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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77화 (178/258)

177.

177.

“긴장 풀어. 내가 얘기했지? 유사시에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라고. 안 벌어지면 장땡이야. 그리고 너한테 얼마나 좋은 자리냐.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자기 눈에 안 차면 길가에 돌아다니는 돌멩이만도 관심 안 두는 사람이 위타천인데 나랑 같이 가면 최소한 돌멩이보다는 좋게 봐줄걸?”

잔뜩 얼어있는 펠루다의 등딱지를 후려치며 말했다.

휴가 중에 집에 있다가 나왔다는데 어딘가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탐사단 호위대장 할 적에 읽어본 펠루다의 프로필에 따르면 예전에 약물에 의존했던 때가 있다고 하는데 설마 다시 손댄 건가?

그러게 왜 몸은 물론이고 정신까지 피폐해지게 하는 걸 손을 대고 그래.

등딱지로는 반응이 신통치 않아서 손등으로 녀석의 뺨을 툭툭 건드리니 동태눈깔처럼 풀려있던 녀석의 눈에 초점이 잡혔다.

“으어!”

그런 펠루다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너 개인적인 부분까지는 뭐라고 터치 못 하는데, 이상한 거 하고 온 거 아니지?”

“아뇨. 전혀요. 그냥······이걸 거절해야 하는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거절은 거절이다. 이 자식아. 그럼 조금 전에 내가 뭐라고 했는지 다시 읊어봐.”

“······다시 한번만 얘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허. 너 정신 똑바로 차려라. 탐사단 호위하러 가는 것보다 20배는 위험하다고 생각해.”

“그런 곳을 왜 가죠?”

“리턴이 그때의 100배는 넘을 수도 있으니까. 여튼 다시 얘기할 테니까, 잘 들어라.”

다시 한번 ‘유사시에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위타천이 아무나 만나주는 게 아니다’ 등등의 제법 긴 서론이 끝나자 펠루다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알아들었어?”

“네. 그런데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딱 하나만 해.”

“원래 대장이 이렇게 있는 사족 없는 사족 다 붙여서 주절주절 설명하는 타입이었나요? 그냥 까라면 까 스타일이었던 것 같은데요.”

펠루다의 말이 맞다.

나도 긴장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요점에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만 빙빙 돌고 있던 거다.

핵심까지 다가가는 길은 짧을수록 좋고, 그 길에 놓인 역경은 정면으로 돌파한다.

양손으로 내 두 뺨을 철썩 소리 나게 때린 뒤, 펠루다에게 말했다.

내 목소리에 힘이 붙은 것이 느껴졌다.

“저번보다 좀 나아졌군, 펠루다. 부 호위대장으로 내가 픽했을 만해. 이전까지의 지시는 다 잊어라. 새로운 지시를 내린다.”

펠루다도 아직 남아있던 눈빛의 흐리멍텅함이 비로소 사라졌다.

“나를 지켜라. 지시 끝.”

고개를 끄덕인 펠루다.

“이제 제가 알던 대장 같군요.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위타천의 자택 앞에서 보자.”

펠루다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길가에 세워두었던 바이크 위에 올라 자세를 잡고 시동을 걸었다.

조금 전의 의기 넘치는 목소리는 어디로 보낸 건지 당황한 펠루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요?”

“이 바이크는 1인용이다. 택시 타고 와라. 여기서 그리 멀지 않으니 각오를 다질 겸 달려오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헬멧을 쓰고 스로틀을 감았다.

뒤에서 펠루다가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이내 멀어져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강남 에어리어의 한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위타천의 자택은 이 아파트의 최상층 펜트하우스다.

수송기와 헬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별도의 착륙장을 단독으로 이용할 수 있어 선택했다는 TMI를 위타천 본인에게서 직접 들은 적이 있다.

펜트하우스로 바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 내부, 옆에 있는 펠루다에게 말했다.

“필요 이상으로 긴장할 필요는 없다. 특히 그렇게 숨을 쌕쌕거리면 위타천이 의심할 거다.”

“대장이 날 버려두고 그냥 가는 바람에 뛰어와서 이런 거 아닙니까!”

“호흡까지 조절하는 게 프로다.”

몇 초간 말이 없이 나를 묵묵히 바라보던 펠루다가 고개를 저었다.

‘말을 말자, 말을.’ 하고 혼잣말을 하더니 이번에는 내게 다른 걸 물어보는 펠루다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위타천의 자택까지 가서 한판 벌이려고 하시는 겁니까?”

“때로는 모르는 게 좋을 때도 있다. 내 지시가 뭐였지?”

“대장을 지키는 거요.”

“거기에만 집중하면 될 거다.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어. 나도 그렇게 되기를 빈다.”

“그······.”

펠루다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말해.”

“그때 호위대원들끼리 사용하는 딥스페이스 아일랜드 있거든요. 닌닌이 만들었습니다. 다 있는 건 아니고 딥스페이스 이용하는 사람들만 모이긴 하는······그런 곳이죠.”

딥스페이스에서 아일랜드는 일종의 채널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던가.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고사하고 말도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에 잠깐 흠칫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훌륭한 상급자는 하급자들의 편의를 봐줄 필요도 있는 것이다, 생각하며.

“그런데. 그게 왜.”

“거기서 가끔 대장 최근 소식이 올라옵니다.”

“계속.”

“그걸 본 저희 정론은 그거거든요. ‘대장 곁에는 사고가 따른다.’ 그러니 최선의 상황보다는 최악을 상정하시는 게 맞지 않을지······.”

우물쭈물하는 펠루다에게 말했다.

“최악을 생각해서 널 데려왔잖아.”

펠루다가 반박하기 전,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펜트하우스에서 승인을 해줘야 움직이는 전용 엘리베이터인 만큼, 열리는 엘리베이터의 문 너머로 높은 층고의 널찍한 펜트하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비싼 제품일 것이 분명한 홈웨어를 입은 가연이 웃으면서 우릴 맞았다.

“어서 와요, 오메가 씨. 동료분도 오신다고 우리 자기한테 들었어요.”

“두 분 쉬시는 데 갑자기 오겠다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우리가 그렇게 격식 차릴 사이인가요? 그리고 나도 이렇게 우리 자기 업계 분들 만나면 좋죠. 우리 자기는 일 얘기를 잘 안 하려고 하거든요.”

나와 인사를 마친 가연이 펠루다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동료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저는 가연이라 해요.”

펠루다는 가연의 인사에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베이터 안에서 잦아들던 그의 쌕쌕거리던 숨소리가 더 가빠졌다.

눈빛도 내 연락을 받고 강남 에어리어로 온 직후처럼 맥이 없었다.

왜 이러나 싶어 툭툭 치자 펠루다가 갑자기 차렷 자세를 하고 90도 인사를 박았다.

“펠루다라고 합니다. ㈜영원 PMC에서 요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이런 말씀 수도 없이 들으셨겠지만, 가연 님 팬입니다!”

“동료 아니랄까 봐 오메가 씨처럼 재밌는 분이시네.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대하지는 마세요. 지금 저는 off 상태라서요. 연예인 가연이 아니라 그냥 가연이었으면 좋겠네요.”

“동료는 아닙······.”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정정해주려는데 펠루다가 다시 한번 인사를 박으며 우렁차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가연은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했고 위타천은 밖에 있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씻는 중이라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음료는 뭘로 드릴까요? 차? 주스? 커피? 혹시 사이보그나 안드로이드시면 말씀하세요. 배달하면 되니까.”

“그냥 물 두 잔으로 부탁드립니다.”

“저는 물 말고 커······! 물로 부탁드립니다.”

내게 찍힌 발등을 매만지며 인상을 구기는 펠루다를 무시하고 가연에게 말했다.

“다른 거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어떤 거죠? 말씀하세요.”

“위타천 님과 말씀 나눌 때, 가연 씨도 옆에 같이 계셔주셨으면 해서요.”

“제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인가요?”

“물론입니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가연이 응접실에서 나갔다.

이렇게 해서 가연과 펠루다라는 이중 안전장치가 마련됐다.

솔직히 위타천이라면 안전장치고 뭐고 폭주할 것 같아서 불안하긴 하다.

그래도 어쩌겠나.

손에는 주사위가 있고, 그걸 던질 결심을 굳게 하고 왔는데.

옆에서 자기가 평생, 아니 삶을 몇 번이나 되돌려도 가연이 타 주는 커피를 먹어 볼 일이 있겠냐는 펠루다의 징징거림을 폭력으로 응징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가연과 세트가 분명한 홈웨어를 입은 위타천이 걸어들어왔다.

“후배가 먼저 내 집에 오겠다는 얘기를 다 하고 아주 천지가 개벽할 일이야.”

펠루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이번에는 180도에 가깝게 허리를 접으며 거의 악을 질렀다.

“처음 뵙겠슴다! ㈜영원 PMC에서 요원으로 일하고 있는 펠루다라 함다! 전설적인 선배님을 만나게 되어 큰 영광임다!”

위타천은 그런 펠루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내게 물었다.

“누구?”

“보르스나탄 탐사단 ODC 유적지 탐사 때 부호위대장 했던 친군데, 싹수가 보이기도 하고 자기도 언젠가는 공공 집행자가 되고 싶다길래 여기 오는 김에 얼굴이나 비추게 하면 좋겠다 싶어서 실례인 줄 알면서도 데리고 왔습니다.”

‘비상용 방패입니다’라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어서 길게 둘러둘러 길게 설명했다.

“후배가 그렇게 고평가하다니, 괜찮은 놈인가 보군. 거, 허리는 언제까지 그렇게 접고 있을 건가?”

그 말에 용수철처럼 허리를 밀어 올린 펠루다가 눈을 반짝였다.

“영광임다, 슨배임.(선배님)”

“선배라는 말은 하지 말지. 나는 여기 있는 오메가 후배처럼 내가 후배라고 인정한 사람들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 선배라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알겠습니다. 위타천 님.”

나를 보는 펠루다의 눈빛에 한없는 우러름이 묻어났다.

그가 중얼거렸다.

“선후배······멋있다······.”

이럴 걸 의도하고 달고 온 건 아닌데······.

때마침 가연이 각자 마실 음료를 내주었고, 우리들 넷은 그렇게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로 위타천이 라떼는 이랬네 저랬네, 라떼는 우유를 의미하는 말이니 원래대로 카페라떼라고 불러야 하네마네 하면서 자기 사설 집행자 시절과 그 이전 용병 시절을 얘기하면 가연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위타천을 바라보고, 펠루다는 눈이 뻑뻑하지도 않은지 깜빡거리지도 않으면서 ‘예, 맞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와! 저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하면서 위타천의 무용담에 장작을 넣는 그런 완벽한 사이클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긴장한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는 것이 분명했다.

“······얼핏 듣기로는 저희 사장님도 예전에 만주 권역이랑 허베이 권역 전쟁에 참여했다고 듣긴 했습니다.”

펠루다의 말에 위타천이 귀를 기울였다.

용병 시절 위타천이 이름을 날리게 된 본격적인 계기가 저 때부터라고 들은 것 같다.

“회사가 어디랬지?”

“㈜영원 PMC입니다.”

“영원······영원······. 아! 제리가 만든 PMC?”

“예! 저희 사장님 성함이 제리 맞습니다!”

“휴전 협상 끝나기 무섭게 눈여겨봤던 양측 용병들, 군인들 스카우트했다는 소리 듣고 보통 미친놈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 나한테도 대우 잘해줄 테니 자기랑 같이해보자던 소리하던 게 기억나는군.”

이번에는 가연이 물었다.

“왜 같이하겠다고 안 했어요?”

“전장 돌아다니는 일에 지쳤으니까. 펠루다 자네도 용병 일 오래 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커리어만 빠르게 쌓고 다른 일 찾으라고. 날 봐. 계속 용병 일 했으면 네오-서울에 올 일도 없었을 거고 그랬으면 가연을 만나지도 못했겠지.”

“자기도 참······.”

부끄러워하는 가연과는 반대로 펠루다는 삶을 관통하는 심득이라도 얻은 것마냥 열심히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

드디어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건지 위타천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먼저 찾아오겠다고 한 건 후배인데, 어째 말이 별로 없군.”

그의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서광이 어려있었다.

무엇을 감추고 있느냐, 어서 내놓아 보거라 하는 무언의 압박감이 넘실댔다.

입을 열었다.

손에서 달그락거리던 무형의 주사위가 손끝을 떠나 던져지는 것 같은 생생한 착각이 들었다.

“저희가 두 번째 만났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두 번째라······.”

“예공방 테러 조사 때입니다.”

“기억이 나지. 건방진 염소를 혼내줬던 것 같기도 하고.”

염소가 아니라 사슴이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나다나 노덴스가 아니라 본인이 그곳에 온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다른 공공 집행자의 시선으로부터 뭔가를 가려야 했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나섬으로 인해 사건의 본질을 흐려야 했다거나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닙니까?”

“그건 마치······.”

맹수의 시선처럼 나를 직시하던 위타천의 시선을 마주하고 그가 차마 말하지 못한 뒷부분을 꺼냈다.

“네오-서울의 공공 집행자가. 손을 잡으면 안 되는 집단과 얽혀 있지 않으냐. 라고 저는 묻고 싶은 겁니다.”

잠깐의 정적 후, 위타천의 몸에서 폭발적인 영력이 넘실댔다.

[영력 감지]를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아지랑이처럼 영력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위타천이 딱딱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 근육 일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후배의 농담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 애초에 이 자리에서 왜 그런 농담을 하는지, 그게 농담이기는 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아직 미처 마시지 못하고 잔에 남아있던 물 표면이 위타천의 영력에 반응해 요동치더니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넋이 빠진 표정으로 나와 위타천 사이만 휘적거리며 바라보던 펠루다가 정신을 차리고 등껍질을 열어 쉴드장을 전개하며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펠루다가 물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거절했어야 했는데! 이런 일인 줄 알았으면 거절했어야 했는데! 그냥 거절했어야 했는데!”

“조용히 해 임마.”

그리고 [영력 간섭]을 사용해서, 뻗어오는 위타천의 영력 몇 가닥의 방향을 뒤틀어버렸다.

펠루다의 쉴드장 너머, 가연을 등 뒤에 둔 위타천이 보였다.

그에게 말했다.

“설명할 시간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아요?”

영력으로 불러낸 신의 형상과 완전히 합치된 위타천의 입술이 달싹였다.

“부디 후배의 그 설명이 내 분노를 잠재울 수 있길 간절히 바라지.”

‘떠들어 봐라. 나는 너 가만 안 둘 거다.’라는 뉘앙스긴 한데······.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펠루다에게 말했다.

“쉴드 없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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