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92화 (193/258)

192.

“타라!”

사무실 건물 앞, 몇 번이고 본 적 있는 에어로 리무진의 뒤쪽의 열린 차창 너머로 테오릭 경이 내게 말했다.

차를 보낼 거라고만 전해 들었기에 차에 올라타 자리를 잡자마자 물었다.

“직접 오시는 건 힘들 거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문이 닫힌 리무진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테오릭 경이 답했다.

“그랬지. 그런데 스케쥴 조정 좀 했다. 오랜만에 손녀가 네오-서울로 오는데 할애비가 마중 정도는 가야지 싶어서.”

테오릭 경의 손녀는 발렌시아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 강철계 마법사였다.

앨리스와 스냅샷의 도움을 빌려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는데, 역시나 페룬 마탑의 마법사이자 테오릭 경의 손녀가 아니랄까 봐 이래저래 범상치는 않은 인물이었다.

발렌시아의 나이는 30대 초반.

나보다 조금 많은 정도다.

페룬 마탑의 실질적 후계자로 여겨지는 상해 지부의 여다함과 많이 비교되곤 했는데, 강철계 마법의 경지나 응용력은 발렌시아가 여다함보다 더 나았지만 계속 전투마법사로 남아있기를 원해서 후계 경쟁을 포기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심지어 본인이 후계 구도를 포기했음을 명백히 밝혔음에도 계속해서 언젠가는 발렌시아가 페룬 마탑주가 될 것이라 믿는 마법사들이 여전히 있었단다.

그런 얘기는 여다함이 상해 지부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나는 여다함이 미사일을 닥치는 대로 쏴대는 것과 동시에 궤도를 틀어 주변 일대를 작살내버리는 걸 바로 옆자리에서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여다함은 컨테이너를 들어 올려 다른 마탑의 건물에 박아버리기도 했다는데 그런 여다함 이상이라니 솔직히 부풀려진 소문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내 옆에 앉아 있는 풍채 좋은 노인네를 보니 그런 생각도 많이 사라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 할배 핏줄이라면 그래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즉, 발렌시아는 관리자가 되기 싫어 일부러 좋은 자리를 포기하고 현장에 남은 실력 좋은 필드 플레이어라는 소리였다.

심지어 용병들 사이에서 불리는 은어나 코드명은 철의 여인이라고.

현직 PMC 요원인 펠루다와 용병인 닌닌에게 물었더니 철의 여인이 네오-서울에 오냐고 놀라기까지 했다.

목표 지점을 주면 같은 페룬 마탑의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소수 팀으로 침투해 일대를 초토화해버린다는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각 권역의 군부, 특히나 네오-서울 수도방위사령부의 열렬한 러브콜을 받을 정도라고 하니 실력 하나는 인정받았음이 확실했다.

강동 에어리어 비행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테오릭 경과 나는 그간의 안부를 전하며 서로 궁금했던 것을 묻고 답하기 바빴다.

그동안 짬이 나면 앨리스를 통해, 아니면 직접 통신을 통해 연락하긴 했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한 것은 야스민 공과 헤지르 대주교 중 누가 벡을 맡을지 상의하는 자리가 마지막이었으니 그동안 참 이런저런 일이 많이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테오릭 경의 눈길이 내 허리춤에 닿았다.

“검이 두 자루다? 그것도 똑같이 생긴 걸로? 어디서 났대?”

“아하하······그게······뭐 이런저런 사정으로 손에 들어왔어요.”

야타가라스와 한판 벌였다는 것은 극비사항이다.

공공 집행본부 내에서도 공공 집행자들에게만 알려져 있을 정도로.

그래서 그런지 나름대로 네오-서울에서 영향력을 가진 테오릭 경도 어떻게 내 허리춤에 있는 칼자루가 두 개가 된 건지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괜찮은 거냐?”

“네?”

아닌가?

내막을 알고 있는 건가?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어깨 주변에 힘이 들어갔다.

“몸의 중심이라던지 그런 거. 마법사인 우리도 밸런스 문제 때문에 함부로 장비를 늘리거나 줄이지 않는데 너는 직접 뛰어다니는 일이 많으니 더욱 와 닿을 것 아니냐.”

다행이다.

다른 문제였다.

재빨리 답했다.

“익숙해져야죠.”

“그 정도로 검을 두 개 들고 다니는 게 중요한 거냐?”

“중요하다고······할 수 있죠.”

그 첫 번째 이유는 당연히 존속살해가 다른 사람의 손에 있을 때의 위험성을 없애기 위해 항상 몸에 붙이고 다니는 것이었다.

다음 이유는 기존의 스킬들과 연계할 방법을 탐구하기 위함이었다.

존속살해는 분명 좋은 검이다.

다만 내가 지닌 검이 위올란트가 만져준 이후 비약적으로 좋아져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것뿐.

비록 배터리가 부족해지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위올란트가 만져주기 전에도 기존의 검을 들고 잘 싸웠다는 걸 생각하면 존속살해 역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쌍검쪽 스킬을 사용해야 할 것 같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검 두 자루를 사용하는 스킬도 익히고 있긴 했지만, 주력으로 사용하는 스킬들에 비하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이.

딥스페이스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두 자루 검을 사용하는 방법을 직접 익혀야 할 수도 있었다.

그것도 위력 차이가 명백히 보이는 검 두 자루를 활용하는 방법이라.

돌이 깔린 가시밭길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야타가라스를 꺾고 얻어낸 전리품을 썩힐 마음은 또 없었다.

한 손에 푸르다 못해 새하얀 광자 검날, 다른 손에 시커먼 광자 검날.

이걸 어떻게 참냐고.

수많은 비행기와 수송기, 헬기가 뜨고 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슬슬 비행장에 다 와 간다는 신호였다.

테오릭 경은 여태 내 무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총기 탄약이나 포탄 분야이긴 하지만 페룬 마탑이 나름대로 방산 쪽에도 한 다리 걸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르파고스 상무가 네 검처럼 생긴 걸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모양만 비슷하게 내고 위력은 따라 할 수가 없다고 한탄하던데, 정말 괜찮은 거냐?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하는 건 다 개소리야. 장인일수록 도구를 더 깐깐하게 따진다고.”

야타가라스가 쓰던 검이라고 하면 테오릭 경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몹시도 궁금했지만 그런 말을 하는 건 틀림없이 또 다른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했기에 얼버무리고 말았다.

“나쁘지 않아요. 저 하기 나름이겠죠.”

“어쭈······머리 좀 컸다고 반항이냐? 요새 이름 좀 날린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처음 뵀을 때나 지금이나 비슷해요.”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던 테오릭 경이 결국 내 말에 수긍했다.

“그래. 그때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당돌했고 지금도 황당할 정도로 거침없지.”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지금 그런 거 말이다.”

이제 내가 물을 차례였다.

“제가 알고 있기로 손녀분은 전장에 주로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들어오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제 여기가 전장이 될 테니까.”

뭐지?

트라이포드에 대한 건 나와 야타가라스의 전투 이상의 극비사항이다.

자칫 흘러나갔다간 사회 전방위에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스민 공이 바이오 섹터를 박살 내놓았음에도 그 일에 도움을 주었던 흡혈귀들은 트라이포드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윤리 강령을 위반한 연구소 하나 때문에 불어닥친 폭풍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즉, 현재 트라이포드의 위험한 행보를 주시하고 있는 곳은 공공 집행자나 아니면 야스민 공정도 되는, 진짜 거물들 뿐이었다.

나도 얽히는 일만 없었으면 그쪽에 신경 쓸 일도 없었을 거다.

그리고 아무리 야스민 공과 테오릭 경이 절친한 사이라고 해도 둘 사이의 대화에서 트라이포드 얘기가 나왔을 것 같지는 않았다.

테오릭 경도 나름의 레이더나 듣는 귀가 있다는 걸까?

하지만 테오릭 경의 이어지는 말은 내 걱정이 기우였음을 알게 해주었다.

“멍청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모르고 있나 본데. 올해는 교류전이 있는 해······잠깐, 설마 그 망할 기억 상실 때문에 교류전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어······모르겠는데요.”

“이런 젠장. 그 기억 상실은 다른 사람들 귀찮게 하는데 지독할 정도로 타고난 재주를 가졌어.”

또 내가 모르는 이쪽 세계의 상식인가 보다.

아마 너무나 당연해서 내게 지적하거나 알려줄 필요도 없었던 그런 상식.

비행장이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된 테오릭 경의 설명은 차량이 주차를 마치고 우리가 내려서 비행장 안으로 들어가 퍼스트석 전용 입국장에서 발렌시아를 기다릴 때까지 계속됐다.

테오릭 경의 아주 장황한 얘기를 정리하면 이랬다.

“그러니까, 네오-서울 페룬 마탑의 마법사들과 계룡권역 프로이데 마탑의 마법사들이 2년이나 3년에 한 번 상호 교류한다는 거네요.”

“중요한 걸 빼먹었군. 내가 프로이데 마탑에 가서 건물 골조를 틀어버려서 화가 잔뜩 난 셀린느 그 마귀할멈이 제발 이런 방식으로라도 설욕할 수 있게 기회를 달라며 애걸복걸해서 시작되었다는, 이 교류전의 유래 말이야.”

아마도 프로이데 마탑주인 셀린느에게 물어보면 조금 다른 대답이 나올 것 같지만 애석하게도 당장 자리에 있질 않으니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건 그렇다고 쳐요. 그리고 상호 교류지만 실은······.”

“‘죽지는 않는’ 전쟁이지. 부상자가 무지 많이 나오거든. 물론 역대 전적은 우리가 압도적이긴 해.”

“그럼 손녀분은 매번 교류전 때마다 들어 오셨겠네요.”

“아니. 전장만 한 긴장감이 없다고 발렌시아는 교류전을 별로 안 좋아해. 그런데 이번에 프로이데 마탑의 원정단장이 셀린느의 직계 제자 중 하나라는 말을 듣고 오겠다고 하더라고. 이름이 뭐더라. 정민?”

흡혈귀 회합 때 본 적 있었다.

신시아에게 신나게 욕을 얻어먹던 여자 마법사다.

나이만 많았다면 차기 프로이데 마탑주로 고려될 정도로 실력이 좋다던가.

스무 살을 갓 넘어 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실제 나이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서로 감정이 별로 안 좋은가 보죠?”

“10년 정도 전이었나, 발렌시아가 아직 여물기 전 한창 까불던 시절에 그 정민이라는 아이에게 무안당한 적이 있을 거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거 말고 없는 것 같구나.”

“설욕전이군요.”

프랑크푸르트 권역 발 네오-서울 행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내용이 전광판에 떴다.

발렌시아가 탄 비행기였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그런데 왜 저를 가이드로 고르셨죠? 페룬 마탑에도 이 정도 일을 할 사람은 많을 텐데요.”

“제자 놈들은 안돼.”

왜 그러냐는 말을 하기 전, 테오릭 경이 먼저 말했다.

“분명 발렌시아 본인이 필드에만 남겠다고 선언했고 나도 여다함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지만 내 제자 놈 중에는 아직도 발렌시아와 결혼하면 페룬 마탑을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놈들이 있기 때문이야.”

“음······.”

“그러니까 너는 발렌시아를 향한 모든 이성적 접근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내 제자 놈들이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이 치근덕거리는 것도.”

“어차피 프로이데는 여성 마법사밖에 없잖아요.”

“여자가 어디에 홀랑 넘어가는지는 같은 여자가 더 잘 아는 법이다. 편견을 버려야 할 거야. 그리고 이번 교류전에는 처음으로 불칸이 합류하기도 하니까 더더욱. 불칸 그놈들은 마나를 마나하트가 아니라 다 아랫도리로 보내는지 사고를 많이 치곤 해.”

“어······저도 남자인데요.”

잠깐 나를 보던 테오릭 경이 껄껄거리면서 웃었다.

그러면서 내 등을 어찌나 세게 쳐대는지 바닥으로 처박힐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웃더니 내게 말했다.

“내가 왜 네게 부탁했겠냐. 야스민 공이 오메가 너를 거의 사위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감히 야스민 가의 영애를 두고 눈을 돌려? 너는 황당한 놈이지 멍청한 놈이 아니야. 그 정도 사리 분별은 하지 않겠어?”

괜한 반발심에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 아니냐고 반박하려는데, 출국장의 문이 열렸다.

고개를 쭉 빼고 두리번거리던 테오릭 경이 크게 외쳤다.

“발렌시아!”

그에 누군가 대답했다.

“할아버지!”

테오릭 경은 보고 있으면 가히 기골이 장대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의 체구였다.

그래서 발렌시아 역시 그에 걸맞은 거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직접 본 발렌시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동년배의 인간 여성보다 전체적인 선이 더 얇게 느껴지기도 했다.

굳이 묘사하자면 병약한 여인 정도랄까.

특이한 점이라면 금속 파츠가 부분부분 보이는 팔 전체에 마법술식과 마법진으로 보이는 문신이 가득하다는 것.

문신 곳곳을 타고 흐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들 때문에 왠지 모르게 발렌시아의 병약함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이나 계속되던 조손간의 해후가 끝나자 테오릭 경은 발렌시아에게 나를 소개해줬다.

“할아버지나 여다함 사형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다, 오메가 청년. 발렌시아다. 네오-서울은 오랜만이라 머무는 동안 잘 부탁하지.”

그리고 이어지는 발렌시아의 말에 나는 이 여인이 테오릭 경의 핏줄이라는 걸 250% 확신했다.

“마탑으로 가지. 비행기에 타고 오느라 뻐근해 죽겠어. 할아버지, 마탑에 다른 마법사들 있죠? 제 밑으로 놀고 있는 애들 다 마탑 앞마당으로 모이라고 좀 해주세요. 남산 등산로 3회 왕복 이후 고기 파티 갑니다. 안 나오는 놈들은 직접 빠따 칠 거라고도 전해주시고요.”

그리고 내게도 이렇게 말했다.

“함께하겠지? 오메가 청년?”

아······이제와서 의뢰 못 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미치겠네.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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