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206.
로봇의 렌즈를 통해 주변의 환경이 눈앞 디스플레이에 펼쳐졌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고층 건물 사이사이, 예상치 못하게 발생한 상황으로 인한 교통통제 때문에 수많은 차량이 공중에 정차해 있었다.
나를 태운 로봇은 그 아슬아슬한 틈을 절묘한 비행으로 빠져나갔다.
“저기 보이는구나.”
이수련의 말처럼, 디스플레이 한쪽에 동대문 에어리어 종합운동장이 들어왔다.
아래쪽으로는 사람들이 뛰쳐나오고, 무장한 공공 집행본부와 수도방위사령부 병력이 그 사람들을 막아 세워 검문하고 있어 굉장한 혼란을 유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위쪽이 멀쩡하냐면, 역시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일단 돔구장의 천장 뚜껑 일부가 날아간데다가 지금 그쪽으로는 열 대는 족히 넘어 보이는 헬기가 서치라이트를 뿌리며 혹시 모를 상황을 경계하고 있었다.
헬기에서 레펠을 타고 돔을 향해 강하하거나 아니면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군인도 있어서 그쪽으로의 접근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헬기 위쪽으로는 생전 본 적 없는 형태의 전투기들이 종합운동장을 중심으로 선회하고 있어 한층 더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저길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앨리스. 안쪽 상황은 어때?”
그때까지도 이수련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던 앨리스가 내 말에 바로 답했다.
-아직 치열해요. 네오-서울 측 병력이 진입하고는 있지만, 진입로가 천장의 구멍 하나뿐이라서 증원이 느려요. 반면에 땅에서 올라오는 놈들은 많고요. 게다가 사장님 안 계실 동안 불칸 마탑의 마법사들이 갑자기 이성을 잃고 피아구분 없이 날뛰는 바람에 진압에 애를 먹고 있어요.
“쉽지 않나 보네.”
-공공 집행자분들이랑 마법사분들이 잘해주고 계시지만 아무래도 수적 열세라서요. 그리고 올라오는 놈들도 어중이떠중이는 아닌 것 같아요. 아! 페룬 마탑의 마법사가 테오릭 경이나 발렌시아 씨에게 접근해 공격하는 시도가 있었어요. 아군 오사인 줄 알았는데 강철계 마법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스펙터일 거야. 잡아 죽였어야 했는데.”
-아쉽지만 사장님은 최선을 다한걸요. 그리고 지하로 가는 길은 거의 다 막힌 것 같아요. 통로가 몇 개 있었는데, 그것도 대부분 점거당한 것 같더라고요.
“수연이나 웨리바흐는 어디 있는지 파악돼?”
-늑대인간은 나다 씨한테 얻어맞고 있고, 수연은 파악이 안 돼요.
입술을 질끈 물었다.
놓친 건가.
수연을 쫓는 대신 이수련을 데리고 내려온 것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느덧 종합운동장이 가까워졌을 때, 앨리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마고 씨가 사장님이랑 직접 통신하고 싶다고 요청했는데. 연결해드릴까요?
“해 줘.”
-임시로 팀 오메가 채널에 초대할게요.
곧바로 마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메가?
“듣고 있어요.”
-용건만 말할게요. 지금 야타가라스한테 연락이 왔는데, 박운과 수연이 한 패인 걸 확인했고 그 뒤를 몰래 밟고 있대요.
“박운? 불칸 마탑주? 살아 있답니까?”
이수련이 벌컥 소리 지르며 끼어들었다.
-그 난리를 쳐놓고 마법사 놈은 도망간 것이냐?
-누구시죠?
-네 녀석 선배 격이니라.
-마지막 수호자시군요. 덕분에 큰 위기를 넘겼습니다.
-공치사는 다 끝나고 들어도 늦지 않노라.
-맞는 말씀입니다. 어쨌든 얘기로 돌아가면, 야타가라스가 직접 목격했다고 하니 믿어도 좋을 것 같아요.
“야타가라스는 지금 어디인데요?”
-종합운동장 지하에 놈들이 뚫어놓은 통로를 따라 이동 중이래요. 이동 방향으로 봤을 때, 근처 청계천을 통해 한강으로 빠지거나 그게 아니라면 지하철 노선을 이용해 현장을 벗어나지 않을까 싶어요.
이렇게 되면 굳이 복잡한 종합운동장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다.
-다른 곳에는 알리지 마세요. 야타가라스는 오메가한테만 알리라고 했는데 이 채널에 계신 분들은 다 알게 되셨군요.
“다들 어디에 말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쪽으로 안내해 줄 수 있어요?”
-네.
“그리고, 앨리스 알죠? 우리 사무실 안드로이드.”
-······알죠.
대답이 묘하게 늦다.
마고는 앨리스에게 말로 얻어맞아 뼈가 부러진 적이 있다.
이후 지금처럼 내게 연락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앨리스를 경유하곤 하지만 가능하면 엮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둘이 알아서 할 문제고 지금의 난 내 할 말을 한다.
“앨리스가 지금 종합운동장 VIP 부스에 남겨져 있거든요? 안전하게 밖으로 좀 데리고 나와줘요. 저는 야타가라스에게 합류할 테니까.”
마고의 놀란 음성이 전해졌다.
-그 안에 있다구요?
통신을 듣고 있었는지 이번엔 앨리스가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괜찮기는 개뿔. 마고! 할 수 있겠어요?”
-병력이 대부분이 전투 지원이나 상황 질서 유지하러 나가서 그리로 돌릴 인원이······잠시만요. 수도방위사령부에도 알아볼게요.
“절차 한번 복잡하네.”
답을 기다리는 동안 이수련에게 말했다.
“이거 속도 좀 줄여줄래요. 종합운동장으로 바로 가지 않을 수도 있어서요.”
“그리하마.”
그러다 문득 머리에 생각 하나가 팍하고 지나갔다.
절차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다.
“마고! 마고!”
-네?
“퓨전 코프 로봇 몇 대가 들어갈 거라고 통보해요. 로봇 주인은 치외법권을 가진 구미호라는 것도 알리고. 그리고 빨리 야타가라스랑 놈들 위치 알려줘요.”
절차고 순서고 다 뭉개도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는 이수련 아닌가.
이수련도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긍정했다.
-본좌가 로봇을 조종해 앨리스를 데리고 나오라는 것이지?
줄곧 듣기만 하던 신시아도 한 마디 던졌다.
-저는 지금 좀비들로 여기저기 틀어막고 있는 곳이 많아서 당장 도와드리긴 힘들어요. 종합운동장 필드 말고도 지하와 연결된 곳이라면 놈들이 밀려들고 있어요.
전면전이라도 벌일 것처럼 병력을 잔뜩 밀어 넣고 정작 자신들은 다른 쪽으로 빠진다?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이렇게 따로 행동하는 것이 나를 유인하기 위한 술책이나 함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뛰어들기로 했다.
지레짐작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많으니까.
또, 술책이건 함정이건 다 부술 자신이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기계 교단 성당에서 만났던 수연과의 악연을 털어내고 싶었다.
몸 안에 있는 마지막 숨까지 뽑아낼 것 같던 압박감이 아직 생생했다.
그때는 온 힘을 끌어올려 데이터 명함을 던지는 여유 정도밖에는 부릴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르다.
사사건건 내 발목에 태클을 걸고 장애물을 만드는 것들을 치워버릴 정도는 충분히 되지 않을까.
어느새 꽉 쥐고 있던 주먹이 아파져 왔다.
종합운동장을 스쳐 가며, 이수련과 다른 로봇들이 편대에서 이탈해 방향을 그쪽으로 틀었다.
드론과 심지어 전투기까지 우리 곁으로 붙었다가 뭔가 전달받은 내용이 있는지 황급히 멀어졌다.
-본좌가 갈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앨리스.
-간다고요? 어디로요?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저기 하늘로 가려고요?
앨리스의 악마적이고 파멸적인 놀림에 이수련은 헛기침만 하다 간신히 말을 꺼냈다.
-크흠. 본좌가 성급했던 것은 인정하나 그것을 그리 농 거리로 삼는 것은 조금······. 정말로 위태로운 상황이지 않았느냐. 낭군이 오지 않았더라면 본좌의 안전도 장담하기는 어려웠느니라.
‘그걸 알면서도 그래? 이 정신 나간 여우년아’로 시작하는 신시아의 찐 우정 욕설이 울려 퍼지고 있을 무렵 잠잠했던 마고가 내게 말했다.
-최단 거리로 야타가라스에게 닿을 수 있는 경로를 도출한 결과, 청계천에 설치된 수량 조절 배수로를 통해 접근하는 게 제일 빠릅니다. 이미 청계천 일대의 통행이 금지된 상태니, 눈치 볼 것 없이 가동할 수도 있고요. 그쪽으로 가시죠.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죠. 아! 현장 책임자인 위타천이랑 연락이 되지 않으니까 한 번 찾아봐 줬으면 해요. 야타가라스에게 부탁한 건데, 지금 야타가라스는 놈들 뒤를 쫓고 있다고 하니 하는 말입니다.”
-오메가 씨와 얘기한 직후 CCTV 녹화가 끊어져 있던데 그 사무실부터 확인해야겠네요.
아래쪽으로 청계천이 보였다.
평소 같으면 사람이 가득했을 청계천은 인근 종합운동장에서 발생한 사태로 인해 인적 하나 없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천의 중심부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맴돌고 있다는 점.
당장이라도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솟구쳐 오를 것처럼 살벌한 모습이었다.
“그······수량 조절 어쩌고가 저겁니까?”
-네. 평소에는 비가 많이 와야 가동되는데 지금은 강제로 가동했어요.
“위험하지는 않고요?”
-오메가 씨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닐 것 같아요.
깜빡했다.
공공 집행자는 노덴스를 제외하면 다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놈들이라는 걸.
-지금 오메가 씨가 타고 있는 로봇, 선배님이 조종하시죠? 전면부 열어서 오메가 씨 떨어트려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알겠노라.
이수련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정말로 로봇의 전면부가 열리기 시작하고 나를 단단히 감싸던 많은 벨트가 헐겁게 풀리고 있었다.
어어?
정말 여기서 떨어트리려고?
다급하게 외치듯 말했다.
“위험하지는 않더라도! 주의사항! 주의사항 말해줘요!”
-음······숨을 좀 오래 참아야 할 수도 있어요.
자기 일 아니라고 더럽게 무책임하네.
일단 손에 칼자루를 챙겨 들고 아래 보이는 커다란 소용돌이로 뛰어들려고 하는 찰나, 소용돌이가 일그러졌다.
마치 커다란 손바닥을 세워 손날로 소용돌이 중심부를 세게 가격한 것 같았다.
다만 위에서 내리친 게 아니라 아래쪽에서 밀어 올렸다고나 할까.
모양이 기묘했다.
지금 뛰어내리면 안 된다는 불길한 직감이 온몸을 사로잡다 못해 목 주변에 오돌토돌한 닭살까지 돋을 정도.
[흡착]
전면부를 활짝 열고 있는 로봇에 몸을 찰싹 붙였다.
-오메가 씨? 내려가셔야 한다니까요.
다시 한번 소용돌이가 일그러졌다.
이제는 모양이 찌그러지다 못해 물이 빨려드는 형태 자체가 달라졌다.
방금의 일그러짐 때문에 생긴 천 바닥의 기다란 틈 사이로 물이 아래로 빠져나가는 모습.
마고의 목소리도 흔들렸다.
-이게 왜 이러지? 내부 모터 파손, 배수 일시 정지······.
소용돌이 저 너머, 뭔가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 반짝임은 시시각각 이쪽으로 밀려 올라오는 것이 확실했다.
“야타가라스가 따라갔다고 했죠.”
-그······렇죠.
“그 빡대가리가 얌전히 잘 따라갔을까요? 항공모함도 가라앉히고, 건물 공사 현장도 지하로 박아버린 양반이?”
후자는 나도 절반 정도의 책임이 있지만 일단 다 야타가라스 책임이라고 하자.
마고는 이번에도 말이 없었다.
야타가라스에게 설득 비슷한 걸 한 사람이 위타천과 마고라고 했다.
위타천이 그 얘기를 꺼내기도 싫어하는 걸 보면, 마고도 야타가라스의 본모습을 눈치챘을 듯싶다.
말이라고는 안 통하고 자기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하는 놈.
근데 검 쓰는 실력과 몸 움직이는 건 발군인 놈.
그게 야타가라스다.
“저는 아니라고 보거든요. 좀 따라가다가 못 참고 검 휘두르지 않았을까요. 제가 아까 예전에 쓰던 검도 주고 왔겠다······.”
소용돌이에서 용오름이 솟았다.
그 위에 머리칼에서 불이 뚝뚝 흐르는 남자가 있었다.
“불칸 마탑주?”
그리고 뒤이어 바다뱀처럼 우아한 몸짓으로 물줄기를 타고 올라 박운의 뒤를 따르는 이가 보였다.
하반신 자체가 기계로 이루어진 라미아.
수연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바닥의 틈새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솟았다.
심연에 사는 괴물 같기도 한 시커먼 것의 손에는 역시나 시커먼 광자 검날, 존속살해가 들려 있었다.
야타가라스가 둘을 공격하다 위로 올라온 모양새.
음울하고 높낮이 없는 야타가라스의 목소리가 주변을 눌렀다.
“꼬리에 상처가 좀 생겨도 대가리를 치는 데는 문제가 없을 테니까.”
[흡착]을 해제하고 바닥을 드러낸 천으로 떨어졌다.
갑자기 터전을 잃은 물고기들이 퍼덕이는 가운데―
우우웅-
순식간에 칼자루를 두 번 뒤틀어 전개한 내 검도 진동했다.
“그렇지. 아무 문제 없지.”
내 말에 다른 셋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