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210.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무늘보처럼 느리지만 확실한 움직임으로 번데기처럼 둘둘 말려 있는 이불을 대충 정리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굳어 있는 몸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한 기지개를 켜자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끄으으으.”
그리고는 제멋대로 뻗친 머리를 북북 긁은 뒤, 파자마를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과 머리 감기를 마쳤다.
화장실에서 나와 목에 수건을 두른 채로 걸어가 의자에 널려있던 바지를 들어 몇 번 탈탈 털고 다리를 집어넣었다가 다시 뺐다.
바지를 얼굴 근처로 들어 올려 조심스레 냄새를 맡았다.
“이거 며칠 입은 것 같은데.”
빨래통에 넣어둔다는 걸 여기 던져두고 잊어버렸나 보다.
들고 있는 바지를 바라보다······.
“에이.”
바닥에 떨어트린 뒤 발로 차서 빨래통 근처에 밀어두었다.
트레이닝복 바지와 예공방제 티셔츠를 찾아 입고 위에 집업 후드를 걸쳤다.
이제 소매가 풀리다 못해 다 터져서 앨리스가 제발 그것 좀 버리라고 애걸복걸을 하는 집업 후드지만 이것만큼 편하게 달라붙는 옷이 없다.
식탁 위에 굴러다니던 칼자루를 챙겨 들고 충전 완료 표시가 되는 배터리를 집어 배터리 교환을 마치고 귀걸이를 착용한 뒤 현관에서 신발에 발을 밀어 넣었다.
양쪽 신발을 다 신기 무섭게 화장실 불이 켜졌다는 걸 발견했다.
귀걸이를 터치했다.
“앨리스.”
-일어나셨어요?
“내 방 화장실 불 좀 꺼줄래?”
-······직접 하고 오세요.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띠리릭하며 도어락이 잠겼다.
“이미 나왔어. 바로 내려갈 테니까 불 좀 꺼줘.”
-일부러 그러는 거죠?
“설마.”
-화장실 불은 껐어요. 방 창문도 열어서 환기도 하고 있고요.
“훌륭해.”
-사무실 건물 앞에 에이들리 씨 와 계신다는데 들일까요?
“오리너구리? 어제도 오지 않았나?”
-그제도 왔었죠. 오늘로 사흘째네요. 교류전 이후 매일 아침 들르고 있어요.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 사무실 문고리에 손을 대자 신원 확인용으로 미미한 전류가 몸을 타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문을 열며 귀걸이에 손을 대 통신을 해제하고 자기 자리에 앉아 패드를 만지고 있던 앨리스에게 물었다.
“자기 지역구도 아닌데 왜 오는 거래?”
앨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왜긴요. 종합운동장에서 사장님을 본 사람이 많으니 인맥 과시를 위해서죠. 원래 정치인이라는 족속이 다······그 후드 제발 버리라고 했죠!”
“싫어. 이게 제일 편하단 말이야.”
“보는 제가 다 불편하다고요.”
모른 척하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오리너구리는 정말 그런 이유로 오는 거야?”
“네. 당선 이후에는 쳐다도 안 보더니, 사장님 이름이 돌기 시작하니까 득달같이 와서 쇼하는 것 보세요. 정치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니까요.”
“그럼 들어오라고 해. 음료수나 한 잔 마셔주고 내보내면 되지.”
“그렇게는 안 할 것으로요. 지금처럼 과시하길 원하지 진짜 할 말이 있는 건 아닐 테니까요. 그리고 함부로 올라올 자리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을 거예요.”
“그건 또 왜.”
그때, 사무실 문의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신시아가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내려와 있는 걸 본 신시아가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네요. 오메가 님. 앨리스도!”
앨리스가 내게 눈짓했다.
신시아 때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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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교류전 사태에서 야스민 가문은 역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수도방위사령부의 병력이 종합운동장 근처로 몰린 사이 네오-서울 외곽 여러 곳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그곳의 정보는 거의 차단되어 있지만, 신시아의 말에 따르면 트라이포드의 짓이 거의 확실하며 전장마다 거신족의 모습이 여럿 보였단다.
아마도 진오의 클론일 터.
제법 길었던 평화에 젖어있던 탓인지 수도방위사령부는 제대로 된 대응이 느렸으며 그 공백을 막은 것이 야스민 가문 소속의 흡혈귀들이었다.
사태 발생 사흘 차, 아무리 야스민 가문이라고 하지만 사병私兵 보유가 말이 되냐 하는 말이 조금씩 흘러나왔지만, 야스민 공은 사병이 아니라 네오-서울 시민인 흡혈귀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라는 워딩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재벌 이미지에 군벌 이미지가 겹치는 것을 매우 경계하는 것이 눈이 보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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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얼굴이 밝아 보이네요?”
“며칠 내내 야전에 있다가 오늘 새벽에 완전하게 지휘권을 수도방위사령부에 넘겼으니까. 오메가 님 보고 싶어 죽을 뻔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레 내 옆으로 붙어 앉는 신시아였다.
앨리스가 그런 신시아에게 말했다.
“이번에 사령술 협회에 대한 이미지가 되게 좋아졌더라고요. 언니의 기계화 좀비 덕에 최소한의 질서유지가 됐다면서요.”
“진이 쭉 빠졌잖아. 두 번 다시는 또 하고 싶지 않은 일이야. 게다가 그 상황에서 이수련은 튀어 나가지, 일 좀 마무리될 것 같으니까 젠 오빠는 나 끌고 전장으로 가질 않나. 좀 쉴래.”
신시아가 소파 깊이 몸을 묻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다시 사무실 문이 열렸다.
“본좌가 왔느니라!”
“그렇게 크게 외칠 필요 없이 조용조용 다녀도 다 알거든요?”
“네오-서울 최고 인기쟁이인 본좌가 어찌 조용조용 다닌단 말이냐!”
그랬다.
페룬과 프로이데의 교류전에 불칸이 깽판을 놓은 것도, 공공 집행자들이 모조리 출동한 것도, 정체불명의 집단이 네오-서울 침공을 한 것도, 내가 활약한 것도 화제였지만 제일 화제인 것은 이수련의 본체인 거대 구미호였다.
그 와중에도 도망치지 않고 남아있던 관람객 중 몇몇이 이수련의 입에서 뿜어진 빔이 불사조의 가슴을 뚫어버리는 장면을 촬영해 올린 것.
이수련이 워낙 대외활동을 안 하는 걸 넘어 자신의 정체를 꽁꽁 숨기고 다녔기에 거대 구미호가 이수련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지만, 나와 신시아가 현장에 있었다는 걸 엮어 ‘저 구미호가 해결사 사무실에 드나들던 여우 소녀가 아니겠느냐.’ 하는 추측 정도는 난무하고 있기도 했다.
사태가 있은 지 며칠이 지난 지금 와서는 구미호가 누구냐를 넘어 구미호는 그때 불사조와 함께 죽었다, 아니다 살아 남았다로 가짜 뉴스 영상까지 만들어질 정도니, 파급력이 엄청나긴 했다.
어제는 앨리스가 인상을 구기고 패드를 터치하고 있길래 뭔가 해서 들여다봤더니 영상 제목이 -한반도의 정기를 받은 구미호가 등장해 사태를 정리하자 다른 권역들 초비상, 공공 집행자 이전에 수호자가 있었다?! 세계가 놀란 네오-서울의 저력!- 이더라.
그렇게 왜인지 모르게 네오-서울 시민들에게 국뽕, 아니 권역뽕을 잔뜩 주입 중인 이수련이 신시아를 보고 도끼눈을 떴다.
“왜 그리 가까이 붙어 앉아 있는 것이냐?”
“정리한 거 아니었어? 뭐라고 했더라? 나보고 낭군의 배피······.”
신시아가 말을 다 끝내기 전, 이수련이 소리를 지르며 신시아에게 달려들었다.
“우와아아아악! 그, 그, 그때는 정말 마지막인 줄로만 알고 한 말이었느니라! 취소! 취소이니라!”
앨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시아에게 물었다.
“제가 모르는 뭔가 있었나 봐요?”
“엄청났지. 이수련이 그렇게 진지한 표정 짓는 거 처음 봤다니까.”
“으으······.”
이수련이 불사조를 물고 위로 날아오르자 제일 먼저 튀어 나간 건 신시아였다고 말해서 균형추를 원래대로 돌리려다가 한 번 참았다.
이수련이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뭐냐고 이수련을 추궁하던 앨리스가 사무실 한쪽의 스크린을 내렸다.
“이번 일의 후폭풍을 체크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좀 정리해뒀어요.”
스크린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리스트가 떴다.
· 불칸 마탑 붕괴
· 톈진, 허베이, 만주, 다롄 등 북부 중화권으로 분류되는 권역들의 일방적인 국교 단절
· WSS 의회의 중립 선언
· 한신나, 간토를 제외한 열도 권역들의 반 네오-서울 공동 성명
· 공공 집행본부에 가해지는 강도 높은 내사
· 트라이포드의 수장은 장?
· 위타천이 공공 집행자에서 내려올 가능성
“한 가지만 들어도 머리 깨질 것 같은데 이게 다 몇 개야. 일단 국제 정세는······.”
내가 말끝을 흐리자 신시아가 얼른 끼어들어 설명해주었다.
“이건 대놓고 트라이포드의 배후에 자신들이 있다고 광고하는 꼴인데도 국교 단절과 공동 성명을 발표한 건 정말 믿는 구석이 있다고밖에는 생각이 안 들어요.”
“단편적이긴 하지만 이번 일만 보아도 네오-서울의 아성이 흔들린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거지. 자기 주제들도 모르고.”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북부 중화권이 트라이포드를 돕고 있다는 건, 다른 권역들은 그렇지 않다는 거네요?”
“상해, 홍콩 같은 남부 중화권들은 곧바로 네오-서울을 지지하고 무력 행위를 자행한 테러리스트들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어요. 애초에 상해 권역에 일리아나 고모님이 계시기도 하니까요. 고모님이 저희 아버지랑 별로 사이는 안 좋아도 판 돌아가는 흐름은 기가 막히게 읽으시거든요. 옌타이나 칭다오 권역은 상황 돌아가는 걸 관망하는 것 같아요. 한반도의 권역들은 평양 권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네오-서울에게 손을 들어주는 것 같고요.”
일리아나는 흡혈귀 회합에서 만난 적 있었다.
쪼끄만 소녀 모습이었는데 관통하듯 꿰뚫어 보는 눈빛이 인상적인 흡혈귀다.
야스민 공과는 섬 분쟁 때문에 사이가 안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같은 흡혈귀라고 서로 돕기는 하는 모양.
신시아의 말이 이어졌다.
“일본 열도도 상황이 심상치 않아요. 거기는 저랑 같은 흡혈귀인 히마와리 일족이 꽉 쥐고 있는데 그쪽에서 아직 방침을 정하기 전에 군소 권역들이 연합해서 반기를 든 모양새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 중에는 열도가 전국시대의 재림이 되지 않겠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요.”
“머리 아프구나, 머리 아파. 본좌의 법술-플라즈마 빔 몇 방이면 정리될 부질 없는 허상 놀음이로다.”
“꼬리 타서 법술 잘 안된다면서.”
“······본좌의 아픈 곳을 그리 찔러야 속이 시원하겠더냐. 뭐, 법술이 조금 미흡해졌더라도 본좌에겐 로봇들이 있으니 괜찮다.”
폭발에서 탈출하던 중 이수련은 꼬리 두 개의 끝이 조금 타버렸다.
그 때문에 법술이 예전처럼 파바박! 나가지는 않는다고.
파바박!이 어떤 거냐고 물어봤는데 그냥 파바박!이란다.
파바박!에서 삐융삐융이 됐다나.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느낌은 알겠으니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또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신시아와 이수련을 말리고 아직 얘기를 꺼내지 못한 리스트의 아래쪽 항목들을 살펴봤다.
“저건 오늘 공공 집행본부 가서 직접 설명 들으면 되겠네. 오늘 맞지?”
“네. 점심 먹고 가시면 시간 맞을 것 같아요.”
“그럼 오늘 점심은 이수련 씨가 삽시다.”
“본좌가?”
“사기로 했잖아요. 저는 말했던 것처럼 특으로.”
“나는 선지국! 신선한 선지도 추가해서!”
“저는 고압축 오일 수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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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공공 집행본부 뒤쪽 주차장에 바이크를 대놓고 건물 안쪽으로 들어섰다.
이미 얘기가 되어 있는지 귀걸이를 통해 본인확인을 마치고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안쪽에서 곰방대를 문 노덴스가 걸어 나와 나를 지하로 데려갔다.
연신 담배 연기를 피워올리길래 물어봤다.
“혹시 여기······.”
“금연이냐고요? 맞습니다.”
“그런데······.”
“이거 못 피게 하면 공공 집행자 안 할 거라고 했더니 피워도 좋답니다. 저도 늘상 피는 건 아니고 요즘처럼 일 많을 때나 핍니다.”
아하······.
“그······위타천은 어떻게 된답니까?”
“전방위적으로 압박이 심합니다. 아무래도 위타천의 부관이 트라이포드의 대가리인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럼 위타천은 이제 끝입니까?”
“아뇨. 자긴 몰랐다고 그럽디다. 장을 죽여버리기 전까지는 절대 안 그만둘 거라던데요. 존심 상해서라도 못 그만둔다나.”
참 위타천답다.
앞서가던 노덴스가 문 하나를 열었다.
“이쪽으로.”
들어서자 한쪽 면이 유리로 되어 옆의 방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그곳에 야타가라스가 있었다.
야타가라스는 그림자를 뒤집어쓰지 않은 평범한 부엉이 수인의 모습이었다.
야타가라스에게 말했다.
“나는 죽이려던 걸 당신이 막았지? 그러니 그동안의 성과를 좀 들어보자고.”
유리 너머에는 내 검에 의해 상반신이 절반 정도 날아간 수연이 온몸이 결박된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