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243.
“사장님! 일어나세요!”
앨리스의 목소리에 어영부영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 가장 처음 보이는 것은 내 방이 아니라 어제의 술판이 깔끔하게 치워진 손님맞이용 테이블이었다.
“나 왜 여기 있냐.”
앉아서 멍하니 있었다.
입이 찢어질 정도로 힘껏 하품하는 동안, 앨리스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패드를 두드리자 무소음 로봇청소기가 가동을 시작하고, 커피포트의 물이 끓기 시작했다.
사무실 소파에서 잔 탓에 왠지 찌뿌둥한 몸을 풀어주기 위해 기지개를 켜자 아랫도리에서 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앨리스가 볼 때마다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내 집업 후드였다.
후드 아래 내 하반신은 속옷만 입은 채였다.
어젯밤의 일이 새록새록 떠오르려는 찰나, 앨리스가 내 앞에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방에 올라가서 트레이닝복 바지 가져왔으니까 입으시고요. 이거 드시고 정신 좀 돌아오시면 어제 시청이랑 성북 에어리어 다녀오신 거 어떻게 되셨나 얘기 좀 해주세요.”
“응······. 바지는 어디 있어?”
“사장님 자리 의자에 걸어놨어요.”
바닥에 떨어진 후드를 주워서 걸치자 앨리스가 버럭했다.
“그걸 왜 주워 입어요! 추우실까 봐 덮어놓은 거니까 다른 거 입어요! 바닥에 떨어지기까지 한걸!”
앨리스가 열어놓은 창문을 가리키며 답했다.
“추워······. 그리고 떨어지고 바로 주워서 더러운 거 없어. 3초룰 몰라? 떨어지고 3초 안에 주우면 깨끗해. 설령 더러워졌다면 청소를 제대로 안 한 네 잘못 아닐까?”
한심 정도였던 앨리스의 눈빛이 경멸 단계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청소는 항상 깔끔하게 해요. 그리고 세상이 어느 때인데 그런 소리를 하세요.”
“세상이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가치가 있어. 3초룰도 그런 거지. 앗! 뜨거워!”
“김이 펄펄 나는 커피를 다짜고짜 들이붓는 건 사장님이 안드로이드가 아닌 이상 해서는 안 될 일이에요. 안드로이드도 구형 모델들은 고장 위험 때문에 안 하는 짓이고요.”
“아침부터 잔소리, 잔소리, 잔소리. 서러워 살겠나. 누가 사장인지 모르겠네. 네가 사장해라.”
내 불평을 건성으로 들어 넘기는 앨리스였다.
“그럴까요? 그럼 가서 창문 닫고 오일샌드 하나 꺼내서 저한테 가져다주실래요? 저 그거 먹는 동안 메일이랑 메시지도 확인하셔야 해요. 빨리요.”
“됐다. 내가 사장하련다.”
손에 든 커피를 후후 불며 내 책상으로 돌아가자 책상 위에 칼자루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의자에 걸려있던 바지를 입기 직전에 앨리스에게 물었다.
“어제 입었던 바지는 어떻게 했어?”
“그거요? 버렸죠. 사장님이 핫팬츠 입고 다니기로 마음먹지 않은 이상 그건 입으면 안 돼요.”
“이수련 씨한테 변상하라고 할 거야.”
다시 한번 어제의 기억이 떠오르려는 찰나, 이수련이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언니! 문 부서져요!”
“이 정도로 부서지면 그게 문이겠느냐.”
“숙취······는 없는 것 같네요? 다시는 언니랑 술 먹자고 하나 봐요.”
“본좌에게 숙취 따위는 없느니라.”
앨리스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이수련은 바지에 다리를 집어넣고 있던 나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역시!”
이수련의 반짝거리는 눈을 보고 있으니 불안감이 치솟았다.
“뭐가 역시에요.”
“거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더니 드디어 낭군과 본좌가 역사를 만들어내었구나.”
그리고는 나를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눈 떠보니 낭군의 방, 옷을 걸치지 않은 낭군!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뜨거운 거사를 암시하고 있지 않으냐. 눈을 떴을 때 낭군이 옆에 있었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 정도는 본좌가 이해하도록 하마.”
“그런 일 전혀 없었거든요?”
“이제 와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아주 앙칼지구나. 그런 모습 또한 매력이 있느니라.”
어제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울분을 토해냈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고요. 앞으로 이수련 씨는 이 근처에서 술 먹으면 제가 찾아가서 술병으로 머리통 깰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내 말에 담긴 진심을 읽었는지 이수련이 내 눈치를 보며 앨리스에게 속닥거렸다.
“정말 아무 일도 없던 것이냐?”
“일이 가리키는 게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언니 정말 기억 안 나요?”
“본좌는 낭군이 사무실로 들어온 게 마지막 기억이니라.”
.
.
.
술에 취해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준 이수련이 어제만큼은 나와 함께가 아니면 묵고 있는 호텔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이수련보고 내 방 가서 뻗어 자라고 소리쳤다.
물론 이수련은 순순히 협조하지 않았다.
계속 내가 고자가 아닌 걸 확인해야 한다고 울부짖었다.
제발 법술로 취기 좀 몰아내라고 애걸복걸을 해도 절대 안 된다고 울더니, 곧 웃으면서 내 바지를 벗기려고 들었다.
그때는 법술을 사용하면서.
쏟아지는 법술로부터 강제 하반신 노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가속, 회피와 관련된 스킬들을 가리지 않고 사용해야 했다.
불사조의 화염에 꼬리 하나가 그을려서 법술이 예전 같지 않다고 투덜대더니 다 엄살인 게 분명하다.
바지 벨트가 뱀으로 변했을 때는 진짜 기겁했다.
뱀을 던져버리자 바지가 밑단부터 썩은 나뭇잎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일이 그렇게까지 되자 나도 모르게 티셔츠만은 제발 건드리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후드득 소리와 함께 바지가 거의 다 흩어지고 속옷이 드러나자 이수련은 풀린 눈으로 피식피식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본좌 앞에서 그렇게 입고 대머리가 됐을 적의 낭군이 기억나는구나.”
겨우 극복한 정신적 외상까지 끄집어내는 악독함에 나는 도와달라고 앨리스에게 울부짖었다.
결국 보다 못한 앨리스가 이수련의 법술이 자신에게까지 오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다가간 뒤 술을 더 먹여서 완전히 뻗어버리게 만든 후에야 이수련의 난동이 멈췄다.
나는 바지가 사라진 채로 하반신에는 팬티, 상반신에는 티셔츠만 입고 이수련을 어깨에 짊어지고 방에 가서 침대에 던져버렸다.
그 후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해서 누워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다른 바지를 꺼내 입기는커녕 그대로 사무실로 내려와 신발 벗고 소파에 눕자마자 뻗어버렸던 것 같다.
.
.
.
“그럴 리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이 황망한 시선을 보내는 이수련이었다.
그러다가―.
“그럼 지금부터라도!”
“미쳤어요? 오지 마요! 말했어! 오지 마!”
“둘 다 아침부터 뛰어다니지 마요! 청소는 다 제가 하는데!”
눈이 홱 돌아서 내게 달려드는 이수련을 피해 달아나는 중, 바로 앞에서 사무실 문이 다시 열렸다.
“좋은 아침!”
방긋방긋 웃으며 들어온 신시아였다.
충돌할 수는 없기에 급하게 속도를 줄였고, 그 바람에 뒤에서 따라오던 이수련에게 잡히고 말았다.
“양물! 양물을 보자꾸나!”
“아, 안돼!”
급하게 트레이닝복 바지 허릿단의 고무줄을 움켜쥐었으나 하도 입고 다녀 무릎이 튀어나오고 고무줄의 탄력을 잃어버린 바지는 이수련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맥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와중에 간신히 애를 써서 팬티까지 내려가는 걸 막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지만 낮에 이루어져도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니라!”
이수련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칠 때, 순식간에 사무실 전체에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이수련의 공세를 방어하느라 사무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것은 신시아의 붉은 눈동자였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 주위로 진해지는 녹색 안광이 한층 더 공포스러웠다.
신시아가 입을 열자 시커먼 사기邪氣가 쏟아져나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망자를 심판하는 염라대왕의 것처럼 무겁고 장중했다.
“둘, 지금 뭐 하는 거죠? 특히 이수련 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얼굴에 가득했던 미소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신시아의 뒤에 있는 문을 통해 앨리스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쓰레기 버리고 올게요.”
덜컥-
문 닫힌 사무실.
존재하는 것은 흡혈귀 사령술사, 구미호 로봇공학자, 둘 사이에 낀 보잘것없는 인간 하나뿐.
“낭군과의 거사를······읍!”
이수련의 입을 막은 뒤, 주섬주섬 일어서서 바지를 챙겨입고 신시아에게 물었다.
“어제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생각 정리할 거니까 찾지 말아 달라고?”
“생각 정리하신다면서 왜 구미호랑 놀아나고 계시죠?”
“놀아나기는 누가 놀아나요.”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는데, 자기 입을 막고 있던 내 손을 치우는 데 성공한 이수련이 말했다.
“푸하! 신시아 너는 데이트를 했지만 본좌는 낭군의 양물을······!읍! 으읍!”
다시 이수련의 입을 막고 신시아에게 빠르게 말했다.
“이수련 씨 어제 앨리스랑 술 마셔서 제정신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놀란 표정을 짓는 신시아.
“앨리스가요? 저한테는 그런 얘기 한 적 한 번도 없는데.”
앨리스를 조금 곤란하게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앨리스가 나를 곤란하게 만든 것에 비하며 새 발의 피만도 못할 게 분명하니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신시아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저 오메가 님 찾은 거 아니에요.”
“그럼요?”
“앨리스 찾아온 건데요? 그런데 우연히도 오메가 님이 여기 계셨네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하는 신시아였다.
밖에 나가서 며칠씩 있는 의뢰가 아니면 아침 시간에 항상 내가 사무실에 있는 걸 누구보다 잘 알 거면서.
“그래요. 뭐 그렇다고 칩시다.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으악!”
내 손을 깨물어 탈출에 성공한 이수련이었다.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있는 신시아를 향해 이수련이 콧방귀를 끼었다.
“저번에 그렇게 본좌에게 혼이 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이냐?”
“나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어. 이번엔 쉽지 않을걸.”
둘의 첫 대면이었던 공공 집행본부 앞에서의 일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바이저를 쓰고 그 위에 로봇 헤드를 만들어낸 이수련.
“정신을 못 차린 게로구나. 본좌의 꼬리 하나가 불타 법술이 약해졌다지만 애송이 사령술사 정도는 몸풀기도 되지 못하거늘.”
로봇 헤드의 눈에서 빛이 번쩍이자 신시아의 안광 역시 선명해졌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라니까?”
“그걸 대봐야 아는 시점에서 이미 그른 것이니라.”
일촉즉발의 상황.
이수련의 공격으로 고무줄이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인지 계속해서 내려가려는 바지의 허리춤을 붙잡고, 둘을 향해 외쳤다.
“둘 다 그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은 원래 상태로 돌아와 나를 바라봤다.
이 정도면 내가 말려주길 기다리고 있던 수준 아니야?
둘의 속내는 어찌 됐든, 해야 할 말은 해야 했다.
“신시아한테는 어제 한 말인데, 저 요새 머리가 복잡해서 생각 좀 정리하려고 하니까 이수련 씨도 저 찾지 말아요. 알겠어요? 그리고 제가 됐다고 할 때까지 둘 다 사무실 출입도 금지.”
“어째서!” / “어째서요!”
예상했던 거친 리액션이었다.
모르겠다.
나는 내 할 말이나 마치련다.
“저 복잡한 사람 아니라서 생각 정리라고 해 봐야 얼마 안 걸려요. 길어야 일주일? 그러니까 정리 끝나면―.”
둘의 시선을 각각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삼자대면합시다.”
그렇게 말하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뒤에서 신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그런데······어디 가세요?”
“······바지 갈아입으러요. 말씀드린 건 당장 오늘부터 시작이니까 저 내려올 때 두 분 다 사무실에 계시면 안 돼요.”
건물 복도로 나와 사무실 문을 닫으니 옆에서 앨리스가 넉넉하고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이제야 좀 남자답네요. 그동안은 영······.”
“뭐래, 이 악마야.”
눈을 한 번 흘겨주고 위층의 내 방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고무줄 풀린 바지가 계속해서 내려가려고 용을 쓰는 것이 마치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온몸 비틀기 하는 나 같아서 조금 안쓰러웠다.
물론 그런 감정과는 별개로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지를 벗어서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화장실로 가 세수를 하고,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다짐했다.
“지금은 좀 복잡하지만, 할 수 있어. 너 이것밖에 안 돼? 더 힘든 일도 잘 헤쳐나왔잖아.”
그리고 다음 날, 사무실로 찾아온 어떤 이의 발언에 의해 정리되어가던 생각과 위태롭던 멘탈이 한순간에 날아가게 된다.
“오메가 씨, 네오-서울에서 추방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