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8권 후기)
200.
화산에 이어 유성우까지 소환해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은 불칸 마탑의 쇼케이스가 끝났다.
필드와 관객석 사이에 투명한 격벽이 솟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열려있던 돔의 천장이 닫히기 시작했다.
천장이 닫히고, 이루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조명이 다시 한 변 변형을 시작한 필드를 비추었다.
다양한 지형지물이 솟아오르는 동시에, 필드 중앙에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빈 깃대가 박힌 작은 구릉이 솟았다.
구릉에서 세 방향의 길이 흐릿하게 뻗어 나올 때부터 시작된 사람들의 흥분 섞인 환호성은 길의 끝, 그나마 야트막한 평지라고 할 수 있는 세 곳에 각각 페룬, 프로이데, 불칸의 문장이 그려지자 더욱 들끓어 올랐다.
그걸 본 앨리스가 말했다.
“이번 교류전 집단전투의 룰은 간단해요. 점령전. 베이스를 다른 마탑에게 빼앗기지 않은 채로 가장 먼저 소속 마탑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깃대에 거는 마탑의 승리래요. 마탑마다 스무 명, 총 예순 명의 마법사들이 말이죠.”
“화력 하나는 대단하겠네.”
“제대로 볼 시간은 없을 것 같지만요.”
앨리스가 패드를 손에 올려놓은 채 몸을 부스의 안쪽으로 향했다.
그 누구도 출입을 금지한 우리 부스의 안쪽에는 신시아와 이수련이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힘을 쓰고 있었다.
먼저 신시아는 VIP 부스에게 비치되어있던 음료수와 과자를 이용해 바닥과 벽에 자신의 사령술 도형을 기본으로 한 술식을 적어놓고 그 위에 올라서 있었다.
그냥 보기에는 애들 장난처럼 보였지만, 그 위력만큼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눈을 감은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녹색 기운이 도형들을 비출 때마다 신시아의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녀는 지금 포탈링을 통해 불러들인 기계화 좀비 수백 기의 시각 정보를 받아들여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기계화 좀비는 관객이나 보안요원, 안전요원으로 위장해 종합운동장 곳곳에 퍼트려 놓은 상황이었다.
“모인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누가 위험하고 위험하지 않은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아요. 게다가 마법사들이 바로 알아채지는 못해도 어렴풋하게나마 사령술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마법사들이 모여있는 쪽에는 접근도 쉽지 않고요.”
“그럼 일반 관객들 위주로 감시해주세요.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게요.”
고개를 끄덕인 신시아가 손을 휘두르자 도형 곳곳에 얹어져 있는 과자들이 응답하듯 몸을 떨었다.
그 옆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바이저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채로 의자에 앉아 있는 이수련이 중얼거렸다.
“전투용 로봇을 원격조종하면 더 편하련만 시설관리용 로봇을 쓰려니 이거 원······. 딥스페이스로 다이브 하는데 가정용 오락기 조이스틱을 던져준 꼴이 아니더냐.”
이수련은 원격조종로봇을 동원해 기계화 좀비가 내려가 볼 수 없는 운동장 지하나 내부 시설들을 살피고 있었다.
다만 퓨전 코프가 자랑하는, 아마도 이수련만 사용할 수 있게 커스텀 세팅이 된 전투용 로봇들은 눈에 띌 것이 불 보듯 뻔한지라 시설관리를 주목적으로 하는 투박한 로봇들을 동원해 이곳저곳을 스캔하는 중이었다.
그에 따라 ‘관절 움직임이 어디 늙은 소가 절뚝이는 것 같네’, ‘시야각이 비 오는 날 도롱이 쓴 것만 못하네.’ 하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비유 섞인 이수련의 투정이 쉬지 않고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그래도 지사에 연락해 운동장 주변에 내 개인 로봇들을 가져다 놓았으니 필요하면 말만 하거라.”
“그럴 필요가 없는 게 제일 좋은 시나리오긴 한데······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그 사이 앨리스는 마고를 통해 전해 받은 종합운동장의 청사진과 근방 동대문 에어리어 도시계획 전도를 패드에 띄워놓고 신시아와 이수련이 알려주는 정보를 토대로 안전 구역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있었다.
“책상에 연결했으면 훨씬 큰 스크린이랑 보조 장비 사용해서 더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었을 건데 여건이 여건인지라 애로사항이 많네요.”
나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겠지만 앨리스의 중얼거림에 가슴 한쪽이 뜨끔했다.
괜히 한두 마디를 얹었다.
“루트 쪽 도움은 요청했어?”
“아직요. 가능하면 저희 선에서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준비는 해둬.”
“네. 사장님, 이것 좀 저기 꽂아주실래요?”
앨리스가 한쪽 손을 등 뒤로 돌려 옆구리를 긁적이나 싶더니 그곳에서 콘센트가 튀어나왔다.
“너 이런 장치도 있어? 태양광 충전이나 무선 충전패드 위에 앉아 있으면 충전되는 거 아니었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구형 전원 공급 장치도 쓸만해요. 어떻게 쓰는 건지 모르시려나? 저기 TV 아래 보시면······.”
“아냐, 알아. 알아.”
TV 콘센트를 뽑고 그 자리에 앨리스의 콘센트를 뽑자 잠깐 부스 조명이 나갔다가 다시 깜빡이며 정상으로 돌아왔다.
패드를 만지는 앨리스의 손이 더욱 빨라졌다.
“이제 회로가 좀 굴러가네.”
이수련과 신시아의 아낌없는 기름 부음, 아니 금전 부음과 장비 부음은 무엇을 만들어냈는가.
앨리스라는 초 오버 테크놀로지 안드로이드를 세상에 선보이고 말았구나.
새로운 문명의 선각자이자 동시에 구태 문명의 징벌자라 할 것이니······.
이런 생각을 하며 얼빠진 눈으로 앨리스를 보고 있자니 신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공공 집행자분들도 오신다고 했었던가요?”
“네. 야타가라스는 이미 와 있는 것 같고. 다른 집행자들도 최대한 빨리 올 거라고 들었어요.”
“나다 씨는 오신 것 같네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주차장에 ‘그 차’가 들어왔거든요.”
나다의 그 차라면 아마도 사쿠라쨩일 것이다.
최대한 빠르고 은밀하게 오라고 위타천이 다른 공공 집행자들에게 전달한 것으로 아는데, 나다는 아마 은밀은 못 듣고 빠르게만 집중한 게 아닐까.
부스 너머에서 커다란 신호음이 울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막대한 함성이 밀려들었다.
집단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함성이 조금 잦아들기 무섭게 앨리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수련 언니! 필드 정 중앙 바로 아래 있는 곳 스캔 돼요?”
“바로 시도해보마.”
앨리스의 눈과 손이 패드 위에서 재빠르게 움직이다 전원이 끊긴 것처럼 멈춰 섰다.
“스캔 된 형태가 청사진의 것과 달라요. 근방의 다른 건물들과 이어진 지하통로로 보이는 흔적도 있고요.”
“시설관리 로봇들이 가지 못하게 막는 구역도 있느니라.”
“위치는?”
벌떡 일어선 앨리스가 창가로 다가간 뒤 유리창에 청사진을 투사했다.
청사진 위에 여러 그림이 그려지나 싶더니, 앨리스가 눈을 깜빡이자 사라졌다.
앨리스 곁으로 온 내 눈에는 집단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아래쪽 필드의 전경이 들어왔다.
최소한의 방어 인원만 베이스에 두고 깃대가 있는 구릉을 향해 치닫는 페룬, 프로이데와는 다르게 불칸의 마법사들은 전원 베이스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린 채 영창을 하고 있었다.
앨리스가 손을 뻗었다.
“저기, 불칸 마탑의 베이스가 있는 곳이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불칸의 마법진에서 거대한 불사조가 솟아나더니, 불을 토해 자신이 서 있던 필드 주변의 지반을 녹이기 시작했다.
발렌시아가 이끄는 페룬, 정민이 이끄는 프로이데의 마법사들이 이상한 기류를 읽고 불칸 쪽으로 공세의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불칸은 필사적으로 방어했으며, 그동안 불사조는 주변에 커다란 싱크홀을 여럿 만드는 것으로는 모자랐는지 날개를 펴고 관객의 안전을 위해 쳐놓은 투명 격벽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불칸의 마법사 하나가 불사조의 발에 밟혀 찌그러졌다.
제대로된 통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격벽이 터져나갈 때쯤, 불사조가 만들어 놓은 싱크홀로 무장한 인원들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위험해질 것 같거든 몸들 피해요. 알겠죠?”
그렇게 말을 마친 나는 부스를 벗어나 아비규환의 중심지를 향해서 마구 달렸다.
혼란을 틈타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관람객들에게 블래스터를 갈기는 놈 하나를 제압하고 귀걸이를 터치해 위타천에게 외쳤다.
“일 터진 것 같으니까 조치를 해요!”
위타천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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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전투가 시작되기 조금 전, 생각에 잠겨있는 위타천이 있던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위타천의 부관, 장이었다.
“오메가 씨와 얘기는 잘 끝나셨습니까?”
스펙터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찬 위타천은 대답 없이 장에게 고개만 끄덕였다.
“스펙터가 나왔다던데요. 오메가 씨 증언에 따르면요.”
“······그렇네.”
장이 위타천의 곁으로 다가서서 물었다.
“현장에 남겨진 건 아무것도 없던데, 오메가 씨의 증언을 신뢰할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믿어봐야지.”
위타천이 중얼거렸다.
“스펙터······이번에 잡으면 바로 가루를 내버려야겠어. 장, 자네도 렙틸리비아에서 놈을 포획할 때 같이 있었던가?”
“현장에 있었습니다. 조금 늦게 진입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스펙터가 담긴 병을 수송기로 옮길 때도 조종을 제가 했었죠.”
“그랬던가.”
“수송기 조종은 다 제가 하지 않습니까. 위타천 님 일정을 저보다 빠삭하게 알고 있는 사람도 없고요.”
“그거야 뭐. 자네가 올린 일정 중에 내가 마음에 드는 걸 고르니······.”
위타천의 말이 멈췄다.
자신의 일정을 조정할 수 있으면서, 경로 또한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쉽게 알 수 있는 인물.
많은 권한을 넘긴 탓에 공공 집행본부 내부 데이터 거의 대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 인물.
공공 집행본부 내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던, 스펙터가 있던 곳을 알고 있던 인물.
위타천은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하고 영력을 끌어올렸다.
서늘해서 스치면 얼어붙을 것 같은 위타천의 목소리가 장에게 향했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나?”
“뭐든지요.”
“자네가 어떻게 내 부관이 됐더라.”
“같이 일 한 게 몇 년인데 이제야 그걸 물어보십니까.”
“말하게.”
위타천의 압박에도 장은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됐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눌 대화는 아닌 것 같군요. 그리고 지금 제게 물어보셔야 할 건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장이 한층 더 크게 미소 지었다.
사람 좋은 미소 뒤로 악의가 스멀스멀 비쳐나오는 괴이한 웃음이었다.
“‘영력이 모이는 게 늦다.’, ‘그런데 그걸 알아채는 것도 왜 이리 늦는지 모르겠다.’ 이걸 물어보시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위타천은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했다.
평소 같으면 거대한 해일처럼 영력이 느껴지고, 신들과 통해야 했으나 지금 느껴지는 영력은 말라가는 개울가에 흐르는 물 한줄기만도 되지 못했다.
심지어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꺼풀이 닫혔다 열리면 안구 위에 모래가 굴러다니는 듯했다.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위타천은 한쪽 팔로 테이블에 기대어 지탱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흐려지는 위타천의 시야에, 장이 활짝 웃고 있었다.
만족감 충만한 장의 목소리가 위타천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좋은 꿈 꾸고 나면 더 좋은 세상이 되어 있을 겁니다.”
굳어가는 혀로 위타천이 간신히 말을 뱉었다.
“네가······트라이포드······.”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있으니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깨어났을 때,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동안 고맙고 즐거웠습니다.”
비틀대던 위타천이 바닥을 향해 고꾸라지자 장은 밖으로 빠져나와 지하로 향했다.
집단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이 요란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장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마침내.”
그러다 감격에 차오른듯, 낯선 단어를 끌어다붙여 문장을 완성했다.
그 단어는 스냅샷이 오메가에게 말한 적 있으나 오메가가 그럴리 없다고 쉬이 넘겨버릴 정도로 현실성이 떨어지는 단어이기도 했다.
"침공의 시작이구나."
음성의 높낮이, 말투, 발화자 그 무엇도 변한 것이 없었으나 단어로 인해 장의 음성은 그분의 음성이 되었다.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