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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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튼을 들고 있던 장의 손목을 광자 검날이 베고 지나갔다.
하지만 고통에 찬 비명도, 당황한 신음도 없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장이 수양을 오래 해서 굉장한 평정심을 가지고 있어서 손이 잘린정도로는 신음도 내지 않는다거나 오히려 그 반대로 뇌를 혹사하는 약물을 잔뜩 투여받은 통에 고통을 관장하는 부분이 맛이 갔을 수도 있으니까.
피나 체액이 치솟는 단면도 없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절단면을 응축시켜 피가 흐르는 것을 막거나 체액이 흐르는 것을 조절할 수도 있으니까.
듣도 보도 못한 온갖 능력, 신비, 이적이 해변의 모래알처럼 넘치고, 설령 그런 것을 가지지 못했더라도 후천적인 시술과 수술로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이는 놈들이 수두룩하니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유연해진 건지, 아니면 연속되는 황당함에 지쳐 생각하는 것을 그만둔 것인지, 어쩌면 두 방식을 내 편한 대로 취사 적용하는 건지 정확히 분류하기는 힘들겠지만 어쨌든 내가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식은 그랬다.
하지만 이런 수용 과정에서도 기준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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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연고와 이해 없이 이런 세상에 뚝 떨어진 내가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직감이다.
스쳐 가는 직감은 한순간의 이변을 알아챈 특별하고 초월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사실 삶을 살아오면서 모인 모든 경험의 빅데이터 집합체가 경고하는 것이라던가.
듣고 보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제법 그럴듯한 설명과 분석이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이유로 직감을 신뢰했다.
나를 믿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로 들어가면 내 얕은 지식으로는 설명하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이고 다방면적인 고찰’ 이런 문장은 내게 그저 괴상한 단어들의 조합으로 다가오는 게 전부다.
그렇지만 다른 이의 몸에 들어와 이제 다른 이의 이름이 내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짧지 않았던 시간, 필연적으로 ‘나는 누군가’에 대한 고민을 하곤 했다.
그 고민은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보면 턱 밑에 솟아있는 뾰루지 같은 것이라 한참이나 나타나지 않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길을 걷다 돌부리에 걸려 휘청할 때, 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든 순간, 앨리스에게 의뢰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처럼 예상치 못한 시간과 공간에서 불쑥 솟아오르곤 했다.
나는 누구인가, 누가 나인가.
예전의 세계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철학이나 성찰과는 거리를 둔 삶을 살아왔기에 나는 간단하게 정의했다.
정의한 게 아니라 내 멋대로 단어를 이어 붙여 조악한 문장을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결론은 그랬다.
‘어쩌면 빌린 것일 수도, 어쩌면 영구적으로 양도한 것일 수도 있는 신체이지만 그걸 포함한 전체가 ‘나’다. 과거에도 나를 이끌었던 직감이 여전히 날카롭고 예리하고 작동하는 것, 즉 연속되는 직감이 이를 뒷받침한다.’
직감을 믿는 건 내가 자기애가 강해서가 아니다.
내가 알고 있었던 상식이 상식이 아니게 되어 버린 시대와 세상에서 표류하지 않기 위한 나름의 격한 몸부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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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손목이 잘린 장이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분명 손목을 자르고 지나갔음에도 검에 아무런 저항감이 없는 것은 분명 좋지 못한 징조였다.
검날 주변에서 연기 몇 가닥이 피어올랐다.
‘수증기? 독성 물질?’
직감이 위험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급전환]
허벅지 바깥의 근육이 잔뜩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긴장감은 곧바로 종아리 뒤쪽으로 전해졌고 이내 아킬레스건을 지나 발바닥까지 이어졌다.
아마 스포츠 중계에서 나왔다면 캐스터가 ‘선수의 다리가 완전히 돌아갔습니다! 시즌 아웃일 것 같은데요.’라고 설명을 덧붙일 정도로 다리의 방향이 바깥으로 틀어졌다.
곧바로 스킬을 통해 위험 요소를 제거했다.
[유연성 증대]
[미끄러지기]
그 덕에 앞으로 향하던 몸의 방향을 옆으로 돌릴 수 있었다.
검등에 맺혀 있던 작은 물방울이 원심력에 의해 또르르 검 끝으로 굴러가더니 이내 이 공간 어딘가로 휙 날아갔다.
이상했다.
피도, 체액도 묻지 않았는데 물방울이 자연 발생했을 리 없었다.
나아가던 방향에서 거의 직각으로 경로를 바꾼 직후 무언가 내 뒤에서 접근하는 기색이 있었다.
몸을 낮추니 내 머리 위로 위타천의 손이 휙 지나갔다.
곧바로 장에게서 멀어져 위타천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뭡니까?”
“너무 접근하는 건 위험해 보여서 막으려고 했네만······그럴 필요는 없던 모양이군.”
그렇게나 장을 부르짖던 위타천이지만 막상 장이 눈앞에 있으니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긴, 장에게 당한 것으로 추정되어 쓰러져 있던 위타천에게는 수많은 검사가 이루어졌는데 어떤 위험 물질도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위타천은 항상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시술을 받았다는데 그것들의 활동 경과를 살펴보아도 이상 징후를 보인 것은 없었다.
‘급격한 탈수 정도가 전부라고 했나······.’
검을 털어내는 척하며 다시 한번 눈으로 훑었지만 다른 물방울은 없었다.
다만, 물방울이 구르기 시작한 위치를 추정하면 장의 손목을 자르고 들어간 언저리 정도로 보였다.
그때, 분명 잘렸어야 할 장의 손목이 어른거리며 스르륵 사라졌다.
장은 여전히 광기가 묻어나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가 흔드는 손에는 여전히 버튼이 들려 있었다.
분명히 잘랐으나, 내가 벤 것은 진짜가 아니었다.
생각 하나가 스쳐 갔다.
[플람 수플레]
힘껏 불어낸 숨이 타오르더니 불길 그 자체가 되어 장을 덮쳤다.
마치 이제는 필요 없다는 듯 장이 버튼을 바닥에 떨어트린 채 걸음을 옮겨 불의 범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아우토다페]
순식간에 장의 아래에 그려지는 기하학적 문양의 조합.
마법진이다.
그리고 문양에서 불이 치솟았다.
정화와 엄벌의 사이에서 이글대는 불 너머, 장의 실루엣이 선명했다.
불이 사그라들기 직전, 곧바로 [스카디].
뻗어나간 삭풍이 미처 사그라들지 못한 불티의 숨결을 실은 채 장을 향해 밀려들었다.
태우고 얼리는 생지옥 속에서 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왔다.
하지만 지금껏 여유로움이 넘쳤던 그의 얼굴에서 불편한 심기가 묻어나왔다.
“실험실의 생쥐가 된 기분이군요. 영 유쾌하지 못해요.”
영력을 끌어올려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던 위타천이 장의 말에서 단어 하나를 잡아냈다.
“실험?”
답은 장이 아닌 내가 했다.
“대체 어떤 능력을 숨기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거든요.”
장을 마주 보고, 그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여유 섞인 웃음을 지어주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던 거예요.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탈수를 일으키고, 불과 얼음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신기루를 만들어 환영처럼 여기게 하는 능력. 장은 자기 주위의 수분을 조절할 수 있는 겁니다. 아마도 아주 급격하게 조절할 수 있겠죠.”
장의 손목을 벨 때 피어오른 수증기와 이슬이 맺혀 있었던 것에서 추정한 사실이다.
추론일 뿐이고, 정확히 어떤 기전을 가지고 발동하고 작용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일정 범위 내의 수분 분포를 조절해서 한 곳을 건조하게 만들면 다른 곳이 습해지는 것인지, 수분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인지, 일정 시간 동안만 일정 공간에만 작용하고 시간이 지나면 원상태가 되는지 등등 궁금증을 가지려면 끝도 없이 가질 수 있었다.
궁금증과 의문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특수 장비를 사용하는지, 마법인 건지, 날 때부터 가진 능력인지, 지금껏 숨겨왔던 것인지 기타 등등.
물어보고 싶은 내용을 꼽으면 여기서 모닥불이라도 켜고 삼박사일 정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장과 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둘은 악연에 악연으로 얽혀 있었다.
같은 하늘 아래 숨 쉬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불구대천의 원수······까지는 아니지만, 계속 내 갈 길에 장애물을 툭툭 던져대는······아주 은밀하게 짜증을 유발하는 새끼?
자, 이제 짜증 나는 새끼의 답을 들을 차례다.
장을 바라보고 툭 던졌다.
“맞지?”
어느새 예전의 웃음을 되찾았지만, 왠지 어색해 보이는 미소의 장이 답했다.
“그걸 제가 굳이 말해줘야 합니까?”
“아니. 별 상관없어.”
검을 역전개한 뒤 양손을 마주 붙였다.
극도의 긴장이 흐르는 대치 상태에서 무기를 들지 않는 나를 보고 위타천이 놀란 음성을 흘렸다.
“후배?”
“놀라지 마세요. 제 생각에는 말이죠. 장이 멀리까지는 능력이 안 닿을 것 같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셨죠?”
[파천황]
몸을 옆으로 튼 채, 손에서 튀어 오르는 뇌전궁의 시위를 잡아당겨 가슴팍까지 붙였다. 뇌전 도술과 궁술의 융합 형태다.
장에 대한 많은 추측 중, 확실한 사실 하나는 장이 위타천 근처에 있을 때 쓰러졌다는 것.
그렇다면 최대한 근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 불능으로 만들면 되는 거 아니겠나.
[궁뢰]
활과 시위 사이에 푸른 기운이 맺히더니 순식간에 화살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위타천도 내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채고 손에 쥐고 있던 무기의 형태를 바꾸었다.
던지기 좋게 얇고 길게 빠진 창의 형태다.
뇌전궁 너머로 보이는 장에게 말을 건넸다.
“이상하지 않아? 버튼 누른 지 좀 지났는데 조금 흔들리고 말았다는 게? 미사일이 수십 발은 되는 것 같던데 말이야.”
장의 얼굴에서 웃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고개를 돌려 바닥에 떨어진 버튼을 바라보았다.
시위를 놓았다.
파직-
뇌전 화살이 거침없이 나아가 버튼을 관통해 새카맣게 태워버렸다.
아까부터 귀걸이를 통해 들리던 앨리스, 이수련, 신시아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전해졌다.
-내부 인트라넷 50% 이상 장악했어요. 미사일 발사 프로토콜에 접근 중. 잠시 지연시키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아요. 프로토콜 완전 폐기 시도할게요.
-일단 본좌가 가지고 있던 휴대용 EMP로 미사일 추진체의 핵심 부품들은 무력화했노라. 위험성이 높아 보이는 것 먼저 손대느라 아직 작동하는 것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들 하거라!
-침착하게 해. 미사일에 접근하는 놈들은 내 좀비들이 막고 있으니까. 일손 필요하면 바로 말하고.
팀 오메가의 선전 덕에 발사가 지연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시위를 당겨 뇌전 화살을 메겼다.
[목표 고정]
[조준 보정]
“굳이 말해주고 싶지는 않은 것 같던데, 가진 걸 다 동원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걸. 최선을 다해. 나도 그렇게 할 거니까.”
손을 놓자 시위를 떠난 화살이 장을 향해 날아가며 수십 수백 개로 쪼개져 하나하나가 번개의 편린이 되었다.
위타천이 던져대는 영력의 창이 번개의 편린에 섞여들어 함께 장을 덮쳤다.
온 사방에 가득한 TV패널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밝던 공간이 더욱 밝아졌다.
번개들이 목표한 곳에 도달하기 전, 나는 이미 두 번째 화살이 매겨진 시위를 있는 힘껏 당겨 들고 있었다.
[속사]
계속해서 수많은 번개가 오로지 한 사람을 향해 뻗어나갔다.
“넌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됐어.”
그게 내가 장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