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그림자를 일으켜 세워 놓은 것 같은 야타가라스의 전신에서 얼굴이 있을 법한 부위가 멈칫했다.
얼굴의 전체적인 형태는 물론이고 눈두덩이나 안구의 형태가 보이지 않아 정확히 어딜 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내 허리춤, 정확히 하면 칼자루에 시선이 닿아있는 것 같았다.
모습처럼 어딘가 음울함이 묻어나는 야타가라스의 목소리가 내 귓가로 흘러들었다.
“혹시 모를 위협이 있을 수 있으니 납검은 하지 않겠다.”
그러더니 그의 발밑으로 그림자가 꾸물대며 길게 뻗더니 내가 앉아 있는 낡고 녹슨 의자 주변에 원을 형성했다.
그림자는 점을 채우듯 원의 경계에서부터 의자로 다가왔다.
내가 다리를 뻗으면 아슬아슬하게 닿을 것 같은 지점, 그곳에 이르러서야 그림자는 영역을 확대하는 것을 멈췄다.
“도망칠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을 거다. 그림자에 닿게 되면······.”
“도망치려고 마음먹었으면 진작에 뭐라도 하지 않았겠어?”
“······.”
“나도 그 쪽한테 묻고 싶은 게 많아. 툭 터놓고 얘기하자고. 나보고 네오-서울의 안위를 위협하는 어쩌고 그랬지? 당신이야말로 그 집단의 수장 아니야?”
그 말에 내 발치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원의 내부 경계가 물결치더니 나를 향하는 바늘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안하무인이라는 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알려진 정보가 축소되었다는 느낌마저 드는군. 그런 얄팍한 블러핑은 집어치우는 것이 네게 도움이 될 거다.”
정보가 축소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스냅샷을 비롯한 루트와 앨리스가 주야장천 노력한 덕일 것이다.
야타가라스의 발언에 대꾸했다.
“난 블러핑하고 있지도 않고, 그 쪽한테 도움받을 생각도 없어. 안하무인이라고? 나한테 줘 터져본 적도 없는 애들이 꼭 그런 말 하더라. 지금은 상성······아니 사정도 있고 당신이 공공 집행자 정도 되니까 얌전히 앉아서 대화로 풀려고 노력 중인 거야. 분위기 험악하게 만드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 아닌가?”
“좋다.”
바늘 형태의 경계가 다시 원래의 둥그런 모습을 되찾았다.
시커먼 광자 검날을 역전개 하지 않은 채로, 야타가라스의 목소리가 다시 나를 향했다.
“리벨리온을 추적하는 도중, 그들의 상위 조직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연, 스펙터 등의 범죄자로 구성된 간부, 이미 네오-서울 곳곳에 뻗친 영향력. 좌시할 수 없는 수준이더군. 심지어 그들에게 제공되는 인적, 물적 자원은 아시아 곳곳의 다른 권역들로부터 오고 있었다. 주로 중화권 권역이었지만 열도의 권역에서도 지원 흔적이 발견됐지.”
말을 멈춘 야타가라스가 다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림자 너머 눈이 있음 직한 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야타가라스의 물음이 날아왔다.
“놀라지 않는군.”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네가 관련된 일이어서가 아니라?”
노골적인 의도가 보이는 뒤틀린 반문.
이 정도에 흔들릴 내가 아니었다.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것까지 도달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어. 어찌나 은밀한지,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내게 도움을 주는 이들 중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 이들도 제대로 된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 그걸 혼자 행동한다고 알려진 당신이 줄줄 읊는 지금 상황이야말로 나는 의심스러운데.”
“네게 도움을 주는 이들의 정체를 밝혀라.”
“이거 왜 이래. 늘 바른길로만 살지는 않았지만 신뢰 떨어지면 바로 밥 굶는 게 이쪽 필드야. 불란다고 술술 불면 되겠어? 그쪽이야말로 어디서 그런 정보를 알 수 있었는지 말해.”
“묻는 건 내 쪽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질문은 되도록 명료하게 해달라고 말한 것 같은데. 그리고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당신과 대화를 하는 거고, 이 정도면 굉장히 협조적으로 나오고 있는 거야.”
펠루다 같은 애들이 지금 야타가라스처럼 나를 취조하는 분위기를 조성했으면 이미 등딱지 다 깨져서 병원 예약 알아보고 있을 거다.
위올란트가 야타가라스의 손에 들린 검에 대해 경고만 하지 않았어도 저기서 같은 말 뱅뱅 돌려 하는 시커먼 놈한테 달려들었지 않았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야타가라스가 트라이포드와 관련 있다는 것이 유력하긴 하지만 아직은 확정이라고 단정을 짓기에는 이르기에 조심하는 부분도 있었다.
엄한 사람에게 선무당 짓 해서 괜한 불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만나온 공공 집행자들이 노덴스를 제외하면 대부분 어디 한군데 나사가 빠져 있긴 했지만 적어도 능력만큼은 절대로 폄훼할 수 없다는 것을 몸소 겪었기 때문에 내 나름의 존중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마음 한구석 호승심이 끓어오르는 것까지 막아낼 도리는 없었다.
계속해서 내 시선이 존속살해라는 저 검으로 향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어느 정도길래 위올란트가 그렇게 경고했을까.’
‘엄청난 검사라던데 무기 빨인 건가? 아니면 그냥 자체로도 강한데 무기는 도울 뿐인 건가?’
‘검을 사용하지 않고 싸우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항공모함······잘랐다고? 그 정도로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역시 무기 빨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과 승부욕이 내면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이건 나르시스와의 전투 직후여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명경지수]와 같은 멘탈 계열 스킬로 이 특수한 상황에서 오는 압박감을 날려버리고 있었지만, 전투 직후의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황.
그리고 생각보다 나르시스를 원만하게 처리했다는 사실 역시 내 자신감에 풀무질을 하고 있었다.
WSS에서 색승과 재회했을 때는 미친놈에게 맞불을 놓아야 했기에 금단의 비기 수준으로 아껴왔던 [광란]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나르시스에게는 [광란]을 사용하기는커녕 아주 멀쩡한 정신으로 [원영신], [궁뢰] 같은 스킬들로 압박했다.
그리고 [궁뢰]에 더해 최근에 잉그리드에게서 배운 늑대인간들의 궁술까지.
마지막은 아무래도 손에 익은 검술로 깔끔히 마무리 지었다.
검술을 제외한다면 모두 색승을 렙틸리비아로 보낸 이후에 익힌 것들이었다.
물론 스승과 제자가 있을 때 늘 스승의 성취가 높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르시스는 아마 신시아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 텐데도 대뜸 미친 수준으로 들이댄 걸 봐서는 강자의 반열에 들었으면 들었지 절대 약하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런 나르시스를 어렵지 않게 제압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팔자인지 주변에 워낙 괴물들만 몰려들고, 그 괴물들에게 익숙해지면 또다른 괴물들이 튀어나오는 탓에 상대적으로 내 존재감이 작아져서 그렇지 나는 강해졌다.
하기사, 내가 그 역경과 고난의 길을 겪을 때 누군가 옆에서 토템처럼 서 있다가 떨어지는 쩔경험치만 주워 먹었어도 급성장을 했을 텐데 눈에 보이지도 않고 계량 계측할 수도 없지만, 어쨌든 의뢰와 그 부가적인 일들을 몸소 헤쳐나와 현실 경험치를 먹은 나는 성장 중이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체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오히려 스스로 알아채는 것이 늦은 것이 아닐까.
이렇게 지금 내 마음속에서는 이 상황을 최소한의 충돌로 마무리 짓고 싶은 한 갈래 가지와 최대한의 충돌을 한번 벌여보고 싶은 다른 갈래 가지가 마구 엉켜 들고 있었다.
‘저번에 위타천 보니까 싸워볼 만할 것 같던데, 그럼 야타가라스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검만 조심한다면······. 그럼 마법 위주로? 그래도 검사라는데 검대검으로 맞붙어 보고 싶기도 하고······. 검술을 봉인하면 주위에 써먹을 만한 게 있을라나? 스킬 어떻게든 짜내서 활용하려고 하니까 옛날 생각나고 그렇네.’
잔뜩 열이 받은 위타천이 내게 영력 파동을 날릴 때 옆에 등딱지 달린 뭔가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어차피 중요한 건 아니었다.
속으로 상황을 풀어나갈 이런저런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중, 야탸가라스가 다시 내게 말했다.
“그들이 스스로를 칭하는 이름은―.”
다음 단어를 동시에 말하는 야타가라스와 나였다.
“트라이포드.”
이제는 입 밖으로 꺼내는 것도 어딘가 불쾌함이 느껴지는 단어였다.
야타가라스의 말이 다시 내게 닿았다.
“그리고 자체적인 추적 결과, 해결사 오메가는 계속해서 트라이포드와 접점을 가진다.”
접점이라는 아주 부드러운 어감의 단어.
듣자마자 스킬로 가라앉혀 두었던 멘탈이 뒤흔들렸다.
“접점? 누가 들으면 어디 좋은 인연이라도 생긴 줄 알겠네. 나는 그냥 하루하루 적당한 의뢰나 쳐내 가면서 살고 싶은 사람인데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 이유가 뭔 줄 알아? 그 미친 것들이 계속 내 앞길을 막으려 들어서 내가 선제적으로 처리하려고 그러는 거야. 아무짝에도 관심 없는 네오-서울의 안전은 거기에 딸려오는 거고. 오히려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을 내가 해주고 있으니까 고맙다고 감사패라도 줘야 하는 거 아냐?”
내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야타가라스는 할 말만 이어갔다.
“트라이포드는 분명 위협적이고 거대하지만, 내부의 결속은 약하다. 애당초 범죄자 따위가 간부로 앉은 조직이니 뻔하지. 너는 그들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내부의 기강을 위해 숙청 작업에 나서지 않았나.”
“숙청······설마?”
“그래, WSS에서 색승을 제압해서 렙틸리비아로 보내 색승을 죽게 했지. 하부조직인 리벨리온을 이용해 조직 내에 의도된 균열을 만들면서까지. 다른 간부들에게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경고를 전달하면서 심지어 마지막에 자기 손은 더럽히지 않는 방식, 나도 깜빡 속을 뻔한 계략이었다.”
얘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
위타천과는 또다른 마이페이스다.
위타천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마이페이스지만, 야타가라스인지 꺼먼쓰레기봉투인지 하는 이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여서 더 소름 돋는 마이페이스다.
결론을 만들어놓고 그 결론에 모든 원인과 과정을 짜 맞춰 끼워 넣는 음모론자들이 이런 부류 아닐까.
“후······색승을 이승 하직하게 한 건 인정하는데······아 나는 아니라니까! 억울해 미치겠네. 이봐! 그쪽! 아니 야타가라스 씨! 얼마 전에 서해 권역에 고래 날아다닌 건 알지? 트라이포드랑 브리가드랑 손잡고 나를 죽이려 들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나는 그 와중에 머리카락이 다 날아가서 다시 나게 하려고 개고생 고생했는데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조직 수장이면 그 지랄을 왜 하냐고!”
“네게 시선이 쏠리자 태백 권역으로 가서 잠잠해지기를 기다릴 셈이었겠지.”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으아아아! 씨바알! 이미 그쪽 대가리 속에는 결론이 나와 있는 것 같은데 그럴 거면 왜 대화라는 단어를 쓰는 거야!”
참지 못하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자 야타가라스의 그림자로부터 길게 나와 바닥에 있던 원의 경계가 내 가슴 높이 정도로 솟았다.
“앉아라. 가능하면 자백받고 싶었는데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군.”
“인정할 게 없으니까!”
“삼자대면이다.”
“삼자대면? 누굴?”
“보면 안다.”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린 채로, 야타가라스는 다 짓지 못해 내장재가 훤히 보이는 벽 너머로 터벅터벅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모습을 보였을 때 야타가라스의 검을 들고 있지 않은 손에 누군가가 억세게 붙잡혀 있었다.
“샴록?”
공공 집행본부 지하에서 마고, 위타천과 함께 영상으로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엉성한 의족, 허름한 옷, 피골이 상접한 얼굴까지.
처음 예공방에서 만났을 때 혹시나 모를 재회를 위해 내가 [체취 남기기]를 사용한 그 엘프와 동일한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입에 단단히 매여있던 재갈을 야타가라스가 풀어주자 샴록이 내게 말했다.
“오메가! 저를 구하러 온 겁니까?”
“아니, 나도 잡혔어. 당신이 여기 있는지도 몰랐고.”
샴록의 눈에 피어오르던 기대감이 여름날 아스팔트 위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하지만 악착같은 독기만큼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샴록이 내게 말했다.
독기와 한이 넘치는 시선을 야타가라스에게로 향한 채였다.
목소리에서도 울분이 흘러넘쳤다.
“이 자식과 무슨 대화를 나눈 건지는 모르지만,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빡대가리니까요.”
너도 이미 겪었구나?
씹어 죽이고 싶다는 저 표정이 이해가 된다.
나도 비슷한 얼굴이지 않을까.
“시작하지.”
야타가라스가 자신만의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이 답답한 짓거리를 다시 시작하려고 할 때, 내게 머리에 직통으로 울리는 일종의 메시지가 있었다.
-오메가쿤! 근처에 있는 것 같은데 들리냐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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