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나는 지금 동대문운동장 한쪽에 있는 사무실에 불려와 있다.
아마 운영 측에서 사용하는 곳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앉아 있는 간이 테이블의 오른편 통창 아래로 내려다보면 불칸의 마법사들이 열심히 쇼케이스를 준비 중인 필드가 한눈에 내려다보일 것 같았다.
우리가 있던 VIP 부스보다 관람 환경이 더 좋은 것 같아 한 번 정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통창 가까이로 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았다.
이마에 주름을 몇 겹으로 만들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연신 손바닥으로 그 주름을 문지르고 있는 내 앞의 위타천 때문이었다.
“후배······.”
초저주파가 섞인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낮은 음성으로 나를 부르는 위타천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허리를 바로 세웠다.
“넵.”
“입장 전부터 스틸레드 마법사들을 피떡으로 만들어 놓은 걸로는 모자랐던 건가?”
“그건 그놈들이 저희 직원을······.”
위타천이 손바닥을 내게 향한 채로 손을 내밀었다.
일단 멈추라는 의사 표시.
위아래 입술을 굳게 붙이니 위타천의 말이 이어졌다.
“후배의 과잉 대응이 분명하지만, 스틸레드 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주변 증언을 확보해 무마하지 않았나. 테오릭 경이 직접 나와서 합의를 중재해주기도 했고. 그게 아니었으면 후배는 들어오지도 못했어. 현장에서 공공질서 문란 혐의로 연행되도 할 말 없을 정도였다는 소리야. 그걸로도 모자라서······.”
위타천이 나를 뚫어져라 보더니 ‘으후’ 하는, 뱃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 흉곽을 통과해 결국 입으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내뱉었다.
“운동장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만 6만명이 넘고, 여러 중계 루트로 시청하고 있는 인원이 최소 20억은 될 거라는데 그런 이벤트가 지연될 줄은 몰랐네. 그것도 후배가 화재를 일으켜서!”
그때, 통창이 바르르 떨며 진동했다.
사람들이 내뿜는 환호성 때문이었다.
불칸의 쇼케이스가 시작된 모양.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페룬과 프로이데의 끝내주는 퍼포먼스를 보고 난 직후라 더욱 그랬다.
새로 참여하는 불칸 측에서도 어마어마한 걸 준비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
하지만 나도 눈치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 당장 일어나고 싶어 다리는 달달 떨되, 차마 일어날 수는 없었다.
일단 지금은 숙여야 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침묵하던 위타천이 입술을 달싹이다 멈추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내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꾹 눌러 참는 모양새라 최대한 반성하고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심지어 얼굴 근육을 움직여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스킬도 사용하지 않고!
이 정도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는 보인 게 아닌가.
“일부러 그런 표정 지어봐야 소용없네.”
위타천이 그 말을 하자마자 바로 표정을 펴고 물었다.
“이제 제 얘기를 좀 해도······될까요?”
“참작이 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으면 해도 좋아.”
화재라고는 하지만 스프링클러가 터지고 안전요원들이 출동한 게 전부라서 위타천도 마구 화를 내지는 않는 것 같았다.
어디가 전소됐다거나 인명피해가 있었으면 위타천도 이렇게 좋게좋게 얘기로 풀지는 않았을 거다.
젖어버린 복도에 대한 배상은 내가 해야 한대서 그건 좀 가슴이 아프지만, 일단 할 말은 해야겠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스펙터에 관한 겁니다.”
스펙터라는 단어를 듣자 착잡함이 가득 메우고 있던 위타천의 눈빛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바위라도 꿰뚫을 것처럼 차갑고 예리한 시선이 내게 꽂혔다.
범죄자들에게는 가차 없기로 유명한 위타천이 놓친 몇 안 되는 범죄자이니 위타천이 스펙터에게 가지는 감정은 매우 각별할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밖에서 놓친 것도 아니고 공공 집행본부 안까지 잡아 온 뒤 탈주했으니 프라이드 높은 위타천에게는 지우고 싶은 오점 아닐까.
“얘기는 들었네. 후배 사무실의 안드로이드로 변한 스펙터와 누구랬지? 늑대인간?”
“웨리바흐라고. 태백 권역에서 산신으로 여겨지는 잉그리드의 손자입니다. 왜 여기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스펙터와 함께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트라이포드의 일원으로 봐도 좋지 않을까요.”
“늑대인간은 차치하고, 스펙터인 건 확실했나?”
“렙틸리비아에서 보셨지 않습니까. 스펙터가 어떤 방법을 이용해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는지. 놈을 직접 잡아다가 가져다 준 사람이 누굽니까. 저 아니었습니까. 절대 틀릴 수가 없죠. 현장에 남은 잔해만 봐도 그렇지 않나요.”
불에 타다 남은 벌레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타천은 고개를 저었다.
“스펙터의 흔적으로 볼만한 건 없었네.”
“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어.”
분명 타버리거나 타다남은 벌레가 있어야 한다.
“가능성은 두 가지.”
위타천의 말이 내 귓전을 때렸다.
“자네가 거짓을 말하고 있거나 스펙터 역시 업그레이드를 했거나.”
“CCTV는······.”
“당시 해당 구역에 대한 CCTV 녹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던 걸 확인했네.”
입 안에서 혀를 굴리며 신중하게 내놓을 말을 고르는 동안, 어느새 주름을 문지르던 손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깍지를 낀 위타천이 말했다.
“그쪽에서 후배를 어지간히 처리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
“아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했지. 공공 집행자가 이런 판단을 내리는 건 위험할 수 있지만, 솔직히 말해 내 직감은 후배를 믿어보라 하는군. 후배를 보고 있으면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무마하긴 하지만 그 안에서 악의가 느껴진 적은 없었거든.”
“그 말씀은―.”
“트라이포드가 이곳에 잠입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심지어 CCTV까지 건드리는 걸로 봐서는 내부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누군가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그럼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말하지 않았나? 지금 종합운동장 안에 있는 사람만 6만이 넘는다고. 여기서 패닉 상황이 발생하면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걸세. 대피를 한다 해도 최소한의 질서와 대피로가 확보된 이후여야 하네.”
굉음과 함께 통창이 다시 한번 떨렸다.
화염계 마탑이라서 화산이라도 폭발시킨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쯤, 정말로 용암이 높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미쳐버렸군.’
계속해서 창문 너머에 붙어 있고 싶어하는 시선을 애써 다시 내부로 돌리고 위타천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는 움직이지 않을 걸세. 꼬리가 잡힌 걸 놈들이 눈치채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 대신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네. 마고는 이미 종합운동장 내부와 인근 CCTV를 모조리 분석하고 있어. 노덴스, 나다, 야타가라스도 머지않아 도착하겠지.”
밖에서는 다시 한번 감탄사와 함께 용암이 높게 치솟았다.
무엇이든 녹일 것 같은 그 뭉근한 질감과 더불어 곳곳을 밝히는 주황빛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창으로 돌렸다.
솟을대로 솟았다 떨어지는 용암에서 뿜어지는 빛이 운동장 곳곳을 밝히고 있었다.
열려있는 돔의 천장 바로 아래, 처마 같은 구조를 한 곳에도 그 빛은 닿았다.
평소였으면 늘 어두웠을 곳이 잠시 밝아졌고, 나는 그곳에서 일렁거리는 그림자가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야타가라스였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내 허리춤에 있는 존속살해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용암은 곧 아래로 떨어졌고, 야타가라스가 서 있던 곳도 곧 어둠에 뒤덮였다.
“내 말 듣고 있나?”
위타천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간신히 돌릴 수 있었다.
“예······에.”
“공공 집행자 다섯이 한 곳에 집중하는 일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큰 건이네. 게다가 은밀하게 처리해야 하네. 해서 후배만 괜찮다면 도움을 좀 받으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의뢰입니까?”
나를 응시하던 위타천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자리가 자리이고, 급한 일이니만큼 세부적인 보상이나 대가는······.”
이번에는 내가 손을 들어 위타천의 말을 막았다.
“제가 원하는 대가는 따로 있습니다.”
“말해보게.”
“―”
내 말을 들은 위타천이 줄곧 굳어 있던 인상을 천천히 펴더니 마지막에는 손으로 테이블을 쳐가면서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내게 물었다.
“정말 공공 집행자 될 생각이 없나? 후배만 한 적임자가 없을 것 같은데.”
“착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큰 뜻이 있어서 그런 대가를 요구한 게 아닙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최대한 노력하지.”
“평소라면 그런 대답으로는 절대 의뢰를 받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평소가 아니죠. 게다가 대단한 신뢰의 직업을 가지신 분의 말이기도 하니까요.”
위타천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위타천도 마주 오른손을 내밀어 내 손을 붙잡았다.
약식이긴 하지만 의뢰 수주다.
손이 떨어지고 물었다.
“그런데 야타가라스는 여전히 저를 의심하고 있나요?”
말 끝나기 무섭게 다시 위타천의 이마에는 주름이 가득해졌다.
“음······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의심은 하고 있네. 하지만 적대감은 많이 줄어들긴 했네. 마고와 내가 몇 번이고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반복해서 그나마 설득 비슷한 걸 한 덕이지. 야타가라스와 그렇게 오래 얘기해 본 건 처음이었네.”
그 빡대가리에게 설득이란 걸 했다니.
마고와 위타천의 인내심과 참을성에 감탄했다.
“그러니 이번 일은 후배에게 있어서도 의심을 완전히 털어낼 기회아니겠나.”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야타가라스에 대한 혐의는요?”
“전혀 없네. 마고가 수도방위사령부 데이터센터까지 침투해 긁어낼 수 있는 건 다 긁어냈는데도 야타가라스는 아니라더군. 우리들 주변 인물들로 조사 범위를 확대하려는 차에 내가 지원을 요청해서 조사는 시간이 더 걸릴 듯 싶어.”
그럼 야타가라스는 그냥······.
차마 내가 하지 못한 말을 위타천이 해주었다.
“야타가라스는 그냥 능력은 출중한데 조금 답답한 친구인 게지. 몸이 너무 좋아 머리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크흠······.”
위타천의 말이 빨라지고, 목소리가 높아지며 얼굴에 울분이 스며 나오는 걸 보면 설득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 부분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내 지적에 위타천이 움찔했다.
“고맙네.”
그리고 내게 물었다.
“그런데 그 새로운 검 말이야. 혹시 그거 야타가라스가 사용하던건가? 정신을 차린 야타가라스가 검이 어디갔냐며 당황했다는 걸 들었네만.”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다 담백하게 꺼냈다.
“네.”
“하아······대체 왜······.”
“전리품이죠.”
“일단 모른다고 얼버무리긴 했는데 그런 황당한 이유라니. 그건 나중에 야타가라스와 직접 담판 벌이게. 날 끌어들일 생각은 말고.”
위타천은 그럼 부탁 좀 하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를 내보냈다.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VIP 부스로 들어가자마자 앨리스, 신시아, 이수련이 나를 둘러싸고 어떻게 된 거냐며 질문 세례를 쏟아냈다.
일단 당장 여기서 다 나가려고 하려다가 생각을 바꿔먹었다.
이들의 도움이 있으면 목표 지점에 훨씬 더 빠르게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앨리스, 패드 들고 왔지? 오퍼레이팅 모드 가동할 수 있어? 신시아는 기계화 좀비 소환해서 보안요원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까요? 관객석 주변을 순찰하면 될 것 같아요. 이수련 씨는 로봇들 동원해서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운동장시설들 스캔 좀 해줄 수 있어요? 늑대인간을 우선해서 찾으면 좋고요.”
“지금요?” / “여기서요?” / “당장 말이냐?”
한 번에 답했다.
“팀 오메가 힘 좀 빌려줘요.”
밖이 다시 밝아졌다.
불칸 마탑은 이제 운동장에 조그마한 규모의 유성비를 떨어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