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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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가 건넨 서류를 휙휙 넘겼다.
“이건······.”
그리고 선글라스 너머 마고의 시선이 있음 직한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0과1이 끝도 없이 나열된 페이지가 대부분이었고, 어떤 페이지는 그에 더해 생전 처음 보는 기호가 더해져 있기도 했다.
“원본을 타원곡선 암호화한 걸 다시 이진법으로 변환한 거니까 그 역으로 해독하면 돼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죠? 수식 기호들은 자주 등장하는 단어나 패턴이 눈에 띄지 않게 바꾼 거니까 해독 중에 막히면 그건 알려드릴게요.”
지지 않고 더욱 황당한 목소리로 맞섰다.
“방금 마고 씨가 한 말 중에 제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이진법이랑 해독밖에 없는데요. 그리고 제가 아는 이진법은 이진법 10이 십진법 2라는 정도에서 멈췄어요. 이렇게 배려 없이 덜렁 들고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도 사진 한 장 없는걸.”
콧등을 타고 흘러내리려는 선글라스를 밀어 올린 마고는 불쾌하다는 듯이 반박했다.
“이거 공공 집행본부 내부 자료 몰래 긁어서 가져온 거예요. 한 장이라도 밖으로 샌 게 알려지면 그대로 저는 청문회 끌려간다고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기껏 암호화까지 해서 빼돌렸더니 배려? 배애려어?”
“어차피 빼낼 거였으면 원본 그대로 들고 오면 서로서로 편한 거 아니었겠느냐는 거죠.”
“그렇게 했으면 제 흔적이 남았겠죠! 공범이니 무능이니 하더니 진짜 무능한 게 누군 줄 모르겠네.”
“되도록 일 얘기만 하자고 했죠. 아침부터 괜하게 힘 빼고 싶지 않거든요?”
“이게 일 얘기 아니면 뭔데요.”
마고와 으르렁대고 있을 때, 앨리스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내 손에 들린 서류를 채갔다.
“어! 그거 그렇게 함부로 보고 그러면······.”
마고가 놀라서 중얼거렸지만, 앨리스의 눈빛 한 방에 선글라스 너머로 얼핏 보이는 마고의 눈동자가 종잡을 수 없이 마구 흔들렸다.
그래, 용케 다시 오긴 했지만,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뼈가 다 붙기는 힘들지.
쭉쭉 훑어보던 앨리스가 말했다.
“잠깐만요.”
그리고 빈 종이와 펜을 들고 와 서류 옆에 놓았다.
앨리스의 눈에서 뿜어지는 엷은 빛이 서류를 계속해서 스캔하고, 앨리스의 손에 들린 펜이 사각사각하는 소리를 내며 빈 종이에 해독본을 적어나갔다.
선글라스까지 벗어 던진 마고는 앨리스가 적어 내려가고 있는 해독본과 앨리스의 얼굴을 반복해서 바라보다 간신히 한 마디를 털어놨다.
“무슨 사무 보조용 안드로이드가 이런 것까지······.”
나도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마고도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앨리스는 이미 양산형 사무 보조 안드로이드의 범주를 뛰어넘었다.
기계와 관련해 최첨단 요람이라 할 수 있는 기계 교단, 그 기술을 공학의 영역으로 가져와 현실화된 파츠로 만들어내는 퓨전 코프처럼 앨리스의 외부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인맥들은 물론이거니와.
샌디 비치와 루트는 아예 자신들의 광범위한 서버 중 극히 일부를 앨리스의 외부 병렬 연산 회로로 지원하고 있으니 내부적인 지원도 든든한 것을 넘어 짱짱했다.
어설픈 스펙으로는 진입하기만 해도 막대한 정보량 때문에 회로가 녹아버린다는 다크웹을 앨리스가 제집 드나들 듯하고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그리고 앨리스 일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지갑부터 열고 보는 신시아까지.
전 세계 어딜 둘러봐도 이런 유력 집단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안드로이드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들인 커스텀 오더, 커스텀 메이드 안드로이드라 할지라도 지금 앨리스의 스펙 발끝에도 미치기 힘들었다.
억만금을 줘도 원천기술을 제공하지 않으면 그만인데 앨리스는 그걸 가장 먼저 누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미공개 기술로 꽁꽁 싸맨 군용 안드로이드 정도라면 모르겠다.
어째 내가 의뢰 해결하면서 몸으로 굴러가며 만든 인맥들을 앨리스가 더 알차게 누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종종 장난으로 앨리스보고 ‘사장 잘 둔덕에 호강한다’라고 말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앨리스가 할 때는 제대로 해주니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게다가 앨리스에게 가해진 ‘호의’들은 원래는 내게 해주겠다는 걸 전부 거절하는 바람에 그러면 앨리스에게라도 해주면 안 되겠냐는 걸 내가 수락한 결과기도 했다.
별생각 없이 그러라고 했었는데 이제 앨리스 자체가 최신 안드로이드 기술의 각축장이 된 모양새였다.
안드로이드 관련 회사 사이에서는 ‘네오-서울에 안드로이드의 미래가 있다.’라는 말도 퍼질 정도라나.
“여기요.”
어느새 작성을 마친 해독본을 내게 내밀며, 앨리스가 덧붙였다.
“100%는 아니니까, 마고 씨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 애가 이 정돕니다.’ 하는 왠지 모를 뿌듯한 시선으로 마고를 바라보며 해독본을 받아들었다.
“땡큐.”
그리고 해독본을 슥슥 넘기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종이를 넘기다가, 여전히 거기서 눈을 떼지 않고 마고에게 물었다.
“이것들, 마고 씨의 시선 밖으로 빼낸 것들이라고 했죠.”
“의도적이었다고 봐요.”
내가 이 몸에서 깨어나기 전의 일도 많이 적혀 있었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예공방 생산기지 테러 이후의 일들이었다.
리벨리온, 기계화 좀비, 계룡 권역부터 시작해서 벡이 있던 연구소, WSS에 모습을 드러낸 색승 등등.
내가 했던 모든 일이 적힌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가히 나의 일대기라고 할 만했다.
정신없이 해독본을 넘기는 내게 마고의 목소리가 닿았다.
“이 사건들에 대해서는 저도 다룬 적이 있어요. 하지만 핵심적이고 은밀한 정보들은 빠져 있거나 아예 방향을 돌려 버리더군요.”
고개를 드니 선글라스가 코끝에 걸린 맨눈의 마고와 눈이 마주쳤다.
“핵심?”
“이 일을 계획한 놈들요.”
“트라이포드······.”
“자기들을 그렇게 부르더군요. 그리고 뒤쪽을 한번 보실래요?”
색승 파트 이후의 해독본은 서술의 방식이 바뀌었다.
사건 위주의 서술에서 인물 위주의 서술로.
물론 그 인물은 나였다.
“오메가 씨의 정보는 루트에서 전담 관리하죠?”
“······.”
“안 그런척해도 다 알고 왔으니까 시치미 뗄 생각은 마세요. 그리고 걱정하지도 마시고요. 역추적해봤는데 근래 루트에서의 유출은 없었어요. 어쨌든! 루트에서 직접 관리하는 정보를 이 정도로 수집할 수 있는 곳은 전 세계를 뒤져도 그리 많지 않아요. 다만 아예 없다는 소리는 아니고 가능하긴 해요. 그중 하나가―.”
“당신이군요.”
“맞아요. 파악용이었죠.”
내 정보가 루트에서 새어 나간 것은 맞았다.
후속 조치로 유출 경로를 찾는데, 이수련이고 스냅샷이고 심지어 엘림마저 어디서 누가 유출한 건지 알 수가 없다고 도통 한탄하는 일이 있어서 그럼 앞으로 조심하라 하고 넘어갔었는데 범인이 마고였다니.
듣고 보니 못 찾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고의 말이 이어졌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신상 정보 같은 것들이라 공공 집행자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데이터베이스에 던져놨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거기서 빠져 있더군요. 앞쪽에서 보셨겠지만, 오메가 씨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오메가 씨는 계속해서 이 정체불명의 단체와 충돌하고 있어요. 그걸 대비해서 그쪽에서도 오메가 씨의 정보를 빼둔 게 아닌가 싶어요.”
트라이포드가 어떤 조직이고, 구성원이 누구며, 어디까지 영향력이 뻗쳐있고, 그들의 수장이 누구인지 명확히 드러난 것은 극히 일부다.
그 극히 일부나마 어렴풋하게 파악한 것은 몇 달에 걸친 시간과 노력을 들인 야스민 공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고는 그 과정을 단 며칠 만에 알아냈다.
야스민 공은 대단히 조심스럽고 천천히 조사 반경을 넓혀가야 했고, 마고는 애초에 접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와 질이 달랐다는 점을 고려해야 마땅하겠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마고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데는 이견을 제기하기 어려웠다.
“무능하다는 말은 마고 씨 같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은 것 같군요. 실언했습니다.”
내 사과를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마고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등을 소파 쪽으로 붙여 앉았다.
“으에? 이런 식의 당근과 채찍으로 날 조련하려 하지 말아요.”
“솔직한 감상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무능하지 않다고 해서 마고 씨가 공범이 아니라는 의혹을 벗은 건 아닙니다.”
내 말에 마고는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에 놓아두고 어디 해보라는 듯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나를 응시했다.
그런 마고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트라이포드는 매우 은밀한 동시에 목적을 알기 힘든 집단입니다. 심지어 구성원 하나하나의 면면도······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대단하죠.”
마고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평범한 놈이 드물죠. 대부분 반사회적 테러리스트거나 국제적으로 악명 높은 범죄자니까.”
“심지어 수연은 예공방의 이사 자리까지 올랐죠. 어쩌면 음지가 아닌 양지에도 트라이포드의 마수가 뻗쳐있을지 모릅니다.”
“동의해요.”
“그리고 뻗쳐있을 곳으로 가장 유력한 곳 중 하나가 공공 집행본부입니다.”
“그것도―.”
마고가 자신이 가져온 서류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공공 집행자인 마고의 시선에서 정보를 빼내는 것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같은 직위인 다른 공공 집행자들의 손을 거쳐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동의해요.”
“그러니 마고 씨의 이런 행동도 트라이포드의 지침을 받아 움직이려는 것이거나, 나아가 저를 이용해 조직 내의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시도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합리적 추론이네요. 나름대로 자부심을 품고 이 자리에 있었는데 이런 의심을 받게 되니 짜증 나기도 하고, 조금 처량하기도 하고요.”
그녀가 손을 뻗어 벗어두었던 선글라스를 천천히 썼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가 오메가 씨 입장이었다면 비슷한 결론을 냈을 것 같아서 더 짜증이 나요. 그리고 저를 의심한다고 하셨죠? 저도 마찬가지라는 걸 밝혀두죠. 오메가 씨도 트라이포드 내의 여러 파벌이나 갈래 중 하나일 수 있고, 어쩌면 저나 다른 공공 집행자의 시선을 돌릴 유인책이나 미끼일 수도 있으니까요.”
아니, 나는 걔네한테 납치당한 걸로도 모자라서 머리까지 다 뽑힌 적도 있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억울하네?
하지만 일단 꾹 참고 넘어갔다.
“서로 해소되지 않은 미심쩍음이 있다는 거죠?”
“정확하네요.”
“완전히 신뢰하다가 뒤통수 맞는 것보다는 그런 미심쩍음이 차라리 낫다고 봅니다.”
“그건 제 의사랑 일치하네요.”
“그래서, 이걸 들고 제게 찾아오신 이유는요?”
내 말을 들은 선글라스 너머 마고의 눈빛이 살벌했다.
“감히 누가 제 눈을 가렸는지 알아냈으면 해요.”
“어느 공공 집행자가 트라이포드의 협력자인지 알아내라?”
“네. 제 역량이 닿는 데까지 전격적으로 지원하죠.”
“그 공공 집행자라는 범주에 본인도 포함된다는 건 잘 아실 거고요?”
“저라고 믿고 싶으신 건 아니고?”
“앨리스가 어제 말하지 않았나요? 고정관념과 편견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잠깐 앨리스를 바라본 마고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살벌한 눈빛을 지우고 움츠러들었다.
알껍데기는 깨고 나왔는데 나와보니 너무 강한 녀석을 마주한 현실이랄까.
얘기를 마친 마고는 서류와 해독본을 남김없이 세절, 소각하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앨리스의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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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가 떠나고 몇 시간 뒤.
책상 의자에 앉아 등받이를 뒤로 눕히고 발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있으니 앨리스가 다가와 말했다.
“이번 의뢰, 쉽지 않겠던데요.”
“네가 그런 소리 하는 건 처음이다?”
“팩트니까요.”
“맞아. 팩트. 공공 집행자 뒷조사도 부담인데 트라이포드랑 엮여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해.”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앨리스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 얼굴은 왜 웃고 계시죠?”
“재미는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잘만하면 계속 귀찮게 달라붙고 충돌하는 애들 싹 쓸어낼 기회잖아.”
“아무리 봐도 사장님은 위험을 감지하는 뇌의 영역이 조금 맛이 간 것 같아요.”
“청운 선생님이 나 아주 건강하다고 그랬거든?”
“청운 선생님도 보고 있으면 은은한 광기가 느껴지던데요.”
나만 보면 일단 침 좀 맞고 시작하자고 달려드는 청운 선생이 떠올랐다.
“그건······그래.”
“그런 사람이 말하는 건강함을 믿기는 쉽지 않아요.”
자기가 말해놓고도 웃겼던지 킥킥거리던 앨리스가 자리로 돌아가며 말했다.
“시킬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 마고 씨가 전격적으로 지원한다는데, 저도 열심히 해야죠.”
“좋은 마인드. 그럼 일단 외부의 시선부터 알아보자고. 스냅샷한테 연락해서 가능한 빠른 날짜에 스냅샷, 타이린드, 엘림까지 셋 모두 모아서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해줘.”
“와······. 루트의 실세 셋을 한 번에 보자고 하는 사람이 네오-서울에 사장님 말고 또 있을까요?”
“꼬우면 자기네들이 해결사 하던가.”