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79화 (180/258)

179.

179.

“대담한 건지 무모한 건지 본좌는 알기 어렵구나.”

남산 꼭대기에 있는 페룬 마탑의 전망대 겸 카페에서 이수련이 자기 앞에 놓인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마신 뒤 내게 한 말이었다.

위타천의 집에 다짜고짜 들어가서 커넥션이 있냐 없냐를 물어봤다는 얘기를 들은 직후이기도 했다.

내 옆에서 페룬 마탑과 콜라보한, 기간 한정 판매 오일 샌드를 신나게 먹고 있던 앨리스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이수련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니까요. 그 주상복합 아파트 전체가 흔들려서 주민들 다 비상 대피했다는 기사 떴을 때 얼마나 놀랐다고요. 설마 사장님이랑 관련 있겠어 했는데 관련 있는 정도가 아니라 사태의 주역일 줄이야······.”

구미호와 안드로이드의 강력한 압박에 나는 괜히 할 말이 없어져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커다란 창 너머로 펼쳐진 네오-서울의 전경은 내가 알던 서울특별시의 것과는 상당히 달랐지만 그래도 어딜 둘러봐도 숨이 턱 막히는 대림 에어리어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요새 늘 사무실에만 있는 것 같다며 앨리스가 좀 나가자고 제안을 한 덕이었다.

당연히 이수련과 신시아는 굉장히 좋아하며 찬성했다.

나는 그다지 생각이 없었지만 결국 3대1이라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따라나서야 했다.

그리고 앨리스의 그런 발언과 행동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이 카페에서만 파는 기간 한정 콜라보 오일 샌드를 먹기 위함이었음을 알아챈 것은 일단 카페 안에 온통 안드로이드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메뉴의 상상하기 힘든 비범함 때문이기도 했다.

이수련이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보기에는 로봇 정비에 쓰이는 기름과 흡사한데 신기하게도 미숫가루 맛이 나는구나.”

실제로 바닥을 보이는 이수련의 잔에 담긴 음료는 굉장히 끈끈한 질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냄새는 곡물 냄새가 났다.

신시아도 끄덕이며 포크를 들어 앞의 접시에 놓인 기름 묻은 걸레를 자르자 달콤한 향이 확 풍겼다.

겉부분만 모양을 낸 케이크였다.

“그러게. 컨셉도 좋고 발상도 좋네. 처음에는 뭐 이런 걸 주나 했는데.”

우리가 신기해하는 모습들을 보자 앨리스가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드로이드나 사이보그 타겟 이벤트긴 한데 동행자들까지 다 오일 샌드를 먹을 수는 없잖아요. 오일 샌드만 나왔으면 저도 오자고 말도 안 꺼냈죠.”

“근데 오일 샌드는 왜 페룬 마탑이랑 콜라보를 했대?”

앨리스 앞에 놓인 오일 샌드 몇 개를 가져와 살펴보니 샌드의 과자 부분에 페룬 마탑의 문장, 우람한 팔뚝, 야구 배트 같은 것들이 양각되어 있었다.

내 눈에는 이런 게 팔리나 싶었지만, 카페를 가득 채운 안드로이드와 사이보그들은 재밌다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내 질문은 앨리스가 아니라 이수련이 답했다.

“페룬 마탑은 특수한 형태의 맞춤 파츠나 부속 사지를 잘 만들기로 정평이 나 있느니라. 강철계 마탑 중에서도 가장 질적으로 우수한 마법사들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냐. 대규모 화력에 집중하는 이들이 있으면 작고 섬세한 것을 잘 다루는 이들도 많겠지. 비록 페룬 마탑의 전쟁 사업이나 철강 사업에 비하면 매출 규모가 많이 작다고 해도 충성 사용자가 타사에 비해 아주 많지.”

‘그 충성 사용자를 우리가 좀 뺏어와야 할 텐데······.’라고 이수련이 중얼거리는 사이 앨리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페룬제 파츠를 파츠 계의 오트쿠튀르(Haute couture, 맞춤 고급 의류)라고 하는 안드로이드들도 많아요.”

“그 정도라고? 그럼 퓨전 코프는?”

“원격 조종 로봇이나 산업 로봇 쪽에서는 적수가 없다고 봐야 하는데, 이쪽 파츠 사업에 뛰어든 지는 얼마 안 돼서 후발주자 입장이죠.”

테오릭 경의 기묘한 그 금속 마스크도 기술력 덕이었나.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만 했다.

당장 연락하면 그게 그렇게 궁금했냐면서 알려줄 것 같긴 하지만 요새 조금 잘나간다고 자기는 잊었네, 고기 먹으러 마탑에 언제 올 것이네, 학교 사업 홍보 모델로 날 쓰고 싶네 마네 하면서 얘기가 하염없이 길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생각만 해야 했다.

지금도 페룬 마탑으로 오는 줄 알았으면 절대 안 왔을 거다.

테오릭 경이 좋은 할배긴 한데 조금 부담스러워······.

그리고 기껏 좋은 일 하면서 대림 에어리어에 사무실 둔 해결사를 모델로 쓰겠다는 건 아무리 봐도 나를 맥이겠다는 의도로 밖에는 읽히지 않는다.

그렇게 서로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며 잠깐이나마 요 근래 이 ‘팀 오메가’가 알게 모르게 공유하던 긴장과 부담감을 털어냈다.

하지만 어디 털어낸다고 쉽사리 털어내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지라 앞에 놓인 케이크를 다 먹기 무섭게 신시아가 내게 말했다.

“그럼 위타천 님은 용의선상에서 제외해도 되는 걸까요?”

“음······. 위타천이 가연 씨를 엄청나게 아끼고, 그런 가연 씨 앞에서 자기 입으로 아니라고 선언하긴 했지만······.”

“사장님한테 되게 우호적이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위타천을 제외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 때, 이수련이 팔짱을 낀 채로 똑 부러지는 목소리를 냈다.

“본좌는 아직이라 생각하느니라.”

신시아가 곧바로 반응했다.

“그건 아마 이수련 네가 위타천 님이랑 가연 씨를 못 만나 봐서 그래. 둘이 아주 지고지순 천생연분이라니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거짓말을 어떻게―.”

“하지. 아주 잘.”

칼같이 튀어나오는 이수련의 말에 신시아가 잠깐 흠칫한 사이, 이수련이 말을 이어나갔다.

“사랑은 화학 작용일 뿐이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화학 물질의 반응에 미쳐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도 있고, 그걸 보면서도 사랑이라는 거짓을 말하는 이도 있느니라.”

“그 말은 위타천 님과 가연 씨의 사랑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가연 씨는 내 친구야. 말조심해.”

“본좌는 그 둘을 깎아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라.”

“그럼 오메가 님에 대한 네 말과 행동도 마찬가지 아니야? 다 화학 작용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

“강한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과 훌륭한 후대를 낳고 싶어 하는 것은 유전자 레벨에 새겨진 본능이니라. 사랑 같은 실체 없는 감정놀음과는 다른 것이지 않겠느냐.”

“그럼 너는 오메가 님한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거야?”

“지금까지는 없었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간과 사건의 불확실성을 감안한다면 계속 없으리라고는 확답할 수 없느니라.”

신시아가 버럭 화를 터트렸다.

“답답한 이과 감성!”

이수련은 하이테크 기업의 총수이고 그 이전에 본인이 공학자라 그런지 논리에서 굉장히 철저한 부분이 있었고, 이런 류의 논쟁이 벌어지면 늘 답답해하는 것은 신시아 쪽이었다.

조력자를 찾는 신시아의 시선이 앨리스에게 닿았다.

시선을 피하는 앨리스가 작게 말했다.

“저는 그 답답한 이과 감성으로 만들어진 존재라 아무래도 수련 언니 쪽이······.”

앨리스에게 락온 되어 있던 시선을 풀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신시아였다.

나 좀 이런데 안 집어넣으면 안 되나?

누구 손을 들어도 누군가에게는 욕을 먹잖아.

결국 욕을 먹을 거라면 양방향으로 최대한 덜 먹는 방향을 택했다.

“일단 이수련 씨가 위타천과 가연 씨 둘을 본 적 없다는 건 팩트죠?”

이수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거짓말을 할 수는 있다는 이수련 씨의 말도 완전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위타천에게 부탁한 일 중에는 트라이포드에게 해가 될 만한 일도 있단 말이죠. 사메의 본거지를 털어달라고 한 일 같은 거요.”

내 부탁에 위타천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해 양동작전을 성공시켰다.

심지어 일본 열도에 있는 권역들에게 공이 돌아가 자신의 이름은 단 한 줄도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그래서 100% 제외하기는 힘들지만 다른 공공 집행자들에게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로구나.”

이수련이 수긍하자 신시아가 얼른 끼어들었다.

“가연 씨랑 자주 만나면서 이상한 점이 없나 확인해 볼게요.”

대강 교통정리가 끝나고 앨리스에게 물었다.

“마고는?”

“샌디 비치랑 루트가 캐고 있는데,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쉽지 않나 봐요.”

“계속 상황 물어보고 알아낸 거 있으면 바로 알려줘.”

“야타가라스는······마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나?”

“네. 딥스페이스나 다크웹 어디를 뒤져도 야타가르스에 대한 건 다 뜬소문밖에 없어요. 이게 진짜 도시 전설 아닌가 싶더라니까요.”

그러던 중 신시아가 속상한 목소리를 냈다.

“오메가 님이 이런 뒷조사나 하고 있을 분이 아닌데.”

“그렇지도 않아요. 어떻게 보면 이게 사무실 근본인데요.”

내 말에 앨리스가 킥킥거리며 맞장구쳤다.

“언니들은 사무실이 자리 잡히고, 사장님 이름이 좀 괜찮게 알려지고 난 이후에 봐서 잘 모를 건데요. 혼수상태에서 일어난 해결사가 할 수 있는 게 이런 일들이었어요.”

“그래?”

내가 이어받았다.

“몇 번째 애인이 바람 난 것 같으니까 뒷조사 좀 해봐라. 우리 조직의 누가 다른 조직에서 스카우트 받는 것 같으니까 한 번 떠봐라. 이런 의뢰도 안 가리고 해야 간신히 사무실 월세 맞춰 내고 그랬죠. 어떻게 보면 제가 하는 일이 그때랑 다른 건 없어요. 조사 대상만 달라졌을 뿐이죠.”

앨리스가 정정해주었다.

“많이요.”

“그래, 많이 달라졌지.”

이수련이 눈을 감고 끄덕거렸다.

“성공한 이성에게 끌리는 것 또한 본능의 영역이니라. 그 성공이 스스로 일구어낸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깔끔하게 무시하고 내 할 말을 했다.

“신시아, 뒷조사랑 낚시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요?”

“뭔데요?”

“조급함을 없애고 기다리는 거요. 그러면 던져둔 낚싯대 중 하나 정도는 반응이 오기 마련이거든요.”

“오······낚시 해 보셨나 봐요?”

“아뇨. 그냥 주워들었어요.”

앨리스가 나를 보고 혀를 찼다.

“그냥 그렇다고 하면 알아서 생각들 할 건데 사장님은 꼭 쓸데없는 말을 해서 이미지를 말아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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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SS 강화 산업지구의 공장 밀집 지역.

달마저 흐려진 늦은 밤.

수연이 주위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한 공장으로 접근했다.

녹슨 자물쇠로 보아 폐공장이었지만 수연은 자연스레 문 사이의 틈을 스르륵 통과해 안으로 들어섰다.

공장 안으로 몇 걸음 들어서자, 음침하고 답답했던 폐공장의 풍경이 한순간에 작전 지휘 본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3D 홀로그램과 진법을 응용한 가림막을 통과한 수연이 마주한 것은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었다.

안에 있던 수연이 끝이 갈라진 붉은 혀를 날름거리자 밖에서 들어온 수연이 말했다.

“그딴 장난은 재미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수연의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안에 있던 수연의 모습이 한순간에 오메가로 바뀌었다.

수연의 표정이 굳었고, 오메가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막 굳고 그런가 봐?”

오메가의 모습이 색승으로, 스콰이어로 변하다가 딱히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드워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변형 벌레를 충원한 스펙터였다.

“드디어 다 길들였어. 너무 오래 쉬었다고. 똥개 돌보는 것도 지쳤고.”

스펙터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액체가 찬 커다란 원통형 기계 안에 들어간 웨리바흐가 있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웨리바흐의 입가에 씌워진 마스크에서 작은 공기 방울이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밀입국한 톈진 권역의 과학자들이 계속해서 웨리바흐의 상태를 체크했다.

스펙터는 수연에게 말했다.

“중화권 놈들이 언제 결과를 내냐고 성화야. 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나한테 지랄을 해대서 아주 곤란했다고. 그리고 슬슬 열도에서도 눈치를 주는 것 같던데?”

“말했잖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맨날 같은 소리. 이것도 잘난 ‘그분’의 지시겠지? 예이 예이 따라얍죠. 암요. 얼굴 한 번 보이지 않고 해라 해라만 하시는 분인데 그걸 말이라굽쇼.”

“그분이 누군지 모르고 있는 편이 더 좋을 거라고 누누이 얘기하지 않았나?”

“어떤 대단한 분인지 들어나 보자니까!”

“감당하지 못 할 말은 하지도 마.”

“뭐 얼마나 굉장한 작자길래? 걸으면 땅이 뒤집히고 숨 쉬면 하늘이 무너지고 막 그러나? 왜? 아예 야타가라스라고 하지? 혼자서 항공모함을 부수고 전쟁을 종결시킨 야타가라스가 그분이라고 하지 그래!”

제법 긴 침묵 후, 스펙터를 응시하던 수연이 말했다.

“마음대로 생각해. 다만 여기까지 온 이상 너도 발을 빼기는 글렀다는 것 정도는 확실히 알아야 할 거야.”

몸을 돌린 수연이 자신의 공간으로 스르륵 멀어지다 말했다.

“머지않아 우리 쪽으로 합류하는 인원이 있을 거야. 교통정리는 알아서 잘해.”

“누군데.”

“브리가드의 생존자들, 그리고―.”

이어지는 수연의 말에 스펙터는 ‘그분’에 대한 생각이 모두 날아갔다.

심지어 미묘했던 수연의 침묵마저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아다의 스승. 우리의 뜻에는 함께할 수 없지만 실종된 제자를 찾아야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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