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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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서울 강동 에어리어 비행장, 나는 입국장 앞에서 하품을 쩌억하고 중얼거렸다.
“새벽이래서 5시나 6시 정도일 줄 알았는데 2시 반은 너무한 거 아닌가요?”
그러자 늦은 것인지 이른 것인지 아리송한 이런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가주겠다고 나선 신시아가 활기차게 답했다.
“그나마 항공기들이 가장 적게 뜨고 내리는 시간을 택하려면 선택지가 얼마 없을걸요. 저는 나쁘지 않아요. 요새는 데이워커가 아닌 흡혈귀가 없다지만 원래 저희의 시간은 밤이니까요.”
신시아가 유독 쌩쌩해 보이는 이유가 시간 때문이었나보다.
그래도 신시아가 와준 걸 명분 삼아 리무진을 빌릴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바이크 뒤에 태워서 약속 장소까지 이동해야 할 뻔했다.
내 옆에 붙은 신시아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오시는 분이 누구시길래 이렇게 마중까지 나오셨어요? 평소 오메가 님 생각하면 절대 이렇게까지 안 할 것 같아서 여쭤봐요.”
바로 답하지 못했다.
묘하게 더 반짝이는 눈망울, 분명 LED 조명 빛 아래건만 달빛이라도 반사하는지 은은하게 새하얀 신시아의 피부, 그와 대비되듯 매혹적으로 붉은 입술.
무엇보다 자연스레 올려 묶은 머리카락 너머, 황홀한 곡선의 목덜미까지.
평소와 같은 세미 정장 차림이 아니라 편하게 입은 운동복차림의 신시아가 오히려 더 미묘하고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밤은 자기들의 시간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더니, 이런 부분도 포함된 건가.
“오메가 님?”
다시 신시아가 나를 부른 후에야 신시아의 목덜미에서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신시아가 눈웃음짓고는 손을 올려 자기 목을 스르륵 쓸어내렸다.
“예전에도 그러시더니.”
괜히 민망해져 반걸음 정도 옆으로 물러섰다.
어째 얼굴이 후끈거리는 걸 느끼며, 빨리 말했다.
“신시아도 만난 적 있는 분이니까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행정, 외교적인 절차는 다 대주교 님이 맡아서 네오-서울 시청이랑 얘기를 잘해서 처리해주시긴 했는데, 일단 공개되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이 알 필요까지는 또 없으니까······.”
일인 만담에 가까운 횡설수설을 늘어놓고 있으니 신시아가 웃으면서 다시 내 옆으로 붙었고, 마침 타이밍 좋게 입국장의 자동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애초에 전용기를 타고 왔을 테니 더 이상 내릴 사람도 없었지만.
청바지와 티셔츠, 머리 뒤로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는 두 개의 뿔, 등에서부터 시작해 물결치듯 아래로 떨어져 흐르는 아름다운 흰색 꼬리.
초압축 외골격이 내장된 X밴드와 일정 간격을 두고 밴드 위에 늘어선 부양 장치까지.
바닥에서 살짝 떠서 두둥실 이쪽으로 오는 용인은 디트로이트 권역의 공공 집행자이자 일정 지역에 무차별 폭격을 하는 능력으로는 전 세계에서 따를 사람이 없을 백린白燐, 페테르였다.
반가움에 손이라도 맞잡기 위해 내가 손을 흔들었다.
입국장을 빠져나와 페테르는 나와 신시아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마에 걸쳐 놓은 안대를 벗지도 않은 채로, 페테르가 내 앞에 털썩 무릎 꿇었다.
“페테······르?”
고개를 떨구고 양손을 모은 페테르.
묵직한 페테르의 목소리가 내게 전해졌다.
“영광 가득한 부르심에 응하였나이다. 열과 성, 신과 심, 혈과 육을 바쳐 적을 불태울 테니 부디 말씀만 하소서. 저는 준비를 마쳤나이다.”
이런 성격이었나?
아닌데?
자기 프라이드가 되게 강하면서 호쾌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내가 당황한 것은 당연하고, 신시아도 무릎 꿇은 페테르를 앞에 두고 나를 향해 어떻게 된 거냐며 입을 뻐끔거렸다.
나도 몰라요.
일단 페테르의 옆에 가서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려 했다.
“왜, 왜 이래요. 일단 일어나시고, 말씀도 편하게 하세요. 저번처럼요.”
페테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춘 채 페테르가 말했다.
“그럴 수는 없나이다. 어찌 대전사의 생부에게 함부로 하오리까.”
“대전사? 벡 얘기하는 거죠?”
벡 얘기를 하자 페테르가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글썽였다.
“비밀리에 방문해 대전사를 몇 번 마주했나이다. 아아! 호흡마다 느껴지는 인공 기관지의 아주 미세한 소음! 극도로 정밀한 금속성 근육섬유의 유연함! 벌써 양손에 기계톱 모형을 들고 뛰어다니는 모습까지! 걸음마다 느껴지는 신앙의 흔적! 용맹한 자태까지! 이 불초 페테르! 대전사를 안아 들고 쏟아지는 눈물 너머로 직감했나이다! 대전사로 인해 교단은 새로운 성세를 맞으리라! 내게 주어진 소임은 대전사께서 밟으실 길을 닦아두는 것! 그뿐이면 족하구나!”
아무래도 벡 뽕을 단단히 맞은 것 같은데, 내 피가 섞여서 하는 말이 아니라 벡이 좀 귀엽긴 하다.
근데 그거랑은 별도로 일단 여길 좀 벗어나 줬으면 한다.
개인용 항공기나 전용기만 이용할 수 있는 입국장이라 우리밖에 없긴 하지만 멀리서 새벽 타임 비행장 직원들이 두셋씩 모여 우리를 보고 수군거리는 게 보인다.
게다가 페테르는 바로 수도방위사령부와 협력해 클론 소탕 작전의 한 축을 맡아줘야 한다.
여기서 신앙 고백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어찌 이리 아량이 넓으십니까. 대전사께서도 필히 생부를 닮아 가장 보잘것없는 자들을 굽어살피시겠지요. 아아······V16······V16······.”
대체 페테르가 왔을 때 벡이 뭘 했길래 이 지경이 됐나 모르겠다.
헤지르 대주교랑 페테르를 앞에 앉혀두고 벡이 혼자 엔진 분해 결합이라도 한 건가.
아니면 기계톱 품새라도 보여준 건가.
마침내 페테르가 글썽이던 눈물을 훔치고 내 부축을 받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내 부축은 의미가 없는 수준이긴 했지만······.
그러자 여태껏 휘둥그레 뜬 눈으로 나와 페테르만 반복해서 바라보던 신시아도 얼른 다가와서 내가 잡은 반대편으로 페테르를 부축했다.
“페테르 씨가 오실 줄은 몰랐어요. 닐 숙부도 너무하네요. 저한테 슬쩍 한 마디 찔러넣으셔도 됐을 건데.”
닐 아이리스.
디트로이트 권역을 중심으로 한 북미대륙 중부 권역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발휘하는 흡혈귀 가문의 실세다.
흡혈귀 회합 때 페테르를 호위로 지정한 인물이기도 했다.
신시아의 밉지 않은 투정을 들은 페테르가 신시아를 보고 말했다.
“둘의 결합은 언제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발이 꼬여 넘어질 뻔했다.
쉽게 당황하지 않는 신시아의 말이 꼬였다.
“겨, 겨, 결합요? 누구랑 누구요.”
“아시면서 묻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 하겠습니다. 대전사의 생부와 영애의 결합을 묻는 겁니다.”
어느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신시아였다.
“그건······음······.”
“대전사의 생부께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저희 기계교단에서는 사회의 발전에 따른 다양한 가정 형태와 결합 형태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이긴 합니다만 정식으로 대전사의 양모로 인정해 성인으로 시성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생부와의 결혼이라는 직접적이고 확실한 절차가 가장 좋습니다.”
“······.”
“어차피 대전사가 성년을 맞으면 흡혈귀의 피를 받아들일 것이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빨리 불필요한 과정을 정리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감히 간언 드립니다. 양모시여.”
신시아의 표정이 부쩍 진지하게 변하는 걸 보고 나는 페테르를 이끄는 걸음을 빨리했다.
#
페테르의 입국으로부터 이틀 뒤.
나는 퓨전 코퍼레이션의 수송기를 타고 네오-서울과 WSS의 남측 경계를 날고 있었다.
앞쪽으로 WSS의 공업 단지가 작게 보였다.
패널과 버튼을 터치해 수송기 외부의 렌즈를 뒤쪽으로 돌렸다.
저 멀리 자줏빛 노을이 물들이는 구름 사이사이, 기다란 거체가 날고 있었다.
페테르였다.
그리고 구름과 희롱하듯 노니는 페테르의 한참 아래, 지상이라 불리는 곳에서는 거신족 클론들이 기계교단의 특수 백린연막탄에 의해 불타고 있을 것이다.
페테르의 참전은 일대 혼란을 불러왔다.
‘북미가 세계 경찰 노릇을 하던 시절을 지났다.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응징하겠다,’ 하는 중화권 권역의 원색적인 비난은 물론이고, 세계 각 권역, 심지어 페테르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디트로이트 권역에서마저 ‘한 권역의 공공 집행자가 취할 행동으로는 적절지 않다.’라고 하는 반응마저 나왔다.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억측과 비방에 페테르는 한 마디로 응수했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을 행한다.’
그리고는 거신족 클론이 나타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가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페테르가 떠난 자리, 수도방위사령부의 병력이 맹진하며 잔존 클론들을 뭉갰다.
수도방위사령부와 공공 집행본부의 기조도 내가 시청을 나온 시각을 기점으로 180도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네오-서울 시청이 권역응전태세를 발동한 것.
방어전략 위주에서 공격전략 위주로 판이 다시 짜였고, 공공 집행자를 필두로 한 공공 집행본부 구성원들은 네오-서울 곳곳을 파고들며 이적단체를 잡아내기 시작했다.
네오-서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간 개성 권역을 넘어 네오-서울까지 적화통일하겠다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던 평양 권역이 이례적으로 공식 성명까지 내면서 자신들은 트라이포드와 관련이 없음을 밝히는 일도 있었다.
이른 시일 내에 방문 예정이던 계룡 권역 위문단과 태백 권역 사절단의 일정이 변경됐다.
병력 및 물자 지원과 함께하겠다는 이유였다.
혹자는 계룡 권역과 태백 권역의 이런 행위가 네오-서울을 등에 업고 중화권 권역의 영향력을 줄여 자신들의 파이를 키워보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읽힌다며 비난하기도 했지만, 원래 국제 관계란 그런 것 아닐까.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는 이전투구의 현장.
각자의 이익만을 위해 치열하게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전장.
옆에 있던 이수련이 내게 말했다.
“바로 어제, 톈진 권역의 대규모 공단에서 거대한 불상 형상이 찍혔느니라. 허베이 권역 중앙위원회 건물은 그림자가 덮쳐 양단되었다고 하고.”
“유격전으로 적의 본진을 흔들 생각인가 보네요.”
“그사이 우리는―.”
“숨어든 적의 머리를 쳐야죠.”
다시 패널을 만져 렌즈의 시야를 옆으로 틀었다.
똑같이 퓨전 코프의 마크가 박힌 수송기가 양옆으로 나란히 날고 있는 것이 보였다.
탐사단 호위대를 비롯해 페룬의 여다함과 발렌시아, 프로이데의 정민, 신시아, 샴록, 젠, 디에고, 박예진 여사, 마지막으로 장을 잡아야 한다며 안 그래도 바쁜 공공 집행자 일을 모두 노덴스와 마고에게 짬 때리고 무단으로 끼어든 위타천까지 안에 타고 있었다.
귀걸이를 만져 전원 접속된 채널을 열었다.
“서로 이래저래 연민이든 연모든 증오든 혐오든 있을 법한 구성이긴 한데 일단 긴급 상황이니까 그런 건 일 다 끝난 뒤로 미룹시다. 꿍해 있는 모습 보이다 걸리면 뒤집니다.”
각자의 숨소리만이 통신 채널에 낮게 깔렸다.
“좋습니다. 현재 우리는 적의 수뇌인 장과 불순분자들이 WSS 공업지대에 캠프를 세우고 네오-서울 내외부로 침투한다는 첩보를 받아 이동 중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분명 심각해야 할 자리지만 왠지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놈들을 모조리 박살 내는 겁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마세요. 특히, 장은 제가 죽이겠습니다. ”
-후배! 장 그 배은망덕한 썩을 놈은 내 손에 죽어야 해!
“제 말 잘 듣겠다고 하셔서 태워드렸잖아요. 나다랑 야타가라스도 밖에 나가 있어서 바쁜 참에 마고랑 노덴스 씨한테 쪽지 한 장 남겨놓고 나왔다면서요. 그러니까 좀 참으세요. 참고로 오퍼레이팅은 우리 사무실의 직원, 앨리스가 전담합니다.”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퍼레이팅을 맡은 해결사 사무소의 앨리······위타천 님?
“소개하다 말고 그게 뭐야.”
-위타천 님이 장을 뺏길 수는 없다면서 단독으로 뛰어내리셨는데요?
창문으로 달라붙어 보니 영력으로 날개를 만든 위타천이 낙하하고 있었다.
“수단 방법 가리지 말라고는 했지만! 이수련 씨! 낙하 준비할게요!”
수송기의 옆문과 뒷문이 열렸다.
수송기에 싣고 온 바이크에 몸을 싣고 시동을 걸었다.
“분명히 말하는데, 쉽지 않을 겁니다. 목숨을 걸고 싸우세요.”
그 말을 끝으로 바이크를 묶고 있던 결속 장치들이 해제되는 것이 느껴졌다.
떨어지며, 스로틀을 거세게 감았다.
그리고 모드 그리즐리 버튼 옆에 새로 생긴 버튼을 눌렀다.
기존에 뿜어지던 것 보다 공기가 더 거세게 노즐에서 뿜어지며 낙하 속도를 줄이더니 바이크 몸체에서 옆으로 길게 날개가 뻗어 나왔다.
노즐이 발사각도를 조정하며 날개 쪽으로 공기를 밀어 보냈고, 이내 바이크는 제조사 권장 고도를 훨씬 넘는 위치에서 믿기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작전 내용을 들은 헤지르 주교가 밤새워 만진 새로운 형태, 모드 팔콘이다.
위를 올려다보니 다른 사람들도 낙하하고 있었다.
위타천을 스쳐 지나간 뒤, 아래로 보이는 공장들을 훑고 있을 무렵, 급하게 스로틀을 틀어야 했다.
블래스터가 분명한 빛줄기가 아래에서 위로 쏘아지고 있었다.
재빨리 검을 뽑아 완전히 전개해 블래스터를 쳐내니 위타천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블래스터가 발사된 곳으로 뛰어들었다.
“장!! 인수인계는 하고 사라져야지!”
어쩌면 장이 흑화한 게 다른 이유가 아니라 위타천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