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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글빙글 돌고만 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구만.”
불쾌한 느낌에 얼굴을 빠르게 흔들자 묻어 있던 누구 것인지 모를 피 묻은 작은 살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왼손에 들고 있던 존속살해의 검날이 깜빡였다.
중간에 한 번 배터리를 갈았는데도 이런다.
기존에 사용하던 검은 아직 멀쩡하게 광자 검날을 밀어 올리고 있는 것에 비교하면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구버전의 설움이네.”
역전개한 존속살해를 옆구리에 꽂는 것과 거의 동시에 탄환이 내게 쏟아졌다.
[빗방울 베기]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전부 빗겨 쳐내니 그렇지 않아도 시체와 부상자로 엉망이었던 주변이 더욱 난장판이 되었다.
어떤 간 큰 놈들이 그렇게 당하고도 부족해서 총을 갈기나 봤더니 앞쪽에 구부러진 총신이 빼꼼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저런 무기를 코너샷이라고 하던가.
그래도 바보들은 아닌지 철저히 원거리 대응을 하기로 마음 모양이었다.
호기 좋게 내게 뛰어든 녀석 중 바닥에 누워서 끙끙대고 있거나 끙끙대지도 못하고 죽은 녀석들이 수두룩하니 합리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뒤에 있는 놈들! 들어라!”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코너샷의 총구가 우수수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시작인 건가.
[흐림수르사르]
시선이 닿은 곳에서 만들어진 빙벽이 내가 서 있는 통로의 절반가량을 막았다.
몸을 가릴 훌륭한 엄폐물이었다.
총탄 세례를 받아내면서 얼음 파편들이 튀었고, 그것들은 바닥에 가득한 핏물과 체액에 섞여들어 질척함을 희석했다.
탄창을 가는 건지 아니면 한차례 쉬어갈 때가 되었는지 총성이 멈췄을 때, 빙벽은 흠집 가득하긴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뒤를 슬쩍 돌아보니 위타천과 클로카이가 있을, 꺾인 공간이 보이긴 했으나 제법 멀어져 있었다.
거리가 제법 있는데도 위타천이 철문을 부수고, 잡아 뜯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공방이나 공장, 철공소에서나 들릴 법한 소리였는데 그곳들은 장비나 기계라도 사용하지, 위타천은 영력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맨몸으로 저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게 대단하긴 했다.
심지어 내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평소에는 조금 이상한 아저씨인 것 같아도 뭐 하나에 꽂혀서 눈 돌아가면 아무도 못 말린다는 평가가 딱 맞았다.
슬슬 그쪽으로 돌아가기 전, 엄포를 놓을 필요가 있었다.
아무래도 저기 있는 놈들은 대화할 마음이 없는 것으로 보이니 내 할 말만 하고 빠지는 게 최선이었다.
정다운 말이 오고 가도 모자랄 판에 총이나 갈기고 있으니, 저기 있는 놈들은 미취학 아동일 시절 대화 예절에 대한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놈들이 다시 방아쇠를 당기기 전, 재빨리 말했다.
“알고 있나 모르겠는데! 출구는 이미 봉쇄됐다! 개죽음당하지들 말고 미리미리 마음 정해서 투항하는 걸 추천한다! 장이 무슨 현란한 미사여구와 가슴 벅찬 보상으로 꼬셨는지 모르겠는데 다 빠그라졌으니까 살길 찾으라는 소리야! 자수하여 광명들 찾아! 인체 실험에 쓰여도 이승이 낫다는데 주제 파악 못 하고 덤비다 황천 간 다른 놈들보다는 상황이 훨씬 좋잖아! 그리고―.”
[흐림수르사르]를 한 번 더 사용하기 전, 경고했다.
“나는 할 만큼 배려했으니까 여기 넘어오면 죽고 싶은 걸로 알겠다! 하루 종일이라도 돌 수 있어!”
통로의 남은 절반도 빙벽으로 채워지는 것을 확인했다.
위타천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면 소음 때문에 제대로 된 통신이 쉽지 않을 것 같아 걸음을 천천히 했다.
“앨리스.”
-네. 듣고 있어요.
“지금 통제실 근처 정리 끝났어. 아직 통제실로 들어가진 못했고.”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있을까요?
“모르겠어. 나도 돌아가서 봐야 해. 위타천이 돌파 중이거든.”
-장의 사살이나 확보도 아직인 거죠?
“맞아. 정황으로 봤을 때 통제실 안에 장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아.”
-알겠어요. 마고 씨한테 전해줘야겠어요. 위타천 님이 뭘 하는지는 몰라도 아까부터 통신 수신을 안 한다고 투덜거리더라고요.
“오늘 내내 독이 잔뜩 올랐더라.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단 1초도 쉬지 않고 들려오는 파괴의 소음이 내 추측에 힘을 실었다.
“다른 쪽 상황은 어때? 새로운 거 있어?”
-침투조가 돌입했고, 산발적인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에요. 자경단들도 다 찢어져서 침투조에 섞여들었어요. 저랑 마고 씨는 미사일 기지 인트라넷을 해킹 중이고요.
“해킹하면 미사일 발사도 막을 수 있는 건가?”
-아직 완전히 파악한 게 아니라서 말씀드리기 조심스럽긴 한데, 미사일 발사에 관한 체계는 인트라넷과는 또 별도 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아요. 양자 암호 프로토콜로 보호된 특수 회선이 통제실에서 뻗어나가서 각 미사일로······.
“그렇게 말하면 못 알아들으니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레벨로 내려와 줘.”
-미사일 발사에 관련된 건 모두 통제실 내부에서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인증 과정 중에는 생체에 관련된 것도 있어서 뚫기가 더욱 쉽지 않은 건 덤이고요.
“생체는 또 무슨 소리야.”
-확인된 건 홍채, 지문, 정맥이 있어요.
“눈알 뽑고 손이랑 손가락 잘라서 가져다 대면 발사 멈출 수 있다는 소리네?”
-생체 반응이 활성화된 상황이어야 해요.
“살려서 가져다 대라고?”
-네.
“쉬운 게 하나도 없네.”
그때, 다시 한번 진동이 기지 전체를 흔들었다.
“여기 갑자기 흔들리는데? 아까도 몇 번 이러긴 했어.”
-잠시만요.
곧 뒤쪽에 만들어 놓고 온 빙벽 너머로 사람의 형체가 어른거렸다.
큰 소리가 나는 걸 보면 빙벽을 부수려고 애쓰는 모양.
그렇게나 섬세하고 정중하게 경고를 했는데도 못 알아듣는 건가.
돌아가서 또 한 번 시원하게 돌아주려는데, 앨리스의 말이 날 멈칫하게 했다.
-연료 주입이 끝난 걸로 확인됐어요.
“미사일에?”
-네. 아직 시간은 좀 있어요. 미사일에 붙어 있던 기술자들도 철수해야 하고, 지지해주고 있던 장비들도 수거해야 할 것이며, 아무래도 지하이니만큼 미사일 발사 시에 뿜어지는 추진체의 열과 압력을 내보낼······.
“앨리스! 진정해!”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답지 않게 허둥대는 앨리스를 진정시켰다.
“네가 말한 대로, 아직 시간은 있다는 거지?”
-그렇긴 하지만 이건 너무······.
그때,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낭군! 들리느냐?
이수련이었다.
-수련 언니! 기지 내부로 들어왔어요?
-앨리스 네 말 그대로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여기에 이런 시설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이수련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문득 한 장면이 스쳤다.
마데르노와 결전을 벌일 때, 이수련이 바다 아래에서 솟아오르던 미사일들을 무력화 시켰었다.
그때의 미사일과 지금 기지 내부에서 발사 준비를 마쳐가는 미사일은 아마 크기도, 위력도 다르겠지만 이수련이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 직면한 상황을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저랑 위타천은 장에게 접근할 테니까 혹시 미사일 발사를 방해할 수 있을까요?”
-어려울 것은 없을 것 같구나.
이수련의 답에 앨리스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언니가 들어온 곳이······노덴스 님의 침투 경로네요. 미사일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과 가장 가까운 곳은 야타가라스 님의 침투 경로에요. 최단 거리 경로를 보낼게요. 젠 님도 함께 가주실 수 있냐고······.
신시아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오빠는 주위에 여자 있으면 모질이 돼서 안 돼. 차라리 내가 갈게.
-그게 좋을듯싶구나. 숫기 없는 꼬맹이는 필요 없느니라. 강철계 마법을 사용하는 녀석들이 둘 보이던데 그 녀석들이나 붙여주거라.
-너 이번에도 미사일 달고 위로 올라가면 가만 안 둬!
-본좌도 반성하고 있다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믿을 수가 있어야지······.
걱정인지 만담인지 모를 대화를 들으며 모퉁이를 꺾자 어레스트에 묶인 채 바닥에서 팔딱대는 클로카이가 있었다.
“얌전히 자빠져 있지 뭘 그렇게 용을 써.”
신발 바닥과 옆면 묻은 정체 모를 액체들을 클로카이의 몸에 닦아 주었더니 팔딱거림이 더욱 경쾌해졌다.
“좋아서 그런 거지? 맞으면 두 번.”
눈을 한 번 깜빡거린 후 절대 그렇지 않다는 듯 눈을 부릅뜨는 클로카이를 가볍게 무시하고 이제는 숫제 고철장처럼 변해버린 철문 근처로 다가갔다.
폭탄이라도 맞은 듯 처참하게 뜯겨진 흔적이 가득한 철문 안쪽에서 아마도 위타천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을 영력이 짙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먹히지 않게 목청을 잔뜩 키워서 소리쳤다.
[기차 화통]
“잘 되어 가요?”
무언가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위타천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계속 울려 퍼졌다.
박자에 맞추는 것이 노동요 같기도 했다.
“귀찮은 일은. 벌써 끝낸. 건가?”
“적당히 막아두고 왔어요. 무식한 일은 아직인 것 같네요?”
“이만하면. 거의 다 되지. 않았네. 싶네.”
“마고가 통신은 왜 안 받냐고 투덜거린다고 그러네요.”
“바빠. 죽겠는데. 삑삑거리니. 안. 받지.”
“알려드릴 게 있는데요.”
“말해. 보게. 읏차!”
“미사일 발사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일단 물리적으로 막기 위해 한 팀이 갔거든요? 그런데 확실한 방법은 아니라서 우리가 장을 확보해서 막아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과정 중에 장의 생체 인증이 있는 것 같아요. 눈이랑 손등이랑 손가락 같은데, 시체로는 인증이 힘들지 않을까 추측하네요.”
“계속. 해보게.”
“문 뚫고 장이 보인다고 해서 바로 죽여버리면 안 된다는 거죠.”
“염병들을. 하는군.”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요. 그래도 노력은 해보자고요. 저랑 종합운동장에서 얘기 나눴던 거 기억하시죠? 의뢰의 대가가 ‘트라이포드의 궤멸’이었잖아요. 근데 트라이포드를 궤멸시키는 대신 네오-서울이 박살 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거 아니겠냐고요.”
“일리 있는. 말이군. 그런데 후배.”
“네?”
“떠들 기운 있으면. 와서 좀. 돕는 건 어떤가.”
“서로 걸리적거리지 않을까요? 그럴까 봐 일부러 안 갔는데.”
위타천이 있는 철문 안쪽에서 바람이 훅 밀려온 것은 그때였다.
마침내 뚫렸다는 직감과 함께 뛰어들었다.
이미 진입한 위타천의 외침이 전해졌다.
“장!”
위타천의 뒤를 따라 진입한 그 즉시 발걸음이 멎고 말았다.
안에는 복잡한 통제 장비도, 그걸 다루는 장도 없었다.
달걀 형태의 거대한 공간, 수많은 TV패널이 가득했다.
패널은 나와 위타천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비추고 있었으며, 특히 정면에는 분노한 위타천과 황망한 내 얼굴이 여러 패널을 이어 통해 보이고 있었다.
“이게······무슨······.”
-사장님! 위타천 님의 위치가 바뀐 것 같다는데, 변동사항 있나요? 어떻게 되고 있어요?
“그게······.”
당황하는 사이, 장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제가 여기 있다는 건 클로카이가 말했겠죠? 그를 너무 원망하지는 말아요. 클로카이는 정말로 제가 여기 있는 줄 알았을 거예요. 적을 속이려면 아군을 먼저 속여야 했답니다.
위타천의 몸에서 영력이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순식간에 뭉친 영력이 만들어낸 창을 휘두르자 주변의 패널이 모조리 터져나갔다.
-잘못된 목적지에 도착한 개미의 분노를 바라보는 건 재밌네요. 특히나 그 개미가 과거의 상사라면 더더욱이요.
거칠게 숨을 내쉬는 위타천이 몸을 뒤로 돌렸다.
“나가세. 아직 발사되진 않았으니 그사이 장을 찾아보지.”
발걸음을 떼는 위타천에게 말했다.
“아뇨. 장은 여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