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나다?
말투로 봐서는 나다가 분명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수신은 했지만, 발신은 불가능하다는 것.
‘분명히 저번에 나는 이거 못한다고 말했는데······.’
그 와중에도 나다의 메시지는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있냐능?
-내 전언이 들리면 응답하라능.
강도와 빈도가 점점 강해졌다.
나다가 근방으로 다가온 것이 분명했다.
한편 야타가라스는 지옥의 질문 무한루프를 샴록에게 시전하고 있었다.
“너는 진오라는 거신족 혼혈과 함께 리벨리온을 이끌었다. 맞나?”
비슷한 질문을 이미 몇 번이고 받아 본 것이 분명한 샴록이 이를 부드득 갈며 답했다.
“맞다.”
“리벨리온은 처음부터 트라이포드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괴뢰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졌다. 맞나.”
오우······.
나도 예전에 리벨리온의 방향과 목적에 대해 한번 크게 일침을 놓은 적 있지만 저건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는 거 아닌가······.
일침이 아니라 칼빵을 쑤신 수준인데.
참지 못한 샴록이 앉아 있던 접이식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자 지금 내 주변을 둘러친 그림자처럼 샴록의 주변에 있던 그림자 원 역시 들끓기 시작했다.
“비록 우리의 방향이 조금 뒤흔들린 건 사실이지만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마음만은 진짜였다! 괴뢰라는 단어로 쉽게 깎아내릴 수 있는 게 아니야!”
저 엘프는 아직도 저러네.
다 떼어놓고 저 문장만 보면 취지에 얼추 동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과정이 너무 안 좋았다.
다른 권역의 영토 일부를 점령하기도 했고, 아예 예언의 주인공인척해서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려고도 했다.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고.
그 결과?
진오는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잠정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샴록은 지금 보다시피 몸에 가득했던 문신 괴수들은 대부분 마데르노에게 죽고 한쪽 다리마저 잃었다.
저런 강력한 부정은 어찌 보면 자신의 현실에 대한 부정일지도 모른다.
샴록이 그렇게 격하게 반응했음에도 야타가라스의 목소리는 처음 음울한 그대로였다.
“동의한 것으로 알겠다.”
샴록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야타가라스를 바라봤다.
이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것보다 더하다.
그냥 자기가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주구장창 같은 말만 반복하는 거다.
시커먼 검을 들고 저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당하는 사람이나 옆에서 보는 사람은 복장이 터져도 한참 전에 터져 속이 다 문드러질 지경이다.
이미 야타가라스의 빡대가리 속에서는 내가 네오-서울을 정복하기 위한 비밀 지령을 받고 외계에서 내려온 멸망신의 사도 정도로 결론이 난 게 아닐까.
그리고 그 결론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기관차, 아니 자기부상열차 위에 탑승해 버린 것 같다.
“아니 이딴 헛짓을······후우······.”
샴록의 한숨에서 많은 것이 묻어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야타가라스는 여전히 자기 할 말만 했다.
“그리고 트라이포드가 리벨리온을 팽한 것에는 오메가의 의지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맞나?”
나를 보는 샴록의 눈가가 떨렸다.
“조언 아닌 조언 때문에 트라이포드와 거리를 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기에는······.”
“영향이 아주 없다는 것은 아니군. 됐다. 들을 건 다 들은 것 같으니.”
“오메가를 옹호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건 비약이야! 우리는 오메가의 말과는 관련 없이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려고 했었어!”
“기껏해야 테러나 하고 다니던 너희가 무슨 수로? 아직도 모르고 있군. 너는 트라이포드의 수장인 오메가에게 장기 말로 쓰이고 버려진 거다.”
“아니, 그······.”
“네 할 일은 끝났다.”
야타가라스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샴록을 향해 던졌다.
작은 구체 같은 그것은 휘리릭 소리를 내며 날아가더니 샴록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어레스트와 비슷한 구조 같았지만, 더 빠르고 정교하고 심지어 대상에게 가까이 갈 필요도 없어 보였다.
샴록도 반응하려 했지만 길게 늘어진 야타가라스의 그림자 내부에 있기도 했고 다리 한쪽이 불편한 상황이라 꼼짝없이 포박당한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샴록의 몸을 감싼 그 기구는 점차 얼굴로 올라왔고, 곧 샴록은 눈과 코만 밖으로 내놓은 미라 같은 형상이 되어버렸다.
“으읍! 으으으!”
“모든 방법의 자해, 자살이 불가능하니 용써도 소용없다. 설령 죽었다고 해도 다시 살려낼 방법도 많고.”
야타가라스는 독기에 절여진 저 엘프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억울해서라도 죽지는 못하겠다는 의지와 독기가 펄펄 넘실대는데······.
야타가라스의 신형이 나에게로 돌아섰다.
“이래도 발뺌할 셈인가?”
“조금이라도 설득력이 있어야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건 그냥 당신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거라니까?”
“삼자대면까지 했는데도 이렇게 뻔뻔할 줄이야.”
세 명이 모였다고 삼자대면이 아니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대신 다른 방향으로 야타가라스의 사고를 유도했다.
“······내가 트라이포드의 수장이라는 결론은 절대로 수긍할 수 없지만! 백번 양보해서, 과정만 봤을 때는 당신이 의심을 할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해. 여기까지는 알아듣지?”
이 자식은 심하게 빡대가리라서 하나하나 되짚어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야타가라스는 내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드디어 모든 걸 인정하는군.”
양손에 주먹 쥐고 그사이에 저 자식 머리통 넣고 마구 돌리고 싶다.
어디서 주워듣기로는 화병이 한국인한테만 있는 병이라던데 전 세계 누구라도 야타가라스와 얘기를 나눠보면 화병을 앓게 될 거다.
장담한다.
분노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물고 말해야 했다.
“결그그 으느르 그증만(결과가 아니라 과정만). 그증!”
옆을 보니 샴록도 눈으로 쉬지 않고 야타가라스를 욕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답답해 봐야 쟤만큼 답답할까. 대충 보니 며칠이고 시달린 것 같은데.’
남의 불행에서 자기 행복을 찾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겠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자, 나는 야타가라스 그쪽을 의심하고 있어. 왜냐? 대량의 은닉 자금이 공공 집행본부로 흘러든 정황이 있는데, 공공 집행자 중 당신을 제외한 모두는 깨끗하거든. 이렇게 나를 붙잡아놓고 굳이 자백받으려는 것도 당신에게 씌워진 의심을 내게 덮어씌우려는 게 아닐까 싶은데. 그렇잖아. 그냥 쓱싹 해버리면 될 걸 왜 이 정도로 내 자백에 집착하는 거야.”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혹시 모를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으아아아! 그쪽은 지금 고의로 피해자를 만들어내고 있잖아! 이 빡······.”
빡대가리라는 단어를 완성하지는 않았다.
친구끼리 서로 장난으로 병신이니 모지리니하고 놀려도 정말 아픈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되는 것처럼, 진짜 빡대가리에게 빡대가리라고 하면 죄를 짓는 것 같았다.
생각은 많이 했지만 그걸 밖으로 내뱉는 건 조금 다른 문제니까.
하지만 내가 완성하지 못한 단어를 샴록이 대신 외쳐주고 있었다.
“으으으으! 으으으으!”
답답함을 토로하다가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들어 야타가라스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를 의심하고 있다고 했지?”
“그렇다.”
“그럼 공공 집행본부로 흘러간 자금에 내가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았을 것 같은데?”
“······정체를 은닉했겠지.”
추측성 발언.
야타가라스를 압박했다.
“확실한 건가? 오히려 이렇게 나를 붙잡아놓고 자백을 기다리는 것보다, 자금 흐름에 내가 개입되어 있다는 걸 찾는 게 빠르고 확실한 방법 아닌가? 자백했다고 한들, 말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데?”
“지시만 했겠지.”
역시 단답형 추측성 발언.
“이 부분에서는 확신이 없군? 설마 모른 척하는 건가? 아니면 지금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거 아냐? 수사망이 조여오니까 나한테 덮어씌워서 털어낼 속셈인 것 같은데. 자금 흐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왜 거기서부터 추적하지 않고 대뜸 내 자백을 받으려 했냐는 의심이 생길 수 있으니까 일부러 외면해서 의혹이 시작될 빌미도 주지 않으려는 거잖아.”
“비밀 집단의 수장이 갖춰야 할 요건 중에 풍부한 상상력이 있나?”
그렇게 말한 야타가라스가 검을 들어 올려 자세를 취했다.
그것만으로 야타가라스는 예기銳氣를 극도로 압축한 한 자루 검이 되었다.
분명 사람의 형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날이 시퍼렇게 잘 벼려진 검의 이미지가 야타가라스의 위에 덧씌워졌다.
그의 전신을 뒤덮은 그림자를 뚫고 피어오르는 압박감만으로도 피부가 저릿할 정도였다.
밤의 바닥을 긁어내는 그의 음울한 목소리가 안개처럼 주변을 장악했다.
“수장이 죽으면 남은 놈들이 더 은밀히 숨어들 것 같아 되도록 협조를 받으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만드는군. 이것조차 계략인가?”
“내가 할 소리야. 이런 식으로 본인을 감추면서 추적을 피할 수 있었던 거군. 몇 명이나 입맛에 맞게 조작한 후 죽였을지 생각하니 소름인데.”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
그 말과 함께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야타가라스의 그림자가 일제히 솟더니 나를 향해 조여들었다.
이제는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칼자루를 뽑아 비틀었다.
그리고 광자 검날이 옆을 보도록 눕힌 후―
[만사재시 매사필종]
검에 닿은 그림자들이 부스러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곡예].
상체를 꺾어 뒤통수가 바닥에 닿을 듯 몸을 기울였다.
배 바로 윗부분으로 시커먼 광자 검날이 스쳐 가는 것이 느껴졌다.
흩어낸 그림자의 원이 아직 다 복구되지 않은 부분이 보였다.
‘저기로 빠져나가면······.’
하지만 그렇게 몸을 움직이기 직전, 샤르륵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아주 고운 옷감이 서로 스치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부드럽고 감미로운 소리였다.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몸을 잔뜩 부풀린 야타가라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위를 스쳐 가던 자신의 검을 치켜올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우면서도 품고 있는 강인함이 느껴졌다.
물리 법칙이 야타가라스를 잡아두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갈 정도로 상식 밖의 움직임이었다.
직감했다.
‘막거나 피하지 못하면 죽는다.’
[복근 강화]
용수철처럼 늘어졌던 상체가 튕겨 올라왔다.
하지만 야타가라스의 시커먼 검은 이미 내 머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복근만으로는 부족했다.
[코어 강화]
인간 근육의 70%는 하체에 있다고 하던가.
종아리와 허벅지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근육이 팽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상체를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하체도 앞으로 미끄러졌다.
아주 간신히 야타가라스의 일격을 피할 수 있었다.
정수리 근처 머리칼이 좀 베여서, 타는 냄새와 함께 흩날렸지만 이 정도는 괜찮다.
아직 내 방에 탈모 연고가 남아있으니까.
한편, 어마어마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기에 그대로 바닥을 베어버릴 것 같던 야타가라스의 검은 바닥에 닿기 직전 우뚝 멈춰 섰다.
소름 돋을 정도로 정교하고 세밀한 힘 조절.
몸이 좋으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더니, 야타가라스가 딱 그런 케이스라는 것에 내 모든 걸 건다.
한탄이 절로 나왔다.
“빡대가리랑 싸우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이 없다고 그랬는데.”
야타가라스가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몸과 검이 어찌나 새카만지 검이 몸인지 몸이 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검막]
야타가라스의 검과 맞닿은 내 검날에서 콰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현상.
상성 열세가 확연했다.
교차한 검을 사이에 둔 야타가라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듣던 것보다는 못한 것 같은데.”
있는 힘껏 야타가라스를 밀어낸 후, 튀어 오르는 스파크를 티셔츠 주변으로 가져다 댔다.
스파크를 흡수한 티셔츠가 그걸 다시 검으로 밀어 보냈다.
광자 검날의 푸른 빛이 부분부분 검게 물들었다.
“음?”
야타가라스가 처음으로 당황하는 목소리를 흘렸다.
[파도천]
검을 휘둘렀다.
꽉 움켜쥐고 있던 뜨거운 돌을 놓아버리듯, 광자 검날은 시커먼 검기를 토해냈다.
그리고 그것들이 향하는 곳은 야타가라스가 아니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짓다 만 건물이 있는 허름한 공사장.
검기는 공사장 곳곳에 놓여 있던 쓰레기들을 휩쓸고 터트렸다.
굉음과 함께 쓰레기 더미가 건물 바깥으로 흩날렸다.
“무슨 짓이냐.”
야타가라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 익숙한 소리가 건물을 타고 오르는 것이 들렸다.
토옹- 토옹- 토옹-
발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찾았다능! 오메가쿤! 어? 야타가라스쿤도 있었냐능?”
상성이 밀리면 지원군을 부르면 된다.
야타가라스가 외쳤다.
“나다! 오메가는 네오-서울의 안위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조직의 우두머리다! 나를 도와 제압해!”
“호에에에! 오메가쿤! 설마!”
“믿지 말아요! 야타가라스야 말로 저한테 혐의를 뒤집어씌울 셈이니까!”
“흐에에에! 야타가라스쿤! 정말로?”
봉을 꺼내든 나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와 야타가라스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지원군······은 맞겠지?
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