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눈을 뜨니 낯익은 천장이다.
내방 침대 위라는 소리다.
몸을 일으키는데, 어제 페룬 마탑의 회식에서 거의 강제로 먹어야 했던 고기들이 아직도 소화되지 않은 채 위장에 남아있는 것이 더부룩하게 느껴졌다.
남산을 그렇게나 뛰어다녔음에도 근육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스킬의 도움도 있었지만, 청운 선생님의 방문 이후로 신체의 자연 회복력이 조금 좋아진 게 아닐까.
청운 선생님의 진료는 더럽게 아프다는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긴 하지만 리턴도 확실하긴 하다.
다만 이게 다행이냐 불행이냐를 따진다면 지금에 한정해서는 불행이라고 하고 싶다.
어제는 남산 등산로를 3회 주파했으니까 오늘은 남산에서 한강까지 뛴 다음 한강 공원에서 체력단련을 할 거라는 발렌시아의 엄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근육통이 심하거나 어디 한군데 파열됐으면 오늘은 못 하겠다고 말이라도 하겠지만 지금 나는 너무도 쌩쌩하다.
“하아······페룬 마탑에서 마포 에어리어 한강 공원까지 직선거리 4km던데 거길 왜 전력 주파하냐고······.”
지금도 대열 옆에서 쇠빠따를 든 채로 ‘뛰어! 뛰어! 마법은 체력에서 온다! 옆에 있는 놈이 쓰러질 것 같으면 옳다구나 하고 어깨에 들쳐 메고 뛰어! 중량 달고 뛰어!’ 하는 발렌시아의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 같다.
심지어 그 가녀린 몸으로 대열 앞과 뒤 할 것 없이 누비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정신병 걸리는 줄 알았다.
마법사 몇몇은 더웠는지 웃통까지 벗고 뛰는데 하나 같이 몸이 실전 압축 근육이다.
누가 이걸 마법사라고 보냐고.
심지어 발렌시아는 고기 파티가 끝난 후 이제부터 자기는 개인 웨이트를 해야 한다고 해서 거기까지 따라갔다가 퇴근했다.
집중해야 한다고 웨이트 중에는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하더라.
그때는 다행이다 싶었다.
쇠질까지 같이 하자고 할까 봐 무서웠다.
침대에서 벗어나 씻고 대충 옷을 주워 입고 내려가니 스냅샷이 와 있었다.
“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알고 계시면 좋을 것 같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뭔데.”
“지금 샴록과 나르시스가 공공 집행본부에 잡혀있는 건 알고 계시죠? 아, 고마워.”
내가 내려오기 전 미리 부탁했던 건지 스냅샷이 앨리스가 앞에 놓아주는 커피잔을 받아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내 꺼······는 있구나. 나도 고마워.”
내 앞에도 커피잔을 두고서 나를 한 번 흘끗 쳐다본 앨리스가 말했다.
“테오릭 경께서 어제의 경과를 보고받길 원하세요.”
“경과? 뭐 없는데? 죽어라 뛰고 죽어라 먹은 것밖에는······.”
“오늘 일 시작하기 전에 페룬 마탑으로 와서 얼굴 한 번 보고 가라는 말씀이겠죠.”
“가면 거기서부터 한강까지 뛰어야 할 텐데······.”
아침에는 다른 일이 있다고 하고 사무실에 있다가 대충 체력단련이 끝날 때쯤 슬그머니 한강 공원에 나타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계획이 꼬인다.
할아버지와 손녀가 아주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데에는 도가 텄다.
“의뢰니까 제대로 하세요. 지인이라고 대충 하다 끝낼 생각 말고.”
“내가 언제 대충한 적 있었냐······.”
말끝의 볼륨이 줄어들었다.
이번이 처음으로 대충하는 의뢰가 될지도 몰라······.
두 분 말씀 나누시라는 말을 끝으로 앨리스는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스냅샷이 말했다.
“발렌시아 씨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는 건 들었습니다.”
“여기서 그 얘기는 하지 말자고. 소화 안 된 고기가 울렁거리니까. 아까 뭐라고 했지? 샴록이랑 나르시스?”
“예. 둘 다 50년 형 이상 구형될 걸로 보이는데, 구형이 그 정도니까 실제 형량은 30년 정도가 되겠죠.”
“그렇구만.”
“다만 둘 다 트라이포드와 직간접적으로 접점이 있다 보니, 둘을 담당하고 있는 위타천 쪽에서는 형량을 대가로 한 사법 거래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의 정보를 얻어내겠다는 생각이긴 합니다.”
“둘의 몸값이 조금 오르겠는데? 지금 공공 집행자들 최대 관심사가 그쪽이잖아.”
“오메가 님은 안 그런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나는 내 일에 걸리적거리지만 않으면 별 관심 없어. 네가 봤을 때 나라는 사람이 네오-서울의 안전이니, 대의니, 정의니 하는 큰 뜻을 품을 사람 같아 보이냐?”
스냅샷은 즉답했다.
“아니죠.”
“그래도 고민 정도는 해라. 이 새끼―.”
욕 한마디를 하려는데, 스냅샷이 먼저였다.
“대의, 정의하는 건 신경 안 써도 의리는 있으시죠. 그거면 된 거 아니겠습니까.”
“······맞아. 내가 하려던 말이 그거였어. 하려던 말이나 계속해봐.”
“계속해서 둘의 증언을 확보 중인데, 진위 확인은 어렵지만 나르시스 쪽에서 스펙터를 만났다는 말이 나왔답니다.”
“스펙터? 위타천이 열이 좀 올랐겠는데?”
“네?”
스펙터가 공공 집행본부에 잡혀들어갔다가 탈출한 건 초극비 사실이다.
그 담당이 위타천이였던 것은 더더욱 초초극비 사실이고.
얼버무려야 했다.
“어······위타천은 정의감이 강하니까. 네오-서울에 그런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돌아다니면 화날 만 하지.”
“위타천의 정의라······어렵군요. 여튼, 나르시스가 그들과 함께하지는 않아서 세부적이지는 않지만, 스펙터에게 들었다는 내용에 따르면 트라이포드의 거점이 WSS에 있고, 중화권 권역에서 계속해서 인적 물적 지원이 계속되고 있다는군요. 예상했던 것보다 규모가 꽤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네오-서울은 위험하니 잠깐 몸을 뺀 건가?”
“아무래도 그런 정황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네오-서울을 노리고 있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주 희박한 경우의 수이긴 하지만 여차하면······.”
스냅샷이 말한 마지막 말은, 앨리스의 패드에서 울리는 통신 알림 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되묻지는 않았다.
뜻도 의미도 알고 있지만, 너무도 허황한 말 같아서.
바닥을 보이는 커피잔을 들어 남아있는 커피를 훅하고 털어 넣은 스냅샷이 일어섰다.
“바쁜데 찾아온 것 같군요.”
따라 일어나서 문 앞까지 배웅했다.
“아니야. 평소엔 별로 안 바빠. 요새 좀 바쁜 거지.”
“그러신가요. 그럼 간만에 다른 카지노에 한 번 가셔서 좀 놀아주시는 건······.”
“카지노는 어차피 루트의 자금 세탁용 아니야? 그렇게 경영에 애쓸 필요 있나?”
“다른 지배인들이랑 모이면 이번에 매출이 얼마 나왔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어떻게 참습니까.”
“그건 그렇겠네. 그래, 시간 비면 한 번 시도는 해볼게.”
“감사합니다. 가보겠습니다.”
문을 닫자 앨리스가 패드를 잡고 쪼르르 다가왔다.
“테오릭 경께 연락 왔어요. 경과보고는 내일 해도 좋대요.”
“와! 그러면 여기 있다가 한강으로······.”
“발렌시아 씨 일정이 바뀌었으니까 그쪽으로 바로 가달라고 하네요.”
“일정이 뭔데.”
“플라워즈 호텔로 간대요.”
“플라워즈 호텔? 위타천이라 가연 씨가 약혼 발표했던 거기?”
“네. 신시아 언니가 사장님한테 뽀뽀했던 거기요.”
커피 마시다 뿜을 뻔했다.
쟤는 그걸 왜 굳이 그렇게 기억하는지는 모르겠다.
진짜 머리 한 번 열어봐야 한다니까.
최대한 평상심을 가장했다.
“갑자기 거길 왜 가?”
“프로이데 마탑의 원정단이 거기 묵고 있어요. 호텔의 협조를 얻어서 호텔 테니스장을 비공개 연습 장소로 쓰고 있대요.”
“프로이데 돈 많나 보다? 거기 마탑주는 구두쇠 수전노 상이었는데.”
“계룡 권역 자연주의자들과 협력해서 만드는 영약들의 성과가 나오고 있나 봐요. 평이 좋아요. 비싼 값 이상을 한다던가요. 그리고 아무리 아낀다 해도 아낄 게 따로 있지 네오-서울까지 제자들을 보내는데 어디 아무 여인숙에나 묵게 할 순 없잖아요. 이게 다 홍보 기회인데. 안 그래도 이번 교류전에 대한 기대가 뜨거워요. 정민과 발렌시아라는 출중한 마법사의 참전에 더불어서 신규로 참여하는 불칸 마탑까지. 중계권 쟁탈전이 엄청 치열했다고 들었어요.”
스포츠 같은 느낌이구만.
앨리스가 계속해서 종알거렸다.
“그런데 교류전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발렌시아 씨가 페룬 마탑의 훈련도 뒤로하고 플라워즈 호텔로 굳이 찾아간다는 건 아마도―.”
앨리스의 말을 끝까지 안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기선제압이구만.”
“기싸움이기도 하죠.”
내가 일어서자 앨리스가 의문 섞인 목소리를 던졌다.
“가시게요? 엄연히 따지면 이건 의뢰 내용이었던 가이드는 아니잖아요. 어떻게 하실지 여쭤보려고 말한 건데.”
“싸움 구경은 못 참지. 그것도 메인 메뉴 전의 애피타이저는 더더욱. 그리고 좀 궁금하기도 해.”
“뭐가요?”
“병약 빠따녀가 대체 어떻게 싸우길래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하는 거.”
제정신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앨리스에게 말했다.
“바이크 시동 좀 걸어줘.”
“이미 해뒀어요.”
“굿. 갔다 온다.”
#
살리베는 개 수인 셰퍼드 종이다.
화염계 마탑인 불칸 소속 마법사이면서, 마탑주인 박운의 직계제자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 플라워즈 호텔 로비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눈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신문에 있는 글자는 하나도 읽고 있지 않았다.
살리베에게 주어진 임무는 프로이데 마탑 원정단의 전력 파악.
프로이데의 인원들이 오전 훈련을 위해 호텔 뒤편의 테니스장으로 나서면 멀리서나마 눈에 담아둘 생각이었다.
스승인 박운이 시킨 건 아니지만, 새로 참전하는 자신들에게 이 정도 어드밴티지는 있어도 되지 않겠냐는 직계제자들의 의기투합이 만들어낸 촌극이었다.
스승님이 알게 되셔도 그냥 모른 척 넘어가실 거다, 다른 마탑에서는 이미 우리 마탑의 정보를 빼내고 있다 등등의 논리로 이미 합리화를 마친 상태이기도 했다.
놀랍게도 그들의 합리화를 위한 논리는 모두 맞아떨어졌다.
박운은 제자들이 하는 짓을 알면서도 놔두고 있었다.
프로이데, 페룬, 불칸 세 마탑이 교류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어떻게든 상대 전력을 알아내려고 애쓰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민을 선두로 한 프로이데 원정단이 조식을 마치고 로비를 통과해 테니스장으로 향했다.
살리베는 조용히 일어나 산책로를 걸었다.
테니스장이 보이는 코스였다.
그때, 테니스장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났다.
살리베가 놀라움을 참지 못하고 혼잣말을 했다.
“페룬의 발렌시아? 여길 단신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살리베가 천천히 테니스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정민과 발렌시아였다.
“여긴 우리가 사용하기로 되어 있을 건데.”
“나도 알아. 정확히 테.니.스.장. 그래서 안으로 안 들어가잖아. 설마 주변을 걷는 것도 못 하게 하려고? 이거 보통 갑질이 아닌데?”
“여전히 유치하군, 발렌시아.”
“마음대로 생각해. 그런데 하나만 묻지. 이렇게 우르르 몰려나와 한 사람을 압박하는 건 유치한 게 아닌가?”
살리베는 고민했다.
여기서 빠질 것인가, 모습을 드러내서 중재할 것인가.
‘아무리 비공개 훈련이라지만 이 자리에 발렌시아가 나타난 이상 이 얘기는 어떻게든 퍼진다. 그사이에 내 이름이 있다면?’
발렌시아는 테오릭 경의 손녀이자 여다함 이상의 강자로 평가받는 강철계 마법사이고 정민은 프로이데 마탑주인 셀린느의 다른 직계제자들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차기 마탑주로 거론될 정도로 입지가 탄탄한 빙결계 마법사다.
그에 비해 살리베는 박운의 직계제자이긴 하지만 앞선 두 명에 비하면 이름값이 모자란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두 마법사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면 불칸 마탑 내에서 자신의 위상도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그가 수인을 맺고 마나를 밀어 보내자 살리베의 몸이 한줄기 화염이 되어 치솟았다.
하늘을 가로지른 화염이 닿은 곳은 정민과 발렌시아가 서로를 죽일 듯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지점.
하반신은 여전히 불꽃인 채로, 상반신만 원래 모습을 보인 살리베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렇게 모습을 보여 실례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중재가 필요한 것 같아 부득이하게 나섰습니다. 두 분 다 진정하시죠.”
입과 코에서 하얀 숨이 쏟아져 나오는 정민과 금속 파츠가 벌어지기 시작한 틈으로 액체의 순환이 시작된 발렌시아가 동시에 말했다.
“뭐 하는 놈이냐.”
살리베는 정중하게 말했다.
“저는 말입니다. 불칸의 살리ㅂ······.”
그때, 저 멀리 테니스장으로 이어진 도로의 초입에서 큰 소리가 났다.
“안 돼!”
모두가 고개를 돌릴 때,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미 가까이 다가온 뒤였다.
오메가였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오메가는 그대로 몸을 띄워 [플라잉 니킥]을 이용해 무릎으로 살리베의 가슴팍을 찍어버렸다.
불의의 일격을 맞은 살리베는 순식간에 테니스장을 가로질러 반대편 펜스에 처박혔다.
멋있어 보이기 위해 불꽃 상태로 유지하고 있었던 하반신은 어느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나동그라진 살리베를 향해 오메가가 말했다.
“이성적 접근? 치근덕대는 놈? 컷트!”
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