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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238화 (239/258)

238.

238.

-모두 최대한 멀어지세요.

펠루다와 기타 등등을 데리고 최대한 빠르게 멀어지던 중, 전역을 휘감는 나지막한 음성이 있었다.

젠이었다.

가라앉는 평화 공원 일대와 치솟는 파편 위로 번개가 수도 없이 떨어졌다.

그걸 본 펠루다가 외쳤다.

“폭발에 폭발로 대응하려는 건가 봅니다!”

“맞불 같은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혈뇌진인이기에 가능한 방법 아닐까요.”

젠이기에 가능할 거라는 펠루다의 말처럼, 젠은 공중에 떠서 손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의도한 위치에 번개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이미 지반이 많이 가라앉아서 안쪽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아마도 안쪽에 남아있던 미사일이나 연료 탱크를 미리 터트리는 작업을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폭발에 의해 높이 치솟는 것들도 젠의 주위에 불어닥치는 바람을 뚫지는 못하고 있었다.

닌닌이 순수한 감탄을 내뱉었다.

“저게 네오-서울의 혈뇌진인······실로 대단하외다. 야스민 가문 최후의 보루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구려.”

“나이가 얼마나 많은데. 짐작할 수도 없다고.”

도깨비불 형태의 상투가 닌닌의 감탄에 가볍게 답했지만, 오히려 그 답에 더욱 진지해지는 닌닌이었다.

“나이와 실력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니라오. 오히려 주어진 것이 많아서 쾌락과 방탕에 허우적대는 이들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오.”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고.”

“충분한 시간이 강함이라는 것에 기여할 수 있는 요소임은 맞소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오.”

“시간을 별로 안 들이고 저 정도로 강해질 수 있다고? 그런 사람이 어딨······.”

빈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닌닌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혈뇌진인 정도까지는 조금 힘들지 몰라도, 나이와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반례로 들기에는 충분하지 않소이까? 대장 정도라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떠들 시간 있으면 뛰기나 해! 낙오한 놈은 버리고 갈 거다!”

다들 시선을 돌리고 다시 뛰기 시작했을 때, 펠루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이 잘한 게 아니라 자기가 잘한 거라고 할 때는 언제고 또 이런 거에 쑥스러워하십니까.”

“내가 잘한 건 맞지만 지금은 젠이랑 비교될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지금은? 시간 흐르면 혈뇌진인 급이 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못 할 거 있나?”

나를 바라보던 펠루다가 뭔가 결심한 건지 고개를 끄덕이고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를 깔았다.

“대장.”

“왜.”

“저번에 말씀드렸던 거 있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무슨 수로 알아먹어.”

“저 PMC 그만두고 대장네 사무실 들어간다는 거요.”

“그거? 헛소리 말라고 내가 그러지 않았나?”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주시죠.”

절체절명······까지는 아니지만 죽어라 달려도 모자랄 시간에 뜬금없이 뭐 하는 짓이냐고 갈구려다가 펠루다의 눈이 진지한 걸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만 해볼 거야. 너무 기대하지는 마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안 된다고 하면 계속 매달릴 것 같아서 일단 얼버무렸다.

이 거북 수인을 사무실 식구로 맞이할 생각은 없다.

위타천이 이 녀석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던데, 펠루다를 내줘야 내가 후배 타령에서 벗어날 거 아닌가.

-폭발이 잦아들고 있다.

나를 내려준 뒤 선회해서 다시 높이 올라간 야타가라스의 목소리.

아마도 야타가라스의 그림자 손에는 아직도 클로카이가 꽉 움켜잡혀 있겠지.

그래도 말이라도 통하고 대꾸라도 해줬던 나랑 달리 야타가라스는 융통성 없는 빡대가리인데 클로카이가 괜히 드잡이하다가 그대로 이승 하직하는 일이 없기를 잠깐 빌어줬다.

계속해서 발밑에서 불쾌하게 울려대던 진동이 천천히 잦아드는 것을 느끼고 앨리스에게 물었다.

“폭발에 휘말린 아군이 있어?”

-자경단 중에는 없어요. 부상자는 있지만요.

“공공 집행본부에서 데리고 온 인원 중에는?”

-잠시만요. 마고 씨한테 물어볼게요.

몇 초 지나지 않아, 앨리스가 밝게 말했다.

-없어요. 사망자 제로.

그리고 다시, 전체 채널로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트라이포드의 수장을 제거했으며, 미사일 기지를 무력화했습니다. 사망자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트라이포드의 수장을 제거했으며······.

천천히 멈춰선 이들이 주위에 있던 동료들을 한 번 눈에 담은 뒤, 온 힘을 다해 환호했다. 때맞춰 자욱하던 먼지구름도 조금 잦아들었다.

그 틈새로 태양 빛이 쏟아졌다.

빛이 쏟아지는 구름의 경계로 은빛 경계가 선명했다.

구름 너머로 빛이 비치는 광경.

저걸 실버 라이닝Silver Lining이라고 한다던가.

희망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고.

진짜 구름이 아니라 먼지구름이라서 썩 적절하지는 않은 비유일지 몰라도 어쨌든 의미만 통하면 되는 거 아니겠나.

눈썹이나 이마에 손을 댄 채 빛을 만끽하던 이들 중 몇몇이 붕괴의 가장자리까지 조심스레 다가가 고개를 아래로 빼꼼 내미는 것이 보였다.

“위타천.”

-말하게.

“위에서 보는 모습은 어떤가요?”

노덴스와 나다를 내려준 위타천은 다시 날개를 펼쳐 야타가라스와 함께 주위를 날고 있었다.

-엄청나지. 기지 잔해, 미사일 잔해, 기지 곁에 있던 지하 고속도로 잔해 등등.

대충 봐도 건너편 경계까지 수백 미터는 될 것 같은 엄청난 직경의 구덩이가 만들어졌으니 위타천의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안에 있던 기지의 규모와 미사일의 개수를 생각하면 오히려 작은 규모지. 젠 님이 애써주셨어.

통신을 듣고 있었는지 젠이 끼어들었다.

-과찬이군요. 일단 탄두에 실린 걸로 추정되는 것들을 대충 들었는데 밖으로 나오면 나중에 처치 곤란일 것 같아서 최대한 폭발 직경을 줄이는 데 힘썼어요. 그러다보니 지반을 녹여서 아래로 더 깊게 묻어버려서 사후 조사는 조금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붕괴 위험도 아직 끝난 건 아니니 다들 주의해주세요.

그리고 다시 마고의 목소리

-수송기를 보냈으니 그걸로 복귀하시면 될 겁니다.

“끝났군요.”

-오메가 씨가 작전 종료 선언해 주시죠.

“네? 제가요?”

-이렇게 많은 사람을 모은 것도 오메가 씨고, 누구보다 앞서서 트라이포드를 궤멸한 것도 오메가 씨니까요.

됐다고 거절하려는데, 어느새 옆에 내려선 신시아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귀걸이에서도 앨리스가 ‘한마디 해! 한마디 해!’를 연발하고 있었고.

일단 귀걸이를 만져 앨리스의 목소리를 뮤트하고 전체 채널로 돌렸다.

“어······존댓말로 하겠습니다.”

가슴과 혀가 울렁거렸다.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까지 커졌지만 나는 대의는 별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치적거릴 것 같은 놈 처리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 마무리는 확실하게 됐으니 다들 걱정할 거 없다 등등 말들이 엉켜서 머릿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결국 나온 말은 짧았다.

어쩌면 가장 하고 싶은 말일 수도 있었다.

“아무도 죽지 않아서 고맙습니다. 다들 고생했습니다.”

-그게 전부에요?

앨리스의 타박에 굉장히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멘트를 뒤에 붙였다.

“해결사 오메가였습니다.”

-하라고, 하라고 할 때는 죽어도 싫다고 안 하다가 갑자기 홍보는 왜―.

앨리스의 잔소리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함성에 묻혀버렸다.

그때, 신시아가 나를 안았고 차가운 감촉이 입술에······.

#

“달라졌어요!”

야스민 공의 서재, 한쪽 눈이 신비로 물든 에브레가 외쳤다.

그러자 자아 형상화 장치를 통해 각각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던 야스민 공의 많은 모습들이 에브레를 향해 손을 뻗거나 손가락을 들어 자기 코 가까이에 대는 것으로 잠깐 기다리라는 시그널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야스민 공은 현재 물 밑에서 북부 중화권 권역의 자금을 조이는 동시에 일본 열도의 내전을 수습하기 위해 열도의 패권을 지닌 히마와리 일족과의 협력을 긴밀히 상의하는 중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네오-서울과 WSS 일대의 야스민 가문 영향력이 닿는 흡혈귀들을 움직여 실시간으로 정보 파악과 대응까지 하고 있으니, 커머라시 야스민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하기 힘든 일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극히 드문 예지 능력자의 능력 발현 순간을 놓칠 수도 없는 일, 야스민 공은 분리된 자아 하나를 보내 에브레 앞에 앉혔다.

“말해보거라.”

하지만 에브레는 곧바로 말하지 못했다.

“어······음······그게······.”

“왜 그러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에브레가 생각하기에도 ‘따님분이 남자랑 키스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꺼내는 상황이 뭔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

게다가 그 아버지 되는 쪽이 보통 인물도 아니고 야스민 공이라면 더더욱.

.

.

.

에브레가 바뀐 미래를 보고 몇 분 뒤, 오메가와 신시아는 아주 진하게 키스 중이었다.

주위에 있는 이들도 위기 상황에서 막 빠져나와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터라 지치지도 않고 환호했다.

플라워즈 호텔에서 있던 위타천과 가연의 약혼식 직전, 오메가와 신시아의 미묘하고 야릇한 스킨십이 소셜 미디어에서 화제가 되었던 적도 있던지라 그 실체를 눈앞에서 확인했다는 생각에 더욱 열광하는 것도 있었다.

모두가 기뻐하는 이때,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이가 딱 하나 있었으니······.

“혈육이 타인과 타액 교환을 하는 걸 목격한다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군요.”

신시아의 오빠, 젠이었다.

나름대로 괜찮은 남매 관계를 유지해온 젠과 신시아 사이지만 아무래도 여동생의 키스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는 건 썩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었다.

젠에게 있어 신시아는 머리 긴 둘째 레비, 레비는 머리 짧은 셋째 신시아 정도의 구분이 적절했기 때문이리라.

옆에 있던 위타천이 젠의 혼잣말을 듣고 답했다.

“우리 후배가 매제妹弟로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입니다? 야스민 공께서는 사윗감으로 굉장히 흡족해하실 것 같은데요.”

“오메가 씨에 대해서는 불만 없습니다. 좋은 친구기도 하고요.”

“허어······. 혈뇌진인, 젠 야스민께서 직접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후배가 대단하긴 하군요.”

“마음이 통하고 뜻이 맞으면 친구 아니겠습니까. 여튼, 둘을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혹시 여동생 있으십니까?”

“외동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실 겁니다. 여동생의 키스 장면을 보는 것만큼 불쾌한 경험은 별로 없을 겁니다.”

위타천이 다시 뭔가 말을 하려는 찰나, 젠이 아주 가볍게 슬쩍 땅을 박찼다.

그러자 젠이 미끄러지듯 잔상을 남기며 옆으로 이동했다.

“꼬맹이 녀석, 언제쯤 그 버릇을 버릴 셈이냐?”

바이저를 내려 얼굴을 가린 채 위타천의 옆으로 착륙한 이수련이었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젠의 목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둘에게 전달됐다.

“도의 길을 걷는 한 계속되지 않겠습니까.”

“재미없기는.”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저를 많이들 찾아서요.”

“본좌가 너무 매혹적이라 동자공의 계를 파할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고?”

이수련을 향해 코웃음 지은 젠이 멀어졌다.

“지금 본좌를 비웃은 것이냐?”

방방 뛰던 이수련에게 눈치를 보던 위타천이 물었다.

“그런데······괜찮으신 겁니까?”

“무엇이?”

“오메가와 야스민 가의 영애 말입니다. 수호자께서도 오메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었나 해서······.”

어깨를 으쓱해 보인 이수련이었다.

“애도 아니고, 키스 정도야.”

“아니······아실지 모르겠는데, 네오-서울이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혼인 형태는 일부일처입니다. 만약 후배와 야스민 영애가 혼인하면 수호자의 자리는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법으로 정해진 것이더냐?”

“예······.”

“그럼 오히려 다행이구나. 본좌는 네오-서울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우니 말이다.”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양손을 허리춤에 댄 채로 호방하게 껄껄거리며 웃는 이수련과 그런 이수련을 보고 더 골치 아파지기 전에 빠른 은퇴를 계획하는 위타천이었다.

.

.

.

얼굴이 벌게진 채로 자신이 본 것을 말하는 에브레였다.

어느새 야스민 공은 모든 자아 공고화 장치에서 벗어나 본 모습으로 에브레의 앞에 앉아 있었다.

급한 일은 모두 젠과 레이먼드 선에서 처리하도록 말을 해둔 뒤였다.

에브레가 말을 마치자 야스민 공이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재밌군. 재밌어. 끝난 줄 알았던 토착종과 외래종의 싸움이 이런 방식으로 이어질 수도 있군. 아마 오메가 본인은 그 중심에 있는 걸 알지 못할 테지만. 그런데 말이다. 에브레.”

“옙!”

렙틸리비아 출신이긴 하지만 에브레도 네오-서울에 사는 이상 야스민 공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거물 중의 거물, 네오-서울의 흑막 등등.

예지가 보이니 당장 야스민 공을 만나게 해달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서재까지 들어온 에브레는 이제야 자신 앞에 있는 야스민 공의 존재감을 실감했다.

“젠에게 들었다. 이전에도 예지가 바뀐 적 있었다지?”

“······예.”

그때도, 이번에도 오메가가 운명의 줄기를 틀었다.

야스민 공의 싸늘한 눈빛이 에브레를 꿰뚫었다.

“너는 허언의 예지자로구나.”

에브레는 긴장했다.

거짓을 말했다고 피를 빨려 죽게 되는 건 아닐까.

눈을 감은 에브레의 머리 위에 뭔가 얹어졌다.

툭-

흡혈귀 특유의 차가운 손이었다.

“하지만 네 예지가 이루어졌더라면 훨씬 많은 목숨이 사라졌겠지. 날 찾아온 건 잘한 일이다. 비록 이루어지지 않은 예지지만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니 말이다. 고맙다. 젠이 좋은 제자를 두었구나.”

에브레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젠의 뒤를 잇는 명망 있는 도사가 된 뒤에도 에브레는 자신을 허언의 예지자라고 부르곤 했는데,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제법 떨어진 시점의 이야기다.

#

몇 주 뒤, 나는 사무실 문을 나서고 있었다.

“사장님, 어디 가세요?”

“시청. 정산받아야지.”

“신시아 언니랑 수련 언니는······.”

황급히 문을 나서며 말했다.

“갔다 와서 얘기해. 갔다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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