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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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당장이라도 야스민 공을 잡아먹을 듯 윽박지르는 신시아.
신시아의 등장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 야스민 공이 흠칫하다 책상 위에 떠 있던 사진 중 하나를 건드렸다.
그러자 이제 키스 사진들은 책상 위가 아니라 서재 전체로 뻗어나가 우리를 둘러싸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수치심 MAX······.
이대로 수치사해서 무덤에 묻히면 그 무덤에서 계속해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날 거다.
내 시체가 이불킥, 아니 관짝킥을 하느라.
물론, 하나 확실히 해두자면 신시아와의 키스가 부끄럽다는 게 아니라 이 상황이 부끄러운 것이다.
신시아 역시 나와 비슷한 감정인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소리쳤다.
“지금 저랑 해 보자는 거예요? 어디까지 저를 부끄럽게 만드셔야 직성이 풀리시겠어요!”
신시아의 눈에 녹색 빛의 사령술 기운이 스멀스멀 모이는 것으로 보아 야스민 가문 찬탈의 현장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아······이게 무슨 짓이냐.
-가주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지 아주 유명한 어느 장면이 다른 세계와 다른 인물로 재현되나 싶었지만, 딸이 아버지의 목숨을 거두는 일은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다.
“실수다, 실수. 네가 말도 없이 들어오는 바람에 놀라서 벌어진 실수.”
야스민 공이 허둥지둥하며 책상과 링크해두었던 자기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자 그때까지도 빙글빙글 돌고 있던 사진이 사라지고 책상도 원래의 원목 상판으로 돌아왔다. 괜히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는 야스민 공이었다.
“네가 오는데도 레이먼드는 왜 아무 말도······.”
“제가 말씀드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두 분이 이렇게 모인 이유가 궁금했거든요. 여기 올 때면 꼭 알려주시던 분이 저한테 말도 안 하고 오신 이유도요.”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때는 아주 나를 잡아먹을 듯이 보는 신시아였다.
사령술 기운은 거두어들였는지 사라졌지만 흡혈귀 특유의, 상위가문일수록 진하게 발현된다는 붉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건 심력은 여간 소모하는 일이 아니었다.
이곳은 야스민 가문 찬탈의 현장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쪼그라들어 죽는 장소일 수도······.
한참이나 나를 쏘아보던 신시아의 입이 열렸다.
“오메가 님은 일단 나중에 얘기해요. 나가 계세요.”
나도 모르게 다리를 절뚝이면서 신시아 곁을 스쳐 가며 ‘······고맙다.’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주춤거리며 나가려는데, 야스민 공의 말이 나를 붙잡아 세웠다.
“아니지. 나가지 말게. 이렇게 셋이 모인 김에 다 열어놓고 얘기나 해 보자고. 내 딸과 이어질 마음은 있나? 데리고 놀다가 팽할 생각이라면······.”
“아버지! 진짜!”
신시아가 다시 눈에 녹색 빛을 모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열려버린 야스민 공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걸세! 신시아 너도 편들지만 말고 냉정히 생각해보거라! 네가 부족한 게 뭐가 있다고! 먼저 들이대기까지 하는데 저토록 묵묵부답이란 말이냐! 남녀관계가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야!”
늘 새하얗던 피부가 조금 붉게 물든 신시아가 거칠게 반응했다.
“제, 제가 언제 들이댔어요!”
“그럼 이 사진이랑 영상은 다 뭐란 말이냐.”
야스민 공이 다시 반지를 책상에 링크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거의 발작에 가까운 반응속도로 막아서는 신시아였다.
박쥐 무리로 변해 신시아의 손아귀를 피한 야스민 공이 서재 내부의 2층 난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말이야. 싫으면 싫다고 밀어내기라도 하던가. 입 맞추고 있으니 아주 좋아 죽더구먼.”
좋긴 했지만 좋아 죽을 정도는 아니라고 정정하기 위해 입을 열기 무섭게 야스민 공이 말했다.
“설마 아니라고 할 건 아니겠지? 그럼 정말 자네 양심도 없는 거야. 그러니 자네, 입이 있으면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여기서 다 해 보게.”
내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 신시아의 고함이 먼저 터져 나왔다.
“아빠! 그만!”
살기가 풀풀 흐르는 말투였지만, 야스민 공은 오히려 감동한 눈치였다.
“오오······아빠라니······네게서 그 단어를 들어본 지가 언제인지 아득하구나.”
얼마나 됐을까? 100년? 200년? 고개를 돌려 신시아를 보고 있자니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답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어요.”
정확한 햇수를 알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충 150년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날 향해 있던 시선을 야스민 공에게로 돌린 신시아.
“그리고 저 말고 레비 오빠는 아버지한테 아빠라고 부르잖아요!”
“아들의 아빠와 딸의 아빠는 무게감이 다른 법이란다. 그리고 레비를 못 본 지도 30년이 넘지 않았니.”
야스민 본가 삼 남매 중 둘째인 레비는 50년 목표 폐관 수련에 들어가 있다고 했던가.
여러모로 범상치 않은 집안이긴 하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좀 가만두시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다가 한창 좋을 때 다 보내고 나중에야 후회하는 거다!”
사고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면 불로장생하는 흡혈귀들에게는 매일이 한창 좋을 때인 것 같지만, 이 역시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2층 난간에 서서 아래 있는 신시아를 향해 잔소리하는 야스민 공과, 아래에서 2층 난간을 향해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신시아를 지켜봤다.
분명 상호 간의 존중과 애정이 느껴지긴 하지만 살벌하기 짝이 없는 부녀간의 대화를 BGM 삼아 생각했다.
마치 야스민 공처럼, 내 머릿속에서 또 다른 나를 만들어 놓고 문답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기 위함이었다.
일단 첫 질문.
-이쁘냐?
친구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면 으레 나오는 질문.
진짜 예쁜지, 예쁘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네 주제에 여자를 만난다고?’의 변형 형태에 가깝다.
하지만 진지하고, 객관적으로 답했다.
-이쁘지.
엔터테인먼트 쪽에서 여왕이라 불리는 가연과 나란히 있어도 굴욕 하나 없는 걸로 검증 끝난 사실이다.
사령술 협회의 이미지는 신시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도 정설로 여겨진다.
또 다른 자아도 수긍했다.
-인정. 능력은······넘어가자.
-판단 빨라서 좋네.
-다 아는 사실이니까. 후딱후딱 넘어가자고. 자기 분야에서의 입지, 재력, 처가 등등 뭐 하나 빠질 게 없네. 그럼 이건 어때. 너? 아니 나? 우리?는 신시아를 좋아하냐?
-이성적으로?
-신시아가 동성은 아니니까.
어려운 질문 같았는데, 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좋아해.
신시아를 처음에 어떻게 만났더라.
타이린드의 소개로 사무실에 왔었을 거다.
그때는 마치 연예인과 팬 같은 사이었는데 여러 일로 얽히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감정이 조금씩 깊어졌다.
스스로 묻어두고, 외면했을 뿐.
또 다른 자아가 웃었다.
-다른 사람 꿰뚫어 보는 건 잘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보지 못했구나?
-그랬나 봐. 된 건가?
-결심이 섰어?
-어느 정도는.
-조심해.
-무슨 소리야? 왜 조심하래.
-몰라. 결혼한 사람들이 이때를 조심하라더라고. 결심한 이때를 잘 넘겨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또 다른 자아가 사라졌다.
생각을 마쳤을 때, 부녀 싸움은 소강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좋은 놈일수록 꽉 잡아채서 다른 것들이 눈독 못 들이게 해야 하는 게다!”
“오메가 님을 물건처럼 말하지 마세요!”
“수호자 구미호가 오메가를 보는 눈을 보거라! 아주 탐욕이 묻어나더구나! 너처럼 어영부영하다가는 다 빼앗기고 후회하는 게야! 남 좋은 일만 하는 거라고! 야스민 가문의 일원, 그것도 내 딸이 그러는 건 절대 못 본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못 봐!”
······소강상태가 아니었구나.
야스민 공이 저렇게 흥분한 건 마도공학 유물에 관련된 사항을 제외하면 처음 본다. 그만큼 신시아를 아끼고 있다는 소리겠지.
“잠깐만요!”
흡혈귀 부녀의 눈이 내게 향하는 걸 확인하고 말했다.
“생각 정리 좀 할 테니까. 그동안 저 찾지 말아요.”
얼어붙은 둘을 뒤로한 채 서재를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아버지 때문에 이제 오메가 님 어떻게 보냐’ 하는 신시아의 목소리와 ‘그게 왜 나 때문이냐. 그러게 네가 진작 더 밀어붙였어야 하지 않냐.
오죽하면 나도 이렇게 나섰겠느냐.’ 하는 야스민 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다시 ‘나서달라고 제가 부탁이라도 했냐.’는 신시아의 반박이 칼같이 이어졌다.
어째 나 때문에 둘 사이에 균열이 간 거 아닐까.
언성이 더 높아지기 전, 얼른 서재 문을 닫았다.
레이먼드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에브레에게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정신으로 이 저택에 더 붙어 있을 자신이 없다.
아무 말 없이 바이크가 주차된 곳까지 따라온 레이먼드는 내가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갈 준비를 하자 한마디 했다.
“다음에는 가문의 일원으로 뵈었으면 합니다.”
“예?”
말을 곱씹는 사이 레이먼드는 소리 없이 멀어지고 있었다.
신시아랑 맺어졌으면 한다는 소리 같은데, 어째 야스민 공보다 레이먼드가 더 압박으로 다가왔다.
잽을 연속으로 맞다가 스트레이트 한 방이 적중한 느낌이랄까.
일단 밖으로 빠져나온 후, 앨리스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머지않아 딱딱한 안내가 들렸다.
-지금은 급한 용무로 인해 통신 연결이 불가하오니······.
이 악마, 일부러 안 받는다 이거지?
사무실로 설정되어 있던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다른 곳으로 바꿨다.
윈드 스크린에 새로운 경로가 설정되는 것을 보면서 귀걸이를 만져 앨리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통신했다.
“예. 요새 바쁘시죠? 혹시 오늘 시간 어떻게 되세요? 아, 그럼 전에 그 찻집에서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예? 다른 건 아니고 남녀관계에 대한 조언을 좀······. 먼저 가 있겠다고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퇴근하시면······예, 예. 거기서 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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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당장 해. 너무 좋아. 행복해 미칠 지경이지.”
내가 조언을 구한 사람은 위타천이었다.
위타천과 가연도 결혼은 아니고 약혼까지만 한 사실혼 관계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혼자 비스무리한 사람이라고는 내 주변에 이 인간밖에 없었다.
이혼이 흠이 되지 않는 시대고, 결혼이라는 법적 규제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유로운 연애가 권장되는 풍조 또한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느낌인지 물어나 보려고 했는데, 위타천의 눈에서 광기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나만 X될 순 없다.’ 하는 악의가 번져왔다.
“어떤 면에서 그렇게 좋냐능?”
나다의 물음이었다.
분명 위타천을 불렀는데 나오는 길에 만나서 데려왔단다.
마고랑 노덴스는 바쁜지 연락도 잘 안 되던데 이 둘은 그런 사정과는 어째 거리가 멀어 보인다.
빡대가라스도 심문해야 할 놈들이 넘쳐서 거의 매일 공공 집행본부로 출근하고 있다는데 여기 둘은 그런 건 그냥 남 일로 여기는 것 같기도 하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심지어 위타천은 장의 흑화에 영향을 미친 것 같기도 한데 참 속도 좋다.
“어떤 면? 음······. 여자친구가 있는데······. 그런데 여자친구라고 하면 나다 자네가 이해할 수 있나? 자네의 불가 종파는 승려의 교제를 허용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교제해보진 않았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능!”
“정말? 어떻게?”
“애니로 배움!”
너무나 당당한 나다의 발언에 굳어버린 위타천이었다.
내가 나서야 했다.
“계속 말씀해보세요. 여자친구가 있는데, 다음요.”
“그래, 여자친구가 집에 놀러 온 거야. 너무 재밌고 좋고 즐겁지. 그런데 해가 지고 이제 집에 갈 시간이 넘은 것 같은데 여자친구가 집에를 안 가. 계속. 이제 내 시간이 필요한데도 안 가! 그게 결혼이야.”
얼빠진 나와 나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위타천이 앞에 담겨있던 차를 단번에 마셨다.
“크으······. 비상근무 상황만 아니었으면 차가 아니라 술 마시러 가는 건데.”
이 상황에서 내가 꺼낼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행복하시죠?”
“너무 행복하지. 너무 행복해. 가연아! 싸랑한다!”
이미 어디서 술 좀 마시고 온 것 같은데······.
위타천을 토닥이던 나다가 나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 보냐능? 결혼할 마음이 생긴 거임?”
“없지는 않은데요······.”
“오오! 얘기해보라능! 완전 두근두근! 상대는 역시 야스민 가의 영애?”
“예 뭐······. 그런데 문제가 좀 있단 말이죠.”
위타천은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수호자 때문이로군.”
이들에게 신시아, 이수련과 관련된 얘기를 쭉 해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얘기를 듣던 나다의 눈이 풀렸다.
그웨지안 때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나다는 지금 머릿속에서 말도 안 되는 관계도를 그리면서 망상 중이지 싶었다.
“······이수련 씨도 싫은 건 아니지만 별로 연애 감정이 들지 않는다고나 할까요.”
내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나다가 치고 들어왔다.
“그 구미호가 수호자였던 거냐능! 완전 충격!”
거기서부터 몰랐던 거구나······그랬구나······.
위타천이 몸을 옆으로 돌려 나다를 발로 밀었다.
“들어가! 복귀해! 괜히 데려왔어!”
“아, 왜 그러냐능! 내가 이런 건 또 전문임!”
“애니에서 배운 건 쓸모가 없어!”
“연애는 애니로 배웠지만 이렇게 복잡한 건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으로 배움! 내가 클리어한 미연시 타이틀이 300개가 넘음! 19세 제외한 타이틀 중 괜찮다고 하는 것들은 거의 다 클리어했다고 보면 됨! 참고로 19세 붙은 건 승려의 양심이 허용하지 않아서······.”
위타천의 발길이 거세졌다.
“가! 복귀하라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이 작자들을 만난 건데 어째 더 복잡해지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