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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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수연이 샴푸 모델처럼 머리를 기울여 물기를 털어내며 나를 향해 웃음 지었다.
긴장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여유로운 웃음이다.
놈들이 쫓기는 게 아니라 내가 놈들의 본거지에 툭 떨어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수연은 여유로웠다.
하지만 그 끔찍할 정도로 유혹적인 웃음과는 다르게 수연은 연신 새빨간 혀를 날름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보라는 듯.
나는 온 신경을 수연의 꼬리 끝에 집중했다.
수연이 어떤 이능이나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크웹에도 없었고, 루트의 정보망에도 없었으며, 마고도 알아내지 못한 것이었다.
예공방의 사장이 수연과 접촉한 후, 무조건적으로 수연의 의견에 찬성하는 거수기가 되었다는 걸로 미루어보아 타겟으로 삼은 대상의 생각이나 신체 변화를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진오의 성별을 뒤바꿔 놓은 색승처럼, 내분비계를 건드릴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매혹하는 것이 아니라 매혹당했다고 착각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냐는 것.
어쩌면 그것 때문에 적이고 아군이고 따지지 않고 덮치려 든다는 색승을 아래에 둘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명경지수]가 수연의 능력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전의 만남에서 확인했다.
[홀딩 마인드]나 [어웨이큰 프롬 나이트메어]도 사용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두 스킬은 일정 시간 동안 외부 자극이 없어야 한다는 선결 조건이 있는지라 여기서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다.
곧 난리가 날 것 같거든.
어둠을 모두 밀어내겠다는 듯 공중에 떠서 몸 곳곳에서 불꽃을 일렁이는 박운.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퍼져오는 그 열기와 빛에도 꼼짝하지 않고 검 끝을 아래로 늘어트린 그림자, 야타가라스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해도 내 호흡이 먼저 가빠질 지경이다.
야타가라스가 먼저 입을 뗐다.
“사태에 대한 해명은 집행본부 조사실에서 듣겠다. 불칸 마탑주, 박운.”
코웃음 친 박운.
“그쪽이 그 유명한 야타가라스인가? 이게 내 해명이다.”
박운이 손을 가볍게 휘두르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불꽃이 튀어 오르며 천천히 회전하는 정육면체가 그의 주변에 발생했다.
정육면체의 변은 곧게 뻗어 타오르는 불꽃이었으며, 여섯 면에는 그려진 것만으로도 강대한 마나의 파장을 일으키는 마법진이 가득이었다.
마법이 완성되기 직전, 야타가라스가 내게 이 말만을 남기고 그림자의 날개를 어깨에서 뽑더니 위로 떠 올라 박운에게 쇄도했다.
“뱀은 맡기겠다, 오메가. 죽이지는 마라. 머리를 알아내야 하니까.”
말하는 걸로 봐서 자기는 박운을 죽일 생각 같은데, 살리는 것보다는 죽이는 게 어렵지 않나?
나도 저 뱀을 죽이고 싶단 말이야.
#
박운을 감싸고 있던 마법진으로 이루어진 도형이 여섯 면에서 빛을 내며 각기 다른 마법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헥사고날 컴버스쳔Hexagonal Combustion]
[입아소진세立我燒塵世]
종합운동장에서 보았던 불사조의 축소판이 쏘아져 나가는가 하면, 등불처럼 흔들리던 빛이 어느새 마그마의 벽이 되어 밀려오면서 동시에 박운이 뿜어내는 열기에 말라버린 청계천 일대에 불벼락이 내렸다.
하나하나가 오메가가 사용하는 화염계 마법 스킬 정도는 기초 입문 정도로 보이게 할 정도로 대단했다.
어딘가 앉아서 편하게 볼 수 있었다면 오메가는 화염계 마법 스킬들의 위력을 한 단계 높일 실마리나 단서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고 강력한 것들이었다.
박운은 어디 가서 종사宗師 소리는 못 들어도 대가大家 소리는 어렵지 않게 들을 정도의 실력은 되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오메가는 박운의 화염계 마법 고급반 강좌를 들을 만큼 여유롭지는 않았다.
박운의 마법으로 인해 바닥의 갈라진 틈에서 뿜어지는 뜨거운 증기를 피하며 오메가는 생각했다.
‘찬찬히 뜯어보고 싶긴 한데 마법 배울 생각이 있었으면 강철계이긴 해도 페룬으로 갔지. 지금도 테오릭 경이 1대1 강좌 만들어 주겠다고 성환데.’
박운의 코에서 쏟아지는 숨이 거칠어졌다.
힘에 부쳐서가 아니라, 가공할만한 자신의 마법에 스스로 취하고 있었다.
아직 그의 피에 남아있는 약물이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을 쏟아지게 했다.
움찔움찔하다 벌어지기 시작한 그의 입에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자의 웃음이었다.
오메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의 마법이 흩어지거나 하얀 포말에 뒤덮여 사라졌다.
박운은 마법을 더 쏟아내던 중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림자 놈은?’
감정이라고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박운의 귀를 파고들었다.
“즐거운가?”
물리 법칙을 가지고 노는 듯한 경이로운 곡예비행으로 박운이 쏟아내는 마법을 모두 회피한 야타가라스가 박운의 머리 위에 정지해 있었다.
“마음껏 즐겼길.”
그 말을 끝으로 야타가라스가 아래를 향해 거침없이 존속살해를 휘둘렀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낼 수 없는 너무도 간결한 움직임.
그렇기에 비로소 극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박운에게 닿지 않을 거리였지만, 검을 쥔 야타가라스의 팔이 주욱 늘어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림자는 아예 검을 타고 올라서 그 자체로 길고 얇은 날이 되었다.
마치 오메가가 [혈계조검술]을 통해 검의 간격을 늘리는 것과 비슷했다.
오메가와 검의 매개가 피라면 야타가라스와 존속살해의 매개는 그림자였다.
그 모습은 마치 존속살해의 시커먼 광자 검날처럼 묵색의 검기가 검 너머로 뻗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박운은 아주 약간 늦긴 했지만 야타가라스의 움직임에 반응했다.
그림자 너머 야타가라스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가 진심을 담아 베려 했을 때 반응한 사람은 지금까지 오메가 하나가 전부였다.
박운의 경우는 약물로 인해 잔뜩 곤두서고 고양된 감각과 신체 덕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야타가라스를 불편하게 하기에는 차고 넘쳤다.
영창도, 수인도, 심지어 손짓도 하지 않았지만 박운의 의지에 따라 그를 가운데 둔 정육면체의 면들이 위로 겹쳐 여섯 겹에 달하는 공방 일체의 구조를 형성했다.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지 거세게 외치는 박운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그의 입에서 침이 튀었다.
“이걸 뚫으려면 대마법 무효화 마나 반입자 탄이라도 가져와야······!”
그의 외침이 멈추고 눈동자가 떨렸다.
검을 내리찍는 야타가라스의 목소리에서 흔들림이라고는 없었다.
“빛이 밝으면 어둠 또한 깊다.”
검을 통해 길게 뽑아낸 야타가라스의 그림자는 마법진을 부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주위에 내리는 어둠, 박운의 불타는 마법진이 길게 뽑아낸 그림자로 스며들더니 그대로 마법진을 통과해 박운을 향해 늘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야타가라스가 수도방위사령부에 있을 시절, 그의 팀원들은 야타가라스만이 할 수 있는 이 검술에 대해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지 자기들끼리 토론을 하고 했다.
‘잠영참蠶影斬’, ‘쉐도우 치즈Shadow Cheese’, ‘만틀 데 나흐트Mantel der Nacht’ 등등 여러 이름이 나왔다.
야타가라스 팀장이라면 전역하고 검술 유파를 하나 세워도 먹어 줄 거라는 누군가의 말에 팀원들이 공감하기도 했다.
태어날 때부터 강했으며, 검을 쥔 순간부터 검사인 야타가라스는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검술 유파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항공모함을 수장시키고 복귀하는 길에서 였다.
그때가 되면 그럴듯하고 멋들어진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당장은 유파에 혼자 밖에 없으니 거창한 이름은 필요 없다고 결심한 야타가라스였다.
그리고, 두뇌파와는 한참 먼 육체파인 야타가라스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기술명을 길게 하면 복잡하기만 하다는 걸.
그러니 이름을 고칠 때가 오면 그때 고치더라도 지금은 가장 간결하고 본질을 담아낸 이름을 사용하기로 한 야타가라스였다.
[베기]
박운의 마법진이 서로 공조하며 화염계 마법을 만들어내며 그림자를 소멸시키려 애썼지만 야타가라스의 그림자는 시시각각 박운에게 파고들고 있었다.
야타가라스가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두 번 베기]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마침내 이를 악문 박운의 어깨를 베고도 계속해서 뻗어나갔고―.
사아악-
멈추지 않고 뻗어나간 그림자가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중간을 베어버렸다.
쿠르릉 소리와 함께 무너지는 다리와 덜렁거리는 한쪽 팔을 붙잡고 있는 박운을 동시에 눈에 담은 야타가라스가 여전히 감정 없이 축 처지는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이런.”
#
야타가라스가 불칸 마탑주에게 향하는 걸 보고 나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수연에게 다가섰다.
중간중간 날아드는 화염계 마법을 처리하긴 해야 했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목표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연은 기계로 교체한 라미아 특유의 하반신을 바로 세워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도주한다거나 공격할 기미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나를 향해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죠? 분명 기계 교단 성당에서 본 게 마지막일 텐데도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다니요. 볼꼴 못 볼 꼴 다 본 연인 사이도 이렇게 질척이지는 않을 것 같아요.”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었다.
[혈계조검술]
[에스피나]
[로타시온]
팔목에서 터져 나온 피가 접붙이듯 검과 하나가 되어 피 가시 체인소드를 만들어냈다.
[고속 이동]
[목표 지정]
[근력 강화]
발이 닿아있던 곳이 우지직하며 부서지는 감각과 함께 몸이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웃음을 짓는 수연의 모습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즉참]
옆으로 뉘어진 채 맹렬하게 회전하는 체인소드가 수연의 허리를 향해 뻗어갔다.
유성의 궤적처럼 올곧고 흔들림 없이 베고 가야 할―.
쿠드드득
체인소드의 회전이 멈췄다.
수연의 하반신 일부가 분쇄기처럼 변형되어 체인소드의 날과 거세게 맞물린 결과였다.
“요새 세계 곳곳의 블랙마켓에서 오메가 당신 피를 구해다 주는 조건으로 얼마를 부르는지나 알고 이 귀한 피를 이렇게 쓰는 건가요?”
검을 뒤로 당겨 회수하려 했지만, 분쇄기처럼 변한 수연의 하반신은 쉽게 놔주지 않았다.
“설마······. 내가 이 정도 힘도 없이 거칠기 짝이 없는 멍청한 범죄자 놈들의 머리 위에 앉아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죠?”
그녀의 꼬리 끝이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로 빨리 흔들렸다.
머릿속이 온통 뒤흔들렸다.
[명경지수]를······.
철커덕―
내 검을 물고 있는 하반신의 반대편, 뱀의 기계 하반신 외장이 열리고 작은 박스가 튀어나왔다.
아주 느릿하게 수연의 말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마약을 하면 사람이 늘어진다는데 이런 기분일까.
“당신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걸 후회해요. 조금 더 노력해서 우리와 함께하게 할걸. 지금도 아쉬워 미칠 것 같아요.”
수연의 몸에서 튀어나온 박스, 수많은 작은 구멍들과 하나의 붉은 점이 보였다.
점은······레이저 포인터?
내 이마 부근을 향해 겨냥하고 있는 걸까.
“그런데 아쉽다고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수는 없죠. 당신을 그냥 뒀다가는 앞으로 우리에게 또 어떤 장애물이 되어 나타날지 알 수 없거든요.”
붉은 점 아래 작은 구멍들 안쪽에서 미미한 불꽃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구멍에서 무언가가 밀려 나왔다.
연필 정도 길이의 길쭉한 것.
대인 살상용 소형 미사일이라도 몸 안에 담아두고 다니는 건가.
달콤한 수연의 목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잘 가요. 오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