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90화 (191/258)

190.

쌍검.

남자의 로망.

아니, 이건 성별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냥 ‘로망’ 그 자체.

하지만 로망이 왜 로망인가.

닿을 수 없기에 로망이다.

그렇기에 이미 잊히거나 잊힌 시대착오적 사고와 행동양식이지만, 가슴을 끓어오르게 하는 무언가의 집대성을 우리는 로망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홧김에 집어 오긴 했지만 야타가라스가 사용하던 검인 존속살해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제법 큰 고민이었다.

부우웅- 부우웅-

이수련이 몸 주위에서 벌 수백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소음이 퍼졌다.

그녀가 몸 주위에 만들어놓은 법술 방어진과 내가 들고 있는 존속살해가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소음이었다.

로봇 헤드에서 불을 번쩍이던 이수련이 팔짱을 끼고 방어진 너머에서 존속살해를 살피다 한마디 했다.

“분명 좋은 검인 것은 맞지만, 생각보다는 아쉽구나. 그간 낭군이 사용하던 검을 보아와서 본좌의 눈이 높아진 것일지도······.”

동감이었다.

지금 허리춤에 차고 있는 기존의 검은 위올란트가 만져 준 이후 배터리 지속시간이 크게 향상된 것과 동시에 대부분의 이능을 깨부술 수 있었다.

마법, 법술, 주술, 저주 등등.

아예 봉인하는 것이 아니라 잠깐의 틈을 만들어 주는 정도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 틈새로 삶과 죽음이 넘나든다는 걸 생각하면 굉장한 능력이었다.

너무 강대한 힘을 마주했을 때는 완전히 파쇄하지는 못하고 반감하는 정도였지만 이걸 믿고 내가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기도 했다.

이수련이나 젠 같은 자신의 분야에 조예가 높은 이들도 내 검이 이능을 파훼하는 걸 보고 놀라곤 했다.

귀물貴物이지만 동시에 귀물鬼物인 것 같기도 하다는 젠의 말에 나는 긍정했다.

검을 휘두를 때면 왠지 위올란트가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위올란트가 검에 붙어서 그렇게 쓰는 거 아니라고 훈수하면 신시아에게 부탁해 진혼해버리려고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법술 방어진 너머로, 어느새 로봇 외장이 뒤덮은 이수련의 주먹이 뻗어오고 있었다.

주먹과 팔뚝 부분부분, 뒤쪽을 향해 열린 외장에서 푸른 불꽃과 증기를 분사해내는 통에 속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랐다.

재빨리 뻗었던 검을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칼등으로 뻗어오는 주먹의 윗부분에 대고 눌러 궤도를 틀어 위력을 반감시켰다.

주도권을 빼앗긴 이수련은 힘을 그대로 이용해 재빨리 몸을 한 바퀴 틀었다.

그녀의 새하얀 꼬리와 등이 보일 때, 원래 가지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주위를 밝히는 푸른 빛의 광자 검날과 사위를 삼키는 검은 빛의 광자 검날이 각각 내 양손에 들렸다.

이제 법술을 깨부수고 내 간격으로 이수련을 끌어들이면······!

“그만.”

마치 신탁처럼 내려오는 거룩하고 장엄한 목소리.

이수련과 나는 마치 감아두었던 태엽이 다 된 인형처럼 제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거의 동시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활짝 열린 사무실의 문 너머.

앨리스가 있었다.

천천히 사무실을 살핀 앨리스의 눈에서 형용할 수 없는 분노의 해일이 보였다.

“지금 사무실에서 둘이 뭐 하는 거죠?”

“어······음······.”

팔락-

나와 이수련이 몸을 움직여대는 통에 생긴 바람에 휩쓸린 종이들이 바닥과 손님용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뭘 부수거나 깨지지는 않았지만 조금, 아주 조금 사무실이 복잡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손님용 테이블에서 홍차를 마시고 있던 신시아가 자신은 관계없다는 듯, 테이블 위를 미끄러지는 종이 한 장을 옆으로 슬쩍 밀었다.

그리고는 아주 도도하게 앨리스에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말려도 안 듣지 뭐니. 어지럽히면 자기들이 치우면 된다면서. 그렇지?”

역시 신시아다.

살아날 구멍을 내 준 것이 분명하다.

나와 이수련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시아의 말이 맞다. 얼른 치울 생각이었느니라.”

“그래. 금방이라고. 알잖아 내 청소 속도.”

앨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기 자리로 가는 동안 나와 이수련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사무실을 정리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앨리스는 당장이라도 신벌을 내릴 듯한 표정을 조금 풀었다.

하지만 혼잣말을 가장한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그거 안 들으려고 열심히 청소한 건데······.

“대책 위원회 갔다 올 테니까 사무실 좀 보고 있으라는 부탁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 잠깐을 못 참고 난리를 벌여?”

억울하다.

나랑 이수련의 예상보다 앨리스가 너무 빨리 돌아온 것이 원인이다.

“일대 인프라가 마비될 정도로 난장판을 쳐놓고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그리고 옥상 놔두고 왜 사무실에서 저러는 건지.”

억울하다.

돌아와서 안 건데, 폐건물 단지는 모르겠지만 사무실 주변은 나보다 위타천이 날뛰면서 부순 게 더 많다.

신시아도 한몫했고.

그래서 야스민 가문이랑 공공 집행본부에서 반반씩 배상하기로 결론이 난 걸로 알고 있다.

이참에 도로 주변을 싹 갈아엎기로 얘기가 된 모양.

그리고 야타가라스와 치고 박았던 그 폐건물 단지도 뭐 몇 개년 계획이 세워지는 중이라고 한다.

나와 싸웠던 사람이 야타가라스였던 것은 다들 모르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지역발전에 이바지한 셈이 되어 주위 자영업자들은 나만 보면 어깨를 두드리거나 양손 엄지를 세운다.

그리고.

아무리 주위에서 그래도 나도 염치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 남들이 볼 수도 있는 옥상에 나가지는 않은 거 아닌가.

다른 검도 아니고 야타가라스의 검을 탁 트인 옥상에서 휘둘러 보는 게 좀 그렇기도 했고.

이런 생각을 잔뜩 하면서 앨리스에게 말했다.

“청소 끝. 다른 거 뭐 할까.”

“잠깐 앉아 계세요. 드릴 말씀 있으니까.”

“대책 위원회?”

앨리스가 눈썹에 힘을 주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거기는 신경 쓸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다들 제가 무슨 얘기하나만 신경 쓰고 있더라고요. 신시아 언니랑 사장님이 전심전력 다하는 걸 본 사람이 한둘이어야죠.”

“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단어를 고르고 있는 사이 신시아가 첨언했다.

“시공사 선정도 저희 입김이 닿는 업체로 할 거라서 혹시나 모를 불이익 같은 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것이 돈과 권력의 맛인가.

너무나 달콤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다.

“대책 위원회 얘기 아니면 뭔데?”

“마고 씨한테 연락이 왔어요. 그리고―.”

앨리스의 눈이 내 손을 향했다.

역전개된 상태로 들고 있는 존속살해를 향하는 것이 분명해 슬그머니 뒤로 숨겼다.

“왜 숨겨요? 누가 가져간대요?”

“그럴 것 같아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걸 덥석 주워오신 건지는 모르겠지만······일단 그것과도 관련된 것 같으니까 한 번에 얘기해요. 빨리 정리하고 갈 테니까 앉아 계세요.”

칼자루를 손으로 빙빙 돌리며 테이블에 앉자 이수련이 킥킥거렸다.

“낭군과 앨리스를 보고 있으면 누가 사장이고 누가 직원인지 모르겠구나.”

“바지사장이죠. 뭐.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요.”

달그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신시아가 홍차 잔과 접시를 받쳐 들고 아주 도도하게 내 곁으로 와 앉았다.

그러더니 여전히 반대편에 앉아 있는 이수련을 향해 말했다.

“너, 오메가님이 어떤 취향인지 모르지?”

“예?”

내 반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이수련의 눈꼬리가 위로 솟았다.

“취, 취, 취향! 둘이 어디까지 간 것이냐! 반칙이다!”

“상상하기 나름이지 않을까?”

“신시아? 무슨 말이죠?”

하지만 신시아는 내 곁에 더 바짝 다가와 앉았다.

이수련도 펄쩍 테이블을 뛰어넘어 나를 사이에 둔 신시아의 반대편에 붙어 앉았다.

나는 한순간에 두 여자에게 끼인 모습이 되었다.

누군가는 부럽다고 할지 모르지만, 세계관 최강까지는 못돼도 강자반열에 드는 이들이 양쪽에서 으르렁대고 있다고 하면 절대 부럽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일을 마무리한 앨리스가 패드를 옆에 끼고 다가오더니 사무실 한쪽 벽의 스크린을 내렸다.

눈빛으로 구해달라는 시그널을 보냈지만, 앨리스는 빙긋 웃는 것이 전부였다.

“보기 좋네요.”

“좋기는······.”

“자 이제 잡담 볼륨 줄이시고.”

사무실의 조명까지 어둑하게 만들자 스크린의 빛이 더 선명해졌다.

앨리스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사실, 이번 일은 축소 은폐하려는 공공 집행본부의 노력이 먹혀들어 가서 그렇지 엄청난 일이에요. 신시아 언니도 내색은 안 하지만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좀 있었을 거고요.”

“걱정 안 해도 돼. 내 일은 내가 처리하면 되니까.”

시가지 한복판에 거대 사신을 만들어낸 걸로도 모자라 원혼들이 귀곡성을 질러대는 사태를 유발한 것으로 인해 신시아는 사령술 반대 진영에서 공격받고 있었다.

위타천이 나서서 나르시스가 색승의 스승이라는 것, 그런 나르시스에게 신시아가 직접적인 모욕을 들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비난의 목소리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이 여론을 야스민 가문에 대한 반감으로까지 이어가려는 조직적인 움직임도 포착되는 상황, 요즘 신시아는 얼굴 보기도 쉽지 않았다.

지금도 간신히 짬을 내서 와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 사무실이 자기 힐링스팟이라는 신시아의 말이 조금 짠하기도 했다.

“그래도 필요하면 바로 말하세요. 언니들한테는 의뢰 비용 95%까지 할인해줄 수 있어요.”

“고마워.”

사장은 난데 왜 그걸 네가······그리고 95%는 뭐야. 100%면 100%지.

앨리스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일단 사장님 혼자만의 주장이긴 한데······야타가라스와 만나서 제압하고 심지어 ‘전리품’까지 얻어오셨죠.”

“그게 왜 나만의 주장이야. 위타천이랑 나다한테 물어봐! 스콰이어도 봤어!”

“위타천 님, 나다 님 두 분 모두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답변이 어렵다고 하셨어요. 아무래도 야타가라스에 대한 건 일부러 감추는 부분도 있었는데 그 야타가라스가 사장님한테 깨졌다는 게 알려지면 지금껏 쌓아온 이미지에 금이 가지 않을까요.”

“와! 억울해! 진짜야! 진짜라니까! 내가 이겼다고!”

“네에. 알겠고요. 스콰이어 씨한테도 연락은 했는데, 아무것도 못 봤다고 하셨어요. 렙틸리비아 자체가 네오-서울의 묵인 아래 돌아가는 공동체니까 공공 집행자들과 얽히기 싫다는 거겠죠.”

“뭐야. 그럼.”

“목격자가 없네요.”

뭐야 이게.

억울함이 화가 되어 폭발하기 직전,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샴록! 샴록이 있잖아! 그 엘프는 야타가라스한테 잡혀있었으니까······.”

“폐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한 직후, 나다님이 구출해서 지금은 공공 집행본부에 있어요. 질이 매우 나쁜 범죄자니까요. 그런데 야타가라스에게 잡혀있던 건지는 당장은 확인하기 힘드네요.”

내가 입을 열려는데, 앨리스가 먼저였다.

“그런데, 마고 씨는 확인해줬어요. 야타가라스가 맞대요. 미친 거 아니냐는 소리도 했고요.”

“그거 봐!”

“위타천 님과 나다 님도 비공식적으로는 인정했어요.”

“그럼 그 얘기부터 했어야지!”

“쪼는 맛이 없잖아요. 그리고 위타천 님은 그 사실로 충격을 좀 받은 모양이니까 한동안 건들거나 자극하지 말아요.”

“하하! 충격받을 거 있나! 내가 잘난걸!”

“네에. 잘 알겠고요. 그런데 그 무기 말인데요. 그거 사장님이 멋대로 집어 온 것 같다는데, 맞죠?”

“아니? 승자의 전리품인데? 그 빡대가리가 들고 다니기엔 아까운 물건이라 가져온 건데?”

존속살해는 내 검의 아킬레스건과 마찬가지다.

위올란트가 만든 검을 함부로 부술 수는 없기에 파괴하지는 않겠지만 존속살해는 내가 가지고 있을 생각이다.

“요새는 유치원생도 그런 식으로 생각 안 해요. 회수 요청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마고 씨의 말이 있었어요.”

“안 준다고 그래.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야타가라스는 검이 문제가 아닐걸? 그냥 신체랑 검술 이해도가 미친 수준이라서 식칼만 던져줘도 물을 베겠던데?”

“그 얘기는 대면해서 하세요. 마침 몸이 나아지는 대로 이쪽으로 오기로 했어요. 마고 씨가 말하기를 서로 오해를 풀 수 있을 거라던데요.”

“누굴? 야탸가라스를? 언제?”

앨리스의 패드에서 벨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설마 지금 바로?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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