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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212화 (213/258)

212.

212.

대략 2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웨리바흐의 다 뭉개진 발음을 해석하는 것이 굉장히 힘든 일이었지만 어쨌든 대화 비슷한 걸 하는 데는 성공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버튼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웨리바흐가 화들짝 놀라서 눈물까지 글썽이며 자체 발음교정을 하는 걸 보면 이 긴고아라는 장치의 행동 교정 효과는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너희 할머니가 마지막에 너를 처리할 수 있었는데도 망설이셨던 거 기억하지? 친손주를 직접 죽여야 하는 고통이 상상이나 되냐? 말 그대로 단장斷腸의 고통이셨을 거라고. 알아들어? 장을 끊어내는 고통. 그런데도 너는 어떻게 했어. 쳐 죽여도 속이 안 풀릴 호로 자식아.”

웨리바흐는 오히려 전갈 같은 꼬리를 만들어내 잉그리드를 죽이려 했었다.

내가 개입해서 웨리바흐를 발로 차 절벽 아래로 떨어트리지 않았다면 잉그리드는 죽었을 것이다.

이후에 태백 권역에서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은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정말로 죽고 죽이는 내전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철창 너머, 웨리바흐와 눈을 맞췄다.

“나다는 살생을 하지 않지만, 나는 안 그래. 거치적대면 죽일 수도 있어.”

웨리바흐의 눈이 내 허리춤에 꽂혀 있던 칼자루로 옮겨갔다가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너를 지금 살려두고 있는 건 공공 집행본부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도 있지만 네 할머니에 대한 내 나름의 성의 표시야. 알겠어? 다르게 말하면 네가 그렇게 무시하던 할머니 덕에 목숨 붙어 있는 거라고. 알아들었으면 처신 잘해. 한 번 더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 안 들도록. 알겠어?”

웨리바흐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갱생이니 개과천선이니 하는 건 믿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아. 특히 너같이 허영심에 찬 놈들은 더더욱.”

허영심이라는 단어에 웨리바흐가 고개를 쳐들고 눈을 부라렸다.

“당신이 뭘 안다고.”

발음도 상당히 멀쩡해진 걸 보니 긴고아에 부기 제거 효과도 있는 게 아닐까.

“너보다야 훨씬 잘 알지. 너는 자유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고 지껄였지만 사실 그건 아무 관심도 없었잖아. 압제에 저항하는 선봉이 된 네 모습에 취해 있었던 게 전부 아니야? 사실 압제도 없었고 선봉도 없었지. 균형과 조화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보이지 않는 영웅들만 있던데. 너는 그런 걸 알아볼 생각도 안 했지? 그런 것보다는 설익고 어설픈 분노에 장작을 던져넣는 편이 더 멋있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했으니까.”

쾅-

철창을 붙잡고 일어선 웨리바흐가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런 웨리바흐에게 말했다.

“다음 주, 태백 권역에서 외교 사절단이 온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양 권역 간의 협력 방안 논의지만 사절단 대표가 네 할머니야.”

눈동자가 흔들리는 웨리바흐.

“널 데려가시려는 거다. 못난 손자도 핏줄이라고.”

“······.”

“명심해. 너를 죽일 능력이 없어서 안 죽이는 게 아니야. 오히려 선을 많이 넘었지만 봐주고 있는 것에 가깝지.”

퉁퉁 부은 입술을 들어 올리면서까지 송곳니를 드러내는 웨리바흐를 비웃어주었다.

“듣자 하니 나다한테 제대로 반격 한 번 못하고 얻어맞았다며? 나였다면······.”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그간 봐왔던 나다의 모습을 생각했다.

여러 모습 중에서도 가장 최근이라 할 수 있는 종합운동장에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휘광으로 만들어낸 수많은 종족들의 팔을 달고 있는 거대한 천수관음.

위타천이나 야타가라스가 가진 패도적인 면이나, 노덴스에게서 볼 수 있는 무에 대한 숭고한 집착과는 다른 결이지만 그렇기에 다른 이들에게서 쉬이 느낄 수 없는 종교적인 영성이나 정수가 배어 나오는 나다 특유의 능력.

천수관음의 뒤에 있을 때는 한 없이 든든하게 느껴졌지만, 내가 마주한다면······.

머릿속에서 수많은 가능성을 담은 그림이 그려지고 찢어지고를 반복했다.

찢어진 조각들이 발치에 가득 쌓일 즈음, 그려지는 그림은 어느새 비슷한 구도였다.

자신이 없다.

질 자신이.

웨리바흐에게 말했다.

“됐다. 이해도 못 할 하수한테 말해서 뭐 하냐.”

“어이!”

“확실한 건 지금 너 같은 꼴은 아닐 거다.”

잔뜩 열 받은 표정의 웨리바흐가 내게 손을 뻗길래 버튼을 눌러주었다.

“끄어어어어으으!”

“까불지 마. 그리고 듣자 하니까 사절단이 오기 전까지 널 데리고 이런저런 실험을 할 거라니까 협조 잘하고. 네 피가 거신족 혼혈 클론을 만들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바람에 여기저기 머리 아픈 곳들이 많은 모양이야.”

“으어어으! 그만! 그만!”

“조용히 안 하면 계속 눌러둘 거야.”

웨리바흐가 양손을 주둥이로 가져가서 위아래를 세게 눌러 신음이 새어 나오지 못하게 애썼다.

“읍읍으읍으읍!”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갱생, 개과천선 이딴 건 안 바라니까 내 눈에 띄지만 말아라. 착하게 살라고도 안 해. 딱 남들 하는 만큼만 하고 살아. 너같이 쓰레기처럼 살고도 기회를 한 번 더 받는 것에 대해 감사도 하고. 누군가는 쳐다도 못 보는 기회니까 할머니한테 죄송했다고도 하고 감사하다고도 해. 알았어?”

“흐으응읍! 으으으!”

“앞으로 다시 보는 일 없게 조심해라. 나는 하던 대로 할 거니까. 네가 피해 다녀.”

버튼에 대고 있던 손을 떼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웨리바흐가 눈물과 침을 뚝뚝 흘리며 유치장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한 봉술 실전을 마쳤는지 이쪽으로 다가오던 나다가 나를 보고 말했다.

“얘기는 잘 했냐능.”

“네. 알아들었다면 다음 주에 태백 권역 사절단이 올 때까지 딱히 말썽부릴 일은 없을 것 같아요.”

“태백 권역 사절단? 저놈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거냐능?”

정말 모르는 것 같길래 잉그리드와 웨리바흐가 조손 관계라고 설명해주자 나다는 놀라나 싶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할머님께서 속이 많이 타시겠다능.”

“원래 태백 권역은 고사하고 머무는 산에서도 잘 내려오지 않는 분이라는데 네오-서울까지 오신다는 걸 보면 못난 후손도 후손은 후손이라는 거겠죠.”

“가정을 꾸리는 건 어렵고 육아는 더 어려운 것 같다능.”

“동의합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마고한테 가 봐야겠네요.”

“내가 데려다주겠다능.”

“저야 감사한데, 나다가 여기 없으면 또 금세 시끄러워지는 거 아니에요?”

나다가 후덕한 미소로 밝게 웃었다.

“그런 놈 있으면 갔다 와서 또 패면 된다능.”

묘하게 지금 작업이 마음에 들어 보이는 나다였다.

발을 떼려는데 뒤쪽에서 웨리바흐가 크게 나를 불렀다.

“오메가!”

돌아보니 녀석이 입을 뗐다.

“고맙다.”

버튼을 눌렀다.

“끄으어아아!”

“나 말고 너희 할머니한테 하라고. 나쁜 놈이 멍청하기까지 하네.”

#

나다는 나를 어느 사무실 앞에 데려다주고 유치장으로 얼른 돌아가야 할 것 같다며 후다닥 뛰어갔다.

설레는 표정으로 작게 만든 봉을 만지작거리는 거리는 걸 보면 유치장 내의 죄수들이 나다의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어떠한 욕망을 깨운 것이 분명하다.

깨어난 스님의 욕망······웃으며 봉으로 매타작을 하는 나다를 상상하니 절로 몸에 한기가 돌았다.

범죄자 놈들의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열고 들어가기 무섭게 사무실 중간의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회의용 스피커에서 마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치장에 잠시 들렀다 오신다고 노덴스에게 들었어요. 늑대인간과 나눌 얘기가 있을 것 같다면서요.

“제 의지는 아니고 나다가 부른 거긴 한데, 얘기는 어찌어찌 잘 마쳤네요. 본의 아니게 공공 집행본부 투어를 돌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요.”

-공공 집행자들이 직접 가이드하는 집행본부 투어. 공공 집행자를 지망하는 사설 집행자들이 들었으면 눈 돌아갈 프로그램인데요.

“요새 공공 집행자들한테 비난 여론 쏟아지는 거 보고도 아직 지망하는 놈들이 남아있답니까?”

-원래 남들이 던질 때 줍는 게 고수 아니겠어요?

그래도 실물로 한 번 봤다고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의자를 빼서 테이블에 앉은 뒤, 마고에게 물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있다고는 얘기 못 들은 것 같은데요.”

내 눈은 여기에 들어왔을 때부터 테이블 끝에 앉아 있던 엘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야타가라스가 대림 에어리어 폐건물에 잡아두었던 샴록이었다.

당시 나와 야타가라스가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자리에 있던 나다가 구출해 공공 집행본부로 데려갔다는 말만 들었고 이후의 행적은 전해 듣지 못했다.

스피커에서 다시 마고의 음성이 울렸다.

-샴록은 저희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어요. 형량 축소에 관한 사법 거래와 진오의 상태 호전이라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요.

아, 진오.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수연과 대치할 때 뒤편에서 노덴스가 그 덩치를 제압했다고 들었다.

진오의 그 몸을 덩치라고 표현하기도 민망하다.

육탄전차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진오는 어떻게 됐습니까? 죽지는 않았다고 들었는데.”

답은 마고가 아닌 샴록에게서 나왔다.

“집행본부의 협조를 받아 네오-서울 모처의 병원에서 치료 중이에요.”

“역시 노덴스가······.”

“신체적인 피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걸려도 치유가 될 것 같다고는 해요. 문제는 정신적인 면이에요. 수연이 걸어놓은 암시와 세뇌가 너무 복잡하고 정교해서 단기간에 풀릴 것 같지는 않대요.”

-수연을 죽일 뻔했다죠? 만약 그랬다면 진오 본체는 물론이고 거신족 클론들이 폭주했을 가능성도 있어요. 지금 언론에 공표는 하지 않고 있지만, 여전히 권역 외곽에서 소규모 국지전이 간헐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트라이포드의 주력은 거신족 클론이에요. 강력하기도 강력하고 수도 많아서 저희 공공본부는 능력 제한 법령 대상자들에게 해당 건만 법령 적용을 약하게 하는 걸 조건으로 협력을 요청하고 있어요.

“그걸 제게 말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요.”

-오메가 씨는 법령 대상자는 아니지만, 사태에 깊이 관여하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저희 측에서 의뢰를 드리고 싶어요.

“전장으로 가줬으면 한다는 말이죠?”

-앞뒤를 떼고 핵심만 말하면. 네. 맞아요.

“그동안 당신들은 뭐하고요.”

-네오-서울 내부에 잔존 중인 트라이포드 세력 소탕 및 장에 대한 추적을 개시합니다. 물론 진행 상황은 오메가 씨에게 공유될 거고요.

“후······.”

-위타천에게 들었어요. 종합운동장의 탐색을 의뢰받으면서 오메가 씨가 요구한 대가. ‘트라이포드의 궤멸’이었다죠? 저희도 아쉬운 소리는 하고 싶지 않지만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정도로 요즘 저희 바쁜 거 아시잖아요. 그렇다고 오메가 씨에게 다 떠넘긴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저희도 내부 정리가 끝나면 곧바로 지원을······.

“하나 물어봅시다. 법령 대상자 중에 한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연락을 돌리고는 있는데 현재까지는 과반수 이상 하겠다고 했어요.

“그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서?”

-반대죠. 아쉬운 게 없으니 이런 일에 환장들 하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이게 일종의 이벤트죠.

내가 아는 능력 제한 법령 대상자는 젠 밖에 없다.

그럼 젠만큼은 안 되더라도 최소한 비빌 시도라도 할 수 있는 놈들이 온다는 거 아닌가.

솔직히 궁금했다.

“당장 수락은 아니고 일단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죠.”

-좋아요. 확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네요.

“왜죠?”

-당장 인원 하나하나가 아쉬운 것도 있고, 단독행동을 방지하기 위해 참여한 인원끼리 묶어서 투입하고 있거든요.

“저는 거기서 빼줘요. 법령 대상자도 아니니까.”

-······그래도 전장이라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요. 말씀드린 것처럼 단독행동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어서요.

“단독으로 다닌다고는 안 했어요.”

-그럼요?

“제가 편한 애들이랑 다니려고요.”

#

드디어 공공 집행본부를 벗어난 나는 바이크에 시동을 걸기 전, 귀걸이를 만져 통신을 연결했다.

“어. 나. 연락이 잦은 것 같다고? 그래서 싫어? 그건 아니야? 야, 그래도 나랑 전화한 덕에 저번에 위타천 사는 곳도 가보고 좋았잖아. 나중에 가연 씨가 너 입원한 병원에 와서 사인도 해줬다며.”

펠루다였다.

“용건은 그게 아니고, 그때 탐사단 애들 연락한댔지? 극비 임무 한다고 하면 올 애들 있냐? 내용? 그건 못 말해줘. 근데 좀 위험할 수도 있고 네오-서울 공공 집행본부 주관이야. 수도방위사령부도 한 다리 걸치고 있나? 그럴걸. 기간은······몰라. 그걸 알아야 해? 사람만 모이면 당장 내일 시작할 수도 있을걸? 끝나는 건 몰라. 급한 일 있는 놈은 먼저 가라고 해. 안 말려. 연락 돌려보겠다고? 그래. 1시간 내로 답 줘. 에? 1시간으로 안 돼? 이 거북 새끼, 안 본 사이에 빠질 대로 빠졌네. 닥치고 끊어. 연락이나 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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