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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229화 (230/258)

229.

229.

에브레는 악어 수인이다.

그의 아버지는 대림 하 렙틸리비아의 구역장인 스콰이어이며, 스승은 야스민 가의 장남이자 세간에서는 혈뇌진인이라 불리는 젠이다.

젠의 명성에 스콰이어의 그것을 비교하기는 상당히 민망한 것이 사실이지만, 렙틸리비아 구역장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생각한다면 에브레는 음지와 양지 양쪽에서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평범한 악어 수인이었던 에브레가 도가에서는 신선으로까지 숭앙받는 젠의 제자가 된 데에는 에브레가 가진 아주 특수한 능력과, 그것을 노린 범죄가 큰 영향을 미쳤다.

에브레는 불규칙적으로 한쪽 눈에 깃드는 신비로 인해 미래를 볼 수 있는 미래시를 보유한 예지 능력자였다.

때로는 별것 아닌 사소한 일, 때로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에브레의 망막에 맺혔다.

그걸 알게 된 스펙터와 색승은 대림 에어리어 지하에 있는 렙틸리비아 2개를 병합해 네오-서울과 외부 지역을 잇는 통로로 이용하려는 것과 동시에 에브레를 납치할 계획을 세웠다.

실제로 납치되기 직전까지 갔으나 렙틸리비아 정상화 의뢰를 받은 오메가의 기지로 색승은 중요 부위가 절단된 채 도망치고 스펙터는 감금되었으며 에브레는 구출되었다.

에브레가 지닌 잠재성과 파괴력, 그리고 그로 인해 절대 평탄할 수 없는 에브레의 삶을 짐작한 오메가는 젠에게 에브레에 대한 얘기를 했고, 전 세계의 어린 도사들이 제자 되기를 간청해도 눈길 한 번 보내주지 않았다는 젠은 에브레를 제자로 들였다.

그것도 야스민 저택의 방을 내주며 숙식을 책임지는 내제자의 형태로.

그 덕에 에브레는 안전해졌으며 젠이 드디어 제자를 들였다는 소문도 피해 갈 수 있었다.

아들을 자주 볼 수 없게 된 스콰이어의 안 그래도 긴 악어 주둥이가 앞으로 조금 더 튀어나왔지만 아무래도 거친 일에 휘말리기 쉬운 렙틸리비아보다는 야스민 저택이 에브레를 지키기에 훨씬 좋다는 것을 수긍했다.

젠은 에브레에게 무언가를 억지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아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으며 에브레가 궁금한 것이 있어 물으면 최선을 다해 답해주었다.

스승과 제자라기보다는 할아버지와 손자 같은 모습이었다.

젠은 도가의 경전은 물론이고 타 종교의 문헌, 심지어 최신 기술에 관한 논문까지 찾아가며 에브레가 가지고 있는 불안감을 해소해주려 노력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젠과 보내는 에브레의 입에서 어느 날 불쑥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스승님 같은 도사가 되고 싶어요.”

언젠가는 한쪽 눈에 도사가 된 자신의 모습이 비칠 것 같아 미리 선수를 친 것.

젠은 환하게 웃었다.

환한 웃음과 반대로 수행의 강도는 거세졌지만, 어느새 에브레는 예지, 운명,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에브레는 예지를 바꾸고, 운명을 흔들며, 미래를 개척한 오메가와, 오메가로 인해 새로운 삶을 받은 벡을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을 구해준 오메가처럼, 언젠가 벡의 힘이 되어주기 위해 에브레는 묵묵히 젠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젠이 급조된 자경단 활동을 하기 위해 WSS 공업지대로 가는 바람에 간만에 스승과 멀어지게 된 지금도 젠은 야스민 저택의 후원에서 수행에 힘쓰고 있었다.

“후우우.”

땅의 정기를 모으게 설계된 진법의 중앙에 서 있던 에브레가 체조하듯 천천히 팔을 뻗자 보일 듯 말 듯 한 푸른 번개가 손 주위에 생겨났다.

번개를 응시하며, 에브레는 정신을 집중했다.

번개는 그의 손끝에서 튀어 올라 상형문자와 비슷한 주呪를 형성했다.

그리고 점차 형체를 갖추더니 제법 읽을 수 있을 정도까지 다가섰다.

도가의 집성 경전인 도장道藏의 일부가 번개로 공중에 수놓아지고 있었다.

한참이나 가지런하게 공중을 흐르던 번개가 흔들렸다.

에브레는 호흡을 가다듬었으니 원인은 그의 집중력이 아니었다.

시야가 갈라지고 있었다.

예지의 전조.

이런 일이 발생하면 자신에게 바로 말하라고 신신당부한 젠이 없을 때 일어난 사태에 에브레는 당황했지만 일단 몸을 타고 흐르는 번개의 기운을 흩어내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상도천상上到天上 하도지하下到地下 급급여율령!”

어느새 글자는커녕 어린아이가 찍어 바른 먹물처럼 이리저리 튀어 오르던 번개가 마지막까지 명멸하며 공기 중으로, 바닥으로 빨려 흩어졌다.

천천히 모아 올린 많은 기운이 한 번에 빠져나가니 급격한 탈력감이 에브레의 전신을 휘저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는 와중, 에브레는 제 아비를 닮아 강력한 꼬리를 바닥에 지탱해 몸이 쓰러지는 것을 막았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가빠진 호흡을 다듬는 사이 마침내 에브레의 눈에 예지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미래시냐.’

펼쳐지는 예지에 집중하기 위해, 멀쩡한 쪽의 눈을 감았다.

곧 에브레는 숨을 들이켜야 했다.

미래시로 보이는 광경은 참상 그 자체였다.

새카맣게 타버리거나 뼈만 남은 시체가 흘러넘쳤다.

다들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한 건지 있는 대로 몸을 뒤튼 모습이었다.

하늘은 붉고 어두웠으며 저 멀리 거대한 연기가 수십, 수백 피어올라 종말을 연상케 했다.

시체들 너머로 한때는 웅장했을 것 같은 건물의 잔해가 보였다.

에브레의 눈에 남겨진 건물 잔해가 몹시도 눈에 익었다.

감겨 있던 한쪽 눈을 뜬 에브레의 눈에 미래와 현재가 함께 보였다.

주변 지형이 많이 깎여나가고, 푸르렀던 야스민 저택의 후원이 시체 밭이 되어 있긴 했지만, 미래시로 보이는 곳은 분명 후원에서 바라본 야스민 저택의 모습이었다.

경황없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에브레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 보이는 영화와 영광은 거짓이라는 듯, 처참하게 파괴되고 부서진 시야가 동시에 보였다.

에브레는 달렸다.

미래시가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저택의 옥상, 한눈에 네오-서울 일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달렸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냐고 묻는 집사장 레이먼드에게 정말 급한 일이니, 옥상의 문을 좀 열어달라는 부탁 끝에 에브레는 옥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난간에 손을 대고 네오-서울을 내려다봤을 때, 에브레는 터져 나오려는 가쁜 숨을 뱉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초거대 권역이자 경제, 문화의 선두 도시는 없었다.

미사일 폭격이라도 당한 듯 거대한 크레이터 수십 개와 그로 인해 변해버린 지형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이 에브레의 내면에서 밀려 올랐다.

옥상의 한쪽 구석에서 토하며, 에브레는 따끔거리는 눈을 감지 않으려 애썼다.

아직 미래시는 끝나지 않았다.

에브레의 눈에 한 남자가 보였다.

허리춤에 있던 두 자루의 검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옷도 찢어져 너덜거렸다.

어딘가 귀찮음이 항상 묻어있는 얼굴은 보기 드물게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지치고 힘겨운 표정이었지만 남자는 서 있었다.

오메가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참상 속, 오메가는 작디작았다.

하지만 에브레는 오메가의 모습을 확인한 것만으로 자신을 덮치던 막대한 무력감이 조금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운명의 줄기를 바꾼 사람.

대단한 스승님마저 거리낌 없이 굉장하다고 하는 사람.

누가 뭐라고 하던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

미래시가 끝날 무렵, 에브레는 몸을 떨었다.

등에 닿은 차가운 감촉 때문이었다.

“에브레군, 무슨 일 있습니까?”

급해 보이는 에브레가 아무래도 이상해 따라온 레이먼드였다.

에브레는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운명은 네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에브레는 생생한 미래시를 떨쳐내려 애썼다.

그의 입에서 결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스민 공을 뵙게 해주세요. 정말 급한 일이에요.”

운명의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그 끝이 예정된 파멸이 아니라고 에브레는 굳게 믿었다.

#

클로카이가 만들어 놓은 통로로 다시 들어가 장이 있다는 통제실로 향하는 도중, 분신의 감각이 내게 전달되었다.

침투조와 접촉하는 데 성공한 것.

클로카이를 사이에 두고 가장 앞에서 나아가던 위타천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자네와 만났다는군. 말이 이상한가?”

“알아들었어요.”

곧바로 [원영신]을 해제했다.

다시 들리는 위타천의 목소리.

“후배가 사라졌다는데? 이것도 말이 이상하군. 후배는 여기 있는데.”

“그것도 알아들었어요. 야타가라스랑 노덴스, 나다가 출구 하나씩을 맡아서 침투할 것 같던데요. 임시 자경단도 그쪽으로 합류하라고 말해놨어요. 제 모습은 뭐 홀로그램이라고 적당히 얼버무려주세요. 신체 접촉은 안 했으니까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나중에 마고가 홀로그램 기술로는 같은 시간대에 각기 다르게 움직이는 걸 구현할 수 없을 거라고 지적하면 어쩌지?”

“그래도 홀로그램이라고 무조건 우겨요. 목소리 큰 놈이 이기니까. 나중에 저한테까지 추궁 넘어오면 우린 끝입니다. 다신 볼 일 없을 거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절뚝거리는 다리로 열심히 통로를 따라가는 클로카이를 흘끗 넘겨보았다.

놈이 내 시선을 감지했는지 중얼거렸다.

“귀가 어두워서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나이 먹으면 청력부터 떨어진다던데······.”

“누가 뭐래? 빨리 가! 빨리!”

“다리가 이 모양인 걸 어떻게 빨리 갑니까!”

“지껄일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움직여! 어디 사는 돼지 새끼처럼 한 마디를 안 지려고 하는 게 더 열받네.”

그렇게 다다른 또 다른 통로의 끝, 위타천이 옆으로 비켜선 자리에 클로카이가 다가섰다.

“나가서 왼쪽으로 코너 하나만 꺾으면 통제실입니다. 하지만 이쪽은 경비가 굉장히 삼엄할 테니 주의하셔야 할 겁니다.”

검을 역전개하자 벽에 댄 클로카이의 손에 빛이 맺혔다.

벽이 스멀스멀 무너지자 건너편의 빛이 통로로 밀려들었다.

클로카이를 뒤로 밀쳐낸 위타천이 고개를 살짝 내미는 순간, 오우거의 거대한 상체가 쑥하고 나타나 시야를 가렸다.

상체를 굽혀 우리를 살피는 오우거와 오우거를 살피는 우리.

‘씨발.’

이렇게나 바로 들킬 줄이야.

그리고 위타천에게 외쳤다.

“뭐해요! 나가요!”

내 말이 시동 버튼이라도 된 양, 위타천이 순식간에 영력의 건틀릿을 만들어 손에 씌우더니 앞으로 튀어 나가 오우거의 면상을 뭉갰다.

“으어어! 뭐야아!”

코를 부여잡은 오우거가 뒤로 쓰러진 사이, 나는 검을 전개하고 클로카이의 멱살을 잡은 뒤 밖으로 나가 왼쪽으로 틀었다.

위타천도 곧 뛰어왔고, 우리는 마치 은행 금고를 연상케 하는 잠금장치가 여럿 달린 거대한 철문을 볼 수 있었다.

“이게 뭐야······.”

“디지털 장비는 해킹이나 오류 위험이 있다고 다 아날로그 구형 장비로만 잠금장치를 구성했을 겁니다.”

뒤에서 고함소리와 다양한 발소리가 들렸다.

“저기! 저기 통제실로 갔다!”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는지 푸푸 거리는 오우거의 성난 목소리와 함께였다.

위타천이 철문으로 다가섰다.

“내가 뜯어내겠네. 후배는 뒤를 맡아주게.”

“후배 후배 하더니 귀찮은 일 떠맡기는 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그럼 내가 막고, 후배가 뜯고?”

“무식한 일 하느니 귀찮은 일 하렵니다.”

위타천의 등에 영력의 형상이 뭉치는 것까지 확인하고 클로카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수고 많았다.”

클로카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런 게 어디 있습니까! 하라는 걸 다 했는데!”

녀석이 손에 마력을 그러모았으나 검이 전개된 이상 어떠한 마법도 완성할 수 없었다.

“억울해! 억울하다고! 이 쓰레기 같은 새끼! 너는 내가 죽어서도―!”

품에서 어레스트를 꺼내 클로카이에게 던졌다.

마법사용으로 제작된 거라 손과 혀의 움직임을 아예 봉쇄하는 어레스트였다.

전신이 꽁꽁 감긴 채 눈만 굴리는 클로카이에게 말했다.

“다 들었다. 너는 끝나고 보자. 그리고 혹시나 내가 돌아왔는데 네가 여기 없다?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찾아 죽인다. 이해되면 눈 두 번 깜빡.”

깜빡 깜빡

“좋아.”

아까 꺾어 들어왔던 코너로 향하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무장한 인원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통제실에 침입하려는 놈들이 있다!”

“막아!”

“클로카이가 납치됐다!”

따위의 말을 지껄이는 놈들을 앞에 두고,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일방향 통로.”

존속살해도 전개해 양손에 검을 하나씩 들었다.

“검 두 자루.”

슬쩍 허리를 틀어 간격을 가늠해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거치적 거리지도 않고. 괜찮네.”

왠지 모르게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으에에! 흐에에! 하는 전투의 함성을 질러야 할 것 같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버프 스킬을 거는 데는 문제가 없다.

중요한 건 모양새 아니겠나.

나를 향하던 놈들에게 오히려 다가갔다.

[검막]

[팽이회전]

[균형잡기]

[반고리관 안정화]

양손에 검을 든 채로 회전하면서.

이 순간, 나는 회오리바람이며 칼날폭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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