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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잉고르드 (2/24)

Episode 1. 잉고르드

주변 환경만 바뀌었을 뿐, 잉고르드에서 내가 맡은 일은 트리비아체에서와 다를 바 없었다. 그곳에서 하녀였던 나는 이곳에서도 하녀였다. 귀족 가문의 허드렛일을 하는 수많은 고용인 중 하나.

처음에는 책 속에 들어온 첫날처럼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구석방으로 내던져져 눈이 퉁퉁 부은 상태로 하녀장에게 끌려 다녔을 때는, 모든 게 꿈만 같았다. 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나는 여전히 책 귀퉁이에 이름 한 번 등장하지 않는 평범한 조연이었다. 기회는 늘 존재한다. 시간이 흘러 리히튼 공작의 변덕이 사그라지면 다시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터였다. 이번에야말로 아주 먼 곳으로, 그 누구와도 함께하지 않고 바로 나 혼자서.

그리 마음을 먹은 후부터, 나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흔적 없이 행동했다. 윗사람이 시키는 잡일에 열중했다.

그렇게 일주일 무렵이 흐른 뒤에도 공작은 내게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역시 날 데리고 온 건 한순간의 변덕이었던 거야.’

마음 깊이 안도할 수 있었다. 그래, 분명 어제까지는 그러했는데….

“너, 붉은 머리.”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목덜미 아래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의 냉기가 선연했다.

“네 이름은 지금부터 ‘수잔’이다.”

“네?”

“나는 같은 말 두 번 하지 않아. 각하께서 네 이름을 물으시면 넌 수잔이라 대답해라.”

용건만 냉랭하게 뱉은 흑발의 남자가 닫혀 있던 문을 천천히 밀고 나갔다. 수잔. 내 이름은 아그레인이 아닌 수잔. 이런 순간에 알려 줘 봤자 머릿속만 더 혼란스러울 뿐이다. 저녁 일과가 끝난 즉시 이곳에 끌고 온 것으로 모자라서, 새로운 이름을 기억하라니.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남자의 눈짓에 따라 조심스레 안으로 발을 디뎠다. 리히튼 공작은 무려 일주일 만에 나를 불러냈다. 무슨 용건일지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혹시 나를 격려하려는 걸까. 미친놈이어도 자기 울타리 안의 사람들에게는 친절할지 모를 일이었다. 괜한 기대로 가슴이 떨렸다. 그리고 그 떨림은 집무실 내 전경을 눈에 담은 즉시 한 줌의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무겁게 흔들리는 등불. 금방이라도 몸을 일으켜 이를 드러낼 것 같은 맹수의 그림자. 그리고 바닥에 웅크린 정체 모를 인기척에 의하여.

“인사는?”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은 어둑한 실내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다. 그의 명화 같은 미모는 잔혹한 성정과 비견해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피 냄새가 코를 찔렀으나 불편한 기색을 내보일 수 없었다. 나는 리히튼 공작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다. 여기서부터는 자력으로 살아남기 위한 눈치 싸움이었다.

“안녕하세요, 각하. 수잔입니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저 초주검은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는가? 격려를 기대했던 직전의 내가 멍청하다 못해 우습게 느껴졌다. 차라리 내일 점심 식사가 무엇일지 고민하는 게 더 생산적이었을 텐데. 나는 고급스러운 벨벳 카펫이 깔린 바닥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공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드넓은 공간에서 오직 왼쪽 가슴의 심장 소리만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이게 무엇인지는 알겠나.”

등 뒤의 남자가 어깨를 툭 쳤고,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허리를 폈다. 공작이 가리킨 이것.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것. 지난 삼 년을 눈칫밥으로 버텨온 나다. 다만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된 모습에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고깃덩이와 다름없는 남자의 등을 내려다보며 힘겹게 대답했다.

“트리… 비아체의 막내 도련님입니다.”

“막내 도련님? 반역의 무리에게 너무 황송한 표현이로군.”

공작의 목소리에는 옅은 비웃음과 경멸, 그리고 감출 수 없는 흥미가 담겨 있었다. 없는 용기를 쥐어 짜 공작과 눈을 마주쳤다. 무감각한 청회색 눈동자가 등불의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다. 나는 곧 그가 말한 흥미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쥔 벽의 장식 검이 내게 내밀어진 순간부터.

“꼬투리만 잡을 순 없지, 고대하던 선물을 개봉할 시간이 다가왔으니까…. 검을 잡아라, 수잔.”

이유를 물으려던 입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소리가 나오지 않은 탓이다.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던 그가 부드럽게 걸음을 틀어 내 등 뒤로 돌아갔다. 공작은 내 손에 직접 장식 검을 쥐어 주었다. 꿈처럼 몽롱하고 숨처럼 희미한 목소리가 귓등에서 들려왔다.

“내가 너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으니, 기념으로 이 정도의 축포는 터트려 줘야겠지. 고작 트리비아체의 것이 무려, 리히튼 잉고로드의 소유가 되었는데.”

“저는… 저는 검을 사용할 줄 모릅니다.”

어깨를 떨며 웃는 감각이 뺨으로 전달됐다. 순전히 즐거움에 의한 웃음이었고, 그 잔학함에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나는 매우 자비로운 주군이야, 수잔. 나의 사랑스러운 개를 위해서라면 넘어간 해가 다시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지.”

검을 쥔 내 손과, 내 손을 쥔 공작의 커다란 손아귀. 죽이라고? 저 남자를? 무려 삼 년간 내가 섬겨 온 남자를?

“물론 그 기다림이 지루한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만.”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에 이가 갈렸다.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대뜸 끌고 와 사람 죽이는 일을 시키고는, 정신 차릴 겨를도 안 주고 협박이라니. 미친놈. 제대로 미친 새끼. 공작이 덜덜 떠는 내 손가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숨을 가다듬어. 검이 널 휘두르는 게 아니라, 네가 검을 휘두르는 거다.”

아니다. 검은 내가 잡고 있었지만 내 손은 그에 의해 휘둘러지고 있었다. 등 위에 실린 무게가 바닥에 웅크린 막내 도련님, 아니 남자에게로 날 밀어냈다.

“귀족 가문에서 일한 하녀치고는 손이 고와. 어릴 적부터 집안일을 돕지는 않았다는 의미지. 평민 태생이 아니었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부에 너의 태생은 남부라 적혀 있었지만 네 억양은 남부의 것이 아니야. 다양한 지방의 억양이 섞여 있지, 그것도 이제 막 배운 수준으로. 트리비아체 고용인들은 참 다양한 출신으로 이루어졌었나 보군. 그들에게서 제대로 된 언어를 배운 건가?”

내 손등을 감싼 그의 손바닥이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다. 반대로 목소리는 수면을 표류하는 작은 종이배처럼 잔잔하고 고요했다.

“너에 대한 기록은 그게 전부였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이자는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 있기에 말 몇 마디로 나와 트리비아체를 꿰뚫어 보는 걸까. 이윽고 공작이 장난이라도 치듯 단정한 손톱으로 내 손등을 툭, 툭 건드렸다. 긴장을 풀라는 의미가 다분했으나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씹고 있었는지, 혀에서 피 맛이 났다.

“서로를 알아가는 재미란 이런 거지.”

웃음과 함께 공작의 반대쪽 손이 턱을 타고 올라와 입술 근처를 배회했다. 입술에 난 피가 닦여 나갈 동안 나는 긴장으로 숨 쉬는 법을 잊고 있었다. 뭐지? 얼굴도 보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내가 입술을 씹고 있었다는 걸…. 여기서 더 공작에게 휘둘리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안 돼. 나는 저 남자를 죽일 수 없어. 막내 도련님은 워낙 성정이 여려, 큰 실수가 아닌 이상 늘 가볍게 웃어넘겨 주던 사람이었다. 바닥을 기고 혀로 신발을 핥을지언정 인간성까지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의 숨통이 끊어진 뒤라 하여도.

“각하.”

“이상하군. 개에게 날 부를 혀가 있었던가.”

맞아, 나는 개였지. 각고의 고민 끝에 최대한 그의 비위를 맞추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주인님.”

몸을 한껏 낮춰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 주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미 트리비아체에서부터 단련되어 있었으므로. 숨죽이며 살아가는 방책은 물 건너간 듯하니, 지척에서 버텨낼 방도를 찾아야 한다. 나는 그가 바라는 귀여운 애완견이 되어 주기로 했다.

“이거, 이미 죽은 상태 아닌가요. 숨을 쉬지 않아요. 아까부터 등이 굳어 있던 걸요.”

손등을 덮고 있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다. 곧이어 웅크린 남자의 상태를 확인한 흑발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잔의 말이 맞습니다. 과다 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중요한 걸 간과했어. 뒈져서도 도움이 된다면 그건 빌힐름의 번견이 아니지.”

말과 함께 공작이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 잡고 있던 검 손잡이를 앗아갔다. 이상했다. 그와 맞닿은 모든 부위가 동상이라도 걸린 듯 차갑고 시렸다. 머리칼 근처를 맴돌던 숨소리와 등 뒤를 누르던 한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공작의 품 안에서 벗어난 즉시 튀어나올 뻔한 한숨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나와 대화하면서 송장의 생사 여부를 확인할 겨를이 있었다, 라….”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던 검을 공작은 고작 한 손으로 손쉽게 다루었다. 장식장 위로 안착한 검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네게 곧 할 일을 주마, 수잔. 그때까지 문제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도록 해.”

상이라도 내리듯, 녹녹한 청회색의 시선이 내 뺨을 상냥하게 쓸었다. 가슴이 턱 막힐 정도로 두려웠던 첫인상과 달리, 얇아지는 눈매가 더없이 아름다웠다. 행실과 외모의 괴리감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으리라.

“나가라.”

그것으로 공작과 나의 두 번째 만남은 끝이 났다. 정신 차렸을 때, 나는 이미 집무실 밖으로 나와 흑발 남자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끝없이 샘솟는 잡념으로 머릿속이 어지럽다. 그리고 그 잡념은 오직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리히튼 잉고르드는 제대로,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다.

“너는 눈치가 꽤 좋군. 그리고 멍청해. 각하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걸 알 텐데.”

그럼 눈에 띄지 말라고 진작 조언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설명도 없이 끌고 와 살인자로 만들려 한 주제에. 나는 공작 못지않게 커다란 남자의 등을 노려봤다.

“그러니 지금 말해 두겠다, 수잔. 이건 오롯이 널 위한 조언이야.”

“하세요.”

“도망칠 생각은 진작 포기하는 게 좋아. 적어도 사지가 멀쩡한 채 생을 마감하고 싶다면 말이지. 친절한 각하께서도 몰이사냥에는 더없이 잔혹해지시니까.”

한마디 툭 던진 흑발의 남자는 계단 아래로 내려가 사라졌다. 나는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잠시간 서서 조용히 응시했다. 어느 부분에 딴지를 걸어야 할지 모르겠네. 공작이 친절하다는 묘사에? 아니면 그딴 게 조언이냐며 화를 내야 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저 남자와도 말이 제대로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살인을 저지를 뻔했다는 공포와 압박감은 자취만 남은 채 흐릿해진 뒤다. 당연한 일이었다. 막내 도련님은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나는 아직 여기서 멀쩡히 숨 쉬고 있었으니까.

“…틈을 노리는 수밖에.”

상대는 그렌페르크 제국의 쟁쟁한 귀족 가문들을 손바닥 위에 두고 노는 남자. 리히튼 잉고르드는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나고, 고작 몇 마디의 대화로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게 하는 타고난 정복자다. 나는 복잡해진 심정을 대충이나마 정리하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어쩔 수 없어. 한평생을 바쳐서 충성하는 척해야 해. 그리고 공작이 방심했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거지.

‘과연 가능할까?’

성공 여부에 의구심이 들었으나, 다른 상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

흑발 남자의 이름은 베르크네 멜런트.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을 오래전부터 보좌해 온 보좌관이었다. 베르크네는 말수만큼 표정 변화도 적었지만, 공작에 비하면 매우 인간적인 남자였다. 나는 불타오르는 트리비아체의 후원에서 적발의 기사와 냉혹한 대화를 나누던 그의 모습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베르크네와 리히튼 공작은 내가 트리비아체의 하녀 일을 그만두려 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던 것일까. 첩자라도 심어 뒀던 건가?

‘의외로 그럴싸한 가정이네.’

잉고르드 가문은 여러모로 기이한 곳이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주말의 늦은 오후, 베르크네가 나를 다시 불렀다. 말없이 시선을 맞추던 그는 내게 등불을 맡기고 저택의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뒤따르던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주인님께서 제게 일을 맡기신 건가요?”

“일? 지금의 네가 무얼 할 수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그것도 그러네요.”

쏟아지는 빗물 때문인지, 지하에서 풍기는 냄새가 고역이었다. 미로처럼 복잡한 복도를 지나, 베르크네는 석판 위에 사람만 한 인형이 눕혀진 철창 안으로 날 안내했다. 불쾌함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설마 진짜 시체는 아니겠죠?”

“만져 보면 알 수 있겠지.”

“트리비아체의 도련님이라든지.”

“궁금하면 직접 얼굴을 확인해 봐라.”

확인해 보라니, 그런 용기가 날 리 없다. 석판으로 다가가 몸을 굽힌 베르크네가 나를 불렀다. 난 침만 꿀꺽 삼킬 뿐 움직일 수 없었다. 근 보름 동안 몇 구의 시체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계속 이러다가는 사람 죽는 일에 무감각해질 것 같았다.

“수잔. 나는 네게 시간을 할애하고 싶은 마음도, 여유도 없어. 그러니 잡아끌고 오기 전에 이리로 와.”

“뭘 시킬 건지 말해 줘요.”

“할 줄 아는 거라곤 기껏해야 빨래나 청소가 다인 네게 대단한 일이라도 시킬 것 같나? 어서.”

조금 더 상냥하다는 것 외에는 리히튼 공작과 마찬가지로 강압적인 어투다. 그의 말에 힐끔 인형, 아니 시체를 쳐다봤다. 신장과 머리칼의 색으로 봐선 확실히 트리비아체의 막내 도련님은 아니었다. 가까워질수록 코끝을 자극하는 썩은 내가 더 역해졌다. 베르크네는 품에서 단도를 꺼내어 내 손에 억지로 쥐어 줬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네 생각보다 훨씬 쉽다. 특히나 너처럼 어리숙한 여인 앞에선 대개가 방심하지.”

무슨 말이야?

“특별한 기술이나 훈련은 필요 없다. 너는 상대가 방심하는, 가장 최적의 순간을 노려야 해.”

“나보고 사람 죽이는 일을 배우라고요?”

“네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양쪽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베르크네의 무뚝뚝한 얼굴을 마주하는 동안 수십 가지의 사유가 머릿속을 복잡하게 휘저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리 갑작스럽게…. 들고 있던 등불은 어느새 지하 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피가 굳어 파랗게 식은 시체를 제대로 응시하지도 못하는 나를 베르크네가 더 가까이 잡아당겼다.

“쓸모없는 자는 각하 곁에 남을 수 없다.”

“제 쓸모가 사람 죽이는 일인가 보네요.”

“아니.”

부정과 함께 처음으로, 대리석 조각처럼 한결같던 그의 표정이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베르크네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내 얼굴을 세심히 훑었다.

“너는 좀 달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 각하께서 왜 너 같은 걸 데리고 오셨는지….”

그 이유에 대해 진정으로 의문을 품은 건 그가 아닌 나다. 베르크네의 말마따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방을 치우고 귀부인을 돕는 허드렛일이 전부인데. 이내 더는 고민할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비튼 베르크네가 석판 위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그분께서 내게 널 맡기셨으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네 목숨을 챙기는 일까지.”

“나는 하녀예요. 누굴 죽여야 하는 순간이 오기는 할까요?”

“넌 트리비아체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 예상했었나?”

순간, 나는 그의 말에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예상했으나 그렇게 이를 줄은 몰랐다? 혹은 전혀 예상 못한 일이었다? 사실 나를 위한 모범 답안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주 잠깐 대답을 머뭇거렸을 뿐인데, 그 찰나를 잡아낸 베르크네가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아아, 그래. 내가 잠깐 잊었군. 너는 예상했었지.”

“그런 적 없어요. 나 같은 하녀가 알면 뭘 안다고.”

멍청함에 탄복이 절로 터졌다. 거기서 당황하는 티를 내면 안 됐는데. 베르크네는 내 변명에 그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름 모를 시체의 목 근처로 손가락을 올리며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네게 급소를 찌르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 줄 거다. 두 번은 없을 테니 잘 기억해.”

그의 선언과 함께 나는 삼 년 가까이 사용하지 않았던 머리를 열심히 굴려야 했다. 내게 주어진 일은 퀘퀘하고 습한 지하에서 같은 행위를 지겹도록 반복하는 것이었다. 기억에 의하면 구토도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나중에는 속에 남은 것이 없어 쓴 위액만 흘러 나왔다. 자극적인 악취에 고통스럽던 후각은 점차 무던해져 갔다.

***

노을이 지는 저녁이 찾아오고, 지하를 벗어나자마자 토가 가득한 양동이부터 비웠다. 고작 몇 시간이 흘렀다고 이런 짓거리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아그레… 아니, 수잔? 오늘따라 안색이 좋지 않구나.”

“속이 쓰려서 식사가 넘어가지 않아요.”

“저런. 오늘은 일찍 가서 쉬렴. 병이 나서 며칠 고생하느니 하루 푹 쉬는 게 낫겠다.”

다정한 하녀장이 안쓰러운 얼굴로 내 이마를 닦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던 것 같다. 충고는 고마웠지만, 내가 휴식을 허락받은 즉시 한 행동은 저택 뒤로 흐르는 냇가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코 근처에 잔상처럼 남은 시체 썩은 내가 물에 씻겨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얼굴을 닦고 팔다리를 닦아도 역한 냄새는 여전했다.

컹, 컹!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굽히고 있던 허리를 폈다. 양옆으로 흔들리는 시꺼먼 꼬리가 보였다. 떠돌이 개, 아니 늑대의 주둥이 안에 내 머리 장식 띠가 물려 있었다. 냇가 근처를 배회하던 늑대는 등을 돌려 숲 안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갔다. 이게 무슨 낭패지.

‘주방의 냄새가 배어 있어서 고기로 착각한 건가.’

구두 신는 일도 잊은 채 늑대의 뒤를 따라 뛰었다. 어째서였을까?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늑대가 얼마나 위험한 짐승인지 망각했던 것 같다. 그저 머리 장식띠를 찾겠다는 일념 하에 홀린 듯 늑대를 뒤따라 두 다리를 놀렸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잔디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그렇게 늑대의 뒤꽁무니를 쫓아서 숨을 헐떡이며 멈추었을 땐, 나를 괴롭히던 피와 썩은 살의 악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헉, 헉.”

붉은 하늘과 주위를 둘러싼 푸른 활엽수들. 이 숲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잉고르드에서 나갈 수 있을까? 뜀박질에 거세졌던 심장박동이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다시 정신없이 두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좁고 답답했던 시야가 마법처럼 확 트였다. 마치, 이대로 달리기를 멈추지 않으면 저 멀리 떠날 수 있을 것처럼.

타앙!

그때, 거친 총성이 터졌다. 나는 몸을 굳히고 주변을 살폈다. 너무 놀라서 두 다리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잔.”

그리고 미풍처럼 불어온 남자의 목소리를 인지한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니, 그런 착각이 들 정도로 공포와 충격에 뒷걸음질 쳐야 했다. 나무 뒤편에서 나타난 남자가 들고 있던 무언가를 흙 위에 내던졌다. 내 머리 장식띠를 물고 도망간 늑대의 사체였다.

“정신 못 차리고 헐레벌떡 달려가기에….”

몸을 굽힌 남자가 힘없이 벌어진 늑대의 이빨 사이에서 머리 장식띠를 줍는다. 피와 침으로 흥건해져 새하얀 레이스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도망이라도 치는 줄 알았는데.”

곁으로 천천히 걸어온 리히튼 공작이 내게 머리 장식띠를 내밀었다. 노을에 붉게 물든 새하얀 얼굴이 그렇게 황홀할 수 없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펑 터져 버릴 것 같은 심장 소리를 뒤로한 채 두 손으로 물건을 받았다. 도망? 그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 늑대가 머리 장식띠를 물고 도망쳐서 다행이었다. 적어도 변명할 거리가 생겼으니까.

“죄송합니다, 주인님. 제 물건을 물고 가서 찾고 있었어요.”

다행히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꽤 멀쩡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다는데 죄송할 것 있나.”

나의 주장은 사실이었고, 그의 대답도 틀린 것 하나 없었으나 전신을 감싼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윽고 공작의 차가운 손끝이 냇물과 땀에 젖은 내 이마에 닿아왔다. 날 향한 진득한 시선이 어딘가로 도피하고 싶게 만들었다. 내가 선 정면의 어딘가를 향하여, 공작이 고개를 틀었다. 그의 시선이 떨어진 틈을 타 축축한 손바닥을 옷으로 닦아냈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늪이 나온다. 숲이 우거져 낮에도 태양이 잘 들지 않고, 굶주린 늑대들이 늘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지. 거기서 사흘을 쉬지 않고 걸으면 지오르타 초원이 나타나. 그 너머가 바로 지오르타 백작령이다.”

“그런가요? 어차피 저는 갈 일도 없는 곳이네요.”

그런 사실을 친절히 알려 주는 이유가 뭘까. 마치 네가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리려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니 돌연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금 내 표정은 어떻지? 목소리는 안 떨렸나? 누가 봐도 마음에 없는 소릴 하는 것처럼 들렸을까? 나름대로 멀쩡하게 내뱉으려 노력한 음성이, 그에게는 가소롭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리히튼 공작은 고개를 돌려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 봤다. 반쯤 넘겨진 백금발 아래로 다 식어 가는 땀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여기서 사냥을 하고 계셨던 건가요?”

사냥총이 보이지 않는 걸 보아 근처에 말이라도 끌고 온 모양이다. 나는 미친 척 주머니 속의 손수건을 꺼내 그의 이마를 닦았다. 멀끔한 얼굴 근방으로 뻗어진 손가락이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매정하게 내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공작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길로 날 응시하기만 했다.

“해가 지고 있는데 이제 가야 할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어두워지면 한 치 앞도 구분하기 힘들 거예요.”

냇가에 놓고 온 신발도 찾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그와 단둘이 있는 이 상황에서 한시라도 일찍 벗어나고 싶었다. 리히튼 공작과 함께 있으면 온 신경이 그를 향한다. 그래서 금방 지치고, 단번에 정신력이 쇠했다. 한데 그는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까. 눈치를 보며 손수건을 쥔 손을 거두었다. 묵묵히 입술을 닫고 있던 그가 날 안아 든 건 그때였다.

“아.”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당황을 숨기지 못하는 동안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공작이 흑색 말 위로 날 앉혔다. 푸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윤기 있는 갈기가 흔들린다. 그 아래로 풀과 흙투성이가 된 내 발이 보였다. 설마 맨발인 날 배려한 건 아니겠지.

“가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거다, 수잔.”

읊조리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공작이 내 등 뒤로 올라탔다. 몸이 맞닿는 긴장에 어깨가 바짝 굳었다. 단단한 두 팔이 날 가두고 말의 고삐를 잡아챘다. 풀어헤친 머리칼 사이로 그가 코를 파묻는 것이 느껴졌다. 그 감각이 비단 나의 착각만은 아닐 터였다. 그 사실을 알리듯, 느릿한 숨이 목덜미로 떨어져 내렸다.

“너는 주인 없는 떠돌이 늑대가 아니잖나.”

***

리히튼 공작은 내게 용건이 남아 있는 듯했다. 딱히 따라오라 말을 한 것도, 눈치를 준 것도 아니었으나 저택으로 돌아온 즉시 나는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랐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면서 미세한 불쾌함과 패배감을 느껴야 했다.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았는데 공작의 의중을 알아채다니? 마치 그에게 천천히 길들여지는 것처럼.

“이리로.”

조용히 걸음을 옮겨 공작이 서 있는 장식장 옆으로 다가갔다. 그가 장식장 깊숙한 곳에서 꺼낸 물건은 새끼손가락보다 조금 더 큰 유리병이었다. 조금 불길한데. 유리병 안에는 정체 모를 검붉은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앞으로 사흘간은 하루에 한 번씩 날 찾아와라. 이 독을 받아가야 하니까.”

“독이요?”

“농도가 매우 낮아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네 몸이 이 액체를 완전히 받아들인다면 웬만한 독에 내성을 갖게 될 거다.”

그래, 리히튼 잉고르드는 미친놈이었지. 그것도 아주 제대로 미친놈. 멍한 얼굴로 그에게서 독물이 든 유리병을 받았다. 이걸 주기적으로 섭취해서 내성을 갖게 한다고? 그 과정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제가… 이걸 마셔야 하나요? 하루에 한 번씩?”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자신한 주제에 잔뜩 겁이 난 얼굴이군.”

머릿속을 정리하는 틈에 그의 손끝이 내 턱을 가볍게 쓸고 멀어졌다. 흠칫, 몸을 빼다가 떨어질 뻔한 유리병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 헛생각이 들기 전에 다시 마음을 바로 했다. 내게 틈을 보이거나, 가벼운 모습을 보이는 건 전부 계산된 행동일 게 분명해. 당장 직전에 사냥당한 떠돌이 늑대의 사체를 떠올려, 아그레인. 그게 네 미래가 될 수 있다고 경고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마셔야 할까요?”

“마땅한 답을 들려 주기에는 표본이 너무 적군.”

그럼 그들 중 죽은 자도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열리기는커녕 무거워지기만 했다. 고개를 들자 시야에 들어오는 공작의 모습에 목구멍이 턱 막혔다. 그가 내게 위협을 가하거나 충격적인 행동을 한 건 아니다. 공작은 그저 의자에 편히 앉아 있었고, 이미 해가 다 져 버린 하늘의 푸르스름함이 집무실 안을 뒤덮었을 뿐이었으므로. 살짝 턱을 올린 공작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할 말이 더 남았나?”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의 리히튼 잉고르드는 미친 것치고는 이상하리만치 평범한 남자로 느껴졌다. 며칠 전 선물이라며 살해를 종용했을 때의 그 남자와는 너무나 다른, 이질적인 분위기였다.

“아니요. 그럼 내일 다시 주인님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수잔.”

“네.”

공작이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시선을 서류에 고정한 채로, 잠시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날 향해 열렸다.

“나의 잉고르드는 언제쯤 무너질 것 같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연히 『태양이 흐르는 강』에 빙의했던 시점에도 소설의 끝은 한참 남은 상태였다. 기승전결의 중반부라 다양한 사건이 끊임없이 터지던 시점이었지. 하지만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빌힐름 황자였고, 최후의 악역인 만큼 리히튼 잉고르드의 마지막은 정해진 수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걸 내게 왜 묻는 거지. 너무나 자연스러운 물음이었기에 하마터면 ‘그렇게 오래 남지는 않았을 거예요. 당신은 주인공이 성장하는 데 소모될 시련일 뿐이니까.’라고 대답할 뻔했다. 함부로 입을 열지 않은 행위에 안도하는 한편 덜컥 불안감이 일었다. 사라진 빙의자들도 이런 질문을 들었을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주인님께서 계시는 지금은 아니지 않을까요?”

나를 불러 세운 것이 무색하게 집무실의 분위기는 고요하다. 더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자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왔다.

“하아.”

잠시도 안심할 틈을 주지 않는 남자다. 머리가 다 아플 정도로.

***

다음 날 늦은 점심이 지난 후에야 공작에게서 받은 독을 삼킬 수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선택이었다. 리히튼 공작과의 관계가 어찌 되었든, 지금의 나는 잉고르드의 하녀였다. 독을 삼키면 그에 따른 반응이 올 게 뻔했으므로 오전부터 업무에 지장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수잔. 안색이 너무 창백한 거 아니니?”

“내가? 딱히 아픈 곳은 없는데.”

“어제부터 속이 안 좋았다며.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어.”

동료 하녀인 레이나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 미쳐 있는 고용주와 다르게, 잉고르드의 고용인들은 전부 비단결 같은 마음씨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대충 고개만 주억이고 잘 세탁된 침대 커버를 빨랫줄 위에 널었다. 햇볕이 쨍쨍한 덕에 오늘 빨래는 아주 금방 마를 것 같았다.

‘나의 잉고르드는 언제쯤 무너질 것 같나.’

공작은 왜 나에게 그런 질문을 했을까? 스치듯 흘러가던 그의 목소리가 어젯밤부터 잊히질 않는다. 별 의미가 없다고 여기기에는 불편하고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물론 그의 가늠하기 힘든 성정을 고려하면 마냥 기이하다고 볼 수는 없을 터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하니, 나 혼자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해가 지고 업무가 끝난 후에는 베르크네를 따라 다시 지하의 철창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고작 하루가 흐른 것뿐이라 시체 옆에서 숨 쉬는 일이 고역이었다.

“어제도 그렇고… 시체들은 어디서 가져오는 건가요?”

안면 없는 사이에 출신은커녕 이름도 모르는 인물. 아무리 억지로 하는 짓거리라 해도, 시체를 흉측하게 훼손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시체의 뒤집힌 피부 결을 살피던 베르크네가 한 박자 느리게 입을 열었다.

“너는 잉고르드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지?”

“제가 정치에 무지해서요. 아는 점이라고는 공작님께서 대단하신 분이란 정도가 다죠.”

“…그렌페르크 제국은 건국 시기부터 지금까지 철저하게 황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가였다.”

책에서도 비슷한 문장이 적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선황의 시대까지였지. 수잔. 너는 황제의 국가에서, 황제와 비견되는 수준의 권위를 지닌 자가 있다면…. 그 인물이 받는 견제와 위협은 과연 어느 정도일 것 같나.”

길지 않은 문장 몇 개로, 베르크네가 묘사하는 인물이 리히튼 공작이란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첩자다. 본래는 고문으로 뼈도 못 추리지만, 쓸모에 따라서 지금처럼 사지를 보존할 수 있지.”

적어도 무고한 시체들은 아니란 소리니, 잉고르드의 베르크네치고는 꽤 친절한 설명이었다.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뜻인가요?”

“그리 생각하는 게 널 더 편하게 한다면.”

두루뭉술한 답이었지만 이전만큼 냉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물의 급소에 대한 일장연설을 들은 후, 어제부터 생각하고 있던 바를 털어놓았다.

“이런 건 별로 효율적이지 못한 거 같아요. 이미 죽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시체를 찔러 봤자 현실과 다르잖아요.”

“네게 살아 있는 인간이라도 바치라는 소리냐?”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시네요.”

“연습은 오늘로 마지막이다. 어디까지나 네가 최소한의 방법을 익히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벌써?

“내일부터는요?”

단도의 날을 살피는 베르크네의 옆선이 날카롭다. 등불에 비치는 눅눅한 갈색 눈동자가 나를 향하더니, 곧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비웃음에 가까운 형태로.

“듣자 하니 각하께서 네게 유리병을 주셨다지.”

그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도 공유하는 건가. 마침 베르크네를 만나기 전에 눈 딱 감고 삼킨 참이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는 네 몸 하나 간수하기도 바쁠 거다.”

그 말의 저의를 몸소 깨닫게 된 건, 공교롭게도 고작 서너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낮에는 한기에 오들오들 떨리는 것으로 그쳤던 신체가 늦은 오후가 되자 본격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구토에 피가 섞여 나왔고 조금 어지럽다 싶으면 코피가 턱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수잔, 너….”

얼마나 흉측했으면 내 모습을 본 레이나의 눈가가 걱정으로 붉게 물들 정도였다.

“걱정하지 마.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병이야. 며칠 지나면 금방 괜찮아져.”

“혹시 그 병이 요절이니? 안 되겠다. 하녀장님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 어서 의사에게 가 봐.”

유리창에 비친 내 꼴을 보니 하녀들의 걱정을 마냥 호들갑이라 여길 수도 없었다. 파랗게 식은 안색과 새까만 눈 밑 그늘, 그리고 시한부 인생이라도 선고받은 양 생명이 꺼져가는 표정까지. 어제 저녁 내가 괴롭힌 시체와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외양이었다. 혈관 안쪽이 얼어붙어 촘촘하게 수축하는 느낌. 한마디로 표현해 숨 쉬면서 죽어 가는 기분이었다. 혈관 틈새로 퍼져가는 피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독물이 대신한다. 실제 손목 아래로 보였던 동맥이 불결한 보랏빛으로 변색해 있었다.

“너무 괴로운데 진통제는 없나요?”

다급히 찾아간 내 물음에 대한 베르크네의 대답은 칼 같았다.

“있어도 통할 리 없지. 네 몸의 모든 피가 독소를 머금게 될 때까지 오늘 같은 몸 상태가 지속될 거다. 약의 효과를 바라느니 하늘에 대고 기도하는 게 나아.”

리히튼 공작을 찾아가 멱살을 흔들며 외치고 싶었다.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다는데, 멀쩡한 사람을 살아 있는 독물로 만들려 하다니! 이건 고문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고통스러운 만큼 밤 역시 길었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물에 잠긴 것처럼 무겁고 느리게 들리는 것은 물론, 눈을 깜빡일 때마다 베개와 침대 위의 축축함이 짙어졌다. 시야까지 흐릿하니 모든 감각이 바다 속으로 추락하듯 먹먹해져 갔다. 지친 몸은 노곤함을 이기지 못했으나 열과 통증이 극심해질 즈음이면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그렇게 빛이 점멸하듯 정신 또한 켜지고 꺼지길 반복하던 어느 시점에.

“입 열어.”

어두운 침실 안으로 나 아닌 누군가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침대는 두 개여도 나 홀로 지내고 있는 방이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느리게 눈을 깜빡였지만, 새까만 밤 속에서 무언가 보일 리 만무했다.

“입.”

입술로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차가운 것이 닿았다. 아니, 뜨거운 것이었나? 무슨 정신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상대방이 바라는 대로 입을 열었다. 무겁고 독한 공기가 메마른 입가 바로 위에서 맴돌았다.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전부 삼켜라.”

선언과도 같은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 내 입술 사이로 흘러 들어왔다. 흐릿한 세상 속에서도 유독 낯선 느낌에 입을 닫으려 했으나, 강인한 힘이 내 턱을 잡고 놓아 주질 않았다. 이어서 지독한 액체가 혀 뒤로 밀려들어 가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잔기침이 나올 정도로 매캐하고, 피비린내가 강하게 느껴지는 액체였다. 혀를 델 것 같은 따가운 감각을 어떻게 참아냈는지 모르겠다. 심장박동이 점차 거칠어져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침대를 내리누르고 있던 무게가 한결 가벼워졌다. 이상함을 느끼고 몸을 일으키려 해도 뻣뻣하게 굳은 근육을 움직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고통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방 안에 남아 있던 것이라곤 창문 너머로 밝아 오는 어슴푸레한 새벽의 빛이 전부였다.

***

『태양이 흐르는 강』은 매우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소설이다. 자극적인 맛이 있거나 전개의 짜임새가 뛰어난 글은 아니었다. 다만 뒷내용을 궁금하게 하는 재주 하나는 뛰어났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글의 독자였던 만큼 중반까지는 소설 속 인물들 각자의 사정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기도 했다. 특히 작중 주인공인 빌힐름 황자의 개인사는 워낙 자주 강조되어 언급하는 것조차 지겹게 느껴질 정도였다.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최고 위치에 오르려는 남자. 지천에 깔린 미녀들 사이에서 오롯이 사랑할 한 여자만을 선택한 남자. 어린 시절 헤어진 친척 누이를 찾아 헤매는 남자. 어두운 과거를 등지고 일어서 동료들과 제국을 바꾸려 한 남자. 뻔하고 정직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었지.

그렇다면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은? 소설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는 와중에도, 숙적 리히튼 잉고르드의 과거사는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다. 상황과 대화로 유추할 수 있는 점이라곤 리히튼 공작이 복수심을 품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칼날이 빌힐름 황자와 황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 다였다. 내가 아는 미래는 기껏해야 지금으로부터 삼 년까지의 이야기. 그때까지 리히튼 공작과 잉고르드에 대한 비화를 파헤치지 못한다면 목숨을 보전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파헤친다고 해도 내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지만.

“수잔. 오늘도 안색이 많이 안 좋은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니?”

“으음, 전혀. 어제에 비해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 아무리 봐도 움직이는 시체와 다름없어 보여.”

나의 대답과 실제 보이는 상태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실제 서재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유령과 다름없었다. 대충 훑어만 봐도 어제보다 배는 심각해 보이는 안색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어제에 비해 썩 괜찮다고 할 수 있었다. 새벽의 기묘한 일을 경험한 후부터 전신을 짓누르던 고통이 말도 안 되게 가벼워졌다. 여전히 피 섞인 구토를 했으나 머리만 어지러울 뿐, 거기서 끝이었다. 그때 내 입 안으로 흘러들어 왔던 이름 모를 액체의 효과가 분명했다.

“레이나.”

“으응?”

“어두운 새벽에 어떤 남자가 네 방에 찾아왔다고 생각해 봐.”

“뭐어? 얘가 뜬금없이 무슨 말이래. 설마 머릿속에도 문제가 생긴 거야?”

침대 시트를 털던 하녀 레이나가 얼굴을 구겼다.

“그 남자가 너에게 무언가를 먹였는데, 다음 날 절대 나을 것 같지 않던 병이 완벽하게 나았어. 어떻게 생각해?”

“너도 참 대중없다. 지금 네 이야기 하는 거니?”

“아니, 그냥 그런 꿈을 꿨어.”

마지막으로 과자가 든 양철통을 정리한 레이나가 허리를 폈다.

“길몽인가 보지. 다행이네, 너의 그 안쓰럽다 못해 다 죽어 가는 것 같은 병이 나으려나 보다.”

“해몽을 부탁한 게 아니라 그 남자에 대해서 물은 거야.”

“남자? 물을 게 뭐가 있담, 네가 골골거리는 게 안타까워서 약이라도 먹이러 왔겠지. 밤에 몰래 찾아간 건… 음. 정체를 숨기고 싶었기 때문이라거나.”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들었을 때의 감상은 또렷했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나는 분명 리히튼 공작을 떠올리고 있었다. 혹시, 라는 생각이 들어도 역시 말도 안 된다 여기고 만다. 단지 흥미롭다는 이유 하나로 날 죽이지 않은 남자였다. 굳이 그런 수고를 할 리 없어.

“꿈이 아닌 현실이라면 찝찝할 것 같아. 애초에 치료됐다는 보장도 없잖아. 잠깐 괜찮은 걸 수도 있고, 남자 때문에 나은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야?”

“중요하지는 않고, 그냥 꿈자리가 좀 불편해서.”

“그렇게 궁금하면 다음에 만날 때 물어보지 그러니. 침대에 눕기 전에 그 남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어.”

레이나와 나는 침대 시트와 세탁이 필요한 커튼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공작부인도, 어른도 없이 모시는 사람이라곤 공작 한 명밖에 없는 가문인데 할 일은 늘 태산이다.

“오늘 오후부터 나와 마리는 별관 청소를 돕기로 했어. 너는 몸 상태가 안 좋으니까 여기서 잡일이나 하는 게 낫겠다.”

그녀의 말에 일층 유리창 너머, 후원 뒤편에 보이는 별관 건물을 쳐다봤다. 이곳에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동안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는 저택이었다.

“별관에는 누가 살아?”

“각하의 손님.”

별관에 거주 중인 손님이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여자란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공작과 별관의 아가씨라…. 여인을 두고 빌힐름 황자와 다퉜다는 소문을 생각하면 마냥 비현실적인 조합은 아닐 터였다. 한데 리히튼 공작도 사랑이란 걸 할 수 있나? 영 상상하기 힘들었다.

“손님이라면, 누구?”

“대단한 귀족 가문의 여식이라는 것밖에 몰라. 처음에는 다들 공작부인이 되실 분이라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거의 방치되고 있거든.”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손님이라며.”

“자의로 잉고르드에 남은 거라 들었어. 각하께서도 억지로 쫓아내지 않으시고. 우리야 자세한 사정을 모르니까….”

하기는. 하녀란 저택의 고용인에 불과하니, 시녀 같은 가신이 아닌 이상 내부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없으리라. 레이나는 내게 빨랫감을 맡기고 저택을 나갔다. 별관으로 향하는 등이 바람에 흔들리는 초원을 지나쳐 멀어졌다. 독물의 여파로 습관처럼 찾아오는 어지러움에 머리를 흔들 때였다.

후원의 정중앙, 노닥거리는 잉고르드의 기사들 사이에서 날 향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와 비슷한 적발에 리히튼 공작만큼 큰 신장을 가진 남자였다. 누군가 했더니 트리비아체에서 날 끌고 나온 그 기사다. 나는 순식간에 불쾌한 기분이 되어 몸을 돌렸다. 저 남자에게 반항하다가 부딪쳐 생긴 입 안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 음식을 씹을 때마다 통증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웬만하면 앞으로 계속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

해가 다 진 늦은 밤에는 베르크네가 나를 찾아왔다.

“수잔.”

그가 몸소 내 침실까지 방문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나는 환복하려던 도중에 그를 따라 공작 집무실로 올라가야 했다.

“표정이 꽤 괜찮군.”

새벽에 있었던 일을 베르크네에게 알려야 할까. 하지만 언젠가는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서 마냥 그에게 기대는 건 좋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만 괜찮은 거예요. 긴장해서 그런가 봐요.”

“최대한 자력으로 버티는 게 너에게 이로울 거다. 각하 앞에서도 그 얼굴을 유지하도록 해.”

“아픈 티를 내지 말라고요? 노력은 할게요.”

일방적으로 독을 주입한 주제에 아픈 티도 내지 말라니. 폭군도 아니고. 나의 물음에 베르크네는 미간만 구겼을 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유리병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그 이상은… 조심하는 게 좋겠지. 각하께서는 빌힐름의 개들이면 몰라도, 가신인 우리의 고통까지 즐기시지는 않는다. 네가 독을 이기지 못하고 각하께 도움을 청한다면 기꺼이 네게 진통제를 넘겨주실 거다.”

“통하지도 않을 텐데 요청해서 뭐 해요.”

한 손에 등불을 쥐고 계단을 오르던 베르크네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날 힐끔 돌아봤다.

“각하께서는 퍽 상냥한 편이시지만, 세심한 요소 하나하나를 설명할 만큼 친절하지는 않으시단 걸 명심해.”

그의 입에서 나온 각하는 아무래도 리히튼 잉고르드가 아닌 모양이다. 제정신이 아닌 남자면 몰라도, 내가 아는 공작은 상냥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난도질당한 막내 도련님의 최후를 함께 목격했으면서도 베르크네는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나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문제는 그 설명되지 않은 요소가 가장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점이지.”

집무실 문의 손잡이를 돌리며, 베르크네가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그분이 네게 무언가를 제시한다면, 최소한 한 번쯤은 깊게 고민해야 한다. 순간의 판단으로 평생을 후회하게 될지 모르니까.”

어쩐지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조언이었다. 문이 열리고, 베르크네를 따라 공작이 날 기다리고 있을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각하. 명하신 대로 수잔을 데려왔습니다.”

한창 무언가를 살피고 있었는지 이마를 구긴 채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얼굴도 아님에도 정의하기 힘든 기묘한 낯설음이 느껴진다. 정말 새벽의 그 남자는 공작이었을까?

“네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수잔.”

개라면 주인의 명이 무엇이든 곧이곧대로 따라야지. 나는 짐짓 자신만만한 척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무슨 일인가요?”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워. 귀한 혈통의 여인이 되어 나를 따라 연회에 참석하면 된다.”

귀한 여인이 되어야 한다니. 너무 두루뭉술한 명령이다. 무엇보다 그와 함께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점이 당혹스러웠다.

“특정 인물을 흉내 내면 되는 건가요?”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

콰앙!

그 순간 갑작스러운 폭음과 함께 공작 뒤편의 거대한 유리창이 크게 몸을 떨었다. 은하수가 내리는 후원의 지평선 뒤, 건축물이 일부 떨어지면서 거대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무슨…?”

콰앙!

굉음이 재차 울려 퍼졌다. 지천을 울릴 만큼 커다랗지는 않았으나, 정신이 번쩍 들 수준으로는 충분했다. 폭발의 근원은 명명백백했다. 창 너머로 별관의 왼쪽 상층부가 반쯤 무너져서 활활 불타고 있던 것이다.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친 나와 달리, 공작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마치 귀를 닫고 눈을 감은 것처럼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베르크네의 반응 역시 조금 기이했다. 그가 공작의 눈치를 살피기 바쁠 동안 오직 나만이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새까만 연기가 구름을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간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던 트리비아체가 연상됐다.

“베르크네.”

“죄송합니다.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가겠다. 너는 너무 물러.”

서류 위에 무언가를 휘갈긴 공작이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둘의 뒤를 따라 후원으로 나갔다. 어찌하면 반응이 이토록 허무할 수가 있지? 마치 예상했다는 듯, 또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공작에게선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를 쫓는 베르크네의 옆모습은 딱딱하게 굳어 있음이 확실했다.

별관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달라붙어 화재를 진압하고 있었다. 기사, 하녀 할 것 없이 냇물을 나른 덕인지 첫 폭음이 들렸을 때 보다는 확실히 불길이 약해진 뒤였다.

“각하.”

“킨을 데려와.”

안 그래도 까만 잿더미로 망가진 기사의 얼굴이 공작을 마주하자마자 사신이라도 본 양 파랗게 죽어 버린다. 이윽고 멀리서 석양만큼 붉은 머리의 기사가 뛰어 왔다. 트리비아체에서 베르크네의 옆에 서 있었던 바로 그 기사였다. 뒤따라온 다섯 명의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킨이라 불린 남자의 얼굴은 다소 참담한 감이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무언가를 직감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보인다는 것.

“킨.”

“죄송합니다.”

“이토록 쓸모없을 수 있다니. 이제는 웃음도 나오질 않는군.”

“죄송합니다.”

이들이 별관을 폭발시킨 주범이라도 되는 것일까. 모든 상황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급하게 흐른다. 한동안 조용하던 공작이 읊조리듯 고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백금발이 불길에 물들어 빨갛게 일렁였다.

“여기서 너희와 노닥일 시간 같은 건 없다. 선택할 기회를 주지, 누구로 할 테냐.”

“제 실수입니다. 저를….”

서걱, 하는 찰나의 소음과 함께 피가 튀었다. 이것으로 두 번째였다. 무자비한 살인을 코앞에서 지켜보게 된 것이. 목덜미를 잡고 쓰러진 건 킨이 아니었다. 죽음은 그의 옆에 나란히 서 있던, 끌려오는 내내 불안을 숨기지 못하던 이름 모를 기사를 향했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죽음을 맞이하겠지. 실 끊어진 인형처럼, 필요를 잃은 사냥개처럼. 공작이 말했다.

“내부인을 신경 쓰라고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르겠군. 같은 일을 반복하고도 학습할 줄 모른다는 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야. 가르치기도 귀찮으니 알아서 처신해라.”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보이는 건 공작의 너른 등과 밤하늘 아래의 백금발이 전부였지만, 그가 이 상황을 상당히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 정도는 쉬이 알아챌 수 있었다.

“베르크네.”

“예.”

“에리얼 크로허츠를 저택으로 데려와라. 나머지는 내 집사에게 일임하겠다.”

“예.”

에리얼 크로허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바닥을 향해 처박혀 있던 고개가 절로 들렸다. 빌힐름 황자의 왼팔이자 제국에서 상당한 권세를 누리고 있는 가문, 크로허츠 후작가. 지금 이 시점에 언급한 것을 보면 에리얼이라는 인물이 별관에 거주하고 있던 손님일 것이다.

잠깐. 소설 속에도 이런 설정이 있었나?

크로허츠의 여식이 잉고르드를 선택하다니, 기억 속을 아무리 더듬어도 생소한 상황이었다. 그때 나타난 시녀, 피오라가 공작의 곁으로 다급하게 뛰어왔다.

“각하. 크로허츠 후작이 방문했습니다.”

약간의 신경질 외에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던 공작의 눈동자 속으로 미세한 한기가 깃들었다.

“에리얼 크로허츠가 위협을 받고, 시기적절하게도 빌힐름의 충견께서 날 찾아왔다… 라.”

명백한 비웃음이 그의 새하얀 얼굴 위로 옅은 물감처럼 퍼져 나갔다. 타오르는 검은 연기와 비릿한 피 냄새, 그 위에서 군림하는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 문득 트리비아체에서 그에게 목숨을 구걸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장면이 그때와 판박이처럼 느껴졌다.

“수잔.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예?”

“크로허츠에 대해서.”

당시의 감정을 가다듬느라 공작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야말로 궁금했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내게 묻는 것일까?

“잘 모르겠습니다. 크로허츠 가문에 대해 아는 거라곤 명망 있는 핏줄이라는 게 전부라서요.”

“정말 모르나?”

“네. 저는 주인님께 거짓말하지 않아요.”

공작이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피오라. 후작을 응접실로 데려와라.”

내 뺨을 스쳐 지나가는 공작의 시선이 따갑다. 또한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계속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뭘까. 단순히 나를 떠보기 위해? 아니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어서?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수잔. 지금은 한시가 바쁘니 각하께서 맡기신 일에 대해서는 차후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베르크네마저 공작을 뒤따라 사라지고, 후원에 덩그러니 남게 된 나는 침실로 돌아갔다. 밤이 워낙 어두운 터라 별관 정리는 내일 진행될 듯했다. 그래, 이 일에 더는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크로허츠와 나는 조금의 접점도 없는 관계니까. 공작은 무서운 남자다. 그리고 나는 여타 빙의자처럼 개죽음을 당할 생각이 없었다.

***

다음 날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온종일 누워 있어야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어느 정도는 예정된 상황이었다. 전날 괜찮았던 몸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수잔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잉고르드에서 계속 일할 수 없을….’

‘수잔의 신변은 전적으로 각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야. 실제로 이 아이 한 명 없다고 저택 관리에 문제가 생기지 않아.’

‘하긴, 각하께서 데려온 아이….’

중간 중간 소란스러움이 느껴졌으나, 몸을 일으킬 여력이 없었다. 새벽의 그 남자가 다시 찾아오길 마음속으로 수십, 수백 번을 바랐음에도 그런 마법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는 않았다.

***

이틀이 지나고 해가 질 때쯤 되어서야 비척비척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독을 삼킨 지 나흘이 되던 날에는 적어도 감당할 수 있는 몸 상태가 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아아. 너 자는 동안 말이지. 음. 별관에서 지내시던 그분 기억나? 그 아가씨가 글쎄 크로허츠 후작가의 여식이었지 뭐니.”

“다들 대단한 출신이라 예상하기는 했는데… 그 정도로 대단한 가문이었을 줄이야. 그런데 참 웃겨요. 후작이라는 남자가 우리 잉고르드까지 찾아온 시점 말이에요. 부녀끼리 짠 것도 아니고.”

그간 몸 상태가 나빠 끼니를 거르거나 방에서 혼자 식사했기 때문에, 꽤 오랜만에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였다. 대화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침대에서 끙끙 앓고 있던 사이 별관 사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 같았다.

“말조심해, 리냐. 그쪽 세계의 이야기는 우리와 하등 상관없는 것들이니 너무 관심을 보이지 말렴.”

“부인은 걱정이 많아요. 누가 고용인들이 식사 자리에서 떠드는 이야기를 듣겠어요?”

“다 너를 위한 말이란다. 등잔 밑이 더 어두운 법이니까.”

콜렌토 부인의 지적에 리냐가 날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콜렌토 부인이 다른 부인들에 비해 유독 조심스럽긴 하지. 우연히 잉고르드 공작저를 방문했는데, 우연히 별관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으니 불안해서라도 제 여식을 데려가야겠다는 건가. 그렇구나. 그가 피를 보면서까지 불쾌함을 표한 이유가 다 있었어. 리히튼 공작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빌힐름 황자의 세력과 싸우고 있던 것이다.

크로허츠 여식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정적인 후작이 원하는 바를 이루게 했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리히튼 공작에게 있어 빌힐름이란 존재는 도화선의 불꽃이나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어쩌면 단순히 책으로 접했던 수준보다 더. 나는 하녀장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레이나가 안 보이네요.”

“그 애는 별관 담당이었잖니. 지금 그곳을 청소하느라 바쁠 거야. 식사는 했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애도 네 건강을 묻더니만…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사이가 참 좋구나.”

“성격이 잘 맞는 것 같기는 해요.”

시끌벅적한 식탁에서 꽤 상쾌한 기분으로 식사를 마치고, 오늘도 독물이 든 유리병을 받기 위해 집무실로 향했다. 버텨야 할 고통을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했으나 그렇다고 그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진통제도 함께 부탁하자. 베르크네가 한 말이니 적어도 헛소리는 아니었을 거야. 마침 도착한 집무실 앞에는 베르크네가 서 있었다.

“베르크네.”

“무슨 볼일이지, 수잔?”

그는 마치 호위 기사라도 된 양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찾아뵙기로 한 것도 있고, 공작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별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도 아닌 베르크네가 이곳에서 버티는 건 또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 분명 마땅한 이유가 있겠지. 다소 난감해 보여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지금은 못 들어가나요?”

“…아니. 너라면 괜찮을 수도.”

뜻 모를 소리를 한 베르크네가 문손잡이를 잡았다. 우습게도 공작의 집무실 앞에 서자 유독 통각이 둔해지는 느낌이다. 저 안에서 유쾌한 경험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너무 움츠러들지 말자. 진통제 정도야 나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잖아?

“각하. 수잔이 방문했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펼쳐진 전경은 공작을 찾아왔던 그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 조금 다르기는 했다. 적어도 피범벅이 된 시체가 몸을 웅크리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살려 주세요, 각하!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녀복을 걸친 여자가 바닥에 엎어져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내고 있었다. 한쪽 손에서 번지는 피의 양이 상당했다. 마치 손가락 하나라도 잘린 것처럼. 불길한 느낌은 왜 항상 들어맞는 걸까. 베르크네가 문을 닫았고, 나는 폭력과 무자비함에 다소 무덤덤해지기 시작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레이나?”

공작의 앞에서 발버둥 치는 여자가 레이나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더더욱. 혼란스럽다 못해 거짓말처럼 다가오는 상황이었다. 레이나가 왜 저 곳에서 공작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걸까.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는지, 베르크네의 가슴 위로 뒤통수를 부딪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입은 열려도 다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잉고르드에서 가장 먼저 말을 걸어준 레이나. 텃세 속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적응을 도와준 레이나. 물음에 언제나 친절히 대답해 주고, 열심히 돈을 벌어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고 싶다던 레이나 제닌. 그런 레이나가 도움이 절실한 얼굴이 되어 날 쳐다보고 있었다.

“수, 수잔! 도와 줘! 너, 너는 알잖니, 내가 첩자가 아니란 걸. 나는 그런 무서운 일을 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잖아…!”

무릎으로 기어 온 레이나가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들어 나의 치마를 붙잡고 늘어졌다.

“가, 각하께서 무언가 잘못 알고 계셔. 내가 잉고르드에 해를 끼치러 온 비, 빌힐름 전하의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어. 아닌 거 알지, 수잔? 우린 친한 친구잖아. 내가 아니란 걸 알지?”

나는 그녀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공작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리히튼 공작은 이 모든 상황을 관망하듯,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얼굴로 책상에 몸을 기댄 채다. 나의 대처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뭘 기다리는 거지? 내가 레이나를 변호하길 바라는 건가? 아니면….

공작의 개가 되었다고 해서 그에게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모든 기회가 박탈당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레이나가 결백하다는 보장도 없었다. 나는 무얼 선택하야 하는 걸까.

“생각이 많은 얼굴이로군, 수잔.”

아주 잠깐의 고민이었을 뿐인데 공작은 지루한 표정으로 집무실 바닥에 깔린 카펫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본인의 입으로 직접 복종하겠다 약속한 것치고 늘 미지근한 대응을 보이지.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죄송합니다, 주인님. 하지만 저는 항상 진심이었어요.”

“복종에서 진심이란 건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야. 요점은 내 명에 거역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공작은 의중을 파악하기가 유독 힘든 남자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은 그의 말에 담긴 의도가, 아니 그가 사람을 복종시키는 방식이 아주 명확하게 보였다. 리히튼 잉고르드는 충성이 아닌 힘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인물이라는 것이.

“수잔.”

익숙하면서 낯선 이름. 기이하게도 그가 입에 담는 ‘수잔’은 태생부터 내가 가진 이름처럼 느껴졌다.

“네.”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얄궂게 너를 속이려 하지. 그렇기에 당장 닥친 눈앞의 상황이 오히려 널 새장 안의 새로 만들 수 있어.”

“저는 머리가 나빠서 어려운 말은 잘 이해하지 못해요.”

그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나의 사랑스러운 개를 위해 친절히 설명하는 수밖에…. 킨.”

“예.”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인물이 책장과 커튼 사이로 진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소리 없이 내 앞으로 다가온 남자는 매정한 눈과 그보다 더 매정한 손길로 레이나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사, 살려 주세요! 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하늘에 맹세코 결백해요! 수, 수잔, 제발 도와…. 아악!”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킨이 검을 거두자마자 들려온 레이나의 비명은 짙은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겨우 손가락 하나의 차이로도 몸의 중심은 망가지지. 이제는 두 쪽 다 넷이니 원상태로 복귀야. 다행이지 않나?”

“각하답지 않은 자비로운 선처이십니다.”

“으흑, 흑…. 각, 각하. 뭐든지 할 테니 제발 사, 살려 주세요. 살려만 주세요….”

이제는 미쳤다고 욕하기도 지쳤다.

“그렇게 삶에 미련이 많으면…. 레이나, 턱을 들어야지.”

공작의 말에 레이나가 바닥에 박고 있던 얼굴을 번쩍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네게 십 초의 유예를 주지. 너의 생사는 오직 수잔의 선택에 달려 있어. 그 어떤 발언도 용서할 테니 마음껏 혀를 놀려서 수잔을 설득해 봐라.”

옅게 그려진 차가운 미소에 적의가 가득했다. 또다. 또 이질감이다. 지금의 리히튼 공작은 나를 안아 안장 위에 올리던 남자와는 완전하게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트리비아체가 멸문한 순간, 별관이 무너진 순간, 그리고 지금, 레이나가 첩자로 의심받는 순간.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 순간들 모두 빌힐름 황자와 연관되어 있다. 소설 속에서도 둘이 서로 못 죽여 안달이기는 했지만….

상념에서 돌아왔을 땐 울음이 뒤섞인 숨을 헐떡이며, 처절하게 망가진 얼굴의 레이나가 내 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수잔. 이, 잉고르드 공작을 믿어서는 안 돼. 절대, 절대 그래선 안 돼.”

레이나의 음성은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 다만 그녀의 속삭임은 곧장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의 무거운 헐떡임이 뒤섞인 상태였다.

“나는 네가… 수잔, 네가 저 남자와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는 잘 몰라. 널 생각해서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공작이 이런 식으로 무고한 고용인들을 사냥해 온 건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야…. 저 남자에게 있어 이 세상의 모든 건 자신의 광증을 채울 유희와, 황자를 무너뜨리는 데 이용할 말에 불과하니까.”

리히튼 공작의 청회색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향한다. 그에 대해 뭣도 모른다면 정신없이 홀릴 만큼 완벽하고 황홀한 자태였다. 공작은 레이나가 내게 어떤 말을 속삭이는지 알고 있을까? 짐작이나 할까? 레이나의 말대로 순전히 즐기고 있을 뿐일까? 극심한 혼동이 찾아왔다. 그의 머리를 열어 리히튼 잉고르드라는 인물의 사념을 샅샅이 뒤지고 싶었다.

“수잔, 너도… 너도 그에게 이용당하고 있니? 나, 나는 잉고르드 공작에게서 너무 많은 사람을 잃었어. 저 남자는 사람이라 불러선 안 돼, 무자비한 살인마고 자신의 권력에 취한 미친놈이지! …제발. 부탁이야, 수잔. 날 이곳에서 나가게 도와 줘.”

공작보다 더 시린 눈빛으로 날 응시하던 킨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나의 전부와 빌힐름 전하를 향한 충성심을 모두 걸고…. 수잔, 전하께 널 구해 달라고 반드시 전할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이나는 킨의 손아귀에 속절없이 끌려 집무실에서 사라졌다. 그 뒤를 따랐는지 베르크네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빌힐름. 정말 지겹도록 나오는 이름이다. 나는 돌연 내 두 다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폭풍의 눈 가까이 걸어 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도 단순히 리히튼 잉고르드에게 휘말렸기 때문이라 여기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나는 한 번 입에 담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수잔. 너는 그저 고르기만 하면 되니까….”

리히튼이 보이는 미소는 순수한 호의에서 빚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는 일은 보통 타인을 조롱하거나 비웃을 때가 전부였다. 실제 『태양이 흐르는 강』 작중에서도 그런 식으로 묘사되는 일이 태반이었다. 나는 리히튼의 눈동자에 고인 고요한 흥분을 인지하고 몸을 굳혔다. 모든 수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노는 남자가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한다는 건, 그리 긍정적인 신호가 아니었으니까. 그래. 마치 지금처럼.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뭘 원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겨우 하녀… 아니, 개에 불과한 제가 첩자로 몰리는 자의 목숨을 무슨 자격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나요?”

공작에게 있어 이 모든 건 유희거리에 불과하다던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문장을 입에 담던 레이나의 얼굴 위로 짙은 공포가 생생했다.

“무언가 착각하고 있군. 지금 내가 너에게 보여 주고 싶은 건…. 고작 네가 가진 권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다. 수잔, 넌 표정 변화를 꽤 잘 숨기나 그렇다고 내 눈까지 속일 순 없어.”

여느 때처럼 고조 없이 차분한 어투였으나 적어도 그의 시선은 아니었다. 나는 내 이마, 눈, 코, 뺨, 입술 할 것 없이 속속들이 뜯어 살피는 눈빛에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이것 봐. 너는 지금 겨우 눈앞에 닥친 상황에도 썩은 잡초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지 않나.”

“누구라도 휘둘릴 거예요.”

“옳아. 그렇기에 나는 네가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 데 도움을 주기로 한 거다. 개와 주인 사이의 신뢰가 바닥이라니.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지.”

가까이 다가온 그림자가 등불을 가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변명을 하는 게 나을 터였다.

“아니에요, 저는….”

역광 때문인지, 독 때문인지 모를 강렬한 어지러움으로 두 다리의 힘이 풀렸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내 몸을 공작의 팔이 떠받쳤다.

“죄, 죄송해요. 저는 주인님을….”

“수잔.”

무언가 목구멍에서 울컥 쏟아졌다. 공작의 새하얀 셔츠 소매 위로 매캐한 비린내를 동반한 핏덩이가 후두둑 떨어졌다. 억센 손아귀 힘으로 내 얼굴을 잡아당긴 그가 내 눈동자를 꼼꼼하게 살폈다.

“증상이 두드러진다 했더니… 전이되는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빠르군. 정신 못 차릴 만해.”

“아, 곧 괜찮아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극렬한 고통이 찾아왔다.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자 날 부축하고 있던 공작이 아주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나?”

그 누구도 고통과 함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내 허리를 받친 손힘이 더 강해졌다.

“대답해.”

몰리기 시작하는 통증과 열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옅게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공작이 내 입가로 반대쪽 손을 들이밀었다. 멀쩡하던 하얀 손등에 깊은 생채기가 나 있다. 그냥 깊은 게 아니라 고인 피가 손목을 따라 줄줄 흐를 정도였다. 저 상처는 또 언제 어디서 생긴 걸까. 멍하니 공작을 쳐다보자 그가 상처 난 손으로 내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정신 차리고 입 열어. 유리병에 담겨 있던 독물의 원액이 바로 내 피다. 바로 삼키면 네 신경이 마비되어 금방 편안해질 수 있어.”

뭔가 대단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머리에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삼키면 편안해질 수 있다는 발언만이 부유하는 정신 속에 오롯이 선명했다. 이윽고 뒤집힌 손등에서 내 입가로 무언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의 피였다.

‘이걸 삼키라고?’

본능적인 거부감에 입술을 꾹 닫고 고개를 틀었다. 이마 위에서 공작의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별 같잖은 부분에서 자존심을 굽히지 못하는군.”

그리고 무언가 고민하기라도 하듯, 아주 잠깐의 간극 끝에 그가 다시 말했다.

“이건 순전히 너를 위한 거다.”

리히튼이 돌연 자신의 입술 안쪽을 이로 짓이겼다. 제 몸을 상하게 하는 일임에도 미간 한 번 구기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행한다. 얼마나 크게 깨물었는지 새하얀 치아 위로 피가 퍼져 갔다. 리히튼 공작은, 그 상태 그대로 내게 입을 맞췄다. 이미 한차례 피를 토한 터라 피비린내의 역함은 없었다. 다만 나는 코앞에서, 아니 속눈썹이 닿을 거리에서 일렁이는 청회색 눈동자를 멍하니 응시해야 했다.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기 전에 입술이 떨어졌다. 혀에 지독한 무언가가 진득하게 달라붙은 것이 느껴진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 맛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괜찮아, 피를 먹이기 위한 거였어. 그의 손등을 핥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처신이다. 아마 그럴 거야.

꽤 긴 시간 정적이 흘렀던 것 같다. 조심스럽게 내 허리를 놓은 그가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나는 한결 편안해진 몸 상태를 실감하며 공작에게서 그 유리병을 받아 들었다. 킨과 레이나는 집무실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내 피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찾아와라. 다만 그때는 지금처럼 괜한 자존심을 세우지 말아야 할 거야.”

대번 피곤해진 낯으로, 무겁게 한숨을 쉰 공작이 마른세수를 한다. 그를 봐 온 시간 동안 이처럼 지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치 나와의 입맞춤이 원인이 된 양.

“명심할게요.”

이마를 짚은 채 소파로 향한 그가 가죽 위에 무너지듯 앉았다.

“원하는 대로 레이나의 목숨은 보장해 주지. 그래야 네가 이 더러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옳고, 오직 나만 바라봐야 함을 깨닫게 될 테니까.”

백 년이 흘러도 그런 날은 찾아오지 않을 텐데. 리히튼 공작은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아니야.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아. 제대로 된 사정도 모르는 채 휘둘리는 건, 신경이 갉아 먹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지치는 일이다.

***

집무실에서 나온 직후. 나는 의외의 인물과 대면해야 했다. 잉고르드 소속의 기사, 킨이었다. 그는 계단 옆 벽에 기대어 딱딱한 시선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껏 그래왔듯 자연스레 지나치려 했으나, 오늘은 남자의 반응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길을 가로막고는 대뜸 내 눈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보아하니 이번에도 손을 벌린 모양이야. 멍청하긴.”

이제는 노려보는 것으로 모자라 시비까지 건다.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상대할 기운이 나지 않았기에 방향을 틀어 지나쳤다.

“허어, 충고를 해 줘도 무시해? 너 설마 베르크네 씨가 정신 빼놓고 이것저것 받지 말라고 조언해 주지 않은 거냐? 아니면 그 조언을 한 귀로 흘린 건가.”

나는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초면에 말 놓지 마. 안 그래도 당신은 특히 재수 없으니까.”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별개로 친히 조언하러 와 주신 몸에게 언사가 상당히 거친데?”

“그거야말로 내 알 바야? 화풀이를 하려면 다른 사람에게나 하지 그래. 졸졸 뒤따라오지 말고.”

“너는 뭐가 좋다고 그걸 자꾸 받아먹는 거냐?”

베르크네의 말을 무시하고 자꾸 받아먹는 그것.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리히튼 공작의 혈액일 터였다. 공작과 입을 맞추던 순간이 떠오르자 머릿속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지는 기분이었다. 걸음을 빨리 해 계단을 내려갔으나 킨은 끝까지 내 뒤를 쫓아왔다.

“이 멍청한 여자야. 각하의 독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줄은 알고 받아먹는 거냐? 그게 순수하게 네 고통을 해방시키기 위해 사용된다고 생각해?”

이어지는 말에 반사적으로 걸음이 멈췄다. 나는 계단 위에 멈춰 서서 킨을 올려다봤다. 이건 또 뭐 하자는 걸까. 킨이 한심함과 짜증이 뚝뚝 떨어져 흐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쯧, 어려 보이니 모르는 척할 수도 없고. 네가 아무래도 뭘 모르는 것 같단 말이지…. 원액에 가까운 잉고르드 독은 치사량을 섭취할 시 장기를 전부 녹여 버려. 섭취한 자는 하루도 채 안 되어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게 정설이라 보면 된다.”

아무래도 내가 삼킨 독의 명칭이 잉고르드인 것 같았다. 잉고르드 가문의 비독 같은 걸까.

“하지만 그 이하일 때는? 이야기가 조금, 아니 꽤 달라지지. 몸에 심각한 물리적 피해를 입히지는 않으나 환각, 환청, 마비는 물론 극심한 중독 현상을 일으키는 거야.”

“…한 번도 경험한 적 없어.”

“그렇겠지. 유리병 속의 독은 극히 낮은 농도로 희석된 상태고…. 내가 말하는 건 당연히 순수한 잉고르드의 결정체, 다른 말로는 각하의 혈액에 대한 경우니까.”

그 말은 리히튼 공작의 피 자체가 독이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미간을 구긴 킨이 참다 참다 억지로 내뱉듯 이를 악물었다.

“한마디로 말해 줄까? 넌 네 스스로 목에 목줄을 채운 거나 마찬가지다, 이거야. 당장 독이 편안하게 전이되더라도. 그 다음은? 잉고르드는 독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중독성을 지녔어. 존재 자체가 마약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마 잉고르드 없이는 제정신도 유지 못할 껍데기가 되려는 거냐?”

“과장하지 마. 겨우 두 번이었으니까.”

“아아, 그러셨어요. 겨우 두 번이셨어요? 그 두 번이 ‘겨우’였으면 내가 이렇게 지랄하고 있을 것 같으세요? 만에 하나는 없어. 넌 이미 반 이상 강을 건넌 거야.”

술술 뱉는 거친 언사와 함께 킨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마치 내게 묵혀 둔 소릴 바닥까지 다 뱉어 속이 시원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킨의 주장에는 미묘하게 사실과 다른 점이 존재했다. 내가 마신 건 희석된 피가 아닌 리히튼의 피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의 말이 맞다면 지금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상황마다 조금씩 다른 건가.’

그는 구겨졌던 진하고 반듯한 눈썹을 천천히 폈다. 단단하게 단련된 손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래도 우리, 평생 이 땅에서 얼굴 마주하며 살아야 할 것 같은데…. 본인이 어떤 우매한 선택을 했는지 정도는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친구. 잉고르드에 나만큼 친절한 사람 또 없다?”

이윽고 나를 지나친 킨이 후원으로 향하는 통로 너머로 사라졌다. 평생 이 땅에서 박혀 살아야 할 정도의 중독. 공작이 내게 먹인 그 매캐한 피. 나는 멀어지는 킨의 적발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음 날에도 해는 떴다. 비척비척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침실을 나섰다. 나와 함께 삼 층 손님 침실을 청소하던 레이나는 더 이상 없었다. 새로운 하녀가 올 때까지 혼자서 느긋하게 청소하라는 하녀장의 지시가 내려졌다. 오전 일과가 끝나고, 베르크네와 마주치자마자 가슴 언저리에서 맴돌았던 질문을 건넸다.

“레이나는요?”

고민 끝에 물은 것과 달리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답했다.

“새벽에 내보냈다. 당분간 저택이 시끄러워질 것 같군.”

공작은 뱉은 말을 멋대로 번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로 전부가 아니란 걸 안다. 리히튼은 거짓말하지 않고 없는 말을 지어내지도 않지만, 나를 기만하는 사람이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늘 일부만을 알려 내 시야를 암전시키려 했다. 억울하고 아파도 나는 불만을 마음껏 표현할 수 없다. 그와 동등한 위치가 아니니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주, 몹시 긴 시간이. 문득 정신을 차리니 탁상 위에 놓인 시침이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베개 밑에 숨겨 놓았던 베르크네의 단도를 꺼냈다.

“가장 완벽한 급소는 목 아래.”

연습했던 기억을 살려 날을 베개에 박아 넣었다. 의미 없는 발버둥이 될 것 같지만, 그래도 늘 만약은 존재하므로. 극한으로 몰린 인간은 종종 미친 짓을 하곤 한다. 나에게 극한은… 이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답답한 잉고르드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듯, 킨이 날 위한답시고 폭로한 진실은 오히려 내 두 다리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실낱같던 희망이 처절하게 짓밟힌 것이다. 차라리 그를 죽이고 잉고르드를 벗어나 먼 곳으로 떠나자. 그 누구도 나를 찾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으로.

문은 조용히 열렸다. 맨발로 올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무실의 문이 밀려나는 소리는 어쩔 수 없다 해도, 걸음 소리는 죽일 수 있었으므로. 리히튼에게 선물할 단도를 쥐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불안한 감은 늘 맞아 들어가는 법. 혹시나가 역시나로,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발소리 죽이는 법을 배워야겠군. 그건 고작 구두를 벗는 일로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

이전처럼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라거나, 손이 덜덜 떨릴 만큼 두려움이 일지 않았다. 모든 걸 내려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취를 남기지 않는 법 역시 중요하지. 하나부터 열까지 엉망인 걸 봐선 베르크네가 제대로 알려 주지 못한 모양이야.”

그는 달빛이 들지 않는 창가의 끝, 기다랗게 그림자가 진 책장 옆, 고요한 사각지대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 보란 듯이 올린 독이 든 유리병과 은색 접시, 그 위로 가지런하게 놓인 금박 초콜릿이 보였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댄 리히튼의 모습은 흡사 어둠과 한 몸 같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까.”

“왜?”

리히튼은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켜 내게로 걸어왔다. 위압적인 신장이 창문 밖 달빛이 내리쬐는 공간으로 들어선다. 날 향한 시선에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걸음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물 흐르듯 다가온 리히튼이 단도를 빼앗으려 하기에, 참고 있던 화가 울컥 터져 나왔다. 그의 가슴팍을 밀치고 단도를 더 강하게 쥐었다.

“왜 대답을 안 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대체 얼마나 대단하다고 사람을 이렇게 갖고 노는 건데! 네 놀이에 날 이용하는 게 재밌어?”

“재밌느냐… 라.”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쥐어서 부러뜨릴 기세로 내 손목을 붙잡는다. 리히튼은 부들부들 떨리는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폈다. 내 무력감을 증명이라도 해 주겠다는 듯, 느릿한 움직임과 무료한 표정으로.

“재미라는 게 뭔지 모르겠군. 흥미가 동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가? 그렇다면 아니라고 대답하는 게 맞겠어. 너는 내게 딱히 흥겨운 존재가 아니야. 날 지옥 끝까지 몰아넣은 악귀라면 모를까.”

“악귀?”

단도를 빼앗아 침대 위로 내던진 리히튼이 장식대로 걸어갔다. 거침없는 손길에 휘황찬란한 장식 검이 딸려 나온다. 돌아온 그는 텅 비어 버린 내 손에 검을 쥐어 주었다.

“그렇게 내게서 도망가고 싶나? 직접 두 발을 잘라내면 여기서 기어나가는 걸 허락해 주지.”

망연해진 기분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도 어이가 없는 나머지 헛웃음이 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저 미친놈에게 고작 두 발을 바치고 도망칠 수 있는 건 절호의 기회야. 리히튼이 쥐어 준 검을 바로 잡고 멀쩡히 선 두 발을 향해 내리그었다.

“하.”

한숨과 같은 헛웃음이 흩어진다. 고통은 없었다. 몸이 기울어지는 일도 없었다. 의문이 들었으나 무언가 확실히 썰리기는 했다. 그러니까, 내 다리가 아닌 그의 손바닥이.

“약한 자에게는… 삶의 종말을 맞이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지.”

남자의 피는 검었다. 마치 지옥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의 재처럼. 날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카펫 위로 떨어졌다. 강한 탄내가 진동했다. 그의 악력이 내게서 검을 앗아갔다. 날카로운 검 날이 그의 커다란 손바닥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이참에 계속해 봐.”

그가 피범벅이 된 검을 자신의 셔츠에 문질러 닦았다. 고작 두세 번 닦아내는 행위에 흉측한 잔상이 제대로 지워질 리 만무하다.

“몇 번이나 시도할지 궁금하니.”

목구멍 아래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려, 거칠게 씹어 내뱉는 목소리. 고깃덩이가 된 손이 내게 다시 검을 주었다. 뜨거운 피를 한차례 적신 후였음에도 그가 내게 맡긴 검은 뼈가 시릴 만큼 차가웠다. 리히튼은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잉고르드에 온 이래 처음으로, 그가 감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롱과 비웃음이 그가 가진 전부가 아니란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이제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검을 더 강하게 쥐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끄러질 것 같아서. 겁을 먹고 포기해 버릴 것 같아서. 이윽고 다시 검을 휘두르려던 찰나.

“아아, 그래. 이제야 알 것 같군. 너는 죽으면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두 눈과 두 귀에 피가 쏠리는 착각이 일었다. 처음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의 일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검에 눈을 고정한 채, 그가 시를 읊듯 말했다.

“그리 생각하기에 내 앞에서 시위하는 것이겠지. 안온한 너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하여.”

“…갑자기 무슨.”

“쉿. 진정해, 수잔.”

“네가 그걸 어떻게….”

억지로 무시해왔던 지독한 현실감이, 거대한 해일이 되어 날 집어삼킨다. 감히 그 누구에게도 내보일 수도, 들을 수도 없던 진실이었다. 입에 담게 되더라도 그 상대가 리히튼 잉고르드가 될 거란 상상은 추호도 하지 못했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설마, 설마라는 가정이 있을 수 있나. 그래도 설마 리히튼이…. 나를 따라서 몸을 굽힌 그가 답지 않게 상냥한 어조로 타이르듯 속삭였다.

“나 역시 그동안 네게 묻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어. 하나하나 세면 보름을 훌쩍 넘길 정도지. 수잔, 너는 스스로가 누구이고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있나? 너와 나의 만남이 불운과 우연의 집합체라고 여기는 건가?”

그 말에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차갑게 굳었다.

‘날 지옥 끝까지 몰아넣은 악귀라면 모를까.’

내 착각이 아니다. 리히튼은 마치 오랜 예전부터 날 잘 알고 있었다는 듯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너, 나를 알아?”

기다란 백금색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빡인다. 리히튼은 내가 본 웃음 중 가장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잘 알지. 네 스스로보다 더.”

리히튼은 아그레인에 대해 알고 있다. 그렇겠지, 난 이 약해빠진 육체의 진짜 주인이 아니니까. 그리 여기니 모든 것이 간단해졌다. 리히튼 잉고르드와 아그레인은 과거에 인연이 있는 사이고, 차후 『태양이 흐르는 강』에 적힐 예정이었던 것이다.

당장 닥친 상황에 적응하느라 많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건 나와 리히튼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그레인과 리히튼의 이야기라는 것을. 따라서 리히튼이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바깥 세계의 인물이라는 건… 그래, 바보 같은 생각이지. 돌연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졌다.

‘너는, 죽으면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무슨 의미일까. 단순히 아그레인의 고향을 의미했던 걸까? 절대 그럴 리 없었다. 분명 무언가가 더 존재한다. 늘 그러했듯, 리히튼은 내게 선택적으로 정보를 흘리는 게 분명했다.

“조금 더 지켜보려 했는데…. 네 상태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군. 좋아. 네가 친히 목숨을 걸고 내게 왔으니 그 성의를 무시할 순 없지. 나와 내기를 하자, 수잔. 번지르르한 말이 아닌 서로를 걸고.”

서로를 거는 내기. 그를 죽이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음은 이미 망각한 후였다.

“내기는 내가 널 완벽하게 길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하여. 네가 이기면 모든 진실을 알려 주지. 궁금한 게 많을 거라 생각하는데…. 안 그래? 살아 있는 독으로 변해 버린 네 몸, 그리고 내 피로 인한 중독, 모두 완벽하게 치료해 주겠어. 그리고 다신 네 옆에 얼씬도 하지 않으마.”

“헛소리하지 마. 내가 네 그 유창한 혀 놀림에 또 넘어갈 거 같아? 내기에서 내가 지면? 뻔해, 그걸 빌미로 더 지독하게 개처럼 부려 먹겠지. 난 도박은 안 해.”

“아니, 해.”

리히튼의 새까맣게 그늘진 청회색 눈동자가 내 눈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내가 이기더라도,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 주지. 제국을 달라면 제국을 주고, 하늘을 무너뜨리라면 하늘을 무너뜨릴 거야. 대신, 빌힐름만은 선택해선 안 돼.”

마지막 문장에는 등이 쭈뼛할 정도로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점을 제외하고도, 리히튼의 설득은 어딘가 많이 이상했다. 지든 이기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이런 것을 과연 내기라 할 수 있는 걸까. 그 어떤 바보가 듣더라도 리히튼이 손해임을 인정할 텐데.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건?”

“그건 해 봐야 알겠지.”

리히튼이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피가 묻지 않은 말끔한 손으로. ‘해 봐야 알겠지?’라니. 참으로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네가 할 일은 하나야. 우리의 내기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오직 나만 따르고,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것. 시간이 흐르면 그 끝에서 무엇이든 얻을 수 있을 테지. 그야말로 손해 볼 일 없는 조건 아닌가?”

그의 유연한 목소리는 메꾸어지지 않는 불안의 틈을 아주 완벽히 공략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 후 어찌해야 하는가. 죽는다고 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나에게 필요한 건 막연한 도피가 아닌 확실한 도피였다.

그가 내게 제안한 순간부터,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나의 길은 앞도 뒤도 벼랑이다. 그러니 한 번 더 리히튼의 꿀 발린 말에 넘어가는 것도, 그런 것도 어쩌면….

“왜 나야?”

내 손을 움켜쥔 힘이 언뜻 강해진 것 같았으나, 아주 잠시의 일에 불과했다. 뒷걸음질 쳐 그림자 안으로 몸을 숨긴 리히튼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위태롭다고? 그렌페르크 제국의 황제 다음으로 제일가는 권력자이자, 황자 빌힐름과 알력을 다투는 그가? 푸르스름한 눈가에 날 선 안광이 스쳤다. 리히튼은 귀를 기울여야 겨우 알아챌 희미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거창한 이유는 없어. 그저 내가… 기나긴 시간을 오직, 너만 갈망하고 살아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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