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스치는 것만으로 눈 끝이 아릴 정도로 밝은 빛이 운동장 전체에 퍼져나갔다.
이수련의 입에서 쏟아지는 빔과 그걸 속수무책으로 뒤집어쓴 불사조의 화염, 그 와중에도 조금이라도 빔을 막아보려는 박운의 필사적인 마법이 뒤섞인 결과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별이라도 하나 만들 것처럼 팽창하던 빛이 살짝 수축했다.
이상징후를 파악한 것은 테오릭과 발렌시아.
전장에서 온갖 폭발을 마주했던 둘의 직감이 위험을 외치고 있었다.
“피해! 휩쓸리면 죽는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빛이 다시 팽창하며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아군과 적의 구분 없이 폭발에서 멀어지기 위해 몸을 뒤로 돌려 전력으로 달렸다.
날 수 있거나 다른 이동 능력이 있는 이들 역시 멀어지기 바빴다.
하지만 그 인파 사이를 거슬러 다가가는 이가 있었으니······.
“아난다여, 이제 나는 늙어 노후하고 노쇠하여 어느덧 나이가 여든에 이르렀다―.”
석가모니의 마지막 유언을 나지막이 읊조리는 나다였다.
오른손으로는 봉을 비스듬하게 들었고, 왼손은 합장하듯 세워 가슴 앞에 두었다.
머리에 잔뜩 솟아있던 핏줄은 어디로 갔는지 평소의 사람 좋은 후덕한 나다의 모습이었다.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끈에 묶여서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몸도 가죽끈에 묶여서 겨우 살아간다고 여겨진다―.”
촤르륵 소리를 내며 봉이 접혀 들어 작은 텀블러만 한 크기가 되자 나다는 그것을 격렬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소매 끝 하나 잘리지 않은 가사 안에 잘 품었다.
그의 머리를 비추는 휘광이 강해졌다.
이수련과 불사조의 뒤엉킴으로 인해 생긴 빛은 주위를 집어삼키는 절멸의 빛이었다.
끓어 넘치는 열기를 품고 있지만, 어딘가 차가움이 느껴지는, 닿는 것들의 마지막 숨을 취하겠다는 빛.
하지만 나다에게서 번져가는 빛은 주변을 지키겠다는 수호의 빛이다.
꿈틀대는 강인한 생명력과 장엄한 종교적 영성이 느껴지는 빛.
바람 부는 어둠을 밝히는 작은 촛불처럼 당장이라도 꺼질 듯 위태하지만, 그 위태한 빛에 닿은 이들의 가슴에 작은 희망을 불어넣는다.
“그만하여라, 아난다여. 슬퍼하지 말라. 탄식하지 말라, 아난다여.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과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없어지기 마련이고, 달라지기 마련이라고, 그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나다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빛이 꾸물대며 아직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커다란 형체를 만들어낼 즈음, 마침내 충격파가 나다가 있는 곳까지 닿았다.
쿠구구구구-
천지가 진동했다.
불사조가 깨부수다 만 돔 천장에서 자재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하지만 나다의 뒤쪽으로는 충격파가 넘어오지 못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빛 덕분이었다.
나다의 읊조림은 멈추지 않았다.
목소리는 하나도 커지지 않았지만, 빛과 함께 묻어나온 법력 때문에 이 난장판 속에서도 모두에게 나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전달됐다.
“아난다여,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거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것을 두고 ‘절대로 부서지지 마라’고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직 이수련과 불사조, 박운의 격렬한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수련의 법술-플라즈마 빔을 정통으로 등짝에 맞은 불사조였지만, 박운의 화염계 마법 덕에 금방 회복해 비명을 질러대며 이수련을 털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수련도 빔을 토해내면서 동시에 불사조를 소멸시키기 위해 지금은 아는 이도 몇 남지 않은 고전 법술을 수십 개씩 터트렸다.
제2, 제3의 충격파가 밀어닥치기 직전이었다.
나다는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이미 가슴 앞에서 세우고 있는 왼손 옆으로 붙여 들었다.
“아난다여, 그런데 아마 그대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 스승의 가르침은 끝나 버렸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마침내 손가락이 위로 향하게 세운 왼손과 오른손이 마주 닿았다.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합장.
이제 나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법력은 완전한 형상을 이루었다.
천 개의 손과 그 손마다 눈이 달려, 일천 개씩의 눈과 손이 있다고 하는 천수관음.
나다를 중심으로, 천수관음이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손 형태뿐만 아니라 엘프의 가늘고 긴 손, 오크의 투박하고 근육질 팔, 네발 짐승의 역관절, 새의 날개, 물고기의 지느러미, 곤충의 갈고리발톱 등등 세상 모든 종족의 팔을 달고 있는 천수관음이었다.
높이가 20m는 족히 되는 천수관음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지만, 몸길이가 그 두 배는 가볍게 넘을 것 같은 구미호와 불사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다.
그러나 담고 있는 힘만큼은 절대로 뒤지지 않았다.
천수관음이 수많은 손을 좌우로 뻗었다.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의 자비를 보여주듯.
그 덕에 이수련과 불사조가 만들어낸 충격파는 나다와 천수관음이 있는 곳을 넘지 못했다.
오히려 흩어지거나 뚫려 있는 돔 천장을 통해 하늘로 벗어나기도 했다.
“아난다여,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의지하여 머물고 남을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진리를 섬으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에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굳건한 바위처럼 붙어 있던 나다의 합장이 떨어진다.
부드러이 움직이는 그의 오른손이 어깨 높이까지 올라간다.
손바닥을 앞으로 향한 채.
두려워하지 말라.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 역시 손바닥을 앞으로 두었지만, 손가락 끝이 올라간 오른손과는 달리 자연스레 손가락을 아래로 늘어트린 그림에서 넷째, 다섯째 손가락을 살며시 구부린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여원인與願印.
“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게으르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
천수관음의 팔마다 범어가 맺히며 황금빛 광휘를 뿌린다.
나다가 읊조리던 석가모니의 유훈이 마침내 끝을 맺는다.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다.”
동시에 이수련이 뿜어내던 빔이 마침내 불사조의 가슴을 뚫고 그 아래의 객석을 녹였다.
불사조가 마지막으로 사그라들며 지금까지보다 규모가 더 큰,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박운이 강제로 마력을 밀어 넣어 폭주를 유도한 탓이었다.
이수련의 입가에서 분리된 로봇들이 불사조의 주변으로 달라붙어 폭발을 억제하려 했지만, 규모가 워낙 엄청나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간헐적으로 로봇들 사이로 새어 나오는 충격파는 나다가 만들어낸 천수관음이 막아내고 있었지만, 충격파가 닿을 때마다 천수관음의 모습이 흔들리거나 팔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으로 봐서 불사조의 마지막 발악을 막지 못한다면 네오-서울 한복판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터진 꼴이 될지도 몰랐다.
이수련은 고개를 돌렸다.
황금빛 천수관음 너머, 모두가 제자리에 서서 얼어붙어 있는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자신에게 닿기 위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메가였다.
천수관음이 보호하는 범위 바깥까지 나온 오메가였지만 계속해서 밀어닥치는 충격파와 강풍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무지막지한 압력을 느껴야 했다.
본신을 내보인 이수련은 악에 가까운 오메가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구미호의 그윽한 눈이 오메가에게 닿자 의념이 전해졌다.
-낭군은 이런 순간에도 본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구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걸음을 옮기며 오메가가 다시 악을 질렀다.
“마지막은 무슨 소리······!”
이수련은 입을 벌려 계속해서 폭발에 폭발을 거듭하는 불사조의 목을 물었다.
법술로 보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기가 후끈 밀려왔다.
입 주변 그녀의 새하얀 털이 바지직 소리를 내며 그슬렸다.
불사조를 물고 있는 이수련이 떠올랐다.
신시아가 고래고래 질러대는 소리가 이수련의 귓가로 스몄다.
-야! 이수련! 뭐 하는 거야! 너 그거 안 내려놔! 이수련!
계속 떠오른 이수련은 불사조가 깨부수려다 실패한 돔 천장을 뚫고 올랐다.
종합운동장 주변은 겹겹이 포위되어 있었다.
수도방위사령부 소속의 전투기가 돔을 뚫고 나온 이수련과 불사조를 보고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마른하늘에 떨어진 벼락이 미사일을 격추해 뇌관을 파괴했다.
근처의 건물 옥상에 방금 도착하자마자 상황 파악을 끝낸 젠이 불러낸 번개였다.
도력을 끌어올려 도포가 팽팽하게 부푼 젠이 신호하자 흡혈귀 수십이 빌딩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곡예 비행하며 벼락 맞은 미사일을 안전하게 회수했다.
구미호가 이수련이라는 것과 이수련이 물고 있는 불사조의 위험성을 알아본 젠이 입술을 꾹 물고 야스민 공에게 연락했다.
“네. 아버지. 저게 터지면 다 끝이에요. 수호자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대로 둬야 할 것 같아요. 우리가 손댈 범위를 넘어섰어요.”
어느새 밤이 내려앉은 네오-서울, 고층 건물에서 꺼지지 않는 불 때문에 네오-서울의 밤은 그렇게 어둡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평소보다 더 훤했다.
계속해서 고도를 높이는 구미호와 그 구미호에게 물려 있는 불사조 때문이었다.
불사조는 이제 작은 태양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수련은 자신의 로봇들과 법술로도 폭발을 통제하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한참이나 위로 올라온 그녀는 아래를 내려봤다.
한강이 흐르는 네오-서울의 전경이 들어왔다.
-많이도 바뀌었구나.
짧지 않은 삶.
많은 일이 있었다.
기쁜 일.
슬픈 일.
화나는 일.
즐거운 일.
최근에 오메가를 만난 이후로는 대부분이 즐겁고 재밌었다.
그때, 이수련의 눈에 작은 박쥐 하나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닿기 위해 날개를 퍼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수련! 그거 어쩌려고! 말만 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신시아였다.
당장이라도 법술을 거두면 폭발할 것 같은 불사조 앞에서, 이수련은 웃었다.
간신히 걸음을 떼면서도 곧 갈 테니 기다리라고 하던 오메가가, 숨을 헐떡거리면서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날개를 퍼덕이는 신시아가, 그리고 둘에게 당장이라도 자신을 구해야 한다고 작은 몸으로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을 앨리스가 고마워서.
이수련이 몸을 작게 만든 뒤, 한 손은 불사조를 향해, 다른 손은 신시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겹겹의 법술 보호벽이 신시아를 감쌌다.
“네가 도와줄 것이 있느니라.”
“뭔데!”
“낭군의 배필이 되거라. 너 정도면 본좌에 못 미치긴 해도 괜찮은 여인이다. 신시아 네가 아닌 다른 여인이 낭군의 옆에 있는 것은 내가 참을 수 없을 것 같구나. ”
“지금 그런 소리를 왜······!”
이수련이 손을 휘두르자 법술 보호벽에 감싸진 신시아가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이수련! 뭐하냐고! 미친년아!”
평소 같으면 절대 사용하지 않았을 거친 말까지 사용할 정도로 흥분한 신시아였지만, 지금은 속수무책으로 멀어져가는 이수련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수련이 중얼거렸다.
“긍지 높은 구미호 일족의 일원이자 한양의 마지막 수호자가 여기 있었노라.”
불사조가 남아있던 마력을 그러모아 폭발했다.
로봇들이 과부하 되거나 타버려 떨어져 내렸고 법술이 깨져나갔다.
밤이 한순간 본분을 잊고 낮이 되었다.
다시 어둠이 제자리를 되찾았을 때, 그 자리에 남겨진 것은 없었다.
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