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손에 들고 있던 앨리스의 팔이 부스러졌다.
아주 작은 벌레들의 군집으로 변하더니, 부웅 소리를 내며 스펙터를 향해 날아가려는 것이 아닌가.
[삼매진화三昧眞火]
손아귀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기를 응집해 순수한 불을 만들어낸다는 설정인 삼매진화는 기껏해야 종이를 천천히 태울 정도의 화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불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장점이 없는 스킬인 것.
하지만 내게는 화염 마법이 있다.
[호티어rôtir]
한순간에 치솟는 화력.
하지만 삼매진화의 장악력 덕에 불은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고 벌레들만 집어삼키고 있었다.
앨리스의 팔로 위장한 벌레 군집을 그대로 들고, 아마도 스펙터일, 아직도 앨리스의 모습을 하고 있는 놈을 향해 쇄도했다.
“사장님······!”
놈이 앨리스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무슨.
차갑게 답했다.
“이미 늦은 거, 모르겠냐?”
놈을 향해 불이 붙어 활활 타는 팔뚝을 휘두르자 불타는 벌레들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주위로 날아다녔다.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가 보았다면 실내에서 쥐불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때까지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빛을 하고 있던 앨리스는 불똥이 가까이 튈 정도가 되자 돌변했다.
표독스러운 눈빛, 세로로 쭉 찢어지는 동공, 길어지는 주둥이, 그 주변에 나는 몇 가닥의 수염, 길쭉길쭉한 신체, 무엇보다 살랑이는 꼬리까지.
앨리스가 한순간에 고양이 수인으로 바뀌었다.
손도 쓰지 않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백덤블링으로 불똥을 피하는 놈은 체조 선수 같았다.
몇 번의 백덤블링 후, 뜯겨있던 놈의 한쪽 팔에서 벌레들이 사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어느새 팔의 재생을 완료했다.
나는 계속해서 벌레들의 잔해가 떨어지고 있는, 앨리스의 것으로 위장한 팔뚝에서 한쪽 바닥에 던져두었다.
스킬이 끝나가자 아직도 살아남은 몇몇 벌레가 고양이 수인 쪽으로 바들거리며 기어가려 했으나 곧 내 발아래 깔려 ‘으적’ 하는 소리만 남았다.
“어떻게 알아챘지? 어떤 감각을 동원해도 구분이 불가능했을 텐데.”
“궁금해, 스펙터?”
[고속 이동]
어느새 나는 고양이 수인의 앞에 있었다.
나는 보았다.
놀라움에 있는 힘껏 위로 향하는 놈의 눈꺼풀을.
확대되는 동공을.
그리고 안구 표면에 반사된 내 모습을.
나는 어떻게 보이고 있나.
흩날리는 머리칼.
흘리듯 내려놓은 한쪽 손.
그 손에 들린, 어느새 완전 전개를 마친 칼자루.
먹잇감을 향해 튀어 오른 표범처럼, 스펙터의 눈에 보이는 내 몸 어디 한구석 맹렬하지 않은 곳이 없다.
머리칼 너머, 나의 눈은 오로지 고양이 수인으로 변한 스펙터만을 담고 있다.
세상 다른 것은 다 잊고 놓쳐도, 놈만은 놓칠 수 없다는 듯.
그리고 보이는 입가.
양 끝이 귀를 향해 있다.
웃음이다.
놓쳤던 놈을 다시 보게 되어 반가워서, 마침내 끝장을 낼 수 있게 되어 기뻐서.
나는 웃고 있다.
자각하지 못한 사이 나는 웃고 있었다.
입술이 달싹이고, 안쪽에서 성대의 울림이 만들어낸 말이 입술 사이로 번져 나온다.
“나는 운이 좋았고, 너는 운이 나빴고.”
[만사재시 매사필종]
직선으로 나아가야 할 광자 검날이, 빛무리가, 아래에서 위로 완연한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 곡선에 스펙터의 가슴팍이 닿았다.
이렇게 된 이상 위장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인지 접점 주변의 벌레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좌우로 확 갈라졌다.
이제 스펙터의 눈에 비친 나는 사라졌다.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가슴팍을 훤히 내보인 채로, 스펙터가 말한다.
“이런 공격으로는 내게 아무런 타격도―.”
렙틸리비아에서 봤을 때도 놈이 이렇게 말이 많았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처리할 뿐.
벌레들이 등판을 내보이는 것인지 놈의 가슴팍이 번들거려 다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몸을 틀자 반대편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커먼, 묵墨색의 광자 검날을 밀어 올리는 칼자루가 손에 들려있었다.
의기충천하던 스펙터의 목소리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두 자루?”
[에피시]
양손에 들린 두 자루 검의 광자 검날을 타고 오르는 불줄기.
내 모습을 반사하던 벌레들의 새카만 등판이 열기를 머금어 한순간에 주황빛으로 물든다.
스펙터는 여전히 불에 약하다.
쉬지 않고 베고 태워야 한다.
익숙하지 않은 두 자루 검일지라도.
[연화무쌍連火武雙]
불붙은 검 두 자루가 스펙터의 몸을 난자했다.
특별할 것 없는, 그저 쌍수 휘두르기지만 나의 경험과 검의 출중함은 스킬의 미흡한 부분을 채우기에 차고 넘쳤다.
놈은 모습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내게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때로는 내게 공격하기도 했는데, 나는 간격을 절묘하게 유지하면서도 차츰차츰 놈을 깎아 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뒤엉켜 복도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러다 검에서 피어나는 열을 감지했는지 천장에서 스프링클러가 터져 나왔다.
세차게 뿜어지는 물이 검에 닿아 증기를 만들어냈다.
스펙터를 놓친 잠깐 사이, 앞쪽에서 제3의 인물이 걸어오며 만들어내는 발소리가 귀에 닿았다.
물에 젖은 바닥에 발이 닿아 만들어내는 철퍽 소리가 불쾌했다.
“본편 시작 전에 미리미리 처리해 두려고 했더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대체.”
철퍽하는 소리가 요란스레 여러 번 났다.
스펙터가 바닥을 기어 그쪽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성별을 알기 힘들 정도로 뒤섞인 스펙터의 목소리가 거세게 터져 나왔다.
“나는 안 한다고 했는데! 네가 부탁에 부탁을 해서 기껏 도와줬더니 꼴이 이게 뭐야! 여분의 벌레도 얼마 없는데!”
“원래 삶이란 그런 겁니다. 아무리 대가리를 굴려서 계산을 해도 해도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온 변수가 모든 걸 다 말아 먹곤 하더라고요. 심지어는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기도 하죠.”
스프링클러에서 뿜어지는 물이 조금 약해졌을 때, 나는 이 자리에 있는 제3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옅어지는 증기 너머, 늑대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주둥이 안쪽으로 새하얀 송곳니가 보였다.
그것은 당장이라도 내 목에 박히길 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 그래? 오메가?”
“웨리바흐. 살아 있었군.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스펙터 곁에서. 그쪽도 참 비루한 삶이야.”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스펙터를 마무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검 두 자루를 한 번에 내리쳤지만, 가로막혔다.
어깨와 팔을 바위 같이 변형시킨 웨리바흐가 스펙터 앞에서 내 검을 받아내고 있었다.
녀석이 이죽거렸다.
“뭐가 그리 급해. 오랜만에 봤으니 회포는 천천히 풀자고.”
“글쎄. 나랑은 생각이 좀 다르네.”
그대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니 바위가 달아오르며 차츰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내가 잔뜩 비꼬았다.
“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 할머니께서 아신다면 통곡을 하실 텐데.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못난 똥강아지다워.”
“너만 없었다면!”
예리한 집게처럼 변한 반대편 손을 뻗어, 내 목을 노리는 바람에 검을 회수해 일단 뒤로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이 무언가를 외쳤다.
“스프링클러 확인하고 있습니다!”
“화재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침착하게 지시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앨리스의 목소리도 귀걸이를 통해 전해졌다.
-사장님! 아직 화장실이세요? 불났나 봐요. 빨리 끊고 나오세요!
웨리바흐가 내게 말했다.
“넌 내가 죽여주마. 그때까지 살아있어라.”
그리고는, 쨍그랑―
복도의 깨진 유리창으로 바람이 밀려들었다.
빠르게 달려갔지만 깨진 유리창 너머로 사라진 웨리바흐와 스펙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깨진 유리에 찔리지 않게 바깥을 살피다 나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미친놈. 도망치면서 폼이란 폼은 다 잡네.”
날 죽인다······.
누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마데르노였던가.
걔가 어떻게 됐더라?
-사장님 빨리 나오세요! 죽어도 곱게 죽어야지, 똥 싸다가 죽을 거냐고요!
그런데 웨리바흐는 왜 스펙터를 데려간 걸까.
놈도 트라이포드?
축 젖은 머리칼이 눈가를 가렸다.
-사장니임! 사장니임!
앨리스도 다급했던지 통신 모드도 전환하지 않고 말하느라 대화 내용이 그대로 내 귀로 흘러들었다.
-언니들! 그냥 들어가요. 사장님 대답이 없어요. 아무래도 똥 싸다 혈압 올라서 기절했나 봐요.
우당탕 쿠당탕하는 소리가 전해지더니 이수련과 신시아가 외치는 것이 들렸다.
-없지 않으냐!
-어디로 가셨지?
‘스펙터가 너로 위장하고 나를 웨리바흐에게 데려가서 쓱싹하려던 걸 알아채서 한바탕하는 바람에 부가적으로 스프링클러가 터졌다.’ 라고 앨리스에게 설명하면 한 번에 이해해줄까?
한숨이 푹 나왔다.
그래도 일단 가서 얘기는 해야 했다.
“나 화장실 아니야. 그쪽으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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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작은 소란으로 불칸의 쇼케이스가 잠시 지연된 사이, 불칸 마탑주 박운은 운동장 지하에 있는 관리시설 중 한 곳으로 향했다.
그의 호흡은 거칠었으며 발걸음은 매서웠다.
녹슬어 잘 열리지도 않을 것 같은 어느 철문 앞에서 박운은 망설임 없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안쪽을 잠식한 어둠을 향해 그가 윽박질렀다.
“미치셨소?”
미치도록 매혹적인 수연의 목소리가 어둠 너머로 들렸다.
“무얼 말이죠?”
“무얼?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요? 스펙터가 등장한 것 같다는 증언이 나왔소. 해결사 오메가에게서! 예정에도 없던 일을 왜 벌인 거요!”
수연이 혀를 날름대는 소리가 박운의 귀에 불쾌하게 다가왔다.
“꼭 성공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성공한다면 큰 이득이 되는 일이었어요.”
“내게 말 한마디 해주는 게 어렵소?”
“아는 이가 적을수록 좋은 일이었으니까요.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어느새 사르륵 소리를 내며 다가온 수연이 손을 뻗어 박운의 턱 주변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꼬리 끝이 맹렬하게 흔들리며 유혹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박운은 왠지 모를 평안함을 느껴 마음이 누그러지고 말았다.
“내, 내가 질타를 하려던 것이 아니라―.”
수연이 눈웃음 지으며 박운의 말을 막았다.
“알죠. 알고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직 우리의 본편이 남았잖아요?”
“그렇지. 집단전투에서······.”
“쉿.”
길고 하얀 수연의 검지가 박운의 입술 위에 닿아있었다.
“누가 들을라. 어서 올라가요. 다른 사람이 찾겠어요.”
박운이 사라지고 문이 닫혔다.
눈웃음과 미소를 지운 수연이 어두컴컴한 방의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스펙터와 웨리바흐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수연의 눈치를 보던 스펙터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 똥개가······.”
“입 다물어. 한마디만 더 하면 정말 죽여버릴지도 모르겠으니까.”
곧바로 입을 다문 스펙터를 지나쳐 웨리바흐의 앞에 선 수연이 손을 뻗어 웨리바흐의 목을 졸랐다.
“이 미친 개새끼야. 누가 너보고 그따위 짓이나 하래. 응? 그 덕에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마법사 앞에서 내가 앵앵거리기나 해야겠어?”
힘을 쓰거나 목을 강하게 만들 수 있음에도 웨리바흐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그저 캑캑거릴 뿐이었다.
“수, 수연 님께서 기뻐하실 거라 생각을······.”
“생각? 그딴 거 하지 마. 너는 그냥 하라는 대로만 해. 구르라면 구르고, 핥으라면 핥아. 뒤지라면 뒤지고. 알았어?”
웨리바흐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수연은 목을 조르던 손을 풀었다.
“가서 빠진 거 없나 확인이나 다시 해. 여기까지 왔으니 더 이상 실수가 있으면 안 돼.”
수연이 거친 숨을 내뿜고 있는 사이, 스펙터와 웨리바흐는 멀뚱멀뚱 서 있었다.
“꺼지라고!”
부리나케 문 너머로 사라진 스펙터와 웨리바흐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수연이 꽈리 틀고 있는 어둠을 향해 말했다.
“마침내, 대업의 시작이로구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린 수연이 경외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시어.”
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