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91화 (192/258)

191.

“일찍 오셨나 봐요. 사장님이 좀 가서 열어주세요. 불 켤게요?”

스크린이 사르륵 소리를 내며 천장으로 빨려 들어가고, 어두웠던 사무실 조명이 밝아졌다.

고개 돌려 사무실 문을 바라보고 있는 내 뒤통수로 앨리스의 말이 들렸다.

“더 세부적인 내용이 있긴 한데, 요약하면······음······섣불리 판단하긴 이르지만 야타가라스에게 혐의점이 없는 것 같다고 하네요. 자기가 찾아내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 한 번 더 탐색해보겠다고 했어요. 노덴스 님과 나다 님도 포함해서요.”

“그래······.”

그때, 다시 한번 부드럽게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났다.

똑똑―

나는 벌떡 일어나서 문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지만, 걸음걸음마다 각오를 다져서, 문 앞에 섰을 때는 내 얼굴에 가득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힘을 잔뜩 주고 있는 탓에 발가락과 발등이 근질거렸으며 코로 빨아 들여진 들숨이 기도, 폐를 거쳐 전신에 퍼지는 느낌과 그 퍼졌던 숨들이 다시 가슴으로 끌어 올라와서 날숨으로 나가는 느낌도 생생했다.

‘눈싸움부터? 선빵필승이니까 주먹 먼저? 얼굴만 확인하고 문을 닫아버릴까? 패자는 꺼지라고 말해?’

머릿속에서 온갖 시뮬레이션이 구동 중인 상태로 문을 열었다.

야타가라스는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던 걸로 기억하니까, 고개를 살짝 위로 올리고 눈에 힘을 준 채로.

여차하면 검을 사용할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왼손은 자연스레 허리춤의 칼자루에 올려놓기도 하면서.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야타가라스의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목소리는 내 가슴팍과 허리 언저리에서 들려왔다.

인상 쓴 얼굴을 내려보니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라 나도 모르게 긴장이 탁 풀렸다.

“청운 선생님?”

광화문 에어리어 종합병원의 소년 명의, 화타의 후인, 히포크라테스의 전생, ‘THE 침술’, 청운이 자기 몸통만 한 커다란 책가방을 둘러메고 있었다.

“제가 너무 빨리 왔나요? 시간 맞춰 오려고 했는데, 오메가 씨의 몸 상태를 확인할 생각에 참지를 못하겠더군요.”

“어······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다른 분들도 계셨군요? 이거 제가 실례하는 게 아닌 건지 모르겠습니다.”

앨리스가 능숙하게 청운의 말을 받았다.

“아니에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소개해드릴게요.”

그리고 각자 소개를 받은 청운, 신시아, 이수련이 인사를 나눴다.

청운은 생각보다 잘 어우러졌다.

심지어 자연스레 진맥을 하기까지 했다.

“야스민 가의 영애! 처음 뵙겠습니다. 저희 병원에도 많은 지원을 해주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흡혈귀 아니랄까 봐 맥이 매우 느리군요!”

“아! 이쪽 분이 해결사 사무실에 자주 방문하신다는 묘령의 구미호시군요. 아니 무슨 기운이 이렇게······. 와······제가 진맥한 구미호 중 가장 연륜이······예? 조용히 하라고요? 허리가 뻐근한데 해줄 수 있는 거 없냐고요? 한번 보겠습니다.”

어느새 얼굴에 바이저를 만들어 쓰고 있는 이수련이 고개를 까딱였다.

외부 노출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저러고 다니는데, 컨셉도 지독하다 싶었다.

나다가 감탄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이수련 쪽이 아닐까.

음료수를 내오는 앨리스에게 물었다.

“네가 청운 선생님 모셔온 거야? 왜?”

“요새 사장님이 심하게 구르는 것 같아서요. 사람 몸이라는 게 우둔해서 아파도 티를 잘 안 낸다는 글을 봤거든요. 미리미리 준비해야죠. 그래서 청운 선생님 언제 괜찮으신지 연락해봤는데 직접 오시겠다고 하셨어요. 좀 일찍 오시긴 하셨지만요.”

“그걸 그냥 오시라고 했어? 내가 병원에 가면 되는 건데.”

“사장님이 잘도 가시겠네요. 정기적으로 오라고 청운 선생님이 당부까지 하셨다는데 저한테는 그런 말도 안 하셨죠?”

음······.

반박할 말이 없네.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고맙다 야. 내 생각하는 건 너 밖에 없네.”

“말이 사무실이지 사실상 노동력이라고는 저랑 사장님 밖에 없는데 사장님은 몸이 재산이니까 미리미리 점검해야죠. 교체나 수리보다 예방정비가 싸게 먹히지 않겠어요?”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표현이 그러니까 좀 이상하다?”

“그러니까 교체 소리 나오기 전에 미리미리 점검하라는 소리잖아요.”

손님용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앨리스가 잠깐 걸음을 멈췄다.

청운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놓은 침이나 뜸 같은 것들이 테이블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느새 테이블 위에 올린 신시아의 양손과 손목에는 침이 가득했고 이수련은 허리를 까고 소파에 엎어져 있었다.

이수련의 허리에 뜸을 태울 준비를 하던 청운이 내게 말했다.

“오메가 씨는 이분들 잠깐 봐 드리고 봐도 될까요?”

나 대신 이수련이 답했다.

“그리 하도록 하여라. 간만에 좀 지져보자꾸나.”

여전히 음료수 잔이 올라간 쟁반을 들고 있는 앨리스가 중얼거렸다.

“나이 먹으면 한의학이나 기공 치료 선호도가 높아진다더니······.”

#

대략 30분 후, 이수련과 신시아의 진료를 마친 청운은 오메가와 함께 오메가의 방으로 올라갔다.

몸 상태 체크를 하려면 속옷만 남기고 다 벗어야 하는데 사무실에서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오메가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이수련과 신시아는 자기들 눈은 신경 쓸 필요 없다며 극구 붙잡으려 했지만, 오메가가 소파에 널브러져 있으면 가끔 옷 사이로 보이는 오메가의 옆구리도 쳐다보기 싫어하는 앨리스가 당장 올라가라는 말로 상황을 단칼에 정리했다.

아쉬워하던 이수련과 신시아였지만 이내 평소처럼 잠잠해졌다.

신시아가 손목을 돌리며 말했다.

“나아진 것도 같고, 그대로인 것도 같고. 그런데 뭔가 시원해진 것도 같고. 묘하네, 이거.”

“그렇게 조그만 차이에 빠져드는 것이니라.”

뜸 맞은 자리가 뜨겁다며 여전히 배와 허리를 훤히 깐 이수련이 신시아에게 답했다.

뜸 자리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저 의사, 실력이 좋더구나. 종종 찾아가도 좋을 것 같으니라.”

“그래?”

“본좌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신기하다는 듯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다 ‘요새 목도 좀 뻐근한 것 같은데 따로 찾아가볼까······.’하고 중얼거리는 신시아 곁에 앨리스가 다가왔다.

소파의 끝에 엉덩이만 살짝 걸터앉은 앨리스가 둘을 향해 말했다.

“가까이 좀 와봐요. 언니 둘 다.”

둘이 가까이 붙자 앨리스가 입을 열었다.

“마침 사장님이 안 계셔서 드리는 말씀인데,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게 부담되면 거절하셔도 돼요. 아시겠죠?”

“무슨 말이길래 앨리스 네가 이렇게 뜸을 들인다는 말이냐.”

“아까 공공 집행자들의 혐의점은 없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죠?”

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앨리스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조사과정에서 트라이포드와 관련된 곳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마고 씨의 말에 따르면 네오-서울과 WSS 곳곳에 산재해 있대요.”

“아버지가 연구소의 배경을 찾다가 아예 그쪽 섹터 자체의 문제를 발견한 것처럼?”

“맞아요. 네오-서울은 좀 덜한데, WSS 쪽은 제법 심각한가 봐요. 중화권 권역에서 요원이나 과학자, 혹은 정체 파악이 힘든 인원이 밀입국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있었다나 봐요.”

“그쪽 시의회가 공이 확실한 편이지만 그만큼 과도 많기로 유명하지. 암흑가를 제어하지 못해 그렇게 크게 놔둔 것과 마찬가지로.”

WSS는 네오-서울과의 전쟁 이후 그 열패감을 연료 삼아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냈으나 빛이 화려한 만큼 어둠도 짙은 권역이었다.

범죄 발생 건수는 인구가 훨씬 많은 네오-서울이 압도적이지만 강력범죄 발생 비율은 네오-서울이 WSS를 근소하게 앞지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물론 네오-서울 전역이 아니라 대림 에어리어만 따로 떼어본다면 대림 에어리어가 압도적이긴 했다.

이수련이 팔짱을 낀 채로 한 손을 들어 턱 주변을 쓰다듬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지 않아도 태백 권역에서 사라진 퓨전 코프의 로봇이 네오-서울을 거쳐 WSS로 흘러 들어갔다는 정황을 찾았느니라. 명확하지 않은 업체들에게서 계속해서 주문이 들어온다길래 소명 자료를 보내라고 했더니 주문이 일제히 사라졌다는 보고도 있었고······. 정확한 추적은 힘들지만 대부분 WSS발 주문이긴 했었느니라.”

“바이오 쪽에서도 마찬가지야. 아버지가 카르텔을 부수고 도산한 업체의 장비나 인력들이 WSS로 향한 뒤 사라졌어.”

앨리스가 끄덕였다.

“거기서 뭔가 벌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드릴 얘기로 이어지는데요. 공공 집행본부에서 사무실, 정확히는 사장님한테 협력을 요청했어요. 물론 비공식적이고 증명 서류 하나 없죠.”

“요청 내용은 아무래도······.”

“네. WSS 내의 의심되는 곳을 찾아봐달라는 거예요. 지금은 네오-서울과 WSS가 상호 교류하며 동반 성장하는 관계라지만 공공 집행본부에서 직접 개입하기는 여러 부담이 있을 테니까요.”

“흠······이미 트라이포드와 척을 진 낭군에게 꼭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낭군이 하기에는······.”

이수련의 염려 섞인 말에 신시아와 앨리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썹을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쪽에서는 조용히 처리하기를 원하는 것 같은데 요새 오메가 님 하시는 걸로 봐서는 절대 조용하게 끝날 리는 없겠지. 큰 사건에 휘말려서 얼굴이 많이 알려지기도 했을 거고.”

“본좌도 그 의견에 동의하노라. 낭군을 보냈다가는 분명 외교 문제로 비화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언니들한테 말씀드리는 거예요. 개인의 자격으로 맡아주실 수 없을까 해서요. 순전히 제 독단으로 진행하는 일이라 거절하셔도 어쩔 수 없다는 건 잘 알아요.”

앨리스의 말에 이수련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냐. 우리는 팀―.”

신시아가 이수련의 말을 낼름 가로챘다.

“팀 오메가잖아?”

“본좌가 말하려 했거늘!”

“누가 말하는 게 중요해?”

“그럼!”

“됐고. 난 할 건데, 너는?”

“본좌가 빠지리라 생각하느냐?”

신시아가 웃었다.

서늘한 웃음이었다.

“사령술 협회 WSS 지부에서 세미나가 있다던데 참가 좀 해야겠다.”

이수련도 웃었다.

노회한 웃음이었다.

“WSS에 있는 퓨전 코프 로봇들 점검 시기가 머지 않았느니라.”

눈빛을 교환한 둘은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시원하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

같은 시각, 방으로 올라간 오메가는······.

몸 곳곳에 장침이 박힌 채로 눈만 굴리고 있었다.

“흐그으아우욱! 선생님! 아파요! 아프흐으아윽!”

간신히 말했지만 돌아오는 청운의 대답은 냉정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안쪽 근육이 이렇게나 많이 지친 겁니까. 자극이 제법 셀 겁니다.”

“아프으으으허엉! 아프요! 지금도 아프흐흐어얽.”

“원래 그런 겁니다. 참으세요.”

그후, 빠른 손놀림으로 침을 뽑은 청운이 오메가의 등에 대고 뜸을 놓았다.

“으뜨뜨거!”

오메가의 허리가 또다시 활처럼 휘었다.

#

며칠 뒤, 사무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나는 몸을 일으켜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아프기는 더럽게 아파도 효과는 기가 막히단 말이야.”

책상에 앉아 패드를 만지던 앨리스가 나를 흘끗 보고 말했다.

“청운 선생님 얘기죠? 그러니까 꼬박꼬박 찾아가요.”

“생각은 해볼게. 그런데 오늘은 신시아랑 이수련 씨 둘 다 안 보인다?”

“없으니까 허전한가 보죠? 언니들 한동안 바빠요.”

“그래? 뭐하는데?”

“있어요.”

“마고나 위타천한테 온 연락은 없었어?”

“사장님.”

“응?”

패드를 내려놓은 앨리스가 나를 보고 물었다.

“안 물어보시던 걸 물어보는 거 보니까 지금 심심하시죠.”

“꼭 그렇다기보다는······큰일이 펑펑 터지다가 갑자기 붕 뜬 기분이랄까?”

“정 그러면 바이크 끌고 드라이브라도 한 바퀴 하고 오세요. 일 있으면 연락 드릴게요.”

“흠······.”

그때, 귀걸이가 진동했다.

터치해보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오메가야! 바쁘냐?

페룬 마탑의 마탑주, 테오릭 경이었다.

“바빴는데, 지금은 잠깐 한가해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럼 너 호위, 아니다 가이드 좀 해라. 믿고 맡길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래.

“호위요? 누군데요.”

-내 손녀.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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