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제대로 들어갔다!’
나와 야타가라스가 만들어낸 두 상처에서 용암과도 같은 피를 쏟아내는 새를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위를 보고 있던 몸을 뒤집었다.
나는 아직 공중에 있었다.
관객석이 시시각각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대로 떨어졌다가는 또 청운 선생님에게 가야 할 것이 뻔하기에 충격을 줄여야 했다.
[고양이 착지]······?
내 그림자 위로 다른 그림자가 겹쳤다.
무언가가 내 어깨와 팔뚝을 강하게 잡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날개를 펼친 그림자가 꿀렁대고 있었다.
“야타가라스!”
그는 소리하나 없이 떠올랐다.
상승하는 우리와는 반대로 불사조는 점점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불사조는 결국 아마 내가 착지했어야 했을 관객석 부근에 처박혔다.
“된 건가?”
여태껏 아무 말도 없던 야타가라스가 답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야타가라스의 말이 맞다.
불사조는 아직 꿈틀대고 있었으며 필드에서는 아직 전투가 한창이었다.
필드에서 무장 병력을 쏟아내던 구멍이 막힌 걸 확인하는 찰나, 쾅하는 소리와 함께 구멍에서 팔 하나가 솟아났다.
두더지의 것처럼 생긴 팔은 계속해서 구멍을 넓혔고, 이윽고 몸을 드러낸 것은 두더지의 양팔을 달고 있는 늑대인간이었다.
순식간에 전신을 근육질 괴수처럼 만든 놈이 울부짖었다.
아우우우-
웨리바흐였다.
웨리바흐가 뚫어놓은 구멍으로 계속해서 병력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페룬과 프로이데 측 수적 열세가 눈에 보일 정도.
그나마 후광과 범어에 둘러싸여 순식간에 적들을 제압하는 나다나 마법 하나를 사용할 때마다 대여섯 정도는 우습게 육편으로 만드는 테오릭 경이 아니었다면 상대 병력을 필드에 묶어두는 것도 힘들었을지 모른다.
게다가 발렌시아나 정민도 휘하의 마법사들을 이끌고 최선을 다해주고 있었다.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 저들이 바로 몸을 피했으면 어디까지 피해가 커졌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야타가라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현재 네오-서울 시청과 수도방위사령부에서는 이 상황을 전시에 준한다고 판단했다. 곧 지원 병력이 도달할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트라이포드의 병력은······.”
“렙틸리비아들의 협조를 얻어 지하로부터 봉쇄 작전이 진행되고 있을 거다.”
그나마 덜 복잡한 구역에 나를 내려준 야타가라스에게 말했다.
“위타천이랑 전혀 연락이 안 되던데, 알고 있는 거 있어?”
“지원 요청 이후에 별다른 연락을 받지 못했다. 내 쪽에서 연결해보려 해도 마찬가지고. 마고도 위타천과 연락이 안 된다고 하더군.”
검을 역전개하고 팔짱을 낀 야타가라스가 바로 중얼거렸다.
“혹시 위타천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 사라진 건 조금 당황스럽네. 찾아봐 줄 수 있을까?”
야타가라스의 고개가 필드 쪽으로 향하자 얼른 덧붙였다.
“저긴 내가 맡을게. 어차피 지하로 가볼 생각이었거든. 악연을 좀 정리해야 될 것 같아서.”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야타가라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믿어보지.”
몸을 돌려 사라지기 전, 존속살해를 전개한 야타가라스가 말했다.
“전리품이라 했다고 들었다.”
조금 뜨끔한 게 사실이었으나 뻔뻔스럽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단어가 싫으면 그 폐허에 버리고 나오지 않은 대가로 생각하던가. 보답품?”
나름대로 회심의 농담이었으나 야타가라스는 여전히 특유의 음울하고 높낮이 없는 말투였다.
“잘 쓰고 돌려주지. 전리품에 손댈 정도로 궁하지는 않으니.”
내가 뭐라 답을 할 새도 없이 야타가라스는 주변 그림자로 섞여들어 사라졌다.
멍청해서 그렇지, 능력은 대단한 놈이긴 하다.
저기서 엎어진 채로 피를 줄줄 흘리는 불사조만 봐도 알 수 있다.
마그마처럼 뜨거운 불사조의 피는 근처의 객석을 통째로 녹이며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물론 야타가라스보다 내가 불사조에게 낸 상처가 더 깊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불사조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일단 완벽히 숨통을 끊어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때, 귀걸이를 통해 신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쇄됐던 출입구 중 하나를 뚫었어요. 노덴스 씨가 들어온 곳이요. 위험 세력이 관람객들 사이에 숨어 외부로 나갈 수 있어서 주변에 몇 겹의 저지선이 만들어지고 있긴 한데 안에 있는 사람들의 안전은 일단 확보한 것 같아요. 좀비들로 현장 통제를 하고 있어서 당장 오메가 님을 돕기는 힘들 것 같은데, 정리되는 대로 바로 갈게요.
“무리하지 말아요.”
-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공공 집행본부와 수도방위사령부의 병력이 올 거예요. 아버지도 총동원령을 내렸어요. 젠 오빠도 올 것 같아요!
앨리스가 끼어들었다.
-헤지르 대주교님도 말만 하면 사제단과 기계 부대를 보내 주시겠대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전해줘. 일이 왜 이렇게 커져 버린 건지 모르겠네.”
다음은 이수련이었다.
-지하에서 수연으로 보이는 라미아의 사진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느니라! 조종 중이던 로봇은 그대로 파괴되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계집은 어찌하여 본좌와 이름이 비슷하단 말이냐!
“그게 지금 중요해요?”
-당연히 중요하고말고! 여튼 지하를 탐색하는 본좌의 일은 마고에게 넘겼으니 앨리스를 통해 전달받으면 될 것이야. 본좌는 낭군을 도우러 가겠다!
왜 너만 먼저 가냐는 신시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수련은 능력의 차이라며 가볍게 무시하는 것 같았다.
이수련에게 오지 말라고 하려다가 필드로 눈을 돌렸다.
테오릭 경과 나다가 있어서 그나마 간신히 유지되는 균형.
게다가 웨리바흐가 다시 구멍을 뚫어놓은 덕에 트라이포드의 인원은 계속 충원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명백했던 수적 열세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는 상황.
버티면 된다고는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필드에 있는 마법사들이 모두 쓰러진 후일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에 이수련이 가세한다면?
젠과 위타천이 존중할 정도의 강자가 이수련이다.
마데르노와의 일전에서 압도적인 장악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었다.
천군만마를 데려와도 이수련 같은 구미호 하나가 가져다주는 든든함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부탁 좀 할게요.”
-로봇을 안으로 들이는 것은 조금 걸리겠지만, 본좌가 도달하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니라. 게서 보자꾸나.
이수련의 통신이 끊어졌다.
“앨리스! 지하로 갈 수 있는 길은 찾았어?”
-지금 복도니, 계단이니 길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어서 쉽지 않아요.
필드에 뚫린 구멍이 보였다.
무장한 놈들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찾지 마. 불사조 처리하고 이따가 저기로 가지 뭐.”
잘 이용하는 곳 있는데 다른 곳을 찾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리고 고생할 거면 앨리스가 하는 것보다 내가 하는 게 낫다.
일이 이 모양이 된 이상 화끈하게 가자고.
그때, 운동장 내부로 이어지는 통로 하나에서 굉음과 함께 엄청난 불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너무 화끈한데.’
넘실대는 불줄기 사이, 노덴스가 보였다.
그는 자신에게 향하는 마법을 피하거나 받아치면서, 간격 내로 들어온 불칸 마법사들을 끌어들여 목을 꺾어버리거나 허리를 뒤틀어 버리고 있었다.
그 간격이라는 것이 아주 묘한 게, 내가 보면서도 ‘저 정도는 안 잡히지 않을까.’ 싶었는데 팔이나 다리가 훅 늘어나서 닿거나, 심지어는 그의 몸 일부가 푸른 불꽃으로 변해 거리를 좁히곤 했다.
유적 탐사의 일원이었던 도깨비, 상투가 보여주었던 도깨비불이었는데, 저것 덕에 상대적으로 화염 마법의 피해가 덜한가 싶기도 했다.
게다가 다대일의 구도에도 불구하고 여유롭게 자세를 낮춘 채로 권격과 각법을 구사하는 모습은 체술과 유술로 네오-서울에서 따라올 자가 없다는 노덴스의 명성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했다.
때로는 노덴스의 움직임에서 템페시르나가 보이는 것 같았다.
노덴스가 불리하지는 않았지만 박운을 위시한 불칸 마법사들의 공세에 이곳까지 밀려 들어온 것 같았다.
어쩌면 마법사들을 이쪽으로 끌어들여 유인한 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노덴스 뒤로 불칸의 문장이 그려진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약이 잔뜩 오른 표정으로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그중에는 로브를 입지 않은 이들도 있는 것으로 봐서, 예상했던 것처럼 일반 관람객이나 운동장 직원으로 위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마탑까지 끌어들인 건가? 아니면 애초에 불칸 마탑이 트라이포드의 하위 조직?’
복잡해지려 하는 머릿속을 비웠다.
‘방해되면 패면 된다.’
언제부터 내가 이런저런 조건을 고려했다고.
필드로 향할 때, 난전의 소음 너머로 누군가 온 힘을 다해 나를 부르는 게 들렸다.
“오메가아아아!”
웨리바흐였다.
“넌 내가······으윽! 꺼져!”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이던 웨리바흐는 양손을 앞으로 들어 올려 경화시킨 뒤 나다의 봉타작을 막아내야 했다.
“뭘 잘했다고 소리 지르는 거냐능! 윤회도 못 할 정도로 박살 내드림!”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마에 핏줄이 두드러질 만큼 화가 잔뜩 난 나다가 한숨도 쉬지 않고 봉을 찔러대자 막고 있던 웨리바흐의 팔에서 파편이 튀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채에 휩싸이기 시작한 나다의 찌르기는 더더욱 속도가 붙었고, 결국 웨리바흐는 나다를 피해 뒤로 몸을 물렸다.
“오메가 네 목은······꺼지라고, 땡중!”
나다는 더욱 악착같이 웨리바흐에게 달라붙었다.
웨리바흐가 계속해서 신체를 변형하며 막아내려 애썼지만 나다가 그 정도에 막힐 위인은 아니었다.
“소승에게는 시주를 바른길로 이끌 소임이 있다능!”
웨리바흐는 나다에게 맡겨도 될 것 같다.
전체적으로 굉장히 혼잡스럽긴 했지만, 이 정도면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덴스가 들어온 통로에서 다시 한번 폭음이 들렸다.
사람의 형상을 한 불길인지 불길이 사람의 형상을 한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 형체가 걸어들어왔다.
불칸 마탑주, 박운이 분명했다.
그가 내부를 한 번 둘러보더니 노덴스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막아라!”
테오릭 경의 고함에 페룬의 마법사들이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박운을 향해 마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강철의 비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빽빽한 강철계 마법의 사이로, 박운은 얄미우리만큼 빠르고 가볍게 움직였다.
그가 도달한 곳은 꿈틀대고 있는 불사조가 있는 곳.
박운의 몸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파장이 거대하게 터져 나오더니 그의 몸 일부였던 불길이 불사조에게 옮겨갔다.
내 검과 야타가라스의 존속살해가 만들어 놓은 불사조의 상처가 아물더니, 불사조가 몸을 일으켰다.
박운은 어느새 불사조의 위에 서 있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불사조가 몸을 일으켜 날개를 퍼덕였고, 열풍이 운동장 내부에 몰아쳤다.
모두의 시선이 불사조만 보고 있었다.
떠오른 불사조는 돔 천장을 향해 치솟았다.
천장을 깨부수고 나가려는 것이 분명했다.
저런 게 밖에서 활개를 치면 여기서 벌어진 난리는 난리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일 것이다.
난리가 아니라 대참사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저 위까지 닿을 방법은······없었다.
우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돔천장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낭군!”
내 옆으로 달려온 이수련이었다.
고개 들어 불사조를 확인한 이수련이 중얼거렸다.
“저번에 고래도 그렇고 요새 들어 커다란 녀석들이 많이 보이는구나. 기강을 한 번 잡을 때가 된 것인가.”
뒷문장을 듣고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이수련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수련이 나를 보고 웃음 지었다.
여우의 웃음이었다.
“은퇴를 해도 마음 놓을 수 없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 건가 싶구나. 어쩌겠느냐. 간만에 힘 좀 써야지. 저건 본좌가 막겠으니 아래쪽은 낭군에게 부탁하겠노라.”
이수련의 등에서 아홉 개의 꼬리가 펼쳐지나 싶더니 그녀는 마치 계단이 있는 것처럼 공중을 뛰어올라 달렸다.
#
달리는 이수련의 속도가 빨라졌다.
허리를 점점 숙이나 싶더니 어느새 손까지 공중에 대고 네 발로 뛰고 있었다.
한 번 뛸 때마다 꼬리처럼 새하얀 털이 몸에서 터져 나오더니 걷잡을 수 없이 덩치가 부풀기 시작했다.
불사조가 돔 천장을 깨부순 틈으로 하늘이 보일 때쯤, 법술에 휩싸인 우아한 구미호가 새하얀 털을 휘날리며 불사조의 날개를 물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본래 모습을 드러낸 이수련의 크기는 불사조에 뒤지지 않았다.
불사조와 구미호가 뒤엉켜 운동장 한쪽으로 떨어지며 만든 거대한 충격파가 운동장을 뒤덮었다.
“로봇이다!”
누군가의 외침처럼, 천장의 깨진 틈으로 로봇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이수련만 접속하고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진 로봇공학의 최첨단 기술이자 정수였다.
로봇들은 각기 작은 파츠로 분리된 뒤, 불사조를 깔아뭉개고 있는 거대 구미호의 주둥이로 가서 재조립됐다.
거대 구미호, 아니 이수련이 입을 쩍 벌리자 법술 기운이 입에 뭉쳐 들었다.
로봇 파츠들이 가동되며 법술에 빛을 더했다.
빛의 정체는 초고온 플라즈마.
메카 구미호가 불사조를 향해 법술-플라즈마 융합 빔을 쏟아부었다.
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