것처럼 익숙하나 그만큼 혼란스러운 느낌. 그래, 이건 기시감이었다.
“걱정하지 마. 나의 증오는 죽을 때까지 너만 향할 테니까.”
그가 내 목덜미를 잡아채는 이 장면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 책 속이 아닌 분명한 현실에서. 나는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칠흑의 세계로 잠식했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침실로 돌아와 있었다. 지난 새벽의 일을 상기하기에는 두통이 극심했다. 나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종을 울려 시녀를 불렀다. 그리고 준비를 마치자마자, 리히튼은 기다렸다는 듯 나를 이끌고 마차에 올랐다.
범인을 반드시 잡겠다며 호언장담했던 것과 달리 후작가는 이른 오전부터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린 즉시 연회에 참석한 모든 귀족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화려한 사륜마차 수십 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작가를 벗어났으며, 그 대열에는 잉고르드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오직 소수의 친족만이 저택에 남아 후작의 마지막을 애도했다. 크로허츠 가문이 후작의 죽음을 타살이 아닌 자살이라 번복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말타에 들어섭니다, 각하, 왕녀 전하.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시종을 보내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리히튼도 잠든 것 같으니 이대로 잉고르드까지 가지.”
그림자 진 도시의 애환을 지나치는 동안 리히튼은 내내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가 바란 결과일진대 딱히 만족스러움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바퀴는 느리게 돌아갔고, 나는 마차에 비친 탁한 금발을 응시하며 의문에 잠겼다. 그래서 결국 리히튼은 내게 어떤 역할을 기대했던 걸까. 단순히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지닌 연회의 동행자? 그것으로 끝?
어느 순간 마차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종이 당긴 문틈으로 말안장에 올라탄 크로허츠 가문의 기사가 보였다.
“실례합니다. 왕녀 전하, 물건을 놓고 가셨습니다.”
기사는 적색 벨벳 천으로 곱게 감싼 물건을 내밀었고, 내가 받아든 즉시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고 마차가 다시 움직일 동안, 리히튼은 단 한번도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깊게 잠든 것처럼 보여도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예리하게 열려 있을 터였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 붉은 벨벳 천을 조심스레 펼쳤다. 안에는 손바닥 크기의 보석함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 어디에 떨어뜨렸나 했더니.”
행여나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오지는 않을까, 리히튼의 낯을 살피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보석함에는 보석으로 보이는 그 어떤 물건도 놓여 있지 않았다. 다만 사각 메모지 옆으로 다소 익숙한 형태의 압화 펜던트가 뉘여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열린 압화 펜던트 안에 그려진 짙은 녹안의 소녀. 초상화의 귀퉁이에는 소녀의 이름이 아주 자그마한 필기체로 쓰여 있었다.
<아그레인 캐롤드>
그것과 동일한 필체의 글씨가 옆에 꽂힌 사각 메모지에도 적혀 있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누이. 언젠가 나의 도움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하며, 곧 다시 만나기를.>
빌힐름.
심장이 멎었다. 나는 멈춘 심장을 억지로 흔들어 깨우고, 조용히 보석함을 닫았다. 긴 시간 숨을 참고 있었던 건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펜던트에 그려져 있던 소녀의 얼굴이 망막에 잔상처럼 남아 수없이 맴돌았다. 빌힐름이 긴 시간 찾아 헤맸던 사촌 누이. 머리 색은 달라도 나와 같은 이름, 같은 녹안을 지닌 사촌 누이. 차분했던 머릿속에 태풍이 몰아쳤다. 리히튼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으며, 고요한 마차 안에서는 오직 내 숨소리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