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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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밖에 없잖아!”
“있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저만 다닐 수 있게 마련해둔 곳입니다!”
왜 그런 짓을?
순간 의문이 들어 녀석의 뒤통수를 다시 한번 바라보고 있자 스멀스멀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는지 녀석이 묻지도 않은 내용을 빠르게 주절댔다.
“네오-서울을 엎을 수 있다고 해서 모였지만 단시간에 여기저기서 모인 놈들이 어디 쉽게 한마음 한뜻이 되겠습니까. 다들 어떻게 하면 곁에 있는 놈을 꼬시거나 죽여서 자기 몫을 늘릴까 하는 고민밖에 안 합니다. 장 님, 아니 장의 곁에 있는 저한테도 그런 제의가 은근히 올 정도인데 자기들끼리는 얼마나 서로 지지고 볶고 하겠습니까. 관리가 안 될 지경입니다.”
그 사이, 앞뒤로 격벽이 내려와 우리는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
뚫으려면 뚫을 수는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시간이 소모될 것이고, 격벽이 다 내려오기 전 힐끗 살펴본 바에 의하면 앞으로도 격벽은 많았다.
돌파를 시도하면 방해가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방해의 종류와 방식도 모른 채 모두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라면 부담이었다.
그때, 위타천이 영력의 날개를 만들어내 가볍게 휘둘렀다.
만들어진 기류가 부드럽게 위로 치솟았다.
날개를 펄럭여서 계속 공기 흐름을 만들어내는 위타천이 내게 말했다.
“후배, 결정해야 하네.”
위타천의 시선이 천장의 작은 환기구를 향했다.
“정확한 종류는 알 수 없지만, 무색무취의 기체가 흘러들고 있네. 맡아서 좋을 건 없을 것 같아. 잘도 이런 시설까지 갖췄군. 쥐새끼, 알고 있는 게 있나?”
멀쩡한 한쪽 손으로 입가를 막은 클로카이의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신경가스일 겁니다.”
이것도 [정화]나 [큐어]로 풀릴까?
궁금하긴 하지만 굳이 이런 시간, 장소, 상황에서 실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앨리스를 비롯한 주변인들이 내게 미쳤다는 소리를 종종 하지만 그 정도로 미치진 않았다고.
클로카이의 말이 더욱 빨라졌다.
“모인 놈들끼리 시비가 붙는 경우도 허다해서 휘말리지 않기 위해 저만 이용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둔 겁니다. 이런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고요.”
“이런 상황?”
“시설 내에서 시비 붙으면 말리는 것도 한두 번이죠. 이런 식으로 격리하고 수면 가스 흘려보내서 처리합니다.”
범죄자 놈들의 바닥을 치는 의리나 동업자 의식도 경악스러운데 처리 방식은 더 기가 막힌다.
이런 마음이 들면 안 되겠지만 새삼 이런 막장 중의 막장 조직을 만들고, 키우고, 유지한 장의 능력이 경탄스럽다.
죄다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위타천의 부관 일을 몇 년 동안이나 말끔하게 해내면서 이쪽 일도 동시에 진행했다는 소리인데 그게 사람인가.
그리고 장의 정확한 능력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근거리에서 위타천을 전투 불능 상태로 몰아갈 정도다.
클로카이도 장의 능력이 무엇인지는 모른다고.
네오-서울과 어느 정치가 집안의 어둠이 도대체 뭘 길러낸 건지 가늠하니 아득해져서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후배.”
위타천의 말이 내 의식을 밀어 올렸다.
클로카이를 실은 수레를 벽에 밀어붙이고 말했다.
“뭐라도 해.”
“죄송하지만 저만 사용할 수 있는 통로라 마법을 사용해야 하는지라······이 검을 좀······.”
“개수작 부리지 말고!”
“여기까지 와서 무슨 개수작입니까! 제가 여기 있는 걸 알 텐데도 신경가스를 뿌리는 걸 보면 저도 가차 없이 버려진 겁니다!”
위로 고개를 들었다.
위타천의 날개가 만들어내는 기류 위쪽으로, 조금 결이 다른 아지랑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클로카이의 설명에 따르면 저게 신경가스일 것이다.
어떻게 하는 건지 가늠도 안 되는 세밀한 날개의 움직임 덕에 아직까지 호흡기에 가스가 차지는 않았지만, 신경가스층은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이 격리된 공간에서 차지하는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신경가스가 몸 안에 들어오는 경우, 정말 천운으로 나는 어떻게 멀쩡해진다고 해도 위타천의 목숨까지 보장할 수는 없었다.
이 쥐새끼는 죽든 말든 상관없지만.
줄곧 클로카이에게 들이대고 있던 검을 역전개했다.
칼자루를 놈의 목 근처에 들이밀며 윽박질렀다.
“네가 하려는 게 안 통하는 건 직접 봤지? 헛수작하면 바로 죽인다. 너를 살려두는 건 여러 옵션 중 하나일 뿐이야.”
“암요. 알지요. 지금은 시운이 안 맞이 이런 꼴이 됐지만, 저도 제 분야에서는 날고 기는 놈······.”
“빨리하기나 해!”
끙하는 소리와 함께 절룩거리며 수레에서 일어난 클로카이가 멀쩡한 손을 들어 잘려 나간 팔의 단면에서 꾸덕하게 굳은 피를 찍었다.
“크윽······. 잘린 부분이라도 주워왔어야 나중에 접합이 편할 텐데.”
그리고는 벽에 술식과 진이 복잡하게 얽힌 도형을 스윽스윽 그려냈다.
‘이건 장 님도 모르게 만들어 놓은 건데······. 그 작자도 날 버리려 했으니 똑같겠지······.’ 하는 한탄과 함께.
순식간에 완성된 도형을 앞에 두고, 클로카이는 몸을 돌려 내게 당부했다.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니 절대로 공격하면 안 됩니다?”
“알았다고.”
다시 벽을 향해 몸을 돌린 클로카이가 손을 도형 위에 올려 방언과도 같은 영창을 완성하기 무섭게 벽이 스르륵 녹았다.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사람 하나가 몸을 웅크려야 간신히 지나다닐 법한 통로, 아니 토굴에 가까운 길이었다.
비쩍 마른데다가 애초에 키가 크지 않은 클로카이라면 무리 없이 지나다닐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마감을 하지 않을 것처럼 벽과 천장이 뭉텅뭉텅 거칠었지만, 자세히 보면 또 거친 면면은 날카로운 무언가로 절단한 듯이 매끈했다.
클로카이를 비켜서게 하고 검을 전개해 안으로 밀어 넣었다.
광자 검날에서 뿜어지는 빛이 통로를 밝혔고, 일단 진입부에는 함정 따위가 없는 것 같았다.
옆에 있던 클로카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했다.
“빨리 들어가지 않으면 가스가 여기로도 유입될 겁니다.”
검을 놈에게 겨눈 채, 위타천에게 물었다.
“제가 맨 뒤에서 이놈이 헛짓거리 못 하도록 감시하면 될까요?”
“나보고 앞장서라는 소리로 들리는군.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인데 말이야.”
씩 웃은 위타천이 덧붙였다.
“하지만 꽤 마음에 들어. 후배가 드디어 나를 신뢰하기 시작한 것 같거든.”
신뢰는 예전부터 어느 정도 하고 있었다.
다만 그걸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어떤 폭주를 맞이할까 상상하기도 두려워서 하지 않은 것뿐.
“자! 가세!”
위타천이 날개를 접고 통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만들어내던 기류가 힘을 잃는 것과 거의 동시에 가스 아지랑이들이 보이지 않는 폭포처럼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나 역시 한 손으로는 클로카이의 뒷덜미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전개한 검을 클로카이에게 겨눈 채 안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통로는 여전히 격실과 연결된 상태였다.
“닫아!”
“노력하고 있습니다!”
“닫으라고!”
클로카이가 열심히 손을 휘저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문득 생각이 스쳐 갔다.
클로카이의 뒷덜미를 쥔 손을 쭉 뻗고, 검을 든 손은 그 반대로 뻗자 클로카이의 손에서 뻗어나간 마력이 순식간에 벽을 밀려 올라오게 했다.
가스 아지랑이가 이쪽으로 스며들기 직전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통로 안, 우리 셋의 긴장감 섞인 숨소리만이 훅훅하고 들려올 뿐이었다.
벽이 만들어지기 무섭게 검을 가까이에 가져다 대서 광자 검날 빛이 만들어낸 음영이 길게 드리워진 클로카이의 얼굴이 달싹거리면서 적막을 깨트렸다.
“이 검······. 대체 뭡니까. 이 정도로 마법 형성을 방해하는 검이 있다고는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마법사들은 죽기 직전에도 궁금한 걸 물어보고 답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이라던데, 이 쥐새끼도 꼴에 마법사라고 이 와중, 이 상황에서도 궁금한 걸 꺼내놔야 속이 시원한 모양.
아주 당연히, 놈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를 해주지는 않았다.
“알 거 없고, 이거 어디로 이어지냐?”
클로카이가 사악한 웃음과 함께 답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십니까? 말씀만 하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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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메가와 위타천이 클로카이의 마법을 역으로 통과해 미사일 기지로 넘어간 직후, 앨리스의 목소리가 ‘자경단’ 구성원들에게 전파됐다.
-오메가, 위타천 통신 및 위치 정보 두절. 상황 파악 중.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거신족 클론과 트라이포트의 범죄자들을 상대하던 자경단 사이에 작지 않은 충격이 퍼졌다.
이동형 토치카의 내부에서 복잡한 강철계 마법을 통해 제어 운용하고 있던 발렌시아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오메가 청년이? 어떻게 된 건지 상세 내용을 원한다.
토치카의 움직임이 멈춘 아주 잠깐 사이, 하반신을 기계 전갈처럼 바꾼 범죄자 하나가 폐허 아래 숨어있다가 토치카를 향해 덤벼들었다.
토치카의 돌출된 어깨 쪽 포탑에 올라 있던 여다함이 외쳤다.
“발렌시아! 정신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화들짝 정신을 잡은 발렌시아는 토치카를 향해 덤벼드는 범죄자의 위치를 확인하고 포탑의 위치를 조정해 여다함에게 마법을 원활히 사용할 수 있는 시야각을 만들어 주었다.
여다함의 손에서 마력이 팽창했다.
[작위作蝟]
폐허에 있던 금속들이 벌떡 일어나 전갈을 향하더니 발사되듯 일제히 쏘아졌다.
‘고슴도치 만들기’라는 마법의 이름처럼, 순식간에 금속의 털을 지닌 것처럼 여기저기 금속이 박히고, 튀어나온 모양새가 된 전갈이었다.
하지만 놈은 아래로 추락하면서 집게 안에 담아두었던 무언가를 흩뿌렸다.
아주 작은 폭탄들이었다.
여다함이 다시 한번 마법으로 폭탄 내부의 금속을 조종해 폭발을 무효화하려고 했지만, 폭탄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폭발 직전이 되었다.
여다함이 눈썹을 찡그렸다.
“금속을 배제한 폭탄인가. 발렌시아, 대비해!”
여다함의 목소리를 들은 발렌시아의 조종에 따라 토치카의 외부장갑이 여다함이 있는 포탑 쪽으로 몰려들었다.
금속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여다함은 입술을 깨물었다.
폭탄의 수가 많고, 터지는 위치가 너무 가까워 적지 않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지금부터 방어 계통의 강철계 마법을 구성해도 늦었다고 생각했을 찰나, 폭탄이 터지고 토치카가 휘청였다.
쓰러질 듯 기울던 이동형 토치카가 균형을 찾았을 때, 여다함은 자기 몸 어디에도 부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더 놀라고 말았다.
토치카 주변, 육각형 조각들이 여럿 날아다니며 쉴드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폭발의 위력이 감쇄된 것에 커다란 역할을 했음이 분명했다.
-괜찮습니까.
포탑 바깥으로 몸을 내민 여다함의 눈에, 펠루다가 보였다.
방금의 폭발로 데미지를 크게 입어 못 쓰게 된 등딱지 조각들을 회수하면서 펠루다가 말했다.
-대장은 어디 가서―.
펠루다의 말이 이어지기 전, 누군가가 전체 통신 채널로 의연하게 말했다.
-오메가 님과 위타천 님은 아마 장을 잡을 수 있는 길로 직행한 것 같아요. 옆에서 목격했지만 두 분의 의도는 제 직감일 뿐이니 믿지 않으셔도 좋아요.
신시아였다.
-오메가 님이 좀 허술한 면이 있고, 보는 사람 불안하게 하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못 챙기는 분은 아니라는 걸 여기 계신 분들은 다 알고 계실 것 같아요. 무엇보다 다 오메가 님을 믿고 여기에 오신 거잖아요? 그것처럼, 우리는 오메가 님이 우리에게 부탁한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흔들리지 말아요.
디에고가 답했다.
-나는 오메가와 직접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야스민 영애의 말에 틀린 부분이 없다고 생각되는데.
다른 이들도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오메가와 위타천의 연락 두절로 흔들리던 마음들이 굳건히 자리 잡혔다.
잠잠하던 앨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퍼레이팅 모드, 지속하겠습니다.
앨리스의 도움을 받아 자경단들이 다시 WSS 공업지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일으켜 세운 클론 좀비들을 조종하던 신시아 곁으로, 이수련의 원격 조종 로봇 하나가 날아왔다.
신시아가 흘끗 확인하고 말했다.
“왜? 무슨 일 있어? 도와줘?”
이수련이 직접 조종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로봇은 신시아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리더니 한 마디 했다.
"따봉."
그리고 로봇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날아갔다.
“참나, 싱겁기는.”
그렇게 말하는 신시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앨리스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리스! 내······들려?
필요에 따라 개별 인원에게 필요한 브리핑이 전달될 수 있도록 채널을 계속 전환 중이던 앨리스는 깜짝 놀라 전체 통신 채널에 크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사장님! 어디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