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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94화 (195/258)

194.

“오메가 씨?” / “오메가 청년?”

정민과 발렌시아가 나를 보고 동시에 뱉은 말이었다.

먼저 정민에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의뢰 수행 중이라 길게 얘기를 나눌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그리고 바로 발렌시아에게.

“여기 계신다는 말을 듣고 바로 왔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테니스장 펜스에 처박힌 누군가를 향해.

“그런데 두 분은 저기 불꽃 개······랑 어떤 관계이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혹시 지인? 아니면 친구?”

“모른다. 갑자기 튀어나왔어.”

발렌시아의 즉답에 이어 정민도 내게 말했다.

“처음 봤어요. 불칸의 어쩌고 하던데.”

마법사일 것 같긴 했다.

차라리 다행이다.

이성적 접근에서 발렌시아를 지키라는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면 테오릭 경이 어떻게 해주지 않을까.

마법사 사회의 인적 네트워크를 믿어보자.

그리고 둘에게 말했다.

“두 분은 하던 거 계속하세요. 저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테니스장의 그늘 아래 벤치로 가서 앉았다.

애초에 내가 저 불꽃 개를 차버린 이유도 기껏 벌어지는 싸움판을 봉합하려 해서였다.

화염계 마법사면 불을 지펴도 모자랄 판에 왜 진화하려고 나서는 거야.

이런 진귀한 구경을 어디 가서 할 수 있겠냐고.

프로이데 마탑의 다른 마법사들이 나를 흘끔흘끔 살피며 주위에서 멀어졌다.

그때, 확장되던 팔의 파츠를 원래대로 되돌린 발렌시아가 정민을 향해 말했다.

“흥이 식었다.”

뭐야, 이 파장 분위기.

“흥이 나긴 했나? 이런 속 뻔히 보이는 도발에 흔들릴 정도로 프로이데는 약하지 않아.”

“내실이 부족한 것들이 허장성세를 부리곤 하지.”

대체 저 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사이 발렌시아는 정민을 비롯한 다른 프로이데 마법사들에게 선전포고했다.

“이번 교류전에서 페룬과 프로이데의 격차를 보여주겠다.”

“글쎄. 그 오만함까지 얼려 부숴버릴 건데?”

“부디 말만 앞선 것이 아니길 바라지.”

“나 역시.”

그 말을 끝으로 발렌시아가 뒤돌아 걸어 나갔다.

어?

끝?

나도 따라가야 하나?

김 팍 샜다.

이게 다 저 불꽃 개새끼 때문이다.

가만 놔둬도 활활 타오를 싸움에 왜 재를 뿌리냐, 이거야.

한 번 더 걷어차 주려고 놈이 처박힌 펜스 쪽을 바라봤더니 마침 화염 줄기가 되어 펜스 너머 하늘로 사라져 버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운은 좋은 놈이네.”

앉아 있던 벤치에서 일어섰다.

프로이데 마법사들 사이를 뚫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정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에 뵀을 때보다······더 강해지셨군요.”

뒤로 돌아보며 답했다.

시선을 아래로 돌려 내 몸을 살펴보면서.

“그게 보이나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옷이 바뀐 것과 칼자루가 하나 더 있다는 것 말고 내 외형은 계룡권역에서 있었던 흡혈귀 회합에 참여했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다른 마법사들 몇몇도 정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온갖 다양한 이능을 가진 이들이 보기에 나는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일 테니.

정민이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갈무리하려 해도 무의식중에 흘리는 게 있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워 그저 분위기라고 갈음해 표현할 뿐이죠.”

정민을 향해 목례하고 저 멀리 보이는 발렌시아를 향해 걸음을 빠르게 했다.

그러면서 정민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분위기라.”

그것도 아무나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상대의 파장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테니스장의 멀쩡한 펜스 너머로 정민의 호통이 들렸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훈련 시작할 준비해!”

그녀의 스승인 셀린느와 대면했을 때의 경험으로 반추하건대 정민은 절대 약하지 않다.

오히려 강자의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정도일 것이다.

“못 봐서 아쉽네.”

발렌시아와 정민 간의 기싸움은 제대로 타오르기도 전에 꺼져버렸지만, 교류전 본편에 대한 기대감이 강하게 피어오르기도 했다.

과연 페룬 마탑이 저 두 명의 마법사들 사이에서 어떤 존재감을 보일 수 있을지도 궁금해지기도 했고.

발걸음을 빨리해서 발렌시아의 옆에 붙고 말했다.

“별생각 없었는데요. 교류전, 재밌을 것 같네요.”

“동감이다. 오메가 청년.”

발렌시아의 옆모습이 웃고 있었다.

재료를 앞에 놓고 어떻게 요리할지 상상하며 오는 즐거움을 참지 못하는 요리사가 지을 법한 웃음이었다.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마탑으로 가야지.”

“일정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오전 훈련, 또 훈련, 점심 식사, 오후 훈련, 지옥 훈련, 저녁 식사, 야간 훈련, 회복훈련.”

“······회복훈련은 뭐죠?”

“수면.”

“그러면 그냥 수면이라고······.”

“단어는 의도를 담는다! 자는 시간마저 회복하는 훈련인 거야!”

어디로 많이 나다닐 일은 없어서 좋겠다는 생각으로 애써 긍정 회로를 돌렸다.

어제 보니 테오릭 경의 걱정이 기우는 아니었던 것인지 페룬 마탑의 마법사 중 몇몇이 발렌시아에게 순수하지만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으나 내가 나설 일이 많지는 않았다.

자신보다 항렬이 낮은 마법사들이 접근하면 어딜 감히 훈련 중에 사저(師姐:같은 스승을 모시는 이 중 자신보다 입문 시기가 빠른 여성)에게 함부로 말을 거냐며, 자신이 막내일 때는 상상도 못 한 일이라며, 페룬의 기강이 무너졌다면서 발렌시아가 쇠빠따로 패버렸기 때문이다.

여러 꼰대를 봤지만, 발렌시아는 꼰대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어쩌면, 아니 아마도 템페시르나 이상일 것 같았다.

테오릭 경과 여다함이 내 얘기를 미리 해두어서 나를 존중해준다는 게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리고 발레시아의 무자비한 쇠빠따질을 본 항렬 높은 마법사들도 접근을 포기하는 눈치였다.

가끔 눈치 없는 마법사들이 훈련 사이 잠깐 쉬는 시간에 발렌시아에게 접근하는 것 같거든 내가 나서서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로 막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나가. 뒤지기 싫으면.”

그럼 마법사들은 번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주위를 살피다 눈치를 보고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고맙다······.”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까지 쥐어짜는 것 같은 훈련 일정에 나도 함께하는 것만 아니라면 꿀의뢰도 이런 꿀의뢰가 없었을 것이다.

호텔 로비를 벗어나기 전, 발렌시아에게 말했다.

“저는 주차장에 좀······.”

바이크를 끌고 밖으로 나오자 발렌시아가 팔짱을 낀 채로 바이크를 살펴봤다.

“좋은 바이크네.”

“하하. 알아보시는군요.”

“자율 주행 기능은 있겠지?”

뭔가 불안해졌다.

“있긴······있죠.”

“대상 설정 및 트래킹 기능은?”

“있······을 걸요.”

“오메가 청년의 뒤를 따라오도록 트래킹 설정하고 내려라.”

“왜······죠?”

“마탑까지 달려서 복귀할 거니까.”

“발렌시아 씨만 달리세요. 저는 바이크로 따라갈 테니까.”

“길을 모른다. 오메가 청년이 옆에서 알려줘야 해.”

“그럼 올 때는 어떻게 왔는데요!”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

“강력한 직감과 분노가 나를 여기로 이끌었다.”

씨알도 안 먹힐 황당할 논리에 말이 나오지 않아서 턱을 떨어트린 채 바라보고 있었더니 발렌시아가 중얼거렸다.

“가이드가 엉망이네. 엉망이야.”

결국 앨리스에게 부탁해 자율주행모드로 전환해달라고 했다.

-일대의 교통 데이터 수신 중. 완료했어요. 사장님 뒤따르도록 설정도 했고요.

“너 목소리가 되게 신난 것 같다?”

-그럴······푸흡······리가요.

바이크에서 내려 헬멧을 벗어 시트 아래에 넣으니 발렌시아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제 보니 체력이 나쁘지 않더군, 오메가 청년! 낙오하면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가려고 했는데! 자! 마탑까지 휴식 없이 가자고!”

발렌시아가 힘차게 뛰어나갔다.

바이크가 떠오르더니 진행 방향을 보여주는 듯이 라이트를 내 발 앞쪽으로 쐈다.

“하지 마라.”

-······.

“연결 끊긴 척도 하지 말고.”

라이트가 꺼졌다.

저 앞으로 치고 나간 발렌시아가 몸을 뒤로 돌려 외쳤다.

“이렇게 느려서 되겠나!”

나도 달리기 시작했다.

[하체 강화]

[억누르는 숨]

[뛰노는 심장]

[기계적 움직임]

순식간에 발렌시아의 곁을 지나치며 말했다.

“어차피 하는 거라면 후딱 끝내죠.”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즐겨야지.

즐기고 말겠다.

뒤쪽에서 발렌시아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그녀의 발소리와 함께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훌륭하다! 할아버지가 괜히 극찬하신 게 아니었어! 다른 마법사들이 오메가 청년 절반만 닮았으면 페룬의 이름이 전 세계를 울렸을 텐데!”

바이크에서도 빠라바라바라밤하는 소리가 났다.

“그것도 하지 마.”

-······.

#

불칸 마탑주, 박운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보고받고 있었다.

플라워즈 호텔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보고였다.

“스승님께서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직계제자 중 가장 서열이 높은 마법사인 준경의 보고를 받는 박운의 얼굴은 시큰둥했다.

“너희끼리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프로이데의 비공개 훈련장을 염탐했고, 살리베의 순번일 때 들켰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살리베는 자신이 나선 것이 아니라 들켰다고 보고했다.

누군지 모를 이에게 걷어차여 나동그라진 것도 모자라 기절까지 했다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준경은 속으로 살리베의 욕을 하며 긴장했다.

드워프인 준경의 튼튼한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박운은 화염계 마법사답지 않게 냉철하고 진중하기로 유명하지만, 그 말이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에 조용하기 때문에 한번 화를 낼 때 정말 무섭다는 것을 제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박운이 손을 들어 이마에 늘어진 머리칼 몇 올을 다시 뒤로 넘겼다.

스승의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준경에게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박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준경이 자기 귀를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그럴 수도 있지.”

“······예?”

“너희도 다 잘해보겠다고 그런 거 아니냐. 조금 과했을 뿐이지.”

“그······그렇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박운이 뒤로 몇 걸음 걸었다.

커다란 창 너머로 WSS 송도 국제지구의 전경이 펼쳐졌다.

그대로 박운이 입을 열었다.

“경아.”

“예.”

“나는 네가 발렌시아나 정민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불칸이 페룬이나 프로이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맞습니다.”

“그러니 네가 잘할 거라고 믿는다. 나가봐도 좋다.”

준경이 나가고 박운이 혼잣말했다.

“나이누안이 아직 내 아래 있었다면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을 건데.”

그때, 유리창 하나에 UI가 뜨며 비인가 통신 요청이 있다는 표시가 생겼다.

박운이 손을 대자 매혹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죠?

“최선을 다하고 있소이다.”

-최선으로는 힘들어요. 최고를 바라거든요.

“그쪽이야말로 실망하는 일 없게 하시오.”

-WSS 이웃끼리 이렇게 믿음이 없어서야.

“약속은 지켜야 할 거요. 우리도 큰 리스크를 지고 하는 것이니.”

-걱정도 많으셔. 우리에게 협조만 하면 불칸을 세계 최고의 마탑으로 만드는 건 문제도 아니라니까.

“교류전에서 확인하면 될 거요.”

-기대하죠.

여성의 목소리 중간중간 숨소리가 들렸다.

쉬잇쉬잇.

마치 뱀이 혀를 냈다 뺐다 하는 소리와 흡사했다.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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