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2. 메어리 (3/24)

Episode 2. 메어리

하녀의 일과는 특별한 일정이 생기지 않는 이상 늘 똑같다.

새벽 다섯 시 삼십 분에 기상해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고용인들과 아침 식사를 한 후 고용주의 기상을 돕는 것이 첫 번째 일이다. 그렇게 영주, 귀부인, 가문의 자제들이 모두 기상해 침실을 비우면 하녀의 오전 일과가 시작된다. 침실의 침구, 방 정리를 비롯해 로비 청소, 응접실 청소 등 맡은 바에 따라 착실히 일하다 보면 어느새 정오가 가까워졌다.

고용주가 점심 식사를 마친 낮에는 하녀들 또한 천국 같은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들의 봉급은 서민 입장에선 꽤 후한 편이며, 지체 높은 가문일수록 대우가 좋았다. 또 그러한 가문은 대체로 연줄을 통해 사람을 구했다. 특히나 잉고르드처럼 그렌페르크 제국의 내로라하는 가문이라면 더더욱.

“메어리? 네게 주어진 일은 우리 업무 중에서도 가장 쉽고 간편하단다. 처음에는 이 일만 하다가, 익숙해지면 추가 일거리를 배분할 거야. 당연히 네 봉급도 그에 걸맞게 오르겠지.”

“네, 네.”

한데 그런 잉고르드에 내가 들어오게 되다니!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잉고르드의 하녀장, 콜렌토 부인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제국 변방의 자작 가문과는 비교도 안 될 거대한 저택, 화려한 내부. 그 모든 것을 이루는 휘황찬란한 자태에 벌써부터 입이 바짝 탔다. 같은 귀족 가문이어도 부의 크기가 이렇게 차이날 수 있다니. 과연 나 같은 초라한 아이가 발을 들여도 되는 걸까.

“함께 일하게 될 파트너는 수잔이야. 너보다 넉 달 일찍 들어온 하녀지. 모난 데 없이 유연한 성정이니 친해지기 쉬울 거란다. 되도록 많이 물어서 이것저것 빨리 배우렴.”

“네.”

“아, 그리고….”

수잔이라니, 이름부터 상냥함이 물씬 풍긴다. 하루빨리 잉고르드에 적응해서 고향 친구들에게 자랑해야지! 나는 귀를 활짝 열고 모든 조언을 받아들일 자세로 콜렌토 부인을 응시했다.

“수잔은 우리와 조금 다른 위치이니…. 적당히 눈치를 보는 게 네게도 이로울 거다.”

“무슨 말이죠? 조금 다른 위치라니요?”

“함께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그럼, 수고하도록 해.”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이기라도 한 건가.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지만, 대개 하녀보다는 시녀 일을 한다고 들었다. 그럼 눈치를 봐야 하는 이유가 뭘까. 콜렌토 부인의 마지막 말이 신경 쓰여 곧장 일을 돕기로 약속한 침실에 들어가지 못했다. 차라리 신경을 완전히 끄자, 메어리. 몰락한 귀족 가문이면 뭐 어때? 지금은 같은 하녀 신분인데! 나는 용기 있게 침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적발의 여인에게로 달려가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함께 일하게 된 메어리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사람 관계에서 첫인상만큼 중요한 게 또 없다고 했어. 한데 내가 너무 갑작스레, 또 시끄럽게 인사한 탓일까?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들려왔다.

“아. 네가 레이나를 대신해 들어왔다던 그 애구나. 잘 지내보자, 난 수잔이야.”

귀가 간지러울 만큼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에 나는 불안했던 마음을 잠식시키며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네. 잘 부탁드려요, 수잔 선배.”

“선배? 여기서는 그런 징그러운 호칭 안 써. 그냥 수잔이라고 불러.”

“그, 그런가요? 바로는 힘들 것 같은데…. 그럼 익숙해질 때까지만 선배라고 부를게요.”

편한 대로 하라는 듯 작게 웃은 수잔 선배가 날 등지고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조금, 아니 상당히 묘한 분위기를 가진 여성으로, 눈에 띄게 고운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구겨진 여름용 베개를 펴는 선배의 얼굴을 조금 멍해진 기분으로 쳐다봤다.

수잔 선배의 피부는 하얗다 못해 생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창백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숨이 끊긴 시체처럼 보일 것 같았다. 으음. 시체는 너무 적나라한 표현이니 인형으로 바꾸자. 장인이 만들어낸, 생명체의 활기가 느껴지는 대리석 조각. 이 정도면 꽤 그럴싸한 묘사일 거라 확신했다. 그녀를 인형으로 비교하는 이유는 단순히 차갑고 비인간적인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피부색과 대비되는 강렬한 적발도 적발이지만, 눈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컸다. 선명한 녹색 눈동자가 잘 닦인 유리구슬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막상 침구 정리를 도우며 마주한 수잔 선배의 눈은…. 뭐랄까, 마냥 녹색이라 하기에는 오묘한 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수잔 선배. 선배처럼 눈동자 색이 특이한 사람은 처음 봐요.”

태양빛을 받은 그녀의 눈동자는 녹색보다 녹회색에 가까웠다. 이상하지. 그 주위의 흰자는 깨끗하지 않고 다소 얼룩덜룩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마치 안개에 가려진 수풀처럼 몽롱하고 기이한 빛깔로. 가만히 살펴보니 눈 깜빡이는 횟수도 보통 사람들과 비교해 현저히 적었다. 이 선배, 진짜 사람 맞아? 알고 보면 뱀파이어 같은 게 아닐까?

“괴물 같지는 않고? 나는 보기 흉해서 거울 볼 때마다 눈을 못 마주치겠더라.”

“괴물이요? 세상에 그렇게 예쁜 눈을 지닌 괴물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깜짝 놀라 반문하자 선배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예의상 웃어 주는 기분이 드는 걸 보면 아무래도 건들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든 모양이었다.

“그 사람이 들으면 무슨 반응일지 궁금하네.”

선배가 말하는 그 사람은 누구일까. 침구가 다 정리된 후, 전체적으로 방의 상태를 다시 확인한 선배가 내게 입을 열었다.

“메어리. 저택 구조는 다 알고 있니? 우선 이 방은 리히튼 공작 각하의 침실이야.”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나는 깜짝 놀라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여, 여기가요? 죄송해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어쩐지 믿기지 않게 고풍스럽다고 했어. 벽지, 바닥에 깔린 카펫, 의자, 액자 할 것 없이 전부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세가 죽는 최상급이다. 특히 천장에 수놓인 벽화는 한참을 서서 감상해야 할 정도로 섬세하고 고고했다. 전에 일하던 저택에서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각하의 침실과 집무실은… 웬만하면 나 혼자 청소하게 될 거야. 너는 그동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쪽 삼 층 방을 치우면 돼. 아마 서른 개 조금 안 될걸.”

“혹시 이유가 있나요? 공작 각하와 관련된 사항들은 숙지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이유? 이유라….”

잉고르드 저택의 장점은 모실 고용주가 공작밖에 없다는 점이다. 어차피 나 같은 말단 하녀야 그분을 직접적으로 도울 일은 없겠으나, 고용된 입장에서 고용주의 눈치를 살피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의 악명은 변방 촌구석에서 자란 내게도 익숙할 정도였다. 눈에 잘못 들어 봉변당하는 것보다 알아서 대처하는 게 좋을 것이다. 긴장하며 기다렸던 것과 달리, 짧은 고민 끝에 보인 수잔 선배의 반응은 이가 시릴 만큼 싸늘했다.

“그런 거 없어. 단순한 고집이야.”

고, 고집? 공작 각하를 그런 식으로 폄하하다니…. 과연 제국 전역에 악명을 떨치는 리히튼 공작도 팔은 안으로 굽는 걸까. 어쩌면 저택의 고용인들과는 퍽 부드러운 사이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어쩌면.

“그, 그럼 다른 조언해 주실 만한 사항은 없나요?”

마지막으로 기울어진 탁자 시계를 바로 한 선배가 무뚝뚝한 얼굴로 날 돌아봤다.

“메어리. 너 혹시 첩자니?”

첩자? 절대 아니라고 외치려 했으나, 덜컥 겁이 난 탓인지 목구멍이 막혔다. 내 얼굴을 훑던 수잔 선배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 아니면 됐어. 여기서 잘 생활할 수 있을 거야.”

“저 처, 처, 첩자 아, 아니에요.”

“그럼 다행이고.”

진짜 아닌데. 내가 콜렌토 부인을 통해 낙하산으로 들어와서 그런 의심을 받는 건지도 몰라. 첫인상이 최악으로 박힌 건가 싶어, 시무룩해진 기분으로 반쯤 쫓겨나듯 각하의 침실을 나왔다.

다행히도 이곳에서의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수월했다. 수잔 선배에게 저택 구조 및 청소 일과를 배운 후에는 점심식사를 위해 일 층으로 내려갔다. 빵을 뜯으며 친한 척 좀 하려고 했는데, 선배는 볼 일이 있다는 말과 함께 식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다른 고용인들의 반응을 보니 끼니를 자주 거르는 듯했다.

“잉고르드는 고명한 귀족 가문답게 기사들도 하나같이 훤칠하네요.”

식탁 옆 너른 창문 너머로 키 큰 청년들이 담소 나누기에 바쁘다. 갑주를 걸치지는 않았으나 단단한 풍채와 분위기만으로도 기사임이 분명해 보였다.

“뭐, 그런 감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하지?”

그중에서도 특히나 눈에 띄는 남자가 있었으니, 수잔 선배보다 더 밝은 적발에 진하고 선명한 인상을 지닌 기사였다. 고풍스러운 대리석 조각처럼 생겼네.

“저분은 누구신가요?”

“저분?”

“저어기, 적발에 키가 크신 기사님이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콜렌토 부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 킨 경을 말하는 거구나. 너도 알다시피 잉고르드의 검은매 기사단을 지휘하는 기사 단장은 각하이시고… 킨 경은 부기사단장쯤 되지.”

“네? 말도 안 되게 젊어 보이시는데, 그게 가능해요?”

“뭐, 확실히 능력 있기는 해. 능력은.”

누가 들어도 오직 능력만 있다는 투였다. 젊은 나이에 부기사단장이 될 만큼 능력 있고 훤칠한 키에 남부러울 것 없는 외모라. 멍하니 킨 경을 쳐다보고 있자, 옆으로 다가온 하녀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저래 보여도 사람 머리를 사과 따듯 떨어뜨리는 남자야. 너무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을걸. 아니면 어린 나이에는 위험한 남자에 더 끌리려나?”

너무 비현실적인 설명이라 그런지 반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박한 평가치고 매섭게 느껴지지 않는 인상이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으로 수잔 선배가 나타났다. 양손에는 구정물이 든 양동이를 들고 있었는데, 어쩐지 날이 바짝 선 사나운 분위기였다.

‘혼자 다른 방 청소라도 하신 건가?’

킨 경과 대화를 나누던 선배는 말이 오가는 내내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아 보였다. 그리고는 무언가 잘 풀리지 않았는지, 내려놓았던 양동이의 물을 킨 경에게 그대로 부어 버렸다. …물?

“어머.”

딱 봐도 구정물인데! 수잔 선배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기사를 뒤로하고서 아무렇지 않게 저택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킨 경의 시선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황급히 딴짓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사이기에 저렇게나 살벌한 거람. 수잔 선배가 걸음을 옮긴 곳은 이제 막 식사가 끝나가는 이곳, 주방이었다. 양동이를 대충 닦고 구석에 몰아넣은 그녀는 내 앞에 앉아 식은 밀크티를 찻잔에 부어 마셨다. 마냥 유약하게 느껴졌던 첫인상은 착각이었던 걸까? 의외로 불같은 성격일 수도. 나는 그 불에 기름을 붓고 싶지 않아 얌전히 남은 베이컨을 찍어 먹었다.

“수잔.”

내가 깨끗하게 비운 접시를 치우고 막내답게 식탁을 닦으려 하던 시점에 낯선 남자가 부엌을 찾아왔다.

“베르크네 씨?”

“잠시 바깥으로.”

그건 내게 있어 퍽 놀라운 일이었다. 시종일관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하던 수잔 선배의 표정이 잠시나마 편안하게 풀어졌던 탓이다. 그녀를 찾아온 인물은 짧은 흑발의 선한 인상을 지닌 남자였다. 묵직한 목소리이기에 킨 경과 유사한 느낌일 줄 알았더니, 판이한 외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킨 경을 대할 때와는 너무 상반되잖아? 수잔 선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옆에서 차를 즐기는 하녀에게 속삭였다.

“혹시 수잔 선배와 저 남자분…. 서로 그렇고 그런…?”

내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뜬 하녀가 찻물을 뱉으며 별안간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 아하하하! 다들 얘 좀 봐, 수잔과 베르크네 씨가 연인이냐고 물어보네!”

그렇게 우스운 물음이었던 걸까. 나는 얼굴이 발개진 채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그래도 잘 생각해 보니까 꽤 그럴싸하기는 해.”

“오늘 내내 지켜봤는데, 메어리의 눈치가 상당히 매섭더라고. 일 적응 참 잘하겠어.”

방금만 해도 비웃었으면서 눈치가 매섭다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식탁 끝에 앉아서 담배 연기를 뱉은 콜렌토 부인이 지나가듯 덧붙였다.

“수잔은 베르크네 씨를 만나러 나간 게 아니야. 각하를 뵈러 간 거지.”

각하. 부인의 조언도 그렇고 수잔 선배의 반응도 그렇고. 확실히 리히튼 공작과 선배 사이에는 무언가가 있다. 그 사실을 콜렌토 부인도 알고 하녀들도 알고 모두가 알지만, 굳이 입에 담지 않는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럴 때는 주위 분위기를 따라서 적당히 넘어가는 게 최고지. 하지만 입이 근질거려 참기가 너무 힘든데…. 결국 작게 헛기침을 하며 참아 두었던 궁금증을 스리슬쩍 꺼내놓았다.

“혹시 수잔 선배의 출신이… 귀족인가요?”

예상되는 반응은 두 가지. 어림도 없는 소리 말라며 직전처럼 배를 부여잡고 웃거나, 모르는 척 얼버무리거나. 한데 정작 하녀들이 보인 반응은 저 둘과 상이했다.

“우리도 잘 몰라.”

어깨를 으쓱이는 하녀를 시작으로 대수롭지 않은 투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그 애는 각하께서 데려오셨거든. 그래서 콜렌토 부인도 처음에는 경계를 꽤 하셨지, 핏덩이 같은 계집애에게 자리를 뺏기는 게 아니냐면서 말이야.”

콜렌토 부인이 작은 미소와 함께 재떨이 위로 재를 털며 웃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지 그러니.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으음,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저는 그냥 수잔 선배가 각하와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워 보이기에….”

말끝을 흐리며 남은 차를 입에 삼켰다. 그런 날 뚫어지라 응시하는 콜렌토 부인의 표정이 상당히 미묘하다.

‘할 말이 있으시면 제발 말해 주세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끙끙대자, 퍽 안쓰러웠는지 부인의 입에서 연기 대신 한숨이 흘러나왔다.

“웬만하면 그 말, 수잔 앞에서는 꺼내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아! 제, 제가 너무 방정맞았죠? 죄송해요. 앞으로 더 조심할게요.”

그 말을 하시려던 거구나. 지적받아 우울했지만 그래도 문제점을 알았으니 다행이다. 확실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자제 못하고 너무 쉽게 꺼내기는 하니까.

“그렇다기보다는… 그래.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어차피 너도 계속 지내다 보면 알게 될 테니.”

아리송한 말과 함께 콜렌토 부인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두고 보면 어떤 관계인지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인 건가. 설마 수잔 선배가 공작 각하의 정부라거나. 아니, 아니지. 이런 예측은 당사자들에게 실례니까.

***

잉고르드에서의 첫 휴식 시간은 궁금증만 남긴 채 끝났다. 나의 오후 일과는 별관 침실을 청소하는 일로, 수잔 선배가 아닌 다른 하녀들에게서 배워야 했다.

“이 건물은 지어지는 중인가요? 들어오면서 보니 왼쪽 부근이 공사 중이던데요.”

“얼마 전에 사건이 좀 있었거든. 다친 고용인들도 한둘이 아니었고. 여러모로 소란스러운 달이었어.”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했던 걸까? 하녀들의 표정이 좋지 않아 자세하게 묻지 못했다.

잉고르드의 일과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수십 명의 고용인을 둔 대저택답게 적당히 바쁘고 적당히 여유로운 일상이었다. 모두가 들어오지 못해 안달인 이유가 있었던 거야. 나는 콜렌토 부인의 고향 친구라는 대단한 지위를 지닌 어머니가 매우 자랑스러워졌다.

***

노을이 산등성 너머로 완전히 넘어가고 늦여름의 한밤이 찾아왔다. 저택의 구조도 읽힐 겸, 건물 내 꺼지지 않는 등불이 있나 확인하러 다니던 때였다. 주변이 이상하게 환하다 싶었더니 응접실 안에서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불이 안 꺼졌나…?”

바닥 위, 흔들리는 노란 불빛 옆으로 기다란 그림자가 일렁인다. 나는 조심스레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벽난로를 가리고 선 훤칠한 등이었다. 불처럼 뜨거운 색의 머리칼이다 싶었는데, 자세히 살피니 불순물 하나 없이 깨끗한 백금발이다. 곧 가벼운 셔츠를 걸친 남자가 내게로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콧등이 높고 이마 골격이 뚜렷해 얼굴 안으로 명암이 짙게 졌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정말, 뭐라 해야 할까. 이토록 아름다운 남자는 생에 본 적이 없었다. 숨 쉬는 것을 잊을 만큼 선명하면서, 살이 에이는 서늘함을 지닌 존재. 그러나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압박감에 자연스레 뒷걸음칠 수밖에 없는 존재.

두 눈이 박힌 사람이라면 직감할 수밖에 없다. 이 남자가 바로 그 유명한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이라는 사실을.

“이, 인사드립니다. 이번에 들어온 메어리 이디스라고 합니다.”

나는 그간 머릿속에 홀로 상상하고 있던 리히튼 잉고르드라는 인물을 한 줌도 남기지 않고 싹 지워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눈앞의 남자를 채워 넣었다. 학살자, 충의 없는 신하, 주인 잡아먹는 번견 등 세간에 퍼진 다양한 악명들과 실제 리히튼 잉고르드는 너무나 판이한 존재였다. 아니, 정정한다. 실제 리히튼 잉고르드의 외견과는 너무나 판이했다.

“새로운 하녀라면 수잔의 파트너인가.”

“네.”

확실히 수잔 선배와 리히튼 공작 사이에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자연스레 그녀의 이름이 나올 수 없었다. 선배와 가까운 척을 좀 하는 게 미래를 위해 이롭겠지.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겨우겨우 한마디를 덧붙였다.

“수, 수잔 선배가 많이 가르쳐 주셨어요. 정말 좋은 선배예요.”

그에 공작이 보인 반응은 단출했다.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헛웃음을 뱉은 게 다였다. 서신을 읽고 있었는지, 필기체로 가득한 편지지가 사방으로 찢겨 벽난로 안으로 떨어진다. 가볍게 손을 턴 공작이 다시 날 응시했다.

“수잔의 방을 아나?”

“네.”

“가서 내가 불렀다고 전해라.”

이 시간에? 설마 둘 사이의 관계가 정말로…. 나는 당황한 티를 못 숨기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 어디로….”

그러나 공작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등을 돌려 휙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에 서서 허망하게 벽난로를 쳐다봤다. 방금 내가 꿈을 꾼 건가.

불을 끄고 고용인의 구역으로 돌아가 수잔 선배의 침실로 향했다. 가장 안쪽에서 오른쪽 문. 가장 안쪽에서 오른쪽 문. 행여나 다른 사람들의 개인 시간을 방해할까,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선배의 침실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저어, 수잔 선….”

쾅.

문이 거세게 닫히고,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어딘가로 끌려갔다. 나는 어느새 어두운 방 안 침대에 눕혀져 천장을 쳐다보는 상태였다. 그것도 목을 내리누르는 날카로운 단도와 함께. 헉. 나도 모르게 숨이 멈췄다.

“죄, 죄, 죄송해요!”

“메어리?”

어두웠던 시야가 급격하게 밝아진다. 날 누르고 있는 무게와 단도의 주인은 다름 아닌 수잔 선배였다. 등불을 켠 그녀는 내 얼굴을 꼼꼼하게 확인한 후 목에서 천천히 흉물을 거두었다. 세상에, 하마터면 그대로 목이 찔려서 죽을 뻔한 것이다! 겁이 덜컥 나 후두둑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사죄했다. 너무 놀라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저, 정말 죄송해요. 흐윽. 저는 그냥, 그냥 수잔 선배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흑….”

“울지 마. 다음부터는 그렇게 기척을 죽이려고 하지도 말고.”

“흡, 훌쩍. 네에….”

나는 그냥 피해 주지 않으려고 살짝 문을 연 것뿐인데, 확실히 노크를 할까 말까 고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수잔 선배가 문제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었으니까. 시간이 조금 더 흐르니 공포감과 억울함이 어느 정도 진정됐다. 그래, 확실히 나의 실수였다. 전에 일하던 저택에서의 습관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할 듯싶었다.

“가, 각하께서 선배를 부르셨어요. 전 그 말을 전해 드리러 온 거고요.”

내 말에 물을 삼키던 선배가 짜증스러운 손길로 앞머리를 넘겼다. 그리고 무언가를 참아내듯 두 눈을 꾸욱 감고 기다랗게 숨을 뱉었다. 한참이 지나 눈을 뜬 그녀는 서랍을 뒤적여 자그마한 무언가를 꺼내 내게로 던졌다.

“먹어.”

“이, 이건…?”

“초콜릿.”

설마 이 포장지, 금박인 거야? 나는 입을 떠억 벌린 채 금박으로 포장된 초콜릿과 수잔 선배를 번갈아 쳐다봤다.

“가, 감사합니다.”

조용히 침실로 돌아온 나는 선배에게 받은 초콜릿을 서랍 안 보물 상자에 고이 넣어 두었다. 이건 나중을 위해 아껴 둬야지. 생각지 못한 선물에 입가에서 웃음이 떠날 생각을 않았다.

‘그런데 각하와 수잔 선배는 대체 무슨 관계인걸까.’

응접실에서 마주한 리히튼 공작과 수잔 선배의 반응을 되새겨 봐도 그럴싸한 가정 하나 잡히지 않는다. 선배의 반응을 보면 정부는 절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아리송하단 말이야. 아무래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란 콜렌토 부인의 말이 명답인 듯싶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