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오메가와 나르시스의 전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무렵, 나다는 대림 에어리어의 우측에 있는 에어리어인 동작-관악 에어리어에 있었다.
위올란트가 만들어 준 봉에서 나타나는 4명의 미소녀 사천왕, 이른바 불법佛法소녀의 애니메이션 제작발표회가 동작-관악 에어리어에서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이날에 맞춰 휴가를 쓰기까지 한 나다였다.
자신과 같은 공공 집행자를 꿈꾸는 불가의 동자승들에게 시간을 할애할까도 생각했었지만 나다는 3분 정도 고민한 뒤 제작발표회장에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동자승들을 만날 기회는 여러 번 있겠지만 제작발표회는 평생에 단 한 번 있을 기회니까.
혹시나 모를 소란을 방지하기 위해 나다는 선글라스, 마스크 이외에도 공공 집행본부 공공 집행자 지원부서에서 빌려 온 여러 위장 장비를 걸치고 있었다.
호환성을 따지지 않고 빌려 온 탓에 장비들끼리 간섭을 일으켜 제작발표회장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지금 나다는 키 130cm에 몸무게 150kg 정도 되는 코끼리 수인으로 보이고 있었다.
행사 관계자들은 그런 나다가 의자에 앉을 때 우지끈하는 소리가 날까 봐 눈을 질끈 감았지만, 다행히 의자가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잔뜩 기대하고 간 나다지만, 선공개 영상을 채 절반도 보기 전에 일어서야 했다.
선공개 영상에서는 동방의 소녀, 지국이 자신과 같은 숙명을 지닌 이들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고 풍문으로만 들었던 서방의 소녀, 광목을 향해 떠나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나다가 일어났을 때, 관계자들은 나다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펄쩍 뛰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 생각해 긴급히 가드들을 부르려 했다.
무전을 듣고 모인 가드들도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모두의 염려와는 다르게 나다는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갔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거대한 덩치의 코끼리 수인이 어떻게 저렇게 발소리나 몸놀림이 가벼울 수 있는지 신기해했지만, 곧 불법 소녀들의 변신 장면이 나오자 홀린 듯이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한편, 밖으로 나온 나다는 사람들의 시선이 덜한 것을 확인하고 위장 장치들을 해제했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푹 눌러 써 이마의 계인을 가린 나다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그 상태로 나다는 이마에 찍힌 계인 중 가장 아래 있는 두 개를 터치했다.
승려라는 이유로 염주를 통신 디바이스로 개조해 사용하는 것은 너무 진부하다며, 계인으로 위장해 삽입해두었던 소형 통신 디바이스가 작동했다.
통신이 연결되는 것과 동시에 나다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마고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늘 엄연히 휴가라능!”
-그 쿤 좀 제발 붙이지 말아줬으면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던 것 같은데요.
“그럼 마고쨩이라고 부르면 되겠냐능?”
-말을 말죠. 휴가인 건 알고 있었어요. 휴가 중에 연락해서 미안한데, 대림 에어리어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해서 혹시 가줄 수 있나 해서요. 지금 어디죠? 통신이 되는 걸 보니까 네오-서울 안인 것 같긴 한데. 혹시 WSS?
“말 안 해줄 거라능.”
-휴가라고는 하지만 이 건은 휴가 철회도 할 수 있을 정도예요.
“휴가 철회? 가장 최근에 있었던 휴가 철회는 아마······.”
-브리가드의 기함이 네오-서울 방향으로 직진한다고 해서 휴가였던 노덴스가 도복 차림으로 뛰쳐나왔었죠.
“그 정도 일이 또 일어났다는 말임? 요새 왜 이리 엉망인 것 같냐능?”
-그렇게까진 말하지 마요. 어차피 우리 얼굴에 침 뱉기니까. 쓸데없는 말을 너무 했네요. 대림 에어리어에서 야타가라스가 출몰했어요. 평소처럼 사전 통보 하나 없이. 또 선조치 후보고라고 하겠죠. 군인 아니랄까 봐.
“정확히 말하면 퇴역군인임. 그런데 야타가라스쿤은 원래 불쑥불쑥 출몰하잖음. 그게 왜 비상이냐능?”
-야타가라스가 출몰하기 직전, 그곳에서 오메가가 밀교승과 전투 중이었거든요. 밀교승은 나르시스. 색승의 스승이네요. 밀교에서 적籍이 지워지긴 했지만 뭐 어쨌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밀교승 정도는 오메가쿤이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능.”
나다는 이미 오메가의 역량을 어느 정도 짐작한 상태였다.
위타천이 오메가를 후임 삼고 싶어 한다는 것을 듣고 충분히 그럴만하다고도 생각한 적 있는 나다였다.
-무슨 근거로 그런 결론에 도출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맞아요. 오메가가 사자 수인을 제압했어요.
“그럼 사자 수인을 처리하러 야타가라스쿤이 나선 거 아니겠냐능.”
-저도 그런 줄로 알았는데······.
마고는 고민했다.
‘공공 집행자 중 하나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고, 오메가는 그 대상을 추적했다. 그리고 지금 가장 유력한 이가 야타가라스다.’
나다에게 이 사실을 알려줘도 괜찮을 것인가.
어쨌든 범죄자를 죽이지는 않기에 불살불법不殺佛法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노덴스와 함께 그나마 상식적인 선을 지키는 나다지만, 이건 의심의 불씨를 지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위타천도 이 사실을 알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모두가 알 필요는 없다.
마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중에 이 사실이 드러났을 때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면 그건 나 하나로 족하다.’
그것이 마고의 결심이었다.
네오-서울의 공공 집행자이자 그중에서도 네트워크와 정보를 다루는 자신이 정작 주변과 집행본부 내부에 구멍이 뚫린 걸 모르고 있었다는 자책과 분노가 마고의 결심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해결사 사무실을 찾아갔던 날, 자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조그만 사무용 안드로이드의 차분하면서도 온기 어린 조언이 그녀를 바꿔놓은 것일지도 몰랐다.
빛 한 점 새어들지 않는 수조 탱크 안에서, 마고의 입가는 웃고 있었다.
“마고쿤? 아니 마고쨩? 듣고 있다능.”
-상황 추이를 보려고 위타천이 출동했는데, 현장에 도착해서 좀 둘러보나 싶더니 오메가에게 제압당한 사자 수인을 끌고 나와서 패고 있대요.
“위타······.”
-네. 위타천이요. 그리고 오메가와 야타가라스는 현장에서 사라졌어요. 오메가의 통신 디바이스만 남긴 채로요. 속단은 이르지만 야타가라스가 오메가를 납치한 그림이에요. 가서 둘을 찾아봐 줄래요?
“알겠다능.”
나다는 재빠르게 근처의 쇼핑몰로 들어가 공공 집행자 굿즈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샵으로 향했다.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공공 집행자들이니만큼 여러 관련 상품들이 나와 있었고, 그중에서는 불가와 콜라보해서 만들어진 1:1 사이즈의 나다 가사袈裟도 있었다.
그걸 집어 계산해 입고 나온 나다가 황당해했다.
“아무리 굿즈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능.”
굿즈로 나온 가사의 가슴팍에는 불가의 심볼이라고 할 수 있는 만卍 자가 커다랗게 인쇄되어 있었다.
나다가 원래 입고 다니는 가사에는 없는 부분이었다.
그것은 마치 바지 위에 팬티를 입고 다니는 다른 세계관의 히어로 가슴에 새겨진 S와 비슷해 보이기도, 그렇지 않기도 했다.
굿즈샵에서 준 봉투 안에 선글라스와 모자, 마스크뿐만 아니라 빌려 온 위장용 장비들까지 구겨 넣은 나다는 그걸 굿즈샵 직원에게 내밀었다.
“공공 집행본부에서 찾으러 올 테니 아무것도 건들지 말라능!”
“예? 에? 나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기 전, 나다는 이미 특유의 가벼운 보법을 이용해 대림 에어리어로 향하고 있었다.
엉망이 된 대림 에어리어 23구역에 도착한 나다는 오메가가 남겨놓은 흔적을 발견했다.
야타가라스를 따라가면서도 [헨젤과 그레텔] 스킬을 이용해 작은 파편이나 쓰레기로 어렴풋하게나마 방향을 남겨놓은 덕이었다.
그걸 본 나다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오메가쿤······드디어 정체성을······.”
오메가가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한 [헨젤과 그레텔]은 마치 깊은 산에 있는 절에 찾아온 신자들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만들어놓은 작은 돌탑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주위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로 은밀한 흔적을 남기는 스킬이 만들어낸 우연의 조화였다.
사라질 쯤하면 나타나는 작은 돌탑의 흔적이 끊겨서 당황한 나다가 주변에 혜심통을 마구 뿌렸다.
반응이 없어 자리를 뜨려는데, 주변에 있는 많은 폐건물이나 완성되지 못한 공사판 중 한 곳에서 쓰레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나다의 눈에 들었다.
곧바로 불법소녀들의 터전이자 훌륭한 무기인 봉을 빼든 나다가 수면 위의 연꽃을 밟는 듯이 가볍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토옹- 토옹- 하는 경쾌한 소리가 건물의 벽을 타고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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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지다 만 건물 공사 현장에서 우리는 삼각대형으로 대치했다.
“야타가라스쿤! 오메가쿤은 조금 거칠기는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능!”
외장재가 떨어져 나간지라 내부의 철골 구조가 보이는 기둥 너머, 봉의 한쪽을 바닥에 세운 나다의 말이었다.
그의 봉 곁에서 어렴풋하게 4명의 미소녀가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모습만 봐서는 웬 여자 아이돌 그룹의 굿즈가 아닌가 싶지만, 저 징후는 나다가 봉에 법력을 주입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아직은 모습이 흐린 것으로 봐서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4명의 불법소녀가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면 그때는 포격 준비가 완료된 것으로 봐야 한다.
내가 들고 있는 푸른 빛의 광자 검날, 야타가라스의 손에서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시커먼 빛의 광자 검날, 화사하고 상큼한 모습을 드러내는 나다의 봉까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역시나 짓다 말아 허물어진 탓에 건너편이 훤히 보이는 벽 너머로 야타가라스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다에게 말했다.
“오메가에게는 여러 혐의와 의혹이 있다. 그를 돕는 건 자유지만, 그렇게 한다면 추후 나다 네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저 빡대가리에게 빈정이 상할대로 상해버린지라 빈정거렸다.
“그 혐의와 의혹을 나한테 넘기려고 애쓰고 쇼했는데 나다가 와버렸네? 이제 어떻게 하려나?”
“할 일이 더 늘어났을 뿐, 목표가 바뀌지는 않는다.”
휘릭-
얇고 낭창낭창한 것을 휘두르는 것 같은 소리가 야타가라스가 들고 있는 검에서 뿜어졌다.
따라가기도 힘든 움직임이었지만, 그의 검이 움직였다.
야타가라스 주변의 공기가 비현실적으로 출렁거렸다.
공간을 접어 붙이면 저런 식으로 보이지 않을까.
[흐림수르사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그 기묘한 출렁임을 막기 위해 냉기를 뿜었다.
빙벽을 만들어 충격을 반감―
휘릭-
다시 한번 야타가라스의 팔과 검이 마치 채찍처럼 움직였다.
빙벽을 만들기 위해 뻗었던, 검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을 재빨리 회수했다.
그리고 몸을 뒤로 날렸다.
그런 나의 눈에, 분명히 빙벽 너머에 존재하던 출렁임이 야타가라스의 움직임과 함께 빙벽 안쪽으로 마치 전이되는 것 같은 모습이 보였다.
“크으으······.”
동시에 손에서 고통이 밀려왔다.
잘려 나가지는 않았지만 야타가라스가 가볍게 휘두른 움직임이 만들어낸 기묘한 파동에 베인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오메가쿤!”
나다의 걱정 섞인 외침이었다.
회복과 치유 계통의 스킬들로 손에 있던 상처를 아물게 만드는 사이, 야타가라스는 가벼운 움직임으로 빙벽을 깨부쉈다.
그가 내게 말했다.
“피하다니. 예상하지 못했다.”
붉은 새살이 돋아나는 손을 몇 번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고개를 내려 그걸 보고 있으니 깊은 곳에서 후끈한 무언가가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스킬이 아니라 순수한 나의 감정이었다.
“간만에 제대로 열 오르게 하네······. 빡대가리 새끼.”
시선을 나다에게로 옮긴 뒤, 말했다.
“저는 도와줄 필요 없거든요? 대신 말리지도 마요. 알겠죠.”
나다가 답을 하기도 전, [파천황]을 사용한 상태로 검을 잡자 푸른 불꽃과 붉은 얼음이 검을 타고 올랐다.
“나는 최대한 협조했는데 판 깬 건 너다. 그러니까 나도 원래 내 방식대로 간다.”
무기 상성은 열세일지 모른다.
그런데 인간 상성은 모를 일이다.
나는 적어도 진심으로 임하는 전투에 있어서는 상대가 누구든 상성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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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대림 에어리어 22구역에 있는 청소, 철거 및 고철 수거 전문업체인 후앙 컴퍼니는 창사 이래 가장 바쁜 날을 맞았다.
옆 구역인 23구역의 흉물로 여겨지는 미완성 빌딩들이 무너지며 나오는 자재를 수거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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