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1권) (1/24)

[안경] [ㅇㅇ]

공금, 요게X

조연의 반격은 없다 1권

프롤로그

트리비아체 가문이 멸문했다.

마치 남의 일인 양 말하기는 했어도, 트리비아체는 내가 긴 시간을 의탁해 온 삶의 터전이었다. 눈앞에서 불타오르는 오랜 저택을 허망한 기분으로 응시했다. 이런 식으로 끝나다니. 더 일찍 도망쳤어야 했던 것일까. 예견된 일이었다지만, 적어도 그날이 오늘이었던 것은 아니다. 무려 삼 년이나 앞당겨 일어난 멸문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도축을 앞둔 돼지처럼 후원까지 끌려 나와야 했다.

“트리비아체 가문은 그렌페르크 제국의 살아 있는 역사나 마찬가지였는데 말입니다. 오랜 저택이라 그런지 허물어질 때마다 비명이 들리는 것 같군요.”

“감상에 젖어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비명이 들리는 건 당연하다. 안에 고용인들이 남아 있으니.”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기사가 몸서리를 쳤다. 일그러진 눈으로 남자를 훔쳐보는 시선은 이미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

“여기까지 끌고 온 하녀들은 뭡니까? 저택 안에서 잿더미가 되게 놔두지 않으시고.”

기사는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이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옆으로 나란히 꿇어앉은 하녀들이 찬바람에 에이는 나뭇가지처럼 벌벌 떨었다. 그들 사이를 한차례 쭉 훑던 기사의 서늘한 눈빛이 정확히 나를 향했다.

안 돼.

숨을 참으며 바닥으로 고개를 박았다. 여기서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것 하나 없었다. 목구멍을 간질이는 울음을 꾹 참아내고, 제비 새끼처럼 다닥다닥 붙어 앉은 하녀의 손을 맞잡았다. 고개를 든 또래 여인의 얼굴은 피딱지와 그을린 재로 엉망진창이었다. 내 꼴 또한 그녀와 다를 바 없으리라.

“아그레인….”

소설 『태양이 흐르는 강』에 들어온 지 삼 년. 정말, 이제 고작 삼 년이었다. 나는 미래의 패자가 될 주인공, 빌힐름 황자의 숨은 조력 가문인 트리비아체에서 하녀 노릇을 해왔다. 가문의 잡일을 도맡아 하는 하녀의 일이 손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살아남으려면 무엇이든 해야지. 다행히 넉 달이 지났을 무렵에는 고된 잡일도 몸에 익었다.

문제가 있다면 트리비아체가 육 년 후에 멸망할 가문이라는 사실이었다. 사람 죽이는 일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잔학무도한 살인마. 주인공 빌힐름의 숙적이자, 그렌페르크 제국의 실세인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이 바로 그 선봉장이었다. 죽음을 대비하여 생각해 낸 방책은 트리비아체에서 삼 년을 일한 뒤 제도로 떠나는 것이었다. 미래에 벌어질 일을 모두 아는 만큼 취할 수 있는 이득은 모두 취해 떵떵거리며 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다들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나의 꿈 역시 제도에서 값비싼 드레스와 보석을 품에 안고 상위 계층의 문화를 누리는 일이었다. 하녀라는 지위는 내가 누리기에 너무나 비천하고 무능한 지위라 생각했다.

한데 작년부터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소설 속에서는 존재감도 없던 귀족 여식이 갑작스레 사교계의 중심으로 급부상했으며, 돌연 미래를 보는 예언자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즈음에는 빌힐름 황자와 리히튼 공작이 한 명의 여인을 두고 신경전을 벌인다는 소문 또한 급속도로 퍼져갔다.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 책 속에 떨어진 건 나뿐만이 아니구나.

“사흘 후 트리비아체의 하녀 일을 그만둘 예정이었다더군.”

“이 셋이서 말입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고작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들 따위가 우리의 대업을 예상했단 건 아니겠지요.”

“모든 건 각하께서 명하신 일이다. 우린 단지 그분의 말씀에 따를 뿐.”

입술이 아팠다. 찢어진 살갗에서 계속 피가 흘렀다.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굴리느라 잘근잘근 씹은 탓이다. 친분이 있던 하녀들과 조용히 떠나려 했을 뿐인데, 설마 계획 단계에서부터 발목을 잡힐 줄은 몰랐다. 깍지 낀 손에서 전달되는 하녀의 떨림이 더 거세졌다. 나도 무서워. 그녀의 공포가 여실히 전달되어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하는 기분이었다.

“각하께서는?”

“오고 계신다.”

그 말에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었다. 저택을 집어삼키는 붉은 화염의 손아귀와 하늘을 물들이는 새까만 연기. 매캐한 공기에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으나, 점차 가까워지는 남자의 실루엣은 아주 선명했다.

청회색 눈동자 속 유려하게 흔들리는 뜨거운 불길이 보인다. 깨끗하다 못해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백금발이 그의 살 떨리는 존재감을 더욱 부각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등 뒤로 타들어 가는 제국의 역사와 사람들의 죽음을 감흥 없는 시선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어깨는 마치 승기를 잡은 맹수의 여유로운 움직임처럼 보였다. 코앞에서 걸음을 멈춘 남자가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우리를 훑었다.

리히튼 잉고르드. 『태양이 흐르는 강』의 전개를 비틀어 버린 수 명의 빙의자를, 이 세계에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워 버린 남자. 미래를 이용해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란 나의 기대를 덧없는 착각으로 추락시켜 버린 남자.

“노쇠하였어. 우리 제국의 오랜 역사를 지닌 가문도… 불길에 무너지는 모습조차 이렇게 추하다니.”

리히튼 공작의 목소리에는 나 같은 범인마저 숨을 멎게 하는 기묘한 힘이 존재했다. 그에 나는 모든 계획이 완벽하게 틀어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남자에게서 도망치려는 행위는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억울하고 원통했다. 내가 왜 이런 식으로 죽어야 하는가? 나는 무고했다. 다른 빙의자처럼 세상을 멋대로 휘두르려 하지도, 그들을 업신여기지도 않았다. 그저 마음만 먹은 데서 그친 게 전부였다. 트리비아체에 가만히 박혀 잡일만 한 것이 다인데, 그마저도 문제였다면 무얼 어째야 했던 걸까.

“고개를 들어 나를 봐라.”

나른한 명령에 후회와 원망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나는 깨물던 입술을 놓고 리히튼 공작을 응시했다.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급격한 피로가 쌓이는 기분이었다. 나를 비롯한 세 명의 하녀를 차례로 응시한 공작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오른쪽 두 명은 죽여.”

“아, 안 돼!”

“부디 살려만 주…!”

오가는 비명에 정신 차릴 겨를도 없었다. 단 일격에 내 왼쪽에 앉아 있던 두 명의 하녀가 힘없이 쓰러졌다.

“…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떨리는 손으로 뺨을 쓸자 분수처럼 튄 뜨거운 피가 손바닥 위에 묻어 나온다. 목이 메었다. 숨 쉬는 일이 이리도 버거울 수가. 다가올 죽음이 벌써부터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저 일격에 목숨을 잃는 자가 나였으면 더 나았을 텐데.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닦는 동안, 리히튼 공작이 허리를 굽혀 날 응시했다.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아졌다. 겁에 질린 더러운 낯이 청회색 눈동자에 언뜻 비칠 만큼. 그리고 서로의 숨결이 지척으로 닿을 만큼.

“너로군. 내게서 도망치려 했다던 하녀가.”

리히튼의 음성은 낙엽처럼 거칠고 한겨울 초원처럼 건조했다.

“똑똑해. 동시에 우둔하지. 나였다면 자정이 지나자마자 홀로 트리비아체를 벗어났을 텐데. 둘도, 셋도 아닌 혼자서 말이다.”

말대답할 용기도, 자신도 없었다. 책 속의 고작 몇 문장으로만 접했던 리히튼 공작의 위압감은 그만큼이나 대단했다. 내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잡아 뜯어낼 기세로 살핀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단정한 손가락 아래로 이에 무참히 씹히고 있던 내 입술이 제자리를 되찾는다. 공작이 손을 거두자마자 입 안에서 진한 피 맛이 났다. 그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무너진 하녀들의 시체를 건드렸다.

“이 하녀들 때문인가? 트리비아체가 하루아침에 멸문할 거라 조언하더라도 쉬이 믿지 않았을 테니. 그래서 우둔하다는 거다. 정과 목숨의 무게는 다르니까.”

우둔? 잘 살아가던 내 인생을 망쳐 버린 당사자가 할 소리인가. 곧 북극의 빙하와 견주어도 될 정도로 차갑고 시린 손가락이 내 턱을 잡아당겼다. 덜덜 떨리던 몸이 그와 맞닿자마자 시체처럼 굳었다. 나는 긴장으로 침도 삼키지 못한 채 남자를 응시했다.

나는 이대로 죽을지 모른다. 아니, 아마 죽을 것이다.

“우둔한 너를 위해 특별히 두 개의 선택지를 주지.”

반갑기는커녕 두려운 제안이었다. 내게는 고통스럽게 죽을지, 아니면 덜 고통스럽게 죽을지 고르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선택해라. 평생을 비참하게 내 밑에서 개처럼 길지, 아니면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지.”

개. 아니면 죽음.

‘다른 자들에게도 이 같은 제안을 해왔을까? 아니면 내게만….’

생각의 끝으로 도달하기 전에 급히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가정이다. 내게만 다르다고 생각하면 안 돼. 이제껏 스스로를 특별하다 여긴 빙의자들이, 바로 저 남자 손에 속절없이 죽어 가지 않았는가? 악역은 괜히 악역이 아니고, 주인공도 괜히 주인공이 아니다. 빌힐름 황자와 리히튼 공작에 빌붙어 권력을 누리려던 빙의자, 죽음을 피해 안락한 삶을 누리려던 빙의자,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도 고작 삼 년 만에. 아마 내가 모르는 더 많은 빙의자들이 이들 손에 죽어갔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살려 주세요. 저, 각하의 충실한 개가 될 자신 있어요.”

리히튼 공작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를 비웃었다. 그가 대리석만큼이나 깨끗하고 단정한 손등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비참하게도 말 잘 듣는 애완 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공작이 멀어지자마자, 누군가 내 어깨 위에 두터운 담요를 덮었다. 나는 삼 년간 함께해 온 하녀들의 시체를 밟고 비틀비틀 일어섰다. 무릎 아래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미안해, 케이시. 날 용서하지 마, 로나. 하지만 살고 싶어. 나는 악당의 발밑에서 개처럼 기어서라도 이곳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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