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누군가 최강의 마법사로 발렌시아를 꼽는다면 이견을 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 반박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모으면 그들로만 동대문운동장 객석을 가득 채우고도 줄이 바깥까지 길게 늘어설 것이다.
그리고는 척하니 팔짱을 끼고 대단한 평론가라도 되는 엄격하고 진지한 말투로 한마디씩을 꺼낼지 모른다.
-전장에서의 존재감은 인정하지만, 성취나 경지가 온전히 밝혀지지 않아······.
-마법은 탐구하고 궁구하는 데 의의가 있는데 발렌시아는 학문적으로는 미약하지 않나······.
-페룬 마탑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서······.
-테오릭 경의 후광을 받아······.
등등의 어느 정도 합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줄줄이 엮여 나오는 것도 예상 범위 내의 일이다.
하지만.
마법사 앞에 전투라는 단어가 붙는다면?
최강의 전투마법사.
누군가는 이전 세대의 전투마법사들 이름을 읊으며 아직 발렌시아는 멀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드높은 이름들을 제외하고 현세대, 즉 현역으로 활동하는 전투마법사 중 꼽으라고 조건을 바꾸면 발렌시아의 이름은 틀림없이 꼽혔다.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때로는 첫손에 꼽히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두셋을 넘어 다섯 언저리까지 내려가다 보면 누구나 발렌시아의 이름을 꺼내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이름들과 견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발렌시아라는 전장에서 가지는 무게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발렌시아는 지금, 한눈에 다 담기지도 않는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는 불사조를 앞에 두고 있었다.
발끝에서 시작한 오싹함이 어느새 그녀의 전신을 꿰뚫더니 머리에 닿았다.
두려워서 생기는 오싹함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발렌시아에게는 익숙한 감정.
뼈가 부서지고 살이 튀는 ‘진짜’ 전투 전의 긴장감, 전율, 흥분이었다.
전투마법사 그 자체인 발렌시아는 생각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불칸이 감히 개짓거리를 한 건가? 내가 있는데도?’
심기가 잔뜩 틀어진 발렌시아였다.
하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불칸의 개짓거리에 아주 조금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저 삐약이가 나온 순간부터 여긴 교류전의 집단전투 따위가 벌어지는 곳이 아니라 전장이 되었으니까.
게다가 불사조가 만들어 놓은 필드 바닥의 구멍을 통해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이 무장한 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때때로 괴수를 이용하는 부대나 조직을 상대한 적은 있지만 발렌시아는 기본적으로 괴수 사냥이 주요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저런 거대 괴수를 어떻게 상대하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발렌시아에게는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전장에 서 있는 이상, 최대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다.
발렌시이가 다른 페룬 마법사들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나아가 짓밟아라. 강철의 의지로 페룬의 위대함을 적들에게 새겨라.”
그때, 불사조가 쏟아낸 화염이 발렌시아를 중심으로 한 페룬의 마법사들 위로 쏟아졌다.
몸을 피하거나 방어 마법을 만들어내 위험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중 한 마법사는 반응이 늦어 꼼짝없이 화염에 잡아먹힐지도 모르는 상황.
발렌시아의 몸을 덮고 있던 강철의 실이 빠르게 풀려나더니 위험 상황에 있던 마법사의 발목을 낚아챘다.
넘어진 마법사의 바로 옆으로 떨어지는 화염을 보고 안도할 무렵, 지하에서 올라온 정체불명의 인원들이 넘어진 마법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블래스터 탄환이 주춤주춤 일어서고 있는 마법사를 향했다.
마법사가 다급하게 수인을 맺어 망토를 경화시켜 탄환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탄환은 마법사가 마법을 완성하기 전에 도달할 것이 분명했다.
속절없이 당할 것 같았던 그 순간, 마법사의 앞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아주 짧은 순간, 마법사는 자기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눈앞에서, 공기 중의 수분이 응결했다.
만들어진 것은 아주 작은 얼음조각.
그 너머로 탄환이 마법사를 꿰뚫기 위해 날아오고 있었다.
눈을 깜빡하기 위해 눈꺼풀이 안구의 중간 정도까지 내려왔을 아주 짧은 시간, 얼음조각이 덩치를 불리더니 사람 상체만 한 원뿔 형태의 덩어리가 되었다.
원뿔의 꼭짓점은 탄환을 향하고 있었고, 마법사를 향해 날아가던 탄환은 중간에 생겨난 원뿔의 경사면을 타고 미끄러지듯 궤도가 바뀌었다.
그대로 두었으면 아마 마법사의 목이나 가슴을 관통했을 탄환은 마법사의 머리 너머로 스쳐 지나가 버렸다.
짧은 시간에 완성도 높은 마법을 선보여 페룬의 마법사를 구한 정민의 손끝에,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마법의 여파 때문인지 냉기가 맺혀있었다.
정민이 프로이데의 마법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프로이데, 페룬을 도와 상황을 타개한다.”
발렌시아와 정민의 시선이 얽혔다.
곧, 강철계 마법과 빙결계 마법이 필드와 불사조에게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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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좀 알려줘!”
고개를 어디로 돌려봐도 혼란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애쓰고 있었고, 나는 그런 사람들을 거슬러 오르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 불사조가 난리법석을 피우는 중인 필드로 향하는 중이었다.
관람객으로 위장해 있던 것인지 곳곳에서 무기를 사용하거나 능력을 보이는 놈들이 나타났지만, 내 눈에 보이는 족족 깔끔하게 사망선고를 내려주었다.
앨리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신시아 언니가 좀비들 동원해서 사람들 대피시키고 있어요. 그런데 출입구를 막고 있는 놈들이 있대요. 불칸의 마법사들 같다는데요?
“트라이포드랑 한통속이라는 거네?”
-네. 그래 보여요. 신시아 언니는 지금 좀비들 통제하기 바빠서 출입구 막고 있는 놈들까지 처리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수련 언니도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으려고 로봇들을 조종하고 있고요.
“내가 갈게. 위치 알려줘.”
앨리스가 알려주는 대로 따라가자 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비명만 질러대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저 앞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도 쉽지 않았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앞에 있던 드워프의 어깨를 밟고 뛰어올랐다.
[경량화]
[초상비草上飛]
그리고 다시 여러 사람의 어깨를 밟아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불칸의 마법사들이 봉쇄하고 있다는 얘기가 사실인지 점차 뒤로 밀려나는 사람들 너머로 열기가 후끈하게 밀려왔다.
마법사 중 하나가 사람들 위로 접근하는 나를 알아챘는지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뭐하는 놈이야! 돌아가!”
돌아가란다고 돌아갈 리가 없는 나였기에 계속해서 다가서자 놈은 불덩이 하나를 만들어 내게 던졌다.
곧바로 검을 꺼내 휘두르자 불덩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안타.’
당황한 마법사에게 달려들어 마법 술식이 떠오르고 있는 손목을 베어버렸다.
“으아악!”
비명에 맞춰 생각했다.
‘2루타.’
그러자 곁에 있던 다른 불칸 마법사들의 주의가 나를 향했고, 그중에는 플라워즈 호텔 테니스장에서 봤던, 셰퍼드도 있었다.
놈들이 다양한 화염계 마법을 그려내며 외쳤다.
“사수한다! 스승님의 명령이야!”
가장 먼저 외친 놈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머리통에 살얼음이 가득했기 때문.
[스카디]로 만들어낸 광경이었다.
‘3루타.’
셰퍼드 놈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빙결계 마법?”
마침내 사람들의 어깨를 밟는 것을 그만둔 나는 [낙법]을 통해 바닥을 한 바퀴 구르고는 바로 [튀어 오르는 용수철]을 사용해 쭉 날아올랐다.
그리고 [플라잉 니킥].
돌덩이처럼 굳건한 나의 무릎이 향하는 곳은 셰퍼드 놈의 가슴팍.
놈도 그걸 알아챈 건지 하반신을 불로 만들어 피하려고 했지만, 내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무릎에 닿은 셰퍼드의 가슴팍에서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움푹 패이는 감각이 전해져왔다.
굉장한 충격 때문인지 실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흐멀흐멀 날아간 셰퍼드의 몸이 출입구에 내려진 겹겹의 셔터에 처박혔다.
‘홈런’
다른 마법사와 무장한 놈들을 처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문제는 철문에 가까운 셔터.
근력이나 힘에 관련된 스킬을 쓰고 들어 올리려고 애라는 애는 다 써봤지만 덜커덩하는 소리만 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칼로 쑤셔서 자르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았고.
“이거 올릴 수 있겠어?”
-운영시스템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파악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책임자가 권한만 주면 바로 해결될 문제긴 한데······.
그 말을 듣고 통신 채널을 바꿔 위타천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여전히 위타천은 답이 없었다.
“나한테 일 맡겨놓고 자기는 어디 간 거야. 미치겠네.”
이제는 사람들도 셔터에 달라붙어 마구 두드려대는 상황.
보안요원으로 위장한 기계화 좀비들이 사람들을 막아 세우려 했지만, 수가 워낙 많아 그마저도 쉽지 않아 보였다.
아마 다른 출입구도 상황은 비슷하거나 더 심하겠지.
이대로 두고 떠날 수도 없어 난처한 상황, 셔터 저쪽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누구 있습니까?”
사람들이 갇혀 있다며 아우성을 치자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떨어져 있으세요! 뚫겠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장비라도 가져온 건가?’
사람들이 주춤주춤 물러나 셔터 뒤쪽으로 넓은 공간이 생겼다.
“됐습니까?”
그러더니 셔터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곧 우지끈, 우드득, 끼이이익 하는 귀를 긁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바닥을 통해 진동이 잠시도 쉬지 않고 전달되었다.
공사현장에서나 들을 것 같은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셔터 너머로 투박한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구멍 주변을 뜯어 넓히더니 다른 손도 불쑥 튀어나와 양손으로 구멍의 경계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 손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장비 따위는 없었다.
으드드드득-
손이 두꺼운 셔터를 ‘찢어’버렸다.
점점 넓어지는 구멍을 통해 나는 이런 일을 벌인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쫙 빼입은 수트와 잘 닦여 반짝거리는 구두, 그 수트 너머로 보이는 잘 단련된 역삼각형의 신체, 그리고 따로 봤을 때는 상당히 언밸런스하지만 묘하게 어울리는, 질끈 틀어 올린 상투까지.
공공 집행자 노덴스가 나를 보고 의문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오메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얘기하자면 좀 긴데 말이죠.”
그때, 사람들이 살았다며 환호성을 지르며 노덴스가 뚫어놓은 구멍을 향해 밀려들었다.
다칠 수 있으니 위험하다며 노덴스가 소리를 지르는데, 사람들 머리 위로 불 하나가 일렁이며 빠르게 다가오더니 셔터 앞에서 사람의 형체가 되었다.
인간으로 보이는 그의 머리와 어깨에서 불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마도 마법사일 그가 말했다.
“아무도 못 지나간다.”
그걸 들은 노덴스의 눈썹 끝이 위로 치솟았다.
단단히 화가 난 것이 분명한 표정.
주먹 쥔 노덴스에게서 맹렬한 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흐름은, 아마도 묻고 싶지 않았을 질문이 되어 마법사에게 향했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불칸 마탑주?”
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