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208.
오메가와 수연이 맞붙어 있던 지점에서 여러 번의 폭음과 폭발이 발생했다.
덜렁거리는 팔을 붙잡고 호흡을 몰아쉬던 박운이 휘파람까지 불며 여유를 가장했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하나는 처리했나 본데.”
긍지 높은 불칸 마탑주는 죽었다.
지금 야타가라스의 눈앞에 있는 인간은 마법에 미쳐 제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네오-서울 중심부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려고 시도했던 범죄자였다.
그림자 안쪽에서, 야타가라스의 부엉이 부리 양 끝이 위로 솟았다.
소리 없이 부리만 움직였을 뿐이지만 명백한 웃음이었다.
이렇게까지 크게 웃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야타가라스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웃음이 저 멍청한 마법사를 향한 비웃음이라는 것, 그것 하나는 확실했다.
어깻죽지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 날개가 퍼덕였다.
음 소거를 해놓은 것처럼 아주 작은 소음 하나 들리지 않는 야타가라스의 모습은 어딘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아직도 그림자를 길게 흘리며 당장이라도 찔러 들어갈 듯 매섭게 박운을 향해 있던 존속살해의 검 끝이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그걸 알아챈 박운.
코에서 끈적한 피가 떨어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들숨으로 마나를 빨아들여 날숨으로 마법을 그려냈다.
그의 주변에 펼쳐져 있던 화염의 정육면체가 박운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언어 그대로 마법을 관통하는 야타가라스의 그림자를 경계했다.
하지만 야타가라스는 공격하지 않았다.
애초에 검 끝을 내린 것은 박운의 무지와 부족함에 대한 조롱에 가까웠다.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박운이 이를 악물고 피가 솟는 왼팔까지 동원해 마력을 흘려보내자 정육면체가 반응하며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마법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때, 야타가라스가 말했다.
“죽었을 것 같나?”
주어 없는 문장이었지만 박운이 의미를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박운은 수연을 깊이 알지 못한다.
그러나 네오-서울 체제를 붕괴하기 위해 중화권과 열도의 몇몇 권역의 지원을 받는 집단, 트라이포드의 실질적인 얼굴마담이 수연인 것 정도는 알았다.
그녀가 사회에서 위장 신분으로 활동할 때는 거대 방산 기업인 예공방의 상무까지 오른 것도 알고 있었고.
게다가 전해 들었을 뿐이지만 트라이포드에는 이름만 들어도 벌인 사건이 떠오를 정도인 악질적인 범죄자들도 여럿 있다.
심지어 하위 조직인 리벨리온만을 동원해 계룡 권역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던 것도 들어 알고 있었다.
불칸 마탑이 있던 WSS의 암흑가를 장악했던 여제 역시 리벨리온이고, 수연에게는 꼼짝도 못 한다던가.
어느 하나 만만하지 않은 조건이 없어 보이는 트라이포드.
그 조직의 수장이 누구고 어떤 영향력을 지녔는지 박운은 아직 알지 못했지만, 수연의 수완이 보통은 훨씬 넘는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수완만으로 조직은 굴러가지 않는다.
특히나 거친 놈들이 모여 있는 조직은 더더욱.
무력이나 그에 상응하는 능력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니 저 오메가라는 인간 해결사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아래로 처져 있던 야타가라스의 검 끝이 살짝 움직여 원래 있던 높이로 돌아왔다.
짧은 문장과 함께였다.
“죽지 않았다.”
오메가와 진심으로 검을 맞대본 야타가라스는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죽을 놈이 아니다.
이유를 대라면 부엉이 수인인 자기 몸에 달린 깃털 개수만큼 읊을 수도 있었다.
10개 정도 말하고 다시 처음 이유로 돌아가 10개를 대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를 반복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화도 격이 맞는 상대와 하는 것이다.
검이 스쳤다고 팔이 잘리고, 마법 좀 썼다고 코피를 흘리는 놈은 격이 떨어져도 한참이나 떨어지는 존재였다.
무엇보다, 아직도 검이 원래 자리로 돌아온 걸 눈치채지 못하지 않았나.
‘아래로 내릴 때는 호들갑이라는 호들갑은 다 떨더니. 우습군. 자기 한 몸 챙기기도 부족한 어설픔으로 다른 이까지 신경 쓰다니.’
존속살해의 끝에서 아주 얇은 실처럼 야타가라스의 그림자가 뻗어나갔다.
박운이 만들어낸 [헥사고날 컴버스쳔]의 여섯 면이 한꺼번에 공명하며 주변이 타올랐다.
청계천 한복판이 환해졌다.
박운의 주위에서 열풍이 몰아치며 수연에게서 발사된 대인 살상용 미사일이 만들어낸 먼지구름을 밀어냈다.
하지만 박운의 눈은 그쪽을 향해 있지 않았다.
‘놈이 정말 야타가라스라면······!’
네오-서울과 WSS의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은 박운이지만 WSS에서 나고 자랐다.
침몰한 항공모함에 타고 있던 승조원 중에는 그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이들도 제법 있었다.
야타가라스를 죽인다, 전쟁에서 죽은 이들의 복수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박운의 이름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것이다.
공명심이었다.
그리고 야타가라스는, 그런 부푼 공명심을 품고 대항할 만큼 쉽거나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화염계 마법을 보며 야타가라스는 한탄했다.
“삿된 감정이 읽힌다. 이후를 그리고 있나?”
존속살해를 머리 위로 치켜든 야타가라스.
그림자를 앞으로 뻗어 낸 존속살해가 부드럽게 반원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진다.
이런 일련의 행동이 이루어지는 동안, 박운의 마법은 여전히 야타가라스를 향하는 중이었으며, 먼지구름은 여전히 흩어지는 중이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정지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고 야타가라스 홀로 움직이는 세상.
누군가는 소실점 이후의 공간이라 부르고, 다른 누군가는 상대 속도를 넘어서면 비로소 보이는 절대 속도의 영역이라 부른다.
작명에는 관심도 소질도 없는 야타가라스이니만큼 그 역시 이 상태를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른다.
다만 스스로가 검이 되고 검이 스스로가 되는 아주 짧은 순간에 마음을 담으면 이런 현상이 펼쳐지곤 한다는 것을 드문 경험으로 체득했을 뿐이었다.
야타가라스는 다시 웃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 영역에서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느리게 쓸려가는 먼지구름 안쪽,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오메가였다.
이 기묘한 영역에 대한 각자의 경험을 나누는 것은 뒤로 미루고, 야타가라스는 쥐고 있던 존속살해를 목표했던 지점까지 내리그었다.
[휘두르기]
검이 멈춰선 순간, 비로소 잠시 쉬어가던 시간이 가속해 원래의 흐름을 되찾았다.
박운의 외침이 주위를 울렸다.
“야타가라스! 겨우 이 정도······!”
그가 만들어 날려 보낸 정교하고 세밀한 마법들 사이, 검은색 그림자 한줄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이미 휘둘러지는 것을 마치고 멈춰선 검 끝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다.
가벼운 움직임에 담겨 있던 거대한 힘이 그림자를 타고 밀려들었다.
가느다란 그림자가 꿀렁대며 부풀고, 곧 칼날이 되어 박운을 스쳤다.
야타가라스는 말한다.
“지금을 이겨내지 못하는 네게 이후는 없다.”
박운의 눈이 커지고, 믿기 힘들다는 듯 호흡이 거칠어졌다.
“마법이 연계되는 그 잠깐을 계산해 냈나.”
“계산은 하지 않는다. 보여서 벨 뿐.”
“그런 말도 안 되는······.”
박운은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야타가라스를 향해 쏟아지던 박운의 마법이 야타가라스의 코앞에서 흩어졌다.
시전자가 끝까지 마법을 유지할 수 없었던 탓이다.
공중에 떠 있던 박운이 말라붙은 청계천의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림자 칼날에 의해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양단된 모습인 채였다.
일전의 일격으로 볼품없이 쓰러져 있던 박운 뒤쪽의 교각이 다시 한번 와르르 무너졌다.
그림자 칼날이 한참 뒤에 있던 교각까지 스친 모양.
“흠······.”
깊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야타가라스가 할 말은 그것이 다였다.
늘어진 그림자를 다시 몸에 붙인 야타가라스가 존속살해를 몇 번 휘두른 후 그림자 안쪽에 잘 넣어두었다.
‘다시 주겠다고 말 한 게 후회될 정도인데.’
여러 검을 사용해본 야타가라스의 마음에 이렇게 쏙 드는 검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마침내 흩어지기 시작한 먼지구름 너머로 시선을 돌리는 야타가라스에게 통신 디바이스를 통해 마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번의 대대적인 설득 이후, 서로가 서로를 감시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며 마고가 억지로 야타가라스에게 떠맡기듯 챙겨준 디바이스였다.
-상황 알려줄 수 있어요?
“박운 사살. 수연은 대치 중.”
-종합운동장 상황은 거의 마무리 되어가고 있어요. 몇몇 놈들은 지하로 도망치긴 했는데 추적 붙였고요.
“위타천은?”
-쓰러져 있던 걸 발견했어요. 심각할 정도의 탈수 증세를 보여서 회복 중이에요.
“위타천은 아니라는 건가?”
-잘은 모르겠지만······위타천의 부관이 안 보여요. 장이라고. 알죠?
야타가라스는 생각했다.
‘누구더라.’
마고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그럼 그쪽 증원은 필요 없죠?
그럴 것 같다고 답하기 위해 야타가라스가 입가를 움직이던 찰나, 마고가 더 빨랐다.
-잠깐만. 배수로를 이용해서 그쪽으로 이동하는 인원이 있는데요? 숫자는 셋.
야타가라스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바닥의 기다란 틈을 보았다.
“셋?”
-네. 열원 감지로는 셋이요.
고개를 갸웃한 야타가라스였다.
그가 느끼기에는 하나였기 때문.
“증원이 필요할 수도 있어.”
그리고는 곧장 다시 존속살해를 꺼내 완전히 전개했다.
-종합운동장 쪽 상황이 마무리되는 대로 노덴스나 나다에게 요청할게요.
마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틈에서 뭔지 알기 힘든 형체 셋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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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얼음 파편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갑고 뜨겁고 쓰라린 그 기묘한 감촉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었다.
다음은 질척한 무언가가 얼굴을 덮었기 때문이었다.
식물, 정확히 말하면 넝쿨의 일부였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이마를 정통으로 때린지라 무지하게 아픈 건 둘째치고 기분이 상당히 더러웠지만,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사지 중 하나가 바닥에서 뒹구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
그 연필처럼 생긴 게 폭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형 미사일인지 아니면 대인용 암살 병기인지 모를 그 새카만 막대기가 발사되자마자 일단은 [흐림수르사르], [스카디] 같은 빙결계 마법을 온 힘을 다해 때려 박았다.
아직 수연의 몽환적인 목소리가 머릿속을 간질이는 나른한 상황에서도 검을 붙잡고 있던 손 중 하나를 떼서 [트야치]로 얼음 칼날을 만들어 미사일을 날리던 박스에 쑤셔 박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주머니에서 가지고 다니던 씨앗을 꺼내 [급속 생장], [과생장]으로 얼음 위를 덮었다.
분명히 이건 능욕용으로 챙겨 다니는 씨앗인데 어떻게 된 게 목적에 맞게 제대로 쓰이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아예 한 번도 없지 않나?
여튼 그렇게 자라난 넝쿨과 나무가 미사일을 감싼 얼음을 꽉 동여맬 즈음 터졌다.
잘 가요 오메가 어쩌고 한 것 같은데.
가도 절대 혼자는 못 가지.
그리고, 그런 말 할 거면 ‘잘 가요’보다 ‘잘 자요’가 더 달콤하지 않겠냐고.
한발이 아니라 여러 발을 발사한 만큼 폭발이 여러 번 이어졌고, 자기 바로 옆에서 터질 줄은 몰랐던지 수연이 뱀의 하반신을 움직여 피하려 했지만 체인소드를 깊게 틀어박으며 놔주지 않았다.
잡을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도망칠 때는 아니란다.
뒤에서 야타가라스와 박운이 치고 박는 모양인지 이런저런 소리가 들려왔지만, 고개를 돌릴 틈은커녕 아주 작은 신경도 쓸 여력이 없었다.
근거리에서 터진 폭발에 휘말리지 않아야 했으니까.
한 손으로는 수연의 하반신에 틀어박은 체인 소드가 빠지지 않게 신경 쓰며, 다른 손으로는 폭발로 날아오는 것들을 쳐내다 보니 어느새 우리 주위를 뒤덮던 먼지가 가라앉거나 한쪽으로 밀려갔다.
하반신 일부가 날아간 것으로 모자라 그곳에 얼음 조각이 틀어박혀 있는 수연이 보였다.
자가 수복 시스템이 내장되어 있는지 수연의 기계 하반신에서 뭔가가 꾸불대며 상처 위를 훑었다.
얼굴이 굳은 수연을 향해 말했다.
“죽지도 않았는데, 잘 가요? 네가 플래그 세워준 덕에 다시 돌아왔다.”
[역발산기개세]
힘을 주어 체인 소드를 긁으며 뽑아내자 근처의 하반신 외장이 뜯겨 나오며 부동액 비슷한 액체가 질질 흘렀다.
수연의 꼬리 끝이 다시 흔들렸―
콰직-
“한 번 당했을 때 끝냈어야지.”
체인 소드를 수연의 꼬리 끝에 박아 비틀었다.
“아악!”
비명을 지르는 수연에게 그녀가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설마······. 내가 이 정도 능력도 없이 해결사 일로 생계 해결하고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파천황]으로 손아귀에 푸른 불꽃과 붉은 얼음을 만들어내서 수연의 심장이 있을 법한 곳에 박기 직전, 야타가라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메가! 위!”
고개를 들어보니 밤의 어둠을 가르는 고층 빌딩의 네온사인 불빛 너머, 무언가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얄쌍해 보이던 그것은 어느 순간 몸집을 확 불렸다.
검을 회수해 몸을 뒤로 피하자 그것이 내가 있던 자리로 떨어졌다.
떨어진 건 내가 본 적 있는 인물이었다.
3m는 가뿐히 될 것 같은 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근육질 신체.
거신족 혼혈인 진오였다.
흰자를 뒤집어 깐 채 입가에 침을 흘리고 있는 진오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실종 상태라고 들었는데 수연이 데려가 저 모양 저 꼴로 만들었던 건가.
콰아아앙-
곁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서 보니 생김새는 진오와 같지만, 신체가 바위나 나무, 강철 혹은 그 외의 다른 물질로 이루어진 또 다른 진오 둘과 야타가라스가 전투 중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간신히 머리를 굴릴 무렵,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운 수연의 입이 열렸다.
“굉장하죠? 배신이나 하는 개새끼를 복제하는 데 성공했답니다. 저만이 통제할 수 있는 거신족 혼혈 병사들이랍니다. 심지어 여러 재질로 조합이나 강화도 가능하죠. 이제 배신은 절대 못 하겠죠?”
이지理智를 잃은 진오는 입에서 그르륵하는 소리만을 낼 뿐이었다.
숨을 길게 뱉은 후, 검을 휘둘러 묻어 있던 것들을 털어내고 말했다.
“안 되겠다. 이 답도 없는 악질년. 여기서 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