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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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을 부르며 등장한 인물의 인상은 자세히 들여다봐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강렬하지는 않았다.
사전 정보가 없다면 누군가의 얘기를 듣고 한참을 생각한 뒤에야 ‘아, 그런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지.’하고 간신히 떠올릴 만큼, 어쩌면 상당히 흐릿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생김새.
굳이 특징을 꼽자면 종족이 인간이라는 것과 조금 피곤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생김새는 내면을 대변하지 못한다.
누가 알았겠나.
저렇게 평범하게 생겨 먹은 인간이······.
박예진 여사를 닌닌에게 넘기고 몸을 일으켜 말했다.
“그러게요. 잘 지냈어요? 장? 요새 찾는 사람들이 많던데,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요.”
내가 아는 것은 장이 위타천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는 것뿐이다.
발견되었을 때 위타천이 심각한 탈수 상태였다고는 들었는데 위타천은 장과 자신이 손끝 하나 닿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에 반해 장은 위타천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나에 대한 정보를 수도 없이 접했겠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데, 지금 나는 장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고 장은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당장 어떤 방식으로 박예진 여사를 무력화한 건지도 알 수 없다.
디에고와 나비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허리춤에 꽂혀 있던 두 개의 칼자루 중 원래 내가 쓰던 것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게 신호라도 된 건지 다른 인원들도 각자 장을 향해 잔뜩 경계했다.
등딱지가 열리며 쉴드 공간을 만들어내는 펠루다, 땅에 발굽을 긁으며 하체를 변형하기 시작된 적토마, 염주를 둘둘 두른 손을 가슴 앞에 세워 합장하는 깡통 등등.
샴록마저 새로 보강한 것인지 몸에 그려진 문신에서 여러 괴수를 뽑아냈다.
그렇지 않아도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 소리마저 천둥 같이 들리게 하는 긴장감이 산 중턱을 지배했다.
장은 여전히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수연은 잘 있나요? 데려갔다고 들었어요. 여러모로 충성심도 깊고 쓸모도 많은 친구라 죽이지는 않았으면 하는데.”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 같은 말투.
다른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나만을 향하는 장의 시선에 맞서며 말했다.
“죗값을 치르는 데 필요하다면, 죽일지도 모르겠군요.”
“아쉽네요. 참 괜찮은 친구였는데, 남자 욕심을 못 버려서 계획에 아주 큰 크랙을 만들었어요.”
내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장의 말이 이어졌다.
“원래는 네오-서울 안쪽에서 조금 더 일이 흘러가는 걸 볼 계획이었는데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빠르게 일을 벌여야 했습니다. 어쩌면 오메가 씨께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네요. 슬슬 상사의 짬 때리기를 견디기 힘들 시점이었거든요.”
장은 농담 아닌 농담까지 섞어가며 말하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기이하리만치 공간을 짓누르는 존재감이 장에게서 스멀스멀 흘러나와 모두의 어깨 위에 켜켜이 쌓이고 있는 것 같았다.
발을 구르던 적토마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깡통이 작게 염불을 외는 소리가 빨라졌다.
다른 이들도 내색하지 않으려 꾹 참고 있을 뿐, 땀을 비 오듯 흘리거나 자꾸만 호흡이 흐트러졌다.
아마 여기 있는 사람 중 나를 제외하면 장을 직접 본 사람은 없을 거다.
장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랑이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초식동물을 호랑이 앞에 내려놓으면 본능적으로 도망간다는 이야기처럼, 자리에 모인 모두는 장이 보통 위험한 인물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아챘을 것이다.
특히나 판단 한 번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장을 누비는 일이 생업인 이들이니 더더욱.
나조차도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인간이 내가 알던 그 위타천의 부관 장이 맞나 할 정도로 마주한 이가 뿜어내는 기세가 달랐다.
거죽만 그대로 남겨두고 안의 내용물을 모조리 갈아치운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런 존재감을 그동안 어떻게 숨기고 살았나 의문스럽다.
온몸에 피를 잔뜩 묻힌 사람이 비틀비틀 등장한 것은 그때였다.
그 사람은 본인보다 훨씬 큰 네발짐승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었는데, 둘의 정체는 온몸에 피 칠갑한 디에고와 한쪽 다리를 잃은 채로 기절한 것 같은 나비였다.
디에고가 왕발 곁에 나비를 내려놓고 숨을 내뱉자 그가 입에 머금고 있던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하아······.”
강인하고 듬직하던 그의 신체 어디를 둘러봐도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다.
그의 전신을 뒤덮는 털을 타고 피가 아래로 떨어져 그의 주변에 붉은 점을 흩뿌렸다.
전신이 온통 피범벅이라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검에 베인 것이 아닐까 싶었다.
박 여사를 돌보던 닌닌이 디에고에게 다가갔지만, 그는 손을 들어 닌닌을 제지하고는 일어서서 장을 노려봤다.
분위기가 한층 험악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장은 얼굴에서 여유를 지우지 않았다.
“네오-서울의 진짜 전력을 깎아낼 생각이었는데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디에고 당신이랑 저 안드로이드 정도는 쉽게 제거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여기가 이러면 다른 쪽도 장담할 수는 없겠네요.”
“다른 쪽?”
자동으로 튀어나온 내 말에 장이 방긋 미소 지으며 답했다.
“네오-서울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 꽤 많더라고요. 속속 합류하고 있답니다. 모인 이들을 놀릴 수는 없잖아요? 실력 테스트나 할 겸 법령 대상자 ‘사냥’ 중이랍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느라 거신족 클론을 조금 소모하기는 했지만 뭐······. 투입된 자원 대비 얻어가는 게 꽤 많아서 다행이긴 한 것 같네요.”
장의 말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개개인이 전술 병기 정도로 평가받는 능력 제한 법령 대상자들을 사냥?
수백 기는 족히 될 거신족 클론을 ‘조금’ 소모?
대치하는 사이 장의 뒤편에서 두 명이 더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에 쓰는지 알기 힘든 널찍한 철판을 등에 몇 개 매단 오크 여성과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비쩍 마른 쥐 수인이었다.
아마 오크의 몸에 튄 붉은 액체는 디에고의 것일 것이며 쥐 수인의 손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끈적이는 액체는 박 여사의 것이 아닐까.
“검귀 글라럽······.”
펠루다의 목소리였다.
“누가?”
“오크 쪽이요.”
“검을 쓰는 걸로는 안 보이는데. 쥐는? 누군지 알아?”
“죽은 걸로 알았는데······만약 제가 알고 있는 게 잘못된 거라면······.”
대답을 듣기 전, 디에고가 포효하며 달려 나갔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그가 오크의 지척에 도달하고 나서야 그가 출발한 지점에서 털어낸 핏방울이 비로소 바닥에 도달했다.
나도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웅웅거리는 진동이 손끝을 타고 전신에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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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럽은 톈진 권역 출신의 오크다.
오크라는 종족은 기본적으로 욕구가 많다.
식욕, 색욕에 탐닉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때때로 조금 더 나아가 명예욕을 탐하는 오크도 있다.
글라럽의 욕구는 조금 달랐다.
다른 오크 여인들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음식을 마구 먹고 열 명 가까운 아이들을 양육하는 삶으로 욕구를 충족시킬 때, 그녀는 길고 날카로우며 반짝이는 날붙이, 검으로 욕구를 충족했다.
정확히 말하면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 그 찬란한 시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워낙 강건한 종족이기에 몸 쓰는 일을 직업 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그런 직업 중에서는 군인이나 용병도 있었다.
글라럽은 일찌감치 그쪽으로 진로를 잡고 어릴 적부터 중화권 권역의 여러 전장을 넘나들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다른 오크들이 체인 소드, 플라즈마 할버드, 블래스터 머신건, 유탄 발사기 등의 묵직한 개인 무장을 선호하는 것에 반해 검을 고집하는 글라럽의 모습은 눈길을 끌었다.
주위에서 어떻게 보든 글라럽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검을 뽑아 베고 또 베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전장을 누비던 10년째 되던 어느 날, 그녀는 오로지 발도에 몰두하기로 결정했다.
모은 돈으로 발검, 발도로 유명한 세계 각지의 검술 유파에 방문해 가르침을 받고 그 찰나의 순간에 신체에 가해지는 압력을 견디기 위해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몸을 강화했다.
그 결과 그녀는 사이보그가 되었다.
신체를 강화하면 발도술을 보강하고, 부하가 최대치에 이르면 다시 신체를 강화하는 나날의 연속.
누군가는 글라럽을 두고 그녀가 사용하는 것이 검술이라 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던지기도 했지만 글라럽은 신경 쓰지 않았다.
가장 빠르게 검을 뽑는 최강의 검사는 자신이니까.
그런 그녀를 부르는 말이 블레이드 마스터Blade Master, 검귀劍鬼였다.
어느 날 그녀에게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네오-서울 공공 집행자인 야타가라스야 말로 이 시대 최강의 검사라는 것.
북부 중화권 권역에 만연한 네오-서울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글라럽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야타가라스가 그냥 싫었다.
어쩌면 자신의 발도술로 항공모함을 침몰시키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고 했던가, 글라럽은 야타가라스와의 일전을 꿈꾸었다.
그런 글라럽에게 트라이포드의 마수가 닿았다.
콧대 높은 네오-서울 놈들을 짓밟을 수 있다는 얘기.
이미 중화권 여러 권역의 든든한 지원이 이어지고 있으며 동대문 에어리어 종합운동장 사태로 인해 네오-서울의 허상이 드러나고 있다는 달콤한 말과 함께였다.
글라럽은 한반도로 와 장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이것 하나만 약속해. 야타가라스는 내 상대다.”
“좋으실대로.”
그녀가 머릿속에서 상념을 지웠다.
자신의 발도에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한 털복숭이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들고 있었다.
‘법령 대상자랬나. 공공 집행자와 비슷한 수준이랬지. 야타가라스가 이 정도라면······실망인데.’
글라럽이 허벅지에 결속되어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등 뒤에 있던 철판 중 하나를 내려 검을 차고 있지 않던 반대편 옆구리에 장착했다.
글라럽의 몸 곳곳에 박혀 있던 발전기관들이 가동을 시작하며 전기를 흘려보내자 철판이 두 개의 레일로 변했다.
자세를 낮춘 글라럽이 레일 사이로 검을 힘껏 밀어 넣었다.
이제 디에고의 표정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온 것이 보였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이 과정 이후, 자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글라럽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발전기관들이 만들어낸 전기가 모두 옆구리로 쏠려 레일에 엄청난 전압이 걸렸다.
극한까지 강화한 그녀의 팔로도 밀려 나오는 압력을 버티기 힘들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글라럽은 디에고를 향해 검을 뽑았다.
[레일건 발도]
피쉬이-
글라럽의 옆구리에 장착되어있던 레일이 엄청난 김을 뿜었다.
워낙 엄청난 전압이 걸리기 때문에 한 번 사용한 레일은 재사용이 불가능했고, 글라럽이 레일을 여러 개 챙겨 다니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에서 분리된 레일이 바닥에 떨어졌다.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선 채로 타버린 털복숭이라고 생각한 글라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김 너머의 사람은 움직이고 있었다.
“젠한테 번개 맞을 때보다는 덜 짜릿하네.”
검을 꺼내 글라럽과 디에고 사이로 뛰어들어 레일건 발도를 받아낸 오메가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