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224.
글라럽은 톈진 권역 출신이면서, 현재는 장에게 협력해 네오-서울 침공에 일조 중인 오크 검사다.
장에게 도움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최강의 검사라고 일컬어지는 야타가라스와의 승부를 위해서이지만, 그건 글라럽의 일방적인 소망일 뿐, 야타가라스는 글라럽을 알지도 못하고 지금은 유격전을 위해 단독으로 허베이 권역에 나가 있다.
허베이 권역에서 야타가라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글라럽도 들어 알고 있었다.
궁궐처럼 지어진 허베이 권역 중앙위원회 건물이 양단되었다는 소식이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밤하늘이 무너져 건물을 덮치는 것 같았다던가.
곧바로 장에게 허베이 권역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고픈 글라럽이었지만 참아냈다.
얼마 전, 장을 수행하며 마실 가듯 나간 자리에서 또다른 먹잇감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먹잇감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전신 곳곳에서 어마어마한 전력을 만들어내는 소형 발전기, 그 발전기들이 만든 전력을 먹고 엄청난 열과 굉음을 내뿜는 옆구리의 레일, 레일 사이에 꽂힌 검까지.
모든 것이 준비가 끝났음에도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막대한 무력감과 절망.
먹잇감은 글라럽 자신이었다.
그것이 오메가를 마주한 글라럽의 감상이었다.
클로카이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목숨을 잃었으리라.
손이 날아가긴 했지만 어차피 글라럽은 사이보그라 손 하나 날아간 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파손된 부위를 벌려 내부의 손상된 모듈을 분리해서 버린 뒤 여분의 파츠를 끼우면 그만이었다.
혈액에 함유된 나노봇 덕분에 아물어가는 피부를 보며 글라럽은 생각했다.
‘오메가라고 했나. 다시 승부하겠다. 야타가라스와 붙기 전 좋은 몸풀기 상대다.’
글라럽은 검을 쥔 이후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몸담았던 부대나 팀이 후퇴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것은 작전상 필요한 부분일 뿐, 자신은 승리했다고 글라럽은 판단했다.
어쩌면 맹목적인 믿음일지도 모르고, 그 믿음이 글라럽이 이렇게까지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완벽한 무력감을 안긴 오메가를 그냥 놔둘 수 없는 글라럽이었다.
그리고 지금, 글라럽은 디에고의 엄니에 배가 관통 당한 채 밀려나고 있었다.
저 멀리 오메가가 탄 호버바이크 뒷모습이 멀어져갔다.
“비켜라!”
엄니에 꽂혀 몸이 위로 들린 불안정한 자세에서 글라럽이 몸을 뒤흔들었다.
그대로 디에고의 엄니를 부러트릴 기세.
디에고는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가 위로 힘차게 들어 올렸다.
엄니에서 글라럽의 몸이 쑤욱 빠져 공중으로 떠올랐다.
여전히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불안정한 자세.
하지만 글라럽의 옆구리에 장착된 레일은 여전히 전력을 끌어모으고 있었으며 손은 여전히 검을 잡고 있었다.
글라럽의 눈에 멀어져가는 오메가와 아래쪽에 있는 디에고, 나비가 보였다.
‘일단 귀찮게 하는 놈들을 먼저 처리한다.’
검을 뽑기 직전, 글라럽은 무언가 자신을 향해 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다리를 칼날로 바꾼 채, 열 손가락 끝을 열어 총구를 들이민 박예진 여사였다.
글라럽이 [레일건 발도]를 시행하기 전, 여사의 눈빛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말살 모드]
여사의 손끝에서 압축형 블래스터 탄환이 발사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여사의 몸 곳곳에서 튀어나온 병기들이 글라럽에게 향했다.
글라럽은 검을 뽑아 맞섰으나 모든 병기에 대항하는 것은 무리였다.
간신히 치명상을 피한 글라럽이 낙법을 펼치며 바닥을 굴렀고, 박예진 여사는 우아한 몸놀림으로 착지했다.
[말살 모드]의 영향으로 글라럽은 피부 여기저기가 벗겨진 상태였으며, 한쪽 옆구리가 날아가기 뒤쪽의 풍경이 보이기까지 했다.
글라럽이 등에 메고 있던 철판을 옆구리로 옮겨 다시 레일을 충전할 때, 그다지 위험하지 않아 보이는 케이블 하나가 박예진 여사에게서 쏘아져 나와 글라럽의 허벅지에 꽂혔다.
케이블을 통해 전해지는 침투 시도를 느끼며 글라럽이 피식 웃었다.
“해킹인가.”
안드로이드나 사이보그 간의 전투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상대의 해킹 시도에 당해 소프트웨어 주도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워낙 복잡한 장비와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그것들을 묶어 통제하는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글라럽은 이 상황이 웃겼다.
전장을 구르며 벌어들인 목숨값 대부분을 레일건과 신체 강화에 박았으니 글라럽의 신체 소프트웨어 보안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케이블 커넥팅을 통한 해킹 시도라니. 구버전 안드로이드다워.”
박예진 여사에게서 자신에게로 이어진 케이블을 뽑아버리기 위해 손을 뻗은 글라럽이 이상함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손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손이 떨리고, 몸 곳곳에 박힌 발전기의 출력이 약해지고 있었다.
다리에도 힘이 빠져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글라럽이 굳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굴려 주위 상황을 파악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서걱-
글라럽의 목에 붉은 실선이 생기고 몸과 목이 분리되어 떨어졌다.
박예진 여사가 다리 칼날에 묻어있는 글라럽의 체액을 털어냈다.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글라럽이 중얼거렸다.
“대체······어떻게······.”
아직 눈을 굴리는 글라럽의 머리를 박예진 여사가 위로 차올리자 주위에서 다른 이들을 상대하고 있던 나비가 귀신같이 알아채고 달려들어 새로 장착한 다리로 글라럽의 머리를 뭉개버렸다.
발레를 하듯 아름다운 움직임으로 남아있던 글라럽의 몸을 수십 조각 내버린 박예진 여사가 혼잣말 같은 대화를 내뱉었다.
어느새 케이블은 그녀의 몸으로 회수된 지 오래였다.
“다짜고짜 제 외부 툴에 접근할 수 있게 달라길래 조금 당황했는데, 굉장한 실력자군요. 구형 해킹 케이블로 저 정도의 사이보그를 완전 무력화할 줄은 몰랐어요.”
-과찬이세요. 다 선배님이 틈을 만들어 주신 덕분인걸요.
일시적으로 박예진 여사와 동조해 성공적으로 해킹을 마친 앨리스의 목소리였다.
공을 돌리는 앨리스의 말과는 달리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박예진 여사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안드로이드와 안드로이드 간의 동조라지만 둘은 애초에 출시 목적도 다르고 출시연도도 한참이나 차이가 난다.
더군다나 박예진 여사는 파츠 교환과 업그레이드를 하도 한 탓에 본인이 아니고서는 건드리기도 힘든 수준, 그녀의 구조를 이해하는 건 같은 안드로이드 중에서도 없다고 봐도 좋았다.
박예진 여사는 한 명의 이름을 떠올렸다.
‘한 명 있었지. 올가.’
지금은 세상에 없는, 어느 안드로이드 공학자의 이름을 떠올린 박예진 여사였다.
올가에게 맡겨도 쉽지 않았을 일은 앨리스는 너무나 가볍게 해냈다.
심지어 다른 인원들에게 부착된 렌즈를 통해 공유된 시야를 이용해 상황 파악과 오퍼레이팅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동시에.
앨리스라는 이름의 사무보조 안드로이드가 머지않아 능력 제한 법령 대상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 여사였다.
하지만 앨리스에게 크나큰 PTSD가 있는 마고가 공공 집행자로 있는 이상 그렇게 될 확률은 매우 낮았다.
마고는 가능하면 앨리스와 얽히는 일 자체를 회피하고 있었기 때문.
여사는 고개를 돌렸다.
안드로이드, 사이보그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신체 일부를 교체해 소프트웨어의 보정을 받아 사용할 것처럼 생긴 놈들이 잔뜩이었다.
“후배님. 조금 더 힘을 빌려줬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영광이죠, 선배님.
여사가 디스트로이어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활약을 펼치기 위해 몸을 날렸다.
한편, 서로 얼굴도 본 적 없지만 정다운 안드로이드 선후배와는 다르게 일방적인 선후배 관계를 설정한 공공 집행자, 그런 공공 집행자를 넌더리 내는 해결사 역시 같은 공간에 있었다.
#
덤벼드는 클론과 쏟아지는 트라이포드 놈들 사이를 휘젓고 있으니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후배! 후배!”
나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위타천뿐이다.
위타천은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인원에게서 합공을 당하고 있었는데, 물론 불리하지는 않았다.
한 놈은 영력 철퇴로 머리통을 깨부쉈고, 다른 한 놈은 멱살을 잡고 얼굴을 폐허에 갈아버리고 있었으며, 다른 놈들도 위타천의 기세에 겁먹은 듯 주춤이고 있었다.
다만 클로카이인지 하는 쥐새끼가 만들어낸 도형에서 여전히 처음 보는 놈들이 튀어나오고 있었으며, 그들 중 열에 여섯, 일곱은 위타천을 보고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지금은 팽팽하지만 위타천도 수십 명에게 포위되면 위험할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위타천 쪽을 향해 바이크를 몰았다.
“바이크가 온다!”
“저놈이 오메가다!”
떠들어대는 놈들이 있었으나 불덩이를 먹이거나 얼음덩이를 처박아서 떠들지 못하게 해주었다.
위타천과 투닥대던 놈들에게 검을 휘둘러 떼어내고 손을 뻗어 위타천을 끌어당겨 바이크 뒤에 태웠다.
영력을 거둔 위타천이 바이크에 오르자마자 주위가 시끄러웠다.
“위타천이 도망친다!”
“쏴! 따라가!”
위타천이 손을 뻗자 그의 손에서 영력의 유성추가 날아가 소리치던 놈의 골통을 부쉈다.
바이크의 속력을 올리면서 물었다.
“악연이라도 있어요? 아주 악에 받쳐서 달려들던 놈들이 많던데요.”
“그런 건 없네. 다만, 간간이 내가 잡아넣은 놈들이 있던데.”
그런 걸 다른 사람들은 악연이라고 불러요······.
“탈옥한 놈도 있고, 어디로 간 건지 기록이 삭제된 놈들도 있던데 여기서 다 보는군.”
이 악물고 바락바락 위타천에게 달려들던 이유가 있을 만하다.
어쩌면 일이 여기까지 오게 된 만악의 근원은 위타천이 아닐까?
장이 놈들을 규합할 때 딱 한 마디 하는 거다.
‘위타천 모가지 따게 해준다.’
위타천이 범죄자를 대하는 방식으로 봤을 때, 이거에 혹할 놈들 많다고 본다.
거기에 한 마디 더 얹는 거지.
‘잘 되면 옵션으로 네오-서울 부동산.’
범죄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왔던 놈이라도 저 조건들을 듣는 순간 옆에 있던 처음 보는 험악한 놈과 어깨동무하고 춤추면서 장밋빛 미래를 꿈꿔볼 수 있겠다.
일단 이런 생각은 나중에 하고, 뒤에서 날아오는 투사체들을 피하기 위해 바이크를 요리조리 몰자 위타천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건가?”
“앨리스 브리핑 못 들으셨어요? 연구 시설이 드러났다던데요. 그쪽으로······.”
위타천이 내 말을 끊었다.
“현장에서 구른 내 감이 말하는데, 그건 함정일 가능성이 높네.”
“네? 왜요?”
“왜긴 왜야. 타이밍 좋게 딱 드러나서 ‘나 여기 있으니 들어와 보쇼.’하고 있으니까.”
“너무 단편적인데요.”
“일부러 그쪽에서 단편적으로 설계한 거겠지. 전장에서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바이크 속도를 줄였다.
위타천의 말이 계속됐다.
“장이 거물 범죄자인 게 드러난 판에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장은 내가 키운 거나 다름없네. 놈은 내게 배웠어. 그러니 나는 알 수 있네. 장은 틀림없이 이곳에 있지만, 그 연구 시설이란 곳에는 있지 않을 거야.”
“그럼, 어디에 있는데요.”
“정확한 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장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짐작이 가네. 클로카이라고 했나? 물질계 마법사고 공간 이동의 달인이라지? 장이 놈을 옆에 데리고 다니는 건 유사시에 몸을 피하기 위해서야. 그러니 클로카이를 따라가면 장이 있겠지.”
위타천이 내 어깨를 두드린 뒤 이미 지나쳐 온 저 뒤를 가리켰다.
꿀렁이는 보랏빛 도형이 있는 곳이었다.
“저거요?”
“내가 만난 범죄자 놈들 중에 공간을 만지려 했던 놈이 적지 않아. 그만큼 범죄에 매력적인 요소가 없거든. 사람을 옮기든, 물건을 옮기든 할 수만 있으면 무조건 도움이 되니까. 마법, 도술은 물론이고 과학이나 기술도 예외 없지. 블랙홀-웜홀 응용장치, 입자분해전송기 등등. 셀 수도 없지. 저만큼의 안정성을 지닌 건 처음 보긴 하다만.”
내 뒤에 앉아 있는 터라 위타천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그런데 말이야. 경험상 저런 ‘통로’는 일방향이 아니야. 무조건 쌍방이지. 예외는 하나도 없었네. 이해되나?”
머릿속에서 불꽃이 팍 터졌다.
“잡으세요.”
위타천이 내 허리를 붙잡기도 전, 바이크 뒤를 날려 방향을 180도 틀었다.
이제 나도 정면에서 보랏빛 도형을 볼 수 있었다.
“열려있으면 우리도 저기로 갈 수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정확하네.”
그대로 스로틀을 감았다.
바이크가 공기를 뿜으며 직선으로 나아갔다.
들이치는 바람을 느끼며, 통신 채널에 대고 말했다.
“모두 제 위치 기준 1시 방향에 있는 보라색······!”
바이크가 가속하자 낌새를 알아챈 것인지 도형의 크기가 천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람 키의 3배 정도는 되어 보였던 것이 어느새 2.5배 정도로 줄어 보였다.
“반응을 보니 제대로 짚었군!”
위타천의 환호성에 호응할 새도 없이 스로틀을 더욱 세게 감았다.
엄청난 속도로 도형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지만, 도형이 줄어드는 속도도 만만치 않았다.
제법 근접했지만, 바이크가 통과할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다.
결국―.
“앨리스! 바이크 부탁해! 우리는 뜁시다!”
“그래! 이래야 내 후배지!”
“후배 안 한다니까요!”
나와 위타천은 달리는 바이크 위에서 작아지는 도형을 향해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