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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95화 (196/258)

195.

“오늘로 가이드는 끝이시죠? 곧 교류전이니까요.”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소파에 몸을 내던지는 나를 보고 앨리스가 건넨 말이었다.

“맞아. 끝. 어후. 힘들었어.”

의뢰가 힘든 건 아니었다.

그동안 혹독하게 굴려진 페룬 마탑의 마법사들이 발렌시아를 보는 눈은 교관을 잡아먹고 싶어 하는 훈련병의 눈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류전에 참여하지 않는 마법사도 죄다 꺼내와서 굴리는 바람에 발렌시아에 대한 원성이 매우 높았다.

그 덕에 테오릭 경이 염려했던 것처럼 발렌시아의 호감을 사서 권력 구도를 한 번 비틀어보려는 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극도로 희박해졌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상황도 있었다.

내 예리한 오감에 잡힌 놈 중에는 발렌시아가 휘두르는 쇠빠따에 맞을 때 환희에 달뜬 신음을 내뱉는 놈들도 있었던 것.

그런 놈들이 발렌시아에게 접근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저 정도면 권력이고 뭐고 상관하지 않는, 진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찐사랑이겠다 싶어서.

물론 발렌시아는 찐사랑이건 구운사랑이건 상관하지 않고 쇠빠따 찜질을 해주었다.

보고 있으면 침이 바짝바짝 마르다 못해 무섭도록 살벌한 발렌시아의 빠따질이었지만 맞은 놈들의 피부가 시퍼렇게 변하는 한이 있어도 뼈가 부러졌다거나 근육이 상했다거나 하는 소리는 안 나오는 걸 보면 발렌시아는 그 분야에 있어서 초월적인 무언가가 아닌가 싶었다.

내가 힘든 것은 훈련에 약식으로나마 참여해야 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강철계 마법사가 아니다, 훈련을 보고 유출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등등의 말로 회유도 해보고 빠지려고 온몸 비틀기도 해봤지만, 발렌시아는 기어코 나를 훈련에 집어넣었다.

역할은 가상의 불칸, 가상의 프로이데로.

“장비를 써보라면서 성화여서 말이야.”

여기서 장비는 내 마법이다.

.

.

.

내가 퓨어인 것은 여러 곳에서 교차 검증이 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스킬 사용을 어떻게 그럴듯하게 꾸몄느냐?

마도공학 유물을 덕지덕지 달고 다닌다는 설정을 만들었다.

그 덕에 여러 이능을 담아두었다가 방출할 수 있으며 주로 화염계와 빙결계를 선호한다는 것도.

이 설정은 내가 야스민 공의 마도공학 경매 대리인이라는 사실, 신시아가 우리 사무실 근처에서 자주 목격되는 점, 하뮬 교수가 함께했던 많은 호위대장 중 나를 최고로 꼽는 것과 얽혀 그럴듯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냈다.

많은 마도공학 유물 콜렉터들이 ‘저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물은 발견된 적 없다. 소명이 필요하다’라는 주장을 했지만, 야스민 가도 나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기에 소문은 돌고 돌며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

정작 야스민 공은 내 능력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물밑의 다크웹과 딥스페이스에서 정보전, 여론전을 하는 앨리스와 루트의 공도 빼놓을 수는 없다.

순수한 퓨어가 아니라 마도공학 유물 빨이었다는 말에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실망하면 어쩔 건가.

내가 그렇다는데.

이 설정의 단점은 딱 하나였다.

내게서 뭘 슬쩍하려는 소매치기의 손길이 부쩍 많이 늘어났다는 것.

그런 녀석들은 한 놈도 빠짐없이 새로운 팔을 달 수 있는 단면을 마련해주는 자비를 발휘했다.

.

.

.

앨리스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안 한다고 했지. 의뢰 범위 바깥이라고.”

“정말요? 사장님 신체언어는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요.”

이크.

[명경지수]

[평정]

[와선臥禪]

나는 이 순간 눈보라 치는 산꼭대기에 있는 한 그루 소나무요, 하늘 높이 치솟아 광야를 눈에 담는 매일지니라.

요동치던 마음이 언제 그러했냐는 듯 가라앉았다.

효과가 있었는지 머리를 갸웃거리는 앨리스였다.

“아닌가? 요새 파츠 교환을 많이 했더니 호환성 문제가 생긴 것도 같고······수련 언니 오면 체크 좀 해달라고 해야겠어요.”

“그······래. 안 그래도 갑자기 바꾸더라. 응? 다 적응기를 거쳐야 하는 건데 말이야.”

사실은 발렌시아의 부탁에 힘 좀 써봤다.

아주 조금.

최고의 강철계 전투마법사가 지휘하는 합격진을 경험해볼 기회가 언제 어디서 있겠냐고.

있다고 하면 전장에서 상대 진영으로 만나는 경우일 텐데, 그건 내가 싫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나를 발렌시아에게 붙인 것부터 테오릭 경에게 이런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

교류전이 닷새 남은 시점이었다.

화염계 마법과 빙결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는 있지만, 불칸과 프로이데에서 각각 연구, 전승, 발전되어왔을 고유 마법들은 할 수 없으니 적당한 선에서 공방을 교환하는 것으로 얘기가 되었다.

내가 전력을 내지 않는 만큼 발렌시아 역시 참여하지 않고 다른 마법사들에게 지시만 내리겠다고 하고 시작된 모의 전투.

한 명의 직계제자가 포함된 세 명의 페룬 마법사를 내가 무력화 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분 남짓이었다.

나도 놀랐다.

의식하지 않아도 그들의 움직임이 읽혔다.

모든 걸 파악할 수 있었다.

호흡, 시선, 수인을 맺기 위한 근육의 움직임, 내 감각을 교란하기 위한 가짜 영창, 마법을 구성하기 위해 마나가 요동치는 것, 그 요동에 마법사들의 눈썹이 흔들리는 것까지.

발렌시아는 훈련할 때 고래고래 질러대던 목소리와 전혀 다른, 차분한 목소리로 마법사들에게 지시했으나 소용없었다.

지시가 미흡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지시마저 내가 몇 수 앞서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카디]로 한 명의 발을 묶어놓고, [트야치]로 만들어낸 얼음 칼날을 들고 다른 한 명에게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접근했다.

세 명의 마법사 중 하나는 [흐림수르사르]로 만들어낸 얼음벽 안에 갇혀서 깨고 나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갇힌 이는 페룬의 직계제자로, 학교 괴담 작전 때 폐교를 봉쇄했던 이 중 하나라 나와도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였다.

정민의 말이 머릿속에서 스쳤다.

-······더 강해지셨군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일을 겪고 헤쳐나온 나는 강해져 있었다.

“그만!”

발렌시아가 외쳤다.

강철계 마법들이 쏟아지려다 내 빙결계 마법에 잡아먹힌 참상이 주변에 가득했다.

내 완승이자 압승이었다.

탐나서 미치겠다는 눈으로 나를 보던 발렌시아의 눈이 다른 마법사들에게로 향했을 때는 타오르는 분노를 담고 있었다.

그녀가 마법사들에게 말했다.

“한 명을 못 이기는데 다른 마탑들을 무슨 수로 이길 거야! 직계들 다 불러와. 나보다 항렬이 높든 말든 상관없다. 못 오겠다고 하면 탑주님이 부른다고 해. 탑주님이 이번 교류전만큼은 내게 모든 권한 다 주셨으니까.”

평소에는 다른 마법사들 앞에서도 테오릭 경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던 발렌시아가 꼬박꼬박 탑주님이라는 경칭을 하는 걸 보면 화가 나도 보통 화가 난 게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검까지 썼으면 10분이 아니라 2분 안쪽으로 끊을 수 있었다. 어쩌면 1분 안으로도.’라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를 보는 다른 페룬 마법사들의 눈에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사용하는 빙결계 마법이 훈련에 도움이 되겠냐고 하던 놈들도 눈을 저따위로 뜨고 있네.

안 되겠다.

너흰 좀 더 굴러야겠어.

발렌시아에게 말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프로이데 마탑에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프로이데의 빙결계 마법을 직접 견식한 적은 없지만 거기는 조직력이랑 결속력 하나는 대단했던 것 같은데 페룬은 거기에 비하면 좀······.”

“조옴······?”

발렌시아의 미간과 눈썹이 꿈틀댔다.

그녀 등 뒤에서 나를 보고 있는 마법사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나를 향해 양손을 대고 싹싹 빌고 있는 마법사도 있고, 혼잣말로 제발······제발······을 반복하는 마법사도 있었다.

어림도 없다, 이 녀석들아.

“오합지졸이네요. 지금도 봐요. 발렌시아 씨가 다른 직계들 데려오라고 했는데 다들 눈치만 보고 있네요.”

마법사 무리 중 누군가가 다급히 외쳤다.

“이, 이미 디바이스로 연락을 드렸······.”

“지금 연락이 안 되는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요? 씻느라 디바이스를 벗어두고 계신다거나 탑주님과 같이 계셔서 매너모드로 전환해두셨다거나? 아~ 나 같으면 진작 뛰어갔겠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법사 몇이 우르르 뛰어갔으나 거친 숨이 섞인 발렌시아의 목소리가 체육관을 휘어잡았다.

“동작 그만. 양팔 간격 좌우로 나란히.”

마법사들이 정렬하자 팔의 파츠에서 김을 뿜어내기 시작한 발렌시아가 짧게 말했다.

“뻗쳐.”

마법사들의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체육관 바닥에 엎드려 뻗쳤다.

파츠가 열리며 내부에 있던 액체들이 흘러나와 발렌시아의 양팔 한가득 그려진 마법술식과 마법진을 메우며 공명했다.

그러자 액체들이 아주 얇고 견고해 보이는 금속실이 되어 순식간에 발렌시아의 전신을 휘감았다.

당장이라도 툭 치면 어디 한 군데 부러질 것 같던 발렌시아는 이제 머리칼 하나까지 금속실 코팅이 끝난 거구가 되어 있었다.

테오릭 경보다도 머리 하나 정도 더 클 것 같았다.

여분의 실이 꾸물대며 그녀의 손으로 몰려가더니 빠따형태로 완성됐다.

물론, 그 빠따는 그녀의 커진 체구에 맞춘 형태이기 때문에 얼핏 봐서는 건축자재인 H빔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는 크기였다.

저래서 철의 여인이구만.

금속성 소리가 섞여 더 무거워진 발렌시아의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너희는 썩어 빠졌다. 같은 페룬의 전투마법사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지경이다. 정신 무장부터 시작한다.”

이후, 무서울 정도로 일정한 강도로 휘둘러지는 발렌시아의 쇠빠따질이 시작됐다.

좀 너무했나 싶기도 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생각은 금방 지워버렸다.

자존심이 걸린 전쟁을 하러 간다는데 저 정도 정신 무장은 필요하지 않겠나 싶어서.

돌아가는 꼴을 보니 남은 기간 발렌시아가 밖으로 나돌 일은 없는 것 같아 그저 기쁠 뿐이었다.

#

“제자분들 눈빛부터 달라졌다고 테오릭 경이 아주 만족해하세요. 그걸 왜 사장님 덕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내게서 열정과 진취를 얻어간 거지. 향기 나는 사람 주위에 있으면 자기도 향기가 묻어나는 것처럼 말이야.”

“사장님이 열정을 보이는 건 소파에 누울 때밖에 없는 것 같던데요. 진취적일 때는 퇴근하고 방에 뛰어 올라가실 때?”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는데, 앨리스가 먼저였다.

“페룬 마탑에서 교류전 VIP석 티켓을 보내왔어요. 사장님, 저, 신시아 언니, 수련 언니까지 네 자리요. 가실 거죠? 이거 요즘 전 네오-서울의 화제라고요. 구할 수도 없는 표예요.”

“신시아랑 이수련은 뭐라고 하는데? 요새 바쁜 것 같던데.”

“사장님 간다고 하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온대요.”

“나는 간다고 안 했는데?”

“근데 저는 사장님이 갈 거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가야 해요. 어차피 사장님 할 일없잖아요.”

“참나. 웃긴다. 내가 그날 할 일이 없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사장님 스케줄 관리, 제가 하니까요.”

그건 그렇지.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교류전 당일, 나는 바이크 뒤에 앨리스를 태우고 네오-서울 동대문 에어리어로 향했다.

교류전은 동대문 종합운동장을 개조한 특수 필드에서 펼쳐질 예정이었다.

경기장에 다가가자,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네오-서울. 돔다운 돔을 가지고 있구나!”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이곳의 동대문 종합운동장은 초거대 돔이었다.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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